아리우스는 이른바 「오리게네스 좌파」로서, 오리게네스(?~254)의 사상에 내포된 종속론(신성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보다 하위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 경향을 이제 급진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는, 하느님은 태어남도 시작도 없이 존재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성자는 탁월하기는 해도 피조물 중 하나이지 결코 하느님과 같지는 않다는 주장에 도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을 쓰는 것도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존재나 지위를 공유한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단지 은유로서, 그분을 공경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수사(修辭)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구세주는 하느님이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성자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아리우스 신학의 핵심 상투어가 여기서 나온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오리게네스 우파」로 분류된다) 가 아리우스를 단죄함으로써 시작된 분쟁이 전체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기에 이르자,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통해 제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는 꿈을 다지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사 최초의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게 되니, 이것이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결정 사항을 통해(니케아 신경) 성자는 『성부로부터,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신 외아들』로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똑같은 본질(homoousios)이시다』고 고백함으로써 아리우스의 교설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아직 훗날 「본질」이란 뜻으로 굳어진 우시아(ousia)란 말마디와 「위격」을 뜻하는 히포스타시스(hypostasis)란 말마디가 혼용되던 시절이어서, 「같은 본질」(homoousia)이란 말은 자칫 「같은 위격」이란 뜻으로 오용될 소지가 많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리우스 이단은 니케아 공의회로써 종식되기는커녕, 향후 적어도 50년간 그리스도교 세계를 뜨거운 논쟁으로 달구게 된다. 그러는 동안 캅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바실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니싸의 그레고리오) 등 뛰어난 신학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용어와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고, 마침내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 2차 보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성령의 신성까지도 명확히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아리우스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선언했다.
이제 아리우스 신학의 속내를 좀 더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지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의미들을 잠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아리우스가 일견 하느님의 절대 유일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교를 다신론의 위험으로부터 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약의 새로움을 모조리 제거해 버리고 사실상 구약의 신관, 즉 단순한 유다이즘으로 회귀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아타나시우스가 밝혀 주었거니와, 결국은 구원론의 수준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즉 신성을 지니지 못한 구원자, 사람과 꼭 같기만 한 구원자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구원에 있어서 위로부터의 은총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수덕적 노력으로 모방해야 할 대상 혹은 모범으로 축소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강박적 유일신론과 더할 나위 없이 논리적이고 명쾌한 사상 전개의 배경에는 헬레니즘 철학(신플라톤 철학)의 신관이 깔려 있다.
아리우스 오류의 간과할 수 없는 측면 중 하나는, 철학적 도식의 기준으로 「신비」를 마구 재단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리우스의 교설은 당대의 단순한 수도승들뿐 아니라 지성인들과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 제공자들에게도 대단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사실 삼위일체니 뭐니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는 접고, 하늘에 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 있다는 것만 명확히 하게 된다면, 지상에서 그 유일한 대리자인 황제의 권한도 얼마나 잘 강조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은밀하게 작동되는 이 「관변신학(官邊神學)」의 힘으로 제국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의 목숨 건 투쟁이 단지 교의 논쟁의 수준에만 그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아리우스 논쟁이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로써 끝나고 말았다고 믿는다면 이는 지나치게 순진한 일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어느 시대나 현재 진행형인 논쟁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이한 종교 전통과 체험들이 본격적으로 서로 만나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 문제야말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가장 민감한 현안이 되어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더라고, 어떤 신비가는 저렇게 받아들이더라고, 심지어 교회에서는 이러저러하게 가르치더라고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은 제자로 자처하는 우리가 저마다 그분과 맺고있는 산 관계 속에서 직접 내 놓는 한 마디를 기다리신다(마태 16, 15 참조). 과연 나에게 그분은 누구이신가. 그분의 진면목을 묻는 이 질문에 내 본래 면목도 달렸다(1요한 3, 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