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왕국
41세에 왕이 되어 17년간 다스렸다.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 남색하는 자를 허락하였다(왕상14:23-24). 전쟁들에 시달렸는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애굽의 시삭의 침략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는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 애굽의 시삭의 침략에는 큰 피해를 입었다(왕상14:25-26). 즉 그는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 때에 만든 금방패까지 다 빼앗겼다.
2) 아비얌(913-911, 왕상15:1-8, 대하13:1-22)
아비얌은 북방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40만의 군대로 80만의 여로보암의 군대를 이겼다. 이 전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남쪽 종교 중심지인 벧엘을 점령했고 몇 성읍을 빼앗았다.
3) 아사(911-870, 왕상15:9-24, 대하14-16장)
아사는 41년을 다스렸으며, 남방 왕국에서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선한 왕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드디어 그의 태후의 위(位)까지도 폐하여 버렸다.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그땅에서 제거해 버렸다. 애굽 군대를 이기고 선지자 아사랴로 부터 사기를 얻은 후 그의 재임15년에,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세우기 위해 유다와 베냐민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전투에서 노략하여 온 소 700마리와 양 7000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또한 성전에 새로운 물품을 더 장비하고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이전 가나안 사람의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자만심을 갖게 된다. 자기를 꾸짖는 선지자 하나니를 투옥한다. 또한 발에 병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의원들을 의지하였다.
4) 여호사밧(873-848, 왕상22:41-50, 대하17-20)
25세에 왕이 되어 35년 간 다스렸다. 이중 3년간은 아버지와의 섭정기간이었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개혁운동을 계속했다. 바알 제단을 없앴으며 또한 산당을 어느 정도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레위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명령을 내려 유다 전체에 "율법서"를 가르치게 하였다. 여호사밧의 훌륭한 신앙은 모압, 암몬, 에돔의 세 동맹이 공격을 가해온 데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침략을 알게 된 여호사밧은 실망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선포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시고 한 선지자를 통해 승리를 약속한 말씀을 하셨다.
여호사밧은 재판절차를 개선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오므리 가문과 동맹하였다. 그러나 이 동맹으로 인해 그 아들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하게 하여 그의 어머니 이세벨의 방식을 좇음으로써 비극을 초래하였다. 또 세번이나 이스라엘 왕을 도와 주다가 죽을뻔 하기도 하였으며, 배가 파선되기도 하였다.
5) 여호람(853-841, 왕하8:16-24, 대하21장)
그의 부왕은 하나님 눈에서 볼때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는데 여호람은 악을 행하였다. 그 이유는 분명 사악한 아달랴와의 결혼때문이었다.
그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범한 비극은 그의 여섯 형제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에돔에 의한 반란과 립나 성읍의 반란이 일어났다. 블레셋과 아라비아인들의 침략으로 경제적인 손실을 겪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의 죄로 인해 엘리야가 한 경고에 따라 큰 병을 앓다가 죽었다.
6) 아하시야(841, 왕하8:25-29; 9:27-29)
아하시야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일 년도 채 못다스렸다. 그는 가족의 막내로서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공격 당시 홀로 생존하였었다. 아버지의 악한 길로 따라갔는데, 어머니 아달랴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예후의 습격으로부터 이스르엘로 도망하였는데 그후 예후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마침내 므깃도에서 살해당하였다. 그의 신하들이 이 왕의 시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장사하였다.
7) 아달랴(841-835, 왕하11:1-16, 대하22:10-23:15)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이세벨의 딸이었다. 남편을 조장하여 그의 형제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또한 유다에 바알 제단을 설치하려 했는데 큰 반대에 부딪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자기 자신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아하시야의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하시야의 누이에 의해 구출된 요아스가 7세가 되었을때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유다국민들의 칼에 죽었다. 이때 이후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 왕국과의 연락은 끊어지고 얼마동안 그 두 관계는 평행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8) 요아스(835-796, 왕상12장, 대하23:16-24:27)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힘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고, 여호야다를 통하여 종교적 개혁을 착수하였다.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우상을 깨뜨리며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혼자 통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는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할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온 백성들에게 연보를 거두게 했다. 성전의 수리는 오나성되었고 매일 드리는 번제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호야다가 죽자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것을 허락을 하였으며 이를 꾸짖는 여호야다의 아들을 돌로 쳐죽이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람왕 하사엘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 하고 유다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드디어 그는 그의 부하들의 반란으로 죽었다.
9) 아마샤(796-767, 왕하14:1-20, 대하25장)
아마샤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29년을 다스렸는데 마지막 24년은 그의 아들 웃시야와의 섭정이었다. 아마샤는 그의 아버지와 같이 생애와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지만 모든 산당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요아스왕 말기부터 혼란하여지고 약하여진 유다왕국을 정리하여 나라를 굳게한 후 그는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그는 국방을 든든히 하고 에돔을 공격하기 이하여 30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또 이스라엘에서 10만의 용병을 고용했다. 그런데 어떤 선지자의 충고로 용병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여 돌려 보내고 에돔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였으나 이 전쟁에서는 크게 패하여 예루살렘성이 훼파하고 자신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마샤는 유다로 돌아온 후 모반을 당해 피살되어 그의 웃시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
10) 웃시야(아사랴, 791-739, 왕하14:21-22; 15:1-7, 대하26장)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을 다스렸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많은 경우에 아사랴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유다의 열왕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유능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는 사실 유다왕국을 부강한 민족국가로 일으킨 강력한 수완의 왕이었다. 그리고 북방 이스라엘을 크게 부강케 했던 여로보암 2세(793-753)와 대등되는 인물이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이 죽은 후 그는 주변 열국들에게 있어서 여로보암의 위치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유다 왕국이 강하여지자 교만하여졌고 백성들도 물질주의 기울어졌다. 마침내 웃시야는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무시하여 이때문에 그는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살면서 그 아들 요담에게 왕국을 관리케 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그는 마침내 문둥병으로 죽었다.
11) 요담왕(739-731, 왕하15:32-38, 대하27)
요담왕은 16년간 유다를 치리하였다. 그는 부왕의 좋은 점을 본 받아 신앙적으로 비교적 경건했었다. 그리고 많은 건축공사도 완성시켰으며 군사력도 계속 유지하였다.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암몬이 배반하려 했으나 그는 그들을 계속 제압하고 조공을 받는데 성공했다.
요담은 신앙적으로는 큰 허물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걸어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계속 유지한 임금이었으나 백성들의 죄악을 다스리는데는 실패했다. 웃시야 때부터 사치에 기울어지던 유다백성들은 점점 더 부패해졌다.
말년에 다메섹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는 점점 세력이 강하여지고 있는 앗수르를 대항하고자 하여 먼저 그 동맹자인 유다왕 요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드디어 요담왕이 ?은 후 그 아들 아하스는 이러한 어려운 형편 중 왕위에 오르게 됐다.
12) 아하스왕(731-715, 왕하16:11, 대하28장)
아하스는 왕위에 올라 16년을 치리하였으나 그의 통치기간에 유다왕국은 심피 약해진 나라가 되었다. 북쪽에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서쪽과 남쪽에서는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아하스왕은 오직 앗수르만을 의지하는 친 앗수르 정책을 견지했으나 그 앗수르 역시 유다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롭게 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계속 그에게 그의 정책의 잘못을 권고하기도 했으나 그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하스는 가나안의 모든 우상을 다시 섬긴 지도자였다. 그리고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메섹에 가서 그곳의 우상의 제단을 본떠다가 그것을 예루살렘에 두고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성전의 놋제단을 그 우상의 제단 북편에 두었으며 성전의 기명들을 뜯어내고 성전을 패쇄해 버렸다.
13) 히스기야(715-686, 왕하18:1-20:21, 대하29:1-32:33)
히스기야는 유다 여러 왕 중에 가장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성전의 문을 다시 열고 성전을 정결케하고 모세의 법을 따라 번제와 화목제의 큰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킬것을 명했다. 모든 산당을 훼파하고 모세 때부터 있었던 놋뱀까지도 부쉈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반 앗수르적이었다. 한때 앗수르의 산헤립왕이 쳐들어 왔을때 그는 이사야의 권고에 용기를 얻어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 18만 5천명의 적군이 죽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죽게 되었을때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15년의 생명의 연장과 더불어 앗수르의 손에서의 구원을 약속받았다. 이때 그는 일영표가 10도를 뒤로 물러가는 이적을 보기도 했다. 병이 나은후 바벨론왕의 사신이 방문하였을 때 그는 세속적인 방법으로 나라의 부강을 자랑하고자 군기와 무장을 자랑하며 은과 금의 보물을 자랑했다. 이로 인하여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선지자 이사야로 부터 듣게 되었다.
14) 므낫세(686-642, 왕하21:2-16, 대하33:2-10)
므낫세가 왕이 된 것은 12세 때였다. 그후 55년간을 왕위에 있음으로 남과 북의 이스라엘 왕들 중에 최 장기간 왕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는 유다왕국으로 심히 부패케 한 때이기도 하다.
그는 부왕이 헐어버린 신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의 단을 다시 세우며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고 몰렉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려 불 가운데 지나게 하며 점치고 사술을 행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을 반대하는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게 한 자였다. 그리고 완전히 앗수르에 예속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의 징계가 그에게 주어졌다. 쇠사슬로 결박되고 갈고리에 꿰어 잡혀가는 비참한 포로의 신세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는 다시 앗수르를 섬기며 조공을 바칠 것을 서약하고 유다로 돌아왔다.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그는 여호와께로 돌아와 크게 겸비하여 기도했고 모든 우상을 제하며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백성들로 여호와를 섬길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15) 아몬왕(642-640, 왕하21:19-26)
아몬은 므낫세의 위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2년간의 그의 정치는 그 부왕의 타락한 정치의 반복에 불과하였다. 마침내 궁중의 신하들의 반역으로 죽었다.
16) 요시야(640-609, 왕하22:1-23:30)
요시야는 여덟살의 어린 나이로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물론 그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어서 요시야 왕을 충성으로 섬겼다. 그의 치리기간 31년은 참으로 크게 부흥하고 발전하던 시기로 유다 왕국 창건 이래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보아 좋겠다. 그는 모든 우상을 멸하는 숙청작업에 있어서도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의 온 이스라엘 우상을 멸하였다.
특히 성전수리 중 율법책을 발견하고 온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하였다. 그는 히스기야왕 때보다도 철저히 개혁을 하였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사사시대 이후 가장 크게 지켰다.
그러나 므깃도에서의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17) 여호아하스(609, 왕하23:31-33, 대하36:1-4)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요시야왕이 므깃도 전투로 전사한 후 백성들은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므깃도에서 요시야왕을 죽인 애굽의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엘리야김으로 왕을 삼게 하고 그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치게 했다. 여호아하스는 3개월만에 폐위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으로 포로되어 가서 거기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벌써 예레미야 선지가 예언한 그래로였다.
18) 여호야김(609-597, 왕하23:34-24:7, 대하36:4-8)
여호야김은 애굽왕 바로 느고의 직접적인 임명으로 유다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애굽에 바칠 조공을 위하여 백성들에게서 많은 것을 늑징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궁전에 만족치 않고 많은 재물을 소비하고 백성들의 노력을 동원하여 더 크게 궁전을 지었다. 또한 백성들을 압박하여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 이에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선지자 하박국이 신랄히 경책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그는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고 또 예레미야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의 보호로 죽이지 못했다. 특별히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두루마리를 빼앗아 불에 던져 태우는 암흑정치를 감행했다.
그는 느브갓네살을 배반하여 느브갓네살로 부터 침략을 받고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19) 여호야긴(597, 왕하24:8-16, 대하36:9-10)
여호야긴의 왕위는 불과 3개월 10일 뿐이었다. 즉 느브갓네살 왕이 다시 예루살렘에 쳐 왔을때 그는 그를 바벨론으로 끌어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대신 왕으로 세웠다. 이때 그와 더불어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후일에 유명한 선지자 에스겔도 본래는 이때에 잡혀간 포로 출신 중 한 사람이었다.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은 그래도 후한 대우를 받았고 마침내는 감옥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는 다른 나라들에서 잡혀 온 왕들보다 높임을 받아 일평생을 바벨론 왕궁에서 먹으며 일용할 모든 것을 종신토록 공급받았던 것이다.
20) 시드기야(왕하24:17-25:21, 대하36:11-21)
여호야긴이 잡혀간 후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세워 왕으로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597-586)로 고쳤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유다왕국의 왕이 되기는 하였으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왕이라기보다는 섭정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시드기야의 왕위는 확고한 것이 못되었고 통치자로서의 그의 능력도 매우 부족하였다. 그는 바벨론왕의 세움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반 바벨론적인 관원들과 백성들의 압력으로 불안한 입장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국가의 혼란은 더욱 심하여졌다. 마침내 시드기야는 반바벨론파와 친애굽파의 압력으로 바벨론을 배반하게 됐다.
이로 인하여 느브갓네살왕은 유다를 공격해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도망가는 시드기야왕을 잡은 바벨론왕은 그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뽑아버린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시드기야는 거기서 죽는 날까지 옥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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