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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므리 왕조의 종교정책

류성련 2010. 7. 30. 15:28

오므리 왕조의 종교정책 
 

 

1. 문제의 제기
한국교회의 크다란 병폐들 중에 매우 심각한 것을 하나 지적한다면 그것은 이원론적 사고이다. 이원론적 사고란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어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이중적 잣대, 즉 자신에게는 관대하여 사회적 약자에게는 가혹한 규범을 적용한다. 뿐만 아니라, 지도층으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수용하고 통합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결과 도덕적으로 심각한 타락을 낳는 현상을 말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난 각 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특정한 규범 하에서 바라보고 규정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오므리 왕조의 종교정책은 경제적 부흥을 위해 전통과 신앙 및 사회적 통합과 연대를 모두 포기함으로서 심각한 도덕적 부패를 가져왔고 그 결과 사회전체가 갈등구조로 발전하여 궁극에는 패망했던 역사적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오므리 왕조는 남북조 분열이후 이스라엘을 비교적 강력한 국가로 재건한 왕조였다. 오므리 왕은 남북조간의 대립적 상황을 청산하고 상업적 도시국가인 페니키아와의 동맹을 통해 국가의 많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함으로 동진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국가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야만 했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전 국민적인 저항과 반발에 직면하여 마침내는 몰락하고 말았다.
오므리 왕조의 국내 상황과 저항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비도덕적) 이원론 형성의 원인규명에 작은 빛을 던져보고자 한다.

 

2. 오므리 왕조 형성이전의 상황


1) 두 경쟁 국가의 국지전
남북조가 분열되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경과 인접하게 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직접 위협할 수도 있다. 예루살렘 북쪽에 방어기지를 두고자 했다.
르호보암은 북부 이스라엘을 강제로 복귀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산발적으로 베냐민 지역에서 국경선을 조정 - 벧엘과 예루살렘 사이에 애매하게 정해진 지역 - 하는 문제만 일어났다. 르호보암은 베냐민 지파의 영토를 점령하려는 조치들을 취했다 (왕상 14, 30; 대하 11, 10).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을 다시 정복하려는 희망을 가졌을 지라도 재위 5년 (주전 935년) 애굽의 시삭이 침공으로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지전은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 (주전 915-913년)의 짧은 통치기간과 그의 후계자 아사 (주전 913-873년)의 통치기간 내내 있었다. 아비야는 에프라임 지대 국경지대에서 여로보암을 쳐부수고 진격하여 벧엘과 그 부근 일대를 점령하였다 (대하 13, 19).
유다 왕 아사는 마레사 국경 요새 (참조 대하 11, 8) 부근에서 애굽의 잔당들을 격파하고 그랄까지 추격하였다. 이로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애굽의 간섭을 종결하였다.
아사의 통치 말기 북왕국의 바아사는 군대를 남진하여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밀고 들어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라마를 점령하고 요새화 함으로 예루살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 넣었다 (왕상 15, 16-22). 그러나 아사는 다메석의 벤하닷 1세에게 선물을 보내어, 바아사와 맺은 조약을 포기하고 자기를 도울 것을 청하였다. 벤하닷은 좋은 구실로 삼고 북부 갈릴리를 약탈함으로 바아사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사는 서둘러 라마의 요새시설을 철거하고 게바와 미스바에 방비시설을 견고케하여 수도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두 나라의 국지전은 분열 (주전 922년)이후부터 오므리가 왕이 되기까지(주전 876년) 계속되었다. 싸움은 건헐적으로 있었으며, 아주 치열하지도 않았지만 두 나라에 인력과 경제력에 부담을 주었다. 분열로 인해 생긴 감정의 골은 국지전이 지속되는 동안 더욱 깊어졌다.

 

2) 북왕국 이스라엘의 내정-여로보암의 방침
여로보암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를 창건하는 과제를 안았다. 수도도 없으며, 행정기구도 없었으며, 군사조직도 없었으며, 국가의 종교조직도 없었다. 여로보암은 수도를 세검에 정하였다 (왕상 12, 25). 세검은 므낫세 지파의 영지로 지리적으로 중앙에 속하며, 가나안계 히브리인의 거류지였다. 이곳의 선택은 지파들의 질투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비이스라엘계 주민들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그 후에 여로보암은 요단 동편 브누엘로 천도했으며, 다시금 디르사로 천도했다. 천도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세검은 방어하기 쉽지 않았으며, 브누엘은 지리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디르사는 세검에서 동쪽으로 7마일 떨어진 곳으로, 역시 비이스라엘적 도시이다 (수 12, 24; 17, 1-4).
여로보암의 매우 중요한 조치 중의 하나는 예루살렘에 대응하는 국가적 공식 제의를 제정한 것이다 (왕상 12, 26-33). 그는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새로운 국가의 종교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영토의 양쪽 끝인 단과 벧엘에 두 개의 공식적인 성소를 설치하였다 (왕상 12, 31-33).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의 일곱째 달 절기에 대항할 목적으로 여덟째 달의 연례절기를 제정하였다.
3)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변
이스라엘의 왕위는 처음 50년 동안에 세 차례나 폭력에 의해 교체되었다. 여로보암이 죽자 그의 아들 나답 (주전 901-900년)이 왕위를 계승하려 하였다 (왕상 15, 25-31). 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 그의 군관 가운데 한 사람인 바아사에 의해 암살되었고,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가문을 몰살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주전 900-877년).
그의 아들 엘라 (주전 877-876년)가 그를 계승하려고 했을 때, 이 엘라도 그의 군관 중의 한 사람인 시므리에게 암살되었다. 이스라엘 군대가 깁브돈에서 블레셋인들과 싸우느라 전장에 있었지만, 디르사에 머물고 있던 엘라는 병거부대의 절반을 지휘하는 시므리에게 살해되었다. 시므리는 바아사 가문을 몰살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일주일 안에 야전 사령관 ( 샤르 차바 왕상 16, 16)이었던 오므리가 디르사로 진격해 옴으로 그는 자결하였다.

3. 오므리왕조


1) 오므리 시대의 국제 정세
오므리는 열왕기에서 8절 정도로 짧게 기술하고 있지만 (왕상 16, 21-28),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매우 유능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에 안정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는 12년 (혹은 8년)동안의 짧은 기간이지만 (주전 876-869년), 그는 성경외적 고대 문헌들에 최초로 나오는 성경의 인물이고 자신의 아들과 두 손자가 왕위를 세습하여 왕조를 창건하였으며, 이스라엘에 국력과 번영을 창출하였다. 앗시리아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오므리가로 지칭하였다. 오므리는 아사 왕 31년 (왕상 16, 23)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며, 통치 기간을 12년간으로 보고 있다.
오므리는 아람 다메섹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주도적인 강대국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 때 이스라엘의 영토는 줄어든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물려받았다. 애굽은 무력한 상태에 빠져있어 더 이상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새로운 제국의 강대국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앗시리아의 앗수르나시르팔 2세 (주전 884-860년)은 상부 메소포타미아를 유린하고 아람 족의 나라를 하나하나 굴복하였다. 그런 다음 오므리 왕의 통치시대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에까지 침공하여 해안의 도시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것은 영속적 정복은 아니지만 불행한 일의 전조였다.

 

2) 오므리 왕가의 외교정책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국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윗과 솔로몬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국내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유다와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페니키아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나, 요단 동부, 특히 아람 족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폈다. 이 정책은 오므리에 의해 실행되기 시작했지만, 그의 아들 아합에 의해 계속 추진되었다.
오므리는 그의 아들 아합을 시돈 왕 엣바알 ( 에트바알)의 딸 이세벨과 혼인시킴으로써 페니키아와 동맹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유다와도 동맹을 맺었다 (왕상 16, 31). 아합은 자기 누이 아달랴를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혼인시킴으로써 유다와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동맹은 군사적 상업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동족간의 반목은 끝났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군사적 신장을 깨할 수 있었다. 오므리는 모압을 격파하여 봉신으로 삼았고 (왕하 1, 1; 3, 4-5), 에돔은 유다의 속주가 되었다 (왕상 22, 47). 오므리는 가장 위험한 경쟁자인 다메섹에 대하여 상황을 역전시켜 놓았다. 그가 취한 행동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는 모압 정복을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합은 다메석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합 통치 초기 이스라엘의 위협적인 재기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아람 족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다. 그러나 아합은 대담한 일격으로 침략자를 격퇴하였고, 요단 동부에서의 2차 접전에서 이스라엘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벤하닷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아합은 다메석이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강요하여 얻어낸 것을 다시 되돌려 받고,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석방했다. 이것은 아마도 두 나라가 모두 앗시리아의 위협 아래 놓였기 때문 일 것이다.

 

3) 오므리 왕조 시대의 국내정세
오므리 왕가의 박력있는 정책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재난에서 구했고 다시 한번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국내적으로 긴장과 갈등으로 몰아 갔다. 국내적 긴장과 갈등의 형성 원인에 대하여 전통적인 입장과 필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입장은 알트에 의해 주장되고 그 후 도너와 디히트리히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먼저 전통적인 입장을 부록의 형식으로 다루고자 한다.

 

부록 I : 이스라엘과 가나안과의 관계에 대한 알트와 도너의 입장
알트는 오므리 왕조의 국내정치의 기본적인 특징을 이스라엘과 가나안과의 관계의 해결로 보았다. 이러한 이해의 문제점을 H. Donner는 잘 지적해 준다. 민족으로서의 가나안은 다윗-솔로몬 시대 이래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가나안을 인종적으로는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문화권에서는 가나안적 전통이 이어져 내려 왔다. 따라서 가나안적 문화 종교 및 정신적 세계가 도시 문화권에서는 여전히 상존했다고 보아야 한다. 기원전 9세기에 있어서 가나안이라는 말은 인종적인 말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학적 종교적으로 규정되어 질 수 있는 말이다.
오므리 왕조는 가나안의 문제를 다음의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택했을 것이다. 첫째,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 주민들과 가나안 주민들 사이에 차이점 (특히 종교적 차이점)을 극복하고 가능한 통합시키고자 했다. 도너는 이러한 정책은 야웨 신앙에 신실한 무리들로부터의 많은 저항을 직면했어야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둘째, 통한정책을 포기하고 두 민족 성분을 가능한 분리시켜, 이원적 정책을 추구하는 길이다. 이 정책 역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추구해온 용해과정에 대립되는 것이다.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격이다. 이미 솔로몬은 두 번째의 가능성에로 나아갔다. 그는 이스라엘의 행정 구역과 가나안의 행정 구역을 나누어 대등한 지위로 다루었다. 오므리 왕조는 가나안-문제의 이원론적 해결책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길을 마지막까지 간 것으로 보여진다.
사마리아의 선택과 관련하여 도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므리가 새로운 수도를 선택한 것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보다 분명히 살펴보기 위해 아래의 4가지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사마리의 매입은 가나안적인 토지 매입 방식으로 얻게 되었다.
2. 오므리와 아합은 사마리아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3. 아합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므로 사마리아는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4. 오므리 혹은 아합 이래로 이스라엘 왕들은 사마리아 외에 이즈리엘을 제2의 수도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종합하여 볼 때 오므리 왕조는 유다의 예루살렘이 갖는 특별한 지위를 본받아 사마리아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독립된 하나의 도시 국가였다. 오므리 왕조는 가나안의 도시 국가의 왕으로,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와 같이, 사마리아를 다스렸다. 그리고 왕들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과 도시 국가 사마리아가 연결되었다.(=Personal Union).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중심으로서 가나안적 요소가 통용되었으며, 이즈리엘은 이스라엘의 중심으로서 이스라엘적 요소가 통용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오므리 왕조의 사마리아의 건설은 가나안의 문제를 이원론적으로 해결하려는 계획된 국내정치적 조치였다. 오므리 왕조는 가나안에게는 가나안적,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적 원칙을 적용하였다.
이러한 종교정책의 결과가 곧 나타났다. 오므리는 페니키아의 상업도시와의 우호조약을 맺었다. 페니키아와의 우호정책은 아합 왕 시절에 절정에 달한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함으로,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에 세워지게 되었다. 바알 신전은 이세벨과 페니키안 사람들을 위한 성소로 세워졌다고 보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 보는 것이라 도너는 지적한다. 오히려 오므리 왕조의 이원적인 종교정책, 즉 사마리아를 가나안을 위한 중심지로 삼으려는 종교정책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므리 왕조의 이러한 종교정책은 필연적으로 전통적 입장을 가진 자들, 야웨의 배타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저항에 부닥쳐야 했다. 이러한 점은 노트 (M. Noth)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알트와 도너의 문제해결 방식은 가나안적 요소를 지나치게 극대화시킴으로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하였다. 도너 자신도 지적하였듯이 가나안적 요소는 정치적 실체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실제적인 위협의 요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알 숭배자들과 야웨 숭배자들 사이의 결전이 있었다면, 그 갈등과 대립은 다른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오므리 왕조는 그들의 직면한 정치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게 위하여 지나치게 전통을 무시함으로 새로운 갈등을 야기시켰다. 국민적 통합을 위하여 지도층의 희생과 양보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지도층이 사회적 통합을 이루려는 의도적 노력의 부재는 국가의 패망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태도를 가나안적 전통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a. 정치적, 사회 경제적 상황
오므리는 재위 초기에는 시므리의 실패한 정변으로 인하여 상당한 손상을 입었던 디르사 왕궁에서 나라를 통치했다. 그는 다윗이 행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게 새 수도를 건설할 부지를 구입하여 그 전 주인인 세멜의 이름을 본 따 사마리아 (소메론)으로 명명하였다. 사마리아는 기원전 722년 북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사용되었다. 사마리아는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8Km 떨어져 있으며, 산악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언덕에 방어하기에 이상적인 위치이다. 다른 한편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선택한 것은 다윗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강력한 정치적 구심점을 형성하기 위함이다.

오므리 왕과 아합 왕은 페니키아와의 외교적 성공을 토대로 페니키아의 (상업적) 부가 이스라엘 흘러들어 오게 하였다. 모든 증거는 오므리 왕가 통치하의 이스라엘은 상당한 물질적 번영을 누렸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사마리아에는 오므리가 시작했으며, 아합이 완공한 탁월한 요새 시설을 갖추었다. 건축물 속에서 많은 상아를 발견함으로서 '상아궁'을 예증한다 (왕상 22, 39). 오므리 왕가는 이즈리엘에 있던 별관을 보수하였다 (왕상 21장). 몇몇 중요한 도시들의 방어시설을 강화하였다. 이것은 당시 도입된 개량된 공성(攻城)무기를 방비하기 위함이다. 공격무기도 발전하였다.

나라가 부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농들의 처지가 더욱 악화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궁핍한 때에 자신의 몸이나 자녀들의 몸이 아니면 자기의 땅을 저당잡히고 부자들로부터 고리대금을 빌려쓰지 않을 수 없었고, 기한 내에 갚지 못하여 노예가 되거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왕하 4, 1). 아합 왕 치세 때에 큰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영세 농민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많은 대지주들이 고자세의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의 재산을 늘렸을 것이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기 위하여 그를 살해한 것은 좋은 예가 된다 (왕상 21장).

아합 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국내정치에 크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페니키아로부터 들어온 이세벨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적인 구심점이 형성된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는 페니키아로부터 들어온 외국 (상업)자본을 토대로 신흥 주류 세력이 형성되었다. 국내 정치무대는 전통적 세력과 신흥 주류 세력간의 대립적 양상으로 양분화되는 양상을 뛴다. 그 내용을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b. 종교정책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오므리 왕가의 종교정책으로 말미암아 고조된 위기이다. 오므리가 페니키아와 동맹을 맺고 그의 아들 아합을 공주 이세벨과 결혼시킴으로서 시돈의 신들인 바알 멜카르트와 아세라의 숭배자였던 이세벨과 그녀의 시종들과 교역을 목적으로 그녀를 따라왔던 상인들에게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들의 토착종교와 제의와 관습을 계속지키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이 세워졌다 (왕상 16, 32f.).
앞서 도너가 언급한 바와 같이 바알 신전의 목적을 이세벨과 페니키안 추종자들을 위한 것으로 축소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이다. 분명 이스라엘 사람들도 바알 신전을 찾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므리 왕조의 이원적 종교정책에서 찾으려는 알트와 도너의 노력 역시 무의미한 것으로 보여진다. 오히려 정치적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치-경제적으로 주도세력이었던 이세벨과 페니키안과 그의 추종자들은 종교적 구심점을 만들어 그들의 세력을 안정적으로 고착시키기 위하여 바알 신전을 건설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정치적 신흥 세력을 따라 종교적 입장을 수정했을 수도 있다.

이세벨은 의지가 굳은 여인으로서 자기가 숭배하는 신에 대하여 열심이었으며, 바알 제의를 궁중의 공식제의로 만들고자 했다.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국가의 공인의 신분을 누렸다 (왕상 18, 19). 이세벨은 중앙 정치무대에서 새로운 중심세력이 됨으로 이스라엘 내의 자발적인 많은 추종자들을 낳게 했으며, 이와 함께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자발적인 바알의 추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야웨 제의 역시 국가의 공식 종교로 남아있기는 하였으나, 바알 신앙을 국가의 정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 없이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멀어진 상태가 되었으며, 심지어 환영까지 하였다. 엘리야는 "양다리를 걸치고 비틀거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왕상 18, 21).
이세벨은 야웨신앙을 처음부터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정책이 저항에 부딪치자 그녀는 가혹한 조치를 내렸다 (왕상 18, 4). 야웨의 선지자들은 그녀의 격노의 표적이 되어 전례 없는 위기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4. 오므리 왕가의 몰락
1) 정치적 실패
이스라엘의 아합은 유다의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이라는 국경 도시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출정하였다. 아합은 이 군사 작전 도중에 전사했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으나, 그는 몇 개월이 안되어 낙상하여 회복되지 못했다.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 그는 모압 왕 메사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왕하 3, 4-27). 여호람은 유다의 도움을 받아 사해남단 주변의 모압을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반역자를 항복시킬 수는 없었다. 다메석과의 전쟁도 질질 끌게 되었다. 아합이 전사한 후 8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곳에서 교전을 하고 있었다.

2) 종교적 저항
이세벨의 철권 정책은 저항운동을 지하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왕상 18, 4). 사무치는 증오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쌓여갔다. 이세벨의 대적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상징적인 인물은 예언자 엘리야였다. 엘리야를 주변으로 많은 소외된 자들이 모여들었다. 엘리야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위해 함께 싸워야 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일대 격전을 벌렸다. 여기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신은 바알이 아니라, 야웨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흥분한 청중들로 하여금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이게 했다 (왕상 18장). 이러한 사건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추론할 수는 없지만 엘리야는 정치적으로 구세력,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민족으로 외세와 연합하지 않는 민족주의적인 사람들, 종교적으로 전통적인 야웨 신앙에 충신한 자들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었으며, 그 힘으로 새로운 정치 세력집단이며, 외세 지향적이며, 바알 신앙에 충실한 자들과의 대결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겔멜 산의 투쟁은 두 세력간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 결과 야웨 신앙에 충실했던 자들이 승리했음을 잘 보여준다.
엘리야는 사회 비판적 측면에서 저항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아합의 포도밭에서 그를 직접 만나서 나봇을 죽인 그의 범죄를 저주하였다 (왕상 21장).

3) 예후의 쿠데타
쿠데타는 주전 843/2년에 일어났다. 표면상으로 쿠데타는 예후라는 장군에 의해 주도된 쿠데타였다. 격렬한 폭력성이 보여 주듯이 실제로 이 혁명은 오므리 왕가와 그 모든 정책에 대해 대중의 누적된 분노, 즉 이스라엘에서 보수적이었던 모든 백성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혁명의 도화선에 엘리사가 불을 붙였다. 여호람이 부재중인 틈을 타서 예후에게 기름을 붙자, 예후의 군관들은 곧장 그를 왕으로 세웠다. 예후는 이즈리엘로 가서 여호람을 죽이고, 사마리아로 가서 에세벨과 아합 가문의 온 가족을 죽였다. 쿠데타는 순식간에 대학살로 변하였다. 그리고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죽이고, 바알 신전과 그 모든 설비를 파괴하였다. 이로서 오므리 왕조는 멸절하게 되었다.

5. 결론
오므리 왕조의 국내 상황은 외형적으로 성장하였다. 군사적 성공과 함께 경제적인 성공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층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비도덕적 행위를 자행하였다. 무엇보다도 외세에 의한 전통의 몰락, 최소한 전통을 위협하는 상황은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야 했고, 마침내는 예후라는 새로운 정치적 야심가에 의해 몰락하게 되었다. 그의 쿠테타 동기는 종교탄압이었다.
오므리 왕조는 불건전한 외세에 대한 지나진 의존함으로 전통과 조화되는 새시대의 정신을 창출하는 데 실패하게 되었다. 더욱이 정통성이 결여한 정치적 종교적 특권층은 필히 도덕적 불건전성을 낳게 되었다. 온 나라는 지도층과 백성, 외세와 전통이라는 양분된 구조로 몰아갔다.
지도층의 자기 희생적인 노력 없이는 사회적 통합을 이룩할 수 없으며, 부분적인 경제 성장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지속되지 못하고, 파멸하게 된다. 오늘 우리들은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개혁의 음성을 듣게 된다. 궁극적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지도층의 자기 희생적 헌신이 요구된다.

부록 II 남북조 연대표

르호보암 922-915 여로보암 922-901
아비야 915-913
아사 913-873 나답 901-900
*바아사 900-877
엘랏 877-876
*시므리 876
*오므리 876-869
여호사밧 873-849 아합 869-850
예호람 849-843 아하지아 850-849
아하지야 843/2 예호람 849-843/2
아탈리아 842-837 예후 843/2-815
요아스 837-800

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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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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