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와 청교도 신앙 원리에 의한 성경적 회복과 갱신
1.성경적 예배를 회복합시다
2.주일을 성수하라
3.가정예배의 회복
4.교리교육의 회복
5.개인 경건의 능력을 회복합시다
송용조 박사(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고려개혁신학연구원장)
1.성경적 예배를 회복합시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 중 하나는 성경에 입각한 바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주일이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교파와 교회에 따라 예배의 형태와 순서에 차이가 있으나,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는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예배의 변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예배 전통들을 편의에 따라 원칙 없이 적당히 배합한다든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무분별하게 비성경적인 요소를 예배의식에 도입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 본질이 회복되어야
예배의 본질은 항상 지켜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배가 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예배의 타락이 됩니다. 교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예배의 타락입니다. 예배의 본질이 상실된 예배는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타락은 예배자의 타락을 가져옵니다. 예배는 예배자의 인격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예배가 잘못되면 예배자의 인격과 삶이 잘못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은(1-4계명) 모두 예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배에 미신적이며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끼어들게 되면 그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예배의 근본 목적은 잊고, 교회성장이라는 목적에만 치중한 예배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해 예배를 변질시킬 것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교회의 참된 성장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가? 즐겨야 하는가?"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련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배자에게는 큰 즐거움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려는 분위기보다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으려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려는 정신이 예배자들에게 너무 팽배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즉 모든 예배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 드리는 예배가 과연 성경적이고 바른 예배인지 늘 반성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위로 받으며, 치료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마는 이것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이것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예배의 진정한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먼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에게 편하고 좋은 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둘째로, 참된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하여 진정한 감사와 찬양, 존귀와 영광과 그리고 능력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셋째로, 참된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릴 때마다 우리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바라보며, 그를 힘입어 예배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대한 예표요 모형이나, 그리스도께서 구약 제사가 예표하는 바를 실제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힘입고 그를 통해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아벨은 우리에게 참된 예배를 가르쳐 줍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방법대로 양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짐승을 대신 죽여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통해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기의 노력으로 얻은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방법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예배했습니다. 또한 자만심과 이기적인 동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바른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삶에서나 예배에서나 유일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 가운데 있는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예배가 말씀에 기초한, 순결한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경적 예배를 회복합시다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예배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오늘날처럼 수준 낮은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진정한 예배가 상실되어가고 있으며 그 대신 각종 생소한 프로그램들이 예배의 자리를 차지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진정한 예배인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자들의 지도 아래 예배에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이 회복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은 성경만이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구원의 유일한 길을 가르쳐주며, 성경만이 신앙과 본문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임을 인식하고 예배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활동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로 통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실상은 예배가 아닌 것들이 많습니다. 교회 형태와 전통에 맞지 않는 예배 스타일을 무분별하게 도입함으로써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성경적 예배를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올바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주일을 성수하라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시고 제7일에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사랑했던 교회와 성도들은 모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한국교회도 주일 성수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이제는 주일을 성수하는 교회나 성도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주일은 창조주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지키라 하신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안식일을 우리에게 지키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이 날을 거룩히 잘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안식일의 기원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이 안식일의 기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다음 날 곧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안식일은 엿새 동안 일하느라 너무 피곤하고 지쳤으니까 하루를 쉬라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쉬셨으니까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창조를 완성하셨다는 표시로 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이 쉬셨다는 것의 첫째 의미입니다. 둘째는, 이런 위대한 창조를 완성하시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일을 보시고 큰 기쁨과 만족에 들어가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일하는 날이 아닌 하나님의 하신 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특별한 날로 정하신 것입니다. 이 날은 거룩한 날이요 기쁜 날이요 복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써,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니라 끝이 있으며, 더 나은 질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하는 것을 미리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영원한 세상까지 예비해 두시고 안식일을 지킴으로 이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을 육체의 피곤이나 푸는 날로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감사와 소망과 기쁨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자.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합니다.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신령한 복을 넘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않으면 영육 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가치 있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이 세상이 지나가고 역사가 흘러간 뒤에 역사의 종국에는 더 높고 복된 새로운 질서의 세계 곧 영원한 안식의 세계가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계시하는 안식의 세계는 우리 앞에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누렸던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마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도 범죄한 인간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쉬지 못하고 일합니다. 경쟁이 치열한 세상살이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고 더 인정받고 더 누리려고 쉴 줄도 모르고 억척스럽게 일하다가 깨어지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믿지 않는 자는 그 마음에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안식일, 곧 주일 성수는 신앙의 시금석이다.
구약 시대는 제7일을 안식일로 구별하여 지켜라 하셨기 때문에 아무 날이나 지켜서는 안되고 일곱째 날을 지켜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엿새 동안 하던 일을 쉬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하는 날로 지켜야 했습니다. 안식일을 마음대로 폐하거나 변경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안식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의 복된 약속의 말씀을 듣고도 믿음을 가지지 못하여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믿음이 없는 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안식일 제도는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기까지는 계속하여 지켜야 될 명령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지키는 날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주님을 지극히 높이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주님의 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좋은 전통을 세웠기 때문에 그 후에 모든 교회가 이 첫날을 안식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제칠일안식일교회는 지금도 제7일을 안식일로 지키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바로 깨달아 주님이 부활하신 첫 날을 안식일로 지킨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지극히 높여 천하 만민들에게 '이 분이 주님이시다' 라고 선포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주일은 아주 영광스러운 날이요 기쁜 날입니다. 이 날은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는 새 생명과 새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구원의 날이요 승리의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주일성수(主日聖守)를 회복하자.
요즘 주5일 근무제에 대비하느라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금요일 밤 또는 토요일 예배로 대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휴가를 떠나는 교인들을 위해 산이나 바닷가에 수양관 겸 주말 교회를 마련하여 휴가지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주말 휴가를 떠나고 싶어하는 연약한 신자들을 배려하려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회가 너무나도 신중하지 못하게 주일 예배를 다른 날 예배로 대치하는 것은 제4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아무 날이나 아무 곳에서나 드려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사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정해서 지켜온 주일 예배를 자기 마음대로 다른 날 예배로 대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와 교만에서 나온 비신앙적 발상입니다. 그것은 제도적 기독교와 역사적 기독교를 무시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는 주말 교회라는 이름이나 개념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와 청교도들은 생명을 바치면서 주일을 거룩히 지켰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여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주일을 지키는 역사적 종교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역사의 종국,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주일 성수는 교인의 가장 기본이 되고 첫째가 되는 의무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주일은 예배드리기 위하여 특별히 정해진 구별된 날입니다. 주일 성수를 포기하면 기독교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까지 사람이 자기 생각과 편리대로 하려는 것은 생명의 주시요 시간의 주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적 예배의 날로 정해주신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소요리문답 제60문).
주일에는 해야 할 일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힘써하고 하지 아니해야 할 일은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세상 일과 오락까지도 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게으름을 피우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대한 공적 사적 예배에 사용하고, 다만 불가피한 일과 자비를 행하는 일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과, 자기 자신과 자기 사업만 생각하지 말고 안식일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말씀과,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주일성수 전통은 많이 허물어졌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것보다는 편히 쉬는 공휴일쯤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복된 날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면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곧 주일마다 하나님께 나아와 경배함으로 새로운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주일을 성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가정예배의 회복
가정은 개인과 사회의 출발이며 기초입니다.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정은 교회를 이루는 근간(根幹)입니다. 개교회는 성도들의 가정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가정들이 굳게 서지 못하면 교회 역시 굳게 서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기독교회는 그 처음부터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훈련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해 왔던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은 아담의 가정이었습니다. 본래 아담은 에덴동산에 홀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른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낙원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담을 향하여,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시면서 하와를 만드시고 인류 최초의 가정을 친히 세워주셨습니다. 가히 완벽한 환경이라 할 수 있는 에덴동산에 거하던 아담에게도 영적 필요와 도움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정은 그 처음 시작부터 예배를 목표로 하여 세워진 거룩한 기관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를 볼 때에는, 인류 역사상 오늘날처럼 가정이 심하게 깨어지고 붕괴되었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하는 서글프고 두려운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대중매체에서나 학교에서 그리고 각종 연구소에서 저마다 가정의 치유책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가정과 결혼생활의 위기와 갈등을 해소시켜 준다고 하는 수많은 결혼 관련 세미나, 가정생활 특강, 부부 및 자녀 상담 프로그램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정에 관한 많은 저술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최신의 심리학 이론이나 상담 기법들을 토대로 해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가정문제의 핵심이 영적인 것임을 진정으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를 영적으로 풀어가려고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정붕괴 현상은 가정이 영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의 반증임을 기억해야 한다. 처음부터 가정은 예배를 위해 세워진 영적 기관이었기 때문에 가정문제는 영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영적 실패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들은 영적으로 회복되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가정예배야말로 가정의 영적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일 뿐만 아니라 가정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며 치유시킬 수 있는 양약입니다. 한 가정의 영적 실패는 그 가정의 총체적 실패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가정과 관련된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한국교회는 그 태동기부터 좋은 신앙유산을 많이 물려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정예배 전통은 주일성수 전통과 함께 개혁주의 교회로부터 한국교회가 물려받아 소중하게 간직해 온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가정에서 찬송과 기도와 성경을 읽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점점 철저한 개인 신앙, 개인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소위 큐티(Quiet Time)라 하여 개인 경건과 묵상 시간을 통한 하나님과의 일대일 만남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부모로부터 신앙을 전수받고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혼자 큐티하는 일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제는 가족과 함께 거실에 둘러앉아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우리의 생활 습관은 불규칙하게 되었고 가족간의 유대관계도 느슨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한편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기 가장 어려운 때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 가정이 가장 심하게 붕괴되어가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의 담이 많이 허물어진 이 시대에, 우리 교회는 허물어진 성전의 담을 재건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가지고 가정의 재건을 위해 기도하고자 합니다. 허물어진 가정의 담을 다시 쌓아 올립시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재건되지 못하면 우리 개인과 이 사회와 나라와 우리 교회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서 '복된 소리, 구원의 소리'(시 118:15)가 아침, 저녁마다 흘러나오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정들이 점점 어두워져만 가는 이 세상에서 빛의 가정들로 든든히 서게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가정들이 모이는 교회들이 이 나라 가운데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4.교리교육의 회복
우리가 회복하기를 원하는 네 번째 사역은 교회와 가정 안에서의 교리 교육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인 바탕이 없는 신자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균형있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조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어릴 때부터 교회와 가정에서 교육하는 것은 영적 골격이 튼튼한 성도를 양육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 됩니다. 이단적인 사상이 침투하여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해야 할 때, 또 우리가 가진 신앙을 변증해야 할 때에도 교리 교육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중요성
토마스 왓슨은 그의 책 [신학의 체계] 첫 장에서 요리문답에 관한 예비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기초 위에 잘 교육받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 말하고 있습니다. 왓슨은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가장 연약한 자의 판단력이 진리의 지식 가운데 교훈을 얻고 그 사랑 가운데 강화될 수 있게 해 주는 요리문답의 형식으로 신앙의 주된 기초들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는 요리문답은 사람들을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최선의 방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요리문답 교육은 보다 깊이 있는 교훈을 배우는 길로 나아가는데 있어서도 필요합니다. 신앙고백 없이 그리스도를 믿거나 공식화된 신조 없이 성경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합니다. 신조들은 성경의 교훈을 잘 요약해 주고,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거짓된 교훈과 생활을 막아내는데 있어서 공적 표준으로서 방패의 역할을 합니다. 요리문답은 신조들을 간략하게 가르치기 위한 수단입니다. 특별히 자녀들의 교육에 널리 이용되고 있고 요리문답의 형식의 신조들은 즉흥적이고 피상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는 확고하고 실질적인 종교 교육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교리교육 부재의 원인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 역시 신앙의 표준을 바로 가르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의 표준을 가르치지 않고 신앙의 표준을 무시한 채 목회한 결과 설교자마다 말씀 중심이라고 외치고, 교회마다 말씀 중심의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신자들 개인마다 말씀중심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비성경적이며, 심지어 교리적으로 오류가 있는 성경해석과 삶이 한국교회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리교육은 교회교육에 있어서 등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은 뜨거운 것 같으나, 그럴듯한 이단적인 사상과 만났을 때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별하고 참 신앙을 변증해 내는 데 있어서 무기력합니다.
교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산물인 교리가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분명 영감되고 무오한 것은 성경뿐이고 성경만이 진리의 유일한 원천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교리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이 직접 성경을 읽고 깨달은 것만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은 교회 역사상 경건하고 성경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수많은 성경교사들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교만일 뿐입니다.
교회교육에서 요리문답이 사라지면서 소위 성경교육을 주로 하는 교회교육은 성경의 권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고등비평이 지배하는 성경관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고, 그 결과 인본주의적인 교육이 교회를 잠식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경교육을 중시하는 교육현장에서도 성경관에 따라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얼마든지 침투할 수 있습니다.
교리교육의 회복
가정과 교회 안에서 요리문답교육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요리문답교육은 종교개혁시대부터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에 의해 교리교육을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성경신학이 발전하면서 요리문답교육은 점점 계단공과식 성경교육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정과 교회에서 교리교육을 효과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실제적인 어려움들이 따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교육이 필요성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절실한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리가 담고 있는 신학적 풍요로움을 어떻게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책임이요 과제입니다. 만일 각종 교회교육 프로그램과 특별활동에 밀려서 교리 교육이 시행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의 교회는 영적, 신학적, 교리적 혼란에 얼마든지 휘말려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 수행에 집중하지 못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리교육의 회복으로 영적 골격과 체질이 튼튼한 성도와 교회들로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5.개인 경건의 능력을 회복합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아무도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는 우리들은 세상과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과 의(義)에 대해서는 살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개인 경건은 곧 성화(聖化)이며, 개인의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면서도 개인의 신앙 인격과 삶이 성숙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곧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오류와 손실과 불행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개인 경건의 회복 운동은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운동입니다. 성도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 2:17)이 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변화가 없이는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경건의 힘은 말이 아니라 그 능력에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왔습니다. 새벽기도와 산기도, 기도원과 철야기도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을 냉정하게 바라볼 때, 기도와 경건의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듯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열심히 출석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전혀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아지는 기현상이 일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사귐과 의논이 가능합니다. 기도 없이 영적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위인들은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으며 또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개인 경건의 핵심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 역시 우리의 영적 성숙에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시 1: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됩니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과 원칙이 됩니다.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등한히 하면서 개인적인 신앙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개인 경건은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와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틀 안에서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드리는 바른 예배와 교리교육 등이 잘 시행될 때 개인 경건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비로소 마련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개인의 영적 성장과 변화 곧 성화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더욱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채, 교회 안의 각종 모임과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고, 남을 섬기는 이런 저런 봉사로 분주할 수도 있고, 심지어 다른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로 바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우리의 경건의 실력이 자라지도 못했으면서 이런 저런 활동을 분주하게 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지 고요한 중에 날마다 돌아보고 반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며,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새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 경건의 바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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