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역사의 전통적인 연대기로 따지면 제 18대 왕조의 통치는 대략 BC 1550년부터 BC 1320년까지이다. 성경 연대기에 의하면 출애굽은 약 BC 1446년에 있었다. 그런데 제 18대 이집트 왕조의 기록 어디에서도 이집트를 휩쓸었다던 어마어마한 10대 재앙의 결과로 생겼을 대대적인 재해의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이 기간에 있었다는 이집트 군대의 괴멸의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있었을 여호수아 휘하의 군대에 의한 팔레스타인 침공을 증명할만한 고고학적인 증거물도 없다.
이 문제의 해결은 이집트의 연대기를 몇 세기 삭감하여(축소하여) 찾을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제 12대 왕조를 모세와 출애굽의 시기로 끌어내려서 산정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고보면 모세 당시에 수많은 유태인 노예의 존재, 피폐한 이집트, 그리고 유태인 노예의 돌연한 출국의 흔적 등을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연대기의 축소(reduction)는 이스라엘에 있는 고고학적 유물의 연대에 대한 해석에서도 고루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후기 청동기(Late Bronze Period)의 말기에 팔레스타인 침공이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전기 청동기 말기에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 여리고의 성벽과 이질적인 문화를 지닌 낯선 민족이 침공한 증거가 있는바, 이 침공자는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군으로 식별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도전 (The Challenge to the Bible)
1995년 12월 18일판 타임(Time) 지에는 10계명이 새겨진 석판(石版)을 들고 있는 모세의 그림이 표지에 등재되어 있었다. 그 그림 한 복판에 ‘성경은 사실인가, 아니면 가공인가?’ 라는 질문이 가로로 쓰여 있었다. 이 기사의 주장은 이랬다.
“구약성경의 여러 내용들은 증거에 상충되든가, 아니면 여전히 충족치 못하다.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노예, 모세의 실존, 출애굽, 성지에 대한 여호수아의 침공 … 등등에 관한 증거가 그러한 예이다. 족히 6년 동안 여리고 유적을 발굴하였던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은 그 당시에 있었을 파괴의 증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p.54)
실제로 그녀는 성경의 출애굽기에 해당되는 BC 1400년 경에는 여리고 현지에 주민이 살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1
“제반 자료들을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분석하여 보면, BC 1580년과 BC 1400년 사이에는 무덤 양식과 고대 건축물에 있어서 양쪽 다 완전한 간격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당시에는 (at that time)’ 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이집트의 노예제도, 모세의 존재, 출애굽, 그리고 여호수아의 성지 정복에 관한 증거들은 풍부하다. Garstand 교수는 여리고에서 무너진 성벽들을 발굴하면서, 성이 있던 곳에 생겨난 언덕 밑에서 전 지역을 덮고 있는 두터운 잿더미 층(thick layer of ash)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방화한 화재로 인한 것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외각 성벽이 가장 심하게 손상되었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들은 경사를 흘러내렸다… 맹위를 떨친 화재의 흔적은 역력하였다. 붉게 탄 벽돌들, 깨진 암석들, 검게 탄 목재들과 잿더미 등등이 그랬다. 불타 무너진 가옥의 잔해들은 성벽을 따라 땅바닥에 즐비하였다. 가옥 내부의 토기들은 무너져 내린 지붕에 깔려있었다.“ 2
그렇지만 고고학자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시점(time)은 잘못된 것이었다.
“초기 발굴에서 발견한 그 방어벽은 후기 청동기 도읍의 것으로서, 그 파괴의 원인은 지진과 화재로 믿고 있었다. 최근의 발굴은 이 성벽들의 시기가 잘못 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성벽들은 실질적으로 초기 청동기 때의 것이었다.” 3
열왕기상 6:1에서 밝히고 있는 정보로부터 출애굽의 시기가 계산될 수 있다. 이 구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Ziv)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솔로몬이 BC 970년경에 즉위하였다는데 동의한다.4 그의 즉위 4차년은 BC 966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때를 기산(起算)하여 480년 전은 BC 1446년경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인정하는 전통적인 시기 산정에 따르면, 그 때는 이집트의 제 18대 왕조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집트의 연대기에 대한 수정 제안 (A Proposed Revision of Egyptian Chronology)
‘그 당시에’ 모세의 흔적이나, 이집트에 내려진 10대 재앙, 또는 출애굽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은 이집트 역사의 연대기 계산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수 세기를 삭감하여 계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수정된 연대기 계산은 제 12대 왕조를 모세의 시기로 끌어내려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조 기간에는 성경 기록을 지지하는 상황 증거들이 풍부하다.
제 12대 왕조의 말기에 재위하였던 왕들 중에 세소스트리스(Sesostris) 3세가 포함된다. 그의 석상에 묘사된 인상으로 보아, 그는 능히 백성들에게 냉엄한 노예제도를 시행하고도 남았을 잔악한 독재자로 생각된다. 그의 아들 아메넴헷(Amenemhet) 3세도 못지않게 잔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의 통치는 4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그의 통치 초기 어느 때에 탄생했을 것이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아메넴헷 4세로 불려졌던 아들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이 왕자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부왕을 추종하였든지, 아니면 부왕과 공동섭정을 하였던 것 같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메넴헷 4세는 모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메넴헷 4세는 아메넴헷 3세의 서거 이전에 신비롭게도 종적이 묘연해졌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소벡네페루(Sobekneferu) 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 공주는 아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만약에 그녀가 목욕하려 강가로 내려갔다던 바로(Pharaoh)의 딸이었다면, 강가로 갔던 이유는 쉽게 이해된다. 그것은 공주의 방에 목욕시설이 없어서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정(洗淨) 의식을 거행하고, 다산(多産)의 하신(河神) 하피(Hapi) 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그 곳에 내려왔을 것이다. 아기를 못 가졌던 그녀로서는 그와 같은 신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기 모세를 그 곳에서 발견하였을 때에 그녀는 이 아기가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쉽게 믿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5―6).
그러나 나이 들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식한 모세는 이집트를 도망쳐야만 했다. 이 일로해서 왕위에 공백이 생겨 아메넴헷 3세가 서거하였을 때에는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공주 소벡네페루가 바로로 즉위하여 8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왕조도 끝나고, 뒤이어 제 13대 왕조가 대두하였다.
이스라엘 노예들 (The Israelite Slaves)
지난 15년간 나는 이집트의 연대기를 정정하기 위하여 애써왔다.7 그 결과로 페이윰(Faiyyum)의 카훔(Kahum)에 있는 12대 왕조의 피라미드들의 건설에 동원되었던 노예들이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노예로 언급된 셈족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15년 전만해도 나는 고고학적 현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그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이다.
나보다 먼저 나의 정정내용과 동일한 정정을 임마누엘 벨리코브스키(Immanuel Velikovsky) 박사가 주장하였던 것은 물론이다.8 그리고 도노빌 쿠빌(Donoville Courville) 박사도 같은 정정을 제안하였었다.9 그러나 그들은 고고학자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해서, 그들의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무시되었었다. 하지만 그 때 이후에도 인정을 받는 고고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정정을 제안하고 있다.
1991년에 피터 제임스(Peter James)는 ‘암흑의 세기들(Centuries of Darkness)’ 라는 저서를 펴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이집트의 연대기는 250년을 삭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10 제임스는 저명한 학자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캠브리지 대학교의 콜린 렌프루(Colin Renfrew) 교수의 머리말을 싣고 있는데, 렌프루 교수는 ‘연대기 개정이 진행 중’ (p. XVI)이라고 인정하면서 ‘역사는 새로 편찬돼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p. XIV). 데이비드 롤(David Rohl)은 1995년에 출판한 자신의 저서 ‘A Test of Time’ 에서 이집트의 연대기는 350년 삭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 이 주장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집트의 제 12대 왕조의 종말은 BC 15세기로 산정되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때가 대충 성경의 출애굽기의 시기에 해당된다. 그 때 카훈에 거주하면서 제 12대 왕조의 피라미드건축에 노력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노예들이 이스라엘 인들이었다.
성경연구학회(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소속 브라이언 우드(Bryan Wood) 교수는 카훈에 살고 있던 셈족 노예들이 틀림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12 그는 이 결론에 이르는데 다른 시각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는 출애굽기 12:40 에서 언급된 430년13,, 14 이라는 기간이, 갈라디아서 3:17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출애굽 당시까지의 전체기간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던 실질적인 기간이라고 결론 맺고 있다. 이 추정도 앞에서의 예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노예 시대를 제 12대 왕조 기간으로 산정한 것이다.
이 때의 증거들은 성경의 기록과 잘 들어맞는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애굽기 1:8―11).
플린더 페트리(Flinders F. Petrie) 경은 페이윰에 있는 도시 카훈(Kahum)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로잘리 데이비드(Rosalie David) 박사는 그의 발굴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즉,
“이 도시에는 상당수의 아시아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집트의 다른 곳에서도 이 사실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시리아나 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었을 그들의 고국은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 그들이 이집트에 와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5
로잘리 데이비드나 플린더 페트리도 이 셈족 노예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걸 확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의 사건을 제 12대 왕조보다 수 세기 이후로 산정하는 전통적인 연대기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리는 또 다른 한 가지 흥미진진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마도 원래는 옷가지나 다른 소유물들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나무 상자들이 카훈(Kahun)에 있던 많은 가옥들의 방바닥 밑에서 발견되었다. 이 상자들은 아기들의 유골들이 담겨 있었는데, 때로는 한 상자 안에 2명 또는 3명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죽을 당시 아기들의 나이는 몇 개월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16
이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는 히브리인 조산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를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출애굽기 1:16). 조산원들은 이 명령을 무시하였던 결과,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22).
수많은 산모들은 품속에서 빼앗긴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비탄의 눈물을 삼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아기들을 상자에 넣어 살던 집 방바닥 밑에 묻었던 것 같다.17
페트리가 발견한 것 중에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노예들이 돌연히 현장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다. 로잘리 데이비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제왕의 피라미드 건설의 완공이 카훈 주민들이 연장과 가재도구를 일터나 집에 내버려둔 채 끝내 그 도시를 떠나야했던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
“이 최초의 카훈 거주가 어떻게 막을 내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가옥들 안에 내버려진 일상용품들의 수량, 그리고 그 용도의 범위나 형태들의 다양성은 능히 그들의 이탈이 돌발적이며, 사전에 계획된 바 없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9
그들의 이탈은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돌발적인 것이었다! 이보다 더 성경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기 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