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김 안토니오님, 동진 A.TNP)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책은 적지 않게 읽혀지고 있는 책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교우님께서 책 소개해 주신 것을 인용합니다. "이 책은 오랫동안 개신교의 가정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개인의 진솔한 신앙체험기이다. 개신교의 열심한 신자이셨다가 作故하신 저자의 두 친·외할머니께 올리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개신교 안에서 흔히 문제점으로 지적하며 비판하는 가톨릭 교회의 모순과 그 내용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개신교와 다소 차이가 있는 성경 정경 등, 성모신심, 성사, 연옥 등에 대해 두 분 할머니께 자신의 신앙체험을 통해 편안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여 설명해 주고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서로 차이를 두며 비방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은 서로가 존중해 주며 진리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할 때이다. 그러려면 우선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 등을 벗어 버릴 필요가 있다. 저자는 교회일치 운동이 일고 있는 시점에서 (일부?) 개신교가 가톨릭에 가지고 있는 오해, 편견, 오류 등을 밝혀주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이 책을 내어놓았다. 이 책은 종교간의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빛을 향해 함께 걷고픈 저자의 애정을 느낄 수 있어 진리를 추구하며 고민 갈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성경의 정경 결정과 번역, 그리고 해석 등에 관련된 논점의 글을 인용합니다. 본문 중의 회색 글씨는 발췌자가 임의로 추가한 것입니다.
성경을 마음대로 떼어 버려도 좋은가
저는 말을 배우기 이전부터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들으면서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2디모 3,16)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책은 구약39권 신약27권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신앙(가톨릭출판사)이란 책을 읽는 도중 성경은 66권만이 아니라 정경은 73권이며 가톨릭에는 성경뿐만 아니라 성전聖傳이란 것도 있으며 성경과 성전은 하느님 말씀의 거룩한 단일 위탁물로서 이 위탁물은 교회에 맡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나도 놀랐었습니다. 물론 이때 저는 이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단정하고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치며 그 책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지침서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오로지 성경밖에 없다고 믿어왔던 저이기에 문제는 더욱더 심각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이 73권이라는 말이 믿어지지도 않았으나 더욱 큰 문제는 73권이 옳은 것인지 66권이 옳은지는 성경에서도 기도 속에서도 또는 그 큰 학교 도서관의 어떤 문헌에서도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심정으로서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73권이 거짓이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음은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 읽고 각종 종교서적 탐독과 고민 때문에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저는 외국대학의 종교학 책자에서 다만 7권의 외경Apocrypha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였으나 그에 관한 궁금증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었습니다. 외경은 무엇이며 위경은 또 무엇인가? 그 판정 기준은 무엇이며 판정은 누가 내리는가? 하느님이 직접 내리시는가 아니면 이를 오랫동안 보관해온 유다교회가 내리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소위 종교개혁 이전 하느님을 믿는다는 그 가톨릭이 내리는가? 그리고 그들이 내린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등.
계속되는 질문만 되풀이하던 중 고맙게도 개신교의 유명한 신학자 R.BARCLAIUS의 책에서 "CANON 즉, 정경은 몇 권의 책으로 된 것으로서 그 보다 더 많지도 더 적지도 않다는 것은 성경 자체로는 증명되지 않으므로 여기에 대하여는 성령의 사적 감도나 그렇지 않으면 로마 가톨릭을 신임할 수밖에 없다"라는 그의 양심적인 결론에 공감하고 그 해답을 가톨릭에서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답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성경은 구약46권 신약27권 도합73권으로서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24,35 ; 마르코 13,31; 루가 21,33) 라는 확답과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구약)은 기원전 150년경 정경으로 인정된 이래 신약시대에서도 예수님과 사도시대를 거쳐 약 1500여년간 정경으로 사용해 왔으나 소위 종교개혁 이후 일부 개신교 종파에서는 구약39권 신약27권을 정경으로 하고 또 어떤 종파는 성 루가와 성 마르코는 사도가 아니라 하여 그가 쓴 것을 진짜 복음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마르틴 루터는 성 야고보서를 '허수아비의 편지'라고 불러 모욕하였으나 다행히 한국성서공회의 성경전서에는 루터가 없애 버린 야고보서가 들어 있음도 재삼 확인하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주님과 진리의 성령(요한 14,15)께서는 7권의 성경을 떼어버려도 좋다고 허락하신 바도 없으시며 그렇게 떼어버린 것이 정당하다고 뒷받침 하시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종교 개혁자라는 사람들이 소위 면죄부(사실은 대사 논쟁) 문제나 그 당시 일부 성직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있었다면 스스로 이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거나 아니면 종교적 해이만을 개혁할 일이지 감히 죄 많은 인간이 주님의 말씀을 훼손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구약이라 할지라도 용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의 자손들이 무엄하게도 높은 탑을 쌓아 하늘에 이르려는 교만과 같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주. 종교개혁 용어가 적절한지와 관련하여, 당시 이탈자들은 교리 등을 포함하여 1500년 이상 쌓여온 교회와 신앙의 유산 및 전통을 거부 비방하며 나가서 새로운 교리로, 새로운 교파를 만든 것이기에 분열 내지 혁명이라는 말이 올바른 용어라고 생각된다. 이는 실상 아래 언급할 자유 성경해석 등에 기인하여 오늘날 3천개 이상의 교파로 통계되고 있는 개신교내 교파 분열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교파이든 이탈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존 교회의 교리가 잘못되었다며 자칭 개혁이라고 외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호칭은 그 자체로는 객관성이 없는 얼토당토않은 음해일 뿐이다. 게다가 루터나 칼뱅 등 이탈자들 중 수장격인 사람들은 오늘날 일반 신도들은 잘 알지 못하는 숙청 지시 등을 '통치적 차원에서' 했던 측면이 있으므로 만약 자신들이 만든 교설들을 가지고 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천부당하다. 사실 종교혁명이 있던 시기는 제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군주국가의 등장과 하층계급이었던 시민계급 및 농민들의 지위 향상, 인문주의(르네상스)가 사회전반 정신적 요인으로, 그밖에 상공업의 발달, 황금만능주의 풍조의 팽배 등으로 중세 때의 안정된 질서가 와해되며 혼란이 가중되던 중세에서 근대로의 과도기였다. 이러한 시기적 혼란을 틈타 성직을 정치적 경제적 이득수단으로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이 직무 남용, 성직매매 등으로 기강이 문란해져 문제가 되었다면 이를 고치는 것이 개혁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더하면 더했지 이에 못지않은데 오직 믿음, 오직 은총 등 오로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교설을 근거로 개혁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한편 그들의 행실상의 문제는 이 교설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임). 개혁이라며 말할 자격이 안 된다고 본다.
구약은 어감상 묵은, 낡은, 오래된 것과 같은 형용사가 붙어있어 이 책을 읽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또는 심정적으로 가볍게 취급하려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다이즘의 입장과는 달리 우리는 구약을 예수님의 신비를 예언한 말씀으로 굳게 믿고 있으며 또 믿어야만 합니다. 교회는 구약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의 책이라는 사실을 기회 있을 때마다 선언하였으며 2세기경 구약성서를 얕잡아 보던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으로 파문하였고 또 교회는 히브리 10장 1절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너무나 오랫동안 사도 바오로(바울로)의 율법 거부에 심취한 나머지 구약성서 전체를 거부함으로서 많은 악영향을 끼친 마르치온을 단호히 이단으로 배격하였습니다(160년). 이를 가리켜 아직도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은 '가톨릭은 구약을 믿는 종교'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모략과 악의에 찬 중상을 하고 있으나 주님을 반대하는 유다인의 경전(39권)만을 그대로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구약 율법에 있는 십일조를 바리사이 같은 근본주의 율법주의자들처럼 자구적으로 해석하여 깍듯이 내세우면서 기복신앙에 호소하는 개신교야말로 헌금에 관한 한 어찌 보면 유다교의 한 교파 같기도 합니다(→발췌자 주. 신약에서는 이웃과 나누는 그 사랑의 정신과 자율적인 정성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바리사이처럼 율법 문자를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주역이다. 한편 기복신앙의 본질은 재물 권세 명예 등을 탐하는 우상숭배임).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인(마태 16,18) 베드로 대성전을 짓기 위한 소위 대사 문제로 교회를 개혁한다고 갈라져나간 형제들이 지금에 와서는 교회를 통째로 그것도 프리미엄을 붙여서 사고팔고 하는 끔찍한 짓을 하면서도 '전도와 선교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다시는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2,15-16)고 하신 주님의 채찍에 맡길 수밖에요.
이 손자는 똑똑히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당시 가톨릭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지 말고 멀리하라고도 배웠습니다. 우리는 삼성냉장고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대우전자에 가서 알아보려 하지 않고 LG전자 상품의 정보를 얻기 위해 현대전자에 가지 않습니다. 이 손자는 너무나 오랫동안 국내 및 국외 정보를 수집 분석 판단하는 분야에 파견되어 일해 왔기에 '경쟁자에게서 얻는 정보란 언제나 편견투성이이며 무엇을 아주 빼 버리거나 과장하지 않은 정보를 얻기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지 말고 바다로 가야 하듯이 저는 진리를 따라 가톨릭 교회에 들어와야 했으며 들어와서야 옛날의 모든 것이 거짓 또는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지고의 진리인 사랑으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어야할 때입니다(→발췌자 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일치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임. 요한 14-17장 참조. 다만 사랑은 악이나 불의와의 타협은 아니며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바오로사도의 신약과 구약의 백성을 엄격하게 구별하면서도 신약의 백성에게 흔히 잊혀지기 쉬운 다음의 말씀을 명심토록 해야 합니다. 즉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로마 11,18)라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원뿌리에서 갈라져나간 개신교의 현주소라고도 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에 관하여는 언젠가 우리 주님께서 "너희는 성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 하고 있다"(요한 5,39)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그 당시 신약성경에는 아직 나오지도 않은 시기였고 다만 율법 스승 바리사이파(그 당시 평민들 중 열성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꾸짖는 말씀으로 여기의 성서는 당연히 구약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볼 때에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결과적으로 개혁이란 미명 아래 '주님을 증언'하는 계시의 말씀을 떼어버린 것이 됩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라는 소위 종교 개혁자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구약의 마카베오 상하권과 신약의 야고보서를 빼어 버렸습니다. 구약의 마카베오서는 연옥교리가 실려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야고보서의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보 2,26)라는 핵심 구절로 된 것으로서 파문된 신부 자신의 소위 의화체험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성경을 사용하셨습니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마태 6,14-15)은 집회서 28장 2절에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마태 6,7)은 집회서 7장 14절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자들아 나에게 와서 쉬어라(마태 11,28-30)는 말씀은 집회서 51장 23-27절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18-19) 말씀은 집회서 11장 18-19절에서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칠 형제 모두 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은 후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르 12,20-23)라고 한 질문은 토비트서 3장 8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1,20절과 지혜서 13,5절, 신약 특히 바오로 서간과 야고보서, 히브리서 등에서도 개신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구약의 여러 책들에서 같은 내용을 수록하거나 또는 인용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약 350여개 구절이 있음). 그런데 누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감히 손을 대어 훼손하거나 떼어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매우 이상한 것은 상기 성경을 정경에서 제외한 얌니아회의가 있던 서기 100년경이라면 이때의 유대인들(→율사와 바리사이로 구성된 랍비들을 말함)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 동참했거나 혹은 죽이라고 고함치던 사람들, 아니면 바로 그들의 2세들로서 성 스테파노를 돌로 치며 예수님을 지금까지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일 터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경전만을 구약으로 삼는 소위 종교혁명가(이탈자)들의 의도를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는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은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이 주장한 것만을 믿는다?" 어딘지 좀 어색합니다.
루터는 또 로마서 3장 28절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라는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며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위작僞作하였습니다. (발췌자 주. 상기 정경결정 문제가 자기 자신의 해석에 따라 이에 불합不合하는 성경을 떼어 버린 것이라면 여기 위작은 번역상의 문제로 성경구절을 자신의 교설에 원본과 다르게 고치는 것을 말함. 한편 오직 믿음 구호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여기에서 믿음은 내면적 신념이나 확신 등을 의미하는 협의의 개념이 있고, 또 예수님의 말씀 내지 가르침, 그리스도이심, 죽으심과 부활 등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 신앙이라는 교리적 의미에서의 광의의 개념이 있는데, 루터가 말하는 믿음은 가톨릭과 달리 전자에 국한된다. 예컨대 예수님의 구원 말씀 중에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는 말씀이 있다면 루터는 마음속으로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믿기만 하면 어차피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런 행실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식의 주의이고, 가톨릭 교회의 견해는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내용에 맞게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보는 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성경구절에 따라선 믿음이 내면적 신념으로만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그는 또 고린토전서 4장 20절 "하느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니 말입니다"를 "하느님 나라는 능력에 있지 않고 말에 있다"라고 뒤집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성경전서에는 제대로 번역된 것이 퍽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마태오 19장 29절에서 '아내'라는 말을 빼었고 루가 2장 48절 성모마리아께서 예수더러 '아들아'라고 하신 것을 '아이야'로 고쳐 놓았습니다(EnversⅢ 323). 당시 엠써Emser라는 사람은 "루터는 그리스도 교회가 옛적부터 신뢰해오던 원문의 여러 곳을 혼란하게 하고 어리석게 만들었고 비뚤어지게 만들어 교회에 불리하도록 하였다. 또 이단적인 주해와 서문으로 교회에 해독을 끼쳤다. 그는 신앙과 선행을 다루는 성구에 이르러서는 횡포하게도 거의 전부 손을 대었다"라고 증언하는 동시에 1400여 군데의 부정확함을 지적하였습니다(Jansen History of German People, ⅪⅤ p425). 이것은 결코 루터의 무지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똑똑하였습니다.
할머니!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 손자가 주 하느님의 말씀마저 자기 마음대로 떼어버리는 이들에게 계속하여 저의 영혼을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안 되는 일이지요. 당시 저는 이런 사람들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루가 11,52) "나더러 주여 주여만 하는 자"(마태 7,21)라고 혼자 분개도 해보았으나 지금은 우리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성서 제일 마지막 장에 요한 사도를 시켜 하신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의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버리실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드릴 따름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손에 의해 훼손된 이래 사랑은 이기심과 증오로, 믿음은 교만과 의심으로, 희망은 어두움과 절망으로, 정직은 기만과 사기로, 선은 사악과 완고한 마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증오와 억제할 줄 모르는 이기심이 한층 더 위험한 양태로 도처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악령은 어디에나 분열을 일으킵니다. 가정 사회 교회 그 어느 곳이든지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교회간의 이해와 상호 일치는 그저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간직하고, 사랑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를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하며 함께 기도할 때입니다.
성경의 자유 해석에 관하여
여기에서 자유 해석이란 가톨릭에서의 유권적 해석 원칙과 대립되는 개념인데, 신앙이나 윤리 등에 대한 사항이 로마 주교인 교황님을 비롯한 모든 주교들과 수도연합회의 수석 수도원장과 총재, 면속 수도회 총장과 고위 성직자 등으로 구성된 공의회 등 교도권에 의해 다수결 표결 등을 거쳐 유권적으로 결정 선포되어 구속력을 가지는 것과는 달리, 어느 특정인(교주)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된 것이 교의로 결정되고 진리처럼 유포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리들이 사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언제 견해가 바뀔지도 모르는 특정 개인에 의해 유권 해석되고 결정된다면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 곧 법이 될 것이며(→종교인은 언제나 이를 경계하고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것 같음),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고 쉽게 불목하여 묵시적이든 명시적이든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 있게 될 것이며 결국엔 분열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유지하고 퍼뜨려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복음화?) 자신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는 사람을 모으고 세를 불려 주입시키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비방 공격하게 되어 이로써 밑도 끝도 없는 갈등과 싸움 속으로 신앙이 말려들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때그때의 개인의 생각과 말이 법이 되는 국가는 거의 없다. 일부 종교만 이런 행태를 보이며 대체 어떻게 세뇌된 것인지(사실 성경은 서로 모순되는 이론의 산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누구든 속아넘어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설사 박사학위 논문을 쓸 정도로 나름대로 연구한 사람이더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자신이 처한 사정은 살펴보지 못하고 비방하느라 입에 거품(유다 13)을 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진노 그 자체를 바라보는 듯하다. "그들은 본디 잡혀서 멸망하게 마련인 이성 없는 짐승들과 같아서 알지도 못하면서 모독하고 있으니 짐승들이 멸망하는 것처럼 멸망할 것입니다."(2베드 2,12)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고 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주장만 옳다고 믿고 논쟁만 한다면 그 공동체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파멸하고야 만다는 뜻일 겁니다. 다행히 그 배가 산에 올라갔기에 망정이지 망망한 대해에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면 그 배는 결국 물 속에 가라앉고야 말았을 것이며 만일 모두가 한 마음으로 뜻을 합하여 노를 저었었다면 신속히 목표에 도달할 수 도 있었을 그 배는 파손되고 그 배에 탄 많은 사공들 역시 물에 빠져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항해하는데 한갓 나침반과 조타의 방향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논쟁만을 일삼고 일정한 뱃길을 잡지 못한다면 그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겠습니까? 흔히 우리는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써 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배를 타고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인생의 대 항로에서 그 선원들이 항로에 관한 논쟁만을 일삼는다면 그 위험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생사가 달린 구원의 항해에는 반드시 권위자의 절대 무오無誤한 조종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성난 파도와 풍랑 속의 승객들일수록 그 조타수의 권위 있는 말 한마디에 전 존재를 내 맞길 수 있는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구원의 길잡이인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는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로마15,4)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 교회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우리 피조물의 임의 해석은 절대 금물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서든지 신약시대에서든지 간에 신자들은 교회의 산 권위의 지도를 받도록 마련되었고 결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의 자유 해석으로 행동하지는 못하도록 되었었습니다. 세상에는 유다인보다 더 성서를 존중히 여기는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성서는 그들의 일대 영예이며 평화 시에는 성서를 국가로 삼았고 재난과 유배를 당할 때에는 성서를 묵상과 위안의 글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논쟁이 일어날 때에는 그들은 아예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사견으로 그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고 대제관과 중의소衆議所에서 이를 결정하며 만일 대제관과 판관들의 판결에 불복하는 자는 사형이라는 엄벌을 받았습니다(신명 17,8-12). 하느님께서 유다 민족의 종교 쟁의爭議를 처리할 때 법률의 조문에 따라 하지 않고 당신의 특정 기관인 종교 법정의 산 권위로서 하였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말라 2,7).
신약시대에 들어와 초기로부터 1500여 년까지는 이 같은 전통이 이어져 우리 구원의 지침으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소위 몇몇 종교 개혁가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자기 마음대로 임의 해석(→신앙과 윤리 등에 관한 보편교회의 유권적 해석에 어긋나는 자의적 해석)함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즉 그들은 교회의 무류無謬 판단을 무시하고 성서 자유해석으로 최고 지침을 삼는 그때부터 그들은 성서의 가장 중요한 점에 있어서 서로 논쟁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성서Bible는 마침내 베이블(Babel 바벨탑)이 되었으니 노아의 자손들이 무엄하게도 높은 탑을 쌓아 하늘에 이르려다가 언어의 혼란으로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듯이 사람들을 각기 하늘나라에 인도하려다가 마침내 혼란을 일으키고 종교 분열만 심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베드로 사도 자신도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 관하여 말하기를 "바오로는 어느 편지에나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 곡해하듯이 그것을 곡해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2베드 3,16)라고 하셨고 또 다른 곳에는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2베드 1,20)의 확실한 성서 말씀을 두려움도 없이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또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마차에 앉아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을 때 그 곁에서 함께 가던 필립보가 "그 예언의 뜻을 알겠느냐"고 묻자 그는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사도 8,31)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서를 개인적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임에도 이를 교만하게도 도외시하는 처사라고 하겠습니다. 학문 조예가 깊은 4, 5세기의 교부들인 성 아우구스티노(어거스틴), 성 이냐시오, 신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 성 그레고리오 등은 성서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면서도 모두 성서의 난해함을 고백하였음에도 오늘날 적지 않은 교역자들이 얕은 성서 지식을 가지고 방자하게도 창세기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말씀을 완전 통달한 양 득의양양得意揚揚하는 일들이 많은데 이는 실로 "천사들도 밟기를 무서워하는 곳을 어리석은 자들이 뛰어든다"라는 시구詩句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세우시면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성체성사의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종교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자유해석의 초점으로 논쟁화하면서 처음에는 80여종의 해석을 덧붙이더니 나중에는 100여종이 자기들 멋대로의 해석이 나타나기에 이르렀으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는 분파에 분파를 거듭하여(파편화) 마침내는 일인 일교파一人 一敎派 상태에 이르고야 말 추세로서 이런 교파 분열은 성경 자유해석 주의를 주창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진리이시며(요한 14,6) 참으로 진리는 우리들을 자유롭게 하십니다(요한 8,32). 그러나 그 자유는 성서를 마음대로 해석하라는 자유는 아닙니다. 주님이 진리이신 까닭은 살아 계신 말씀인 그분이야말로 모든 신적 계시의 원천이요 봉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주의적, 합리적 해석이라는 것으로 그분의 신적 말씀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려고 한다는 명분으로 말씀의 모든 초자연적 내용을 삭제하거나 회피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교회 전반에 걸쳐 오류가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의 확산은 곧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신앙의 상실, 즉 배교로 이어지도록 유혹합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사도단에 있었던 악의 유혹, 즉 배반의 유혹과 같은 것입니다. 또 이것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우상, 곧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교회를 세움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파괴하는 임무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 저더러 이 세상에서 겁없이 살아가는 사람 세 명만 꼽으라고 하시면 저는 다음과 같은 사람을 추천하겠습니다. 첫째, 평생 책 한 권을 읽고서는 세상의 진리를 모두 터득한 양 떠드는 사람. 둘째, 독서에 관계없이 무조건 자기주장만 옳다고 하는 안하무인격인 사람. 셋째, 성서를 (보편교회의 유권적 해석과 다르게 임의적으로) 자유해석하면서 자기감정에 자기가 도취되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떠드는 풋내기 설교가 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사람이 바로 세 번째 사람입니다. 그 같은 사람들은 각기 새로운 교파 창립의 천명天命을 받은 양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길 교조가 되어 보려 날뛰면서 영구불변의 성서로 변천 무상한 자기 교설을 변호해 보려고 무던히 애쓰기도 합니다.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시는 주님의 요청을 거부하는 밀밭의 가라지 비유(마태 13,36-43)를 연상케 할 뿐입니다. 보십시오. 할머니, 할머니께서 계실 때는 대체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그저 비슷비슷한 교파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교파에서는 하느님께는 일위一位밖에 없다고 성서를 인용하여 증명하는가 하면, 다른 교파에서는 똑같은 성서를 인용하여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고 다만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교파는 그 성서를 인용하여 삼위三位를 주장하고, 또 다른 교파는 똑같은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파는 성사聖事Sacraments를 원래 없는 것이라고 성서로 변증하고 어떤 교파는 성사란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합니다. 또 어떤 교회 목사들은 강단에서 대담하게도 몇 년 몇 월 몇 일에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세계가 멸망한다고 예언하기도 하고 막상 그날이 되어 아무 이상이 없으면 실례의 말이지만 뻔뻔스럽게도 하는 말이 그 날짜가 연기되었다고도 합니다. 어떤 교파는 일부다처주의를 주장하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쳐 교회가 문 닫을 지경이 되자 하느님이 다시 수정하여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소위 성령의 빛을 받아 진리를 가르친다는 목사님들의 성경해석 태도가 이렇게도 천차만별이며 심한 경우에는 논쟁의 대립이 정도를 지나쳐 같은 예배당 안에서 서로 격투까지 벌어지는 실례를 우리는 가끔 보고 듣고 있으며 이 손자도 우리 집에서 시작하여 큰 교회로 발전한 저의 어머니가 집사였던 교회에서도 직접 보고 그로인해 한때 교회에 대한 회의를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래서야 양떼는 누구를 믿고 따라야 옳단 말입니까? 하는 수 없이 신자도 역시 자기 의견과 비슷한 어느 하나를 골라잡게 될 것인 바, 소경이 문고리 잡기가 그리 쉬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각자를 비추어 그 참뜻을 잘 알아듣게 해주신다고 하면서 성서 자유 해석을 성령을 통해 합리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각 사람의 관계는 일대일의 관계이며 하느님과의 만남은 개별적인 것은 틀림없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심도 사실입니다(1고린 12,11). 그러나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7). 하느님께서 향하는 방법은 각각 다를 수 있다 하여도 구원은 공동체적입니다. 즉 진리의 성령은 교회에 공공적公共的으로 허락되셨지 결코 각 개인이 주관적 감정이나 흥취興趣적으로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교파가 '주님은 사람 모양만을 한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아프지 않았다고 하면서 오직 우리는 부활하신 하나님만 믿기 때문에 우리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못 박히신 예수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성령이 그들 각자를 비추어 그 참뜻을 잘 알아듣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사람들(1요한 4,3)이라고 까지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성령이 각 개인을 비추시어 성서를 잘 알아듣게 하신다 함은 결국 성서 자유해석을 구실로 수많은 오류와 이단발생 책임을 성령께 돌리려는 독신瀆神적, 신성모독神聖冒瀆적 망설이며 진리의 성령(요한 14,16)께 이보다 더 큰 모욕이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한 나라의 법률도 개인적 해석을 금하고 그 해석은 사법 당국에 위임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구원의 생사가 달린 (신앙이나 윤리 등에 관한) 성경의 해석과 교회의 통리通理를 어찌 각 개인의 의견에 맡겨 버리겠습니까? 성서는 인간의 신앙과 행동을 다스리는 하나의 규범이므로 고정성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미터기도 그 고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터원기를 현재 파리 박물관에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보관하고 있으며 온도의 영향으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백금으로 만들고 그 단면을 ×자형으로 하였습니다. 만일 누구나 마음대로 늘이고 줄일 수 있도록 고무줄로 만든 미터기가 있다면 이는 공공연한 도량기는 될 수 없고 오직 교활한 장사꾼의 손에나 있을 법한 부정한 기구일 것입니다. 하물며 신앙과 도덕의 규범인 성서가 시중에서 통용되는 미터기만한 가치와 중요성도 없고 특히 고정성도 없이 자기 멋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여 고무줄로 된 부정확한 기구같이 줄이고 늘이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대 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저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2고린 2,17)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즉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자기의 편의에 따라 제 마음대로 해석하는 소위 성경 자유해석가들 입니다. 성경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제 마음대로 설교함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치명상입니다. "우리의 지력과 자유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2고린 10,5) 성경이지만 한번 그것이 자유해석의 포로가 되는 날엔 무제한의 자유와 자유, 의견과 의견이 다투어 일어나 드디어 아전인수의 해석을 제멋대로 붙이게 됩니다. 교회 역사의 사실로 보아 성서 자유해석 자가 삼위일체를 반대하고 차등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자유해석이 사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율법주의) 교회를 부정하고 칠성사까지 부인하면서 선행무용론(→오직 믿음 Sola Fide, 여기서 믿음은 앞서 말한 대로 마음속의 신념과 확신만을 말함)까지 제창하였습니다. 이제는 연옥뿐 아니라 어떤 교파는 천국과 지옥 심지어 영혼까지 부인합니다. 이 모든 그릇된 해석은 오로지 성경 자유해석이 낳은 괴물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하려는 그 열의는 가상하다고 할 수 있으나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올바르게 전해야지 각자 자기의 뜻에 맞게만 전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유해석 금지, 즉 유권적 해석 원칙에 대해 신앙인은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의미인지 알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어둠 그 자체임. 하느님의 말씀을 더 정확히 알아들으려는 노력은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난해한 구절의 이해를 도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성경에 더욱 쉽게 접근하고 더욱 온전하게 자양분을 이끌어 내기 위해선 교회에서 인가된 주석서를 옆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주해서는 하느님 말씀에 더욱 맛을 느끼게 해주고 또 이를 잃지 않게 지켜준다)
할머니, 성서의 자유해석 못지않게 성서 원문의 잘못된 번역도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한 형제로서 아직도 성서 자유해석을 마음껏 즐기는 목회자 분들께 이렇게 호소하고 싶습니다. 제발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주십시오. 복음이 목회자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굴절되어 나오지 않도록 문자 그대로 우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 암흑시대에서는 성서 특히 예수님의 복음만이 우리를 비추는 빛이 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성서 해석으로 예수님의 복음이 함부로 난도질당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는 너무나 극심한 오류로 만연되어 있기에 복음은 더욱 문자 그대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제발 우리에게 더 이상 혼란을 주지 말아 주십시오. 하느님의 진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올바른 빛 안에서 진리를 보려면 가난해져야 하고, 진리를 온전하게 보존하려면 단순해져야 하며, 진리를 본연의 광채대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려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고 가난하고 단순한 목동들이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던(루가 2,8-20) 것은 천사들이 그들에게만 찾아왔기 때문이며, 여러분이 따르는 착한 목자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마태 11,29)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퍽 어려운 일이겠으나 주님의 조력은총에 힘입어 작은 사람이 되고 가난하고 단순하고 겸손한 분들이 되어 주십시오. 때문에 돈을 써가며까지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특히 금전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또는 교만하게 된 분들일수록 저에게 항의하지 마십시오. 그러실 경우 제 입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마태 7,6)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대답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까 매우 우려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저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한국의 공동번역 성서에 관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이후 자모이신 성 교회에서는 가톨릭과 그 외 모든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해 성서를 공동으로 번역하여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이를 위해 1968년에 세계 성서공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치 사무국은 제2경전을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번역에 수록하도록 합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1968년 1월 성서번역 공동위원회가 조직되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이 모여 1969년1월부터 번역에 착수하여 1971년 4월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대한성서공회의 발행으로 간행되었고 이어 1977년 4월 부활 대축일을 기해 공동번역 성서가 간행되었습니다.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번역을 위해 천주교의 천주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을 표준말에 의거한 하느님으로 분류하였고 야훼와 여호와는 현대의 성서신학계에서 따르고 있는 '야훼'라는 명칭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개신교 관주성경(영어, 한자, 일본어 성서를 구한말식 맞춤법을 따른 번역본)의 영어식 지명과 인명 표기로 인해 원 지명과 다른 문제(예:다마스커스 DAMASCUS)는 원어 표기와 사전 및 교과서의 명칭을 따르기로 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위해 획기적인 시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급진주의적인 개신교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쳐(하나님, 여호와 호칭 및 제2경전을 받아들이는 문제 등) 개신교에서는 오늘날까지 이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대한성서공회에서도 공동번역을 발간하면서 천주교용과 개신교용으로 구분하여 개신교용에는 제2경전을 위경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 개신교내의 일치가 확고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파 및 교단의 분열은 날로 심화되고 있으며 각 교단간 문제도 매우 심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공동번역에 관하여 개신교 내에서는 참으로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감리교의 한 장로라는 사람이 교계 신문에 광고를 내기를 "마리아를 숭배하는 천주교 집단과 어울려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꾸는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성경 공동번역에 참여한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라"는 끔찍한 내용을 게재揭載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사람은 신은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앗쌀라 무알라이꿈'하는 기도와 함께 검지로 하나를 가리키는, 즉 유일신 알라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야곱이 부인4명을 거느렸다고 하여 자기들도 4명의 부인을 합법화하는) 이슬람교도도 하지 못할 이야기를 이 장로는 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란 신神은 비록 광적으로 믿는지는 몰라도 전 인류를 구속하시려고 신神이 하늘에서 인간이 되어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는 분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이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나 하느님 이름 때문에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발췌자 개인적으로는 어떤 어휘든 하느님에 대해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으므로, 어느 것이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언행에 따라 God도 되고 사탄도 될 거라고 본다)
할머니 저는 개신교에서 크게 잘못된 교육을 받은 게 한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기보다 나를 벌하시는 하나님, 내가 잘못한 것을 기다렸다가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등으로 오인하도록 두 분 할머니들로부터 강요되어 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아래 각주 참고). 십일조를 잘 안 내도 벌, 월요일이 시험날인데도 주일에 시험 공부하면 또 벌, 주일에 장사하면 그 가게는 꼭 망하고,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흉을 보면 벌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홍수로 쓸어버리시는 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는 분, 온갖 재앙을 내리시는 분 등 그야말로 진노하시는 하나님만을 강조하셨던 게 사실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두려우시고 정의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자비하신 분"(이사 42,3)으로서 천상의 영복을 마다하시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 인간과 같이 사시려고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시었으며 도리어 피조물인 그 인간들로부터 수많은 능욕과 고통을 당하시다가 그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당신의 목숨까지 내 놓으시면서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가 23,34)라고 기도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한결같으신 사랑을 저에게 강조하고 교육시키셨어야 했었습니다.
* 주. 이에 대해서는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류상태 목사님, 삼인)라는 책에 실린 내용을 인용합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시장바닥의 상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도쟁탈전, 치부의 수단으로 전락한 십일조의 강요, 그것도 모자라서 헌금하신 사람들의 명단까지 주보에 올리는 파렴치한 행위들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는 죄인을 양산하는 위선과 기만의 장소이다. 목이 터져라 회개하고 통곡하는 통성기도는 위선과 기만의 연습시간이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죄의식만 심어주고 있다. 그 원죄론은 결국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회자의 협박 무기로 전락하였다. 개인 기업을 상속시키듯 교회의 목회직을 자기의 왕국처럼 혈통으로 세습시키는 자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몇 퍼센트 정도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일부 개신교는 이성 없는 짐승처럼 광신적 오직 믿음뿐 아니라 이러한 형벌을 강조하여 십일조 등에 있어 자신의 말에 대한 맹목적 순종을 은연중에 강요해온 것으로 보인다. 오직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이라면서 이런 행위는 왜 강요하는지, 오직 믿음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면 어찌하여 십일조는 벌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 경우엔 자유로운 행실에 따라 믿음을 판단하기 때문인가? 본인은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각 개인에 대해 적합한 방식으로 각기 다른 영역에서 부르시고 이끄시어 이에 응답하는 개인과의 개별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느끼거나 체험을 하면서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지 한 순간 기만적으로 정신질환자처럼 맹신 광신했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자신들의 공동체 내로 끌어들이거나 남에게 산상설교 등의 윤리덕목을 가르치려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이 먼저 바로 그 가르침대로(특히 요한 13,34 등의 사랑의 계명)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선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고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고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요한 13,35; 15,8 등)
다시 돌아가서, 그 장로는 분명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그 입으로 남들을 저주하였고 그것도 광고매체를 통해 공개적으로 행한 것을 보면 사랑보다는 미움을 더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장로나 개신교의 극소수의 지나친 열성자들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저주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저주한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냉대하는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시면서 다른 야고보 사도를 통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런 제안을 한 야고보 사도와 그 형제를 꾸짖으신 분(루가 9,54-55)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같은 장로는 그가 다니는 교회에 기여를 많이 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장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같은 사람일수록 고맙게도 우리나라에 감리교를 맨 처음으로 전한 미국 감리교회(연합)에는 장로란 직분이 없음을 아마도 알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장로뿐 아니라 권사도 없습니다. 어떻든 한국에서 장로라고 하면 교회의 한 원로요 지도자로서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여기 비록 잘못 번역된 한국의 개신교 성경에도 장로는 존경받아야 한다고 하느님의 말씀인 양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1디모 1,17) 이와 같은 개신교 성경에 나타나 있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장로는 존경받기는 고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사도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먼저 묵상해 보아야 할 것 갔습니다. 즉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사랑)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라 1,9)라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 장로 같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일치는 고사하고 종교분쟁 또는 심하면 종교전쟁까지 일어나게 할 사람들이 많아진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또 이 같은 사람이 한사람이라면 아예 할머니께 말씀드리지도 않았겠으나 문제는 이런 장로, 권사, 집사들이 지금의 개신교에는 비교적 많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엔 이 손자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크리스찬 Christian)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명칭은 세상 어떤 명칭보다 더욱 고귀한 것이며 이 명칭에는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허명虛名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가장 엄숙한 의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찬이란 말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 받들어 따르고 그분의 덕을 본받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을 지녔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닮은 점이 없다면 이런 큰 모순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믿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 모두들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나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오직 한국어의 보통명사일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하느님은 수없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도 많습니다. 요사이는 돈과 권력이 그리고 쾌락이 곧 하나님이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하느님은 실제로 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다만 보이는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신 성부 하느님을 믿습니다. 또한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제3위 성령님을 믿습니다(마태 3,16-17; 마르코 1,9; 루가 3,22).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삼위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크리스찬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습니다. 굳이 하나님과 하느님 중에 어느 한 분만을 꼭 믿어야 한다면 "나는 곧 나다 I Am that is who I am"(출애 3,14)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분만을 믿겠습니다. 한마디 부연한다면 요사이 세계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하느님을 야훼로 쓰고 있으며 지금도 유대인들은 학자에 따라 야훼라고 쓰든지 또는 여호와라고 쓰든지 간에 글은 그렇게 쓰지만 거룩하신 그분의 이름은 부를 때에는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무식이 곧 용감이라고 유독 한국에서만 하나님 하느님하고 싸우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어에도 다만 GOD이라는 한 단어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종교인들은 자기가 믿는 곳으로 모든 이가 와주기를 바라고 자기들만이 예수님 편이라고 속단하는 수가 많습니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은 무조건 상대편은 마귀나 또는 이단자로서 지옥 간다는 속단과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의 인격마저 모독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오히려 예수님을 슬프게 하여 드릴뿐입니다. 누가 누구를 보고 이단이라고 합니까? 심지어 심한 경우에는 가톨릭에도 성경과 찬송가(성가)가 있느냐고 질문하는데 속된말로 삶은 소머리도 웃을 지경입니다. 이제는 문익환 목사님도 가시고 저의 개신교 시절 덕망 높으신 한경직 목사님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할머니 시대의 손양원 목사님도 가고 안 계십니다. 그런데 그 훌륭하신 목사님들의 뒤를 이어 묵묵히 일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는데도 요사이는 목사님들에 대한 인식과 존경심도 점차 사라지는 듯하여 안타까울 뿐입니다. 특히 모든 것을 숫자적으로 계산하는 풍조에서는 목회자의 인격이 들어설 공간이 없음도 문제인 것 같구요.…여기 유수한 개신교 잡지에 공개적으로 지적한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무임목사(실업 상태에 있는 목사) 수는 약 7000여명으로 증가일로에 있으며 신학교는 총 270개로 그 중 220개는 무인가 신학교이며 50개만이 인가교이다. 매년 배출되는 졸업생은 6500명이나 5000명은 무인가 신학교 출신이다. 이들은 정작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시킬 교육 목사와 교육 부서를 인도할 만한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분들이 비일비재하다.
- 무인가교는 대부분 강의실과 도서관이 아주 빈약하며 도서관이 아예 없는 학교도 많다.
- 한국교회 위기는 세속적인 스타성 목사들의 맹활약이다. 이러다 보니 연합 단체는 물론 개혁 단체들조차 공명심으로 행동한다(조직에는 회장급만도 20여명이고 부흥사 협의회는 협동 총무만도 200여명 가깝다).
- 세미나는 부흥을 갈망하는 목사들의 요령 터득의 현장이며 돈과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벳세다 들판의 떡을 위해 모여든 청중이다.
할머니! 여기 재미 동포 사업가 중 한 분이 개신교를 떠나며 개신교 잡지에 긴급 투고한 원고를 극히 일부 발췌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이 투고는 개신교가 반성해야겠다는 취지에서 자체 공개한 것이라고 보여지지만 그 사업가가 어디로 갔다는(개종) 말은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분의 문맥으로 보아 가톨릭으로 회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복음정신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평신도일수록 완전한 진리에 접하면 금방이라도 회심할 수 있고 직분이 있거나 그 직분도 차츰 올라갈수록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회심하기 어려운 것이 상례이나 기묘한 방법으로 회심하신 분들을 많이 보아왔고 더욱이 강렬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십자가를 지고 응답하신 목사님들은 그야말로 자기 육신의 생명 줄인 그 모두를 버리고 오직 영원한 새 생명을 찾으시려는 노력으로 회심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 나는 왜 개신교를 떠났는가(왜곡된 교회의 모습을 보며) - 재미사업가 황OO, 기독교 사상 1999년 11월-12월호
-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왜곡되어 가고 있다. 기복신앙은 아주 일반화되어 가고 있고 교회의 기업화는 이미 그 한계를 넘었다는 느낌이다. 교세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마치 제동장치가 고장난 자동차같이 달리기만 한다. 어떤 행위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도 나을 것이 없으며 솔직히 말해서 어떤 경우는 교회의 운명이 기업보다 훨씬 비리를 많이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단의 감투에 수억원의 돈을 쓰며 공공연히 교회를 매매하기도 하면서 목사들은 이것도 모두 전도를 위한 것이니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항 근처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한국 모 교단의 선교대회가 열린 적이 있다. 한국 재벌그룹의 간부도 여러 해 근무했던 나지만 대회 규모에 너무 놀랐다. 호텔 1층에 있는 연회실을 여러 개 터서 족히 1천명 이상이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연회장에서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니 수십만 달러가 소요됐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대회라면 선교 추진 본부가 있는 한국에서 개최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 S교회 담임 목사였던 A목사는 80년대초 C장로에게서 $100.000을 무이자로 빌려 집을 샀다. 그 집의 은행 융자금은 주택 수당으로 교회가 지급했고 얼마 안 가서 그 집은 목사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학교 교사가 학부형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 집을 샀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수년 전 자민련의 이모의원은 정덕진씨에게 무이자로 수억을 빌려 썼다가 실형을 살고 나왔다. 공직자에게는 뇌물이 되는 일이 어떻게 목사에게는 극히 칭찬받을 일이 되는가?
- 성경 말씀이나 복음을 목사들 편한 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붙이니 신앙은 자연적으로 왜곡된다.
- 한국 사람들은 신분의식이 매우 강하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도 명함만은 커야 한다. 교회에 와서도 집사니 권사니 장로니 하는 '계급'을 받는 것을 좋아하며 목사들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이를 적극 활용하여 '진급 심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 교포들은 별달리 사회적 지위가 없다 보니 교회의 직분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L씨는 S교회로 온지 1년만에 부부가 다 권사로 진급했고 K장로는 S교회에 온지 1년만에 다른 사람은 20년 다녀도 되기 힘든 장로를 월 $4000 정도의 헌금으로 간단히 진급했다.
- 감사 헌금을 위해서는 추수감사절과 심지어 맥추 감사절도 있다. 내 친구 K목사가 미국 유학 후 귀국 준비하며 한말에 의하면 "분당에서 교회를 하는 친구가 교인이 70명 정도 강단과 의자, 전세금 등을 합하여 그 교회를 약 8000만원에 팔려고 하며 그 돈으로 유학을 하려 한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교회매매이다. 한국에서 교회매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 오늘날의 한국개신교는 중병에 걸린 환자 같다. 너무나 깊이 병이 들어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정도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교회가 기업화되고 타락했다면 모든 교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싫든 좋든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들이다. 때문에 그 주된 책임은 곧 목사들에게 있다. 오늘날 골목골목마다 세워진 개신교가 진정 올바른 복음 위에 기초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 우리 주위의 목사 자제로서 유학 온 사람들을 많이 본다. 목사의 자제라고 유학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70-80년대 초까지 유학이란 여간한 경제력 없이는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러나 어떻게 목사의 봉급으로 유학을 시킬 수 있는가? 만일 공무원이 그랬다면 그 재산은 의심해 볼 것이다.
- 모 목사는 아들이 이곳 북가주에서 사업하기 때문에 자주 온다. 이분은 아들을 유학시켰을 뿐 아니라 사업자금까지 대 준 것이다. 언젠가 설교에서 아들의 사업자금을 충분히 대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는 목회자에 대해 더 좋은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십일조는 최소의 의무이고 그 이상 소득의 20% 또는 30% 정도는 헌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아들 사업 자금을 위해서 또 한국에서는 상류층 운동인 골프도 즐기기 위해서 평신도로부터 20-30%의 헌금을 거둔다면 한참 지나친 일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나의 상관이었던 B전무는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가 한탄하는 것은 대 그룹의 전무로서 아버지를 노회장 한번 시켜 드릴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1억 5천만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수원의 25평 아파트를 1600만원에 샀으니까 대략 이 아파트 값 9채 값이었다(1982년도). 이 목사는 B전무가 사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회장이 되었다. 이 목사는 그래도 잘난 아들 덕분에 노회장이 되었지만 다른 노회장들이나 감독들은 모두 잘난 아들 덕분에 출세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할머니! 더 이상은 누워서 침 뱉기라고 생각하여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그러나 꼭 한 말씀은 목회자들에게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마태 7,22)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 7,2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당신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시지 않으셨는지요? 한번쯤은 꼭 바로 당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야고 4,14)
할머니, 여기 물질을 초월한 주님의 사랑만을 전하다 주님 품에 안긴 한 가톨릭 사제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벨지움의 트레머루 태생인 성 다미안 신부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브렌느러콩트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60년 예수와 마리아 성심회(The Father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 'The pie pus Fathers')에 입회하여 다미안이란 수도명을 받고 호놀루루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1864). 그 후 그는 9년 동안 푸노와 코알라 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1873년 몰로카이 나환자촌에 파견을 자원하여 여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주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행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이 나환자수용소 몰로카이 섬에 갔을 때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서로 싸우고 온통 절망에 빠져 자살하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코웃음만 쳤습니다. "흥, 하느님 사랑이 다 무슨 헛개비 소리인가? 정말 사랑하신다면 우리를 이토록 썩어 문드러지게 내버려둔다는 말인가? 그따위 사랑은 당신네처럼 건강한 자들만이 읊어 대는 사치한 잠꼬대야!!"라고 빈정대며 욕설을 퍼부을 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다미안 신부님은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라고요. 과연 그 기도는 응답이 되어 신부님도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신부님은 강론(설교)때마다 "동료 나환자 여러분!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나환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내 몸은 비록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진솔한 사랑에 감복되어 그 섬은 사랑과 평화의 섬으로 변했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성덕과 애덕은 수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던 손양원 목사님은 두 분 할머니 모두 돌아가신 이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동족상잔이라는 비극 속에서 그 목사님의 두 아들(동신, 동인) 모두를 잃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의 아들이란 이유로 어떤 청년이 잔악하게 죽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바로 그 범인을 용서하고 그분의 양아들로(안재선 → 손재선으로)까지 삼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라고 하신 예수님을 그대로 따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의 개신교회 내에도 이 같으신 목사님들이 분명 많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일부 빗나간 목회자들과 양적量的 팽창에만 집중하는 소위 스타성 목사들의 그늘에 짓눌려 때로는 질식 상태에까지 이르곤 합니다. 그리고 더욱 한심한 것은 열심하고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조차 설교를 위해 손 목사님의 자료를 옮겨 적어 사용한 후에는 그 양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또는 그 자손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조차 태반이 모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교계에도 너무나 삭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 손자는 가끔 철야기도를 통하여 이분들을 위해서도 특별히 기도합니다.
할머니! 여기 초대 박해시대 때 순교하신 성 뽈리까르보 주교 순교자에 관한 스미르나 교회의 편지를 공개해야할 것 같습니다. 성 뽈리 까르보는 사도들의 제자였고 스미르나의 주교였으며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와 함께 로마로 가서 부활축제 문제에 관하여 제11대 교황 아니체투스Anicetus와 회담도 하였습니다. 이 순교자 주교는 가톨릭 정통교리의 수호자이셨고 사탄의 맏이라 부른 마라치온니즘과 바렌티아니즘을 배격하라고 역설했습니다. 또 그는 이교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155년경 스미르나시내의 경기장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다음 글은 순교현장을 목격한 어느 신도가 스미르나 교회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의 둘레에는 화형에 쓰일 물건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이 그에게 쇠못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려 했을 때 뽈리까르보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로 두시오. 나에게 불을 견딜힘을 주시는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더라도 장작더미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오. 그래서 그들은 못 박지는 않고 묶어놓기만 했습니다. 이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시여,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당신을 알게 된 사랑하올 복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여, 천사들과 대천사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당신 면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의인들의 하느님이시여,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께서는 이날과 이 시간에 제가 순교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나누고 성령을 통하여 불사불멸 안에서 육신과 영혼의 새 생명에로 다시 일어나도록 마련하셨나이다. 성실하시고 거짓 없으신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마련하시고 저에게 이미 보여주셨으며 이제 이루어 주신대로 오늘 당신의 순교자들과 함께 살찌고 마음에 드는 제물로서 저를 받아주소서. 그래서 이 모든 것 때문에 영원하신 천상의 대사제이신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찬미하고 찬송하며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더불어 당신께 이제와 미래에 영원토록 영광이 있으소서. 아멘." 그가 아멘이라고 말하며 기도를 마쳤을 때 사형집행인들은 불을 붙였습니다. 거센 불길이 타오를 때 우리는 한 기적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그 기적을 보는 것이 허락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은 바람을 가득 담은 배의 돛처럼 불가마의 모양을 띠고는 그 순교자의 몸을 감싸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몸은 타고 있는 육신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구워지고 있는 빵이나 또는 용광로에서 제련되고 있는 금이나 은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유향 냄새나 어떤 귀한 향료 같은 향기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4)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야 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혹 위험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능력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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