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교회사1교실

[스크랩] 수도원 규칙을 만든 베네딕트

류성련 2014. 5. 6. 06:32

수도원 규칙을 만든 베네딕트

 

 

 

동굴서 철저한 은둔생활
수도공동체 규칙 만들어

 

『하나님의 사람 베네딕트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그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직접 생활하셨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교황 그레고리1세  대화집 중).
여기서 언급된 규칙서, 즉 「베네딕트 규칙서」는 12세기까지 서방교회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지켜졌던 수도승 생활의 규칙서 이었으며 이후에도 서방 수도생활의 기초, 유럽 수도원 생활의 규범으로 자리 잡으며 베네딕트(480?∼547?)를 사부로 여기는 수많은 수도승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후 15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 「기술자 건축가 개간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베네딕트의 면모는 바로 이 규칙서를 따르는 제자들이 역사 안에서 이뤄놓은 업적을 통해서 더욱 넓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네딕트의 생애는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대화집 제2권에 수록된 전기를 통해 참고할 수 있는데 교황은 이 책을 통해 베네딕트의 출생부터 중요한 사건들과 배경, 그리고 죽음까지 전 생애를 묘사했다. 그는 규칙서를 직접 읽고 이를 토대로 베네딕트의 전기를 교훈적 형태로 재구성 한 것으로 풀이된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베네딕트는 480년경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나 547년 몬테카시노에서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최근의 연구자들은 베네딕트의 생애가 490년에 시작해서 560년에 마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고 만닝(E.Manning)과 같은 학자는 몇몇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575년에 사망했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그의 성장 배경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 출신인 것으로 알려진다. 청년기에 유학차 로마로 갔던 베네딕트는 당시 로마 상황이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음을 보고 회의를 느껴 유모와 함께 엔피데(Enfide) 지방에 있는 사비나 산들로 옮겼다.
이후 유모와의 관계도 끊고 수비아코의 한 동굴로 들어가 3년 동안 은수생활에 몰입했던 베네딕트는 이 기간 동안 일체 외부와의 관계를 끊은 채 음식마저도 바구니에 줄을 달아 빵을 전해 받는 등 철저하게 기도에 몰입하는 생활을 했다.
이때 베네딕트가 머물렀던 동굴은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라고 불리는데 가파른 절벽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이집트 수도자들이 사막에서 살아간 삶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자신의 영혼과 대면하고 악과 어둠의 세력에 대적해 나갔던 베네딕트는 그 지역에서 목축 생활을 하며 목동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다.
부활 축일을 잊을 만큼 기도에 몰입하는 수도 생활 속에서 베네딕트는 욕정과의 투쟁을 겪으며 가시밭을 맨몸으로 뒹구는 등의 투쟁을 통해 욕정을 제어하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그 같은 베네딕트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돼 비코바로(Vicovaro)의 한 수도원 원장으로 추대되는 결과를 낳았으나 베네딕트를 시기하는 이들의 음모로 인해 그는 조용히 그곳을 떠나게 된다.
이에 대해 그레고리 1세 교황은「분노에서 초탈하고 높은 인내의 경지에 이른 성덕의 표현」이라고 칭송했다.
이후 베네딕트는 수비아코에 정착 다시금 수도생활에 정진했다. 이곳에서 그는 베네딕트의 성덕을 듣고 몰려온 이들을 지도하며 특별히 12명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12개의 수도 소 공동체를 만들어 수도생활을 해나갔다.
베네딕트의 명성이 퍼져 나가면서 그의 명성을 시기한 인근 본당 신부가 살인 음모를 지니고 독이 든 빵을 선물하거나 수도 공동체 해체를 위해 젊은 여인들을 수도원 담 안에 들여보내는 등의 일이 발생했는데 이때 그는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알고 몇몇 수도자만을 데리고 새로운 곳으로 향했다.
다시금 베네딕트가 자리를 잡은 곳은 바로 몬테카시노. 카지노(Cassino) 도시에 인접한 해발 519m의 산(Monte) 정상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유명한 수도원 규칙서를 저술하였고 여러 기적과 모범을 통해 동료 수도자들을 지도했으며 인근 주민들을 복음화 시켰다.
몬테카시노는 비록 세상과는 격리돼 있었으나 다른 수도원의 수도자들이나 당대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성인의 영적 가르침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자 찾아오는 자리였다.
베네딕트는 또한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회적 정치적 일에도 관여,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고통 받는 이들과 기근으로 굶주리는 이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레고리 교황은 성인이 행한 것으로 간주한 많은 종류의 기적들을 서술하고 또한 그의 누이동생 스콜라 스티카의 기적도 언급하고 있는데 스콜라 스티카는 그의 내적 동반자이자 자매로 등장, 성인을 인간 존재의 또 하나의 새로운 측면으로 인도해 가는 역할을 한다.
베네딕트는 생전에 스콜라 스티카와 카푸아의 주교 제르마노의 죽음을 예견하는 환시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성덕의 높은 경지에 이른 베네딕트의 완성, 즉 영광스러운 죽음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기도하고 일하라’ 정신 강조
순명 침묵 겸손을 기본 덕으로
기도 독서 노동으로 일과 구성

유럽 수도원 생활의 규범이 되었던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성인의 유일한 저서인데 정확한 저술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생애 후반기(530∼540)에 마무리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에 관한 이론 뿐 아니라 비코바로(Vicobaro), 수비아코(Subiaco), 몬테카시노(Monte Casino)에서의 수도 경험과 체험들이 녹아있다는 면에서 이론과 규율이 잘 조화돼 있으며 또한 수도 생활에 요구되는 핵심 사항들이 체계적으로 서술돼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 베네딕트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그분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직접 생활하셨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대화집」에서 베네딕트 규칙서에 관한 내용을 이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여러 수도 규칙들이 있었던 상황에서 베네딕트 규칙서가 명성을 지니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내용적인 면에서 우월성을 인정받은 것과 함께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베네딕트를 서방 교회의 가장 뛰어난 수도승으로 소개한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 같은 배경에 앞서 베네딕트 규칙서가 베네딕트 수도회 담을 넘어 인근 다른 수도원들에 퍼져 가게 된 것은 그만큼 성인의 사상과 영성이 복음의 정신을 따르고 있음을 수도자들이 공감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갈리아 남부 지역에서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지역으로 퍼져 독일에 전해졌던 규칙서는 카롤링 개혁 이후 중세 모든 수도원들이 베네딕트 수도 규칙을 따를 만큼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곧 베네딕트 회원이 되는 것을 의미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베네딕트 규칙서는 머리말 부분의 「수도이상」이나 71∼72장의 「형제적 사랑」에 관해 서술한 내용 등을 통해 성인의 영성과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는 면에서도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베네딕트는 여기서 윤리적인 영성을 설파하는 것만이 아닌, 초기 수도회 정신을 이어받아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는데 모든 영적 행위들의 최종 관건은 하느님을 찾는 것, 종교적 그리움을 채우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학자들은 성인의 또 다른 영성을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Menschenfreundlich keit)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규칙서 전면에 깔려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신학자 요셉 봐이스마이어는 『사람이 자신의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 그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고 유지해 나가는 것, 자신의 능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알고 자신과 함께 있는 것 등이 수도 규칙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성인은 규칙서에서 「수도승」(monacus)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으로 칭했으며 수도 생활의 기본적인 덕을 순명과 침묵과 겸손으로 제시했다.
예루살렘의 초대 공동체 생활에서 수도 생활의 이상을 찾았던 베네딕트는 수도자의 일과를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구성하였고 성서 독서를 수도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규정, 공동 기도와 함께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을 이루는 기초로 설명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의 정신은 기도와 노동의 조화를 꾀했던 성인의 정신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베네딕트회 회원들은 그 같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 정신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학교를 세우며 서방 세계 안에서 영적 문화적 종교적 삶의 중심을 이뤄갈 수 있었다.
수도 서원 부분의 「정주」와 「수도승다운 생활」에 대한 개념은 베네딕트가 처음 도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정주 서원은 실제 수도원 안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는 외적인 정주의 의미도 있지만 하느님을 향해 항구히 정진해야 한다는 내적 정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형제적 공동체와 관련해서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은 공기와 같이 중요하고, 형제적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이어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표현되어야 할 것」으로 설명한다.
성인은 수도 공동체의 근본적 바탕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보았다. 형제들 간에 나누는 모든 인간적인 감정들 보다 그리스도를 더 높이 세워야 할 것으로 보았으며, 또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기초로 보았다.
이러한 베네딕트 규칙서는 현대 교회에서도 대표적인 수도 규칙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베네딕트 이후에 생겨난 서방 교회 규칙서 대부분이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베네딕트 수도회 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주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만 한편 지역 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선교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한다는 이념은 수도회의 학교 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 학문 연구를 가능하게 했고 예술 활동을 꽃피게 했기 때문이다.
발터 닉(Walter Nigg)에 따르면 베네딕트 성인은 「건설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요구 사항들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건설하려 했으며 모든 종류의 슬픔과 싸워 나갔다.
성인은 죽음을 맞기 6일전 자신의 무덤 문을 열어놓게 하고 사망 당일에는 성체를 영한 다음 두 수도자 팔에 의지해 양팔을 높이들이고 기도하는 가운데 선채로 선종했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