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리스도교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는 당시 제2의 부제(副帝)인 콘스탄씨우스 클로루스와 헬레나의 아들로 나잇수스에서 출생하였다. 청년시기를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끌레씨아누스 황제(로마 제국의 제1정제)의 궁전에서 보낸 그는 황제가 305년에 은퇴하면서 그를 부제로, 그의 부친을 제1의 정제(正帝: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리라는 기대에 어긋난 조처를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제2정제가 된 그의 아버지가 있는 골 지방(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으로 갔다.
일 년 후에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군대는 콘스탄티누스를 제2의 정제로 추대하였다.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로마 제국의 서방지역 대부분을 통치하면서 그의 세력권 확장에 노력하였다.
콘스탄틴누스와 교회정책
312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서 로마 제국의 제2의 부제인 막쎈씨우스를 이딸리아에서 몰아내고 로마를 점령하기 위해 알프스 산을 넘어 진격하였다. 로마의 티베르 강에 놓여있는 밀비우스 교(橋) 전투(312년 10월)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에 그는 전쟁의 승산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신(神)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 전투는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그리스도교 국가의 옹호자로 등장하는 요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사건은 당시대의 역사가인 락탄씨우스와 에우세비우스에 의해서 언급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전투 전에 발현(에우세비우스의 증언) 또는 꿈(락탄씨우스의 기록)에서 자신과 그의 군대가 그리스도교의 신의 가호와 구원의 표적을 받았다. 그는 태양 위로 ‘이 표시로 싸워라’는 말과 함께 십자 표시를 보았고 이 하늘에 나타난 표적을 그의 군대의 어깨에 붙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는 그가 진군(進軍)하는 데 자신감을 넣어주었고 마침내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승전(勝戰)을 그리스도의 힘과 그리스도교의 우수성의 증거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의 개종을 내적인 마음의 변화, 즉 종교적 체험의 기적적인 결과로 보기보다는 황제의 순전한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 증거로 이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재직기간(306-337) 동안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묵인하였고, 오직 임종 때 가서야 그리스도교 신도로 세례를 받은 사실을 들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의 내적 마음의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로 황제가 일신교(一神敎)적인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 정도 종교적 경험을 갖고 있어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에 대해 내적 준비를 오래 전부터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승리에서 그가 일신교로 전환한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일신교 형태의 종교 중에서 제일 순수하고 참된 것이 그리스도교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았다.
312년 말경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 대해 우호적인 조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면세특권을 부여하였고 국가의 사법권을 교회의 주교들에게 이양하였다.
313년 봄에 그는 밀라노에서 동 로마 제국의 리치누스 황제를 만나 소위 '밀라노 칙령'이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동 로마 제국의 집정관들에게 보내 그리스도교에 관용을 베풀고 다른 종교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도록 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와 성직자들에게 수많은 재산을 기증하였고(예컨대 라테란 궁전을 교황에게 기증하였음), 많은 대성전들(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예수 묘지 성당,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대성당 등)이 이 시대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교회생활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국법에 의해 주일과 교회축일을 공휴일로 정하였다.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이 제정되어 교회는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받은 막대한 토지는 대(大) 그레고리오 교황(590-604) 이후에 교황령(敎皇領)으로 조직되었고 교회에 부여된 기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안식처 역할을 하는 교회를 건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재산은 남용되는 수도 있었다.
325년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전(全)로마 제국을 통치하였고 그리스도교 역시 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보편적 그리스도교는 범세계적 로마 제국의 건설을 도울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내부의 일치는 황제에게 중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내분에 의해서 타격을 받고 분렬의 위기에 처하여 있던 그리스도의 일치를 회복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갖고 종교회의와 공의회를 소집, 주재하였고 이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는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콘스탄티누스가 주교처럼 교회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다른 종교의 예식에서 대제관으로 갖고 있던 황제의 권한을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사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인임을 숨기지 않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에 성실하였다. 그는 337년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에우세비우스(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가 아님)에게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하고 흰색의 세례복장을 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를 12사도와 같은 성인, 즉 '13번째 사도'로 추앙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등장의 종교적 의미
콘스탄티누스의 시대 전까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 금지된 종교로서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는 갑자기 호의와 헤택을 국가로부터 받으면서 특권화되는 새로운 상황에 처하였다. 이제 그리스도교적인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 제국은 호교론자 시대부터 주창되어온 국가임무를 갖게 되었다. 즉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가 그 사명인 구원의 메시지 선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길을 마련하는 과업을 맡게 된 것이다. 이 국가의 과업이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달성되었다.
이 시대에 세계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전제조건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당시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를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로서의 황제로 보았고 그와 함께 교회에 있어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교회는 국가와의 새로운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전하였고, 교리교육의 내외적 확대, 그리스도교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심, 잔존하던 이교사상과의 논쟁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달에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기회주의보다는 종교적 관심에 의해서 입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콘스탄티누스의 과격한 급진적 결정은 이교의 중심지인 로마, 아테네 등지에서 격한 논쟁을 일으켰고 비난을 받았다. 반면에 주교들은 황제의 우호적인 정책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교회법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그 시행에 있어서 국가적 차원의 보호를 받게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공의회의 결의문은 국법으로 선포되었고 이로써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우호적 태도와 행동은 국가의 교회내정간섭과 교회의 자율권상실을 초래한 황제교황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김성태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카톨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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