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부들과 사막의 교부들
바하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른다. 교부라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교부들이 성도들과 만나는 가운데 그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교회를 세워간 사람이라면, 교회와 세속을 떠나 광야에 머물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교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 사막의 교부들이다. 교부라 하면 주로 4-5세기에 활동하였으며, 사막의 교부들도 대략 이 시기에 일치한다. 사막의 교부들도 교부라는 이름을 들은 만한 사람들이었다. 때로 그들 가운데는 이단성이나 극단적 경향을 가진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교회의 청량제였고, 아타나시우스가 어려운 시기에 수도원에 피신하였던 것처럼 건전한 교회의 기풍이 때로 세속적인 세상을 떠나 순수한 모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들의 수도원이다.
세상 속의 교회를 대변하는 교부들과 그와는 대극에서 교회에 새 기풍을 이끌어오기를 원했던 그들인지라, 이들은 아주 다른 두 집단인 것 같으나, 그들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독거 수행자들은 완전히 격리된 것이 아니었고, 또 그들이 마치 불교의 선승과 같은 수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쨌든 교회과 연관을 맺고 있었고, 그들의 관심 가운데 커다란 부분이 바로 교회였다. 그래서 교부들과 사막의 교부들을 뭉뚱그려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활동과 삶의 목표이다. 그들은 이 면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교회를 교회답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막의 교부들이 원했던 것은 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교회가 보다 하나님의 뜻 가까이에 있게 하겠는가 그것이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의식이었다. 그 문제 의식에서 구원의 진리를 지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교부 및 사막의 교부들 사이의 이런 연계점에 주의하면서 우리는 영성이란 이름을 가지고 오히려 먼저 초대의 교부들을 살펴보고, 그런 교회의 토양 위에서 사막의 교부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또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미리 결어에 가까운 말을 하자면 이런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이 아무리 세속을 떠나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들이 금욕과 은둔에 개인적 취향을 가졌다 하더라도, 구세주 예수를 던져놓고 혼자서 길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아무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삶에 대한 물음이 강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당대의 교회와 연관된 것이지 단지 자신만의 실존적 물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도원을 향하여 우리는 실존적 수사를 기대하기보다는 참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은수사의 면모를 기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의 양면적 가능성을 같이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다. 열성으로 목회를 하는 것과 아주 깊숙이에서 은둔하여 기도를 하는 것은 모두 교회를 살지게 하는 행위이다. 기질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판단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양자를 같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쪽 부분은 당대의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의 길을 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초대 교회를 교회답게 이끌기 위해 예수의 구속 사역의 하나님 중심성을 극히 강조하였던 아타나시우스, 그는 참으로 당대 교부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다. 그런 아타나시우스가 사막으로 피신하였을 때, 그는 다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독거 수행을 하였던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이런 집필로 인하여 안토니우스도 널리 알려지고, 또 수많은 은수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려지게 되었다. 목회자와 수행자는 하나이며 교회와 수도원은 하나이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그렇게 연합하여 있는 교회의 한 모습을 본다. 그것은 오늘까지도 카톨릭에서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신교 교회의 목회자들은 물론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럴지라도 수행과 수도원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기풍이 한국 개신교에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목회자들은 목회의 마인드와 함께 은둔의 마인드를 가져야 할 것이다. 목회 때문에 은둔 자체가 부인되거나, 아니면 은둔의 관점을 가지고 가서 목회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 양태가 다르기는 하여도 초대 교회의 교부와 같은 시대의 사막의 교부들은 세속과 사막에서 같이 진리와 교회를 지켰던 사람들이다. 오늘의 교회도 그와 같은 목회, 그와 같은 영성 훈련을 일으켜내어야 한다.
아타나시우스와 오리겐
영지주의를 소개하면서 이미 말한 바대로, 초대 교회의 영성은 성찬 공동체와 신비주의적 영성 둘로 대별된다. 바로 그런 면에서 성찬 공동체를 대변할 만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요, 신비주의적 영성을 대변할 만한 사람이 오리겐이다. 오리겐은 비록 그 후대 추종자들이 이단으로 정죄까지 받기는 하였지만, 그의 초대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비록 철학이 신학을 앞서는 것 같은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고, 그리스도의 사역보다도 영지적 신비에 기울어지는 것 같기도 했으나, 바로 그런 것까지 함께 오리겐은 그 시대 기독교의 대표적인 해석있던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조차도 오리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오리겐의 신앙은 진지한 신앙의 한 주류였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오리겐과 마주선다기보다는 오히려 오리겐적 경향을 가지면서도 교회의 진리와 전통에 더 분명히 서는 길을 찾는 것에 있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나 사막의 교부들도 이런 두 사람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교회의 교부들이 보다 성찬 공동체적 영성에 보다 가깝고 사막의 교부들이 보다 오리겐적 영향에 가까우리라는 것은 능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양 집단이 서로 나누어서 반대족의 영성에 탐닉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세계 전체에는 성찬 공동체적 영성과 신비주의적 영성이 병존하여 있었다.
A. 4-5세기의 교부들
먼저 교부들 쪽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당시는 아타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을 제외하면 다른 교부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교부들의 계급적 한계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강력한 침투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교부들은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청빈을 선택하였고, 그것을 관철해 내었다. 초기의 분명하고 결단력 있는 기독교의 상이라고 하겠다. 오늘 이른 바 직업으로서의 목사니, 깨끗한 부자니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들 앞에서 먼저 부끄러움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가이사랴의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찌안수스의 그레고리, 존 크리소스톰 - 동방,
프와티에의 힐라리우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제롬, 히포의 어거스틴, 대 레오 - 서방.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D300-373)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의 영성이라고 부를만큼 오리겐의 영성과는 확고히 다른 영성을 세웠다. 그는 믿음의 체험을 인간 존재 안에 내재하는 신적 초월성을 향한 열망으로 보지 않았다. 계시는 단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복음의 계시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었다. 영성은 말하자면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계시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적 우주론에 발딛고 지성주의적이고 엘리트적인 개인성에 의존하는 영성을 떠나서, 복음서에 계시된 신적 실재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영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서의 계시로 인하여 직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성육신의 영성이 확고해졌으며, 로고스가 성육신한 구세주로 명확히 묘사되었다. 그래서 인류는 구원의 로고스가 육체적 구조 안에 들으옴으로써 영향을 받는 실체이다. 이리하여 기독론적 직관에 근거한 성육신의 영성이 교회의 비전으로 세워졌을 뿐 아니라 이집트 수도원 운동의 영성도 이에 받침하여 견고해 졌다. 그는 말하자면 니케아 공의회의 결의를 수호한 교부였던 것이다.
이 아타나시우스가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동방의 전통 아래서 즉 희랍 철학의 영향 아래서 쉽게 신비주의로 기울어지지 않고 구체성의 성육신 교리를 지키고 그래서 단성론이 아니라 양성론이 세워질 수 있는 신학적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성품에 관한 단성론과 양성론 논쟁이 기독교 역사 전체에 배어 있는 갈등이라 본다면, 단성론적 경향을 갖기 쉬운 배경에서 양성론적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신학이 어떤 학문적 배경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존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찬양을 받아왔고, 그래서 마땅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바실과 두 그레고리)
가이사랴의 바실(330-379)은 기독교의 신성한 의무를 하나 하나 제도화하였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오리겐 양자를 다 실천하려 하였다. 그는 가정적 전통을 통하여 오리겐의 신비주의를 물려받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시대의 실질적 교회론을 세워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은 보다 풍부한 교회론과 보다 강력한 성령론의 견지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의 영성을 세워간 것이었다. 그는 신적 계시의 감추인 비밀에 대하여는 오리겐적 신비주의를 취하여 이른바 영적 진보의 단계를 강조하였다. 그의 종합적인 견해는 이런 것이다. 예전의 규범과 의식 그리고 성경이 영성의 근원이 되는 바 그것은 여기 성령의 감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만찬적 영성과 신비적 영성을 결합하였다.
나찌안수스의 그레고리(329-390)는 바실의 친구로서 독거 및 관상을 사모하였으나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으로 인하여 사제직을 감당하다가 아버지 사후에 이사우리아 광야로 들어가서 4-5년간 침묵과 관상의 생활을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기도 하였으나 일부 동료들의 정책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금욕과 관상의 생활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성령님을 분명히 하나님으로 칭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관상과 침묵과 금욕에 매력을 느꼈으며, 이미 성직 제도가 부패하는 것에 대한 그의 고발은 구약 선지자의 비애가 담겨 있었다. 반면 서민 계층의 영성에 대하여는 경멸하고 이것이 순교자 숭배제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다. 그 태도의 극단성은 있으나 현대 및 전 역사 속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그는 통찰하였던 것이다. 그의 논설은 정확한 데가 있지 않은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교회의 제도를 비판하고 천박하게 행하여지는 순교자 숭배를 염려하였던 것이다.
닛사의 그레고리(331-394이후)는 바실의 동생이다. 그의 공헌은 무엇보다 다시 아타나시우스와 오리겐을 잘 종합한 것이다. 그는 갑바도기아 교부들 가운데서 가장 체계적인 사람으로서 오리겐적 전망을 가장 순수한 양식으로 다듬어 신비주의적인 풍성한 교리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그런 한편에 성육신적 토대를 명확히 강조함으로써 신비주의가 쉽사리 빠져드는 이원론적 염세주의의 위험을 극복하였던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오리겐의 구원론이라는 틀 안에서 아타나시우스가 대중화시킨 로고스의 성육의 교리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틀은 현대까지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폴 틸리히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쓴 틀은 기실은 이 안에 있는 것이다.
존 크리소스톰(334-407)
그는 안디옥에서 태어나 당시 가장 뛰어난 안디옥 학파 주석가인 다소의 디오도루스의 신학을 배웠다. 20대 초반에는 2년간의 은수사 생활을 거쳤으나, 건강을 해치고는 사제로 임명받았으며, 무엇보다는 그는 뛰어난 설교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설교의 속기록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그 영성의 복음적 근거라는 관점에서 오늘도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며 매우 풍부한 영성적 원천이 된다. 그는 특히 사도 바울의 저술에 몰두했으며 그의 수많은 설교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교리적 사상은 아타나시우스를 계승한 성육신론이며, 이것은 안디옥의 특징대로 윤리적이고 역사적이다. 그는 말하자면 그 시대의 사도로서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성육하신 임재를 실현하여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교회와 교회에 헌신하는 사제직을 긍정하였다.
프와티에의 힐라리우스(310-367)
힐라리우스의 의미라면 역시 그가 서방의 사람으로서 희랍 세계와 라틴 세계를 중개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서방 영성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기독론과 윤리학에 초점을 두었고, 고올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교회에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확고한 교리탐구와 성경 읽기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도덕적 관심에 대한 책임있는 의식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의 자전적인 고백을 기초로 하는 「삼위일체에 관하여」라는 책은 종교적 회심의 지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주 상식적인 체험에서 시작하여 여러 단계의 영적 각성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모든 영적 기대가 성취된 것을 기뻐하며 편히 쉬는 데까지를 하나 하나 이야기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334-397)
암브로시우스도 힐라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동방의 영성을 서방으로 소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필로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등의 저서를 번역하고 쉽게 풀어 소개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유산을 라틴 교회에 전한 것이다. 그는 천부적으로 법과 질서에 충실했으며, 그래서 여러 황제들을 진정으로 정치적으로 다룬 사람이며, 어떤 극적인 상황에서도 신중하고 사려깊었다. 그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성화시켰으며 로마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융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암브로시우스의 특성은 어거스틴에게서 보다 승화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시대가 처한 영적 위기에서 기독교의 진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구체성은 때로는 체제지향적인 인상까지 주기도 하지만, 그 구체성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그들의 노력은 매우 진지한 것임에 분명하다.
동방에는 보다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띤 알렉산드리아 전통이 있고 한편으로는 매우 역사적 구체성을 중시하는 안디옥 전통이 있었다. 서방이 경우에는 이제 자신들의 역사적 정황과 관련한 구체성이 드러나서 나온다. 우리가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에게서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때로 이런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을 변호해야할 때가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체제를 유지하는 방도를 찾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급진적인 경향을 가질 때에는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의 구체성은 이 극단적인 급진성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런 교부 신학 시대의 지리적 차별성에 대한 인식 가운데서 한편 이들을 비판하고 한편 변호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돌려서 말하면 어거스틴이나 암브로시우스를 빌미로 하여 우리의 체제지향적 고착성을 옹호하려고 한다면 그들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는 원천적으로 법의 나라이다. 그런 만큼 그들 자신이 사는 현실을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시대였으며,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도 그런 영향 내에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신학을 형성해낸 것이다. 그 시대성과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의 융합은 아름다운 것이다.
제롬(331-420)
그도 역시 동방의 전통을 서방에 전달하기에 노력한 사람인데, 그는 훨신 오리겐주의에 치우친 편이다. 그는 물론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번역하기도 하였지만, 오리겐의 예레미야 에스겔 설교집을 번역하였고 대체로 오리겐의 저서를 추적하며 번역하기에 애썼다. 균형을 이루려는 다른 신학자들에 비하면 비교적 치우친 편이었고, 그의 불세출의 업적은 역시 라틴어 성경 「불가타」를 번역해낸 것이다. 독신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등 그의 신학적 편향성으로 인하여, 그는 다른 교부들과 같은 반열에 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가타 번역으로 후대에 내내 이름을 남겼다 하겠다.
어거스틴(354-430)
그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로 하여 이제 교회가 맹아적 모습을 벗어 내고 정형화된 교회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는 그로 하여 이제 초대교회라는 유아기적 옷을 벗어내고 장성한 교회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도나투스 논쟁은 이런 어거스틴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배교자의 세례는 무효라는 그 순결해 보이는 주장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순수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변절한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런 와중에 어거스틴은 아주 온당한 절충안을 교회에 내놓았다. 변절한 사제라 할지라도 그가 사제로서 행한 세례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타협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손을 빌어서 오지 않고 성령님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으로 온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역사성과 구체성은 그런 것이었다. 성경적인 순결성을 견지하면서도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 내지는 유지시켜내는 힘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로 세워가는 힘이었다. 그가 가진 여러 신학적 논의들의 부족한 부분들은 자주 지적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보여준 이 역사성과 구체성은 찬양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천재였고, 철학과 사상이 난무하는 시대상 가운데서 방황하였고, 당시의 지식인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영지주의적 경향에 빠졌고, 그래서 마니교에 가입하는 역정을 거쳤다. 이런 배경들을 가진 그의 「고백」은 내적 자아를 분석하는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보인다. 한편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어거스틴의 신비적 열심을 부채질하였다. 또한 「신국」은 자기 시대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전망을 보여주는 구체성 신학의 정수이다. 철학적 내면성,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 시대를 향한 그리스도교적 전망 등이 어우러져있는 그의 면모를 우리는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B.수도원 운동
불교에 출가의 전통이 있거니와 기독교도 초기에 일종의 출가의 전통이 있었다. 수도원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기독교 교회가 어느 정도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바로 나타나기 시작한 교회의 고착화 내지는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끝없는 순결의 추구 이 둘의 결합 때문이다. 사막의 교부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3세기 말에서 4-5세기로 이어지는 금욕 수행자들에게서 수도원의 시초를 볼 수 있고,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독서 수행을 하였던 안토니우스를 우리는 알고 있다. 안토니우스의 수행 자체가 훌륭하기도 했거니와, 그 당시 균형적인 초기 신학을 정착시킨 아타나시우스가 안토니우스를 수행의 영웅으로 소개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콘스탄틴으로 인하여 기독교 세계와 문화가 정착 단계에 들어가던 4세기 초기, 이런 세속적 가치관들에 반발하는 흐름들이 있었으니 그 출발점은 시리아인들과 콥트인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흔적은 이집트의 파피루스로 발견되곤 하는데, 그들의 주된 강조점은 독신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性的 이원론을 넘어서고 하나님의 독생자와의 합일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이 시도하였고 계승되어 갔던 사막의 수도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성들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1.몇 위대한 인물들의 거룩하 성품 2.수도자들을 한계적 삶으로 몰고 갔던 나일 계곡의 지리 3.로마의 이집트 농민 타락으로 인해 이미 존재하였던 은둔운동 4.교회의 지도자가 제국 정책에 저항하면서 피난처를 구하던 상황.
이런 금욕 수행자들은 소아시아의 동부 즉 메소포타미아 상부 근처에도 있었다. 이것은 357년 세바스테의 감독 유스타티우스가 고무한 것으로, 이들은 나중에 결혼, 가정생활, 사회질서, 성직자 등의 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런 비난은 지나친 것이었으나,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아내, 부모에게서 해방된 자녀, 순종을 거부하는 노예와 군인, 교회법 무시, 성직자들의 경제적 권리 무시 등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병자들을 돌봄으로써 열렬한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한편 성경에서 사막의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출애굽, 엘리야의 삶, 세례요한, 예수의 40일 금식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성경적 기록은 종말론적 분위기 가운데서 사람들을 팔레스틴의 광야로 이끌었다. 팔레스틴의 금욕 고행자들은 360년부터 증가하였다. 이리하여 형성된 기독교 수도자들의 거처는 과거 유대교의 금욕공동체와 위치가 비슷하였다. 이런 공동체에는 여러 경향들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심지어는 불교나 마니교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 안에서는 대체로 이런 부분에 대한 강조는 적은 편이며, 창조와 구속 등 기독교 기본교리의 주제들과 스토아 내지는 플라톤 학파의 철학적 내면성의 영향들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사막의 교부라고 하면 이집트의 은수사들을 말하며, 그것이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틴에서도 일어났고, 그들의 이런 수행은 교회에 오랜 역사를 이어오며 오늘까지 끊어지지 않은 수도원의 효시가 되었다. 수도원조차 부패하였을 때 다시 수도원 개혁운동도 일어나게 되지만, 사막의 교부로부터 시작되는 수행과 수도원의 역사는 기독교의 정화의 역사이다. 그래서 교회사를 연구하는 것은 실로 수도원의 역사가 반이어야 한다. 오늘 현대에 와서는 과연 수도라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을까? 우리가 더러 이름을 접하고 있는 예수원 같은 경우는 무엇보다도 노동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안으로 들어가보면 결국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의 은혜에 잠기며, 그 금욕의 자리들을 오히려 천국처럼 여기고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리라.
안토니우스(3세기 후반- 4세기 초반)
교회 위인들의 전기에서는 마치 예수의 흔적을 기록한 것 같은 인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 위인들의 훌륭함에도 이유가 있지만, 예수의 생애가 워낙 인상깊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지도자를 예수의 생애와 유사한 형태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기록의 백미가 바로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우스의 생애」이다. 더군다나 아타나시우스는 그냥 안토니우스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당시 기독교 교회에서 혁혁한 위치에 있었고, 그런 권위를 안고 안토니우스를 소개하였던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악령들의 시험을 기도로 이기고 능력과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여하간 아타나시우스로서는 안토니우스의 삶을 그대로 묘사하였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부과한 침묵, 자원해서 선택한 가난, 초인적 지혜, 심리적 안정성 등을 소개하였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영지주의적 개념을 개진한 것이었으며, 즉 만물이 구속함을 받는 날 성육신에 의해 회복되어 인간성은 태초에 지니고 있던 완전한 상태를 회복하리라 하였던 것이다.
파코미우스(약290-347)
안토니우스가 은수사였다면 파코미우스는 共住 수도사였다. 공주 수도가 은둔 수도와 다른 것은 같이 거하는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상대적으로 금욕 생활의 어려움은 덜하지만, 탐욕스런 생각이 가차없이 질타당하고 근절되는 영적 지도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주 수도의 중심 부분은 영적 아버지의 지도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노동과 기도 악과의 싸움이 더하여 졌다. 파코미우스는 나일강 상류의 타벤니시에 그의 가장 성공적인 공동체를 세운 바 있다. 그는 324년에 수도 헌신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몇 년이 못되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9천명이 넘었다 한다. 심지어는 그가 수도를 했던 지역에는 수도사가 오히려 일반인의 숫자를 능가했다 할 정도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력 다툼이 생기기는 했으나 몇 후계자들의 노력으로 파코미우스의 이름으로 「규칙」이라는 책이 발간되었고, 이런 노력을 통하여 그 수도 공동체는 계속되었다. 공주 수도사들은 은수사들과 마찬가지로 친교를 통하여 마음 안에 깊이 숨겨진 자신의 진정한 동기들을 발견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교만의 죄를 극복하려 노력하였다. 또 단순하고 자연과 밀접한 생활을 하면서 이웃의 행복과 공동체를 위한 고된 작업에 헌신하는 훈련의 삶을 통하여 참된 수도자의 길을 걷고자 하였다.
사막 교부들의 정신
사막 수도자들의 수도는 당시 그리스도에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수도자들이 거하는 사막을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사막지역을 방문한 한 방문객이 「수도원의 역사」라는 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 또한 방문자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대체로 이 책은 제롬의 친구인 루피누스의 저작으로 돌려지지만, 그가 사막을 직접 방문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 쓴 글을 루피누스가 희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나름의 신학적 해석들을 덧붙인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방문자는 그 당시 수도 중이던 리코폴리스의 존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많은 교훈을 듣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들이 사막의 수행이 어떤 영성을 구하는 것이었는지 보여줄 만한 것이라 보아서 대략 소개하고자 한다.
*사막의 교부들에 대하여 하나 하나 알기를 원하면, 노만 러셀이 지은 「사막교부들의 삶」(은성)을 찾아보라
사실 혼자서 은둔하여 수도한다는 것이 생각기 따라서는 아주 괴퍅스런 사람이라는 연상을 일으키게도 되어있다. 안토니우스만 하여도 얼마나 사람들을 피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이 수도사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특별히 불친절하거나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거나 그렇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향하여 엄격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금욕을 요구하였으나 타인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게 수도의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친절은 오늘 유행이 되고 상대방의 호의를 기대하는 친절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 친절 가운데도 수도자다운 엄격함은 지니고 있었다. 리코폴리스의 존이 했던 말 하나를 들면 수도자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마시오......그대 자신을 신뢰하지 마시오......허영심 때문에 우리의 덕을 취하려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즉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선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것, 경건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자들은 항상 자신에게 이런 규정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리코폴리스의 존은 이런 저런 비유들을 들며 여행자에게 교훈을 주었는데, 엄격한 고행에 성공하였으나 여인에게 유혹되고 만 예를 이야기하면서 금욕을 은혜의 방편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서 그리된 것이라 하였다. 또 이런 예도 들었다. 어떤 덕망있는 수도사가 자만하기 시작하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 등의 작지만 어려운 일을 기피하려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열심이 식었음을 깨달았으나 회개를 하기보다는 사막으로 갔다. 그리고 다른 수도자들을 만나서 죽기까지 인내하라는 말을 하고는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이번에는 정말로 능력있는 현자가 아니라 구세주 앞에 엎드린 죄인의 심정으로 기도하였다. 수도사들은 그 당시 심리학의 대가로서 자신에게 가혹했지만 그들이야말로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험과 타락, 악, 죄, 절망,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하는 것 등 참된 영성 생활의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수도사들은 그런 가운데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래서 리코폴리스의 존도 “침묵 속에 잠기며, 관상하는 훈련을 하라...... 이렇게 하는 수도사는 근심 걱정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존은 스스로는 금욕을 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선한 것처럼 보이기만 원하는 태도를 비난하였다. 즉 수도사는 끝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일에로 나아가는 것이지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도자들은 스스로 평생 자기의 뜻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는 것에 힘썼고, 수도사가 죄인이요 외국에 갔다가 돌아온 탕자와 같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운동선수의 비유는 참으로 정곡을 찌른다. “운동선수는 경기에 임할 때 불필요한 옷은 모두 벗어버린다. 수도사도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벗어버리며, 주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싸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수도사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고행에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은 수도 생활에서 십자가와 함께 바로 부활을 맛보았던 것이다. 리코폴리스의 존도 40년 독거 수도를 하였는데, 항상 밝고 웃음 띤 얼굴을 소유하였다 한다. 그들의 온유는 대단하여서 야생의 짐승들에게 물을 주고 음식을 나누어줄 정도였다 한다. 수도사들은 방문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려는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이교도들은 우울하고 유대인들은 울부짖으며 죄인들은 슬피 울지만 의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사는 생명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개인적인 절망을 유익하게 사용해야 하며, 그러한 절망감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방문자에게 이런 태도를 보일진대, 같이 있는 수도사들 사이의 사랑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수도사들은 참으로 한 형제 된 것을 보이며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허물을 감추어 주었다. 한 수도자의 이야기는 감명 깊다. 한 형제가 잘못을 범하였다. 그래서 그를 책하기 위하여 사부 모세를 불렀다. 그러자 그는 깨어진 항아리에 물을 담아서 그 자리에 갔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내가 지나온 길에 내가 지은 죄들이 줄줄 새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형제의 잘못들을 판단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수도자들은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고 또 돌아보려 하였다. 수도사들은 말하자면 천국을 사는 것이었고, 그래서 「수도원 역사」에서는 수도사들을 천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천국을 살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와 함께 부활이 증언되는 것, 이것은 기독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사들의 금욕이 때로는 탈속적이어서 황당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들이 개인적인 덕을 쌓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런 금욕과 사랑을 통해서 십자가와 함께 부활이 증언되는 세계를 그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사막 교부들의 행적에는 기행이나 기적 등 오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지만, 이들의 행적은 정말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상대로 살기 원했던 사람들이 전체로 자신을 드렸던 흔적이다. 수도원은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고,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사막 교부들의 그 순전함은 다시금 다시금 교회에 하나의 사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금욕주의와 고행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비치든지 그들이 노력하였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열심은 우리가 높이 사야하고 또 배울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일이다.
결어
교회는 이렇게 지켜졌다. 신학적 정신이 정밀한 교부들이 교회 가운데 든든히 버티고 있었고, 한계적 상황이라 여겨지는 자연 속에는 정말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내 몸에서 나타나기 원하는 수도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리하여 교리도 지켜졌으며, 교회도 지켜졌다. 그리고 성도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지침으로서 그들은 등대처럼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교부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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