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겐
오늘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며 일생을 복음사역에 헌신하다 순교한 오리겐을 소개하려 합니다.
오리겐의 부모는 헬라인으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
세베루스(193~211)는 군인출신으로 로마의 5현제시대가 끝나고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황제가 된 자였습니다. 초기에는 큰 내란을 격은
로마시민들을 잘 다독거렸으나, 점차적으로 폭군화되어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20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대박해에서
오리겐의 아버지인 레오니데스는 순교합니다. 그는 오리겐에게 헬라식
교육을 시키는대신 기독교적 수양을 쌓도록 지도하였습니다.
레오니데스가 관헌들에게 끌려갈때 오리겐도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강한 만류로 그만 두었습니다. 그대신 옥중에 있는
아버지게에 편지하여 믿음의 선한싸움을 끝까지 잘 감당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재산을 몰수당한 17세의 오리겐은, 어머니와 6명의 동생들을
거느린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신자들을 위한 교회학교 교사를 하면서
예수님을 본받아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리겐의 신앙은 그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고 성경공부를 많이하여 동년배들을 선도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때 오리겐은 청년의 욕정이 교사일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고민
하다가, 복음전파에 전념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감추려 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알게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겐의 신앙을 칭찬하며 격려하였고,
성도들은 더욱더 오리겐의 가르침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의 감독은
질투심이 생겨나고 오리겐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리겐을 매장시키기
위해 로마제국내에 있는 모든 교회의 감독들에게 오리겐의 자해행위를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하는 편지를 띠웠습니다. 그런데 수신자들의 반응은 오히려 오리겐의
행위를 칭찬하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틴 지역 교회들과 가이사랴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들은 오리겐을 초청한 후 안수하여 장로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러자
데메트리우스 감독은 더욱더 오리겐을 비난하고 다녔고, 오리겐을 옹호하는 교회
감독들과도 등을 졌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오리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오리겐은 성경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히브리 성경사본들을 구해서 연구했으며,
많은 구약성경의 주석서를 썼습니다. 또한 신약성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남겼는데,
특히 누가복음에 대해서는 바울이 칭찬한 복음서로서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해
쓰여졌다는 의견을 남겼습니다. 또한 히브리서에 대해서는 그 서신에 나타난 사상은
사도의 것이지만 문체와 어법은 사도가 말한 것을 기록했거나 받아 적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교회가 히브리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말하더라도 반대하지
않지만, 세간에는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나 누가가 썼다는 견해도 있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종합해보면 사도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쓴 편지를
누가가 헬라어로 번역하여 초대교인들에게 전파한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오리겐의 해박한 성경지식은 당시에 생겨난 많은 이단자들의 견해를 옳바르게
수정해 주었으며, 그에게서 많은 훌륭한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명성은
로마황실에까지 알려졌으나, 황제들이 바뀔때마다 누구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누구는 기독교를 박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갈루스 황제(251~253)통치때인
253년 오리겐은 7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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