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복음주의적 영성신학의 토대
글/ 김귀춘 교수(세계사이버대학)
1. 어거스틴의 영성과 신학- 하나님의 절대주권 확립
어거스틴의 영성과 신학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무수한 환난과 핍박 그리고 이단과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나온 결정체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 모니카의 신앙으로 경건하게 살려는 의지와, 이교도이고 성적욕구강한 아버지의 육적인 삶 사이에서 숱한 방황과 혼돈을 거듭했고, 그 가운데서 마니교를 비롯한 무수한 이단들과의 투쟁속에서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이러한 환난은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참된 길로 인도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했고, 그리하여 일평생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며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정립하게 된다. 국가적으로는 기독교의 국가인 로마가 멸망하면서 이교도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크리스천조차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피력함으로써 지상의 도성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고 영구적임을 선포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핵심사상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롯한 기독교 전체 역사를 통해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의 사상을 형성하기까지의 과정과 열매를 살펴봄으로써 어거스틴의 영성과 신학을 조명해본다.
a. 18년간 정욕의 노예생활
어거스틴은 354년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탄생했다. 아프리카라 하면 미개한 것을 생각하지만 기독교 사상사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다. 어거스틴 이전에도 키프리안, 터툴리안 같은 학자가 나왔고 신플라톤학파도 거기서 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납고 방종한 생활을 했고 죽을 때에 겨우 세례 받고 죽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어릴 때 어거스틴은 신앙교훈을 잘 받아 드리는 듯 했으나 차츰 세속적 활동에 관심을 가지며, 기독교 신앙에 재미를 잃어버렸다. 어거스틴이 17세 되던 해에 카르타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뛰어난 수사학적 웅변가로서의 자질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곳은 당시 아프리카 제일의 도시여서 많은 유혹이 있었다. 어머니 모니카를 통해 감화받은 기독교 신앙은 잊어버리고 음란한 생활로 아들까지 낳았다. 이때부터 387년 암브로우스에게서 세례받을 때까지 18년간 육신의 노예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머니가 ‘제발 유부녀만은 손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어거스틴은 육욕의 노예가 된다. 어거스틴은 나중에 “나는 19살부터 28세까지 나 자신을 속이고 남을 유혹했다”고 고백하였다.
b. 마니교에 심취
어거스틴은 이런 가운데서도 도덕적 생활과 삶의 본질적 문제에 늘 번민의 나날을 보낸다. 물론 육욕적인 본능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지만…. 그의 영은 죄를 뼈저리게 느껴 철학을 통하여 그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시세로(Cicero)의 책을 통해 답을 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성경을 읽어보았으나 영의 눈이 멀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마니교(manicheism)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 마니교는 오랜 동안 기독교와 마지막까지 정면 충돌을 일으킨 가장 위험한 영지주의였다. 어거스틴은 9년간이나 마니교의 열렬한 옹호자요 전파자가 된다.
당시 마니교는 지중해 연안에 퍼져 있었다. 마니교의 가장 큰 매력은 우선 합리적이라는 것이었다. 마니교는 당시 어거스틴이 기독교에 관해 가지고 있던 두가지 문제들을 해소시켜 주는 듯하였다. 우선 수사학에 통달한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볼 때 성경은 세련되지 못한 문체와 표현들로 가득차 있었다. 구약성경 중 어떤 부분은 가히 야만적이라 할 만큼 폭력, 강간, 부도덕, 사기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니교는 성경에 대해 물질주의요, 유치한 언어의 표본이라고 경멸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악의 근원에 관한 문제였다. 모니카는 그에게 오직 한 하나님만이 계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볼 때 주변에는 악이 충만하였다. “지존하고 선하신 하나님이라면서 악을 창조하였다는 것인가! 악의 근원이 하나님이란 말인가!” 어머니의 주장처럼 만물이 다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은 선하거나 지혜롭지 못한 분이었다. 마니교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선을 창조한 신과 악을 창조한 신이 따로 있다고 하였다. 악은 바로 광명의 원칙의 피조물이 아니라 암흑의 원칙의 소산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니교가 구약을 거부하였기에 회의적인 젊은 지성인에게 구약의 문학적이고 도덕적인 미숙함이 문제가 되었는데 마니교는 잠시 이를 해소시켜주는 듯하였다. 그러나 근원은 해결되지 못한 채 의문만 더해갔다. 383년 로마에 살면서 열병에 시달리는 중 마니교에 대한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나중에 마니교의 허구성을 발견하고 떠났지만, 갈수록 마음은 혼란한 상태에 빠진다.
c. 암브로스와의 만남
어거스틴은 8년간 카르타고에서 수사학교사로 있다가 로마로 가서 교사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에서 그의 생애 일대 전환을 가져다 준 스승, 암브로우스를 만나게 된다. 과연 어떻게 조잡한 언어와 폭력과 거짓으로 가득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제공한 인물이 암브로우스였다. 수사학 교수인 어거스틴은 당시 밀란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가인 암브로우스가 어떻게 설교하는가 관찰하기 위해 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점차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가졌던 중요한 지적 난점들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에 대한 암브로시우스의 모형론적 그리고 알레고리적 해석은 어거스틴을 어머니의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던 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해결해주었다. 암부로우스가 구약을 해석하였을때 구약은 그 조잡한 모습을 감추었고, 놀라울 정도로 깊이 있는 의미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다면 전생애를 헌신하고 싶었다. 당시 기독교인의 이상이었던 수도생활을 하려면 일체의 정욕과 야망들, 나아가 웅변술 교수로서의 직업조차도 버려야 됨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가 성적 유혹에 심히 시달리고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밀라노에서도 여전히 이중적 자아에 번민하는 생활이었다. 성적 욕망과 신앙인 사이의 내면적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즈음 그는 어머니의 권면으로 그동안 함께 살아온 여인을 보내고 어떤 자본가의 딸과 정식결혼하려고 했다.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오겠다던 자본가의 딸은 나이가 어려 2년을 더 기다려야 결혼할 수가 있었다. 그 기간을 참지 못하고 어거스틴은 또 다른 여인과 성적쾌락을 즐겼다. 이런 수치스러운 생활, 가장 치욕스러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경향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이제 성서의 매력과 권위는 어거스틴의 마음과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깊이 참회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이에 어거스틴은 가슴의 통증을 느껴 치료 차 친구의 별장에 갔는데,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절규했다.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 아니신가. 그분은 한없이 선하신 분이다. 그렇다면 선은 싫어하고 악을 좋아하는 내 마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나는 벌받기 위한 존재로 태어난 것인가. 내가 온통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면 도대체 누가 내 안에다 이런 고통의 씨앗을 뿌렸단 말인가. 만약 악마가 한 짓이라면 악마는 어디서 생겼는가. 가령 천사가 사악한 의지 때문에 악마가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를 악마가 되도록 만든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천사는 다 선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가.
d. 회심 및 영성생활
어느날 어거스틴은 같은 고향사람, 폰테키아너스의 방문을 받는다. 그와 대화하던 중 사막의 성자 안토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홀로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안토니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에 분열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자들은 천국을 자기들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학식은 있으나 결단력이 없는 나는 육체 속에서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더 내 자신에게 기다려야 하는가? 내일 또 내일! 왜 지금 당장은 안 되는 것일까? 왜 이 시간이 나의 수치의 마지막 순간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에게 정결과 순결을 주시옵소서. 그러나 너무 조급하게 허락하지는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내가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섬기고자 계획했을 때 그 안에는 그것을 원하는 나와 반대로 원치 않은 내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양자는 결국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롬7:17)가 주장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자유안에서 범한 죄의 대가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원죄론과 은총론은 이처럼 처절한 내면과의 싸움에서 터득한 것이다.
이때 사방에서 그를 부끄럽게 하는 소식들이 전해졌다.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마리우스 빅토리누스가 교회에 출석하여 공개적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다는 소식, 두 명의 고위 관리들이 아다나시우스가 지은 「안토니의 생애」를 읽고 세상의 관직과 명예를 버리고 은자의 길을 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러움과 부끄럼이 심하게 교차되면서 내면은 고통으로 신음했다. 어거스틴은 친구들의 무리에서 벗어나 정원으로 숨었다. 387년 7월이었다. 그가 정원을 거닐며 깊은 번뇌와 불안에 빠져 있을 때, 아이들의 동요소리가 들려왔다. “집어라!”, “읽어라!” 즉시 성경을 펴니 로마서 13:11-14의 말씀이 나타났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그의 영혼 밑뿌리를 흔들어 놓는 신의 계시였다. 통회의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진정한 회심은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죄된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말씀을 다 읽고 났을 때 그는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있었다.
회심 이후 어느 산속, 친구의 별장에 8개월 동안 머물면서 고요히 자신을 정비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과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이 온전히 그를 주관하여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387년 암브로스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회심에 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오, 늦게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이렇게 늦게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내 안에 계셨는데도 나는 밖에서만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나와함께 계셨지만 내가 주님을 떠나 있었습니다.”어거스틴은 세례를 받고 세속적 의미의 출세를 포기하고, 약혼도 파기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수도적 공동체를 구성하여 명상과 수련의 날들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팔아 자기의 주택과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준다. 그는 여기서 자기 소유를 친구들과 함께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세상에서 은둔하며 오직 기도와 성경 연구와 명상에 세월을 보낸다. 불철주야 하나님 말씀을 명상하며 단식과 기도와 선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는 철저히 금욕생활을 하는데, 의식주는 검소했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391년 힙포에 어떤 부자를 회개시키러 갔다가 그곳 기독교도들의 강권으로 사제가 되고 그곳에서 제2의 수도원을 세웠다. 396년 힙포의 주교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 뒤를 이어 힙포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지 얼마 안되어 교회 안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거기서 거룩한 사도들 시대에 정한 규율과 생활양식을 본받는 생활을 했다. 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수도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얽어매고 끈질기게 노예근성으로 괴롭힌 것, 하나하나에 대해 열거한다. 향취, 청각의 쾌락, 눈의 쾌락, 지식욕, 교만과 허욕, 칭찬에 대한 바른 태도, 허영심, 자만의 오류 등을 열거하며 이러한 것들이 극렬하게 자신의 내면을 괴롭히고 순간순간을 노예근성으로 이끌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이 자유하게 되었음을 처절한 그의 경험을 토대로 고백한다. 그는 일생 건강치 못했고 위의 압박과 가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43년 8월28일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e. 이단과의 논쟁속에서 확립한 기독교의 핵심진리
어거스틴은 이단자들의 반대를 통해서까지 기독교 정통신앙이 확립된다고 하였다.하나님의 절대주권! 오직 은혜! 이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확립하기까지 어거스틴은 이단들과 수없이 맞서 싸워야만 했다. 신학이 체계화되지 않은 그때의 상황에서 이 싸움은 산고의 고통이요, 목숨을 내건 투쟁이었다.
1) 마니교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신론(386-395년)
한때는 마니교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어거스틴이 이제는 이들의 가르침에 대해 반론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이들의 교리에 대응하여 어거스틴은 주로 성경의 권위, 악의기원 및 자유의지에 대해 논했다.
마니교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입각한 선과 악의 분리를 배격하고 어거스틴은 일원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은 선하신 창조를 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악은 선의 결핍 혹은 부족으로 설명하였다. 마니교의 역사가 정해졌다고 믿는 ‘운명론’ 혹은 ‘결정론’을 배격하고, 창조시에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하였다. 물론 타락 이후 죄짓는 자유만 남았지만. 어거스틴은 이것을 ‘갇혀진 자유의지’라 부른다. 이것은 악의 기원의 난제를 푸는 열쇠인데, 악의 실존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것은 하나님이 그 의지를 창조하였고, 그래서 그것은 선하고 또한 그 의지는 스스로 자유로운 결단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따라서 인간의 의지나 천사의 의지가 나쁜 결단을 내릴때 악의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악이 어떤 ‘실재’(a thing)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니교는 악의 정체를 어둠의 원리로 보지만 어거스틴의 악을 이같은 실체(a sustance)로 보지않았다. 악이란 결단, 방향, 선의 결핍이다.
2) 도나투스 이단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교회론(395-410년)
도나투스의 이단성은 배타적인 청교도주의적 정신에서 비롯되었는데, 당대 가톨릭교회의 순수하지 못함과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타협 즉 로마의 당국자들인 세상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을 박탈당했고, 따라서 구원의 영역밖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교회가 심판날까지 그속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될 혼합된 집단이란 사상을 발견했다. “교회 안에는 양과 이리, 알곡과 가라지가 모여 있으며, 이것을 구별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런 교회를 ‘섞여 있는 교회’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극단적 분리주의를 배격하고 성례전의 효력은 성례전을 집행하는 사람의 신앙과 도덕성에 달려있지 않고 단지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우신 사랑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분리주의적 집단에 계속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 무거운 형벌을 가하는 입법을 권장하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3) 펠라기우스 이단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은총론(410-430년)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아담은 죽을 운명으로 지어졌으며 죄를 범하였든지 범하지 않았든지 간에 죽었을 것이다. (2)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해를 끼쳤지 인류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니다. (3)새로이 태어난 아이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4)아담의 죽음과 범죄에 의하여 전 인류가 죽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모든 인류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5) 복음뿐만 아니라 율법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6)주님이 오시기전에도 죄가 없는 인간들이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영국 출신의 수도사로서 경건과 엄격한 생활로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자유롭게 창조하셨으며, 악의 기원은 의지 안에 있다는 데에 어거스틴과 동의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자신의 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죄를 극복하고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우리들 각자가 죄를 짓거나, 혹은 죄를 짓지 않을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였다. 원죄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린 아이들도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죄를 짓기 전까지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자신이 기독교 신자가 되고 싶어하는 동시에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 의지의 갈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의지가 죄악에 사로잡혀 무력했던 경험을 그는 갖고 있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의지가 원하는 바대로 이룰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그였다.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 죄를 통솔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고,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의지 사이의 투쟁에 불과하다. 이는 곧 우리 의지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회심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와 죄책에 사로잡혀 있으며 인간의 본성자체가 타락하였고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사랑과 정욕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돌이킬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의 유일한 효력을 강조하게 되었다.이에 그는 예정설이라는 강력한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그 교리에 따르면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출발시키고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행동이며 그것은 인간의 공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려진 결정이라는 것이다.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는 오직 은혜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죄를 짓지 않을 능력도 없고, 은혜를 받아들일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만이 인간을 회심케하고 구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정된 자들에게만 이를 주신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요지였다.
어거스틴은 또한 로마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 즉 지상의 도성과 천상의 도성이라는 용어로써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고 영구적임을 정립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의지와 정과 욕을 좇는 극심한 내면의 분열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지의 무력함을 절절이 깨닫는 과정속에서 자아를 분쇄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노래한 어거스틴의 체험적 영성이 낳은 승전보다. 이것이 어거스틴 영성의 핵심이고 주제이다. 그리고 당시 신학이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여기저기에서 치솟는 이단과의 피터지는 논쟁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뿌리째 흔들릴 위험도 초래했지만 이를 통해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성과 자유의지의 무력함을 정립함으로써 중세 교회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무너져가고 인본주의로 치달을 때 루터가 어거스틴의 사상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하게 되는 쾌거를 이룬다.
살펴보았듯이 어거스틴의 영성과 신학은 편안하고 안전할 때 확립된 것이 아니라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한 환경, 게다가 극렬한 자신의 분열된 내면과 싸우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교리를 왜곡하려는 이단과의 끈질긴 투쟁끝에 얻은 각고의 산물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의 난공불락의 진리, 복음주의적 영성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죄의 세력을 인간편에서 극복했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능력(롬8:1-2)이 들어온 것이 아니다. 생명의 성령의 능력의 법이 죄의 세력을 극복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게 만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 복음, 자유, 은총만이 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깨닫기까지 하나님은 율법적 삶, 금욕적 생활로 그 영혼의 갈함을 더하신 것이다. 이처럼 그의 율법적, 금욕적 삶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갈급함과 간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이 아닌 복음 안에서만이 평안, 자유, 사랑, 인내, 따뜻함, 용서가 임할 수 있음을 수도생활을 통해 진지하게 배운 것이다. 율법은 몽학선생에 불과하고 복음만이 영생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몸소 깨닫는 과정이었다.
글/ 김귀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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