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교회사1교실

[스크랩] 토마스 아퀴나스

류성련 2014. 5. 6. 06:59

토마스 아퀴나스
1225-74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일명 토미즘이라 한다)

 

형상과 물질
토미즘은 물질과 형상(또는 관념)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심 원칙을 받아들임으로써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교회의 사상을 화해시켰다.

질료는 사물의 관념에 의해 침투당하기 전까지는 잠재성-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는다. 관념이 들어가야 비로소 그 사물이 된다. 가령 진흙은 벽돌이 아니지만 진흙 없이는 벽돌도 없다. 그렇지만 잠재성만 있는 진흙이 벽돌의 형상이나 관념과 결합되면 그때는 벽돌이 존재한다.

토미즘은 존재의 낮은 형상들은 더 높은 형상들을 만드어내는 데 쓰일뿐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자라고 다른 것으로 바뀐다. 이 모든 운동은 신이라고 하는 완전성을 향한다.
제 1동인(動因)으로서의 신은 배후에서 사물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모든 사물이 움직이는 목표다. 사물은 자신이 가까이 접근하려는 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으므로 일차적 동인은 신의 사랑이다. 부동의 동인이라고도 불리는 제1동인은 신의 존재에 대한 토미즘의 다섯 가지 증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다. 만일 운동이 있다면 최초의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이 바로 신이다. (이런 증명은 나중에는 논파되었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여졌다.)

토미즘의 현실관에서 형상과 질료는 모두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토미즘은 보편 논쟁의 갈등을 봉합하 수 있었다. 문제는 형상(관념)이 구체적 사물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는가 혹은 구체적 사물 '안에'만 존재하는가, 또 구체적 사물이 사라진 '다음에'도 형상은 존재하는가였다. 토미즘은 세가지가 다 맞다고 주장했다. 관념은 (잠재성으로서) 구체적 사물 이전에 존재하고 구체적 사물 안에 존재하며 자꾸만 위로 올라기기 때문에 구체적 사물이 사라진 다음에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개념론자의 시각에서 많은 내용을 끌어왔으면서도 세 입장을 조화로운 전체 안에 결합시켰다.

 

지식과 교리
낮은 형상과 높은 형상이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는 교리는 현세적 지식을 포함해서 지식은 무용하며 헛된 것이라는 교회의 입장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토미즘의 교육 체계에서 철학과 법학은 최고의 인간 학문이다. 철학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정신의 수련을 위한 법칙을 공부하는 것이고 법학은 우리의 육체적 본성을 지배하는 규칙을 연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토미즘의 현실관에 따르면 철학과 법학은 모두 필요하고 동등한 것이다. 이런 공부를 시작하려면 먼저 모든 형상과 질료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지식을 통해서 가장 완전한 인간성에 이른다.  소크라테스가 18세기 전에 말한 대로 지식은 덕이다.
신에 근원을 두고 있는 신학은 토미즘에 따르면 철학을 보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식 영역이다. 신학은 배움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둘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지식은 계시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고 계시는 철학의 지식을 전제로 한다. 진정한 지식은 죽은 다음에야 찾아온다. 사후에 신의 마지막 계시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살아 있는 동안 자연에 대한 지식을 최대한으로 습득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다.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 중에는 어느 것을 더 중시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도 형상과 질료는 서로 공존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에 힘입어 해결되었다. 오감을 통해 얻어진 자연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완성에 필요한 것이었기때문에 육체와 영혼은 함께 있으며 동등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렇게 해서 토미즘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로 갈라져 있던 이원론을 내몰았다. 육체(질료)와 영혼(형상)은 현세의 완성를 위해 모두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로버트 램 ; 서양문화의 역사 /중세, 르네상스 중 p79~80, 사군자)

 

토마스 아퀴나스 생애와 저술 
로마 황제령과 프리드리히 2세 영역의 경계에 있는 로카세카 성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5살 때부터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세경 전화를 피해 몬테카시노를 떠나 나폴리대학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연구를 통해서 복음전파를 목표로 하는 탁발수도회인 도미니크회를 접하게 되었다. 가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크회에 들어간 그는 파리를 거쳐 쾰른으로 건너가 여기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지도를 받았다. 과묵하고 거구인 아퀴나스는 마그누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대학 교수의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탁발수도회를 배격하는 파리대학에서 규정에 따라 《명제논집》의 해설강의를 마친 아퀴나스는 1256년에 교수자격을 획득하였으나, 분쟁으로 인하여 강의의 시작은 1년 뒤로 미루어졌다. 신학과 교수의 주요한 직무는 성서의 강의 및 학문적 논점에 대한 토론의 주재와 설교였으며, 이 시기의 대표적 저서로는 《유(有)의 본질에 관해서》와 소수의 성서 주석 이외에, 당시의 철학·신학의 주류였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을 두는 진리에 따라서 보완하려고 시도했던, 정기토론집 《진리에 대하여》가 있다.

아퀴나스는 관례에 따라 3년간 교수로 재직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약 10년 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크회 부속학교에서 교수직과 저작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은 두드러지게 성숙하였는데, 그 기연(機緣)이 된 것은 같은 도미니크 회원인 모르베카의 길레루무스의 번역활동에 도움받아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철학의 정교한 연구를 달성하였다는 점과, 정열적인 교황 울바누스 4세의 요청을 받고 동방교회와 공동으로 그리스 교부(敎父) 및 교의사(敎義史)의 본격적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던 점이다. 이 시기의 주요 저서로는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정기토론집 《신의 능력에 대하여》, 보통 《황금연쇄(黃金連鎖)》로 불리는 4대복음서의 연속 주석 및 《신학대전(神學大典)》 제 1 부 등이 있다.

69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 탁발수도회 배격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아퀴나스는 다시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계속해서 3년간을 프란치스코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보수파, 인문학과의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아베로에스派)도 포함된 3개파의 논적과 논쟁하면서 《신학대전》 제 2 부, 그리고 몇 가지의 성서 주석과 정기토론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의 주석 등, 많은 저작활동을 하였다.

72년 도미니크회의 새로운 신학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온 그는, 다른 저서와 병행해서 《신학대전》 제 3 부를 연이어 저술하였으나, 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의 축제일 미사 후 돌연 집필을 중단하였다. 이 사실에 놀란 동료들에 대해서 <나에게 새롭게 계시한 점에 비하면 이제까지 저술한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다.

74년 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병든 몸을 무릅쓰고 리옹회의로 향해 여행길에 올랐으나 중도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고향 근처인 포사노바의 시트회수도원에서 죽었다.

(야후 백과사전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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