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교회사1교실

[스크랩]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아타나시우스

류성련 2014. 5. 6. 07:58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아타나시우스

성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
4세기 교회를 이끌었던 가장 위대한 지도자를 꼽으라면 아타나시우스(300-373)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을 앞장서서 변호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집트의 민족지도자요, 교회정치가요,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니케아 정통 신학을 수호한 신학자이다. 샤프는 말하기를 “콘스탄틴이 정치계와 속계에 있어서 니케아 시대를 이룩한 중심인물이었다고 하면 아타나시우스는 신학계와 교계에 있어서 중심인물이다.”고 하였다.

출생과 신앙배경
아타나시우스는 300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그리스도인인 그는 자연히 그리스도교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철학과 신학교육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청년시절에 종종 광야로 은수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아름다운 표양을 보며 유익한 말씀도 많이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층 더 열렬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가 사막에 거주하는 동안 수도사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워 이를 스스로 지켜나갔다. 이러한 엄격성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심지어 일부 적수들로부터도 경탄을 자아냈다. 아리우스파에 대항하는 인물들 가운데 아타나시우스야말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그 이유는 그가 치밀한 논리 전개에 통달했다거나, 그의 스타일이 우아했다거나, 혹은 정치적 술수에 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아리우스파들의 유려한 점이라든가 다른 중요한 교구들의 감독들이 탐닉했던 사치에 빠지는 일없이 자기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 민중들 속에 뿌리박은 신념, 그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심오한 신앙의 원칙 등이 그를 강력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순결과 덕을 겸비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니케아 회의가 열린 325년에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한 젊은 장로였다. 그런데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죽으면서 아타나시우스를 자기의 후계자로 추천했다.
그는 비록 젊었지만 동방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의 지위에 올라 이집트와 리비아의 교회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다. 그는 46년 동안 감독직에 있으면서 끈기 있게 아리우스 이단과 대항하며 싸웠다. 그는 5번이나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는데 4번은 아리우스파인 치리자에게, 한번은 배교자 줄리안에 의하여 결국 2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니까 5번이나 교회로 다시 불려가서 감독의 직분을 다한 것이다. 그가 일생동안 걱정하고 목적한 바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려던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 체계의 머릿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 삼위일체론을 거부하는 아리우스파를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신앙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들과 맹렬한 논쟁을 벌이고 투쟁하는데 보냈다. 그러나 정신적인 무기만을 사용하였지 다른 포악한 행동으로 그들을 제재하지는 않았다. 그는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했지만 상대편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권고는 할지언정 이것을 억지로 믿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정통의 원리를 그대로 지켰던 것이다. 샤프는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정정당당하며, 가장 존경받을 만한 인물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또 그레고리 나지안센은 말하기를 “나는 아타나시우스를 찬양 할 때는 곧 덕을 찬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인격은 모든 덕으로써 이루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사랑과 빛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갔던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시대적인 배경과 삼위 일체 논쟁
313년 이후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활개를 펴게 되었다. 황제와 고관대작들이 모두 다 기독교인들이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모든 불이익을 당하고 목숨을 걸어야 했던 순교의 열풍은 자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적 쇠퇴기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었다. 사회적인 기반과 출세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정도로 사회적 흐름이 뒤바뀌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풀무불 가운데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멈추자 어느새 안일함과 영적태만에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324년에 이르러서는 콘스탄틴이 갈라진 동방과 서방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황제로서의 장래의 성공은 옛날의 퇴폐적인 이교보다 그리스도교에 달렸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공공연하게 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이를 보호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되고, 그의 정책도 교회를 중심 삼아 세웠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잠재력이 로마제국을 다스려 나아가는 데 얼마나 유용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갖은 모양으로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힘썼지만 성과는 더디었다. 옛날의 전통과 이교주의, 사교주의가 아직도 로마에서 큰 세력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신성(삼위일체 논쟁)에 대한 상반된 견해로 감독과 감독이 서로 대립하고, 심한 충돌을 빗었다. 기독교 자체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외형상으로 제국은 하나였지만 신학적으로는 둘인 셈이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콘스탄틴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고 또한 로마 제국을 강화하며 단합시키는 목적을 위해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325년 수도 콘스탄티노플 건너편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첫 번째 교회회의가 열렸다. 318명의 감독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당시의 감독수는 제국 전체에 약 1800명이었다. 그중 헬라 문화권에서 목회하는 이는 1000명 가량이었고, 라틴 문화권에서는 약 800명이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견해가 나타났다. 정통적인 이들은 비록 숫자는 소수였으나 유능하고 영향력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감독이었다. 그의 수행원으로 온 아타나시우스는 비록 젊고 어렸지만 통찰력에 있어서 이미 미래의 정통주의 신학자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약 20명의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입장을 따랐다. 그리고 대다수는 유세비우스의 중도파를 따랐다. 그러나 오랜 논쟁 끝에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정을 가졌던 감독들이 거의 다 차츰 대다수인 정통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오랜 회의끝에 비로소 니케아 회의는 신앙고백을 만들어 냈다. “참 하나님의 하나님, 창조되지 않고 나신 아버지와 동질이시며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만들어진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여기에서 ‘그가 없었던 때라든가’, ‘그가 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자가 창조되었다든지 변하는 존재라든지 성부와는 다른 질이라든지’ 하는 용어들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대표들은 이 신조에 서명하기를 거절하였지만 그들은 모두다 유형을 당했다. 이제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이심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 신앙고백이 뜻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분인가? 아니면 거의 같은 분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를 애매하게 보았다. 결과적으로 논쟁은 거의 60년을 더 끌었다.
379년에는 신앙심 높은 데오도시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지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서방의 교회에서 니케아 신조대로 교육을 받았기에 아리우스의 주장을 용납 할 수 없었다. 그가 황제가 되자 니케아 신조는 로마제국의 신앙고백이 되었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 노플회의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확실하게 공포하였다. 이 신앙고백이 오늘날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모든 것의 조물주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한 분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아버지의 질로부터 탄생하신 독생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온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 창조를 받지 아니하시고 나신 분으로서 아버지와 동질이시다. 그로 인하여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만물은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강림하셔서 육신이 되시고, 사람이 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고 다시 오시리라,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니케아 신조 원문」


기독교 정통 교리의 수호자
삼위 일체 논쟁에 큰 영향력과 감화를 끼쳤던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전 생애를 진리를 바로 세우는데 모든 열정과 힘을 쏟았다. 그는 신학자요 행정가로서 탁월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종의 형체를 입기까지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그 완전한 겸손을 닮기 원했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신처럼 만들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며 또한 완전한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의 말년에는 정통 신앙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던 평생과는 다르게 평안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단을 반박하는 글을 쓰며 나날을 보냈다. 진정한 기독교 정통 교리의 수호자였던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비록 니케아 신조가 완전히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그는 진정한 승리자였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피조물을 보았고, 신학을 연구하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삼위일체. 그것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만 열리는 영원한 신비다. 그러한 신비를 볼 수 있는 발판을 다진 그의 삶은 신앙고백을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에 생생히 각인 될 것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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