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교회사1교실

[스크랩] 어거스틴의 사상이 현대에 미친 영향

류성련 2014. 5. 9. 19:50

어거스틴의 사상이 현대에 미친 영향

 

 

 


I. 들어가는 말

1. 연구의 범위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소유한 정신적인 역량에 버금하거나 그 이상이 되어야만이 가능한데 그것은 그 사상가의 해석이 가능해지는 전제이기에 그러하다. 그런데 이같은 작업을 어거스틴, 354년에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출생하여 430년 히포의 감독 (현재 알제리 숙크아라스)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교부를 연구함에 참으로 신중한 작업이 요청된다. 특히 어거스틴은 고전 시대를 마감하고 소위 새로운 세대, 중세기로 전환되는 전환기에 빛을 남긴 분이요, 종교 개혁과 루터가 그의 기본적 신학적 사유의 소양을 함양했던 교육 환경이 아우구스투스 수도원이었으며 그의 말대로 "어거스틴은 위대한 교회의 스승이다"한 평가의 기초 위에서 이 소론은 특히 그의 신학적 사유가 현대적 사유에까지 영향 미치고 있는 부분을 초점을 맞춰 어거스틴 사유의 현대적 해석의 현황과 이해와 함께 현대적 삶에 어거스틴 사상의 도전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2. 연구의 제한
어거스틴 사유의 근거는 ①신학적으론 바울적이요, ②철학적으론 신플라톤주의라는 점을 모든 학자들은 긍정하고 있는데 전자는 어거스틴의 모든 저술을 종합하여 바울 서간에 관한 언급들을 정리하면 거의 모든 바울의 주장들의 주석이 어거스틴으로부터 정리될 수 있는 양적인 면에서 분명해지고 있으며, 후자는 385년 회심의 철저한 변화 이후에 찾아온 그의 모든 활동의 목적이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살필 때 그의 주장의 표면에는 신플라톤주의의 색깔이 바울의 경우와 같지는 않을지라도 어거스틴 사상에 분명히 표출되어 나타난다.
특히 라틴적 분위기에서 철학과 그의 신학이 성숙되어 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시」란 그의 방대한 저술에서 희랍철학에 관한 그의 잘 정리된 이해들이 정리되어 있음은 본 저자가 중심 관점으로 희랍적인 배경에서의 성 어거스틴의 견해 접근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사려된다.
3. 연구의 목적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입장은 어거스틴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신학적 안목과 그를 둘러싼 사상적인 배경과의 창조적 조우를 보면서 오늘의 신학 함에 지혜를 분명히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는 사회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의 나라가 함께 평행선을 그으면서 동시에 하나로 역사의 피륙을 조성시켜 나가다가 종말의 순간에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도성이 승리한다고 보고 있다. 바로 이것은 그의 견해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나라와의 의존성, 초월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는 입장이어서 신앙인이 종교적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맹점과 세속 주의에 빠지기 쉬운 위험성도 극복하는 기독교의 아이덴터티의 강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거스틴의 그같은 입장은 오늘의 기독교가 Secularism 도전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향제시가 되고 있기에 신학자요 동시에 철학적인 어거스틴의 사상의 면모를 정리하는 목적을 그 곳에 두면서 이 소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II. 어거스틴 신학의 역동성의 토대
어거스틴 사상이 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그처럼 지속적인 영향을 긍정적으로 끼치고 있는가에 답하려면 우선 그의 사상적인 배경으로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의 사상적 배경의 역동성과 그의 독창성의 다이내믹이 그로 하여금 교회사에 우뚝 솟은 스승이 되게 했다는 정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 그는 복음서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바울에게서 신앙의 논리성을 체득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의 시대에 정신적 주류라고 볼 수 있는 프로티노스(Plotinus)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던 신플라톤 주의의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즉 신앙적 논리와 철학적 논리의 창조적 조화에 관하여 희랍의 철학가 데오도라코 풀로스에 의하면 "기독교라는 새 포도주를 신플라톤주의라고 하는 포도주 부대에 담은 자"라고 정리하고 있다. 특히 그의 정신적 항해의 길을 간략히 요약해 보면 i)세속 생활, ii)마니교에서의 방황, iii)신플라톤주의에 정박, iv)기독교 안으로의 귀의로 정리가 가능한데 이같은 생애 안에서의 단계적인 발전은 다분히 변증적이었으며 희랍적인 면모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말한 희랍적인 면모, 변증법적인 상태란 희랍철학 안에 이미 원숙하게 결실된 사유의 방법론이었다. [에로스]란 "끝없는 진리 추구에의 열정"이라 볼 수 있는 정신 활동은 어거스틴 사유 세계의 특징이다. 앞에서 말한 네 단계에서 어느 한 단계에만 안주할 수 없는 그의 영혼은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의 품안에 안식할 때까지 내 영은 안식할 수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마니교에서 방황하던 시절을 우리가 그의 고백록을 따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9년 동안이나 그들의 사상적 사슬에 매여 있던 철저한 습관의 사람이 전혀 다른 사상적 체계인 신플라톤 주의로 방향전환을 할 수 있었던 결단은 그의 영혼이 잠자지 않는 불면증 즉 피곤치 않은 에로스의 활동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 데오도라코 풀로스는 "기독교가 철학과 하나로 일치가 이루어졌으며 철학과 기독교가 어거스틴의 사유안에 형제애를 이루어서 클레멘트가 말했던 것처럼 「헬라철학은 기독교의 몽학선생」이란 개념이 어거스틴이나 모든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였다"라고 정리하면서 "기독교는 어거스틴에게 빛(내면세계의 조명과 믿음)을 제공했고 그의 정신은 소멸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열정은 강도를 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학문의 제일원리며 기본이 되고 있는 [로고스]의 학문인 철학은 인간의 문화사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루어 왔고 이루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기여는 지속되리라고 본다. 바울안에 있는 헬라사상, 어거스틴은 물론, 현대의 변증법적 신학, 네덜란드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키에르케골 등을 통하여 신학의 체계속에 깊이 침투하여(infiltration), 급기야 폴 틸리히에 이르러서는 그의 신학을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이란 별명을 줄 정도에 있다. 이같은 인접 학문과의 창조적 만남은 학문하는 오늘의 세계에 일종의 당연성으로 받아지고 있는데, 이미 옛날로 불려지는 어거스틴 시대에 그의 사유 안에 철학의 논리와 신앙의 논리인 신학이 공존 체계를 형성했음은 바로 거기에 그의 사상의 역동성이 내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가 토인비가 사도행전 17장 아레오파고에서 행한 바울 설교를 평하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만남이라'하고 있는 중요한 대목에서 주전 250년경의 천문학자면서 시인인 아라투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당시에 철학적으로 훈련된 청중들에게 대화의 문을 여는 방법을 사용한다. 훗날 고린도에 와서는 "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한 두 경우에서 전자는 철학과의 긍정적인 입장에서 후자는 부정적인 입장에서 사도 바울의 입장이 설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철학적 유산이 바울의 신학적 작업의 음양으로 협동적이었으며, 특히 부정적인 면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일원인 클레멘트가 그의 저술 「양탄자」란 곳에서 바울이 부정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철학은 일반적인 철학의 체계가 아니라 쾌락을 선으로 보는 에피큐러스학파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위와 같은 시대정신과의 창조적 관계 형성은 어거스틴 전통에서도 명백하다. 특히 그의 삼위일체론을 뒷받침하는 아리우스파 막시미너스와 토론에서 삼위일체의 정확한 이해 제시의 이론적 근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II]에 등장하는 [범주론]을 기초로 한다. 313년의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이후 325년 니케아 회의 이후에도 계속 아리우스의「윤리적 생애를 통한 예수의 신성화」견해와 아다나시우스의「한 본성」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규정한 입장 사이에 줄곧 정치적인 힘과의 역학 속에서 논란이 지속되었었는데 그 막중한 교회의 관심사인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성 정립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지지된다는 점은 어거스틴 사유에 헬레니즘 즉, 철학의 매력이 얼마나 컸던지를 가히 짐작케 한다.
그의 인식론에 있어서도 철저히 회의주의에 서 있던 「아카데미에 반하여」란 저술에 나타난 그의 질문과 대답은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는데 "과연 진리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행복과 관련하여 "모든 행복한 사람은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는 자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열렬히 추구하는 것이 획득 불가능하다면 어떤 인간도 행복할 수 없다"라는 전제와 함께 "그러므로 몇몇 사람은 어떤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어 "실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Si fallor, Sum)라는 부정을 통한 긍정의 재건까지 접근한 변증법적 인식에 도달한다. 즉 그의 인식론을 전개함에도 기존의 소크라테스, 제논, 키케로 등의 입장들을 근거로 발전시키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적 다이내믹의 근거로서 신앙의 논리에 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푸주랏이 그의 고백론은 인간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불굴의 작품(l'immortelle peinture ducoeur humain)이라고 명칭한 그의 영혼의 자서전에서 "매우 강한 열심으로 당신의 영인 경건한 성서에 몰두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 바울에 관해서 말이다"라고 피력하면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에 속한 자료들과 비교하면서 성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가 앞서 언급한 대로 마니교의 사슬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세계관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은 그의 영혼의 지칠 줄 모르는 탐구욕 즉 에로스였음을 밝혔는 데 그 전환은 마니교 안에 있는 폐쇄적 이원론 사상이었고 신플라톤주의 안에 있는 사상적 융통성 때문이었다. 즉 선과 악, 하나님과 세계 등이 전혀 별개로 접촉이 불가능한 이원론의 구조에서 신플라톤주의는 우주의 최고 절대자인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 ), 영혼( ), 영( ) 그리고 최하급의 물질로 구분되면서 이 구성 요소들 사이에 아래로 단계적인 하강을 하고 아래에서는 단계적으로 회고하여 상승하는 융통성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주변 인물들일 암브로시우스, 심플리키아노스, 빅토리누스 등이 신플라톤주의 사상 체계에 속한 그룹이어서 어거스틴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신플라톤주의의 체계를 이해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 있으며 또 어거스틴은 그 신플라톤주의의 체계에서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 안내를 통해 성경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들도 거기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철학 안에서) 다음과 같이 초대하는 소리를 듣지도 못할 것이다. "수고하는 모든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또한 많은 신플라톤 주의의 저술 속에서 구원자의 얼굴도 보지 못할 뿐더러 그의 놀라운 사랑,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한 말씀도 발견치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이 기독교의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진리인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전 생애를 통해 투쟁했다고 보여진다. "나는 당신의 안식에 도달하여 내가 만족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발견키 위해 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능력은 발견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과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향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시며 부르시는 그 분을 붙잡았다."
바로 여기에 어거스틴 사유의 능력이 되는 또 하나의 다른 기초가 있게 되는데 기독교의 진리였다. 기독교의 진리 안에서 새사람( ), 새로운 피조물( )이 되어서 [하나님 사랑]이 그의 생의 축이 되었다. 고백록을 기록한 목적도 보면 "amore amoris tul facio istuc : 당신의 사랑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글을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상태까지 이르며 더 나아가 성경에 관한 그의 기본적인 자세를 살펴보면 "당신의 성경이 나의 순수한 즐거움입니다"라고 고백한 후 그가 구했던 것은 그 비밀스런 지혜의 원천이 깨달아질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기 위함이었다. "당신 법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시간을 나에게 주소서. . . 왜냐하면 당신이 일정한 이유도 없이 그렇게 많은 양의 페이지 위에 그렇게 은밀하고 비밀스런 것들을 기록할리는 만무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술회하면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내면적인 조명" ( )을 자기에게도 달라고 겸손히 간구하면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그의 고백록에서 분석하고 있다.
위의 입장은 바로 어거스틴의 또 다른 한 면, 성서에 기초한 그의 사유 체계의 한 면을 보게 되는 것인데 즉 그의 사상의 동력이 철학적인 차용에서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성서의 빛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그의 신학적인 사유와 철학적인 사유의 복음적인 협동이 회심에 관한 사건을 정리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그의 사유가 후대의 기독교 사유 안으로 들어와서 그의 몽학 선생으로서의 철학과 어떤 작업을 벌렸는지에 대하여 그의 역사 이해에 기초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III. 어거스틴의 회심
1. 회심에 영향을 준 요인들
메타니아 ( )는 우선 그 성서 신학적 의미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식의 변화", "지성의 변화", "전인격의 변화"라 볼 수 있는데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중에 경험한 온전한 변화를 통해 삶이 이레네우스가 주장했던 바대로 삶의 새로운 장( - : recapitulation)을 구성했다. 특별히 그의 변화를 세미한 데 이르기까지 수사 학자로서의 탤런트를 잃지 않고 고백록에서 정리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믿음 이전의 생애와 믿음 이후의 생애를 철저히 분리시키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그러면 그의 회심에 영향을 준 일련의 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자.
첫째로 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성, 둘째로 삶을 통해 겪었던 만남의 사건들, 셋째는 지극히 작은 사도 바울의 겸손한 고백, 넷째는 무엇보다 중요한 어머니 모니카의 신앙적 배려, 다섯째는 개인적 삶의 쓰라린 비극의 경험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장에서는 이 만남의 사건들을 정리 해보고자 한다.
1) 삶의 진지한 추구로서의
어거스틴이 회심한 직후 그의 큰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친구 Alypius에게 달려가서 자기를 회심으로 이끈 말씀, 로마서 13장 13절을 기쁨으로 낭독할 때 Alypius는 그 뒤 로마서 14장 1절을 명상하며 어거스틴이 믿음의 성안으로 입성한 것을 환영하면서 그의 회심 후의 상황을 예측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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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 영혼은 당신의 품안에 안식할 때까지 평화를 누릴 수 없나이다.' 한 그의 고백을 보면 곧바로 회심을 통해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그의 삶과 신학함에 있어서 끝없는 추구를 감행한 삶이 진정한 대립을 향한 변증법적 삶의 진행이었다고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의 회심의 가장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완전한 생명의 고지에 올라 흔들림 없는 자연 계시의 통달을 향한 열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당시의 지성인으로서 시대의 엘리트들을 사로잡고 있던 희랍철학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그의 AD400년에 완성된 고백록이 오늘의 사람들에게까지 공감을 불러일으킴은 기독교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함도 있겠거니와 당시의 수사학 교사로서 잘 훈련된 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그의 헬라 철학을 통한 예비 교육( )이 "가장 진실된 철학인 기독교의 품안"으로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몽학 선생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는 점입니다.
2) 삶 속에 나타난 만남의 사건들
한편 그의 회심에 영향을 준 요인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또 하나의 회심을 전후한 개인 생활에서 만남을 가진 인물들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생애중 특별히 회심을 유발시킨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대상들을 살펴 보면 회심후 그의 삶이 윤리적으로 금욕적이며 또 고백적인 상태로 변화되고 한편으로 회심을 통해 결단적이고 급진적이기도 한 삶의 국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의 회심에 영향을 주고 있는 만남의 대상들 중에 이집트의 사막에서 영웅적인 금욕 생활로 당시의 많은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안토니 (BC3)와의 만남이다.
"만남의 신학자"마틴 부버가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신다"고 보았고 "너"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에 인간은 '영원하신 분' 을 만나게 된다"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평범한 사람이 감히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철저한 금욕적 생활의 성취를 친히 안토니가 보여 주었을 때 진리 탐구에 끝없는 열정을 불태웠던 그에게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참회록에 수도사 안토니와의 만남후 철저히 안토니와 같은 전적인 변화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입장을 보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나를 회심케 했고 그럼으로 나는 더 이상 여자를 (아내를)취하지 않을 것이요, 이 세상의 약속들을 더 이상 취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금욕주의냐 하면 어거스틴의 사상에 의하면 철저히 금욕주의가 되고 그러나 세계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세상을 이탈하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금욕주의다. 형태를 취하는 세상과의 역동적 관계를 이루는 위치에서 기독교의 위상을 정리할 수 있다. 그같은 분명한 위치 확립이 어거스틴이 안토니와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후대 수도원 운동의 여러 문헌 가운데 나타난 처녀성(virginity)에 관한 입장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안토니와의 만남은 그의 신앙관에 분명한 획을 긋는 세계 내적 금욕주의 입장을 체계화했고 만남의 중요성을 구체화했다.
3) 바울을 통한 감동
한편으로 어거스틴이 마니교에서부터 계속적으로 연구해 오던 paul의 사상은 어거스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의 일관된 입장이다.
특별히 R.A. 머로우는 바울에 관한 모든 주석이 어거스틴의 저술 속에서 발견될 정도로 바울의 입장과 일치한 신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의 회심 직전의 클라이막스, 위기의 순간에 바울의 고백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라는 겸손한 고백을 감당치 못할 자로다(고전15:9) 전하면서 겸손함이 없는 자신의 재발견과 바울의 겸손한 덕에 놀라움을 표한다.
물론 마니교에 있을 때에는 계속 그들의 주장에 따라 바울에 관한 이해를 하고 있었으나 마니교에서의 바울 이해는 종합적이라기 보다는 단편적이었고 그들의 전이해 즉 신학적인 편견으로만 바울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훗날 바울에 관한 종합적이고 정당한 이해가 이르렀을 때는 마니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취약점을 극복한 순수 바울적인 신앙과 신학적 입장에 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겸손한 고백이 그의 세속적 욕망 추구에 매진하고 있었던 상황에 한 도전을 제시하였고 그의 생애에 하늘의 생수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영적 각성에 한몫을 담당했다.
4) 어머니 모니카의 후원(support)
32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종으로 온전한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어거스틴의 배후에 산들바람처럼 동행했던 어머니의 사랑의 후원(support)은 어거스틴의 회심의 사건에 빼놓을 수 없는 만남의 요인이 된다. 이교도인 아버지보다도 더욱 어머니에 관한 짙은 영향을 술회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의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모성애는 마치도 바닷가의 부드러운 바위라 치면 부성애는 그 바위를 향해 돌진해 오는 파도에 불과한 것임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특별히 불신의 아버지에게 보여준 신앙의 인내와 덕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잘 묘사되어 있고 그를 향한 모성은 위대한 모범이 되었다. 어거스틴이 나이 30세 초에 세상의 욕심을 따라 밀란을 향하여 어머니와 이별하려 할 때 보여준 이별의 아픔을「모니카의 고통」이란 항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를 떠날 때 어머니에게 여행하는 친구를 마중하기 위하여 부두에 나간다고 속이고서 당시의 최대의 문화 중심지인 밀란을 향해 몰래 떠났는데 그같은 망동을 어머니는 개의치 않으시고 아들을 위해 홀로 남아 눈물로 하나님의 면전을 축축이 적셨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가 밀란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뒤, 얼마 지나자 그의 생애에 어머니의 중보의 기도로만 해결되는 심한 중병을 앓게 되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 같은 심한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에 감동을 받아 세례를 요청했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그때와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도움을 청해야 할 중요한 때에 냉담한 자기를 이상히 여기며 어머니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가 역사 함으로 자기의 영적이며 육적인 이중적 죽음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힘입게 했노라고 고백한다.
"그와 같은 두려운 공격이 내 어머니의 자애의 가슴속에서 극복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질병은 치료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그 사랑을 나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녀의 해산의 고통, 육체를 이 세상에 출생했을 때 겪었던 그것보다도 성령을 통해 나를 출생케 했던 것이 더욱 심했다. . . 계속적으로 당신에게만 향해진 그같은 기도들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오! 자비의 하나님! 당신은 하루에 두번씩 빠지지 않고 계속 당신의 보좌에 희생을 드리는 한 과부의 순수하며, 절제와 함께 드리는 겸손하며 상한 심령을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술회하면서 아직 불신앙의 생활 속에 있었던 자기를 위해 기도한 어머니의 경건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생애에 어머니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회심 사건 이후 어머니와의 신학적 대화를 전개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는데 ①육체적 욕망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달콤한 것과 비교할 때 관심 밖의 것이며 그것과 관련하여 전혀 언급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점, ②육체적 영역의 것들을 넘어서서 태양, 달, 그리고 별들에 관하여 논하다가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영혼까지 이르러 이스라엘을 진리인 영원한 양식으로 먹인 소멸되지 않는 법, ③생명은 지혜요 지혜로부터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며 그 지혜는 영원한 지혜이다라는 점과 ④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것도 아닌 단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영원에 관한 주제 등을 어머니와 함께 토의했다고 전하고 있다.
신학적 지성과 신앙의 경건성을 소유한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에 직면한 어거스틴은 객지에서 영면하면서 보여준 어머니의 결단성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술하기를 (동생이 함께 동석하여 임종을 지켜봄) "너희들은 나의 몸이 어디에 묻히는 것에 개의치 말아라 유일무이하게 너희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있는데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주의 제단에 거할 나를 잊지말아라"라고 전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신학사에서 거성이된 배후에는 이같은 어머니의 감동적인 밑거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리라 본다.
5) 당대 지성들과의 만남
또 다른 한 요소 어거스틴의 회심에 영향을 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당대 신플라톤주의자였으며 기독교인 된 ①밀란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와 ②암브로시우스의 영적 아버지라볼 수 있는 Symplicianos와 ③당시의 최고 지성인 Victorianos 와의 접촉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철저히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하여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철저히 숨겨진 의미인 '영'적인 해석을 주장하였으며, 육신적 생각은 인간의 영혼에 거슬리는 것이고,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해 방향전환을 하는 것은, 곧 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영혼에서 떨쳐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한 편지에서 보면 성도들이 어떤 교회에 가게 된다면 그 지역 교회의 습관에 따라야 할 것을 권면하면서 암브로시우스의 밀란에서의 충고를 어머니에게도 따를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암브로시우스의 권위를 긍정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께서 밀란에 오셨을 때 토요일에 교회가 금식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매우 곤란을 느끼며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야 될는지 당황했으나 나는 그런 일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어머니 자신을 위해 암브로시우스의 충고를 따르도록(토요일 금식하지 않음)권면했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 입장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더 나은 규칙이 있다면 자신의 규칙을 따라도 되지만 자기의 주장을 존중하여 지켜도 무방합니다"라고 얘기했으며 그의 입장은 어떤 별다른 이유 없이 단순히 권위에 복종하는 양 토요일 금식을 포기할 것을 의도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분명히 어거스틴은 거기에서 일종의 거만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계속해서 말하길 "나는 (암브로시우스;역자주)로마에 갔을 때 또한 토요일에 금식을 했으며 여기에 있을 때는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교회에 가든지 지역 교회의 관습을 지키시기 바랍니다"라고 암브로시우스는 입장을 밝혔는데 "나로서는 (어거스틴)훗날 자주 이 주장에 관해 거듭 되생각해 보면서 그 입장을 하늘이 준 일종의 신탁으로 받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회심 직전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어거스틴에게 바울 신학의 총체적 이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음을 우린 중요하게 봐야 된다. 철저한 이원론의 입장에서 마니교의 교리 중 영지 주의의 요소는 바울이 마니교의 예언자였으나 바울을 영지 주의적 입장에서 이원론으로 보고 있기에 9년동안 마니교에 몸담았던 어거스틴의 바울 이해는 철저히 마니교적인 면과 영지주의적인 면으로 채색되어 오해되고 부분적인 이해만 갖게 되었는데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의 방향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바울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총체적인 이해를 접근할 수 있도록 도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묵시 문학적인 작품으로만바울 서신을 이해하는 마니교의 입장에서 탈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386년 8월의 밀란의 정원에서 나타난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을 통한 새로운 창조로서의 회심시까지 그의 선입주견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남아 있었다. "안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지라도 내 지체 안에 다른 법은 무엇을 의미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그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란 의미는 무엇인가 위와 같은 그의 추구는 철학적 전승에서 이어받았던 질문, 이 감각의 세계 위에 초월한 어떤 치료자로서의 대상을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더이상 찾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의사'이신 하나님을 간구하는 그런 방향으로 그의 사유 세계는 진보되었다.
특별히 암브로시우스를 만난 후 그의 영혼에 거룩한 불이 붙어 가는 즈음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심플리키아노스란 장로님은 구약을 비롯 바울 신학에 나타난 중심 사상을 설교화 할 것을 권유하였고 어거스틴은 바울의 새로운 이해와 함께 마니교에서 생각했던 구약 무용론을 탈피하여 암브로시우스를 통해 해석된 족장들에 관한 새로운 이해 즉 지혜에 의하여 그들의 영혼이 순수해진 상태를 각자 표현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르게 된다.
밀란에서 만난 어거스틴의 회심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암브로시우스의 영적인 아버지라 볼 수 있는 심플리키아누스 장로인데 그는 당시의 밀란에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을 시도한 가장 대담한 사람 중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사상적 배경에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상의 결합은 하나의 절대적이고 진실한 철학적 문화의 모습이었고 크리스챤 플라톤주의자에 관하여 언급한다면 플라톤 사상의 역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기독교로 집중된 듯했다. 사실 두 가지의 사상 조류는 같은 방향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탈 세속적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함과 같이 플라톤도 같은 이데아의 영역을 논하였고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플라톤의 제자들은 "사상계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러한 전반적 분위기에서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주어 마니교의 운명론적이며 폐쇄적인 이원론적 사유 체계에서 벗어나게 했던 신플라톤주의의 외부를 향한 확산(procession)과 내부를 향한 동시에 회귀(turning)하는 발전과 통합의 이론은 그가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게 했던 중요한 변증법적 사유의 진행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신플라톤주의의 지도자인 플로티노스의「Enneades」에 의하면 선과 악의 완전한 양극단의 분리의 체계에서 결코 악의 영역이 변화를 가져와서 구원의 길로 전환될 수 없는 마니교의 체계가 최고 선인 "EV↔ 인 다양한 변화의 첫 단계인 인식↔ (인식의 하부구조)↔최종적인 물질인 로 구성된 세상의 구조가 상호 하강하고 상승하는 역동성의 이론으로 어거스틴은 사상의 발전을 가지면서 악의 근본적인 문제가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었던 심플리키아노스 장로는 기독교의 우월성 안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그 성안에서 일어났던 어거스틴과 같은 분야 즉 문학적인 방향에서 많은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Marius Victorinus에게 일어난 감동적인 변화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는 순간을 가졌다. 그의 회심 상황을 어거스틴의 심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고백록에 나타난 에피소드를 여기 소개해 보기로 하자.
성경을 평소 연구하던 빅토리누스는 심플리키아노스 장로에게 고하길 "나도 크리스챤입니다"라고 고하자 심플리키아노스는 담대히 대답하길 "당신이 교회 안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저는 결코 당신을 교인으로 불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얘기들을 들은 Marius Victorinuus는 반문하길 "교회의 벽이 교인이란 한계를 그어줍니까?"라고 냉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영적인 갈증은 성서를 깊이 연구하게 했고 급기야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해야만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도 주님으로부터 시인 받을 수 있다는 마태복음 10장32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에 감화를 받게 되고 심플리키아누스 장로를 통해 교회의 입교자로서 공중 앞에서 고백할 것을 청했다고 한다. 그때 교회 당국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감안하여 공개 신앙 고백을 피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입교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그의 용단은 정반대로 공개 고백을 주장했고 그 결과는 당시의 사회에 파문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어거스틴은 설명하면서 그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록에서 전한다.
당신의 종, 심플리키아노스가 나에게 빅토리아노스의 일화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참으로 그와 같이되기를 열망하는 불타는 가슴이었습니다. 그가 율리안 황제의 칙령으로 크리스챤들에게 수사학과 문법을 가르치지 못하게 될 때도 과감히 그의 명문이었던 학교를 당신의 말씀을 제하고 폐교하면서 '어린아이 입술이 위대한 것을 접한 냥' 그의 전 생활을 당신에게 바치는 기회를 통해 더욱 행복해진 것 외에 그보다 더 큰 생애의 결심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같이 당시 지성들을 통해 지적 만족을 추구하다가 얻은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으로서 크리스챤 정신은 당시의 상황에 참으로 감동적이며 오늘 모든 지성인들의 지적 활동에도 중요한 방향감각을 제시하며 우리의 신학적 노력 마져도 인격적인 최고의 지성으로서의 하나님을 잘 변증하는 그런 긍정적인 자리에 서야한다는 것도 암시를 받게 된다.
2. 전체 삶의 "once for all"로서 그의 회심
1) V-day
앞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회심에 직접 간접 영향을 준 여러 요인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장에서는 그의 생애 중에 일어났던 순수한 사건으로서 회심 사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보며 그리고 그의 생애에 철저한 변화를 정리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증진코자 한다.
어거스틴의 회심이 일어난 때는 마니교 이원론의 사슬에서 반대하여 신플라톤주의의 체계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신선한 빛 줄기를 느끼고 있던 A.D 386년 8월 밀란의 정원에서 였다. 그의 나이 32세의 순간이었는데 깊은 심연에 놓인 그의 생애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만나 주셨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가 밀란의 정원에서 마음의 평온을 위해 열망하고 있을 때 근처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집어서 읽으시오 집어서 읽으시오"하는 노랫말을 들었고 마치도 천사들이 자기 귀에 쟁쟁히 들려주는 멧세지인냥 도전되어 친구 알리피우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바울 서간을 펴게 되었고 눈이 가 닿는 곳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는데 로마서 13장 13절 이하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란 말씀이었고 그 말씀을 정독해 가는 동안 절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솔로몬의 지혜서는 하나님의 선물에 의하지 않고는 절제( ; Continentia ; self-command) 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참고)
A.D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가 스스로 생각하길 12사도와 동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공언하면서도 임종시까지 세례 받길 거절했던 완고함과 그의 회심한 직후 A.D 387년 친구 알리피우스, 그의 아들 Adeodatus와 함께 부활절 날 세례를 받기로 결단하고 자기의 고향 타가스테에 가서 평신도 중심한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은 그만큼 그의 회심은 급진적인 상황의 돌변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고백록」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전쟁의 장면이 심하면 심할수록 승리의 기쁨은 커서" 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 사건을 천군 천사가 함께 기뻐할 것인데 회심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생애를 짓누르고 있었던 불순종 습관이 그로 하여금 온전한 해방에 이르지 못하게 했던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은 설명하고 있다.
두 가지의 원함이 나의 인격 속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하나는 옛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하나는 육적인 것이었고 또 다른 것은 영적인 것이었는데 그 둘은 서로 대항하고 있었으며, 경쟁하고 있었고 내 영혼을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과거의 습관이 못내 자기의 영혼을 얽어맨 사슬이었고 그 사슬에서 자기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무능력을 발견했고 그 순간 에베소서 5장 14절 ". .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한 위로를 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법은 습관의 명백한 횡포라는 것을 분명히 보이듯 단지 그는 말로만 "즉시! 잠시 후에! 잠깐만! "하고 대답했지 어느새 습관은 자기 영혼을 점령하고 있었고 자신을 유인하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매일의 습관적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에겐 고통만 더해 가는 지루한 나날이었다고 부언한다. 그러한 곤고한 영혼의 주인공 Augustine에게 V-day가 회심을 통하여 찾아왔는데 하나님의 자비를 향하여 상승하는 그의 의지의 노력을 통해 땅으로 하강하려는 어둠의 역사를 박차고 전진했으며, 그는 폭우 같은 눈물과 함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어느때까지 입니까? 언제 우리의 진노가 끝이 나게 됩니까? 우리의 불운을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아! 언제가 마지막입니까? 내일입니까? 언제까지나 내일입니까? 왜 지금 당장이 아닙니까?"라는 절규의 기도였다.
이같은 간곡함에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히 임했고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치료로 새로워지는 축복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개인의 축복만이 아니라 그 이후 전 서구 역사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축복의 사건이 되었다.
2) 새로운 창조
작렬하는 아프리카의 열정을 뒤로하고 사라 없어질 세속적인 영광을 추구하여 그렇게 열렬히 만류하던 어머니 모니카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사 학자로써 성공의 길을 걸으려 했던 그에게 돌연히 찾아온 변화의 역사는 ①선과 악의 반율 ( )을 극복하며 ②모든 회의 ( )를 뛰어넘는 통달의 ( ) ③32년간을 끈질기게 기도해 오던 어머니의 기도 응답의 축복인 새 창조 그 자체였다.
여기에서 그의 회심의 사건이 그처럼 중요한 새 창조였다는 몇 가지 점을 그의 신학적 물음 몇 가지를 정리하고 싶다. 우선 그의 시간개념의 인식에 있다. 고백록 11장에서 질문하면서 정리해 나가는 시간개념은 다음과 같다.
시간은 해, 달, 별같은 천체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 .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 시에 시작되었고 한 곳의 찬송가를 찬송할 때 몇 소절을 앞으로 더 찬송해야 할 것을 알듯이 현재라는 시간 위에서 과거와 미래를 헤아릴 수 있다.
특히 그는 영원과 현재시간의 관계를 단절로 보지 않고 비록 영원이란 하나님의 시간이 현재 시간 위에 그리고 밖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이 현재시간과 동시적으로 현존하며 견고하게 서있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와같은 개념은 Plotinus의「Enneades」에서 암시되어 있고 어거스틴의 후대 인물 Boethius(480-524)에게서 더욱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 인간의 시간은 지나가지만 (passes)하나님의 시간은 동시적으로 서있다(stand)라고 정리하고 있다.
당신의 시간은 지나지도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가기도 하며 오기도 합니다. . . 당신의 해는 하루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날은 어떤 날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날 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내일에 길을 제공하지 않는데 그것은 어제부터도 이어온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의 회심이 새 창조였다는 의미심장한 모습은 회심 이전에 미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 사랑의 발견과 함께 헛된 행복의 추구에서 탈피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의 사랑을 표시하기 위해서 고백록을 기록했으며 동시에 그가 회심 직전에 그처럼 두려워했던 성적인 위안을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릴 공포에 있었던 육욕에 이끌린 비참한 상태를 극복하고 최고의 선(summum bonum)을 말, 가치나 욕망, 목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으로 관련 짓는 변화가 일어났다.
육체는 어떤 장소 안에서 몸무게에 의해 균형을 잡고 위치를 결정한다. . . 어떤 물체들이 질서에 어긋났을 때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안정을 회복한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다. 내가 놓여 있는 어떤 곳이건 사랑에 의해 중심이 잡혀지고 있다.
인간의 욕망 추구가 아닌 온전한 사랑으로 동기화된 삶을 재건한 어거스틴의 변화된 사건은 참으로 바울이 고린도 전서 7장8절-9절에서 미혼 남녀에게 권면한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한 말씀을 따라 절제의 길을 따르면서 동시에 살아 충만한 생애로의 새 창조가 일어난 그의 서간문 중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라"(요한1서 4장 9절을 기초한 Tractatus in Epistolarn Johannis ad parthos 에서)라고 크리스챤 행동 지침을 주기도 한다. 얼마나 어거스틴이 소유의 상실에 대한 공포에서 희생을 원하는 방향으로 철저히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 모두가 미루어 알 수 있겠다.
3) 신학함의 starting-point으로서의 회심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쓰고 있었던 시점은 그의 나이 40세 초기였다. 그리고 그가 힙포에서 감독이 된지 5년 지나서인데 감독직에 오른 것도 교구 성도들의 요청이었다는 것과 함께 그가 그의 전 생애를 술회하면서 특별히 그의 유아 시절, 어머니의 모유가 부족한 이웃 아이들이 어머니의 젖을 통해 양식을 공급받을 때 보여 주었던 시기와 질투등 한편으론 부끄럽기 조차한 자기의 행위들을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소개해 나갔던 점은 회심을 통해 재창조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 더욱 삶에 가치있고 행복한 시절을 보여주고 있다는 단면이다.
동시에 그가 종신토록 이단과 전투하는 생애를 보냈던 모습은 신학함에 회심 사건은 그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원천이요 기초요 starting-point 이라는 점을 강화해 주고 있다.
교부 중 잊을 수 없는 인물, [아다나시우스]가 남긴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인카네이션한 이유는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인격체"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란 주장 속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먼저 "말씀이 육신된"그 중대사의 진정한 정신에 우리가 완전히 접목되는 진정한 회심이 없이는 그 출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참회록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 당신의 어떤 다른 종류의 선의 필요성을 갖고 있지 않고 영원한 평온이시며 당신은 안식 그 자체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회심이 있기 전, 성 어거스틴은 정처 없이 인간이 세운 숱한 윤리 체계, 철학 체계에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일어난 그의 회심 사건은 철저히 하나님의 종( )으로 탄탄한 섬김의 길을 걷게 했다.
이같은 사실은 그의 저서 [행복에 관하여] (De Beata vita)란 저서를 헌사한 데오도로스에 관한 그의 입장 변경을 보면 더 한층 돋보인다. 밀란에서 어거스틴에게 신 플라톤 철학을 소개하기도 했던 그는 지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신성한 여가"(dignified leisure)를 위하여 번잡한 공적인 삶을 이탈했었는데 이점을 어거스틴은 높이 칭찬하게 되었다. 훗날 그의 고백록에서는 냉담해져서 "터무니없는 교만으로 부풀어져 있는 사람"으로 평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술회하기를 40년전 교양 있는 크리스챤으로 그를 묘사했을지라도 너무 지나친 상태가 된 것과 고위 관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과 관련해 그를 칭찬했던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 바로 그의 삶과 신학적인 기본 입장이 철저히 회심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3. 어거스틴의 회심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
1) 의 見解
현대 희랍의 기독교 철학의 대표자로 꼽히는 학자 중 는 그의 [철학과 기독교 연구]에서 어거스틴에 관한 항을 페이지까지 할애하고 있는 데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첫째로, 어거스틴은 헬레니즘의 당시 모습인 신플라톤주의의 체계를 하나의 구조로 하고 그 속에 기독교란 내용을 담아 철학자요 신학자로 섰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란 포도주 부대에 새 술인 기독교를 담아 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주장은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5세기까지의 모든 문화유산들에게 문외한이 아니었다는 이해 속에 근거하고 있는데「The city of God」에 나타난 당시의 문화와 철학자들의 사상에 관한 그의 잘 정리된 그리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정확한 비판은 참으로 놀랄 만하다.
둘째로, 의 어거스틴에게 일어난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회심의 역사를 그는 이해하길 하나의 진리가 아니 유일무이한 진리, ( )를 향하여 간절히 열망하는 갈급한 영혼의 에 기초하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피조물에 관하여 갈망했던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한 바로 그 창조자를 갈망했다." 그는 말하길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피조물에 관해 갈망하거나 목말라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변형의 그림자가 전혀 없으며 한 점의 변화도, 그림자도 없는 바로 진리이신 당신 자신을 향하여 서 있었다." 실로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의 악도, 선도 다 선용하셔서 그를 향해 우리가 참 인식에 거하도록 하시는 살아서 활동하시는 분임을 인식할 수 있다.
셋째로, 그는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창조적 융화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생애는 바로 고전 헬레니즘을 뛰어넘는 본질을 갖고 있으면서 기독교는 영적인 삶이요 하나님에 관한 내적 이해이다 라고 정리한다. 회심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서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은 "자기의 눈물을 씻을 풍성히 준비된 분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어거스틴은 그의 회심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재창조하시며 인간을 위로하시는 분임을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2)생애를 쓴 Peter Brown의 견해
Augustine의 생애를 단계적으로 잘 정리한 Peter Brown은 어거스틴의 회심을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인 Antony(250-356 A.D)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구별하고 있다. 즉 안토니는 마태복음 19장21-22절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한 말씀에서 감동을 받고 고대 세계의 마지막이라 볼 수 있는 지중해 지역에 금욕적 경건한 삶을 통해 모범을 제시했다.
물론 Peter Brown은 당시의 elite층인 철학자들, 예를 들면 프로티누스 같은 이들은 플라톤의 「이상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그 도시 이름을 Platonopolis라 명명했다) 노력했으며 은퇴한 로마의 장관(prefect)인 다다너스 같은 이들은 알프스 산정에 있는 그의 마을을 철학자들의 크리스챤적인 변형으로서 'Theopolis' 혹은 'City of God'이란 명칭으로 변경시켰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에 관한 그의 입장을 보면 형태상으로는 그같이 급진적인 변화를 갖고 있으나 내용상으로는 전혀 차이를 갖고 있는 즉 결혼 생활 포기, 그의 공적 지위에서 후퇴, 재정상으로나 사회적인 특권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으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잊어버리지 않고 안토니의 영웅적 결단이 어거스틴의 지적인 프로그램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같은 질적인 회심 사건에 나타난 안토니와의 견해 차이를 Peter Brown은 시인 Zenobius란 사람에게 쓴 어거스틴의 편지를 통해 인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괴로움을 더해 주는 상처를 취급함에 있어서 몇몇은 고독함 속에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지만(couterizing) 반면에 다른 이들은 자유 교양학의 수단으로 그들에게 유하게 하는 기름을 바른다." 즉 그의 입장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회심 후에도 카시키아쿰에서 친지들과 함께 도서관에 소장된 전통적인 서적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자유 교양학을 더욱 더 세련되게 취급하는 자로 남아 있었다고 관찰하고 있다.
이같은 입장에서 선 Augustine이해는 그를 변증론 자로 이해할 승산이 크다. 즉 시대적 상황 특히 문화적 상황에서 기독교의 논리적인 증명을 시도하려는 그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은 Peter Brown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크리스챤 인문주의자로써 철학적 내용을 신학화 했으며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아덴에서의 설교를 통해 보여 주었듯이 당시의 문화적 전통인 B.C4세기천문학자 의 싯귀 "신의 소생"( - )이란 문귀로 자기에게 계시된 창조의 신, 사랑의 신인 하나님을 변증하면서 설교했던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4세기의 사람들은 흩어져 있는 은하수처럼 지중해 연안 곳곳에서 수도하고 있었던 수도사들의 무덤은 별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건에 관한 진정한 의미의 토론이 안토니의 시대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그같은 이해들은 금욕적인 에 입각한 사회적 유대와의 단절을 그들의 수단으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거스틴의 회심 속에서 그같은 분리 현상과 함께 동시적으로 명쾌한 명료성을 갖고 가장 진실하게 숨어 계신 하나님을 증명해야만 할 것을 약속하면서 구름을 통해 빛이 확산되듯이 단계 단계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줄 이론적 계획을 가지고 문화적 엘리트의 유산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3) R. A. Markus의 견해
R. A. Markus는 Peter Brown의 제자로써 그 스승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따르면서 어거스틴의 회심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나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초대 기독교의 마침」(the end of Ancient christianity)이란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그는 " Non nomine sed opere "즉 "명목상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기독교"란 후렴귀를 내세우면서 도덕적인 열정과 타성과의 끝없는 투쟁을 주장하는 펠라기안의 입장과 어거스틴의 크리스챤 평범성(christian mediocrity)을 대치하면서 어거스틴의 회심론의 입장을 설명해 간다. 사실 펠라기우스는 크리스챤 삶에 있어서 성숙성을 주장하면서 심지어는 "악하게 행하는 것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가 더 나을 것은 못된다"라고 주장하면서, 도덕적인 열정주의를 내세우면서 타성과의 끝없는 투쟁을 요청한다. 이같은 입장은 오늘의 성숙한 시대에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도덕적 노력으로 구원에 도달이 가능하다고 본 「기독교의 비종교화」입장과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사려된다.
그러니까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총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 속에 내재한 의지의 힘만으로 하나님의 완전에 도달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며 제롬이 펠라기우스를 다음과 같이 풍자했듯이 "스코트랜드의 죽이 푹 퍼진 것처럼 펠라기안은 인간성에 내재하고 있는 취약점을 부풀게 하고 있다"고 한 것처럼 자유의지가 소유되어 있다는 그것은 그 존재가 자유롭다는 의미 그 자체는 아니다 라고 어거스틴은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 중심에 선 견해를 피력했다.
이와 같은 차이를 R. A. Markus는 정리하면서 그 둘의 이론적인 차이가 결혼과 처녀성에 관한 현실 문제로 구체화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록 회심 후에 그 자신은 독신으로 살았을지라도 결혼에 관한 그의 신학적인 입장은 니케아 회의에서 그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충분히 당했던 Paphnutius의 주장, 즉 크리스챤의 결혼에서 발생하는 부부지간의 성행위는 순결과 같은 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한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의 결혼 제도는 그의 원죄의 유전설과 함께 인간 자신의 영광과 비참과 양대 지류가 된다는 입장이라고 사려된다. 동시에 애매하긴 하나 "결혼은 좋은 것이고 독신은 더욱 좋은 것이다"라는 주장도 발견되고 있다 즉 그의 회심이 몰고 온 사유의 변화는 그의 회심 전에는 플라톤의 Symposium에 등장하는 Diotima훈련처럼 펠라기우스의 금욕주의의 길에 서 있었으나회심을 통한 그의 위치는 도나티스트들과 같은 외적인 분리주의라도 아니었으며, 내적인 분리주의자였던 Pelagian도 아닌 하나님의 빛 아래서 본질적인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을 주장했던 신학자요,철학자였다. 특히 이점에서 R. A. Markus는 어거스틴의 세례 받음의 의미를 과거와의 확실한 정화로 그를 치료하는 단번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일생 동안 계속되는 회복으로 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convalescence)
이상과 같이 어거스틴의 A.D 386년, 나이 32세 때의 깊고도 진한 복음적 경험인 회심 사건을 살펴보았다. 특히 본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영향력이 세속 사회를 향해 희미해져 가는 오늘의 정황에서 어거스틴의 회심 사건은 ①신학함의 starting-point로써 ②인생의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참된 행복의 기초로써 모든 인간을 향한 경건한 메세지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살펴보았다.
그같은 중요성을 안고 어거스틴의 회심 사건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여러 주변의 요인들이 하모니되어 그의 회심 사건을 향해 밀려오는 해변의 파도처럼 밀고 왔으며 거기에 여타 기독교의 감동적인 지도자들에게서처럼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변화시켰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고대와 중세의 획을 긋는 전환점에 서서 시대적으로 그의 인물됨과 그의 영향력은 컸지만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서양 문화사에 불굴의 패러다임이 되고 있는데 그의 영적인 투쟁과 고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정신사에 우뚝 솟은 인물이 되게 했다. 특히 신학적 내용의 변증을 시도했던 성자는 역사의 흐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선구자로서 인정되고 있는데 그만큼 그의 작업은 역사 위에 견고히 관련을 맺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은 역시 뚜렷이 그의 삶의 여정에 일어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회심이 일어나는 순간의 객관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즉 그의 회심이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점에서 기회를 따라 다시 한번 그의 역사 철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사려된다.
학자들의 흥미 있는 그의 회심에 관한 이해도 그의 회심 사건의 의미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 만큼 오늘의 신학도들에게 회심과 신학도와의 긴밀한 관계성을 재삼 인식할 수 있었고 각인의 회심 사건에 의해 그의 사고와 크리스챤의 삶의 방향이 설정되고 있음도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IV.어거스틴의 역사 이해
어거스틴은 역사와 문화에 관하여 처음으로 체계화한 철학자요, 신학자이다. 특히 그는 역사를 ①신적으로 ②자연적으로 ③이데올로기적으로 ④경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여러 구분 속에서 ①번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역사가로서 역사와 문화가 신의 섭리인 말씀과 계획으로 발전된다고 본 사람이다. 즉 역사의 발전적인 법칙이 바로 거룩, 하나님, 신의 법칙에 놓여 있다는 입장이다.
두개의 도시와 문화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요, 다른 하나는「세속의 나라」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전에는 바로 그들의 방법 즉 야만적이고 죄된 방법으로 살았다. 그들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새로운 삶이 창조되었고 새로운 도시, 문화가 세워 졌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인간의 도시는 실수 투성이요, 죄와 어둠의 문화요, 갈등과 불안, 그리고 불만족의 도시이다. 하나님의 도시는 비록 땅과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다양한 문제들 속에 구원과 문제 해결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같은 두 종류의 이질적인 나라가 오늘의 역사를 이루고 있음을 명백히 하면서 성서 안에서 7단계의 역사적인 변천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데 특이할 만한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의 7일과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는 완성의 기간을 6일로 삼으심은 우연이 하니라 역사가 6단계로 전개되어 갈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태복음1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아담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바벨론에서 예수 시대까지, 예수부터 재림까지의 4단계 외에 아담에서 노아까지,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두단계를 첨가함으로 「Civitas Dei」에서 역사의 단계를 구성해 놓고 있다. 어거스틴의 이 구분은 맨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며,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의 생애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독창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구분이다.
특별히 그의 역사 구성에서 상당히 제1단계인 아담과 노아의 기간 어간에 발생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의 출발 이전 가인과 아벨의 구분은 가인은 「자기애」에 집착되어 있는 문화라면 아벨은 「하나님 사랑」에 관계된 도시여서 이 세상에서 존재가 발견되고 있을지라도 영원히 왕노릇하게 될 몸의 부활과 함께 지상에 얽매일 그런 나라가 아닌 지극히 높은 곳에 위치한 나라이며, 이 세상과 별개의 독립성이 존재함을 밝힌다.
제7단계인 안식의 나라, 주의 재림 이후에 있을 완성의 단계를 앞둔 제6단계를 노년기에 비한 어거스틴의 흥미 있는 유비는 참회록의 유아기에 관한 시기와 질투에 관한 회개와 관련하여 모든 사물에 관해 충동 없는 노년의 침착함을 대비하면서 그리스도의 출현 이후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숙함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거스틴이 본 역사 발전의 구성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지도자와 하나님의 뜻(절대정신)-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비춰지며 집중된다고 보면서 그들은 선물로 받은 그들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빛을 비추어서 타인들의 종교적인 열망과 형이상학적인 갈증을 채워 준다. 이들은 역사의 위험성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와 같은 위험성과 맞붙어 싸우는 많은 이들의 운명과 고통과 투쟁을 표현해 준다. 즉 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한 기관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 백성들의 의식과 집단이 이 역사 발전의 구성 요소가 된다. 대중은 결코 개인 개인의 영향만 받는 그런 수동적인 것만이 아닐 때가 있다. 그 안에 자체의 대중들에게 속해 있었던 각 개인들의 정신 집합체들을 소화시키며 동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민속 음악 그리고 대중 음악은 근저에서 창조적인 면모를 가진 강도높은 형이상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개인과 백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각자 한편은 다른 편을 전제하고 있다. 함께 공존하고 있고 서로 예속되고 있다. 결코 양립되거나 반대되지 않고 있으며 두개의 축은 역사와 문화 발전에 함께 기여하고 있고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 함께 구성 요소가 되고 있다. 만약에 장구한 문화와 전승을 창조해 온 정신을 소유한 각성된 개인들이 국가를 다스릴 때 역사와 문화의 흐름에 있어서 세계 역사의 빛나는 장을 갖게 된다.
셋째로 개인과 백성의 협동이 문화 발전에 요인이 되고 있다.
역사가 두키티데스는 지도자로서 페리클레스의 사건을 분석하며 기술할 때 개인의 가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페리클레스는 백성들을 지도하며 인도하는 중에 "백성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고 백성의 고통과 슬픔과 분노와 정신적인 억압하에서 백성의 분노를 자제시킬 충분한 가치를 소유한 정신으로 그 위기를 대면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에게서도 그의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 분명히 둘의 협동 관계를 통해 악의 세력이, 그에 반해 선의 세력이 역사 속에 정착되어 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넷째로 헬레니즘이나 기독교 같은 위대한 사상들이 역사와 문화 발전에 요소가 된다. 위대한 사상, 차원 높은 사유 등은 개인이 생존하며 백성이 교육되는 이상이다. 만약에 인간사에서 헬레니즘이나 기독교 같은 위대한 사상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영혼이 황폐하게 되었을 것이요, 정신은 어두워지고 공허하며 혼돈했으며 본능적이며 야만적이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점에서 역사의 중심으로 「위대한 사상」에다가 매우 큰 의미를 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 존재를 움직이며 인간의 삶을 채색하며 역사를 형성하며 세상을 움직이는 최고의 가치로서 「사랑」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데 위대한 사상과 역사의 동력의 중심으로 사랑 없이는 앞으로의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그는 보고 있다. 참회록13권에서 "한 소년이 그의 몸무게에 의해 자신의 위치를 안전하게 설정하듯이. . . 어떤 사물들이 질서를 벗어나면 불안하여 질서에 되돌아와 안정을 회복하듯이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요, 어떤 장소에 내가 놓여 있든 간에 나는 사랑에 의해 지탱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하면서 그 개인의 삶의 터전뿐만 아니라 전 삶의 영역의 균형을 "사랑"에다가 놓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요한 일서 4장7절과 8절을 근거하여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무엇이든지 하라"는 「하나님의 도성」15권에 나오는 사랑의 명령은 어거스틴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다섯번째로 어거스틴은 역사의 발전 요인을 경쟁 내지는 시합으로 보고 있다. 인간성 내부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요소로 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발전에 필요한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경쟁심 내지는 시합은 역사 발전의 요소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경쟁 즉 시합이 기독교적 각도에서, 정당한 범위 내에서, 윤리적 각도에서 유지되어야지 전쟁이 방지되며,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며, 적대 감정이 유발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고 있다. 어거스틴의 이같은 역사 발전을 위한 제한은 칸트가 그의 「철학적 시도」란 저술에서 "숲속에서 나무들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보지 않는가? 숲속에서 한 나무가 물과 햇빛과 자연의 혜택을 누려 다른 나무보다 더욱 왕성하게 뻗어 다른 가지를 넘어 하늘을 찌르고 그 옆의 다른 나무들이 거추장스럽지 않게 혼자 자라나는 나무일지라도 경쟁이 없는 나무도 어떤 경우에는 가지가 휘어지고 형편없이 자라나지 않는가?라고 정리한 내용과 같이 homo homini lupus(사람과 사람 사이에 여우와 같이 싸움이 일어난다)는 전쟁상태를 방지하는 범위 내에서 즉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의 빛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경쟁 내지는 시합이 바로 윤리적이 되며 법칙이 되며 인간적이 되는 발전적이며 성숙되어 가는 만족할 만한 경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위와 같이 방대한 역사 철학이 담긴 그의 저술을 통해 바울이 에베소서 4장4절에서 6절 사이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위에 계시고 그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가운데 계시도다"라는 말씀처럼 역사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도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V. 현대로의 변천
전장에서 어거스틴의 사상의 역동성에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창조적 종합이란 점과 이 창조적 종합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 존재가 참여하는 385년의 8월 밀란에서 경험한 회심의 강한 역사 등을 살피면서 간략히 그의 역사 이해에 접근하여 그의 사상의 역동성이 그의 역사 철학이요, 신학의 골자라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 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고 있는 역사 발전의 여러 요인들을 그의 저술을 분석함으로 점검해 보았다. 그러면 그가 갖고 있는 영적인 동력이 바로 후대 거성들의 중심 사상이 되고 있고 현대라는 사유 체계 속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 되고 있음도 분명히 점검해야 하는 데 이 장은 그런 면으로 관심을 기울여 보려고 한다. 먼저는 종교 개혁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그의 영향력을 먼저 점검하고자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가 (1483-1546) 1505년, 문학 석사가 되고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를 하게 될 때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으로 (낙뢰로 인한) 자기 생애의 길을 포기하고 영혼 구원의 깊은 번민으로 1505년 7월17일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때 독일의 그 수도원은 안드레아스 프로레스(1492-1501)와 요한 본스타우피츠 승원장의 개혁으로 중세 수도원으로서는 가장 대표적이라 할만 하였다.
이같은 그의 신학적인 첫 출발이 어거스틴적이었다는 점은 그의 사상 가운데 나타난 「두 왕국설」을 통해 특히 어거스틴의 개념이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자유의지의 개념에 있어서도 완전한 자유의지의 개념보다도 이성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적인 관심사에는 자유의지가 가능하지만 믿음과 영적인 관심사의 경우에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형식적인 자유」(a libertas in externis)를 언급한 점은 완전히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와 은총의 역동적인 관계를 정리한 어거스틴의 입장과 본질상 일치를 이루고 있다.
마니교와의 논쟁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는 가능성을 소유한 선으로 소개되면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인간 자유의지의 비참성을 잘 변증적으로 정리하면서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만 낙관적임을 밝히고 있다.
루터가 두왕국설을 정리한 Gerhard Ebeling의 「Luther,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란 저서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을 양분하면서 서로 뒤섞여 있다(intermingled)고 보고 있다. 이 점은 바로 어거스틴의 비유 가운데서 두 나라는 한 강물이 되어 흐른다는 입장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특히 우리가 루터의 교황의 권위에 관한 반박에서 「만인 사제설」이 주장되고 있는데 어거스틴이 힙포의 주교가 될 때 크리스챤들의 적극 지지로 되었던 (특별한 주교의식에 의해서가 아닌) 사실을 암브로시우스의 경우와 함께 들고 있음도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루터의 사유 안에는 어거스틴의 사상이 재발견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베를린 대학에서 죠지 빌헬름 프레드리히 헤겔(1777-1831)은 고전 철학의 최종 단계의 철학자라고 볼 수 있으며 13년 동안 슐라이허마허의 동료였다. 그는 일찍이 튜빙겐에서 신학을 공부함으로 크리스챤 이상에 기울어 졌으며 마튜 마놀드가 제기한 " Hebraism, Hellenism"에 관한 문제를 헬라 휴머니즘 즉 합리적 완전의 높이에서 본성과 네메시스(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비극의 심연을 묘사하는 사유 체계와 원리로 물들어져 있으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하는 은총의 수락자로서 인간에 관한 기독교적 이해를 어떻게 철학적인 종합을 구하는 데 주력했다.
1806년 헤겔은「Phenomenology of spirit」「영혼의 현상」이란 저술을 통해 윤리적 질서, 문화, 문명, 그리고 예술과 종교와 철학 속에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의 객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철학 체계의 중심 사상이 바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를 논했던 어거스틴 사상의 재건임을 알 수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그는 옛 그리스의 문화에서, 로마제국 내에서 그리고 독일의 세계에서 세계 정신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Herder가 열어 놓았던 길을 답습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세계사는 자유 정신의 발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는 그의 입장은 인간 역사 속에서 그가 읽을 수 있는 내적 의미와 상승한 목적의 철학적 양태를 발견하려 하는 그의 의도와 함께 구체성의 배후에 있는 즉 전체를 포괄하는 어거스틴의 사유의 연결임을 찾을 수 있다.
헤겔 이후 현대의 정신 사조 속에 있는 전체와 주체의 대립에서 헤겔은 바로 구체적인 현실을 일맥상통하게 묶는 절대정신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데 이것은 곧 어거스틴의 신학적 역사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사려된다.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과 심층 심리학과 실존주의적 위기 신학의 주창자가 된 이는 네덜란드의 소크라테스란 별명을 가진 Soren Kierkegaard(1813-1855)이다. 그는 당시대의 네덜란드 주교였던 Mynster와 가족적인 차원에서 친분이 있었기에 매주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자기가 안수를 거부한 이유와 1850년에 출판한 "기독교 안에서의 훈련"이란 저술을 Mynster가 악평한 이유로 결별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곧 키에르케골을 통해 동시대의 기독교가 부르조아적이며 신약 성서적 기독교가 되지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란 저서를 통해 우리는 본질과 의미, 주어와 존재, 현실과 논리적인 것, 무한과 유한, 본능과 영, 인식과 믿음, 경험과 초월 등 대칭 상태에 있어서 사람은 의무적으로 하나를 택하든 다른 하나를 택하든 새로운 삶의 선택을 기회로 가져야 하며 결코 제 3의 선택은 없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키에르케골의 수도사적인 삶과 그 개인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삶의 경험을 철학화하고 있었던 그 점은 철저히 「고백록」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 이전의 상태와 믿음 이후의 상태를 술회해 나간 어거스틴의 상황과 일맥하고 있어서 키에르케골의 삶과 학문은 어거스틴 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를 들고 인간성 회복을 위해 일어난 운동은 프랑스 혁명인데 이 엄청난 비중을 갖고 있었던 사건을 냉소적인 자세로 바로 보고 있었던 이는 독일의 시인이요, 사상가인 괴테였다.(1749-1832) 괴테에게 있어서 어거스틴과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면 우선 그의 역사를 바라보는 견해와 사랑하는 아들 아우구스트의 죽음이 어거스틴의 아들 Adeotatus의 사망과 서로 연대되면서 그들 작품의 비극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그의 아들, Adeotatus의 의미를 자기의 저서 고백록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는 그의 아들과 대화 형식으로 엮은 「 」(선생)이란 책을 저술했는데 그는 거기에서 그의 아들의 영특함에 놀라며 더 나아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음을 상세히 기술한다. 그것처럼 괴테의 비극「faust」엘레니란 장에서 괴테는 주인공, 낭만주의로 상징되는 파우스트와 고전주의로 상징되는 엘레니를 결합시킴으로 거기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에브포리오나스란 아들을 극중에 등장시켜 그를 통해 새로운 자유와 삶의 용기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삶속에 이뤄지는 비극적 더 나아가 희망적인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정리하여 그들의 사상을 표현해 나가는 방법들의 유사성은 어거스틴 사유와 계속성이 오늘의 정신계 속까지 미치고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VI. 나가는 말
인간 문화재 중 불굴의 작품이라 할 고백록을 통해 우리는 그 사상적 다이내믹이 신플라톤주의의 에로스의 길, 복음서와 바울이 준 깊은 영적인 강화력이 합치된 성숙된 인격 형성으로 이뤄진 드디어, 하나님이 존재함을 안다는 그런 지성적인 인식에서 더 깊이 전진하여 (루터는 이런 회의적 인식은 곧 무신론에 도달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깊이 체험함으로 통달의 지식에 도달했던 어거스틴이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는 새롭게 된 인격이 전 존재 그리고 전존재가 터득한 삶에서 축적된 교육적 자양분들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확실한 근거를 밝히려는 분투하는 그의 삶도 살펴 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사상적 동력이 16세기, 18세기, 19세기 루터를 비롯 헤겔, 키에르케골, 괴테, 오늘의 현대까지도 사상적 거성들 속에 전개되고 있음은 A.D 3세기에 한 국지적인 영역에서 세계 속의 종교로 기독교를 부상케 한 그 때, 그 상황만 그의 중요성이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의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읽혀져야 할 그의 사상을 우리 인간성의 구원의 길잡이라고 사려된다.
한결같이 그 감동 어린 고백록을 칭찬하는 데 그와 같은 장르의 저술도 기독교 문학사에서 처음의 것이며 옛 시대의 저술이라기에는 너무 현대인들의 메마른 가슴에 고전으로 와닿는데 그 이유는 내용에서도 물론이지만 그 명확한 설득력을 동원한 수사학적 기법에 있음도 알아야 한다. 동시에 그의 예리한 통찰력은 현대의 사유 속에서 마치도 여러 가지 사유의 체계들이 각기 나름대로 콜롬버스의 발견처럼 새로운 사유의 체계인 냥 주장하지만 이미 어거스틴의 영적인 투쟁 속에서 그 같은 주장들이 서로 연관을 갖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본 논술은 현대의 거성들과 어거스틴 사상의 대화를 시작하는 정도에서 끝을 맺고 있는 데 한 시도에 불과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 이런 방향의 연구 시도가 활발히 전개되어야 하리라 보며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행하라"한 그의 중심 사상은 사랑의 사도 바울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 사상까지 도달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다시 예수의 뜻이 오늘날도 선포되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교훈이라 본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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