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아와 밀라노여행1 - 비스콘티성과 파비아 대학에서 페트라르카를 회상하다!
우리 일행 4명은 오늘 아침에 스위스 루가노에서 코모를 거쳐 밀라노 에 도착해서는
호텔에 배낭을 맡기고는 동북쪽으로 옛날 성곽 도시 베르가모 를 다녀온다.
동북쪽의 베르가모를 보고는 기차를 타고 밀라노에 도착하자말자 이번에는 서남쪽으로
예술과 학문의 도시 파비아 를 보기 위해 다시 기차를 타는 데.....
우선 벽에 붙어 있는 노랑색 출발시간표를 보니 17번 플랫폼에서 16시 05분에 출발하는
리보르노 LIVORNO 가는 기차를 타면 되는데 30분 가량이 걸린다.
이 기차는 등급이 IC (인터 시티) 인지라 EC (유로 시티) 처럼
유레일 패스 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좌석을 예약(구입) 해도 되고 안해도 되지만, 짧은 거리는 그냥 타도 무방하다!
6인실 컴파너먼트에 앉으니... 기차는 30분 가까이 들판을 달려서는 16시 33분에
파비아 Pavia 에 도착하는데 택시를 타니 단테광장 Piazza Dante 과 카스텔로 광장을 지난다.
비스콘티 성 까지 6유로가 나오니 우리 일행 4명으로서는 버스비와 비슷하네!
성 앞은 공원으로 꾸며 놓은지라 잔디밭과 벤치에는.....
처녀들이 선탠을 하거나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벤치에 앉아서
오후 한 때를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을 본다.
예전에는 일본의 성들 처럼 성을 지키는 1차 방어선이었던 성을 둘러싼 해자 는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물이 말라버려 잔디가 자라는 데.....
붉은 벽돌의 옛 성 은 수리중 인지 아님 월요일이어서 문을 닫은건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게 아쉽다.
여기 비스콘티 성 Castello Visconteo 은 밀라노의 통치자 비스콘티 의 명으로
1,365년에 건축된 벽돌이 겹겹이 쌓인 성으로 시립박물관이 있다고 하네...
이 도시 파비아 Pavia 는 로마시대 군사 거점으로 중세에 자유도시로 발전했으며
11세기에 파비아 대학 이 설립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 와 페트라르카 도 수학했다고 한다.
14세기에 밀라노의 통치자 비스콘티가 의 지배하에서 학문이 번성했으나...
16세기 이후 이탈리아에까지 손을 뻗친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으며!!!
그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을 당했기에
여기 파비아는 훗날 이탈리아 통일운동 이 거세게 타올랐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1,515년에 프랑스의 왕이 된 프랑수아 1세 가 북이탈리아를 침공해
밀라노와 이 도시 파비아를 장악 하니.....
이에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의 세력 확대를 근심하여
독일 황제 카를 5세를 충동질하여 서로 이간질 시킨다.
그 충동질에 넘어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가 북이탈리아에 군대를 파견하니
프랑스와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서는.....
1,525년에 여기 파비아 전투 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왕은 패배하고 포로 가 된다.
이에 밀라노는 독일 지배하에 들어가는 데 황제가 오스트리아는 동생에게
스페인, 네델란드, 나폴리와 더불어
밀라노를 아들에게 물려주니..... 파비아는 스페인령 이 되는 것이다.
1,525년 파비아 전투 는 참전한 병력의 수가 적어 프랑스군이 2만 4천에
독일이 2만3천명을 참전시켰다는 데,
당시는 오늘날곽과 같은 징병제가 없어 왕이 개인 돈으로 용병 을 고용하였단다.
스위스인 용병을 거느린 프랑스왕 프랑수아가 북이탈리아에서 남진하여
독일측 6천명의 수비대가 지키는 파비아를 포위 하자
독일측 이탈리아인 용병과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역 포위 한 전투였다고 하네!
당시에는 국민개병제하의 징병제가 없어 왕이 독일, 이탈리아인이나
스위스인 용병을 고용 하였다고 하니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왕의 개인 군대" 라고 보는게 옳겠네?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영국왕 리차드, 프랑스왕 필립과 더불어 참전한 독일왕의 대군은
프리드리히 왕 이 1,190년 터키 킬리키아의 강을 건너다 익사하자 해산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신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군대로서는 당장 행군 비용과 전투비용.....
그리고 다달이 월급을 줄 왕이 없으면....
한시도 유지되지 못하는 "용병의 한계" 인 것이다!
훗날 로마 교황이 프랑스와 손을 잡자 카를 5세는 군대를 가톨릭의 도시 로마 로 진격시키니
독일인 개신교도 용병 란츠크네흐트 들은 종교적 원한도 있어
재산 약탈로도 모자라 로마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학살 하였던 것이다!
용병제도가 무너지는 것은 훗날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 일어나
프랑스 왕의 군대가 흩어진후
혁명의 전파를 염려한 이웃나라들이 연합해 프랑스를 침략해 오니....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등 여러나라 군대의 침략으로 부터
조국인 프랑스 내나라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인들이 자발적으로 군문에 참가하면서 징병제도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
다시 지도를 보며 또 행인에게 물어서 골목길을 7~8 분을 걸으니 조그만 광장이 보이고
한 건물이 길게이어지는 데, 바로 "파비아 대학" 이다.
파비아 대학 Universita di Pavia 은 볼로냐나 파리 처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하나로 현재 보이는 대학 건물은 14세기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밀라노 공작 인 비스콘티 가문의 갈레아초 2세 가 파비아를 지배하게 되면서....
이 도시 출신 시인 페트라르카를 후원 하는 한편 파비아 대학 까지 설립했던 것이다!
대학교 앞은 바로 도로로 버스정류장도 있는 데, 자전거로 등하교 하는 학생들을 보며
교문으로 들어가니 마주치는 동상 은 누구일러나?
파비아 대학 Universita di Pavia 은 볼로냐나 파리 처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하나로.....
현재 건물은 14세기에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보자니 운동장은 없는 모양이네?
정문인지 측문인지 모를 문으로 대학교 내부로 들어가니 수많은 이들의 조각상 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을 보는데 이 대학 출신 유명인사 들인 모양이네?
*** 대학 구내 벽에 낙서처럼 생긴 이 조형물은 해시계 같네? ***
대학 구내에 역사박물관이 있다고 들은지라.... 그러면 레로나르도 다빈치 와 인문주의자
시인 페트라르카 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하여 이리저리 찾아다녀 본다!
페트라르카 는 단테 처럼 피렌체에서 추방된 서기의 자식으로
1,304년 토스카나의 아레초 에서 출생해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한후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에서 자리를 얻는다.
이무렵 성 키아라 교회에서 만난 라우라 라는 처녀에게 반해 연애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라틴어 서사시 아프리카 와
사랑의 빛과 어둠을 표현한 서정시 “칸초니에레” 를 쓴다.
한편 키케로의 연설문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을 발굴하면서
인문주의자로 되어 갔는 데......
1,348년 흑사병 으로 라우라가 죽자 심리적 갈등을 격는다.
그의 제자 보카치오 가 피렌체를 휩쓴 흑사병의 참혹함을 격으며 쓴
작품이 바로“데카메론”인 데....
그는 교황과 불화하여 아비뇽을 떠나 비스콘티가의 초빙 으로 1,361년에 파비아 로 온다.
만년에 파비아 근처 알쿠아 에 은거하며 단테의 신곡과 유사한“승리”를 집필했는데
저 비스콘티가의 갈레아초 2세가
메디치가 처럼 이런 "인문주의자를 후원" 했던 것이다!
그 갈레아초의 아들 잔 갈레아초는 1,395년에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밀라노 공작 겸 파비아 백작 지위를 받아 번영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한다!
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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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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