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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현대교회사 강의안 요약본

류성련 2014. 8. 13. 23:36

 

 

근현대교회사 강의안 요약본 II (근현대사 개론).  윤종훈교수(총신대학교)

 

I.근현대교회사 개론적 고찰

 

1.근현대교회사 특징적 구조.


근현대교회사 개관: 중세와는 전혀 다른 양상적 구조를 보였다.
중세의 천상적, 내세적인 자유의 약속으로부터 지상적, 현세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이 일어났던 시대이다.  아쉽게도 근세에는 건전한 신학이 아닌 인간의 이성과 자율만을 강조하는 신학으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따라서 근세사로 역사가 진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준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신다는 사상이 상실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신율로 특징지워진 중세와는 달리 근대와 현대는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율의 시대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신 중심의 사고(theocentric thinking)에서의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anthropocentric thinking)에로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case는 블란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 Rene Descartes)의 명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so I am).

이러한 중세에서 근대로의 신학의 변화는 르네상스와 자연과학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운동들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 문예부흥은 학술적 측면에서 인문주의(Humanism)의 발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인간성 연구’라고 정의될 정도로 인간중심적인 경향을 보였다.

2)자연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사고를 ‘중세적 신율적 이성’에서 근대적인 자율적 이성으로 전환시켜 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천문학 연구는 아이삭 뉴톤 경(Issac Newton, 1642-1727)이 출간한 “원리”(Principia)에 정리가 되었으며, 그의 원리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에 대한 기계적인 견해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주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뉴톤의 ‘원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 계시, 기적 등을 거부하는 비판적인 반종교적인 방향의 길을 열게 되었고, 자연과학과 이성이 인간사의 규범적인 힘으로 떠올랐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거부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세시대 당시 카톨릭교회가 “기독교 교리”를 각 “민족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개신교들은 이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함. EX) 사실 중세의 교황 이노센트 III (Innocentius III, 재위,1198-1216)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중세의 교회의 권세란 영적인 지배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지배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개신교는 그간 카톨릭교회가 교권과 속권을 다 차지하려고 시도할수록, 그리고 국가의 통치자가 교권을 침해하거나 교권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자 군림하려고 할수록, 그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통하여 저항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러나, 근현대인들이 추구해온 자율, 해방, 창조성은 교회와 국가내의 보편적, 절대적 지배체제를 거부함으로 인하여 신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 사회 온 영역에서 다원화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세적 다원화 성향은 교회 자체의 분열이 큰 원인이 되었다.
즉, 중세의 획일적인 신학구도 속에 사로잡혀있던 사람들이 종교개혁이라는 관문을 통해 ‘중세신학’의 한계와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시작. 그리고 진정한 신학과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 그러다 보니, 각자의 입장에서 성경과 전통을 해석함으로써 “신학의 다양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신학적 분열이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수많은 사회병리현상과 엄청난 혈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각 나라가 신봉하는 교파이외에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이단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명목아래 처 부수기 위해 전쟁이 발발하게 됨.  ex) 36년간에 걸친 프랑스 위그노전쟁(1562-1598), 20년간에 걸친 영국혁명 또는 청교도혁명(1620-1640)-이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것임, 30년간에 걸친 종교전쟁(1618-1648)이 발생됨.
그러나,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근대인들은 하나되지 못함의 아픔의 상처가 얼마나 큰가라는 역사적 교훈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고, 신앙의 공존, 공생의 중요성을 자각하기에 이르자, 계몽주의라는 이념적 사상이 태동되어 근대 민주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2.근현대교회사의 사상적 흐름

자율의 시대, 이성의 시대, 개인주의, 세속화시대가 이 근대교회사에 나타난 현상들이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사조의 등장은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는데 긍정적인 면도 없지않아 있었지만, 이는 대부분 사회의 병리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자율, 이성, 개인주의와 같은 개념과 이념들은 중세에 얽매였던 신학방법이나 교회의 형태에 매우 긍정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으나,  합리주의 성향적 흐름으로 인하여 소시니안주의나 합리주의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사조로 인한 사회병리 현상들이 각 교회와 사회와 정치 가운데, 속속히 드러나게 되었지만, 신앙고백주의적 정통주의, 경건주의, 퓨리탄운동, 복음주의적 부흥운동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진정한 교회관”을 세워가는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1세대의 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이 후계자들의 전수과정에 있어서 약간의 발전과 수정 작업을 거치게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신학의 흐름이 교리주의(교조주의, Dogma)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이 개신교 정통주의이다. 16세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 정통주의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1) 탈정통주의 (소시니안주의와 계몽주의/자연신론으로 진행).

반교리주의를 특징으로하는 소시니안주의는 전통적인 교리를 부인하고 교리가 인간의 판단과 사고를 제한함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율성과 해방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삼위일체의 개념이나 다른 전통적인 교리를 거부하게 되었다. 이 사상은 근대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소시니안주의가 전 유럽의 계몽주의의 길을 열어주었고, 자유주의의 포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2)루터교 내에서 발생한 경건주의(Pietism).

경건주의 운동은 루터교회의 영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루터교의 영역을 넘어, 개혁주의의 영역에 까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영향을 미친 운동이었다. 이 경건주의는 교회의 체험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이것은 다시 모라비안 운동을 통하여 존/ 찰스 웨슬리를 비롯하여 조지 휫필드의 영국의 부흥운동은 신대륙의 기독교에 영향을 미쳐 미국에서는 18세기 초엽에 소위 제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기까지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1789)과 자유주의 운동의 발흥은 근대사의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기독교 시대의 종말(즉, 중세시대까지의 교황중심의 기독교 교회체제의 종말)을 가져와 “기독교 이후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이 과정에서 계몽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로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돕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통기독교 사상에 반기와 변화를 요구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기독교 전통의 뿌리를 뒤흔들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의 고등 비평/ 미국의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자유주의 신학의 촉진제가 되었다.

 

3. 근현대교회사의 시대구분 (두 가지)

문화사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근대의 출발점을 14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Dante, Petrarch(1304-74), 복카치오에 의해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으로 보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교회사적 입장에서 볼 때, 이 당시는 아직 중세의 카톨릭적 구도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1517년에 발생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도 16세기가 되기 때문에 르네상스를 근세의 시작으로 정한다는 입장은 수긍하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두 사건 중 하나를 근대교회의 시작점으로 보는데, 그 중 하나는

 

1)155년 Augusburg Interim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

적어도 근대교회사의 시작점은 종교개혁 1세들이 일단락될 때와 일치한다는 주장임.
그러나, 문제는 종교개혁의 끝이 언제인가? 결정하기 쉽지 않음. 왜? 나라마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있었고, 게다가 종교개혁의 시작점이 달랐기에 일단락된 싯점도 달랐던 것이다.

루터가 서거한 연도-1546년, 급진종교개혁운동 선구자였던 카알슈타드(Karlstadt)가 서거 1541. 칼빈의 영향을 미친 Martin Bucer가 서거는 1551. 루터의 동역자/아우구스브르그신앙고백서 작성자였던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의 서거는 1560년. 이때 대부분 개신교회가 로마카톨릭에서 분리되어있던 싯점.
게다가, 카톨릭으로부터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그 생존권을 최초로 인정받은 싯점이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 1555년이다.

게다가, 영국=1558년 구교와 신교의 중도정책 추구자인 엘리자베드여왕이 즉위, so, 성공
즉, 영국 국교회의 지위가 확고하게 됨. 스코틀란드-1567년에 칼빈주의에 입각한 스코틀란드 장로교회가 국가교회의 지위를 획득. 프랑스, 화란 -1559(빠리), 1566(안트워프)에 칼빈주의 교회의 첫 총회가 개최. 칼빈주의의 진원지였던 제네바도 1564년 칼빈이 서거후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가 그 후계자가 됨으로서 세대 교체됨. 카톨릭-루터의 종교개혁에 철저하게 반기를 들고나와 “예수회”라는 교단을 세웠던 이그나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가 서거 1556년임. 1563년에 트리엔트 회의(1545-63)가 종료됨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음.
So, 종교개혁은 1550년대 또는 1560년대에 일단락을 맺은 것으로 추정. 이후로는 신앙고백주의 시대가 전개됨.

<소결론> 종교개혁1세대가 끝나고 종교평화 조약이 맺어진 1555년을 깃점으로 개신교 신앙고백주의시대가 열렸으니, 이는 근세교회사의 출발점.

 

2)1648년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The Peace of Westphalia, 1648).
1번과 같이 보면, 너무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즉, 근대교회사에 대하여 “근대문화사”로 접근하면 너무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가지게 된다는 주장. Ex) 근대교회사의 특징들인 개인주의 발흥, 세속화, 자연과학의 발달,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자율 등은 근대교회사의 출발점을 알리는 시대사조들인데, 이를 16세기로 보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주장이다.
Ex) Kurt Dietrich Schmidt, Gerald R. Cragg의 주장-유럽의 30년 종교 전쟁(1616-1648)이 끝나는 1648년을 근대교회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이유: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종교적 문제로 인해 1세기 동안 진행된 종교적 분쟁을 종식시키고 종교적 관용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건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유럽의 역사, 사회, 정치, 종교, 문화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기에.- 이는 종교개혁의 끝나고, 근대교회사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동안 특히 카톨릭의 카알 5세나 프로테스탄트의 프레드릭, 심지어 헨리 8세조차도 종교적 통일이 국가적 통일에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했지만, 약 1세기동안의 종교전쟁을 치루는 과정 속에서 특히 종교적 합일을 이루기 위해 수 십년을 싸워온 프랑스가 낭트칙령을 통해 얻은 교훈은 종교적 통일보다는 종교적 관용이 두 진영간에 더욱 바람직한 시대적 요청임을 자각함. 따라서 그동안 신성로마 제국을 꿈꿔오던 카알 5세 또한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통하여 그 야망이 붕괴되어 버렸다.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통하여 게다가 교황의 영향력의 상실을 가져왔다. 교황의 권위는 서유럽의 정치 현안에 더 이상 힘을 미칠 수 없는 지점까지 축소되었다.

이러한 제반적 상황을 고찰해 볼 때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된 1648년도를 근대교회사의 시작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3) 결론적 고찰:
사실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1세대는 역사선상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제반 교회사에 영향을 끼친 여러 사상적 발전은 1648년에 가서야 비로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특히, 신율적 구조에서 인율로 구조의 변경을 근대교회사의 특징으로 볼 때,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된 1648년을 근대교회사의 시작점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미 1555년 아우구스브리그 종교화의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근대교회사의 출발점을 알리는 “신앙고백주의/정통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
결론 - 어느 것을 선택하든 문제되지 않는다. 단지, 중요한 것은 이 두 사건은 근대교회의 출발점의 등불을 지폈다는 점이며, 이 두사건이 주는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함. 따라서, 이 근대교회사의 출발점을 알린 이 사건의 개요와 과정과 결과를 살피기로 하자.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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