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근현대교회사의 시대적 배경
윤종훈 교수(총신대학교)
1.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 (1555년) –The Peace of Augusburg.
1)배경: 1555년 독일내 루터란 프로테스탄트들과 카톨릭 사이에 맺어진 이 종교화의는 개신교가 구교로부터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생존권을 인정받는 공식적인 사건. 이를 계기로 개신교와 구교의 분리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맘. 카톨릭을 선호하던 신성로마황제 카알 5세(Charles V)는 당시 구라파에서 아니 전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큰 권세를 소유함. 이유: 아버지 필립에게서 프랑스 로렌지방, 퓨랑슈 꽁떼 지방, 화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거대한 영토인 부르군드 공국을 상속받음. 게다가 조부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타계 후 로마황제에 올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 크로아티아, 티롤 등 상속. 그의 최대관심사는 이제 종교적 통일을 통해 정치적 통일을 영구화하는 일임. 문제: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I(Fanncis I, 1515-47)와 동쪽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위협하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슐레이만 1세에 크게 좌우되고 있었음. 이 두 나라의 위협이 강대하였던 1526년 카알 5세는 스파이에르(Speyer)국회에서 루터파 제후들에게 양보하였으나, 사태가 호전되자, 1629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국회에서 다시 강경한 자세를 취함. 루터파 제후들은 이에 항의하였고, 그 결과 개신교도들에게 별명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이는 다름아닌 항의하는 사람들, 즉, protestants 라는 말임. 1530년에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열린 국회에서 루터파는 멜랑히톤(Melanchton)이 편찬한 [신앙고백](Confession of Augusburg)을 제출하고 , 그것이 부인되자 다음 해 1531년 슈말칼덴 동맹(League of Schmalkalden)을 체결하여 황제에게 대항하였다. 이상황에서 카알 5세는 오스만터키의 견제에 종교적 통일을 이루지 못함. 그러나, 정치수완이 좋은 그는 1544년 프랑스 프란시스1세와 오스만터키의 슐레이만1세와 끄러비에서 평화조약을 체결. 기회를 잡은 카알은 당시 바울 3세인 교황을 통해 1545년 트렌트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토록 함. 이를 통해서 개신교를 없애고자 함. 이를 깨달은 개신교측은 아무도 참여 안함. 이때 찰스는 독일내 종교적 통일을 위해서는 무력으로라도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제거코자 함. 그러므로 카알 5세와 프로테스탄트들이자 슈말칼덴 동맹국인 프랑스와 오스만터키를 중심으로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1546-1552년). 따라서, 이런 상태로는 개신교를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카알 5세는 당시 삭소니 공작 모리쯔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유명한 군주를 회유 설득해 자기 편으로 만들고 슈말칼트 동맹과의 전투를 벌임. 그 결과는 당연함. 왜! 당시 삭소니 공작 모리쯔는 매우 세력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카알 5세에게 넘어가 버리자 그 전쟁은 카알5세 측에서 가볍게 승리할 수 있게 됨. 그래서 그는 1547년 여름무렵에는 독일을 자기 발 아래 굴복시키게 됨.
그러나, 독일 북부 마그델부르그(Magdelburg)지역은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루터파였으므로 카알 5세에게 계속 반항. 이를 정복코자 또 다시 개신교의 삭소니 공작 모리쯔를 이용했으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황제를 배반키로 작정. 그 사실을 몰랐던 찰스 5세는 모리쯔로 하여금 막델브르그의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 모리쯔는 전투에 참전했다가 오히려 군사들을 카알을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를 공격하자, 카알은 곤경에 빠지게 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카알 5세는 1552년 8월 2일 파싸우 조약(Passau)을 맺고, 그는 독일 정책의 실패에 낙담하여 동생인 페르디난트(Ferdinand)에게 권력을 이양하고는 수도원에 칩거. 1555년 2월 5일, 모든 종교적 문제들을 단번에 영구히 해결짓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회의가 아우그스부르그에서 회집됨. 그리고 그 해 9월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약을 체결.
2)종교화의 내용: 모든 영주의 개혁권: 종교개혁의 권한은 각 지방 영주들의 고유권한으로 황제도 백성들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영주의 영역은 그의 종교: 어떤 영주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거민은 그 영주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 영주가 결정권. 지방 분권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됨. 이것이 후대에 가서 독일이 난립되는 배경을 마련하게 됨.
이주권: 영주의 종교에 반대하는 자는 자기에게 맞는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 상당히 민주주의적인 냄새를 풍기기 시작함. 이는 아마 중세에서 근대 르네상스의 영향의 결과로 이해됨. 이젠 중세처럼 한 국가의 백성이 단순한 왕의 하수인, 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중세의 인간관에 변화가 있음을발견하게 됨.
교회령 유보: 교회령의 성직자 가운데 개신교로 넘어간 자는 성직을 상실하고 이제까지 교회령에서 받던 급료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됨. 이 규정에 의해 중세 이래로 교회령은 계속 가톨릭의 손에 남게 됨. 즉, 카톨릭 아래 머물러 있던 성직자들의 재산, 땅, 급료는 더 이상 개신교 것이 아님.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교회령 유보조항을 받아 드리는 대가로 교회령 내의 개신교를 신봉하는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자유시(自由市): 가령, 프랑크프르트, 보름스, 슈파이어, 슈트라스부르그 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도시에서 카톨릭 예배당이 존속하는 것을 허용한다.
3)역사적 의미: 이를 통하여 황제가 지배하는 보편적 국가에서 영주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민족국가로서의 변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영주의 권한이 강화되어 1555년 이후로는 영주가 자기 관할권내 종교에 대하여 성직자 임명권, 재정권, 교리적 문제까지 관여하게 됨. 카톨릭이 개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사건. 이후로 개신교는 단일교회의 형성에 실패하고 수많은 교파교회로 분열되는 상황에 빠지게 됨. 교회의 분열의 계기: 아우그스부르그 종교화의는 비록 개신교 종교의 부분적 자유를 선언한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이는 또한 전 유럽의 개신교의 자율화로 인한 denomination(교파)분열의 출발점이 됨.
결론 : 이제 신앙고백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됨. – 교파가 분열되자, 자신이 속한 교파의 위상을 정립할 필요를 느끼게 됨. 그러니, 당연히 자신의 교파가 제일 성경적이고 모범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교파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각 교파별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됨. 따라서, 근세의 기독교는 각 나라별로, 교파별로, 조직과 교리를 달리하게 됨. – 각 교파의 조직원리, 교리, 각각 채택한 신앙고백서, ex)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 1530, 영국교회의 39개 조항,1536, 프랑스의 갈리아 신앙고백,1559, 화란 개혁교회의 벨기움 신앙고백 1561, 영국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7-8.
신앙고백주의로 흐르다 보니 뭘 강조하게 되었는가? 신학적 차이점이 발견됨. 따라서, 우리의 신학이 최고이며 정통이며 제일 성경적이며 성경의 원리에 가장 충실하며 정확하다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신학적 논쟁과 사소한 신학적 차이에 대한 설전이 일어나게 됨.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당시 살던 사람들에게는 신앙교육이 살아있는 체험적인 신앙 보다는 교조주의에 빠진 dry한 신학으로 채워지게 됨. 그러니, 백성들 가운데 무슨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삶에 활력이 있겠나? 그러니, 다음에 역사선상에 등장하는 경건주의와 삐딱하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신앙고백주의를 살펴 본 소시니안파들은 또 다른 자유주의의 물꼬를 트게 되는 것임.
역사가 신앙고백주의로 흐르는 현상이 팽배해지자 단순한 지식을 위한 지식, 신앙이 아닌 신학적 신앙추구에 염증을 느끼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인격과 인격의 만남, 주님과 나와의 인격적 체험적 만남을 추구하게 됨. 이것이 16세기 경건주의의 출발점인 것임.
2. 프랑스의 개혁교회와 낭뜨칙령: 위그노 = 제네바거주 프랑스인 개신교도들과 나아가 프랑스 본토의 개신교도들에게 확대 적용됨. 1)과정: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 이후 수년 후 프랑스에서는 신교와 구교 특히, 칼빈주의자들과의 위그노전쟁(Huguenots, 1562-1598)이 발발. 전쟁원인: 칼빈주의 세력의 확장으로 인한 구교의 불안과 불만. 즉, 1555년 최초의 프랑스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설립. 1559년 2000개 교회, 신도수 40만으로 급증. 1559년 개신교 총회가 결성, 칼빈이 초안한 갈리아 신앙고백(1559년)과 교회 권징조례가 채택됨. 이를 우려한 인물: 칼빈주의를 종교적 이단이요 정치적으로 반국가적이라고 간주했던 프랑스 왕 앙리(헨리) 2세(Henry II).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그노들은 비밀집회를 계속적으로 가지게 되었고, 이에 동조하는 수많은 프랑스 국가 고위층들도 이 집회에 함께 활동하게 됨. 앙리 2세 뒤를 이은 프란시스(프랑스와) 2세는 너무 어려서 앙리 2세의 친구 기즈(Guise)공 프란시스와 로렌 추기경 찰스(Charles, 샤를르)가 섭정을 맡게 됨. 이 때에도 당연히 섭정을 맡은 카톨릭파들인 이 두 사람은 칼빈주의를 계속적으로 반국가적으로 간주하고 억압을 자행. 그러나, 이제 프랑스도 약간의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변화의 계기가 종교적 학살로 부작용을 낳게 됨. 즉, 프란시스 2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동생 찰스 9세가 왕위 계승. 비록 11살 밖에 되지않는 아들을 섭정한 어머니 까뜨린 드메디시는 배후의 실권자가 됨. 그녀는 적대적인 그룹들을 해체시킴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증대시키려는 정책을 사용. So, 카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62년 쌍제르멩 칙령(Peace of Saint-Germain)을 반포하여 제한된 범위나마 종교의 자유가 허용됨. 따라서, 위그노들은 성채도시(Walled town)이외의 지역에서는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수 있게 됨. 그러나 카톨릭 측에서는 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1562년 3월 1일 Vassy에 모여서 예배드리던 1,200명의 위그노들을 향하여 기즈공 프란시스가 이끄는 200명의 병사들이 처 들어와 무참히 학살한 참사가 발생함. 이 학살은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일곱 차례에 걸친 종교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음. 이 사건으로 위그노 74명이 순교하고 124명이 부상함. 이 전쟁은 1563년 3월까지 계속됨. 1563년 3월 12일 [앙브와즈 칙령](Edict of Amboise)에 의해 평화가 회복됨. =이는 장차 10년 후 엄청난 대학살이 자행될 것이라는 무언적 선전포고였음.
2) 성바롤로매 대학살(1572년): 마침 이 날이 St. Bartholomew의 축제일 이었기에 이렇게 불리움. 당시 프랑스 위그노이던 쟌 달브레의 아들 나바르의 앙리(Henry of Navarre)와 카톨릭 신자 샤를르 9세의 누이인 마가레뜨 공주(Marguerite of Valois) 와의 결혼식이 성대히 거행-이는 일종의 양측의 화해무드코자. 이 결혼식에 대하여 위그노들은 매우 환영함- 이유-이를 통하여 신구교의 신앙의 자유의 바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기에, 그러나, 반대로 카톨릭측에서는 극렬히 반대. 1572년 8월 16일 이 결혼예식은 성대하게 거행됨. 그 후 일주일이 지나자 이에 분개한 카톨릭 교도들이 프랑스내 위그노 지도자들을 무참히 학살 시작. 23일 토요일에 시작된 이 학살은 26일 화요일까지 4일동안 계속됨. 그 결과, 1572년 10월까지 약 2만명의 위그노들이 살해됨. 앙리 3세가 죽은 후 아들 앙리 4세가 칼빈주의를 정략상 포기하고 카톨릭에 귀의하여 왕위에 오른 후 1598년 4월 13일 낭뜨칙령(Edict of Nantes)을 발표. 5월에는 베르덩조약(The Treat of Verdun)을 체결해 1562년이래 계속되어온 위그노와의 갈등을 종식시킴. 이 칙령이 폐지되는 1685년까지 프랑스 내에 두 종교가 공존할 수 있게 됨.
당시 교황이었던 Gregorius XIII는 이 대학살의 소식을 듣고 Te Deum (laudamus) 여기서 Te Deum이란 교부인 Ambrosius가 만든 찬송가임. 즉, 하나님 당신을 우리가 찬양하나이다 라는 성가를 부르도록 명령. 게다가 이 피뿌림의 잔치를 자축하고자 기념주화까지 발행하게 함. =피에 굶주린 늑대나 사자와 이 교황과의 유사점 :1) 둘 다 짐승들 2)피만 보면 드라큐라가 된다. 3)하나님이 모르고 사는 것들 4)마귀의 앞잡이.
3) 낭뜨칙령 의의: 비록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로 남아있게 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프랑스가 근대적 국민국가로 계속 발전해 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 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것도 최고로 잘 섬기겠다라고 고백하면서 살아왔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인들 사이에 단 3개월 만에 2만명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가 아끼고 사랑하는 자들을 처참하게 죽였다는 이 역사적 피흘림의 현장을 상상해 보라! 중세에 수많은 종교재판이 있었는데,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를 가장한 이단들의 가라지 역할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실제로 이를 위해 종교재판이 열려서 주님의 나라가 손상되지 않게 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으나, 대부분 종교재판을 통하여 죽이되 처참하게 때로는 찢어서 죽이고 게다가 또 한번 더 죽이기 위해 화형시켜 버리는 살해행위들, 어떤 이는 이미 죽어 매장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발굴하여 다시 화형식을 거행하던 모습들..... 우리 주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하셨겠는가? 약간의 신학적 차이점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거하는 수단과 방편으로 사용했던 역사의 잔재들 .....
진리수호,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20,000명이 처참하게 살해됨. 카톨릭은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자세에서 성바돌로매 대학살을 자행했을 것임. 주님의 답변: 그 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3.종교전쟁 - 독일 30년전쟁과 웨스트팔리아 조약. 1)원인: 독일의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약은 독일에서 일시적이나마 평화를 가져왔으나 완전한 해결책을 아니었다. 사실 이 화약은 개신교 교파 중 루터파에게만 종교의 자유를 준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위그노전쟁을 통하여, 화란은 칼빈주의자들이 독립전쟁(1568-1609)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독일의 칼빈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임. 게다가 가톨릭 진영에서는 반동종교개혁 결과 1560년 이래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 세력이 현저하게 회복(폴란드, 독일)됨. 게다가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 칼빈주의파의 세력이 매우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러자 카톨릭 진영에서는 칼빈주의 측에 대하여 무력으로서라도 개신교를 완전히 멸절시키려고 생각한 반면에, 개신교 특히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그들의 생존권을 무력으로라도 보장 받으려고 했기 때문.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세기 초 불안을 느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칼빈파의 팔쓰(Pfalz)선제후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어 연합(Union)을 결성하고(1608), 다음 해에 카톨릭은 바리에른 공을 중심으로 동맹(League)을 결성하여 맞섰다. 2)문제의 발단 및 진행: 전쟁의 발단은 보헤미아에서의 분쟁이었다. 이곳은 휘스파 운동의 본고장으로서 개신교가 많았고,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한 민족감정이 강하였다. 원인이 다양함
<직접적인 원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제 루돌프 2세가 1609년 보헤미아 (오늘날의 체코의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그동안 허용했던 종교적 관용을 루돌프 2세의 동생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겸 헝가리 왕이었던 마티아스(Martthias) (1557-1619)가 이 종교적 관용을 철회하고 개신교 억압정책을 사용. 개다가 1617년에 황제 마티아스는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페르디난드 대공(Archduke Ferdinand)을 보헤미아의 왕인 동시에 제국의 계승자로 지명(신성로마 황제, 1619-37)함. 페르디난드 라는 인물은 카톨릭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파. 개신교를 이도교로 이해하는 사람이었음. 이에 분개한 개신교들은 1618년 5월 마티아스의 두 충신인 황실관리들인 마르티니쯔와 슬라바타 그리고 그들의 비서들을 프라하 시내의 흐라진(Hradschin)성 밖으로 집어 던짐. 물론 이들은 죽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앞으로 닥칠 30년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후, 마티아스는 죽고 페르디난드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교황 바울 5세와 합세하여 개신교에 대항. 그 결과, 페르디난드 2세는 카톨릭의 지원에 힘입어 프라하에서 수많은 개신교도를 처형하고 보헤미아를 재차 카톨릭화하게 됨. 개신교는 힘없이 무너짐.
<경과> 이 소식을 전해들은 덴마크 왕 크리스챤 4세(Christian IV)는 1625년 독일 개신교도들을 구출하기 위해 페르디난드 2세와 전쟁을 벌이면서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됨. 사실, 크리스챤 4세가 전쟁에 개입한 근본적인 이유: 종교적인 것보다는 정치적인 전략 성격이 강했음. 덴마크는 1629년에 거의 패전의 분위기가운데 있었는데,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 2세, Gustavus Adollphus II (1611-32)가 전쟁에 개입. 스웨덴이 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2). 1)니더작센과 폼머른 지방이 신성로마황제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스웨덴의 정치적 역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정치적인 고려때문. 2)독일이 가톨릭 진영에 넘어가면 스웨덴의 개신교도 존립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종교적 고려때문. 여기서 스웨덴은 큰 승리를 거둠. 그러나, 여기서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는 전사하게됨. 그의 사후에도 스웨덴은 계속적으로 전투에 나가 승리함.
여기에 프랑스가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전투에 개입. 이쯤 되자, 페르디난드 2세는 전쟁이 자신에게 손해라는 사실을 자각. 게다가 독일인들은 지리멸렬한 전쟁에 염증을 느낌. 이에 스웨덴정부와 프랑스도 언제나 휴전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문제는 명분! 드디어 1648년 10월 24일 독일 서부의 웨스트팔렌 지방 로마 황제 페르디난드 3세(1637-57)와 프랑스왕 루이 14세(1632-1715),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됨. 이 조약이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에서 체결되었다 하여 웨스트팔리아화약이라 불리움. So, 지리한 30년 전쟁의 종식을 가져옴.
3)결과: 웨스트팔렌 조약을 통하여 종교개혁 후 계속된 개신교와 카톨릭의 대립이 종식되고 진정한 종교적 자유가 주어져 유럽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 듬. 이는 근대사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음. 이를 통해 1555년 아우구스브르그 종교화약이 재확인되면서 칼빈주의에 대해서도 종교적 자유가 보장됨. 화란과 스위스가 신성로마 제국에서 분리하여 독립 민족국가를 형성했음. 따라서 30년에 걸친 종교전쟁 이후 지성인들은 더 이상 종교 또는 기독교신앙에 대하여 회의 뿐만 아니라, 이젠 무시하기 까지 하게 되었고, 종교는 신앙의 차원보다는 거의 이성적 차원에서 접근하게 됨.
재미있는 현상: 종교적 자유가 완전히 주어지자, 프로테스탄트 가운데에서도 감사와 감격에 찬 신앙의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하기 보다는 자율이 방종으로 흘러가는 현상을 목도하게 됨. 그래서, 1648년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된 즈음에 유럽 사회문화 속에는 인간의 자율성,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기에 이르게 됨. 게다가 자율성, 이성이 신앙 앞에 자리잡게 되고, 이젠 18세기 초엽이 되자 아예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사고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인간의 이성의 판단이 신앙을 대신하게 됨.
이 세가지 현상 즉, 1.아우그스부르그 종교화의(1555년), 2.성바롤로매 대학살(1572년)과 이에 대한 1598년 4월 13일 프랑스 낭뜨칙령. 3.종교전쟁 - 독일 30년전쟁과 웨스트팔리아 조약(1648)은 중세의 천년의 역사를 접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한 근대교회사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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