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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Ⅰ.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Ⅱ. 자살의 역사적 이해Ⅲ. 자살의 원인Ⅳ. 자살의 유형-(4) 자기 처벌성 자살
4. 자기 처벌성 자살
자기 처벌성 자살은 문자 그대로 자기를 스스로 처벌하려는 의도에서 시도하는 자살이다. 자신을 스스로 처벌한다는 것은 깊은 양심의 가책에서 일어난다. 자신이 부주의하거나 잘못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경우 죽음으로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스스로 죽어 잘못을 사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이 자살은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 자신이 나서 책임을 지는 성격이 강하다. 이런 자기 처벌성 자살은 매우 양심적이어거나 소심한 사람이 시도하는 편이다. 주변 사태가 도도히 자신에게 밀려오는 상황에서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버텨낼 만큼 심리적으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처벌성 자살은 사실과 전혀 다른 측면도 있어 때로는 안타까움을 갖게 만드는 죽음이다. 일의 잘못됨과 실제로 잘못됨에는 어느 정도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에서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잘못했는가와는 무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잘못됐다는 그 일을 깊이 자각하는 가운데 더욱 양심의 가책이 유발됐을 수도 있다. 이때 자살 시도자는 자신의 자살로 모든 것이 일단락되거나 정리되고 마무리되기를 의도한다. 이런 자기처벌성 자살은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양심의 가책에 의한 자살
지나친 양심의 가책은 자살을 부르기도 한다. 다같이 잘못했어도 이들은 더 많은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분명히 자신이 잘못한 경우로 판명된다 해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될 것을 양심의 가책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처벌한다. 이러한 자살은 개인적 측면이 강하다. 동일한 잘못을 범했다 해도 모든 사람이 반드시 자살로 그 책임을 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잘못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의 잘못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스스로를 처벌하는 성향이 높아지는 이유다.
지난 2004년 10월 성실했던 형사계 반장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포천 여중생 사건을 맡은 강력계 형사 반장이었다. 포천 여중생 사건이 일어난 이후 1년 동안 사건 해결을 위해 매일 한 번씩 사건현장을 다녀갔을 정도로 성실했던 그는 평소 성실한 형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유서에서 포천에 와서 휴가 한 번 제대로 갔다 오지도 못하고,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도 못하고 스스로 삭히느라 술을 마셔야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아내같이 싫으면 싫다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못해 여기까지 온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인 딸에 대한 걱정과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가정에서도 모범적이었다는 것을 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강력계 형사라는 외길을 걸어온 그의 자살에는 다른 원인도 있을테지만 유달리 양심의 가책이 큰 성격 탓도 크다.
양심의 가책은 정신분석에서 초자아가 강한 사람에게서 더 표출된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부모의 말에 순순히 순종하고 사회의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들이 초자아의 위협에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낀다. 이런 점에서 양심의 가책이 심한 사람은 수치심이나 죄책감도 더 강하게 느낀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대개 부모의 양육 환경에서 찾는다.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억압 때문에 자아가 위축돼 있거나 자기존중감이 낮은 상태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우리는 수치심이 자기존중감이 낮은 데 대한 열등 의식의 일차적인 신호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가치를 위해 체면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특성도 더 크게 작용한다. 이런 태도는 내면 세계를 가지려는 심리지만, 이 내면 세계를 자신이 지켜내려는 자기만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실제로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은 수치심에 민감하다. 그런 이유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수록 수치감을 숨겨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들의 양심의 가책이나 수치심은 어떤 의미에서 존경받고 칭찬받고 싶은 근저의 자기애적·과시주의적인 소원들에 대한 방어기제다. 물론 이들은 병리적 자기애 지시, 특히 전부 아니면 전무의 법칙을 따라 인정과 존중, 칭찬을 받고자 하는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만 부적절감과 양심의 가책만을 심하게 경험할 뿐이다. 이런 양심의 가책이 지나친 상태에서는 강렬한 자기애적 욕구와 격노로 반응할 수 있는데, 그것이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2) 자기 패배로 인한 자살
자기 패배성으로서의 자살은 급격한 에너지 소진과 관련된 죽음이다.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급격한 에너지 소진이 이뤄져, 존재 가치의 평가 절하를 시도한다. 이들은 대개 타인에 의한 비판이나 모욕보다 스스로 부끄러움과 수치감을 느끼는 자기애적 모욕을 경험한다. 심지어 이들은 어떤 암시적인 가치 절하에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근저에 있는 자기애적 취약감과 외부 견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하려는 체제가 약화돼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어떤 잘못한 일이 일어날 때 드러내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속으로 은폐하려 한다. 이러한 은폐된 자기애적 소원은 에너지가 격감된 자기애적 구성물의 역동을 반영하는데, 우울한 자기애적 역동은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적절히 처리되지 못해 결국 그 갈등을 자살로 마감한다. 이런 자살은 급격한 에너지 소진으로 인한 죽음이기는 하지만 자기 패배를 인정하고 죽음에 대한 의지로 자신을 처벌한 행동이다.
우리는 ‘도피성 자살’ 편에서 투자 실패로 자살을 시도했던 부녀의 예를 들었다. ‘10억 만들기’ 신드롬에 빠진 그들은 재산을 탕진하자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버지는 딸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부녀는 이날 옥탑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그녀가 먼저 목숨을 끊으면 아버지가 시신을 처리하고 뒤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이제 갈 때가 되어서 갑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는 이틀 동안 딸의 시신을 옆에 두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시다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월세를 받으러 온 주인에 의해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투자 실패는 그녀에게 패배로 여겨졌다. 그녀에게 투자 실패는 단순 실패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 정도의 강한 것이었기에, 그 패배감은 더 컸다.
패배감은 타인에 비해 유치하고 약하고 어리석고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이런 특성은 대개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것이 드러나는 경우와도 관련된다. 내면적인 것들은 대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바림직하지 못한 부끄러운 법이다. 그것은 겉으로 남을 위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나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그 이익이 공동체의 생활을 방해하는 것,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사고, 동물적이고 관능적인 욕구나 사고 등이 해당한다.
이런 특성은 대개 자신의 부정성을 극도로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런 자극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나는 바보처럼 보인다→이렇게 보이는 것은 끔찍하다→부끄러워 살 수 없다’. 이는 타인에게 자신의 약한 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면이 극단적인 행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분노적 충동으로 인한 자살
분노적 충동으로서의 자살은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분노는 자기 파괴적 행동을 유발한다. 물론 분노는 현상적으로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도록 분노를 쌓아 온 결과다. 이 경우 분노는 강력한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다름없다. 마음 속 불만이 누적돼 어느 시점에서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분노적 충동으로서의 자살은 분노를 유발하는 강도가 그 자신을 사로잡을 정도로 커진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그를 조절한다.
우리는 때로 홧김에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힘들게 1년간 농사를 지었는데 가격이 폭락했을 때 그것을 추수하지 않고 트렉터로 갈아 엎어버리는 어떤 농부를 종종 본다. 추수하려고 일꾼들에게 주는 품삯이 더 든다는 항변이다. 그 농부의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들의 표정은 가득한 실망감과 함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치가들에게 분노하고 있다. 그것이 심각해지면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도저히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일어난 자살이지만, 속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분노적 충동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분노적 충동을 자극받으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상황에서는 사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강하게 휩쓸린다. 더구나 분노는 그 특성상 원한을 품게 만들고, 원한을 품으면 종종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을 방어하거나 공개적으로 비난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런가 하면 원한의 대상을 두려워해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더 깊은 원한의 표현으로 복수하고 싶은 심리인데, 이는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상실한 데 대한 이차적인 고통 및 분화와 연관된다. 이런 점에서 분노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특성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심리학에서는 정의내린다.
분노는 대개 상대방이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하거나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결과로 표출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자아의 안정이 무너지거나 위협받는다고 판단하면 일어난다. 이런 측면에서 분노적 충동은 맹목적 공격이나 파괴 충동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나 욕구도 무너진다는 판단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분노는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해도 무시하는 당사자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있고 자아가 손상되지 않았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지나친 분노감이 극단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4) 실패에 따른 부담에 의한 자살
실패에 따른 부담으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중대한 일이 실패했을 때 자신에게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이들의 부담은 대개 단순한 심리적 부담이 아니라 내면에서 엄청난 죄책감은 혹은 죄의식이 작용한 결과다. 이들의 ‘죄책감’은 흔히 종교의 영역에서 신앙적으로 주로 사용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양심을 거스른 데 따른 심리적 불안감으로 이해된다.
지난 2005년 5월 낙태를 비관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1년 전부터 결혼을 전제로 성관계를 가져 임신했다. 그녀와 사귀던 남자는 이미 두 차례나 유산을 시키고도 “내 아기가 맞느냐”며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몇 차례 실랑이를 한 끝에 낙태를 감행하고, 자살했다. 이 사건은 사랑과 변심으로 인한 것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실패에 따른 부담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다. 아마 그녀는 실패에 따른 심리적 부담감이 극도에 달했을 것이다. 주변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데다, 자신이 확신하고 행동한 것에 따른 보이지 않는 가족의 압박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심리적 불안감은 대표적인 ‘부정적 정서’다. 환자들은 임상에서 불안을 경계하면서도 가장 쉽게 불안에 휩싸이는데, 이들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이 불안 현상은 뚜렷한 원인없이 느끼는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 등의 감정으로, 더 악화될 수 있다. 여기에 원만한 해결 없이 불안에 휩싸이게 되면 겉잡을 수 없이 시달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불안은 흔히 위협과 같이 분명하고 실제적인 위협에 대한 반응이지만, 때로는 자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주관적 감정의 산물이다. 이런 경우 자살 시도자의 지나친 책임감이 문제일 수 있다. 이때 책임의 소재와 특성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이들의 지나친 책임감이 죄책감과 심리적 부담을 일으키는 원인이 돼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실패에 따른 심리적 부담을 죽음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에 따른 심리적 부담도 알고 보면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잘못했다’는 느낌은 대개 개인적·임의적인 기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유부남과의 외도에는 죄책감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 남자의 병든 아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에 극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과 행동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생각이 정당화될 수 없을 때도 있고 생각이 행동 이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지나친 불안에 휩싸이지 않도록 보살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5) 결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는 자기 처벌성 자살에 대해 고찰했다. 이는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지나친 욕심으로 엄청난 실패를 초래했을 때,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이다(마 27장, 행 1장). 예수님의 제자 중 스스로 자원해 나섰던 유다는 신약 성경의 유일한 자살이면서도 대표적 자살이다.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해 판 죄를 뉘우치고 은 30개를 반환한 뒤 성전에서 나가 ‘스스로 목매 죽었다(마 27:5)’. 부정한 수입은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지 못했고, 반역의 댓가를 반환했지만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황급히 성전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 절벽 위에 목을 매었을 것이다(행 1:18). 그는 스스로의 탐욕을 절제하지 못해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제자였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괜히 욕심을 내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에 휘말리고, 그에 따른 자살이 기독교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얼마전 빚더미를 해결하지 못하고 비관 자살한 젊은 연예인의 사건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기독교인이라도 지나친 탐욕으로 무리수를 두면 수렁에 빠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는 말씀을 깊이 새길 때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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