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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적 고찰

류성련 2014. 9. 12. 20:04

화요 강의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 강독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어 올립니다.

 

인터넷에 떠돌던 자료인데 저작권에 문제가 있으면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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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적 고찰

 

황 정 욱

 

 

≪차 례≫

1. 정 의

2. 자유주의의 소역사 및 초기 자유주의 신학의 전반적 성격

3.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 사상

4. 리츨의 윤리적 하나님 나라 사상과 반형이상학적 그리스도 중심 신학

5. 헤르만에 있어서 신앙의 확실성

6. 하르낙의 교리 비판과 비교리적 기독교의 본질

7. 트뢸취

8.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

 

 

 

1. 정 의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은 계몽주의, 관념론, 후기 합리주의의 전제 아래 19세기 중엽에 생성된 신학적 입장을 말한다. 본래 "liberal"이라는 개념은 18세기 이래에 사용되었으며, "자유롭고 관대하고 관용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아직 어떤 신학적 입장이나 방향을 지시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광범위한 의미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은 근대에 발전된 개신교 신학의 결과 전반을 지시하며, 어떤 특정한 신학적 입장이나 방향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자유주의 신학은 시간적으로 1863년 "프로테스탄트 연맹"(Protestantenverein)의 창설로써 시작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17, 18세기로부터 특히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유산으로 받았다: 세계 역사의 일체성, 현실의 일원성에 직면해서 신앙과 이성의 연결, 공적 종교와 사적 종교의 구분 및 외적 교회의 삶과 내면적 종교성의 구별, 성서의 역사화 및 이와 결부해서 종교의 본질과 기독교 교회의 실증 전승을 구별, 반교리주의와 개인적 종교 신앙 체험에 대한 요청, 세계 섭리관의 표현으로서 이신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 도덕, 종교성의 교사로 축소시킴, 법적 기구로서의 교회와 대립하여 개별자들의 종교 윤리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해, 인간학적 구조로서 종교성.

 

자유주의 신학은 아카데미적 학문의 결과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또한 경건 운동이고자 했으며 개인적인 신 체험에 부응하려고 했다. 자유주의 신학과 유사하게 철학 안에서는 19세기 중엽에 신칸트주의가 발생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주의 신학에서 통일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근대의 과학적 경향과 기독교 경건 사이의 증대하는 괴리 속에서 역사 비판적 및 종교사적 리얼리즘을 통해 그 괴리를 메우려 하고, 종파적 사고의 전제, 속박 등에서 자유롭고자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때로는 "문화 프로테스탄티즘"(Kulturprotestantismus)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두 개념은 상호 교환 가능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유주의 신학이 복음의 문화적 순응성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는 경우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필자는 강연 제목에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개념을 통일한다.

 

19세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모든 개인은 지성적, 윤리적 관점에서 완성될 수 있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팽배했었다. 역사적 문화 발전과 더불어서 하나님이 원하는 발전 과정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과학적 인식, 예를 들어서 다윈의 진화론을 성서의 창조 신앙, 인간의 신형상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본래적 기본 관심사는 기독교와 문화, 신학과 세속 학문을 가능한 한 긴밀하게 접합시킴으로써 이로써 주변 세계의 탈기독교화 과정에 대응하려는 데 있다. 금욕주의적인 세상 도피, 혹은 기존 질서의 무조건적 인정이 그 목표일 수가 없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대(對)문화 독자성을 입증하려 하였으나, 또한 기독교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려 하였다.

 

2. 자유주의의 소역사 및 초기 자유주의 신학의

 

전반적 성격

 

1863년에 독일 "프로테스탄트 협회"는 기독교와 세속화되는 문화 사이의 괴리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창설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선언에 의하면 그들의 목표는 자유 정신과 더불어, 전체 문화 발전에 상응하여 프로테스탄트 문화를 갱신함에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 사고는 쉴라이어마허의 경험 신학과 그 당시 철학에서 지배적이었던 신칸트주의의 동향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특히 신칸트주의의 反형이상학적 윤리적 경향은 구미 신학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 신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신학 체계의 형성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후퇴하였다. 반면에 실천적 리얼리즘과 부르주아적 문화 낙관주의 때문에 윤리, 사회 이론, 실천적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람들이 교의학에 앞서 윤리학에 우선권을 부여했다거나 혹은 교의학이 윤리학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함은 잘못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교의학적 원칙 문제에 대한 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었고 특별히 확실성, 진리 문제에, 그리고 신앙 명제의 적절한 해석에 큰 관심을 보였다. 모든 신학적 진술들이 시간 제약을 받는다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무조건적 효력, 무오적 진리이기를 요청하는 도그마 개념을 거부했다. 기독교 신앙의 도그마화에 대한 비판은 더 나가 反형이상학적 입장에 의해서 심화되었고 교의학을 단순한 신앙 교리의 집합으로 축소시켜 놓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숭배 운동에 대응하여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신학 및 선포의 탈(脫)그리스도론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3.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 사상

 

자유주의 신학은 미래 지향적 하나님 나라 기대를 세계사적 지평에서 받아들였다. 이와 결부해서 칸트, 헤겔, 쉴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의 사상들이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리스도 계시의 발전과 더불어서 역사를 이끌어 나간다는 사상에서 기인한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내의 하나님의 섭리적 영적 활동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며, 구원의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개인적인 하나님 경험의 형태로 전개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이신론의 형태로 사고하였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는 인식될 수 없고 보여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통일된 세계 역사에 방향과 목표를 준다. 역사는 어떤 인과론적 기계론적인 혹은 탈의미화된 과정이 아니라 목적론적 과정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를 풀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겸비와 신뢰로써 역사 과정에 순응해야 한다. 이것을 알 때 회의하는 인간도 종교적 사고가 가능하게 된다. 이 회의의 주제 아래서 인간들의 무신론적 기본 상황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역사 내의 하나님의 작용 문제는 관념론적으로 답변된다: 하나님의 영은 세계 및 인간의 주관적 정신을 지배하며 역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적 현존, 진행의 예측 가능한 배경이 된다. 그는 개인의 인격 안에서 역사함을 통해서 신앙, 사고의 명증성을 가져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화육신, 구원사가 관심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영이 중심에 들어온다. 하나님은 영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고 중계한다. 신론에서는 하나님?영?그리스도의 순서가 이룩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더 이상 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 운동으로 과정-섭리적으로 이해한다. 신학은 역사 운동(즉 발전)의 도식 속으로 옮겨지고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적 도식에서 벗어난다. 신론에서 하나님과 현실의 관계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의 작용이다. 칸트는 영의 활동을 윤리적 요청으로, 도덕 역사의 목적론적 방향으로 해석했다. 헤겔은 이것을 세계 정신의 진화로, 역사적 운동으로 이해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그리스도론은 그가 특별한 신 의식을 소유한 한에서 예수를 인간, 하나님을 계시하는 역사적 인물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간주된다. 1860년대에 이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와 관념적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가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홀츠만(H.J. Holtzmann)이나 카임(K. Th. Keim)처럼 예수 생애를 연구하였다. 예수의 종교적 의식은 전적으로 자료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 역사적 인물이며, 그의 출현은 하나님 영의 계시의 우연적 사실이다. 그에게서 신적인 것은 영의 운동이니, 이 운동에서부터 그는 하나님을 표출한다. 그는 그의 하나님 체험의 명증성에 의해서 보통 인간으로부터 구별된다. 그는 종교도 교회도 창설하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을 따름이다.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인류 발전을, 보다 고차적인 신앙의 종교 윤리적 실현 상태를 지향한다.

 

자유주의의 성서 이해는 역사 비판적 인식론적 근거에서부터 정통주의의 문자 영감설을 배척한다. 영감은 일차적으로 개인적 겅험의 현상이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기자들을 고려할 때 역사적 소여물로서 신앙은 여기에 의존한다. 한편 현재적 신앙 영감은 성서 증언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1869년 프로테스탄트 협회는 성서 문제에 입장을 취했다. 성서는 특별한 거룩한 권위로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의 법정이 되어서는 안되고 복음일 따름이다. 다만 주관적 신앙에 상응하고 신앙에 자명한 것만이 성서에서부터 취해질 수 있다. 성서는 개인적 신앙에 자명한 경우에 한에서만 권위로서 인정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여기서 종종 성령의 내적 증거라는 종교 개혁적 원칙을 원용하고, 루터의 "fides qua creditur"와 결부해서 입증하였다. 그리고 "fides qua creditur"는 다시금 주관적 명증으로 해석된다.

 

자유주의의 역사 비판적 성서 해석은 실증적 종교와 종교의 본질을 구별한다: 마치 껍질과 알맹이처럼. 신구약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분석을 통해서 종교의 영적 본질을 탐구하고 그것으로부터 고대의 표상들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종교적 본질은 초시간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현재적 종교성에서 유추된다고 보았다.

 

이런 구별에 근거해서 성서는 스스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문서로서 철학적 비판, 보편적 세속적 문학 비판의 방법에 맡겨질 수 있다. 성서 전승은 역사적 종교사, 문학사에 편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보편적 문학 비판 방법이 도움이 된다.

 

자유주의 신학과 경건의 핵심은 인간의 종교적 성향을 서술함에 있었다. 이것은 특히 보편화되는 당시대인들의 종교적 무관심을 고려해서였다. 쉴라이어마허는 종교적 의식은 전(前)이성적이며 모든 도덕적 합목적성에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심리학에 따르면 영적 존재인 인간은 내면적 실재적 명증 사건으로서 종교성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자연 과학적 경험주의에 맞서서, 내면에서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하였다. 쉥켈(D. Schenkel)은 양심 현상에 종교 행태가 근거한다고 보았다. 비더마이어(A.E. Biedermeier)는 모든 체계에 선행하는, 인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증언의 직접성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하면 종교란 인간을 통해 설정되는 것이다. 신앙의 종교 현상은 교의학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주체 안에 현재하는, 일반화될 수 있는 경험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의 작용은 내면적 빛으로 삶의 흐름으로, 운동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자유주의 신학과 고백의 본래적 핵심은 주관적 내면성 영역 안에서 개관적 신성을 인식함에 있다.

 

조직화된 국가 고백 교회는 양심을 강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교회는 종교적 이념, 친교를 자유로이 전개함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초기의 개신교 협회는 밑바닥으로부터의 교회 건립을 옹호하였다. 줄체(E. Sulze)는 1780년대에 소시민들의 나태함에 대한 치유 수단으로 지방 자치 교회를 주창한다.

 

교회 조직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은 주(洲) 교회(Landeskirche)와 국가 교회를 시인한다. 그러나 동시에 관료주의로부터의 독립을 바랐고 개신교 민족 교회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新프로테스탄티즘" 이론은 독일 전체 교회를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新프로테스탄트 교회로부터 사람들은 미래의 사회, 문화의 초석이 놓일 것을 기대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국가 교회에 대해서 관계가 깨어졌다. 국가 교회는 강제 기구로 간주되었다. 좀(R. Sohm)은 원시 교회가 가진 근본적인 자유를 전제하면서 이를 주장한다. 국가 교회 법은 다만 국가의 강제 법이며 따라서 비본래적 이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교회(Freie Kirche) 창설을 고려함이 없이 자유주의적 종교성을 가진 소수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였다. 한편으로 그들은 국가와 문화의 자율적 현실성을 긍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나 개인적 종교의 자유와 국가적인 것과의 명확한 구별을 원하였다.

 

성례전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은 거의 접근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종교적 요구를 일깨우고 양육하고 만족시키는 설교 교회로 인식했을 뿐이다. 유아 세례는 선취된 신앙 고백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후에 견신례에서 개인적으로 확인된다고 본다. 세례는 그리스도 몸에 편입으로는 파악되지 않았다. 성만찬은 드물게 거행된다. 그것은 다만 개인적 신앙을 확신하기 위해 봉사할 뿐이고, 그리스도의 사망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주의 윤리는 기독교 행동과 평가가 자연적 행동과 평가와 어떻게 관계되는지 해명하지 않는다. 자연과 영의 구별에 상응해서 윤리의 자연적, 사회적 요소들은 내적 하나님 나라 윤리 및 예수 추종의 윤리와 빈번히 구별된다. 이를 위해 기초가 되는 것은 쉴라이어마허에게서 보는 바, 구원과 윤리의 구별이다. 사회학적으로 자유주의는 시민 사회 지향적이다. 자유주의는 백성의 의무에서 민족적 요소를 강조한다. 그러나 윤리적 규정들은 빈번히 인도주의의 목표를 지향한다.

 

4. 리츨의 윤리적 하나님 나라 사상과 반형이상학

 

적 그리스도 중심 신학

 

하나님 나라 사상은 이미 18세기 경건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이 사상은 경건주의자들에게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졌으니, 그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일로 이해하였다. 이 나라를 보급함은 죄와 모든 반신적 세력에 대항하는 싸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확장함이었다. 그 확장이란 양적인 의미에서는 그의 주권 영역의 확장으로, 질적인 의미에서는 신앙과 사랑의 성장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후에 특히 19세기 신경건주의에서 선교, 디아코니아, 고아, 노인, 병자를 위한 기관 설치와 같은 교회 사업이 하나님 나라의 일로 간주되었다.

 

19세기에 하나님 나라 사상은 진보 신앙을 위하여, 또 국가와 사회 형성을 위한 사회 윤리적 목표 설정을 위하여 종교적 동기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의미가 컸다. 또한 개혁파의 신정주의, 시민적 문화 국가, 서유럽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동기들이 이 하나님 나라 사상과 결합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도덕적 문화 제국이라는 (그것은 인간의 발전 노력의 최종 산물로서 얻어진다) 견해는 기독교 희망을 내세계적 미래 유토피아로 세속화한 결과로 보여진다.

 

괴팅겐의 신학자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99)은 하나님 나라 사상을 통해 기독교를 사회 윤리적으로 활성화하려고 하였고 세계 책임성 의식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개신교 전통에서는 하나님 나라 이념 아래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실패했다고 비난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그에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실현하려는 최고의 선(善)으로서, 그러나 동시에 인간 공동체의 도덕적 과제로서 이해된다. 인간이 그의 직업적 의무를 사랑의 의무로 이해하는 그런 공동체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실화된다.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내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예수의 말과 모범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리츨은 19세기 후반부에 전개된 루터 르네쌍스에 중요한 견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서 자유주의 신학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하며 동시에 세상사에서의 능동적 행동을 강조한 루터의 사상의 양극성을 상호 결합시키려 했고 그 시대의 조건 하에서 관철시키려 하였다. 기독교 신 사상은 그에게는 실천적 신앙의 표현으로 보였으니,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는 어떤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리츨의 하나님 상(像)은 사랑 이념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때 하나님의 거룩 표상과 죄에 대한 진노의 표상들은 배제되었다. 그 이유는 이런 표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종교적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그가 그의 전 인격으로써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을 계시했다는 데 있다. 화해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 관계의 극복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리츨은 정통주의에서 확립된 법정적 화해론과 예수의 대리 형벌 사상을 단호히 거부했다. 리츨 신학의 어떤 특성들, 예를 들어 소위 자연 신학의 포기, 자연적 이적의 거부, 죄론과 그리스도론을 축소시키고, 중점을 윤리와 하나님 나라 사상에로 전이한 것 등은 종교 개혁자의 유산이 아니라, 차라리 당시대의 신칸트주의의 反형이상학적 경향과 실증주의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리츨이 신 증명을 거부함과 함께 또한 자연 현실 속에서의 신 경험을 포기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면에서 그는 변증법적 신학의 선구자였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만 신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신학의 학문성은 리츨에 의하면 신앙 문제에 무관심한 이론적 세계 인식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인식의 대상의 특성에 상응하는 인식 방법을 발전시킴에 있다. 리츨은 존재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이론적 인식과 가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적 인식을 구별한다. 종교적 판단은 가치 판단의 성격을 지닌다는 그의 주장은 여기서 이중적 목적을 가진다.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형이상학적 도그마의 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자연 과학적 사고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술을 옹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형이상학은 존재론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학에 적합한 인식이 될 수 없다. 모든 종교적 인식들은 종교적으로 관여한 개인들의 직접적 가치 판단이 된다.

 

이 일반적인 인식론적 결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술어에도 해당된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우리를 위한 그의 구원 가치를 나타낸다. 그의 신성은 언제나 교회가 그 창설자에게 바치는 인정과 가치 평가의 표현일 뿐이다.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론이 양성론을 확립하면서 상관없는 학문적 인식 영역에 속하기를 주장하는 한, 그것은 "형이상학"으로, "스콜라주의"로 거부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리츨의 종교 가치 판단 이론은, 그의 내면 속에서 성서의 구원 사건의 의미를 경험한 자만이 구원 사건의 객관적 현실을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 사상과 표상들은 이론적 지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신앙에 대해서만 그 가치를 관철할 수 있을 뿐이다.

 

북미 자유주의 운동에서 종교적 동기가 역사 내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는 사회 윤리적 활동에 결정적 추진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리츨이 윤리 및 종교 도덕적 진보에 대해 강조한 것이 큰 반향을 얻었다. 1908년 필라델피아에 미국 교회 연합(Federal council of churches)을 창설할 때에 허다한 요구를 담은 프로그램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이 미국 개신교의 사회론이 되었다. 이 발전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사회 복음(social gospel) 운동이다. 사회 복음 운동은 주로 라우셴부쉬(Walter Rauschenbusch)에 의해 고취되었다. 하나님 나라를 전 인류의 사회적 갱신을 위한 유도 이념, 과제로 파악한 이 운동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 사상을 받아들였고 1930년대까지 미국의 신학 사상을 결정지었다. 천년 왕국설과 결부된 사회 복음 운동은 가족, 학교, 사회적 삶뿐 아니라, 국가 경제 질서를 기독교화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동시에 죄책, 심판, 십자가에 대한 사고가 완전히 뒷전으로 물러났다. 북미의 자유주의의 하나님 나라 기대는 비판적으로 회고할 때 너무나 순진하고 낙관적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바이쓰(Johannes Weiss;1863-1914)가 1892년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재발견함과 더불어서 예수 선포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 행위를 통해 초래될 수 없는 것인 한에서 종말론적 사항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로써 리츨 학파의 윤리적, 내세계적 하나님 나라 사상은 그 해석학적 기반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사상의 사회 윤리적 목표는 여전히 종교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한편으로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1875-1965)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생명에 대한 외경"이라는 문화 윤리로 변형시키려 했다. 그는 바울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바울은 초자연적 하나님 나라를 윤리적 나라로 바꾸고, 이로써 기대되어야 할 것으로부터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5. 헤르만에 있어서 신앙의 확실성

 

헤르만(Wihelm Herrmann;1846-1922)의 신학사적 의미는, 그가 신칸트주의의 학문 이론의 토대 위에서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하고 또한 진리 문제에 답변하려고 노력하였다는 데 있다. 기독교 신앙은 신약 성서의 사신의 결정적 내용에 근거해야 하고, 역사 비판의 결과에 의해서 결정지어지거나 상대화되어서는 안된다. 역사 비판적 인식에 따르면 우리는 형식적 성서의 권위 혹은 교회의 고백의 효력에서 출발할 수 없기 때문에 헤르만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영속적으로 중대한 사실은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역사적인 예수의 인격과 우리를 요구하는 윤리적 요청.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예수의 윤리적 권위에서, "예수의 내면적 삶"에서 이루어진다. 기독교 신앙은 개별자가 예수의 인격에서 얻는 자유로운 확신과 신뢰이다. 신 인식, 구원의 확신, 그리스도 고백은 예수의 권위를 인정함과 일치한다. 물론 예수 인물의 계시적 성격은 역사적 학문을 통해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투쟁하는 인간이 예수 상과 만날 때, 이 만남은 그 인간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이에 따르자면 기독교 신앙은 교리를 진리라고 인정함도 아니고 특정한 구원 사실을 수락함도 아니고, 오히려 개인적 신 경험, 내면적 설복당함이다. 헤르만은 당시대의 삶의 철학의 영향 하에 체험 개념에 신학적 기준의 기능을 부여했다. 종교적 체험은 어떤 성서적 진술 혹은 교회의 가르침이 수용될 수 있는지, 자기 체험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종교적 체험은 기독교 교의학을 이런 것에 근거해서 하나의 체계로 서술하는 것을 가능케 만든다.

 

헤르만은 성서를 교리 규범으로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고 또한 과거의 신앙적 사상들을 "규범적 가르침"으로 가르치는 것에도 반대한다. 유일하게 규범적 가치를 지니는 신앙의 근거는 신약 성서 및 교회 전통의 많은 신앙적 사상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신앙의 확신을 주는 신앙의 근거는 현재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교의학자는 지나간 시대의 경건을 표출하는 신앙적 사상들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사고를 위한 최종 법정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처럼 헤르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주어진 신앙의 근거와 신앙적 사상(?신학) 사이를 구별한 것은 현재적 현실 체험으로부터는 성서와 교회 전통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문을 열어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 사상을 이처럼 전개함에 있어서 헤르만은 그 사상들이 완결된, 자체 안에 모순이 없는 체계로 통합될 수는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

 

6. 하르낙의 교리 비판과 비교리적 기독교의 본질

 

종교 개혁기의 신앙고백의 법적 효력이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에도 교회 전통의 신학적 의미와 해석에 대한 논란은 불가피해졌다. 왜냐하면 역사 비판은 신약 성서와 고대 교회의 교의에서 획득한 신앙 내용을 상대화시켰고 그것의 구속성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르낙(A. Harnack;1851-1931)이 {교리사 교과서}(1886 이후)에서 제시한 비판적 관점은 교리 형성, 발전을 이해함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르낙에 의하면 교리사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 명제가 중심 교리로 승격되고 교회 내에서 관철되었던" 4세기 초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하르낙은 기독교가 감정 혹은 도덕적 의지, 행동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신적 인식, 세계 인식을 내포하는 사고하는 종교임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제의와 경건을 넘어서서 신약성서 내의 교리 내용을 이론적으로 통찰하고 전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학이고 교리이다. 하르낙은 고대 교회 신학과 교리의 사고 구조, 진술 내용을 그것들이 당시의 철학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교리들이 신약 성서에서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도출되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교리 형성 과정은 사변적 관심에서, 혹은 이단 방어에서 나온 것으로서 단순한 복음을 가렸고 본질과 멀어지게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교리 형성에서 그리스 철학에서 취한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사용한 결과이다. 그래서 하르낙은 말한다: "도그마는 그 발상과 건축에 있어서 복음의 토대 위에 있는 그리스 정신의 작품이다." 하르낙에 의하면 교리사 연구는 도그마의 전개, 발전 과정을 서술, 비판하기 때문에 교회를 교리적 기독교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도그마를 단순한 신학적 이론 혹은 신앙 고백과 구별한다. 도그마를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위해 필수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역사적인 교회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한, 종교 개혁은 하르낙에게는 이 형식적 권위의 종말을 뜻한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교회 도그마 전통은 복음으로 환원되었다. 왜냐하면 복음만이 유효성과 필수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볼 때 종교개혁 신앙고백 형성사는 더 이상 교리사가 아니라, 신학사로 분류되어야 한다. 물론 개신교 교리 발전도 비판적인 간격을 유지하고 상대화시킴으로써 역사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제는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단순한 복음으로 환원하는 2차적 환원 단계의 때가 무르익었다. 여기서 당시의 개신교 신학자들에게서와 같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신교 내에는 신앙과 가르침의 자유가 지배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입장이 당시 지배적이었다. 교회적으로 공인된 교리 법칙으로서 무조건적 효력을 요청하는 도그마들은 "로마 카톨릭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신교 신앙이나 학문적 신학이 승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개혁기 신앙 고백의 시대 제약성을 언급함으로써 성직자의 신앙 고백 의무의 전적 폐기와 교리 규범을 신약 성서로 제한하기를 시도하였다. 이처럼 역사 비판적 신학의 인식과 신앙 생활의 종파적 제약 사이의 긴장, 대학교 신학과 보수적 교회 지도층 사이의 긴장은 사도 신조의 유효성 논쟁의 배경이 되었다. 그 직접적 계기는 목사 쉬렘프(Ch. Schrempf;1860-1944)의 사건이었다, 쉬렘프 목사는 세례 시에 사도 신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해직당했다. 사람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교리 훈련 및 교리 강요의 포기를 변호하기를 기대했다. 이때 하르낙은 사도 신조는 적어도 보완을 필요로 한다는 입장을 발언함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하르낙은 사도 신조 내지 신앙고백의 폐기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예배에서 사도 신조를 수의적으로 사용할 것을 조언했다. 해석 문제에 관해서 그는 사도 신조의 모든 명제들을 동등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사도 신조에 대한 전통적인 문자적 해석을 상징적 해석으로 대치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이 역사 비판적 인식에 보다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사도 신조의 세부 내용들은 "신앙이 거기서 인지해야 할 불가시적 관계와 가치를 위해서" 언급된 것이다. 하르낙은 처녀 탄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고 그 부분을 상징적 해석에서도 배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신조 전체에 대해서는 적극적 평가에 도달했다. 결국 하르낙은 한편으로는 역사 비판적 연구의 인식을 고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 신조의 교회적 의미와 기능에 대한 이해심도 가졌기 때문에 당시 매우 상이한 평가를 받았다. 어쨌든 사도 신도의 문자적 해석 거부와 상징적 해석 제안은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가 역사적 과정이며 변천한다는 의식과 함께 계몽주의 신학이 제기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19세기에 들어와서 보다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본질 문제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기독교의 특성에 대한 문제로서, 변천하는 역사 현상 배후에 있는 불변적 원리에 대한 문제로서 이해되었다. 하르낙의 강연 {기독교의 본질}(1900)에 의하면 기독교의 본질은 신앙고백이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성서의 사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예수의 단순한 선포에 있다. 복음의 내용은 3개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 개별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에 대한 신앙, 진정한 도덕성의 동기로서 이웃 사랑에 대한 신앙.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는 하르낙이 제시한 본질 규정이 과연 기독교의 특성을 적절히 표현한 것인 아니면 성서적 기독교를 상대화시키고 축소시킨 것이 아닌가를 놓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켈러(M. Kahler)는 신약의 선포의 본질적 내용은 비시간적 이념도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도 아니고 예수의 인격이라는 주장으로 하르낙에 맞섰다.

 

하르낙은 이처럼 교회의 판결과는 별도의 자유로운, 그리고 비도그마적인 기독교를 추구하였다. 자유주의의 경향을 보건대 교회의 구속, 교회의 권위적 인식 방법에 구속당함에서 해방되고자 했는데 이것은 현대적 사고의 요구에 보다 적절히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이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제도적 교회와 종파적으로 확정된 교리 체계에 대항하여 자유로이 자신을 전개하는 개인주의적 종교성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7. 트뢸취

 

트뢸취(Ernst Troeltsch;1865-1923)는 당시 풍미한 역사주의를 대변한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루터로 시작하여 그 이후의 정통주의 시대를 구개신교 시대로 규정하고, 이 시대는 교회의 권위적 문화가 여전히 중세의 지배를 받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에 대비하여 계몽주의 이후 의 시대를 신개신교(Neuprotestantismus) 시대로 칭하고, 신개신교는 자유롭고 세상적인 문화와 결합된 종교로 보았다. 트뢸취는 계몽주의가 사고의 역사화를 통해서 모든 영역에 야기된 단절을 중시했으니, 역사화, 상대화는 법, 도덕, 사회, 국가 뿐 아니라 도그마, 신앙 고백, 신학 이론까지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신앙론에 있어서 고대 교회의, 혹은 종교 개혁기의 신앙 고백에 구속될 이유가 없으며, 과거 시대와의 교리적, 신학적 연속성은 신개신교에서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없다.

 

트뢸취는 종교 교리는 제의에서 발생하였고 제의에서 모여진 종교적 생명의 표현이라는 견해를 주장했는데, 그러므로 교리사를 종교 사회학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그리스도론의 생성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제의 중심에 놓은 데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은 교회, 소종파, 신비주의 등 상이한 공동체 내에서 상이한 의미를 얻게 되었다. 교회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는 그의 속죄적 죽음을 통해 구속과 사죄를 단번에 이루고 말씀 선포, 성례전을 통해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구원자이다. 소종파에서는 예수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요 이끄는 자이다. 그러므로 소종파는 천년 왕국설과 종말론에 기운다. 신비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통치는 신적 영의 통치이며,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의 마음 안에 있는 내면적인 것이고 구원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나님과 영혼의 합일 과정이다. 여러 상이한 기독교 공동체에는 그러므로 상이한 교리 형태가 나타나며, 이것들은 물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상호 혼합되고 결합된다. 이같이 종교 사회학적으로 구별할 때 교리사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트뢸취는 이처럼 교리사 분석을 통해서 교회의 현재적 과제 극복을 위한 지침과 미래의 기독교 교리 형태를 위한 기준을 얻으려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교회의 교리적 고립, 자기 폐쇄가 아니라 현대적 세계관에 대해 개방할 것을 추천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교회는 기독교 소종파의 관심사, 신비주의의 추구하는 바를 자기 안에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교리 비판 과정은 트뢸취에게서 절정에 도달했다. 그에게서 모든 교리적 전승의 역사적 제약성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는 현대적 사고는 기독교의 절대성의 포기를 위한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기독교는 배타적인 계시 주장으로 말미암아 고립화되었으며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 및 구원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죄론은 현대적 사고에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일정한 고대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기본 명제를 전제하는 종교 개혁자의 칭의론도 더 이상 승인될 수 없다.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예수의 인격에 의존하는 것이 필요하다면―교회는 종교적 삶을 위해서 버팀대, 중심, 상징이 필요하기 때문에―이것은 교회 그리스도론에 집착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적 이유에서 예수의 인격을 하나의 도그마 혹은 윤리 법으로 변화시키려는 저 경향에 반대해야 한다. 종교적 삶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예수의 인격에 대한 도그마적 교리가 아니라 그 인격 자체이기 때문이다.

 

트뢸취가 교리사, 신학사에 대한 종교 사회학적 해석을 추천한 이유는 신학적 교리 발전은 이념 역사와 사회 역사의 상호 작용에서 나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적 교리의 특수 형태에 있어서 종교 제의적, 공동체적, 사회적 요소들이 현저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관념적인, 신앙 이론 발전에만 관심하는 교리사 서술을 불충분하다고 느꼈고 이 관점에서 하르낙을 비판했다. 그러나 트뢸취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듯이) 종교가 절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순수 사회 경제적 요소로 환원될 수 있고 그 독자성에 있어서 해체될 수 있다는 견해를 단호히 배척하였다. 기독교 역사는 경제-사회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방향에서의 모든 시도는 트뢸취의 판단에 따르면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에 대한 은폐된 공격이다.

 

트뢸취는 개신교의 계몽주의 신학이 발전시킨 완성 가능성 사상 및 헤겔의 역사 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 그는 기독교를 전체 역사의 점진적 발전 과정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현재의 교의학은 성서와 신앙고백의 가르침을 단순히 유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고 기독교의 본질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본질 규정은 역사적 인식과 역사 철학적 규범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추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 객관성의 형태를 요구할 수 없고 결국 주관적 결정에 근거한다. 그의 본질 규정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신으로부터 소외당한 세상 안의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인식을 통해서 다시 태어남, 보다 고차적으로 태어남에 대한 신앙이며 이로써 하나님과 피조물의 연합이며 피조물 간에 하나님 나라로의 연합이다."

 

그러나 트뢸취는 종교적 개인주의, 교직, 신앙고백, 교회 교리에 대한 무관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인식했다. 그는 동시대 자유주의 신학의 성격을 날카롭게 규정했을 뿐 아니라 또한 적확하게 그것의 약점과 위험 요소들을 지적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 삶에서 제도적으로 근거가 박약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은 반작용에 대해 저항하기가 어렵다. 이 반작용이란 한편으로는 집단적 무신론, 다른 한편으로는 경건주의적 정통주의 및 개혁 카톨릭 세력이다.

 

트뢸취는 현재의 심화된 과학적 경향 때문에 교회의 교리 전통을 전폭적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요구를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개신교 시민 사회 내의 폭넓은 보수주의적 성향을 지적했고 보수 지향적인 교회 조직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비판적으로 기독교와 문화의 완전한 종합 경향에 항거했고 양자의 대립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종교의 특성은 문화와의 대립, 학문 및 공리주의적 도덕과의 차이, 초세상적 초인간적 능력 전개, 감각 저편에 있는 것을 지향함, 환상을 전개함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와 화해한 종교는 대체로 악한 과학 및 피상적 도덕 이상의 것일 수 없고 그 종교적 소금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8.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

 

자유주의 신학의 공통점은 신앙적 진리는 그때마다 새로이 형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도그마적, 교회적 전통에 대한 비판적 자세에서 현대 학문의 방법과 지식들에 대해 자신을 개방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자유로운 확신을 변호하고 모든 신앙의, 양심의 강제에 대해 공격적이다. 가능한 한 비도그마적 기독교를 지향한다. 신앙은 이성에 모순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신관은 대체로 철학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리츨의 경우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상이 지배적이 된다. 대개 자유주의는 일반 계시, 자연, 역사, 자의식 내에서의 계시를 고백한다. 사변적인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예수 신앙으로 대치된다. 예수 생애 연구에서 자유주의는 당분간 주도적이었다. 고대의 객관적 속죄론은 주관화되며, 법정적 이해는 윤리적 이해로 대치된다. 죄 이해는 도덕적으로 약화되었고 인간의 품위가 역설된다. 인간 이해와 마찬가지로 세계, 역사 이해도 문화 긍정적이 되고 낙관적으로 진보 신앙에 기운다.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내세계적 실현이라는 목표와 함께 세계 형성에 참여해야 한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성직자주의와 종파주의는 공격받는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사적 기독교의 형태로만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결속한다. 교회 신학보다는 사회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카톨릭에 대해서는 우월 의식에 가득차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성서, 일반적인 종교사, 기독교 교리사 및 신학사 연구를 통해서 중요한 학문적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신관, 관념론적 인간론, 종교적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교회 사상, 진보 사상에 근거한 역사 신학, 세속화된 종말론은 신학적으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주의적 전통을 비판하고 교리적 법정으로서의 도그마를 거부한 것이 정당하였다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오해한 것은 도그마와 교회의 신앙고백이 신앙 체험의 열매로서 이단과 거짓 교리에 대한 필연적인 경계막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 내용을 왜곡됨이 없이 보존하기 위한 보호 기능까지도 가졌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종말은 이미 1차 대전 전에 자유주의의 흐름들이 세분화됨에서 그 조짐이 나타났다. 자유주의 종말은 시기적으로 발흥하는 변증법 신학의 도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1차대전 전에 프로테스탄트 협회는 회원 숫자의 감소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독일 외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은 예를 들어 시민 종교(civil religion), 과정 신학, 종교 심리학, 사회 복음 운동에서 속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제기한 문제는 학문적으로, 교회적으로 계속 살아 있었다. 이것은 1920년대 독일 대학교 신학부 강의 목록 등에서 입증된다.

 

변증법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서 발전된 현실적, 전망적인 단초들을 새로운 체계 안에서 속행하였다. 신학과 콘텍스트, 신학과 문화의 관계 문제는 특히 바르트와 틸리히 사이에 논란되었고, 바르트와 하르낙 사이의 논쟁은 상호 간의 몰이해 가운데 끝났다.

 

자유주의 신학은 1차 대전후 현대를 주도하는 신학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다. 불트만은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인간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에 관해서는 너무나 말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고백 교회에서는 제도적 교회, 성서, 성례전, 교회법, 교회 질서를 새로이 평가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은 자유주의의 교회법 이해, 구약에 대한 비판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또한 자유주의의 反교의주의와 민족의 자연적인 집단적 종교성 이론을 환영했다.

 

2차 대전 이후 세속화 논쟁은 자유주의의 역사 해석을 새로이 받아들인 셈이다. 극단적 "세상성" 이론은 본회퍼에 의해 발전되었다. 탈기독교화의 배경 하에서 기독교 신학을 근대적 세속화 체계 속에서 변형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니, 신(神) 죽음 신학의 이론은 바로 니체의 새로운 해석이다.

 

종교적 성숙의 표현으로서 자유주의의 공동체 원리는 교회 내의 민주화와 시민 운동에서 속행되었다. 자유주의가 내세운 개성 이념은 현대 커뮤니케이션 사회의 집단 경향에 직면해서 의미심장하다.

 

전체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1차 대전 이후 쇠진한 것 같이 보인다. 그의 발전 낙관주의는 20세기 전반의 파괴적 사건들로 인해서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인간적 자결, 자유, 관용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요구는 포기될 수 없는 유산이다.

 

출처 : 뉴스앤조이 신학마당 에르고니아
글쓴이 : neotheolog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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