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루터 4
비텐베르크 (Wittenberg)
1990년까지 동독땅 작센주에 속하였던 Wittenberg 는 이제 다시 통행이 자유로운 독일연방으로 예전의 루터도시로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동독당시 발전이 없이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이 도시는 다시 정부와 주의 집중적인 투자로 인하여 예전의 깨끗한 도시의 모습을 다시 찾았다.
오늘은 종교개혁의 중심인 Wittenberg 을 찾아 개혁자들의 흔적을 찾아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사진과 함께 올린다. 오랜전부터 꼭 방문하고 싶었던 도시로 독일인들에게 그리고 개신교인들에게는 하나의 성지와 같아 5만의 인구임에도 구도시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를 기차로 찾아 차가 없이 하루종일 걸으면서 유럽의 어두운 중세에서 사람들을 성경과 바른 신앙으로 변화시켜 근대화로 가는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활을 감당하는 마틴루터를 읽고 싶었다. 여름날임에도 썰렁한 날씨는 간편하게 입은 여름복장을 춥게한다. 기차역에서 방향을 잡아 시내로 들어가기 전 커피한잔이 생각나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 것도 없다. 날씨도 썰렁하고 역주변도 썰렁하여 역사를 찾아 먼거리를 달려온 순례자의 마음도 찬기운이 돈다. 따듯한 차한잔이 간절한 날씨에 아무 것도 없는 역주변은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을 찾는 도시의 첫인상에 실망이 된다. 시내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면서 눈에 띄는 낯익은 건물들. 사진으로 보아 언제 와보았던 도시같이 반갑다. 낯섫음이 없이 시내 초입에 있는 루터의 집과 대학 그리고 멜랑히톤교수의 집이 한눈에 보인다. 평형으로 곧게 시내를 들어가는 두개의 길은 차의 집입을 막고 사람만이 다니는데 길위에 서서 보는 시내는 루터가 설교를 하던 교회 그리고 궁정교회의 종탑이 한눈에 보이면서 신앙의 교향에 온 착각 가운데 여기저기 들러본다.
Wittenberg 시는 개혁자 마틴루터로 인하여 항시 감사를 하고 있다. 아무런 보잘 것없는 작은 도시였던 독일 북동쪽 한구석에 위치한 도시에 루터는 거의 그의 생애를 보내었다. Johann von Staupitz (스타우피츠, 비텐베르크대학의 신학박사)가 1511년에 루터를 이도시로 데려온다. 그 후 루터는 그의 생애 마지막 1546년 까지 이 곳에서 살게된다. 그와 그의 개혁으로 인하여 이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뜻있는 도시로 1996년에는, 종교개혁에 관계된 궁정교회, 시교회, 그리고 루터의 집, 메랑히톤의 집을 죽연결하는 두개의 길 주변이 UNESCO 로 등록이 되는 영광을 얻는다.
1293년에 도시는 정식으로 시로 등록이 되며, 1502년 프레드릭현자 ( Kurfuerst Friedrich der Weise 1463-1525)가 Loucorea 대학을 세운다. 1817년 도시는 인근 Halle (할레) 라는 도시와 합병이 되면서 Wittenberg 라는 도시명으로 프로이센에 속하게 되었다.
1508년 루터는 대학에 교수로 이 곳을 오게되며, 그후 1511년으로 신학교수로 이도시에 아주 이사를 온다.
1514년 부터 시교회 (Stadtkirche)에 설교를 맡게 되었으며, 1515년에는 아우구스틴 수도원 부주교를 역임한다. 당시 구교에서 베드로성당건축비와 독일 마인츠 성당을 짓는 건축비를 충당하기위해 테첼은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판매하려, 작센왕국의 선제후인 현자프레디릭에게 허락을 신청하나 선제후는 자신의 지역에서는 절대로 면제부 판매를 금하여, 그는 작센경계지역 인근에서 판매를 한다. 그 면죄부 구입을 위해 미사를 빠지는 교인들을 보면서 루터는 신앙 가운데 잘못 전하여지는 구원의 진리를 바로잡으려 궁전교회의 나무문에 95개 논제를 걸면서 구교의 면제부판매 문제는 전국으로 확산하게 된다.
로마 교황의 친서로 인하여 1524년 루터는 수도사의 옷을 벗고, 시 최고신부이며 감독관이던 Johannes Bugenhagen과 개혁의 사역을 시작한다. 교황의 친서가 도착하기전, 교황의 편지를 불에 태운 사건과, 당시 수녀였던 Katharina von Bora와의 결혼은 당시 구교사회에선 큰 사건으로 유럽전체에 퍼져나간다. 이 결혼식을 기념하여 비텐베르크는 매년 루터의 결혼날자인 6월에 축제를 정기적으로 연다.
Philipp Melanchthon, Johannes Bugenhagen, Justus Jonas 그리고 Georg Spalatin 은 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개혁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이도시에 모여 계획하게 된다. 멜랑히톤과 루터가 대학에서 개혁에 관한 강의로 인한 영향 그리고 Cranach(크라나하)의 그림과 인쇄술로 인하여 개혁의 이름으로 참기독교신앙은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이들의 종교개혁의 역사는 이도시를 개신교 가운데 정신적인 성지로 만들어 지역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역사는 신의 섭리가운데 만들어져 간다는 것을 루터의 개혁과 그 주변을 보아 다시 확인한다. 당시 선제후로 신성로마제국이였던 지금의 독일지역은 항시 황제를 선출하는데 그 가운데 4명의 강력한 왕가의 제후가 맡고 있다. 그 선제후 가운데 작센의 제후가 들어간다. 당시 프리드릭현자 선제후는 당시의 구교의 잘못됨을 강하게 주장하는 바른 신앙을 가진 제후였으며, 그 작센왕국안에 비텐베르크에서의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의 힘과 바른 신앙으로 보호되고 발전되어진다. 당시의 황제인 칼도 Worms 제국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꺽지않는 루터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법으로 보호 받는 것만을 제재하게된다. 그러한 루터를 길에서 강도에게 납치되는 것과 같은 꾸며 프리드릭현자는 루터를 자신의 왕국안에 있는 바트부르크성에 은신시킨다. 재미있는 점은 그와 루터는 살아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한다.
비텐베르크 구시가지의 모습이다. 가운데 교회가 시교회인 성마리안교회이다. 교회 바로 앞 광장이 시장광장이며 광장 흰색건물이 시청사이다. 오른쪽길위로 가면 루터의 집, 멜랑히톤의 집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대학건물이 나온다. 사진에 광장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궁정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중앙역에 내려 도보로 가능하며 모든 루터와 개혁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을 천천히 걸어서 방문 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시청 가운데 보이는 두개의 동상은 시청사를 바라보면서, 왼쪽이 멜랑히톤, 오른쪽이 루터의 동상이다. 궁정교회 안에 안치되었으며 준비된 묘비도 이와 같이 배치되어 있다. 이 두사람은 개혁의 동지로 죽어서도 같은 장소에서 묻히면서 연혼가운데서도 좋은 친구로 지낼 것 같다.
시청광장의 모습이다. 뒤에 보이는 교회가 시교회, 성마리아교회이다.
광장에서 아래로 보이는 궁정교회이다. 이 교회는 1760년 7년 전쟁시 불에 타서 심하게 무너지게 되며, 루터의 95개 논제를 걸었다는 교회의 나무문도 당시에 타버려 1858년에 청동으로 문을 다시 만들게 된다. 교회 탑의 모습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내용으로 한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 384장을 탄생시킨다.
95개 논제가 걸린 나무문은 1760년 7년 전쟁으로 불타 없어지고 이 후 청동으로 루터의 375년 탄생일 기념으로 다시 만들어 지금은 95개의 논제가 독일어로 문에 새겨져있다. 당시 실제로 루터는 이 교회의 나무문에 논제를 못박았는가 라는 의문은 많은 추측을 낳고있으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시의 전통 가운데 싹을 내려 전국, 전유럽으로 번지게 된다.
궁정교회에 있는 루터의 무덤이다.
대학인 Loucorea (로이코레아) 광장이다. 1502년 프레드렉현자가 만든 대학으로 루터개혁으로 매우 유명하여진다. 이 대학에서 루터는 1512년 교수로 활동하며 400명 학생들 앞에서 잘못된 구교의 부조리와 개혁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 역사적 대학이다. 이 대학에서 조금 늦게 멜랑히톤교수는 그리스어 교수로 활동한다. 대학은 1817년 Halle 시와 병합이 되면서 대학도 Halle-Wittenberg 대학으로 바뀐다. 1995년 시는 이도시를 아카데미도시로 다시 성장시키기위해 이 건물에 재단을 만들어 시작한다.
루터의 집이다. 1504년에서 1507년까지 검은 수도원으로 만들어 진다. 1508년 루터는 이 수도원에 입교를 하며, 1523년 이 수도복을 벗으면서 수도원을 떠난다. 제후인 요한은 이 수도원을 1532년 루터에게 선물하여 루터는 부인 카타리나와 6명의 자식들과 이 건물을 집으로 사용한다. 정원 가운데 걸어가는 여인이 부인 보라이다.
루터의 거실이다. 이 거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개혁에 대하여 논제하였다.
루터의 친구 멜랑히톤의 집이다. 루터의 집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루터집의 정원이다.
시교회의 전경이다.
Cranach(크라나하) 뜰. 크라나하의 집으로 명칭되어지는 이 건물은 당시 Nuernberg 출신 화가인 뒤러와 같은 시대에 활동을 하였던 유명한 화가인 Lucas Cranach집이다. 프레드릭현자의 궁중화가이였으며, 비텐베르크에 자신의 작업장을 가지고 제자를 키웠다. 루터의 절친한 친구이며, 그가 그린 루터의 그림은 당시 개혁에 중대한 역활을 한다. 지금 전해지는 루터의 얼굴그림과 개혁가의 활동과 도움이 될 많은 그림을 그려 개혁에 큰 역활을 하게된다. 그는 1537년 시장으로 역임을 하기도 하며, 약국을 소유하고, 인쇄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시에서 가장 부자로 그 부와 인쇄술 그리고 그림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이 빠르게 확산되며, 확실한 증거를 남길 귀중한 역활을 한다. 지금 이 건물은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의 모임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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