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잘못 아닌 스스로 성숙해가는 과정
하느님의 분노는 인간 자신의 투영일 뿐
신과 인간 관계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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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줄리안의 사상은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에서 흘러나온 논리적 귀결이다. |
지난번에 언급한 힐데가드에 이어 등장하는 여자 신비주의자로 영국 출신의 노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1416)을 들 수 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신비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영국이 나은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생몰 연대도 불확실하고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가 노위치에 있던 성 줄리안 교회에 부속된 작은 은둔처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줄리안 부인(Lady Julian)’이라 불렀다. 사람들이 그를 줄리안 부인으로 부른 것을 보아 그 당시 많은 수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족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것, 수녀가 된 다음에도 그를 돌봐줄 도우미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 그가 전 생애를 영국 노위치나 그 주위에서만 보냈다는 것, 훌륭한 글을 남긴 것으로 보아 상당히 훌륭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는 정도를 미루어 알 수 있을 뿐이다. 잔첸(Grace Jantzen)의 말을 빌려 보자.
“줄리안은 젊은 나이에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위해 기도했다. 첫째, 그리스도의 수난을 머리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몸소 참여하는 차원으로 체감하기 위해 기도했다. 둘째, 중병이 들어 자기를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죽을 줄로 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셋째, 참된 참회·자비·신의 뜻에 대한 사모라는 세 가지 ‘상처’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 때문인지 줄리안은 30세 무렵 심하게 앓았다. 며칠 간 생사를 헤매다가 신부님이 와서 임종에 관한 예식을 가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병이 나으면서 일련의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됐다. 그리스도를 보는 비전(visions)과 말문이 터지는 체험이었다. 1373년 5월 13일에 시작된 이런 경험이 열여섯 번이나 일어났다. 줄리안은 이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영어로 적어 놓고 『신의 사랑에 대한 열여섯 번의 계시(Sixteen Revelations of Divine Love)』라는 제목을 달았다. ‘계시’라는 말 대신 ‘보여줌(Showings)’라고도 했다.
심한 병 앓은 뒤 신비 체험
줄리안이 언제 종교에 완전히 귀의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이런 중병과 종교적 체험을 일종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다음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무튼 줄리안은 자기를 완전히 헌신한 ‘은둔자’가 되었다. 줄리안과 같은 형태의 은둔자를 영어로 ‘anchoress’라고 하는데(남성의 경우 anchorite), 속세를 떠나 성당 한 쪽 벽에 붙여서 지은 골방 같은 곳에서 평생을 묵언과 기도와 고행으로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골방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밖으로 향한 작은 창문으로서 보통 커튼을 쳐두었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열어서, 종교 문제로 상담하러 온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주는 문이다. 다른 하나는 좁은 구멍 같은 문으로 그곳을 통해 성당 안에서 미사가 행해지는 것을 들여다보고 영성체를 받을 수 있는 문이다. 셋째는 옆에 붙은 도우미 방으로 통하는 문이다. 도우미가 살림을 맡아 하고 은둔자는 오로지 기도와 명상과 상담과 저술에 전념했다.
수도원서 묵언과 기도로 수행
은둔자는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이라 여겨졌다. 그러기에 은둔자가 은둔의 삶을 시작할 때는 장례미사를 드리고, 죽는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는 예식인 병자 성사(病者聖事)를 행한다. 그 후 은둔자는 주교의 인도를 받아 골방에 들어가 죽는 날까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 몇 가지 예외가 있는데, 병이 심해질 경우 일광욕을 위해 정원을 산책하는 것 같은 경우이다. 물론 찾아오는 사람들을 창문을 통해 만나 좋은 말을 전해주는 일을 계속하고, 또 도우미와 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완전히 고립된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음식은 단순한 것이지만 단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해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해서 상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행과 기도의 삶을 사는 동안 줄리안은 자기가 1373년에 처음 받았던 계시 혹은 ‘보여줌’의 뜻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처음 비전들을 기록해 놓은 『신의 사랑에 대한 열여섯 번의 계시』는 단순히 자기 경험 자체를 서술하는 형식의 글이었다. 그 후 신학적으로 더욱 완숙해진 줄리안은 자기가 처음 받았던 그 경험들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처음 본 계시들을 풀이해 주는 주석 형식의 본격적인 책을 펴냈다. 처음 계시를 받은 후 20년이 지난 1393년에 완결판으로 나온 이 책은 영국에서 여성이 영어로 쓴 최초의 책이 되었다. 처음에는 손으로 베껴 쓰는 사본 형식으로 전수되다가 1670년 처음으로 인쇄되고, 여러 쇄를 거쳐 20세기 초엽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줄리안이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에 속하는 인물로 인정된 결정적 계기는 1979년 해설과 주해를 붙인 줄리안의 저서가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 책에 나타난 줄리안의 사상을 보면 한 마디로 ‘낙천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줄리안이 하느님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유명한 말, “모든 것이 잘 될 거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온갖 것 모두 다 잘 될 거야.(All shall be well,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이 그가 가지고 있던 사상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줄리안은 스스로도 물론 고행의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당시는 유럽 전역이 흑사병이나 100년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고생을 할 때였다. 그러나 줄리안은 이런 현실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계시에서 자기가 개암나무 열매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듯이, 하느님이 동그란 공처럼 생긴 이 세상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줄리안은 이처럼 자기가 처한 참담한 현실에서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한결 같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 이런 하느님은 그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요하는 엄혹한 하느님이 아니라 기쁨과 자비,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그 당시 주류 정통 신학은 이처럼 흑사병이나 농민 봉기로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것이 사악한 사람들을 솎아내시는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하느님이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이기에 그럴 수가 없다고 믿었다. 우리가 당하는 이런 고난이나 아픔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라고 보았다. 줄리안은 또 그의 계시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고통당하는 광경을 자주 보았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영광을 볼 수 있기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하늘을 보는 것이라 했다.
줄리안의 사상을 일별해 볼 때 크게 세 가지 구체적인 견해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 첫째가 죄란 필요한 것이라 보는 그의 죄 인식, 둘째가 하느님은 노하시지도 않고 용서하시지도 않으신다는 특별한 구원관, 셋째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어머니로 보는 신관이다. 이 세 가지 사상은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논리적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첫째, 줄리안에 의하면 죄란 필요한 것이다. 죄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쳤지만, 줄리안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철이 없고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뭔가를 배우기 마련인데, 우리가 짓는 죄란 결국 이런 실수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과정에서 거쳐야할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또 죄나 실수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는 의미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받으면 같은 고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더욱 가깝게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병상련(同病相憐)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절대적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노(wrath)를 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하느님이 분노하셨다는 말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분노를 투영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줄리안은 또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도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용서라는 말은 뭔가 옳지 못한 일을 했을 때 사용하는 말인데,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죄는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성숙해 가는데 겪어야 할 학습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보시면서, 인간의 영혼이 성숙해지므로 더 이상 죄악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전통적으로 죄인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는 가르침보다는 모두가 결국은 다 구원 받게 된다는 ‘만인 구원설’의 원형에 가까운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만인 구원설’의 이론 제공
셋째, 줄리안은 하느님을 ‘어머니’라 믿었다.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은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구별을 초월하지만, 인간적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경우 신을 어머니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동시에 예수님도 어머니시라고 했다. 줄리안에 의하면 이 지상에서 모성의 역할만큼 진실하고 강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과 하느님, 혹은 인간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처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보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줄리안 자신이 30세에 은둔자가 되기 전 어머니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무튼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낳으시고 젖먹이시고 보살피시고 길러 주시는 분”이라 했다. 도(道)를 두고 만물을 낳고 젖먹이고 돌보고 기르는 어머니로 보는 『도덕경』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고난이 겹치는 시대였지만 이런 아름다운 마음 때문인지 줄리안은 70세 이상을 살았다. 지금 노위치 성당 앞에는 성 베네딕토의 성상과 더불어 성 줄리안의 성상도 함께 서 있다. 비전을 통해 얻어진 새로운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사에서 여성성을 드높인 한 여성이 남성성의 상징적인 인물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사뭇 신기하게 여겨진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1045호 [2010년 0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