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정통주의에서 계몽주의가지 그리고 그이후 : 원종천

류성련 2014. 9. 13. 23:21
5. 정통주의 (Orthodoxy)(16C 후반 - 17C)
종교개혁 후에 개신교 교단 내에서 정통적인 교리를 세우기 위해서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 시키려고 노력을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루터가 죽은 후에 루터교회에서는 후계자들이 루터교회의 정통교리를 세우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을 한 것이다. 또 개혁교회에서는 칼빈이 죽은 후에 후계자들이 정통의 교리를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통주의는 교리화 작업을 실시한 시기이다.
또한 교단별로 신조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루터교(주로 독일지역), 개혁교회는 너무 여러군데이다. 나라마다 개혁교회들이 생긴다. 각 나라마다 생긴교회들이 많이있다. 그래서 교회의 신앙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표현하는 교리화 작업이 필요했다. 또 각 교단의 신학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신조이다.

*긍정적 - 성경의 진리를 복음의 진리를 명확하게 세우겠다는 것(신학을 진리에 따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작업이다)
*부정적 - 신학이 너무 지식화가 되고 사변화되고 나아가서 철학화가 되어버림. 분쟁이 많이 생김(교리논쟁, 교리싸움-같은 교단 내에서)-->분쟁이 생기니까 당연히 분열이 생김.
이런 부정적 현상으로 말미암아 총체적인 결과로서 교회가 전반적으로 영적인 분위기가 침체가 됨.(영적인 침체) 이런 상황에서 선교도 전도도 일어날 수 없다. 또 신앙의 실천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종교개혁이후에 전체적으로 개신교가 상당히 침체되는 위기상황이 찾아옴.
칼빈의 신학이 신앙에 도움이 되고 영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내용이 명확하게 신학적이면서도 신앙적인 능력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면은 신학과 신앙이 너무나 조화로웠다. 신학은 신앙을 위해서 존재하고 신앙은 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정통주의에서의 문제는 신학과 신앙이 자꾸만 갈라짐(분리됨). 신학과 신앙 사이에 주고 받는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침체에 빠짐. 살아있는 신앙의 역동적인 모습이 교회에서 나타나지 않음.

a. 루터교회
1546년에 루터가 죽음. 죽은 이후에 루터교회가 셋으로 분열된다.
① 루터 정통파
루터의 신학적인 입장을 철저하게 고수하겠다는 주장. 루터보다 더 루터적이었다.
(충성을 하다보면 더 과잉 충성을 하게된다. 그래서 주인 보다 더 앞장 서 나아가는
형국이다. 나중에는 지나칠 정도로 나아감-예: 루터가 이신칭의를 말하며 선행을 말하
고 선행을 경계할 것도 말했다. 왜냐하면 선행에 공로적인 사상이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행에 대한 댓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더
나아가서 선행이 악하다라고까지 말한다. 선행에 대해선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증이
생기게 함.)
② 필립파
칼빈의 영향이 조금 들어갔다. 성찬론에서 쯔빙글리와 루터와의 논쟁이 벌어지는데
루터는 카톨릭의 입장과 비슷한 모습이 보였다.(공존설) 그러나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말한다. 이런 개념으로 쯔빙글리와 칼빈과 하나가되어 개혁교회가 이루어짐.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개념을 완전히 부인하였다. 그러다 보니까 이러한 칼빈의 영향이
루터교회에 숨어들어옴. 루터 다음으로 루터교회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필립 멜랑톤
(Philip Melanchthan)이 칼빈의 성만찬의 임장을 은밀하게 받아들임. 나중에 루터
정통파에 의해서 싸움이 일어남.
이러한 논쟁이 계속 진행됨. 1580년에 루터 교회에서 화합신조를(Formuia of concord)
만듦 그 동안에 문제가 되었던 교리 문제에 대한 결론을 다 내림. 30년 이상 가져왔던
사상에서 벗어님.
너무 세밀하게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③ 중도파

b. 개혁교회
쯔빙글리와 칼빈쪽 개열이 합쳐짐. 츠빙글리 후계자가 블링거이다. 블링거와 칼빈이
합침. 개혁교회의 영향이 칼빈으로 말미암아 유럽 여러 나라에 퍼짐.
개혁교회는 루터교회에 비해서 교리 논쟁의 문제는 좀 덜했다. 17C에 들어가서야 문제가
생김. 개혁교회에서 벌어진 논쟁 중 하나를 알미니안 논쟁 중 한 가지라고 한다.
화란에서 벌어짐(화란 개혁교회, 블란서 개혁교회)
c. Armini
1610년에 Arminius 라는 사람이 당시 화란에 라이든 대학의 교수였다.(Leyden 대학)
당시에 개혁교회에 신학적인 입장이 예정론이었다.
화란정부에서 알미니안에게 당신이 이 예정론의 내용을 잘 정리해서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잘 설명해 줘라. 알미니우스가 연국함 . 그런데 알미니우스가 공부하다 보니까
알미니안주의를 인정하게됨.
화란계획교회가 입장이 난처하게됨.
결국 발견이 되고 알미니안 우스가 문제가됨.
드디어 교단에서 조사가 들어가고 재판 판결이 나가지 전에 1608년에 죽음.
알미니아누스가 죽었으면 사상이 끝나야 하는데 40여명의 추종자들이 죽으 스승을 위해서 글을 씀.

Remonstrance(저항)-5가지

1) 예정론의 원래 의미는 예지적 예정이다. 개혁교회에서 말하는 예정론은 예지적 예정론이라는 것이다. 칼빈과 rogury회에서 주장하는 예성된 성격은 하나님이 무조건 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누구신지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조건을 보고 성하신 것이라는 것에 반대.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예수를 믿을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알았다. 하나님은 시간을 다 초월하신다.
결국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께 근거한다. 그러나 예지적 예정은 사람의 결정권에 달렸다.

2)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만 구원받는다. 이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애초에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뜻한 바를 (속죄-->모든 사람)
3) 성령께서 역사를 하셔야만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를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
5)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구원이 끝까지 보장된다는 것은 명확하지 않다.
-->알미니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람 위주이다.
1610에 이것이 발표되고 개혁교회 내에서 엄청난 논쟁이 일어남.
1618년에 화란의 Dort 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림. 이때 내린 결론을 알파펫 다섯 글자로 씀. 일반적으로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고 함.
Total Depravity(전적타락)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알미니안의 예지적 예정은 선택이지만 조건이 있다. 그 사람이 앞으로 예수를 믿는 다는 조건이다.
Limited Atonement(제한 속죄)-2번의 속죄가 모든 사람에게 예수께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피 흘린 것이 아니라 진짜하나님의 백성인 택함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린 것이다.
Irresistible(불가항력적 은혜-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저항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
Perseverance of Saints(성도의 견인-한번 예수 믿은 사람들은 무슨 상황이 벌어져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은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된다.
교리가 굉장히 날카롭다. 싸우는 분위기고 투쟁하는 분위기에서 나오는 교리고 상대를 치기 위해서 만든 교리이기 때문에 상당히 공격적이다.
교리를 세우겠다는 의도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런 교리 작업만 하다보면 가슴이 냉랭해 지고 머리만 비대해 진다.


6. 경건주의 경건주의

敬虔主義

Pietism

(독)Pietismus.
17세기 독일 루터교에서 시작되어 많은 영향을 끼친 신앙개혁운동.

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개인적 신앙을 강조한 경건주의는 곧 다른 나라들에 퍼졌고, 시간이 감에 따라 사회적․교육적 관심사들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신앙이 경험에서 멀어지게 될 때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경건주의 운동들이 일어났다. 17세기초 루터교는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권 내의 반대파들과 논쟁하는 데는 유용했지만 영적인 양식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스콜라주의적 체계로 굳어져버렸다. 30년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부흥의 징후들이 나타났고, 경건문학과 신앙적 신비주의 전승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리처드 백스터, 존 버니언을 비롯한 여러 저자들의 작품이 번역되면서 영국 청교도사상의 영향이 대륙에 미쳤다. 신앙적인 이유에서 네덜란드로 추방된 사람들, 그중에서도 윌리엄 에임스는 독특한 네덜란드 경건주의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곧 독일에 확산되어 독일 루터교권에서 이미 '개혁 정통주의'로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개혁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 정통파 루터교인들의 '가슴과 심장의 신학'은 요한 아른트(1555 ~1621)가 쓴 책들로 가장 잘 대변되었고 또 폭넓게 소개되었다. 또한 루터교가 그 시기에 쓰던 찬송가도 영적인 부흥 분위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여러 갈래의 부흥운동은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1635~1705)의 삶과 활동을 통해 하나로 수렴되었다. 슈페너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행정목사로 있으면서 그 도시의 타락한 삶을 보고 고민하던 끝에 최초의 ' 경건자들의 모임'(collegia pietatis)을 조직했고,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성서를 읽고 영적 깨달음을 나누었다. 이런 모임은 곧 그 운동의 특징이 되어 그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경건주의자라고 불렀다.

슈페너는 자기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경건한 소원들 Pia Desideria〉(1675)에서 당시의 정통파를 무력하다고 평가하고 개혁을 위한 제안들을 내놓았다. 그 제안들은 다음과 같다. ① 개인적․공적으로 성서를 더 많이 사용할 것, ② 평신도들에게 신자의 제사장적 책임들을 더 많이 지게 할 것, ③ 살아 있는 신앙의 실천적인 열매들을 맺는 일의 중요성, ④ 논쟁보다는 경건과 배움을 중시하는 목회자 훈련, ⑤ 교화를 목적으로 한 설교 등이다. '경건자들의 모임'은 이러한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이상적인 도구였다.

독일 경건주의의 지도권은 슈페너로부터 할레대학교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에게로 넘어갔다. 프랑케는 유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할레대학교를 경건주의의 유력한 제도적 중심지로 만들었고 그 대학교와 관련하여 수많은 자선단체들이 생겼다. 할레대학교가 배출한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루터교를 조직한 헨리 멜키오르 뮐렌베르크(→ 뮬렌버그가)가 있다 (→ 색인 : 뮬렌버그가).

할레대학교가 배출한 또 하나의 인물인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카운트 폰 친첸도르프(1700~60)는 작센에 있는 자신의 영토에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아교도 난민들을 대상으로 모라비아 교회를 세웠다. 할레파 경건주의자들이 참회를 요구한 데 반해 친첸도르프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구원을 위해 유일한 필수조건이라고 설교했다. 경건주의가 독일 밖에서 직접적이고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마 친첸도르프의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감리교를 세운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교도들에게 유익한 영감을 받았으며,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는 등 중요한 경건주의적 요소들을 당시 갓 시작한 복음주의 운동에 첨가했다. 다른 교단들은 목회신학․선교활동․예배형식에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경건주의운동이 절정에 달한 것은 18세기 중엽이었지만 이 운동은 그후로도 계속되었으며 현재도 독일의 여러 지방과 그밖의 나라들의 모라비아 교회에 뚜렷이 남아 있으며, 일반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서 내면적으로 남아 있다. 19~20세기의 신앙부흥운동들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경건주의와 연관되었으며, 반대로 경건주의도 그 부흥운동들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16-17세기에 일어났던 운동
1) 특색 : 정통주의의 문제점(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너무 교리적이고, 논리적이 경향으로 치우신 것이다.
중세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 신비주의 신학이였다.
종교 개혁이후의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였다.
2) 이론 : 교리의 정통성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사변화 되지 않고 오히려 체험적인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발전시켜 나가자는 운동이다. 실천적인 운동이다.
신앙과 신학이 밀접한 관계를 같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다.
개신교 입장에서는 신학과 신아ㅣ 분리되고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이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들은 전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종교개혁에 신학과 신앙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복의 운동이다.

a. 청교도주의 청교도주의 (淸敎徒主義; Puritanism)

16세기말과 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초기에 이루어진 종교협정 이후 존속되어온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습으로부터 영국국교회를 '정화'하고자 노력했다. 모든 생활에서 도덕적․종교적 진지성을 보인 것으로 유명한 청교도들은 교회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전국민의 삶에 확산시키려고 했다. 국가를 변혁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내란으로 이어졌고, 청교도적 생활방식의 실용모형으로 미국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1534년 헨리 8세는 영국국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켰고,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은 에드워드 6세(1547~53 재위) 때 급속히 신장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재위기간에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자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순교하거나 추방당했다. 추방자 중 다수는 제네바로 갔는데, 그곳에 있는 장 칼뱅의 교회는 훈련된 교회의 실용모형을 제시했다. 이 경험으로부터 엘리자베스 시대의 잉글랜드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책인 〈제네바 성서〉(2권)와 J. 폭스의 〈순교열전 Book of Martyrs〉이 나왔다. 폭스의 책은 잉글랜드가 종교개혁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인식하게 했다. 1558년 프로테스탄트들은 엘리자베스의 즉위를 열렬히 환영했으나 엘리자베스의 타협정책으로 광범위한 개혁을 바라던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교회의 최고 정치기구인 주교회의를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청교도라는 말은 1560년대의 제의(祭衣) 논쟁 과정에서 생겨났는데, 청교도들 중 다수는 영국국교회의 정치형태를 장로 중심제로 만들기 위해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고, 개혁이 지체되는 것을 우려한 다른 청교도들은 '지체 없는 개혁'을 결의했다. 이 '분리주의자들'은 영국국교회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계약에 근거를 둔 자발적 회중을 형성했다. 두 집단 모두 기존체제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특히 분리주의자들이 받은 탄압은 더 심했다. 기존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당한 청교도들은 설교와 소책자 발간으로 관심을 돌렸고, 종교적 표현, 사회적 행동과 조직을 통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청교도주의가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귀족과 의회의 후원뿐만 아니라 옥스퍼드․케임브리지의 여러 대학과 교수단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어 1603년 칼뱅주의자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자 청교도들은 다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1604년 햄프턴 코트 회의에서 제임스 1세는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문구에 대한 청교도들의 불만을 묵살했다. 청교도들은 여전히 탄압을 받았다. 일부는 직위를 박탈당했고, 일부는 국교에 최소한도로 순응하면서 곤경을 피했으며, 타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잉글랜드를 떠났다. 찰스 1세(1625~49 재위)와 대주교 W. 로드의 재위기간에 국교에 순응하라는 압력이 가중되었지만 청교도 정신은 계속 확산되었고, 1640년대에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청교도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의회와 정부를 향해 하느님과의 계약관계를 새롭게 하도록 촉구했다. 의회는 교회정치에 관해 조언해줄 성직자단을 소집했으나,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의견이 너무 심하게 분열된 나머지 교회정치와 규율을 개혁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왕당파 군대를 무찌른 신형군(新型軍)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의회가 찰스 1세와 타협하여 그들이 청교도주의를 위해 얻은 것을 헛수고로 만들 것을 우려한 나머지 권력을 빼앗아 신형군의 영웅 크롬웰에게 맡겼다. 크롬웰의 공화정 아래 종교정책은 제한적이나마 다원주의를 허용하면서 청교도에게 특혜를 주었다. 이것과 함께 수평파․디거파․제5왕국파․퀘이커파(오늘날 현존하는 유일한 종파)를 포함한 많은 급진적 청교도 집단이 출현했다.

1658년 크롬웰이 죽은 뒤 보수적인 청교도들은 찰스 2세의 복위와 수정된 주교 중심제를 지지했으나 로드의 엄격한 주교 중심제를 재확립한 사람들에게 압도당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는 대박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명예혁명 기간에 마지막으로 포괄적인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영국의 종교문제는 1689년 기존교회를 주교 중심제로 하고 국교에 반대하는 집단들을 관용하기로 한 관용령에 의해 처리되었다.

계약공동체를 수립하여 거룩한 공화국을 실현하려고 한 청교도들의 이상은 토머스 데일에 의해 아메리카 버지니아 식민지로 이식되었으나 가장 큰 기회는 뉴잉글랜드에 찾아왔다.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 세워진 교회조직의 본래 형태는 장로교와 분리주의의 '중간 형태'였으나, 1648년 뉴잉글랜드의 4곳의 청교도 식민지는 케임브리지 선언을 공동 채택하여 회중교회적인 형태를 취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교회의 틀에 따라 세속 사회에서도 공화정을 실시했고 하느님의 선민만이 투표를 하고 다스릴 수 있었다. 이 원칙이 제2세대 거주자들에게 문제가 되자 불완전 서약을 채택했는데, 이는 세례를 받고 도덕적이고 정통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교도의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그밖에도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에서 쫓겨난 로저 윌리엄스는 로드 아일랜드에서, 퀘이커교도 윌리엄 펜은 펜실베이니아에서 각각 청교도적 실험을 했다.

청교도주의의 특성은 일차적으로 강도 높은 종교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청교도들은 인간이 자신의 죄의 상태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필요하고, 하느님은 설교를 통해 구원을 계시하며 이성보다는 성령이 힘 있는 구원의 수단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자연히 당시 영국국교회의 설교와 의식의 특성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신 청교도들은 성서와 일상적인 경험의 이미지들에 주목하는 평범한 설교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중시한 청교도들은 학식 있는 목회를 권장했다. 청교도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회심경험은 칼뱅주의에서 비롯된 예정론과 결합되어 자신들이 역사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라고 하느님이 선택한 선민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

참고문헌

청교도주의


청교도정신 : 알렌 카든, 박영호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청교도 신앙 : 마틴 로이드 존스, 서문강 역, 생명의 말씀사, 1990
청교도신학 : 에드워드 힌슨, 박영호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종교적 급진사상 : 림희완, 집문당, 1985
The Puritan Experiment:New England and Society from Bradford to Edwards : Francis J. Bremer, 1976
The Elizabethan Puritan Movement : Patrick Collinson, 1967
Society and Puritanism in Pre-Revolutionary England : Christopher Hill, 1964 (reissued 1986)
The Intellectual Life of Colonial New England, 2nd ed. : Samuel Eliot Morison, 1956 (reprinted 1980)
The Rise of Puritanism:or, The Way to the New Jerusalem as Set Forth in Pulpit and Press from Thomas Cartwright to John Liburne and John Milton, 1570-1643 : William Haller, 1938(reissued 1984)


1) 16세기 후반- 17세기 중반
2) 상황 : 영국에서 시작해서 미국으로 번져나감. 이 신앙은 한국으로 의미있게 들어온다.
헨리 8세로부터 시작된 영국 국교회 영국국교회

英國國敎會

Church of England

영국의 국가교회.

2세기 영국의 그리스도교에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16세기 종교개혁 뒤 생긴 성공회의 모체가 되는 교회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세의 영국교회와 앵글로색슨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교회행정․전례․관습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틀을 귀중히 여기며 보존하고 있다.

5세기 로마의 영국 통치가 끝나면서 침입하기 시작한 앵글로색슨족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파송한 로마의 수도사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영국에 도착한(597) 뒤 약 90년이 흐르는 사이 영국의 모든 색슨 왕국은 점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종교개혁 전까지 영국 교회는 진보와 쇠퇴를 겪었다. 8세기 영국의 학문수준은 상당했으며, 몇몇 영국교회 성직자들은 유럽에서 학자․개혁가․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뒤 덴마크의 침입으로 수도원은 파괴되고 학문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웨식스 왕들이 영국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자 교회는 다시 개혁되기 시작했다. 11세기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하자(1066), 영국은 라틴계 유럽 문화에 보다 가까워졌다. 영국 교회는 로마의 견해에 따라 개혁되었는데, 지역교회회의가 부활되었고, 성직자의 독신생활이 요구되었으며, 서부 유럽의 교회법이 도입되었다. 중세기에 영국의 성직자와 평신도는 서방교회의 생활과 활동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영국국교회는 중세 후기의 특징인 종교적 불안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14세기 종교개혁가이며 신학자인 존 위클리프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혁명적인 비판자였으며,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평가된다. 헨리 8세(1509~47)는 로마 교황과 대립하여 독립된 영국국교회를 세웠다.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 헨리 8세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자 영국의회는 헨리 8세를 돕기 위해 영국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시키는 법령을 통과시켰으며, 1534년에는 영국의 왕을 영국국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만들었다. 이때문에 수도원은 탄압을 받았으나 그밖의 다른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헨리 8세는 비록 영국국교회를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시켰지만, 여전히 가톨릭교회로 남아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죽은 뒤 에드워드 6세는 재위한 6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553년 에드워드의 이복동생이며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메리의 박해는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영국국교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었을 때 독립된 영국국교회가 다시 세워졌다. 〈성공회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1549)와 '39개 조항'(Thirty-nine Articles)(1571)은 전례와 교리의 기준이 되었다. 17세기 청교도운동은 영국 내란(1642~51)과 공화정 수립(1649~60)의 계기가 되었다. 왕정과 영국국교회는 탄압을 받았으나 1660년 모두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이 로마 가톨릭의 유산을 강조한 반면, 18세기의 복음주의운동은 영국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 유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2가지 유산은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각각 고교회파(High Church)와 저교회파(Low Church)로 불리기도 했다. 20세기 영국국교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국국교회는 주교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는 캔터베리와 요크의 2개 관구로 나누어져 있다. 관구의 지도자는 대주교인데, 캔터베리 대주교가 서열상 위에 있다. 관구는 주교가 지도하는 교구로 나누어지고, 교구는 다시 몇 개의 소교구로 나뉜다. 원칙상 사제를 돕도록 되어 있던 여성 부제는 1987년 처음으로 서품을 받아 미사집전을 제외한 모든 성직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가 헨리 6세때 개혁다운 개혁이 시작된다. 이때
부터 유럽에서 개혁자들이 들어온다. (신학적, 신앙적) 메리 여왕이 등극할 때 이
개혁을 중단시키고 영국을 카톨릭화 한다. 이 과정에서 300여명의 개혁자들이 순교를
하게된다. 그리고 일부 개혁자들은 제네바로 l나을 가게 된다. 메리 여왕이 죽고 나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 할 때 개신교를 인정한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까 제네바로
갔던 개혁자들이 다시 돌아온다. 이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칼빈의 영향을
받는다.- 제네바 교회의 모습을 배운다.) 이들이 영국 국교회를 현상태에서 제대로 된
개혁을 하게 된다.
이때 대륙은 신앙이 시들게 되는데 다시 영국이 불을 일으키게된다. (독일 경건주의가
나타남)
3) 시작 : 교회 정치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반체제 운동을 시작했지만
실패하였다 그 이후에 1500년대부터 시작해서 내면적인 경건운동, 개인의 영혼을 개혁
시켜주는 운동으로 변화하게 된다. 반체제 운동을 할 때 목숨을 걸고 했기 때문에
그 힘이 대단했다.
4) 방법 : 1590년대 윌리암 파킨스의 글을 보면 “그의 언약 사상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간다. 거기에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 있다. 해위언약은 아담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지만 실패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
언약이 이루어진다.”
은혜 언약에 있다면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
방법 :
① 행위언약에서 은혜 언약으로 들어간 체험이 있느냐? 정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의 체험이 있느냐는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회심 체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② 은혜 언약에 들어 가 있는 사람은 당연히 성화의 삶의 열매가 있다.
퍼킨스는 이것을 점검하기 위해 세 가지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 윤리 도덕적인 삶 (외적인 삶)
- 영적인 삶(내면적인 삶) : 자신의 심령 가운데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소망과 의지가 있느냐 만약에 그것
없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 영적 전쟁이 있느냐? : 죄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고민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느냐
③ 경건을 유발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④ 청교도주의에서의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구원의 범주내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으로 이루라는 말을 본다면 무수한 전투가 있다. 이것은
궁극적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면서 깊이가 있고, 완성을 해 나가는 것이다.
⑤ 성화를 향해 나가는 것이고, 영화를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⑥ 책임주의가 분명하다.
5) 훈련 방법 :
① 주일 성수 : 개신교 가운데 유일하게 주일을 강조했다. 성경적으로도 맞지만
경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즉 영적 훈련을 드리는 날로 정했다.
② 가족 종교 : 반체제 운도에서 개인의 영성으로 방향을 틀면서 가족 중심으로 (소그룹) 영성훈련을 하게 되었다. 가장을 단순히 생계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장으로 목사로 아내를 자녀를 가르칠
수 있도록 가장을 훈련시켰다. 주일날 목사님의 설교를 확실히 알게 하여 가족들에게 가르치게 되었다.
③ 영적 일기 :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동안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회개할 것은
철저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해결하고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다.
④ 철저한 말씀 순종 : 말씀을 순종하자면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이들은 삶을 경건하게 순종하
고, 지킬려고 한 것이다. 이들이 17세기 중반에 영구 정부까지 장학하게 된다.
b. 독일 경건주의
1) 배경 :
① 17세기가 넘어가면서 루터 교회가 침체가 되고 교회가 분열되어 가는 가운데
1618-1648년 종교 전쟁 종교전쟁 (宗敎戰爭; war of religion)

유럽에서 종교개혁 이후 16, 17세기에 종교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전쟁.

종교전쟁은 종교와 관련된 모든 전쟁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신․구 양교파의 대립이 국제전쟁으로 발전한 경우를 지칭한다. 여기에는 ①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1562~98), ②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 1648), ③ 30년전쟁(1618~48) 등이 속한다. 종교전쟁은 많은 정치사상을 낳았는데 이것들은 왕권을 재주장하는 데 강력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장 칼뱅의 가르침에는 세속적 권위에 대한 수동적 복종이 강조되었는데 바르톨로메오의 참살 사건 이후 위그노교도들은 이것을 지지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왕이 그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경우 왕을 공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변화에 위그노교도들이 한 가장 중요한 공헌은 익명의 소책자 〈독재에 반(反)한 주장 Vindiciae contra tyrannos〉(1579)으로 이것은 왕의 권한과 백성의 권리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거기에는 만일 왕이 신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의 백성을 정당하게 다스리지 않을 때는 백성들이 반역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전개되어 있다. 이에 대립하는 정치이론으로는 교황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이론가는 이탈리아의 고위성직자인 로베르트 벨라르미노이다. 바르톨로메오의 참살 이후 일단의 가톨릭 집단이 국가의 단결과 평화를 위해 위그노교도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야 하며 교황지상주의자들과 위그노교도들을 모두 제압하기 위해선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로써 왕권신수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왕권신수설의 요점은 백성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사람에 의해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신만이 그런 권위를 위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신이 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나바라왕 앙리는 이 이론에 힘입어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여기에 장 보댕은 〈국가론 Six Livres de la Republique〉(1576)을 써서 백성을 왕권에 복속시키는 정치적 계약은 종교적 차이를 우선한다고 주장해 그의 왕권을 한층 공고히 했다.→ 30년전쟁, 위그노


이 일어나는데 이 전쟁을 겪으면서 독일 국민들이
영적 갈급함이 더욱더 심각해진다. - 전쟁을 겪으면 인생관이 달라진다.
그리고 루터 교회에서 자성의 소리가 나온다. 참된 기독교가 뭐냐?
② 이런 상황에서 청도교주의의 실천적인 강인한 정신이 독일로 유입이 된게 된다. 영국 청교도의 책들이 번역되어 온다.
2) 필립 슈페너 슈페너

Philipp Jakob Spener

1635. 1. 23 북알자스 라폴츠바일러~1705. 2. 5 베를린.

신학자, 저술가, 독일 경건주의의 주도적 인물.

독일 경건주의는 17, 18세기 루터교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개인의 진보와 정직한 행동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했다. 슈페너는 초기에 루터교 신학자 요한 아른트와 영국의 설교가 리처드 박스터 같은 청교도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하던 시절(1651~59) 루터교 정통신학과 관행을 개혁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성직구조와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는 성직자들의 태도를 비판했다.

슈페너는 31세에 마인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루터교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신자 개인의 영적 성장, 기도, 성서공부를 장려하기 위한 모임인 '경건학교'(collegia pietatis)를 시작했다. 슈페너는 또한 독일의 목사들과 폭넓은 교제를 나누었는데, 이것은 그의 주요저서 〈경건의 소망 Pia Desideria〉(1675)과 함께 경건주의를 성장시키는 데 공헌했다. 〈경건의 소망〉은 경건주의의 기본 프로그램을 요약한 것으로, 슈페너는 이 책을 통해 독일전역에서 경건주의 운동의 대변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슈페너는 교리에 손상을 줄 정도로 지나치게 실천을 강조한다는 평도 종종 받았다. 그러나 당시 벌어지고 있던 교리투쟁을 보고 깊이 걱정했으며, 그 대부분을 해롭고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1686년 슈페너는 당시 독일 루터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드레스덴 왕실 수석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곧 그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라이프치히대학교와 작센 왕실의 루터교 정통파들이 경건주의를 비난하고 나섰다. 슈페너는 작센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를 주정뱅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

1691년에 슈페너는 베를린으로 가 장크트니콜라스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 왕실의 지원을 받아 많은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1694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경건주의를 기반으로 세운 할레대학교에서 슈페너는 제자 크리스티안 토마시우스와 아우구스트 H. 프랑케에게 교수 자리를 알선해주었다. 슈페너가 죽을 때쯤에는 독일의 경건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영향은 영국과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는 300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영적인 제사장직 Das geistliche Priestertum〉(1677)․〈일반 신학 Die allgemeine Gottesgelehrtheit〉(1680) 등이다.



① 소그룹을 통한 실천적 성경 공부를 하라.
- 현재 독일의 성경 공부느 교리 정리를 위한 성경 연구였다. 그러나 슈페너는
성경을 평이하게 공부하고 실천하라고 하였다. 개인적으로 하지 말고 소그룹으
로 하라.
② 만인 제사상론을 실천하라
- 일반 성도 모두는 제사장이다. 루터는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그 후손들이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교회 사역에 투입시켜라. 그들을 말씀을 가르치고, 소그룹
인도자로 세워라.
③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라.
- 매일의 삶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라.
④ 안 믿는 사람들과 이단으로 보이는 사람을 볼 때 그들의 비난하기 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줘라.
⑤ 실천적인 신학 교육을 하라.
독일 신학 교육이 잘못되었다.
2) 경건주의 영향
이 운동들이 주로 젊은 층을 통해서 일으켰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이 운동이
성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학이 있었다. 독일 경건주의, 청교도주의(켐브리지
대학)기 있게된 것은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필립 슈페너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도하는데 동료 교수, 학교 당국이 방해를 하게 되었다. 이때 대학을
세워버리게 된다. 할레대학이 경건주의의 원산지가 된다.
어느 운동이 성공하려면 지속이 되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후계자 있어야 하느데
필립의 후계자는 허먼 프랭크가 이어받았다. 프랭크는 필립 슈페너가 하지 못한 사회
복지를 하게 되는데, 고아원, 성경공회..등을 세워 사회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입히는데
해외 선교까지 하게 된다. 이때 당시 개신교는 선교를 생각할 수 없었는데 프랭크와
경건주의가 이루게 되었는데 할레 대학이 선교사 훈련소가 되었다.
실제적인 경건주의는 개인적인 경건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선교를 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유일한 대안은 경건주의가 회복되는 것에 있다.


7. 계몽주의 啓蒙主義 (enlightenment; (프)Siecle de Lumieres (독)Aufklarung.;17․18세기 유럽의 지적(知的) 운동.)

신(神)․ 이성(理性)․자연․인간 등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한 사상운동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예술․철학․정치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중심이며,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지식․자유․행복이 합리적 인간의 목표라고 보았다.

이성중심 사상을 맨 처음 탐구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서, 그들은 자연의 질서정연한 규칙성에 지적인 정신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로마는 자연의 합리적인 질서와 자연법 사상을 포함해 그리스 문화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이고 보존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혼란기 동안 개인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고, 이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연결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점차 그들이 물려받은 그리스-로마 유산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절정을 이룬 ' 스콜라 철학'이라는 사상체계는 사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이성을 부활시켰으나 동시에 이성을 영적(靈的) 계시와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진리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중세 유럽에서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리스도교의 지적․정치적 체계는 인간중심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신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다시 프랜시스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험적 과학과 르네 데카르트, G. W. 라이프니츠, 뉴턴의 수학적 엄정성을 낳았다.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을 창조적 존재로 이해하는 인식이 부활되었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장기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베이컨․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루터 역시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을 적용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프톨레마이오스가 과학에서, 교회가 영적인 문제에서 지녀왔던 권위는 이제 해방된 인간 정신의 검토대상이 되었다.

어떤 문제에 이성을 적절히 적용했는가는 그것이 정확한 적용인가, 즉 타당성을 보장하는 추론 방법론이 어느 정도 발전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과학과 수학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으며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귀납․연역 논법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새로운 우주관이 탄생했다. 특히 뉴턴이 행성의 운동 법칙을 몇 가지 수학공식으로 정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간의 지식획득 능력에 대해 커져가고 있던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우주를 몇 가지 간단한 그리고 발견 가능한 법칙에 지배받는 장치로 이해하는 우주관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사상인 인격․신과 개인의 구원이라는 개념에 충격적인 영향을 끼쳤다.

결국 이성에 근거하여 사물을 보는 움직임은 종교에도 적용되었다. 자연적, 즉 합리적 종교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이신론(理神論)이 나왔다. 이신론은 비록 조직적인 종파도 운동도 아니었지만 약 2세기 동안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리스도교와 충돌했다. 이신론자들은 어떤 종교적 진리도 만족하게 생각지 않았으며 진리는 모든 합리적 존재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우주라는 기계를 만들고 움직이는 유일신이 존재하고, 이 신이 어떤 상벌체계를 주관하며, 인간은 덕(德)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을 종교에 적용한 결과 회의론․무신론(無神論)․유물론 등 이신론자들의 자연종교를 넘어서는 급진적인 사상들이 나왔다.

계몽주의는 처음으로 종교에서 떨어져나온 심리학․윤리학이라는 근대적인 이론을 탄생시켰다. 존 로크는 태어날 때 인간의 마음은 백지상태(tabula rasa)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세계에 대한 경험에 따라 빈 곳이 채워지고 개성이 창조된다고 했다. 따라서 선(善)․원죄(原罪) 등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여겨져왔던 속성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았다. 심지어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쾌락과 고통에만 관심이 있고 여기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쓰고 있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다만 생존과 쾌락의 극대화와 생존에만 관심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급진적인 정치이론을 낳았다. 과거에는 인간이 세운 국가는 신의 나라를 본뜬 것이며 영원한 질서를 지상에서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그것은 자연권과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상호 유익한 계약관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상황이 사회를 사회계약으로 보는 견해와는 너무 달랐으므로 계몽주의는 비판과 개혁, 그리고 마침내는 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다. 영국의 로크와 벤덤, 프랑스의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모두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비판하면서 자연권에 기초를 두고 정치적 민주주의 기능을 하는 좀더 높은 형태의 사회조직이라는 국가의 청사진을 그렸다. 이런 강력한 사상은 영국에서 개혁을,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운동이 진행될수록 그 자체에 쇠퇴 요인이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신론은 점차 위안과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 추상적인 이성을 너무 강조함에 따라 반대되는 정신이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뒤에 낭만주의로 알려진 문화운동에서 보여지듯이 흥분과 감동의 세계를 찾았다. 프랑스 혁명을 뒤이은 공포시대는 과연 인간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진보의 역사라고 하는 계몽주의 특유의 낙관론은 계속 살아남아 계몽주의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이 되었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18c
18c는 이성을 통한 과학 만능주의시대였다. 인간 스스로 높아지는 시대였다. 이 시대는 1517에서 1700년 까지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유지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1700년이 넘어 가면서 기독교 전통이 무너지는데 그것은 이성이 우월시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일들이 있기 전에 17c에 이런 이성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이 18c에 넘어 오면서 이성 만능 주의가 되었다. 17세기에는 이성주의와 정통주의, 경건주의가 함께 있었다.
17 18c초 18c
이성주의 - 이성만능주의 - 계몽주의
경건주의 - 부흥운동 - 감리교 운동 - 대각성운동
여기서 이성주의는 상당수 정통주의의 가르침(허버트,데카르트, 존 로크)을 가지고 있었다.
a. 허버트
공통적 개념이 이었다. “인간은 누구가 똑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에 신앙 때문에 너무나 많이 싸웠다. 이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평화를 추구해야한다. 여기서 이성을 강조하지만 그래도 정통적 신앙이 남아 있었다.
b. 데카르트 데카르트

Rene Descartes

(라)Renatius Cartesius.
1596. 3. 31 프랑스 투렌 라에~1650. 2. 11 스톡홀름.

프랑스의 수학자․과학자․철학자.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처음 반대한 사람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을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직관이 확실한 지식임을 발견했다.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과 연장(延長)을 본질로 하는 물질을 구분함으로써 이원론적 체계를 펼쳤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체계는 본유관념으로부터 이성에 의해 도출된다는 점에서 직관주의적이나, 물리학과 생리학은 감각적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다.

성장배경과 교육

아버지 조아섕은 렌 지방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1세 때 죽었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지만 가족의 연고지인 푸아투 지방은 위그노교의 본거지였다. 1606년 라 플레슈 예수회 대학에 입학하여, 훗날 프로테스탄트교를 탄핵한 자로 알려진 교부(敎父)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4년 푸아티에에 가서 1616년 법학 학위를 땄다. 당시 푸아티에서는 위그노교도들이 루이 13세에게 격렬히 반항하고 있었다. 1618년 네덜란드 브레다로 가서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오라녜 공(公) 마우리츠의 평화시(時) 군대에서 15개월 동안 수학과 군사건축학을 배웠다. 여기서 의사 이사크 베크만의 격려로 수학을 공부하고 〈음악에 관한 소고 Musicae Compendium〉(1618 저술, 사후 출판)를 썼다.

1619~28년 북․서 유럽을 여행했다. 보헤미아에 머물렀던 1619년 장차 인간의 권능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및 철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1620년경에 이미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연역적 추론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 그는 자연에 대한 신지학적(神智學的) 지식도 검토했으며, 마술사 레이몽 륄과 연금술사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추종자들에게 실망했지만 독일의 수학자이자 장미십자회원인 요한 파울하버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1620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로마 가톨릭 군대에 몸담았다가 1662년 파리로 건너갔다. 이때 장 루이 게 드 발자크, 테오필 드 비오, 클로드 미도르주, 교부 마랭 메르센 등의 친구를 사귀었다. 특히 메르센은 일생 동안 수백명의 학자․저술가․수학자․과학자 등에게 서신을 보내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해준 박식한 사람으로, 데카르트가 더욱 광대한 지적 세계와 접촉하도록 만든 주요인물이었다. 데카르트는 저서를 출판하기 훨씬 전부터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데카르트는 1628년 과학에서는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개연성이 중요하다는 연금술사 샹두의 주장을 거부하고 확실성을 얻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이야기했다. 예수회 체제에 맞서 1611년 오라토리오회 교육체제를 기초하고 평신도로 비밀군사조직을 만들어 프로테스탄트교와 싸웠던 베륄 추기경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고 데카르트를 초대했다. 평론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베륄은 예수회의 토마스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데카르트에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형이상학을 집필하도록 권고했다. 베륄은 데카르트를 가톨릭에 귀의시키고자 애썼으나 결국 데카르트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로 떠나 거처를 숨기면서 16년 동안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교를 포함한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교의 박해가 심했던 프랑스와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의 안식처였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루칠리오 바니니처럼 신의 기적을 자연적으로 설명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거나(1619)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에 충성하는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독창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데카르트는 1629년 프라네커대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초안을 썼다. 1630년 라이덴대학교에 등록하여 의사 앙리 르네리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1631년 덴마크를 방문했고 1633~34년 의사이자 연금술사 에티엔 드 빌브레시외와 함께 독일에 머물렀다. 의사 H. 레기우스가 1639년 위트레흐트대학교에서 데카르트의 견해를 가르치자 칼뱅주의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뵈티우스와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은 데카르트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데카르트는 1648년 〈뵈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는 같은 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둘 다 신의 은총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관용과 인권을 호소했다. 그러나 논쟁이 심화되자 데카르트는 프랑스 대사 및 친구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철학과 도덕관

데카르트의 목표는 자연에 정통하는 것이었다. 〈세계․광학․기상학․지리학〉에서는 지식 나무의 줄기에 대한 이해를 제공했고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는 그 뿌리를 해명한 뒤, 역사․의학․도덕 등 지식의 가지를 연구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역학은 의학이나 생리학의 기초이고 의학 또는 생리학은 도덕심리학의 기초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가 역학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고 믿었다 (→ 색인 : 기계론). 생리학을 연구하면서 동물의 육체를 해부하여 각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였고, 동물은 영혼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혈액순환에 대해서도 기술했으나, 심장의 열기가 혈액을 팽창․분출시킨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인간, 태아발생론 L'Homme, et un Traite de la formation du foetus〉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1641년 데카르트는 피코와 자크 발레 데바로의 방문을 받고 이 두 사람을 주인공(자신은 조연)으로 대화록 〈진리 탐색〉을 썼으며, 1644년에는 자신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집성하여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를 출판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통일이며, 정신과 육체는 송과선(松果腺)에서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두 실체이다. 송과선은 두뇌의 기관으로는 쌍을 이루지 않은 유일한 기관이므로 정신과 육체의 합일점임에 틀림없다고 데카르트는 추론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각기관에 미치는 작용 하나하나가 신경관을 통해 미세한 물질을 송과선에 전달하여 독특한 진동을 일으키고, 이 진동이 감정과 격정을 유발하여 육체의 작용을 야기한다. 예를 들어 어떤 병사가 적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도망치는 경우처럼, 외부자극에서 시작하는 반사궁(反射弓)은 우선 내부반응을 거친 뒤 육체의 작용이라는 최종 결과에 이른다. 정신은 육체의 반응을 직접 변화시킬 수는 없고, 송과선의 진동을 두려움과 도망을 유발하는 상태에서 용기와 싸움을 유발하는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인간이 특수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경험이라는 조건에 좌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어린시절 사팔뜨기 소꿉동무를 사랑해 한동안 사팔뜨기 여인만 보면 마음이 끌린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어릴 적 일을 기억해내고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통찰은 그가 자유의지와 정신의 육체조절 능력을 옹호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그와 같은 논변에도 불구하고, 1649년 〈 정념론 Les Passions de l'ame〉에서는 인간의 육체작용 대부분이 외부의 물질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도덕관은 반그리스도교적이었다. 데카르트는 칼뱅주의 및 예수회와는 대조적으로 신의 은총이 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덕이 쌓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진리발견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카르트의 낙관적 견해는, 구원을 오로지 신이 내리는 은총의 선물로만 여긴 예수회 운명예정설 변호론자이자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비관적 견해와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는 유덕한 행동이 은총보다는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 12세기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신의 상징이어서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오직 타인의 선(善)을 위해 호의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하며 이러한 관용이 최고의 덕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념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였으며, 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극단적인 도덕적 낙관주의자였다. 그가 보기에 정념은 자발적인 의지이며,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그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고 촉구한 점에서 스토아주의자이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정치철학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지만, 사물들의 질서에 순종하라는 세네카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정을 생애 최고의 거룩한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에, 친구를 속이도록 권하는 마키아벨리의 충고는 거부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족 등 사회집단의 일원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자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말년과 유산

네덜란드에서 16년을 보낸 뒤 데카르트는 1644, 1647, 1648년에 잠깐씩 프랑스에 돌아와 머물면서 〈철학의 원리〉․〈제일철학에 관한 성찰〉․〈반론과 응답〉의 프랑스어 번역(역자는 각각 피코, 뤼용 공작, 클로드 클레르슬리에)을 감수했다. 1647년에는 가생디와 홉스를 만났으며, 기압 측정을 위해 퓌드돔 산(山)에 기압계를 설치하는 실험을 파스칼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프랑스 재무장관 피에르 달리베르와 접촉하여 왕립대학에 기예(技藝) 실습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1648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 프롱드의 난(亂)이 일어나자 급히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의 에흐몬트로 돌아갔다.

1649년 데카르트는 클레르슬리에의 동생이자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 엑토르 피에르 샤뉘의 주선으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궁정에 초대받았다. 데카르트는 매일 오전 5시에 크리스티나에게 철학을 강의했으며, 그녀의 명령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5막 형식의 희극 1편과 〈평화의 탄생 La Naissance de la paix〉이라는 무도회용 시를 썼는데, 이 시는 30년전쟁의 종결을 가져온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서 크리스티나가 한 역할을 칭송하고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글이었다. 이밖에도 스웨덴 학술원 설립 법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1650년 2월 1일 오전 5시 여왕에게 법안을 제출했을 때 데카르트는 감기에 걸렸다. 그 자신이 겨울이면 인간의 사고도 물처럼 언다고 말한 스웨덴에서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된 탓에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숨을 거두었다.

데카르트가 죽은 뒤, 경건한 가톨릭교도였던 클레르슬리에가 유고를 입수하여 선별 간행함으로써 데카르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윤색작업은 교부 아드리앵 바예가 1691년 방대한 데카르트 전기를 펴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정말 그리스도교 교리를 지지하는 데 주된 관심을 쏟은 로마 가톨릭교 옹호론자였는지, 아니면 결정론적․기계론적․유물론적 물리학을 확립하면서도 경건한 자세로 자신을 보호한 무신론자였는지는 그가 살아 있을 때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클레르슬리에와 바예가 이용한 데카르트의 많은 원고들이 현재로선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답하기 어렵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667년 데카르트의 유골이 파리 주느비에브뒤몽 성당에 안치되던 바로 그날에 그의 책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한편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들은 데카르트 생전에 줄곧 그를 예수회회원이자 교황예찬론자 즉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1930경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요관심이 형이상학적 종교에 있었다고 믿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가 태생이나 정치면에서 프랑스인이자 왕정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가톨릭교도였다고 믿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사람이 신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분별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가급적 숨기고자 애썼지만 자신의 유물론적 물리학과 생리학이 무신론의 싹을 내포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무한한 우주를 쳐다보고 인간의 왜소함과 비참함을 느껴 전율에 휩싸인 파스칼과는 달리, 인간은 불쌍하고 죄 많은 존재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주를 이해하고 행복을 증진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신에 기도하는 일은 건방진 태도이며, 그보다 인간은 자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R. A. Watson 글 | 徐道植 참조집필



현대철학의 아버지 : 사고의 방법론이 현대적이다.

c. 존 로크 로크 (John Locke; 1632. 8. 29 잉글랜드 서머싯 링턴~1704. 10. 28 에식스 오츠.; 영국의 철학자.)

로크, 작자 미상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
영국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 미국 헌법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저자로 유명하다.

생애

초기생애

로크의 집안은 청교도적 경향을 가진 국교도였다. 시골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청교도혁명 당시 의회파에 가담하여 싸웠는데 이러한 경력은 로크가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곳의 교육은 철저했지만 뒷날 로크는 규율이 너무 엄격했다고 불평했다. 1652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다. 청교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학교에는 수사학․문법․도덕철학․기하학․그리스어 등 전통 스콜라식 교과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로크는 교과과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낡은 교과과정에서 벗어난 실험과학이나 약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656년에 학사학위, 2년 뒤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1년 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를 상속해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을 얻었다. 로크는 가르치는 것을 평생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을 가르친 것은 4년뿐이었다. 1665년 브란덴부르크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의 서기로 일했고 돌아오자마자 또다른 외교직책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이 시기 그의 논문․편지․비망록 등을 살펴보면 주요관심은 당시의 자연과학과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삶의 근본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교육의 편협성을 절감한 로크는 당대의 철학, 특히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실험과학이었다. 그는 근대화학의 선구자로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로버트 보일과, 얼마 뒤에는 역시 친구인 저명한 의학자 토머스 시드넘과 공동작업을 했다.

애슐리와의 제휴

로크가 처음으로 정치가 애슐리 경(나중에 샤프츠버리 백작이 됨)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의사로서였다. 1666년 여름 옥스퍼드를 방문했을 때 애슐리 경은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였고 친지의 소개로 로크와 만나 곧 친구가 되었다. 다음해 로크는 의학학위도 없었고 의료활동을 하려는 뜻도 없었지만 애슐리가(家)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는 단지 의료문제 뿐아니라 일반문제에 관해서도 애슐리의 개인상담자가 되었다.

애슐리는 정력적이고 과감한 정치가였으나 정적이 많았다. 그러나 애슐리에 대한 로크의 존경심을 감안할 때 애슐리가 과연 정적들이 주장하듯 사악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애슐리는 입헌군주제, 시민의 자유, 종교적 관용, 의회의 통치, 영국의 경제적 성장등을 단호히 옹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목표는 로크도 이미 적극 지지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두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로크의 사교모임 대부분은 사실상 친구와 더불어 철학․과학의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1668년에 이미 그는 새로 설립된(1663)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또 로크의 집에서는 여러 친구들(애슐리 경, 의사인 존 메이플토프트, 토머스 시드넘, 신학자이기도 했던 제임스 티럴 등)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로크는 〈인간 오성론〉의 서문에서 어느 날에 있었던 모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참석자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당황해 다음 모임에서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검토하고 우리의 지성이 적절히 다룰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을 가려보기 위해" 정신의 능력에 대해 논의하기로 결심했다. 로크는 직접 이 토론회를 열었고 모임이 끝난 뒤 인간의 인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직도 남아있는 2개의 초고(1671)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19년 뒤 〈인간 오성론〉에서 전개할 사상의 싹이 나타나 있다. 또 이즈음에 로크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케임브리지 플라톤 학파의 대표자들과 사귀었다. 이들은 경험과학에 공감하면서도 인간 삶의 이성적 요소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물론을 반대했다. 또 이들은 정치와 종교에 대해 자유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로크는 이들이 본유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주의를 주장하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관용, 종교적 삶의 일부로서 실천행위를 강조하는 것, 유물론을 거부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큰 매력을 느꼈다. 이 학파의 정신은 당시 로크에게 영향을 준 광교회파(廣敎會派)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광교회파는 누구나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으며 그밖의 비본질적인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1672년 애슐리는 샤프츠버리 백작 1세로 귀족이 되었고 그해 말 영국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샤프츠버리 백작은 곧 왕의 총애를 잃고 해임되었으나 재임기간 중에 무역 및 식민지 평의회를 설립하였다. 로크는 여기서 2년간 간사로 일했다. 그러나 심한 천식으로 고생하면서 런던의 공기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1675년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6개월 후 로크는 프랑스로 가서 4년 동안(1675~ 79) 머물렀다. 프랑스에서는 가생디 학파 특히 그 지도자 프랑수아 베르니에와 만났는데, 이 만남은 로크의 형이상학․인식론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피에르 가생디는 데카르트 철학의 지나친 사변적 요소를 거부하고 에피쿠로스의 3가지 학설 곧 경험론․쾌락주의․원자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경험적 증거에서 이성적 추론을 통해 더 나아간 정보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외적 세계의 인식은 어디까지나 감관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생디의 견해였다.

영국에 돌아왔을 때 나라사정은 뒤숭숭했다.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는 로마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샤프츠버리가 이끄는 청교도 다수파는 그의 왕위계승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샤프츠버리는 1년 동안 투옥되었고 로크가 귀국할 즈음에는 다시 신임을 얻어 추밀원 의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과 의회 사이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지 못하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샤프츠버리는 1년 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1683년 죽었다.

말년

로크는 1683년 9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네덜란드에 체류하는 동안 새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그동안 생각해왔던 문제들을 정리할 여유를 가졌다. 1684년 찰스 2세는 크라이스트처치가 로크에게 주던 장학금을 중단했다. 다음해 로크의 이름은 영국정부가 유럽에 지명수배한 84명의 반역자 명단에 올랐다.

로크는 1685년에 왕이 된 제임스 2세가 쫓겨날 때까지 5년 이상 외국에 머물렀다. 1688년 가을 제임스 2세의 반대자들이 네덜란드 오라녜의 빌렘을 왕으로 추대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로크는 외교관 직책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고 탄원위원회에만 참여했다. 그러나 런던의 공기가 또 건강을 악화시켰기 때문에 1691년부터는 친구 프랜시스 경과 매섬 부인의 집인 '오츠'에 은거하면서 이따금 런던에 들르곤 했다. 로크는 은둔하면서도 휘그당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비록 토리당의 압력으로 그 폭이 제한되었지만 로크와 샤프츠버리가 추구하던 개혁은 '무혈의 명예혁명'으로 달성되었다.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고 시민의 자유, 종교적 관용, 사상과 표현의 자유 등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1695년에는 출판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말년에 로크는 주로 자신의 저작을 출판하는 데 힘썼다. 또 이자․이자율․조폐․무역 등에 관한 소책자를 쓰고 출판했다. 1695년에는 〈그리스도교의 합리성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을 출판하여 덜 독단적인 그리스도교를 옹호했다.

로크는 1704년 죽은 뒤 하이레이버 교구 교회에 묻혔다. 매섬 부인은 "그의 죽음은 그의 삶처럼 경건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편안했으며 고요했다"고 전했다.

로크의 철학

인식론

로크는 이성적 추론만으로 세계에 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견해를 거부했다. 데카르트를 무척 존경했지만 그의 철학에 들어있는 사변적 정신은 경계했고 스콜라 철학자들의 사변성을 경멸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오직 경험과 경험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자연과학자야말로 인식을 증진하는 진정한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과제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의 획득과정에 대한 이해'라는 소박한 문제라고 말했다. 즉 '인간이 갖는 지식의 원천․확실성․범위'는 무엇이고, 이와 더불어 '신념․의견․동의의 근거 및 정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원천'에 관한 해답은 명백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감각지각에서 시작되며 자신에 대한 인식은 내성 혹은 '반성'에서 시작된다. 일반적 원리에 대한 생득적 인식과 그러한 원리로부터의 이성적 추론이 인식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로크는 〈인간 오성론〉 제1권에서 생득적 인식에 대한 논의를 검토하고 그것의 무가치함을 보여준다. 제2권은 감각경험과 반성이 모든 인식의 원천이라는 주장으로 시작되는데 감각경험과 반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 자체가 인식은 아니지만 정신에 인식의 소재를 제공한다. 이 소재를 로크는 '관념'(idea)이라고 부른다. 관념은 '정신 앞에 있는' 대상이지만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물리적 대상을 표상한다는 뜻에서 정신 앞에 있다. 로크는 크기․모양․무게와 같이 대상의 실제 성질을 표상하는 관념과 색․맛․향기처럼 인식주체에만 지각되는 성질을 표상하는 관념을 구별했다.

로크는 여러 관념을 분류함으로써 관념의 원천이 언제나 감각과 반성에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모든 관념이 정신 앞에 직접있는 단순한 관념은 아니다. 많은 관념은 복합 관념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단순한 요소로 분석할 수 있다. 감각과 반성에 주어지는 것은 단순관념뿐이다. 정신은 이 단순관념들로부터 복합관념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뒤이어 나오는 인과관계나 실체 관념에 대한 로크의 고찰은 면밀히 검토해 보면 상당한 난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 오성론〉 제2권으로 경험론을 완벽하게 변호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 모두 감각지각에서 도출된다는 견해를 뒷받침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관념은 정신 외부의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반성적이며 내적인 것이다. 로크는 제2권에서 이러한 관념들을 분류하면서 경험적 심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는 감각지각, 기억, 식별, 광기, 고통과 쾌락, 감정, 관념의 연상 등에 대해 귀중한 설명을 제시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하고 또 인간은 물질적이며 비물질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크의 가장 귀중한 업적은 인격의 동일성에 대한 설명이다. 로크는 먼저 여러 종류의 동일성을 구별한 후 인격의 동일성은 자기의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언어를 다룬 제3권이 다른 부분보다 "힘들었다"고 말했다. 사고와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고와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데 로크는 관습적인 기호인 단어는 사물을 직접 표현하는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라고 함으로써 관념이론을 언어설명에 적용했다. 단어가 표현하는 관념은 모호할 때도 있으며 대응하는 관념이 없는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는 단어의 경우가 그러하다. 보편어의 사용은 보편자 이론과 결부되어 있다. 보편어는 어떤 특수한 관념을 대표하는가 아니면 단지 정신의 창작물에 불과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로크는 보편어의 사용은 그것이 '명목적 본질'을 가리키기 때문에 가능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의미(지시)하는 것은 현실적 본질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 즉 '지성의 작업'을 통해 생겨난 어떤 것이다. 제3권의 마지막 부분은 언어의 어쩔 수 없는 불완전성과 피할 수 있는 언어의 남용을 다루었다.

제4권에서는 인간이 갖는 지식의 본성과 범위를 논의했고 논조는 제1, 2, 3권보다 합리론적이다. 로크는 경험론의 관점이 낳는 회의론에 부딪치자 수학의 확실성에서 지식의 이상을 찾는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합리론자와 같은 관점을 취한다. 지식은 지각이지만 감각지각이 아니라 논증과정에서 얻어지는 지적 직관이다. 제4권의 첫 부분은 데카르트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직관하거나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엄밀한 지식이 수학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지만 물리적 세계 내의 관계는 직관할 수 없다. 관념과 명목적 본질은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실제 사물의 내적 본성은 인식할 수 없다. 현실세계에 대한 '과학', 확실한 지식은 불가능하며, 직관은 관념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로크는 물리적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식'도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는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종류의 인식은 관념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아니지만 확실성을 갖는다. 그러나 로크는 대부분의 경우 물리적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인식은 개연적이며,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에 의존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치이론

정치철학에 관한 로크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통치이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이다. 이 책의 1부는 17세기 중엽 로버트 필머 경이 왕권신수설을 옹호하기 위해 쓴 〈가부장론 Patriarcha〉을 반박한 것이며 2부는 절대정부론 자체를 반박했다.

로크는 정치권력을 "재산권의 규제와 보존을 위해 사형 및 그 이하의 형벌로 법률을 제정할 권리, 그러한 법률의 시행과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공동체의 힘을 행사할 권리, 그리고 어디까지나 공공선을 위한 권리"로 정의했다. 정부는 공공선을 확보하는 조건으로 어떤 통치자에게 신탁된다. 그러므로 통치자의 권위는 절대적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이다. 또한 개인은 시민사회에 들어설 때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개인은 원초적 공유물에 '자신의 노동을 혼합'함으로써 재산권을 획득한다(노동가치론의 싹이 나타나 있음). 개인은 정치권력이 자신의 재산권과 사상․언론․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사용되도록 기대할 권리가 있다. 시민사회에 들어설 때 개인은 자연상태에서 가졌던 타인에 대한 처벌권만을 포기한다. 개인은 '자연법의 집행권'을 포기하고 '공공의 수중에 양도'한다. 개인은 시민법에 복종하며 이러한 자발적 복종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발견한다. 이러한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로크는 혼합정체(입법부는 선거로 뽑는 반면 행정부는 보통 한 사람, 즉 군주인 정체)를 내세우고 입법부와 행정부의 분립을 주장했다. 로크에 따르면 인민은 궁극적인 주권자이기 때문에 정부가 신탁조건을 위배할 경우 언제나 지지를 철회하고 정부를 전복할 권리가 있다.

도덕철학

로크에게서 일관된 도덕이론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도덕도 수학처럼 확실한 과학이 될 수 있다는 그의 견해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도덕철학에는 합리론적 경향이 있다. 그러나 때때로 도덕과학을 옹호할 때 그는 단지 도덕논의에서 사용되는 단어에 대한 엄밀한 분석의 가능성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또 다른 경우에는 행복주의 도덕론을 제시한다.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쾌락을 증대하거나 고통을 감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선이 도덕적 선은 아니다. 도덕적 선은 우리의 도덕적 행동이 '도덕의 진정한 근원'인 신의 의지와 법률에 합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교육이론

〈교육에 대한 몇 가지 견해 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1693)에서 로크는 자신의 교육론을 전개했다. 좋은 교육은 정신과 육체 모두에 주의를 기울인다. 좋은 교육자는 운동과 놀이와 충분한 수면을 강조한다. 어린이는 감정을 발산하도록 해주어야 하며 되도록 구속하지 말아야 한다. 교육자는 지식에 앞서 덕성․지혜․좋은 성품을 불어넣어야 한다. 부모도 어린이 양육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부모의 모범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교육효과를 낳는다. 현대언어와 라틴어, 지리와 역사, 수학, 그리고 나중에는 민법․철학․자연과학 등 유용한 지식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향

지식의 힘을 신봉했다는 점에서 로크는 최초의 계몽주의 철학자였으며 더 넓게는 영국 경험론 학파와 미국 실용주의 학파의 사상적 전통을 기초한 사람이었다. 조세징수권 논쟁과 1688년 명예혁명에서 휘그당의 이데올로기를 전개한 로크는 자유주의의 고전적 표현을 정식화했다. 그의 자유주의는 미국혁명과 미국헌법에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에도 서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R. I. Aaron 글 | 鄭昌昊 참조집필



d. 이신론 : 이성 만능주의에 의해서 수정되어진 기독교를 이신론이라고 한다. 영국, 독일
에서 성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원죄, 속죄, 영벌, 성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것은 이성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상에서는 모든 것을 감소시켰다. 일반 역사에는 계몽주의를
높이 평가한다.
계몽주의는 기독교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8. 감리교운동 감리교 (監理敎; Methodism ; 18세기에 존 웨슬리가 영국성공회를 부흥시킨다는 취지로 시작한 운동.)

오늘날에는 감리교회 형태로 세계 도처에 남아 있다.

1738년 영국성공회 성직자 존 웨슬리는 한 종교집회에 참석했는데, 그의 〈일기 Journal〉에 따르면 이 집회에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끼고,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개인 구원의 확신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곧 조지 화이트필드와 협력하여 교회가 자기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회의 소외계층을 상대로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그후 웨슬리는 교리상의 문제로 화이트필드와 헤어졌지만, 많은 평신도와 몇몇 성직자가 그의 운동에 가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그의 동생 찰스로, 그가 지은 찬송가들은 감리교 부흥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이들은 영국성공회 안에 한 '단체'(society)를 형성했다. 웨슬리는 이들이 영국성공회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몇 년 동안 긴장관계가 계속되다가 웨슬리가 죽은 지 4년 뒤인 1795년에 이들은 정식으로 영국성공회와 결별했다. 중앙기관의 강력한 권위와 효율적인 지방조직을 결합한 잘 짜여진 교회 행정 및 평신도 설교자들의 기용에 힘입어 이들의 운동은 19세기 내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감리교는 특히 팽창해가는 공업지대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이 신앙으로 경제적인 좌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고 때로 근검절약으로 경제의 향상도 도모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1784년에 ' 감리교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자치권을 지닌 교단으로 설립되었다. 이 교단 설립을 이끈 인물은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토머스 코크로서, 이들은 웨슬리의 원칙에 따라 미국교회를 조직하되, 정착이 이루어진 지역과 미개척지역의 현실에 맞추어 수정했다. 독립전쟁 직전에 이르러서야 감리교 순회설교자들이 처음 미국에 도착했지만, 19세기 중엽까지 감리교는 미국의 다른 어느 교단보다 많은 교인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토록 눈부신 발전은 특히 아메리카의 변방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감리교 순회목사들이 말을 타고 변방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쉬운 말로 설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리교가 미국 개신교에서 그처럼 활력이 넘치는 교파가 될 수 있게 한 것은 감리교의 독특한 제도였다. 지역단위로 종규를 집행하는 감리교도들의 '속회'(屬會 class)가 조직되었고, 강력한 중앙기관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조직이 있어 순회설교자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감독한 것이다. 1844년 노예제도 문제로 남감리회와 북감리회로 분열하는 바람에 성장이 일시 저지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두 교단은 교인과 재산면에서 급성장을 계속했다. 감리교가 점차 미국 중산층 개신교의 일반적인 양상을 닮아가자 내부에서 '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 발생하여 19세기말에 갈라져 나갔다. 1939년 남․북 감리회가 재결합하고 그후에도 더 많은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성결운동에서 비롯된 성결교와 오순절교회는 계속 독립교회로 남아 있다. 감리교의 흑인교회들은 1939년 새로운 중앙 기관의 관할하에 통합되어 연합감리교 내에서 독자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가 1968년 이후 점차 감리교 본교단에 통합되었으며, 1974년까지는 인종에 바탕을 둔 모든 교구가 폐지되었다.

영국과 미국 감리교도들이 선교활동에 쏟은 열정 덕분에 감리교는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미국 감리교에서 유래한 교회들이 영국 감리교회에서 비롯된 교회보다 더 많고, 널리 퍼져 있지만 영국 감리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자치권을 향한 운동이 더욱 순탄하게 진행되어왔다. 19세기에는 영국과 미국 감리교가 모두 여러 차례 분열을 겪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점차 재연합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으며, 전세계 감리교도들은 범세계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에 충분한 역할을 감당해왔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식․상황은 매우 다양하지만, 감리교는 교리에 순응해야 한다고 엄격히 고집하거나 신학 사색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역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들을 받아들인다. 감리교는 신자의 신앙을 북돋워주고 개인생활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교리(특히 존 웨슬리의 견해와 관련이 있는 구원확신과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가르침)들을 강조하고, 신앙의 핵심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예배는 단순하고, 성직자와 평신도가 예배 및 교회행정에 함께 참여하며, 소외당한 사람들을 돌보고, 사회 여건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리스도인이 서로 격려하고 배우기 위한 작은 모임들을 구성하고 협력적인 감독체제(이 체제에서는 모든 목사들이 교회의 중앙기관과 '연결'되며, 행정 지도를 받는다)를 유지하며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

한국의 감리교

한국 감리교의 역사는 1885년 4월 미국 감리회 선교사 H.G. 아펜젤러가 장로교의 H. G. 언더우드와 함께 내한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이미 1884년 6월 감리교 선교사 R.S. 맥클레이가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감리교의 선교사업에 대한 허가를 요청한 바 있었다. 그리고 고종 황제는 같은 해 7월 3일 교육과 의료사업에 한해 활동을 허가하여 미국 남감리회는 교육사업을 위하여 아펜젤러를, 의료사업을 위하여 W.B. 스크랜턴을 각각 선교사로 임명했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부터 자신의 숙소에서 한국인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후일 배재학당으로 발전했다. 스크랜턴의 모친에 의하여 시작된 이화학당은 초기 한국여성교육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감리교의 선교정책은 처음부터 교회중심적인 교인 양성보다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을 했다.

미국 남감리회가 선교활동을 시작한 지 10년 후인 1895년 10월에는 미국의 북감리회가 한국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감리교는 2개의 감리교회, 즉 남․북 감리교회가 공존하게 되었다. 남․북 감리교회는 처음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1907년 6월 협성신학당을 설립하였다. 협성신학당의 설립은 1905년 5월 미국 감리회에서 세운 미국 감리회신학당을 공동으로 경영하자는 남감리회의 제안을 미국 감리회가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1924년 2월 5일과 6일에는 남․북 감리교회 진흥방침 연구위원회가 조직되어 연합적인 전도․교육․출판 사업을 논의하였다. 이후 계속적인 연합노력을 바탕으로 남․북 감리교회는 1930년 12월 2일 서울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창립총회를 열고 최초의 한국인 감독으로 양주삼(梁柱三) 목사를 선출하였다. 통합된 한국 감리교의 형성은 감리교의 기본 특성의 하나인 교회연합정신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감리교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민족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상동교회는 민족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담임목사인 전덕기(全德基)에 의해 설립된 상동청년학원에서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한 한글운동과 최남선을 중심으로 한 국사교육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민족운동과 함께 감리교는 한국 개신교의 신앙부흥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07년에 있었던 한국 개신교의 대부흥운동은 원산에서 활동하던 남감리교회 선교사 R.A. 하디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는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감리교의 기본적인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 감리교의 민족운동의 전통은 3․1운동을 통해 강렬하게 나타났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6명의 기독교계 대표 가운데 9명이 감리교계 인사로 이필주(李弼柱)․최성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김창준(金昌俊)․박희도(朴熙道)․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정춘수(鄭春洙) 등이었다. 그러나 한국 감리교는 일제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아 1940년말에는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었으며, 1941년 3월에는 감리교의 3부 연회가 해산되고 대신 조선기독교단이 조직되었다. 이에 대하여 1942년 12월 2일 감리교 특별총회는 불신임안을 가결하였지만, 일제는 이 총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조직하였으며, 8․15해방을 20여 일 앞둔 1945년 7월 20일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감리교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연합적 성격에 있었다. 이미 1930년에 한국 감리교는 하나의 조선감리교로 출발하였다. 8․15해방 이후 전개된 몇 차례의 교회분열 위기를 연합정신으로 극복하였다. 8․15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에서 교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순수한 감리교의 전통을 재건하려는 일단의 교인들이 교회의 지도부와 대결하게 되었다. 감리교의 재건을 주장하는 측은 1946년 1월 동대문교회에서 감리교재건측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대해 교권세력은 같은 해 9월 특별총회를 소집하여 감독을 선출하였다. 감리교의 재건을 주장하는 측은 이에 맞서 1948년 1월 별도로 총회를 소집하고 감독을 선출하였다. 이러한 교회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1949년 4월 합동총회가 열려 김유순 목사가 통합된 감리교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1954년 3월 대전총회에서는 교회헌법을 개정하여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이러한 총회의 결정에 대해 개정 이전의 교회헌법을 수호하려는 호헌파는 1955년 3월 천안에서 감리교호헌측 전국신도대회를 열고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교회의 조직을 정비하기 위하여 한국 감리교가 진통을 겪는 과정 속에서 한국 감리교사상 획기적인 일이 이루어졌다. 감리교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자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1955년 중부연회에서 전밀라(全密羅)와 명화용(明和蓉)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편, 1954년 5월에는 목원대학의 전신인 대전신학원이 개교하여 한국 감리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국 감리교의 교회분열 위기는 주로 감독 선출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실제로 제10회 총회는 135회에 걸친 투표 끝에 감독을 선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1970년 10월 제11회 총회는 단 1회의 투표로 감독을 선출하였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일단의 교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경기연회를 조직하였다. 1974년 10월 제12회 총회에서는 교단 내 파벌운동에 반발하여 교회갱신운동이 전개되었다. 몇 차례의 교회분열의 위기를 경험한 한국 감리교는 1978년 10월 제13회 총회에서 다시 합동을 이루었으며, 실질적으로 다원감독제도(多元監督制度)를 채택하였다. 이 제도는 각 연회마다 각각의 감독을 선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감리교는 연회 중심의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 감리교는 다른 개신교와 구별된다. 한국 감리교는 연합적 성격을 특징으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연합적 특성은 교회 외적으로는 대화와 포용적 태도로 나타났다. 또한 일찍부터 전통문화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을 신학적으로 다뤄왔으며, 다른 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긍정해왔다. 이러한 성향이 신학적으로는 '토착화 신학'으로 형성되었다. 1910년대 이후 최병헌에 의해서 제기된 한국 감리교의 토착화 신학은 이후 한국 감리교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오늘날 한국 감리교의 조직은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그 아래 연회․지방회로 구성되어 있다.

申光澈 글



17c에 정통주의,
경건주의,
이성주의
정통주의와 이성주의 유사한 점은 정통주의도 이성적으로 교리를 만들어나갔다. 차이점은 정통주의는 오직 성경중심 안에 신학을 체계화 시켰지만 이성주의는 성경중심이 아니라 이성만을 사용하였다.
18C에는 이성주의 - 계몽주의
경건주의 - 부흥운동 ① 감리교 운동
② 대각성 운동
부흥운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운동이였다.
감리교 운동 :
① 18C의 영국 상황
㉠ 윤리적, 도덕적으로 황폐화 되었다. 상아탑으로 여겨졌던 대학도 경건과 학문이
아주 약화되었다.
㉡ 교회의 설교도 메마른 윤리적 설교들이 많았다.
㉢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은 도시화, 노동착취가 있었다.
㉣ 독일의 경건주의와 청교도주의가 영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 이런 것을 영국을 통해 부흥이 일어나는데 이때 웨슬리라는 인물이 나온다.

a. 요한 웨슬리 웨슬리 (John Wesley; 1703. 6. 17 잉글랜드 링컨셔 엡워스~1791. 3. 2 런던.; 영국국교회 성직자․복음전도자.)

웨슬리, Nathaniel Hone이 1766년에 그린 유화(부분)
동생 찰스와 함께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운동을 창시한 인물이다. 비국교도였다가 엡워스에서 교구 목사가 된 새뮤얼 웨슬리와 수재나 웨슬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런던 카르투지오 수도회 수도원에서 6년간 공부한 뒤, 1720년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하여 1724년 졸업한 뒤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1725년 옥스퍼드 주교에게 부제임명을 받았고, 다음해에 링컨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선발되었다. 1728년 9월 22일에는 사제임명을 받았다.

1729년 10월 연구원으로서 상주(常駐) 요건을 채우기 위해 옥스퍼드로 돌아가 동생 찰스와 로버트 커크햄, 윌리엄 모건과 함께 조직한 종교연구 모임에 가담했는데, 이 모임은 질서정연한 연구와 경건생활을 강조했기 때문에 조롱조로 '질서주의자들'(Methodists)이라 불렸다. 웨슬리는 찰스로부터 모임의 지도권을 물려받아 회원수가 늘어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질서주의자들'은 자주 성찬식을 가졌고 1주일에 2일을 금식했기 때문에 '신성 클럽'(Holy Club)이라고도 불렸다. 1730년부터 이 모임은 정규활동에 사회사업도 포함시켜서 옥스퍼드 교도소를 방문하고, 죄수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이들의 빚을 갚아주고, 일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노력했다. 빈민가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손길을 뻗쳐 음식․옷․의약품․책 등을 나누어주고 학교도 운영했다. 1735년 웨슬리 형제가 떠나자 신성 클럽도 해체되었다.

1735년 4월 아버지가 죽은 뒤, 옥스퍼드 시절의 친구 존 버턴과 북아메리카 조지아의 식민지 총독 제임스 오글소프 대령으로부터 복음전도협회의 요원이 되어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관장하고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설득을 받았다. 이 사명을 위해 사제임명을 받은 찰스와 함께 웨슬리는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이민온 모라비아교도들을 소개받았는데, 이들은 그가 추구해오던 영적인 평정을 누리고 있는 듯했다.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는 실패로 끝났고, 자기가 맡게 된 회중들에 대한 사역도 신통하지 못했다. 그는 이들을 대상으로 신실하게 사역하기는 했으나, 성직자로서 고자세를 유지하는 바람에 반감을 샀다. 순진한 마음으로 서배너의 최고행정관의 조카딸 소피아 홉키를 사랑하다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리자 그녀에게 성찬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비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도 저질렀다. 1737년 12월 조지아에서 도망쳐나왔는데, 그것은 소피아 홉키 일화 때문에 오해와 박해를 당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런던에서 그는 모라비아교도 페터 뵐러를 만났는데, 이 사람으로부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오직 믿음을 통한 은총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성서 교리를 강조한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을 발견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가(街)에서 영국국교회의 후원을 받는 모라비아교도들로 주로 구성된 모임에 참석하여 루터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 서론을 읽고 있는 동안 지적인 확신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바뀌었다. 당시 35세였던 그는 이 순간부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설교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영국국교회 회중들은 그의 열정이 싫어서 곧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웨슬리는 종교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신앙 열정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고, 특히 모라비아교도들과 비슷한 '속회'를 도입했다. 이것은 각 종교단체 안에 구성된 작은 모임들로서, 성(性)이 같은 사람, 혼인한 사람들로서 일신상의 비밀을 함께 나누고 비판을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회원 자격을 한정했다. 웨슬리는 이러한 모임을 위해 1738년 12월 '속회 회칙'(Rules of the Band Societies)을 작성했다.

1년 동안 기성 교회단체들을 대상으로 일했으나, 그의 방법에 대한 반발이 점차 거세졌다. 1739년 훗날 영국과 북아메리카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위대한 설교자가 된 조지 화이트필드는 웨슬리에게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지역의 민중에게 가라고 설득했다. 웨슬리는 개종자들을 규합하여 지속적인 교제와 영적 성장을 위한 집단으로 만들었는데, 런던의 한 집단으로부터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곧이어 런던과 브리스톨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도 이와 같은 집단들이 생겨났다. 회원들이 무자격자들이라는 추문을 미리 막기 위해 1743년 감리교 단체들을 대상으로 〈규율 Rules〉을 발행했다. 새로운 단체를 세우기 위해 그는 순회 설교자가 되어 여러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그의 접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헌신적인 평신도들을 통한 사역을 추구했고, 이들도 순회설교자들이 되어 감리교 단체들을 관할하는 일을 도왔다. 웨슬리의 설교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갔으나,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뒤에는 대부분 영국으로 돌아왔다. 런던 주교가 그의 설교자들 가운데 일부를 미국에서 일할 성직자로 임명하지 않자, 웨슬리는 1784년 독자적으로 이들을 성직자들로 임명했으며, 같은 해에 그가 만든 단체들은 영국국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역한다고 선언했다. 말년에 웨슬리는 영국 제도(諸島)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참고문헌

웨슬리


존 웨슬리 총서 전10권 : 김광식 외, 유니온, 1983
존 웨슬리의 사회윤리 : M. 마르쿠바르트, 조경철 역, 보문출판사, 1992
요한 웨슬레 : 송흥국, 대한기독교서회, 1991
웨슬레 신학 : 이성주, 성광문화사, 1988
존 웨슬리의 신학 : 콜린 윌리엄스, 이계준 역, 전망사, 1987
웨슬리 신학개요 : R. 버트너 외, 김운기 역, 전망사, 1987
혁신적 교회 갱신과 웨슬레 : A. A. 스나이더, 조종남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웨슬리 신학의 요점 : 폴 A. 믹티, 나영복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요한 웨슬리의 경건과 기도 : D. D. 머레이, 김보원 역, 생명의 말씀사, 1982
John Wesley:A Theological Biography, 2 vol. : Martin Schmidt, 1962-71
John Wesley, 2nd ed. : Albert C. Outler (ed.), 1970
A Union Catalogue of the Publications of John and Charles Wesley : Frank Baker, 1966
The Wesleys in Cornwall : John Pearce, 1964
Selections from Journal of John Wesley : Hugh Martin (ed.), 1955
관련 인터넷 링크

United Methodist History
Sermons on Several Occasions



** 모라비안 모라비아 교회
18세기에 창설된 개신교 교파.

15세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후스파 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 형제단이 그 기원이다.

역사

16, 17세기에 보헤미아 형제단 운동은 반종교개혁 집단에 의한 박해와 베스트팔렌 조약(1648)에 의한 금지조처에도 불구하고 소위 '감추어진 씨앗'인 충성스런 신자들의 노력을 통해 살아남았다. 당시 개신교는 초기의 활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 17세기 후반 독일에서 경건주의라는 형태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으로 인해 인근의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지하 개신교도들이 더욱 동요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개신교 지역으로 도망쳤고, 경건주의는 여러 귀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젊은 백작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는 감추어진 씨앗을 다시 살려내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1722년 보헤미아 형제단의 전통을 따르는 일단의 가문들이 모라비아를 떠나 작센에 있는 친첸도르프 백작의 땅에 정착해 헤른후트를 건설했다. 헤른후트는 순식간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수많은 사람들과 독일 등지에서 온 경건주의자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베르텔스도르프라는 인근 마을의 루터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했으며, 헤른후트에 있는 집회실에서 정규예배 외의 많은 예배를 보았다.

독실한 루터 교회 신자였던 친첸도르프 백작은 피난민들을 국가교회의 틀 속에 묶어두려고 했다. 그는 종파주의자들로 보이는 피난민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지만 그들이 자신의 교회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교회의 남은 자들임을 알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전통을 부활시키도록 도와주었는데, 그 발전과정은 2갈래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헤른후트 공동체는 모라비아 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기존의 경건주의 모형을 따르는 여러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부분이 루터파 교회이지만 일부 개혁교회도 포함되는 국가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곳의 모라비아교도들은 후대의 관점으로 보아 '디아스포라'로 알려졌고, 그들의 수효는 나중에 한 교파가 되었을 때의 모라비아 교회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1727년 8월 13일 특별 성찬식을 드리면서 형제애로 뭉치는 놀라운 체험을 했고, 이는 공동체 내부의 의견충돌을 없앴으며, 지속적인 복음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헤른후트는 수년 내에 세계적인 그리스도교 선교 프로그램의 중심지가 되었다. 최초의 디아스포라 전도자들은 1727년에 선교여행을 시작했으며, 1732년 최초로 선교사들이 서인도제도의 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헤른후트를 떠났고, 그뒤 20년 이내에 그린란드, 수리남, 남아프리카, 알제리,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와 같은 선교적 관심, 특히 저개발지역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이후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1735년 베를린에서 다피트 니치만이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에 의해 새 모라비아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면서 친첸도르프 추종자들은 한 교파가 되었고, 코메니우스의 손자 야블론스키는 장로교회 목사이면서 보헤미아 형제단 감독이 되었다. 모라비아교도들은 니치만의 지도로 활동을 재개했고, 감독․장로․집사의 세 성직으로 이루어진 직제를 만들었다. 헤른후트파는 시민생활과 교회생활이 신정주의(神政主義) 사회로 통합된 독특한 공동체 양식을 발전시켰고 이는 유럽, 영국, 아메리카에 있는 20여 개 모라비아 공동체의 모형이 되었다. 친교 모임을 통한 그리스도교인 양육, 찬양과 악기 연주로 매일 드리는 예배, 기숙학교, 집중적인 해외선교와 디아스포라 전도가 배타적인 모라비아 마을들의 특징이었다. 이들은 수공예품 생산으로 수익을 올려 자신들의 생계와 선교활동에 쓸 경비를 충당했다.

영국의 모라비아 교회

1734년 아메리카 식민지로 선교활동을 하러 가던 모라비아교도들은 런던에 들러 접촉을 가졌으며, 이는 1738년 잉글랜드․웨일스․아일랜드에 있는 교회의 선구가 되는 패터레인단(Fetter Lane Society)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존 웨슬리는 1735~36년 조지아로 가는 도중 배 위에서 모라비아교도들을 알게 되었고, 2년 뒤 영국으로 돌아와서 동생 찰스와 함께 모라비아교도들과 관계를 맺고 1740년까지 함께 활동했다. 그후 감리교와 모라비아교는 각각 독자적인 길을 갔다. 영국인의 기질에 보다 잘 맞는 감리교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한 반면, 모라비아교는 부흥 절정기가 지난 뒤로는 약 40개의 교회와 5,000명 미만의 신도밖에 안 되는 영국 제도의 작은 교파 중 하나로 남았다.

북아메리카의 모라비아 교회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모라비아 교회가 벌인 선교활동은 서인도 제도의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1732). 그러나 그들의 선교 동기가 분명하지 않았고, 유럽에서의 지위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1735년 조지아로 갔다. 친첸도르프는 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고국에서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기대했다. 조지아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들은 1740년 펜실베이니아로 가서 나자렛과 베들레헴을 세웠다. 친첸도로프가 펜실베이니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소종파들과 루터파, 개혁파 교회 배경을 가진 많은 독일인 이주자들을 하나의 연합교회로 조직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아메리카에서 14개월을 보내며(1741~43), 유럽의 계획을 본뜬 선교계획을 세웠다. 교회의 일치를 이루겠다는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으나 신대륙에 모라비아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 있는 몇몇 모라비아 교회들은 폐쇄적공동체를 이루었으나, 다른 교파와 친교를 나누는 모라비아 교회들도 있었다. 약 1세기 동안 펜실베이니아의 베들레헴, 나자렛, 리티츠, 노스캐롤라이나의 세일럼(지금의 윈스턴세일럼)에서는 모라비아교도들끼리만 살았다. 베들레헴 출신의 모라비아교인들은 1753년 최초의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인디언, 인근의 유럽인 이주자, 해외의 원주민을 위한 선교활동과 복음전도 프로그램이 퍼져나갔다. 특히 독립전쟁 이후 교회 밖에서 온 많은 어린이들이 모라비아 교회 기숙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는 교파적 전망보다는 디아스포라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규제되었으며 폐쇄적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규모가 작았다. 교회는 19세기 중엽 국제적인 단체로 다시 조직해 미국인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성을 허락할 때까지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 교회는 대부분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온 이주민들로써 성장했지만,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는 주로 토착민들이 점점 많이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에 컸다.

미국 모라비아 교회는 1771년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북부와 남부 관구로 나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 두 관구는 공동의 해외선교위원회와 신학교를 두었으며, 목회자들의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졌다. 윈스턴세일럼에 있는 세일럼대학과 베들레헴에 있는 모라비아대학은 모라비아 교회와 관련이 있다. 다른 미국 모라비아 교회 집단인 형제단은 모라비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해외선교에 협력했다.

북아메리카의 모라비아 교회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모라비아 교회가 벌인 선교활동은 서인도 제도의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1732). 그러나 그들의 선교 동기가 분명하지 않았고, 유럽에서의 지위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1735년 조지아로 갔다. 친첸도르프는 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고국에서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기대했다. 조지아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이들은 1740년 펜실베이니아로 가서 나자렛과 베들레헴을 세웠다. 친첸도로프가 펜실베이니아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소종파들과 루터파, 개혁파 교회 배경을 가진 많은 독일인 이주자들을 하나의 연합교회로 조직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아메리카에서 14개월을 보내며(1741~43), 유럽의 계획을 본뜬 선교계획을 세웠다. 교회의 일치를 이루겠다는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으나 신대륙에 모라비아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 있는 몇몇 모라비아 교회들은 폐쇄적공동체를 이루었으나, 다른 교파와 친교를 나누는 모라비아 교회들도 있었다. 약 1세기 동안 펜실베이니아의 베들레헴, 나자렛, 리티츠, 노스캐롤라이나의 세일럼(지금의 윈스턴세일럼)에서는 모라비아교도들끼리만 살았다. 베들레헴 출신의 모라비아교인들은 1753년 최초의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인디언, 인근의 유럽인 이주자, 해외의 원주민을 위한 선교활동과 복음전도 프로그램이 퍼져나갔다. 특히 독립전쟁 이후 교회 밖에서 온 많은 어린이들이 모라비아 교회 기숙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는 교파적 전망보다는 디아스포라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규제되었으며 폐쇄적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규모가 작았다. 교회는 19세기 중엽 국제적인 단체로 다시 조직해 미국인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성을 허락할 때까지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 교회는 대부분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온 이주민들로써 성장했지만, 노스캐롤라이나 교회는 주로 토착민들이 점점 많이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에 컸다.

미국 모라비아 교회는 1771년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북부와 남부 관구로 나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 두 관구는 공동의 해외선교위원회와 신학교를 두었으며, 목회자들의 자유로운 교환이 이루어졌다. 윈스턴세일럼에 있는 세일럼대학과 베들레헴에 있는 모라비아대학은 모라비아 교회와 관련이 있다. 다른 미국 모라비아 교회 집단인 형제단은 모라비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해외선교에 협력했다.

조직․교리․예배

전세계에 퍼져 있는 모라비아 교회의 지역별 행정단위는 관구별 장로 협의회가 행정을 담당하면서 그것을 통해 자치적으로 운영된다. 10년마다 열리는 대표 총회를 통해 모든 교회가 연결되며, 전체 교회에 공동으로 적용되는 교리와 교회법의 모든 문제를 결정한다. 성직임명권은 감독들에게 있으나 감독 직무는 본래 행정 업무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감독은 자주 행정직에 임명된다. 모라비아 교회는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계율인 성서의 본래 원칙을 고수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에 모두 동의하므로 독자적인 신조를 따로 만들지 않으며, 개신교 주요교파들이 낭송하는 여러 신앙고백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항목이 이미 언급되었다고 믿는다. 부활절 일출예배 때 사용하는 기도문은 모라비아 교회의 주요신앙내용 요약서로 간주된다. 예배는 전례(典禮)로 행하며, 전통적인 교회력(敎會曆)을 따른다. 성찬식은 1년에 6번 거행하지만 어떤 지방은 매달 거행하기도 한다. 찬송가로 사용하는 곡으로는 독일의 합창곡이 특히 많으며, 그리스도 중심의 모라비아 교회는 부활절을 앞둔 수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한다.



진젠도르프 친첸도르프 (Nik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 1700 독일 작센 드레스덴~1760. 5. 9 헤른후트.)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킨 종교․사회 개혁자.

모라비아 교회( 보헤미아 형제단)의 지도자로서 세계 개신교 에큐메니컬 운동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오스트리아 귀족가문 출신의 작센 주 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외할머니 헨리에테 폰 게르스도르프로부터 자상한 교육을 받았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경건주의자였으며, 중요한 경건주의 신학자 필리프 슈페너와 가까운 친구였다. 이러한 종교교육은 후에 할레에 있는 '프랑케 파이다고기움'에 들어감으로써 더욱 심화되었으며(1710~16), 졸업한 뒤에는 신학을 공부하라는 가족의 뜻을 떨치고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정식 교육기간은 관습대로 '대여행'으로 끝났는데, 이 여행에서 유명한 칼뱅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 인물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1721년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작센 법원에서 하급 직책을 맡았고, 1년 뒤에는 로이스의 에르드무테 도로테아와 혼인했는데, 그녀는 남편의 경건주의 신앙과 찬송가 작곡에 대한 열정에 동조했다. 관직 생활은 오래 하지 않았고, 할머니로부터 베르텔스도르프의 영지 일부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뒤부터는 그 영지의 소작인 문제, 특히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난민집단 문제에 몰입하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온 이 '보헤미아 형제단' 난민들은 그의 도움으로 작센 헤른후트의 모라비아 교회 정착촌을 발전시켰다. 그의 원래 의도는 엄격히 말해 에큐메니즘적인 것이었다. 그는 슈페너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안의 작은 교회들'(ecclesiolae in ecclesia)을 발전시킴으로써 교회를 부흥시키고 결국 여러 교회를 단일 루터 교회로 통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체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그는 공동체 중심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즉 "공동체 없이는 그리스도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헤른후트 형제단 협약'(1727)의 규율들은 평소에 친첸도르프 백작이 갖고 있던 이상, 즉 그리스도교도 정착촌을 세워 그리스도와 즐거운 사귐을 갖는 가운데 모든 일상생활을 해나가려는 이상을 구현하는 내용들이었다.

헤른후트와 그뒤에 세운 모라비아 정착촌들에서는 가족 중심의 생활이 각자 속한 합창대 중심의 생활로 점차 바뀌어갔는데, 이 합창대들은 나이․성별․혼인 여부에 따라 엄격히 구별된 공동집단이었다. 이 합창대들은 구성원들에게 공동생활장소․음식․옷․일거리를 주었고, 친첸도르프의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이론에 따라 어린이 보호와 교육을 충분히 맡아주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공동체 이상에 따라 소비뿐만 아니라 생산도 공동으로 했는데, 이 경우 공동체는 개인 노동에 대한 대가로 개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었다.

헤른후트에서 새로운 회원들을 모으는 데 크게 성공을 거두자 귀족사회, 도시의 동업조합들, 루터 교회 등 기성 권위체제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친첸도르프는 1734년 정통파 루터교 목사가 됨으로써 자신을 종파주의자로 보는 사람들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유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2년 뒤 작센 정부의 명령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추방당했다. 유배생활 동안 친첸도르프는 모라비아교도들의 해외 선교사업을 정식으로 대표할 수 있도록 '보헤미아 형제단'의 감독에 임명되었다(1773). 친첸도르프는 베테라비아의 헤른하크와 마리엔보른에 모라비아교도의 정착촌들을 세우고, 네덜란드와 발트 해 연안국에 여러 교회를 개척한 뒤 서인도제도에서 지냈다. 나중에는 영국에 모라비아 교회의 토대를 세웠으며, 이곳에서 감리교 목사 존 웨슬리를 다시 만났다. 1741~43년 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 모라비아 교회들을 세우고(그 가운데 펜실베이니아 베슬리엄 정착촌이 중요함),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선도하는 데 앞장섰으며,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여러 독일계 개신교 교회를 연합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뒤 에큐메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트로펜'(Tropen:훈련방법들)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이 사상에 따르면 각각의 개신교 교회들은 공동의 종교진리에 대한 이해와 전달 방법이 다를 뿐, 오직 하나인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체적이고도 타당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1747년 작센 당국자들은 이전에 내렸던 추방령을 취소했고, 2년 뒤에는 '보헤미아 형제단 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했으며, 1749년 영국의회도 이 교회를 승인했다. 그러나 1740년대에 지나친 행동을 보임으로써 반대자들에게 공격을 다시 시작할 빌미를 주었다. 이 시기에는 친첸도르프의 신학에 담겨 있던 반(反)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들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특히 헤른하크에서는 그리스도가 겪은 고통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 성적(性的)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그는 10여 년 간의 여생을 고통에 짓눌려 지냈다. 세계 여러 지역을 대상으로 추구해온 선교사업 때문에 빚이 쌓여갔고, 자기를 계승하여 모라비아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던 아들 크리스티안 레나투스가 25세에 폐병으로 죽었으며, 1756년에는 아내 에르드무테마저 죽었다. 다음해에 평생 동역자가 되어준 안나 니치만과 재혼했는데, 그녀는 이전에 '베슬리엄 독신 자매들의 합창대'를 이끈 바 있다. 3년 뒤인 1760년 친첸도르프는 헤른후트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친첸도르프가 교회사에 끼친 영향은 그가 상당히 열정적으로 설교했던 경건주의적인 '가슴의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당시 계몽주의가 표방한 무신론적 합리주의와 생명력을 잃은 개신교 교리에 모두 반대한 친첸도르프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종교적인 느낌과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큐메니즘, 그리스도교도들의 공동생활 추구, 세계 전역의 선교망 구축 등은 그의 설교․찬송․대중기도․신앙책자들에서 거듭 강조된 명제들이었다. 그의 종교적 교리들과 표현양식은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으나, 그당시의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에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G.L. Gollin 글

참고문헌

친첸도르프


변화된 새사람 31인 : 크리스찬월드 편집부 편, 크리스찬월드, 1993
Hauptschriften, 8 vol. : Erich Beyreuther․Gerhard Meyer (eds.), 1962-66
Zinzendorf:The Ecumenical Pioneer : Arthur J. Lewis, 1962
Der junge Zinzendorf : Erich Beyreuther, 1957
Count Zinzendorf : John R. Weinlick, 1956



웨슬리의 신학 :
① 완전 성화(완전주의) - 이신칭의를 기초로 해서 성화쪽으로 엄청나게 강조했다.
신학적인 내용이 힘을 실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인간도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하는데 어느 순간 완전 성화의 단계에 오른다. 이
상황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죄를 짓지
않는 성결의 상태에 도달한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 들어가면 죄의 뿌리가 빠진고까지 하였다. 이것은 삶의 명확한 목표가
설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의 말씀이 능력이 있게된다.
② 문제점 : 그렇다면 인간은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이냐 ?
웨슬리가 약간 조정하는데 이 완전은 절대적 완전이 아니고, 상대적 완전이다.
③ 상대적 완전이란 ?
죄도 두가지 종류가 있다. 의도적인 죄와 비의도적인 죄가 있다.
여기서 의도적인 죄는 죄다. 그러나 비의도적인 죄는 죄가 아니다. 즉 완전한 상태가
된다고 해도, 그 안에서는 완전한 것이 없기 때문에 비의도적으로 죄를 질 수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죄를 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④ 완전의 상태가 또 비 완전해 질 수도 있다.
⑤ 칼빈주의에서는 성령의 충만으로 이해한다.
⑥ 사람들이 이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도전을 받고 이 영향력이 사회에 나타
게 된다.
칼빈주의를 공격
① 그릇된 예정론
② 반율법주의 : 구원받았으면 됐지 뭘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사냐? 그냥 기쁘게 살면
되는거라는 신학사상
③ 조지 휫필드가 철저한 칼빈주의자이다. 그런데 부흥이 된다.
④ 그러므로 예정론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⑤ 그러나 갈라지게 된다.
결과 :
① 웨슬리는 교단을 만들지 않았다.
② 웨슬리안 감리교회
③ 웰쉬 감리교회(휫필드)로 나뉘어진다. - 칼빈주의 감리교회이다.

b. 죠지 휫필드 화이트필드

George Whitefield

1714. 12. 27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글로스터~1770. 9. 30 미국 매사추세츠 뉴버리포트.

영국의 영국국교회 복음전도자.

대중설교로 18세기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주 전역에 개신교 부흥운동이 일어나도록 자극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 스스로 '거듭남'이라고 부른 강한 신앙 각성을 체험했다. 옥스퍼드에서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친구가 되었고, 이들의 초청으로 1738년 선교 사역에 동참했다. 이때는 이미 웅변술이 뛰어난 복음전도자로 유명해져 있었다. 그뒤 그의 경력은 조지아에서 매사추세츠에 이르는 아메리카 식민주 전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기간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아일랜드에서 순회 설교를 한 기간으로 나뉜다. 그는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 안에서 거듭나는 체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고, 이점 외에는 교단이나 지역의 특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주들에서 일어난 신앙생활의 대각성운동과 초기 감리교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9. 미국 대각성 운동
1) 18C 운동으로 미국에서 일어났다.
① 상황
미국의 청교도 운동이 사라진다. 이유는 이성주의 계몽주의 영향 때문이다
1726년 미국 동부 지역의 뉴저지라는 곳에 어느 한 작은 교회인 화란 개혁 교회
(프랭클린 화이젠목사)에서 이 목사가 보니까 영적으로 모두 죽은 사람들로 보였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 결단하고, 강하게 도전하게 되었다.
㉮ 성찬을 금지시킨다. - 교인들 불만
㉯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복음과 교리를 집중적으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 어느 순간 한 가정에서 회심 사건이 일어난다. - 가정 부흥
㉱ 한 집의 회개가 다른 집의 회개가 되어진다.
㉲ 이런 운동이 옆 교회로.. 옆에 마을로 번지면서 부흥이 일어나게 된다.
② 50년간 부흥이 일어난다.
③ 모든 것은 한 사람부터 시작하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일을 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④ 화이젠 목사는 누구인가 ?
화란 사람이다. 화란에 청교도주의가 내려오는데 그가 청교도인이였다.
2) 반대세력이 나타난다.
① 장로교 안에서 너무 감정적이지 않느냐 이성적인 것도 필요하다고 보면서 수서히 분열
의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② 다른 장로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때 조나단 에드워즈가 나타나게 된다.
3) 조나단 에즈워드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 10. 5 코네티컷 이스트윈저~1758. 3. 22 뉴저지 프린스턴.

미국 청교도 신앙을 물려받은 위대한 신학자․철학자.

'대각성 운동'으로 알려진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킨 인물로 19세기 선교확장 시기의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생애와 사역

아버지 티모시는 코네티컷 이스트윈저에 있는 교회의 목사였고, 어머니 에스터는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에 있는 교회의 목사 솔로몬 스토더드의 딸이었다. 에드워즈는 5번째 자녀이자 11명의 남매 가운데 외아들로서, 청교도적인 경건함, 사랑, 교육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가정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뒤 13세에 코네티컷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학에 입학하여 1720년에 졸업했으나 뉴헤이븐에 2년 간 더 머물면서 신학을 공부했다. 뉴욕에서 잠시 목회생활을 한 뒤(1722~23) 1723년에 석사학위를 받았고, 1724~ 26년 대부분을 예일에서 개인교수 생활을 했다. 1727년 외할아버지가 목회를 하고 있는 노샘프턴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같은 해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황홀경에 빠지곤 하는 깊은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쾌활함과 조화로운 교양을 지녔다.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에드워즈가 학생시절에 남긴 원고들에는 뛰어난 관찰력과 분석력(특히 〈곤충들에 관하여 Of Insects〉에 잘 나타나 있음),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광학이론(光學理論)에 대한 몰두(〈무지개에 관하여 Of the Rainbow〉), 유물론과 무신론에 맞서는 과학과 철학 저서들을 펴내려는 포부(〈자연철학 Natural Philosophy〉) 등이 잘 나타난다. 평생 습관적으로 펜을 들고 공부하면서 수많은 공책에 자기 생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저서들의 〈목록 Catalogue〉은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드러내준다.

에드워즈는 신학 유산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 Personal Narrative〉에서 그는 어릴 적부터 예정설(하느님이 자신의 주권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여 구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버림으로써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교리)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으며, "그것은 공포를 자아내는 교리처럼 보이곤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교리에 대해 점차 지적인 반박을 했지만, 회개를 하고 나서야(1721초) 비로소 하느님의 주권에 대해서 '즐거운 확신'을 갖게 되고, 성서와 자연에 계시된 하느님의 영광을 '새롭게 자각하게' 되었다. 무한히 영광스러운 하느님에 대해 직접적․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에 의해서' 영혼에 직접 부여되고 모든 '개념적' 인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보고 맛보는 것(1,734번째로 행한 설교 제목)이 에드워즈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이것만이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그 안에 인간의 구원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임에 틀림없으며, 이것이 에드워즈의 우주적 낙관주의의 근거이다.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이 하고 계신 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까닭은 단지 하느님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에드워즈가 한 모든 설교의 중심 주제이다.

청교도와 다른 개혁주의 성직자들, 케임브리지 플라톤학파, 뉴턴과 로크 같은 영국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에드워즈는 당대의 철학을 통해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의 윤곽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존재에 관하여 Of Being〉라는 논문에서, 그는 절대무(絶對無)란 생각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하느님이 영원하고 전능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어느 것도, 심지어 우주적인 존재일지라도 의식(意識)을 떠나서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물질은 오직 인식하는 정신 안에서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고, 우주의 존재는 매순간 하느님의 지식과 창조의지에 달려 있고, '영혼들이야말로 진정한 실재'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지식이 궁극적으로 감각을 통해서 온다는 주장(로크)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는 감각을 통한 인식이 사람의 정신에 관념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지식은 하느님의 계시의지에 직접 좌우되고, 하느님과 영적인 일들에 대한 지식을 얻어 구원을 받는 것은 '새로운 감각'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하게 된다. 그 은총의 선물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거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은총을 통해 얻게 되는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기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궁극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회개와 거룩한 생활을 명령한다. 하느님은 은혜의 수단들(설교, 성례, 심지어 지옥의 두려움)을 중요시한다. 그 은혜의 수단들 때문에 회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은 그것들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정설을 믿었던 설교가 에드워즈는 사람의 감정과 의지에 호소하며 설교할 수 있었다.

노샘프턴에서의 목회

1729년 스토더드가 죽자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보스턴을 빼고는 가장 중요한 노샘프턴 교회의 강단을 혼자 맡아야 했다. 맨 처음 출판된 설교로서, 1731년 보스턴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의존, 구속의 역사, 그의 완전하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느님 God Glorified in the Work of Redemption, by the Greatness of Man's Dependence upon Him, in the Whole of It〉에서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신앙과 도덕의 자만심에 빠져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다고 비판했다. 또한 하느님만이 신자들의 모든 선이기 때문에 사람을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신앙이 구원의 유일한 방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진취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국교회만이 아니라 국교회 반대자들에게도 널리 퍼진 아르미니우스주의(네덜란드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유래됨)를 쉽게 받아들였는데,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을 무능하게 만드는 원죄의 효과들을 최소화했고, 자유주의를 강조했으며, 도덕성을 종교의 핵심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이런 견해들에 맞서 1734년 11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에 관해 연속 설교를 한 결과, 1734년 겨울부터 1735년 봄까지 노샘프턴과 코네티컷 강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기간 동안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에드워즈의 설교를 듣고 신앙고백을 했다. 그 뒤에 쓴 보고서 〈하느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신실한 이야기 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1737)는 특히 회개 체험의 유형들과 단계들을 묘사하여 미국과 유럽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1740~42년 식민지(미국) 전역에서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영국 감리교 운동에서 큰 성공을 거둔 복음전도자 조지 화이트필드와 뉴저지 출신의 장로교 목사 길버트 테넌트는 많은 대중을 끌어모았으며,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를 통해 격렬한 감정적 반응과 대중의 회개를 이끌어냈다. 에드워즈 자신은 비교적 청중들을 차분하게 다루기는 했지만, '분노한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엔필드에서 한 설교(1741)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설교'를 여러 차례 했다.

대각성운동은 회개와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무절제와 무질서, 교회와 세속사회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부흥운동과 관련된 태도들과 관습들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 화이트필드 개인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에드워즈는 그것이 하느님의 참된 사역이며, 그 사역을 더 증진하고 더 순결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대각성운동을 옹호하고 비판하기 위해 그는 〈성령 사역의 독특한 표지들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1741)․〈최근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에 대한 몇몇 사람들의 견해 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1742)․〈신앙적 감동에 관한 논문 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1746) 등을 썼다.

〈신앙적 감동에 관한 논문〉에서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냉정하고 '합리적인' 신앙관을 반박하면서 '모든 참된 종교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이며, 그 사랑의 순수성은 내적인 성품과 실천결과들에 의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1749년 에드워즈는 〈반성 Reflections〉이라는 글과 함께 젊은 부흥운동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회고록을 편집했다. 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인도에 가서 일하다가 1747년 젊은 나이에 죽은 브레이너드에 관한 이 책은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 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세상에 신앙 부흥을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증진하기 위한' 국제 '기도협조'를 제안받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특별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하나되게 하기 위한 작은 노력 Humble Attempt to Promote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1747)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요한의 묵시록〉에서 천년왕국에 앞서서 온다고 예언한 '대환란'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교회는 복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성공을 거둘 것을 내다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선교활동을 가로막는 주된 이념적 장벽을 제거하도록 도왔다.

노샘프턴에서의 파면

한편 에드워즈와 교회 회중들의 관계는 점점 나빠져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에드워즈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입장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당시 통용되던 '불완전 서약'(Halfway Covenant)에 따르면, 교인 자녀들 가운데 세례는 받았으나 회개의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사람들도 '계약에 힘입어' 자녀들이 세례를 받게 할 수 있었다. 스토더드는 비록 회개의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계약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성찬식에 받아들이는 당시의 관습을 노샘프턴 교회에서 채택하도록 했다. 이에 반해 에드워즈는 점차 성찬식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신앙고백은 교리 지식과 도덕적 선행만이 아니라 참된 신앙을 담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1749년 에드워즈는 위와 같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끝에 결국 해고되었고, 1750년 7월 1일 엄숙하고 절제된 심정으로 '고별설교'를 했다. 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Qualifications for Communion〉(1749)․〈솔로몬 윌리엄스 목사의 책에 대한 한 응답 가운데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고 진리를 옹호함 Misrepresentations Corrected, and Truth Vindicated,in a Reply to the Rev. Mr. Solomon Williams's Book〉(1752)을 썼는데, 앞의 책은 그 자신이 섬기던 교회 회중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쓴 것이고, 뒤의 책은 코네티컷 레바논 교회의 동료 목사가 자기 견해를 오해했다고 보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에드워즈는 논쟁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그의 입장은 결국 승리를 거두어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에 교도 자격에 관한 교리를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국교 폐지 이후 회중교회가 처한 상황에 더 적절한 교리가 되었다.

스톡브리지에서의 목회

1751년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 있는 개척교회의 목사 겸 그 지역 인디언들의 선교사가 되었다. 언어 장벽, 질병, 인디언 전쟁들, 개인적으로 못살게 구는 사람들과의 대립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목회에 충실했고, 여가를 내어 〈의지의 자유 Freedom of Will〉(1754)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서, 의지는 가장 강력한 동기들을 거스르면서까지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기능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의지는 감정이나 선호(選好)와 같은 것이다. 결단은 영혼의 '지배적인 경향'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의지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최대의 선'으로서 나타난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은 그들의 욕구와 의도의 표현인 결단의 내용에 대해서 도덕적인 책임을 질 것을 당연히 요구한다고 했다.

1757년까지는 〈원죄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대교리 Great Christian Doctrine of Original Sin Defended〉(1758)를 완성했는데, 이 책은 주로 노리치에서 시무하는 영국 목사 존 테일러가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칼뱅주의(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사상에 근거한 교리체계)를 공격하여 '아메리카를 소란스럽게 한' 데 대한 반론이다. 이 책에서 에드워즈는 인간의 마음이 부패했다고 가르치는 성서 구절들을 인용하고,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는 경험적 증거로 보아 모든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는 성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원죄 교리를 변호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느님이 아담의 죄책(罪責)을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轉嫁)했다는 개념을 반박했는데, 에드워즈는 하느님의 '속성부여'에 따라 정체성(正體性)이 결정된다는 독특한 이론을 제시하여 인류와 아담의 연합을 설명했으며, 인류의 내적인 타락은 아담의 죄책에 대한 법적인 형벌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가지고 있던 죄의 성향에 동참함(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얻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으로 에드워즈는 아메리카 신학에서 인간 본성을 놓고 길게 끌어온 논쟁에 중요한 공헌을 했고, 이 논쟁에서 쓰인 용어들을 정립했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선과 자율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테일러의 주장이 위험한 주장이라고 보았다. 이 주장은 모든 그리스도교도들이 믿고 있는 초자연적 구속 개념을 뒤흔든다고 본 것이다.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계획한 몇 편의 논문들 가운데 정작 완성된 것은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에 관해서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참된 덕의 본질 The Nature of True Virtue〉(1765)이었다. 이 2편의 논문은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의 행복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에 있다. 왜냐하면 자족적인 충만함 가운데 있는 하느님은 자신의 속성을 발휘하여 자기자신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피조물의 행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행복은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즐기는 것이다. 참된 덕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존재인 하느님과 그보다 열등한 모든 존재들을 그 존재의 등급에 따라 사심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덕은 자기 사랑이나 세속적인 이타주의(18세기의 2가지 주요 견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 자기 자신, 가족, 국가, 심지어 인류에 대한 사랑도 최고의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존경을 받을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도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사역의 역사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에드워즈는 1739년에 이 주제에 대해서 연속 설교를 했으며, 이 내용은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음)이다. 이 책은 훗날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성서․역사․조직신학의 자료들을 한데 묶은 완벽한 신학 저서가 되었다. 1757년 그는 뉴저지대학(뒤의 프린스턴대학교) 학장으로 초빙되어 1월에 그곳에 도착했으나, 천연두에 걸려 학장직을 수행해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

영향

에드워즈의 직계 제자들인 조셉 벨러미(코네티컷 베슬리헴의 목사), 새뮤얼 홉킨스(매사추세츠 그레이트 배링턴, 후에는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목사), 조나산 에드워즈 2세는 에드워즈가 이룩한 학문 업적들 가운데 일부를 발전시켜 뚜렷한 신학 학파를 만들었다. 이 학파는 처음에는 ' 홉킨스주의'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 뉴잉글랜드 신학'으로 불렸다. 이 사람들과 이들의 후계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유니테리언주의자들(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 '이단자들'에 맞서서 칼뱅주의를 변호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칼뱅주의 교리 가운데 일부 내용에 중요한 수정을 가하여 19세기 복음주의적 자유주의를 위한 길을 닦아놓았다.

에드워즈가 죽은 뒤 1세기 동안 아메리카 개신교의 지적 성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영국에서도 그의 책이 널리 읽혔다.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1861~65) 이후 청교도와 칼뱅주의에 대해서 일어난 전반적인 반발로 인해 그의 명성도 줄어들었고, 주로 '지옥불 설교자'로, 까다롭고 실속없는 형이상학자로 기억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 그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신학자들과 '아메리카 정신'을 그려내려고 하는 세속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저서들이 다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는 몇 가지 이유는' 그가 신앙 열정을 지적 엄격성, 도덕적 건실성과 결합할 만큼 역량이 있었고 신학적 관점의 폭이 넓었으며, 신앙을 실재에 대한 '실존적인' 반응이라고 강조했고 사랑을 종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으며,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T. A. Schafer 글



① 그는 외조부가 목회하던 곳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② 외조부는 너무 포용적인 입장으로 목회를 하였다. 이것은 청교도의 열심히 식어서
대충 교회를 목회하던 시대에 외조부가 그런 방법으로 하였었다.
③ 에즈워드는 청교도적인 기질이 있어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④ 수찬 금지령을 내려서 교회 성도들과 충동이 일어나서 쫓겨나게 된다.
⑤ 그 기간동안 청교도 연구와 부흥을 연구를 하였다.
⑥ 부흥을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영향을 그 시대의 지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⑦ 그의 저작중 ‘종교적 감흥’에서 부흥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반응에 대해서 노하는데
“우리가 회심을 격을때에는 긍정적으로 인간의 정적인 부분이 감흥적을 일어나니까
그것을 무시하지 말라”는 입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⑧ 그러면서 이런 감정과 체험을 강조하다보면 신비주의나, 인간주의로 흐를 수가 있다.
왜냐면 내 감정으로 모든 것을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신본주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정리

17c 18c 19c
이성주의 - 계몽주의 - 낭만주의
종교개혁 - 정통주의
경건주의 - 감리교 부흥운동 - 성결운동
미국 대각성 운동

10 계몽주의 계몽주의 (啓蒙主義; enlightenment; (프)Siecle de Lumieres (독)Aufklarung; 17․18세기 유럽의 지적(知的) 운동.)

신(神)․ 이성(理性)․자연․인간 등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한 사상운동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예술․철학․정치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중심이며,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지식․자유․행복이 합리적 인간의 목표라고 보았다.

이성중심 사상을 맨 처음 탐구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서, 그들은 자연의 질서정연한 규칙성에 지적인 정신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로마는 자연의 합리적인 질서와 자연법 사상을 포함해 그리스 문화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이고 보존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혼란기 동안 개인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고, 이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연결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점차 그들이 물려받은 그리스-로마 유산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절정을 이룬 ' 스콜라 철학'이라는 사상체계는 사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이성을 부활시켰으나 동시에 이성을 영적(靈的) 계시와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진리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중세 유럽에서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리스도교의 지적․정치적 체계는 인간중심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신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다시 프랜시스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험적 과학과 르네 데카르트, G. W. 라이프니츠, 뉴턴의 수학적 엄정성을 낳았다.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을 창조적 존재로 이해하는 인식이 부활되었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장기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베이컨․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루터 역시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을 적용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프톨레마이오스가 과학에서, 교회가 영적인 문제에서 지녀왔던 권위는 이제 해방된 인간 정신의 검토대상이 되었다.

어떤 문제에 이성을 적절히 적용했는가는 그것이 정확한 적용인가, 즉 타당성을 보장하는 추론 방법론이 어느 정도 발전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과학과 수학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으며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귀납․연역 논법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새로운 우주관이 탄생했다. 특히 뉴턴이 행성의 운동 법칙을 몇 가지 수학공식으로 정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간의 지식획득 능력에 대해 커져가고 있던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우주를 몇 가지 간단한 그리고 발견 가능한 법칙에 지배받는 장치로 이해하는 우주관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사상인 인격․신과 개인의 구원이라는 개념에 충격적인 영향을 끼쳤다.

결국 이성에 근거하여 사물을 보는 움직임은 종교에도 적용되었다. 자연적, 즉 합리적 종교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이신론(理神論)이 나왔다. 이신론은 비록 조직적인 종파도 운동도 아니었지만 약 2세기 동안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리스도교와 충돌했다. 이신론자들은 어떤 종교적 진리도 만족하게 생각지 않았으며 진리는 모든 합리적 존재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우주라는 기계를 만들고 움직이는 유일신이 존재하고, 이 신이 어떤 상벌체계를 주관하며, 인간은 덕(德)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을 종교에 적용한 결과 회의론․무신론(無神論)․유물론 등 이신론자들의 자연종교를 넘어서는 급진적인 사상들이 나왔다.

계몽주의는 처음으로 종교에서 떨어져나온 심리학․윤리학이라는 근대적인 이론을 탄생시켰다. 존 로크는 태어날 때 인간의 마음은 백지상태(tabula rasa)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세계에 대한 경험에 따라 빈 곳이 채워지고 개성이 창조된다고 했다. 따라서 선(善)․원죄(原罪) 등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여겨져왔던 속성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았다. 심지어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쾌락과 고통에만 관심이 있고 여기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쓰고 있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다만 생존과 쾌락의 극대화와 생존에만 관심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급진적인 정치이론을 낳았다. 과거에는 인간이 세운 국가는 신의 나라를 본뜬 것이며 영원한 질서를 지상에서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그것은 자연권과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상호 유익한 계약관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상황이 사회를 사회계약으로 보는 견해와는 너무 달랐으므로 계몽주의는 비판과 개혁, 그리고 마침내는 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다. 영국의 로크와 벤덤, 프랑스의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모두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비판하면서 자연권에 기초를 두고 정치적 민주주의 기능을 하는 좀더 높은 형태의 사회조직이라는 국가의 청사진을 그렸다. 이런 강력한 사상은 영국에서 개혁을,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운동이 진행될수록 그 자체에 쇠퇴 요인이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신론은 점차 위안과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 추상적인 이성을 너무 강조함에 따라 반대되는 정신이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뒤에 낭만주의로 알려진 문화운동에서 보여지듯이 흥분과 감동의 세계를 찾았다. 프랑스 혁명을 뒤이은 공포시대는 과연 인간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진보의 역사라고 하는 계몽주의 특유의 낙관론은 계속 살아남아 계몽주의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이 되었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비판과 낭만주의
a. 흄 흄 (David Hume; 1711. 5. 7(구력 4. 26) 스코틀랜드 에든버러~1776. 8. 25 에든버러.)
18세기 스코틀랜드의 경험론 철학자, 역사가, 경제학자, 저술가.

흄, Allan Ramsay가 그린 유화(1766)
철학을 인간 본성에 대한 귀납적 실험과학으로 보고, 뉴턴의 과학방법과 존 로크의 인식론을 기초로 해서 인식이 생겨날 때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경험을 떠나서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인식론이 후세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도덕가로 자처한 듯하다.

초기생애와 저술활동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나인웰스의 소지주 조지프 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고등민사법원장의 딸이었다. 처음에는 양가 전통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다양한 학문의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한때 독서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려 몇 년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1734년 브리스틀의 한 상점에서 수완을 발휘하던 중 생의 전환점을 맞아 프랑스에서 3년간 은둔했다. 그는 이 기간에 주로 옛 앙주 공국(公國)의 라플레셰에서 〈인성론 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쓰는 데 몰두했다. 3권으로 된 이 책에서 그는 하나의 완전한 철학체계를 세우려고 했다. 이해력을 다룬 제1권은 인간의 인식과정을 설명하면서 관념의 기원, 시간․공간․인과성 등의 관념, 감각의 진실성 등을 차례로 논하고 있다. 제2권은 정념에 관한 부분으로, 인간의 감정 질서를 상세한 심리 메커니즘을 통해 묘사하고 이성이 정념에 비해 부차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도덕을 다룬 제3권은 어떤 행동이 유쾌한 결과를 낳는가 아닌가에 따라 나타나는 시인(是認) 또는 부인(否認)의 느낌으로 도덕적 선을 설명했다. 〈인성론〉은 그의 사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한 저서였지만 자신은 말년에 이 책을 유치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다른 어떤 저서보다도 특히 제1권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흄은 1737년 영국으로 돌아와 〈인성론〉 출판작업에 착수했다. 야심에 찬 첫번째 저서는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해 그를 낙담시켰다. 그러나 2번째 저서 〈도덕․정치학 논고 Essays, Moral and Political〉(1741~42)는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을 얻어 에든버러대학교의 도덕철학교수직에 지원했지만 무신론자라는 여론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에든버러를 떠나 방랑생활에 들어갔다. 정신병자 애넌데일 후작의 개인교사로 1년을 보냈으며,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비서가 되어 1748~49년에는 빈과 토리노에서 궁정사절로 활동하기도 했다.

성숙기의 저술활동

이 시기에 번 돈으로 흄은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세 편의 도덕․정치학 논고 Three Essays, Moral and Political〉(1748)․ 〈인간 이해력에 관한 철학 논고 Philosophical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748)가 그 성과였다. 뒤의 저서는 〈인성론〉 제1권을 개작한 내용에 〈기적에 관하여 On Miracles〉라는 논문을 덧붙인 것이다. 흔히 이 저서는 흄이 1758년 개정판을 낼 때 새로 제목을 붙인 〈인간 이해력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덕 원리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1751)는 〈인성론〉 제3권을 개작한 것이다. 이 두 저서가 흄의 성숙기 사상을 대표한다.

〈인간 이해력 탐구〉에서 흄은 사실과 경험에 비추어 추리의 성격에 대한 주요문제들을 날카롭게 제기한 뒤 연상원리에 의거해 대답하고 있다. 그는 감각과 내성(內省) 자료인 '인상'과 이 자료들을 혼합․변경하여 얻는 '관념'을 구분하고, 모든 관념은 인상에서 생긴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의미를 해석하는 2가지 접근방법을 내놓았다. 하나는 '관념들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분석적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경험적 방법이다. 논증적 지식은 오직 관념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반면 사실들은 서로 어떠한 논리적 관계도 없으며 개개의 사실은 그 역(逆)도 생각할 수 있으므로 사실에 관한 논증적 지식이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인과성 이론을 펼쳤다. 흔히 인과성의 관념은 사실들 사이의 필연적 결합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관념은 어떤 인상에서 생긴 것인가? 흄은 감각자료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도 직접 관찰할 수 없으며, 오직 두 사건이 자주 일정하게 연접(連接)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 연접의 관찰을 통해 마음속에는 한 사건의 인상 또는 관념에서 다른 사건의 관념으로 이행하려는 연상 습관이 자리잡는다. 이 습관에서 느껴지는 강제력이야말로 인과성 관념의 원천이다. 이어 그는 인과추론의 과정을 고찰하면서 믿음(belief)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았다. 우리는 원인에서 결과, 또는 결과에서 원인을 추론할 때 단순히 추론되는 대상의 관념을 떠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흄은 이 믿음의 정체가 일종의 생동감 또는 생생함이라고 주장한다. 생생함은 본래 인상에 속한 것이지만 정신의 연상작용에 의해 특정한 관념들에도 속하게 된다. 바로 이 생생함 때문에 우리는 인과추론의 대상을 그저 관념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흄은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건들이 과거와 똑같이 미래에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명제가 거짓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명제들에 대한 믿음이 인간 본성에 뿌리박은, 따라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자연적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주장한 요지는 다만 그 믿음들이 경험적 관찰에 의해 직접 얻어진 것도 또 이성에 의해 추론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흄의 회의론이 부정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확실성이었다.

〈도덕 원리 탐구〉에서 흄은 이전보다 세련된 형태의 도덕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도덕성이란 관련 당사자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이 시인하는 어떤 성질을 일컫는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시인은 사실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인식'이 아니라 '느낌'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어떤 성질이 도덕적 가치를 갖는 이유는 그 성질의 소유자나 타인에게 주는 유용성 또는 유쾌함 때문이다. 흄은 도덕적 정서의 대부분이 타인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공감은 인간 본성에 기초한 사회생활과 개인의 행복의 근본원리라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흄을 도덕 냉소자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을 회의한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과장된 이론들을 회의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저서를 출판한 뒤 흄은 에든버러에서 여러 해 (1751~63)를 보냈다. 이때 훗날 절친한 친구가 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후임으로 글래스고대학의 논리학교수직이 거론되었으나 무신론자라는 소문이 나도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1752년 에든버러 변호사 도서관장직에 임명되어 마음껏 독서할 수 있었다. 〈정치론 Political Discourses〉(1752)에 뒤이어 카이사르 침략기부터 1688년까지를 서술한 〈영국사 The History of England〉(6권, 1754~62)가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의 출판으로 그의 이름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63년 흄은 파리 주재 영국대사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파리에서 그는 어디를 가나 폭넓은 지식, 예리한 사고, 유려한 필체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흄은 몇 년 뒤 귀국할 때 당시 프랑스에서 박해받던 장 자크 루소를 데리고 와 한 마을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던 이 천재는 흄의 행동을 음모라고 판단, 비밀리에 프랑스로 되돌아간 뒤 자신이 배신당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 기분이 몹시 상한 흄은 사실을 밝히기 위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자신의 설명을 덧붙여 공개했다(〈흄과 루소 사이에 벌어진 논란의 간략한 진상 A Concise and Genuine Account of the Dispute Between Mr. Hume and Mr. Rousseau〉 1766).

1769년 공직과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늘 마음에 그리던 에든버러에 돌아와 정착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연회와 토론회에서 여러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렸으며, 또 이미 출판된 저서들을 다듬고 고치며 남은 생을 보냈다. 1762~73년에 〈영국사〉 개정판이 여러 차례 나왔고, 전집에 해당하는 〈논문집 Essays and Treatises〉은 1753~72년에 8판이 나왔다. 이밖에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를 썼으나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출판을 유보했다. 이 책은 죽고 난 뒤 1779년에 출판되었다. 매우 초연한 태도로 쓴 〈흄 자서전 The Life of David Hume, Esquire, Written by Himself〉(1777)은 완성 날짜가 1776년 4월 18일로 되어 있다. 오랜 병고 끝에 그는 1776년 8월 25일 에든버러 집에서 죽었다. 유저(遺著) 관리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흄 자서전〉에 추도문을 실으면서 그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지혜와 덕의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흄의 저명한 친구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중에는 목사도 여럿 있었다. 마지막 병상에 누운 흄을 방문한 바 있는 보스웰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Private Papers〉에서 그 철학자가 자신이 왜 영혼불멸을 믿지 않는가를 쾌활하게 설명하던 장면을 회고하고 있다.

의의와 영향

흄이 18세기의 주요사상가였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업적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더라도 그렇다. 그 이유는 흄의 4가지 면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문필가로서의 면모이다. 개성과 겉치레를 멀리하는 흄의 문체는 이미 생전에 평판이 높았다. 또 무거운 몇몇 주제를 제외하면 그의 필치는 매우 경쾌하다. 서술의 냉정함․균형감각․유려함․명쾌함 등은 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둘째, 역사가로서의 면모이다. 〈영국사〉는 그가 죽고 난 뒤 1894년까지 최소한 50판을 거듭했다. 지금은 비록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당시에는 이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혁신적 저서였다. 내용은 더욱 방대해졌고 서술 시각은 더욱 공정해졌다. 게다가 인물과 사건이 극적인 단계를 거쳐 종국의 사태에 이르는 과정이 인과구조 속에 잘 짜여 있다. 〈영국사〉는 그후 일반독자를 위한 역사 서술의 한 전형을 마련했다. 셋째, 경제학자로서의 면모이다. 그가 12세 연하의 애덤 스미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 원리에 입각해 있었으며 역사에서 증거를 빌어와 논변을 펴는 솜씨도 똑같이 뛰어났다. 스미스의 몇몇 주장, 예컨대 '부는 화폐가 아니라 상품으로 이루어진다', '화폐유통량은 시장에 나온 재화량과 관계가 있다', '이자율 하락은 화폐과잉이 아니라 경기활황의 징후이다' 등을 보면, 18세기 '고전 경제학자들'이 계승한 흄의 탁월한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 철학자로서의 면모이다. 유럽에서는 그를 전형적인 영국 고전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본다. 독일에서는 특히 칸트의 비판철학이 흄에 대한 대응으로 성립했기 때문에 흄을 중요한 인물로 본다. 영국에서는 그의 적극적 영향이 19세기에 활동한 벤담의 공리주의와 존 스튜어트 밀에게서 확인된다. 흄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연결을 의심함으로써 근대세계에 고대 회의론을 되살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비록 자신은 뉴턴을 존경했지만 흄의 인과성 비판은 근대 과학의 철학적 토대를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특히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는 회의론보다 그의 자연주의가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흄의 자연주의는 철학적 정당화가 오직 자연세계의 규칙성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분석철학자들은 그 믿음이 흄 자신과 그가 서 있는 회의적 전통이 제기한 여러 문제를 해결해줄 전망을 열어 보인 것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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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론 경험론 (經驗論; empiricism)

가장 넓은 의미로는 믿음들이 무엇보다도 실제 경험에 의해 확증되기만 하면 받아들여질 수 있고 행동기준이 될 수 있다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

전문적으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분명히 구분되는 한 쌍의 철학이론, 즉 낱말이나 개념이 온전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경험가능한 사물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론의 한 갈래와,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는 인식론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경험론의 여러 가지 의미

넓은 의미

일상태도를 묘사할 경우 경험론은 종종 이론에 대한 무시나 무관심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를 경험주의자라고 부를 경우 그것은 대개 돌팔이 의사를 뜻한다. 반면 확증된 사실 외에 관습적 견해나 불확실한 추상적 이론을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켜 좋은 의미로 경험론자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좁은 의미

기본적으로 구분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앞서 말한 의미론적 경험론과 인식론적 경험론이 동일한 것인가가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험론자는 선천적(a priori) 개념을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선천적 명제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 용어법에서 '경험적인 것'의 반대말을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본유적인 것'(the innate)이라고 보는 점도 경험론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한 요소이다. 개념, 지식의 의미․정당화 문제와 인과적 발생의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 본유적이라는 말은 인과적으로 경험과 무관하게 생겨난 것을 뜻하는 반면, 선천적이라는 말은 지식을 정당화하는 일이 경험과 논리적으로 무관함을 뜻한다.

선천적인, 따라서 비경험적인 개념은 대체로 2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니다', '그리고', '모든' 등과 같은 논리학․수학의 형식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 '원인' 등과 같은 범주개념이다. 선천적 명제는 이보다 종류가 많아서 말뜻을 정의하는 명제, 동어반복적 명제, 논리학․수학․형이상학의 여러 공리(公理)․원리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경험론자는 이 가운데 오직 일부만 선천적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적 경험론은 경험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서 절대적․실질적․부분적 경험론으로 나눌 수 있다. 절대적 경험론은 어떤 선천적 개념과 명제도 부정한다. 그러나 대다수 철학자가 선천적 명제를 인정하고 있는 이상 지식에 대한 절대적 경험론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좀더 온건한 형태인 실질적 경험론은 모든 개념이 경험적이지만 형식개념만큼은 선천적이라고 본다. 이 관점에 따르면 형식개념은 말과 말의 관계에 속하는 순수 구문론적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논리학․수학 명제도 정의명제(定義命題)처럼 의미들 간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현대 분석철학이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이 실질적 경험론은 모든 선천적 명제를 은폐된 형태의 동어반복 내지 분석명제로 본다. 논리학․수학이 선천적 성격을 띠는 반면 과학은 철저하게 경험적이며, 이밖에 신학․윤리학․형이상학의 명제가 있지만 이는 위장된 동어반복 내지 경험명제이거나 참․거짓을 가릴 수 없는 사이비명제에 불과하다.

끝으로, 부분적 경험론은 선천적이면서도 사실적 성격을 띤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칸트의 선험형이상학의 명제, 신학의 명제, 도덕의 근본원리, 자연의 인과법칙 등은 모두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이다.

경험론의 역사

고대철학

서양철학에서 최초의 경험론자는 소피스트들이다( → 색인 : 그리스 철학). 그들은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합리론적 사변에 반대하여 인간과 사회를 철학의 중심과제로 삼자고 주장했다. 순수이성에 대한 이들의 회의론적 주장은 곧 반발을 불러일으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론 철학을 낳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 가운데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인간의 개념형성 과정을 경험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는 정신이 감각을 통해 물질세계와 접촉함으로써 관념이 생겨난다고 보았고, 경험론의 색채가 더욱 강한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든 개념이 감각경험의 잔상(殘像)이며 이 개념으로 이루어진 지식도 모두 경험적이라고 보았다.

중세철학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대부분의 중세 철학자는 개념형성에 관한 한 경험론의 관점을 취했다. 이는 '먼저 감각에 있지 않은 것은 지성에도 없다'라는 당시의 일반적 공식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는 모든 본유관념을 부정하고 감각에 주어진 것을 지성이 추상화함으로써 관념이 형성된다고 보았으며, 13세기 과학자 로저 베이컨은 연역추리보다 관찰을 더 중시했다. 중세의 가장 체계적 경험론자이자 유명론자(唯名論者)인 오컴(William of Ockham)은 모든 지식이 감각에서 기원한다고 보고 '추상적 지식'은 가설적 성격을 띨 뿐 어떤 존재와도 관계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근세철학

근세 경험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귀납의 원리를 체계화한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다. 그는 경험에 앞선 지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지식은 자연세계에 대한 경험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물론자이자 유명론자인 토머스 홉스(1588~1679)는 개념에 관한 경험론과 지식에 관한 합리론을 결합하여 모든 관념은 물질이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생겨나지만 지식은 그 관념들에 대한 연역적 계산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가장 정교하면서도 영향력이 컸던 것은 〈인간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을 쓴 존 로크(1632~1704)의 경험론이었다. 그는 모든 지식이 감각작용 혹은 반성작용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함으로써 본유관념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로크는 개념의 본성 문제와 지식의 정당화 문제를 혼동하기는 했지만 개념의 경험적 성격을 철저하게 고수함으로써 어떻게 단순관념에서 복합관념이 생겨나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유신론적 관념론자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정신 외부의 물질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물체를 지각된 관념의 복합체로 보는 현상론을 내놓았다. 스코틀랜드의 회의론자 데이비드 흄(1711~76)은 로크 경험론의 원칙을 더욱 철저하게 고수함으로써 물체․정신․인과관계 등의 개념 속에는 경험으로 확인되는 내용 이외의 것이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비판철학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는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경험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본유적인 것과 선천적인 것을 명확히 구별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정신은 여러 선천적 개념과 선천적 종합판단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은 경험을 초월해 있는 실재와는 관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19세기말까지 로크 경험론이 성행했다. 특히 존 스튜어트 밀(1806~73)은 가장 철저한 경험론자였다. 그는 수학지식도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경험적․귀납적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철학

20세기 들어 가장 영향력있는 경험론자는 영국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선천적 종합지식을 인정했지만 언어분석학파의 창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영향을 받고 나서는 논리학․수학의 명제를 분석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흄을 계승하여 철학의 과제는 개념을 감각에 직접 주어지는 요소로 분석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협력을 통해 발전한 이론의 영향으로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가 생겨났는데, 이 학파의 이른바 '검증원리'는 흄의 경험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비판과 평가

소피스트의 경험론을 논박하기 위해 플라톤은 변화하는 감각세계는 오직 '억견'(臆見)의 대상일 뿐이고 참된 '지식'은 영원하고 필연적인 진리를 대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불변적이고 지각불가능한 형상 또는 보편자의 세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생각을 따랐지만 보편적 형상이 질료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본 점에서는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그도 감각이 인식의 재료를 제공하되 참된 지식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 자명한 원리에서 연역된다고 본 점에서는 분명히 합리론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연역논리에 대항하여 생겨난 베이컨의 근대 경험론은 과학의 시대를 맞아 진가를 발휘했지만, 갈릴레오 역학에 내포되어 있는 수학의 혁명적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함이 있다. 이를 강력히 비판한 사람이 합리론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였다. 그에 따르면 명석판명한 관념은 본유적이며, 비록 인간지성의 한계 때문에 경험에 의존하는 일이 불가피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모든 지식은 선천적이다. 17세기 후반 G.W. 라이프니츠는 〈신(新)인간오성론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1704)을 써서 로크를 비판하고 관념의 본유적 성격을 다시 강조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 경험론을 비판한 사상가로는 경험에 의한 반증가능성을 내세워 귀납주의를 비판한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가 있다. 또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W.V. 콰인은 대부분의 현대경험론자가 전제하고 있는 분석적 진리와 사실적 진리의 구분이 아무 근거도 없는 것임을 논증했다.

17세기 이후 철학의 주요한 영역으로 자리잡은 인식론의 주요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경험론과 합리론 사이의 문제이다. 과학이 실질적이면서도 비경험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은 현대과학의 여러 새로운 양상 때문에 의문시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놈 촘스키 같은 언어학자가 인간정신의 본유능력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경험론의 강점은 인간의 개념과 지식이 외부세계에 적용되고, 세계는 감각을 통해 인간에게 작용한다는 점을 인정한 데 있다. 그러나 감각자료를 처리하는 과정에 정신이 어느 정도 개입하는지는 그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자)
그는 철학적 사상으로 계몽주의를 비판한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 계몽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완전이 이성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고 비판한다. 계몽주의는 이성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인간이 인식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안다고 보았다. 그 시대자연의 당시 인과 관계를 아는 것도 이성을 통해서 안다고 보았는데 그는 경험을 통해 알뿐이다고 하였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공식을 아는것일 뿐이다. 이 이론이 그 시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러고 나서 계몽주의가 비판을 받게 되는데 낭만주의를 통해서 그렇게된다..

b. 낭만주의 낭만주의

浪漫主義

romanticism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서구 문명에서 문학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룬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고전주의 일반과 18세기말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던 질서․냉정․조화․균형․이상화․합리성 등에 대한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와 18세기의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 일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낭만주의는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환상․초월성 등을 강조했다.

문학

진정한 의미의 낭만주의가 싹트기 전인 18세기 중엽부터 몇 가지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전 낭만주의(Pre-Romanticism)라고 부른다.

영국 문학에서 낭만주의는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서정민요집 Lyrical Ballads〉을 출판한 1790년대에 시작되었다. 워즈워스가 〈서정민요집〉 제2판(1800)에 붙인 서문에서 시를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충일"(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로 정의한 것이 영국 낭만주의 시운동의 선언이 되었다.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3번째로 중요한 시인은 윌리엄 블레이크이다. 한편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첫번째 단계는 내용과 문어체 모두에 걸쳐 일어난 혁신과 신비적인 것, 잠재의식,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탐닉이 그 특징이다.

1805년경부터 1830년대까지 지속된 낭만주의의 2번째 단계에는 고유의 민담, 민요풍의 발라드와 시, 민속춤과 음악, 심지어 그때까지 무시되어온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모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화적 민족주의가 되살아나고 민족의 기원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 특징이다. 역사에 대한 평가가 되살아나자 역사소설의 창시자인 월터 스콧 경은 이를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글로 옮겨, 역사소설을 개척했다. 이즈음에 영국의 낭만주의 시는 존 키츠와 바이런 경 및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1820년대에 이르자 낭만주의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문학에 널리 퍼졌다. 이 후기(2번째) 단계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접근방식은 보편성을 잃고, 나라마다 역사적 유물과 문화유산을 연구하거나 비범한 인물들의 정열과 투쟁을 조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 이전에 활동한 대부분의 주요작가들을 들 수 있다.

한국문학에 있어서 낭만주의가 대두된 것은 1920년대초에 쓰여진 시에서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전통적 도덕과 인습에 거세게 반발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절망적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흔히 1920년대 낭만주의를 병적․감상적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인지 〈백조〉를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홍사용․박종화․나도향․이상화 등이 이에 속했다. 박영희의 〈환영(幻影)의 황금탑〉(백조, 1922.1)․〈월광(月光)으로 짠 병실〉(백조, 1923.9), 박종화의 〈사(死)의 예찬〉(백조, 1923.9),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백조, 1923.9) 등은 현실의 모든 번민과 집착의 저편에 서서 죽음에의 초대를 노래했다.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백조, 1923.9)에서는 세상을 공포와 비애만이 가득찬 곳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1920년대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행위는 낭만적 정열이라기보다는 낭만적 허무로 끝나며, 그것은 감상에 탐닉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고 일정한 감정의 절망적 몸짓을 관습화하는 이러한 감상의 바탕에는 건강한 도덕성이 있을 수 없으므로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은 김소월 등 몇몇을 외에는 그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20년대 초기에 감상 및 퇴폐적 성격을 띠었던 낭만주의 문학은 사실주의 또는 프로 문학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각예술

1760, 1770년대에 제임스 배리와 헨리 퓨젤리, 존 해밀턴 모티머 및 존 플랙스맨 등 영국과 로마에 있던 많은 영국 화가들은 종래의 구상예술이 다루었던 고대의 역사와 신화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종래의 엄격한 제작방법과는 합치되지 않는 새로운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 화가들은 기괴하거나 비장하거나 지나칠 만큼 영웅적인 주제를 선호했고, 긴장된 선을 이용한 드로잉과 음영의 대담한 대조로 대상의 윤곽을 뚜렷이 나타냈다. 영국 초기 낭만주의의 주요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나름대로 힘차고 독특한 환상적 형상을 창출해냈다.

그뒤의 세대에서는 J.M.W. 터너와 존 컨스터블의 작품을 통해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라는 중요한 양식이 등장했다. 이 화가들은 경외심을 자아내고 웅장함을 느끼게 하는 역동적인 자연계를 묘사하기 위해 빛․공기․색채의 순간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프랑스 초기 낭만주의의 주요화가는 앙투안 그로 남작과 테오도르 제리코였다. 그로 남작은 당시의 나폴레옹 전쟁을 주제로 전투의 극적 장면들을 그렸고, 제리코는 〈메두사의 뗏목 Raft of Medusa〉과 정신병자들의 초상화에서 개인의 영웅적 행위와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1820년경의 낭만주의 운동을 사실상 선도했다. 가장 위대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는 외젠 들라크루아였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붓놀림, 화려하고 감각적인 색채의 구사, 역동적인 구도, 북아프리카 아랍인의 생활에서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이고 대담한 주제를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낭만주의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무시무시할 만큼 조용하고 황량한 풍경화를 그림으로써 신비롭고 종교적인 외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건축에서의 낭만주의는 주로 옛날 건축양식의 모방과 '폴리'라고 칭하는 기괴한 건축물을 통해 표현되었다.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가진 영국과 독일의 건축가들은 중세 고딕 건축물에 매력을 느꼈고, 이렇게 되살아난 고딕 양식에 대한 관심은 결국 고딕 복고양식을 낳았다.

음악

낭만주의 음악은 독창성, 개성,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 실험정신이 가미된 자유로운 형식이 두드러진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프란츠 슈베르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는 교량이었으며 그들의 기법은 기본적으로 고전주의 양식이었지만, 강렬한 개인적 감정과 표제적 요소는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리트[歌曲], 야상곡(夜想曲), 간주곡, 카프리치오[奇想曲], 전주곡 및 마주르카 같은 새로운 음악형식이 등장함에 따라 음악의 극적인 표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낭만주의적 정신은 시와 전설 및 민간 설화에서 영감을 얻었고, 문학과 음악을 표제음악이나 서곡, 부수음악 같은 형식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낭만주의 음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낭만주의 초기의 주요 작곡가는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레데리크 쇼팽, 펠릭스 멘델스존, 프란츠 리스트였다. 이들은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을 최대한으로 확대하고, 반음계를 온전히 이용하기 위해 화성의 수를 늘렸으며, 악기와 사람의 소리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낭만주의 음악의 중기 단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는 안토닌 드브르자크, 에드바르트 그리그, 표트르 일리히 차이코프스키이다. 음악을 통해 민족의 독특한 정서를 표현하려는 낭만주의의 노력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드보르자크,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러시아,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에 드러나 있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작품으로 시작된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가에타노 도니체티와 빈첸초 벨리니, 조아키노 로시니 같은 작곡가들이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를 수준 높게 끌어올린 사람은 주세페 베르디였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낭만주의 음악의 마지막 단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활동한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드워드 엘가, 얀 시벨리우스 등이 있다.



계몽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반발이 된다. 계몽주의는 너무나 지나칠적으로 이성적으로, 비감정적으로 나갔다. 낭만주의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같은 경우 자연을 볼 때 자연의 법칙을 찾고 과학적으로 보려고 했던 방면에 낭만주의는 시와 음악 예술적으로 보았다. 중세 시대의 종교적인 현상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낭만주의에서는 종교영역에서 초월적인 부분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가 너무도 많은 부분을 왜곡시켜났다고 비판했다. 모든 인간의 보분을 이성적으로 구분하고 체계화 시켜놨는데 사실을 왜곡시켰다고 보았다.
신앙의 영역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이 아닌 영역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지만 기독교의 회복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나아가서는 범신론적인 부분으로까지 넘어갔다. 18c에 나온 것이 19c까지 강하게 이어나간다.

c. 칸트 칸트 (Immanuel Kant; 1724. 4. 22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1804. 2. 12 쾨니히스베르크. ;독일의 계몽주의 사상가.)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이마누엘 칸트는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합리론과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종합했다. 그는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인식론․윤리학․미학에 걸친 종합적․체계적인 작업은 뒤에 생겨난 철학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생애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1946년부터 소련에 속하게 되었음)에서 태어나, 전생애를 거기에서 보냈다. 칸트는 마구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이민온 사람의 자손이라고 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 어머니는 독일인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인품과 지성으로 유명했다. 부모 모두 루터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였다. 이 교파는 검소한 내적 삶과 도덕법에 대한 복종을 가르쳤다. 이 교파 목회자의 영향으로 칸트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8세 때 담임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 학교에 들어갔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이 학교에서 8년 6개월 동안 배웠는데, 일생에 걸쳐 라틴어 고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했다. 신학과정을 이수하면서 때때로 설교도 했지만, 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수학과 물리학이었다. 합리론 철학을 체계화시킨 크리스티안 볼프를 연구했으며, 동시에 아이작 뉴턴의 과학을 열렬히 신봉했던 어떤 젊은 교수의 도움으로 뉴턴의 저작도 읽기 시작했다. 1744년에는 최초의 책을 썼는데, 주제는 운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지만, 1746년 아버지가 죽고, 대학부속학교에서 조교직을 얻는 데 실패하자 그는 가정교사직을 구해서 9년 동안 일했다. 1755년에 친구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무급(無給) 대학강사가 되었다.

15년 동안의 강사 시기는 칸트가 강사와 저술가로서 점점 큰 명성을 얻게 되는 시절이다. 첫 강의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고, 과학 발전에 대한 관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관심의 수준이 아마추어 이상이었다는 것은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인종, 바람의 본질, 지진의 원인, 천체에 대한 일반이론 등을 다룬 과학저작들을 다수 발간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시작된 강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논리학․형이상학․도덕철학 등 철학의 주요분야 및 자연지리학에 이르기까지 강의 주제가 넓어졌다. 글을 쓰는 스타일과 달리 강의는 유머와 박진감이 넘쳤으며, 영국․프랑스의 문학은 물론, 여행기와 지리학, 과학과 철학 등 광범위한 독서에서 얻은 풍부한 실례를 들어 실감 있고 생기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2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수로 데리고 가려 한 다른 대학의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를린대학교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서까지 시학 교수로 초빙했으나 이것도 거절했다. 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기를 더 원했다.

이 시기에 칸트는 뉴턴 물리학의 과학적 내용과 철학적 함축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했다. 칸트는 뉴턴의 사유방법과 당시 볼프와 알렉산더 코틀리프 바움가르텐에 의해 체계화되고 대중화되어 독일대학에 널리 퍼져 있던 코틀리프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뉴턴을 지지하고 라이프니츠를 비판했지만, 1750년대에는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전제들에 관해 노골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760년대에 들어서는 라이프니츠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점점 높여갔다. 어떤 제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칸트는 라이프니츠․볼프․바움가르텐을 공격하면서, 자신을 뉴턴의 추종자로 선언했고, 장 자크 루소의 도덕철학에 큰 찬사를 표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철학은 수학을 모델로 하여 자명한 전제들에 근거해서 증명된 진리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라이프니츠주의 철학의 방법적 주장을 공격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주의자의 핵심적인 이론들을 비판했다. 모순과 인과에 대한 논리주의적 입장, 존재론적 신의 증명, 공간개념 등이 주요한 비판의 쟁점이었다. 마침내 1770년 칸트는 15년간의 무급 대학강사 생활을 마감하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서 논리학․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죽기 몇 년 전까지 그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놀랄 만큼 독창적인 저작들을 연달아 발표한다. 이미 비판철학의 중요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던 1770년의 교수취임논문 이후 11년 동안 아무 글도 발표하지 않고 연구에 전념한 끝에 1781년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비판철학 시기가 시작된다.

비판철학 시기

1781년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이후 9년 동안 위대하고 독창적인 저술들이 계속 나옴으로써 단기간 동안 철학 사상에서의 혁명이 일어나고 이후 철학의 나아갈 방향이 정립된다. 〈순수이성비판〉은 칸트가 10년 동안 생각하고 명상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여러 번 연기하면서 주저한 끝에 초판을 발간했다. 자기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해명을 제대로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걱정은 적중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해석자들의 비판이 많은 오해를 범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바로 잡기 위해 〈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에 대한 입문 Prolegomena zu einer jeden ku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onnen〉(1783)을 썼고, 1789년에는 초판을 개정하여 재판을 발간했다. 이 두 판의 장단점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관념론적인 해석을 선호하는 독자들은 보통 초판을 더 좋아하고, 반면에 실재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재판을 선호한다. 그러나 읽고 이해하기 어렵기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 책이 난해한 이유는 칸트가 고도의 전문적 기법과 엄밀성을 추구하던 볼프나 바움가르텐의 저작을 철학 저술의 모범으로 삼고 썼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에 대한 저술이다. 칸트는 여기서 자기 이전의 형이상학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기초를 닦고자 했다. 그의 주된 공격대상은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이었다.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은 신, 인간의 자유, 영혼불멸 등 본성상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인간 정신이 순수사유를 통해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인간 정신은 결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주의 형이상학은 다 속임수라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진정한 학으로서 형이상학이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학의 원리들이 한편으로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이것은 모든 학적 인식의 조건임)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포함해 탐구자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즉 그 의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 이상을 알 수 있게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두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인식이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연적인 경험들로부터 분리되어 선험적일 때에만 필연적일 수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주어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술어가 포함하고 있으면서 종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는 명제는 종합적이지 않고 분석적이다. 왜냐하면 연장개념이 물체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라는 명제는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무게는 물체 개념에 덧붙여서 물체들이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문제를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즉 어떤 조건 아래에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정식화했고, 이 문제를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근본 문제가 된다.

칸트에 따르면 이 문제는 수학․물리학․형이상학의 세 영역에서 제기된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의 1부 '초월적 원리론'의 세 부분이 각각 한 영역씩 다룬다. '초월적 감성론'에서 칸트는 수학이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것을 논증했고, 또 시간과 공간은 둘 다 인간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감관을 통해 포착되는 것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초월적 분석론'에서는 물리학이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데 그 이유는 물리학이 경험을 질서지울 때 특별한 종류의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칸트가 '범주'라고 불렀던 이 개념들은 경험을 통해 생긴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경험을 해석하는 전제가 되기 때문에 선험적이며, 경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범주는 그 기원 면에서만 경험적 개념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인식에서의 역할이 전혀 다르다. 경험적 개념은 특정한 경험들을 서로 관련지어서 구체적으로 질서지워진 경험을 산출하는 반면, 범주는 이 구체적인 질서지움이 따라야 할 일반 형식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범주는 인식의 틀에 해당한다. 그러나 비록 범주가 객관적 인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범주가 줄 수 있는 인식은 단지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이다. 범주는 감각을 통해 시공 중에 주어지는 것을 질서지울 때만 타당하고 실질적인 인식을 줄 수 있다. '초월적 변증론'에서는 형이상학의 선험적 종합판단들을 검토한다. 칸트에 따르면 여기서는 상황이 수학이나 물리학과는 반대이다. 형이상학은 감각경험을 초월하여 절대적 무제약자를 추구하기 때문에 감각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해버린다. 이때문에 진정한 선험적 종합판단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칸트는 형이상학이 영혼․세계․신과 같은 무제약자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하여, 형이상학의 시도가 이율배반에 빠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밝히려 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성취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근대 천문학을 기초한 코페르니쿠스가 겉으로 보기에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사실은 관찰자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마음의 선험적인 원리가 대상에 적용됨을 설명함으로써 마음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에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은 결코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형이상학을 '확실한 학의 길 위에' 올려놓으려 했고 이것이 비판철학의 진정한 의도였다. 이런 의도 때문에 칸트는 앞서 발간한 〈도덕형이상학기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를 체계적으로 확대하여 1788년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발간함으로써 진정한 도덕의 체계를 제시하려 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확립한 원리를 구체적인 차원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여, 1797년에 발간된 사회철학저술인 〈도덕형이상학 Die Metaphysik der Sitten〉에서는 덕의 문제를 검토하고 법과 정치의 기초를 제시한다. 비판철학을 마감하는 제3비판서인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에서는 크게 2가지 문제를 다룬다. 첫째, 미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최초의 체계적인 미학을 제시하고 있으며, 둘째, 자연에서 목적론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말년

비판철학은 곧 독일어를 쓰는 모든 중요한 대학에서 강의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철학의 성지가 된 쾨니히스베르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치 신탁을 구하듯이 칸트에게서 온갖 종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했다. 이런 존경을 받으면서도 칸트는 자신의 규칙적인 습관을 어긴 적이 없으며 엄격한 생활을 유지했다. 5피트가 채 되지 않는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진 칸트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평생 엄격한 식생활을 했다. 칸트 때문에 '철학자의 산책로'라 이름붙여진 거리를 규칙적으로 산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산책을 기준으로 시간을 맞추었다. 그는 노령으로 산책이 힘들어질 때까지 루소의 〈에밀 Emile〉을 읽는 데 열중하느라 며칠 집에서 나오지 않은 때를 제외하고는 1번도 규칙적 산책을 어긴 적이 없었다.

〈판단력비판〉이 출판됨으로써 칸트의 중요한 철학 저작은 완성된 셈이다. 1790년부터 그는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는 많은 저술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루 2~3시간 이상 저술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그가 완성한 저작들은 한편으로는 전에는 자세히 다룬 적이 없는 주제들을 정교하게 다루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과 명확한 오해들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1793년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를 출간하면서 칸트는 프로이센 당국과 종교의 믿음을 표현할 권리에 대한 논쟁에 휘말려들었다. 이 책에서 종교에 접근해가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태도가 정통종교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칸트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많은 근본 교리를 왜곡한 책임을 지고, 종교적 주제에 대한 강의나 저술활동을 금지당했다. 칸트는 일단 수긍했지만 이 금지를 왕에 대한 개인적 약속으로 여겼고, 1797년 왕이 죽자 스스로 이 금지에서 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1798년에는 그의 마지막 주요저서인 〈학부들의 논쟁 Der Streit der Fakultaten〉에서 금지된 주제를 다시 다루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쓴 방대한 유고는 베를린판 전집의 마지막 2권에 모아져 있는데, 내용은 주로 비판철학을 더욱 발전시키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유고들은 미완성 저작이라기보다는 어떤 저작을 준비하기 위한 단편적인 메모들이다. 그가 쓰려 한 책의 제목은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근거로부터 물리학으로의 이행 Ubergang von den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Naturwissenschaft zur Physik〉이었다. 이 책은 〈자연 과학의 형이상학적 근거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Naturwissenschaft〉(1786)에서 제시한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자연과학의 일반적 체제만이 아니라 상당히 자세한 부분까지도 선험적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유고들로 판단해볼 때, 비록 유고의 양이 많기는 하지만, 그 유고가 완성되었더라도 비판철학의 체계와 명성에 중요한 내용이 덧붙여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점점 쇠약해지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1804년 2월 12일 칸트는 쾨니히스부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제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제2비판의 결론에서 선언한 다음 문구가 새겨져 있다. "더욱더 자주, 그리고 더욱더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내 위에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속의 도덕법칙은 더욱더 새롭고 큰 존경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준다."

O. A. Bird 글

참고문헌

칸트


저서

Gesammelte Schriften, Immanuel Kant, 29 Bd. (by 1980) : Berlin Academy, 1902-
かント全集 全18卷 : I. kant, 原佑ほか編․譯, 理想社, 1965 - 77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 I. 칸트, 이한구 역, 서광사, 1992
칸트의 역사철학 : I. 칸트, 이한구 역, 서광사, 1992
실천이성비판(세계교양사상백선 8) : I. 칸트, 강대정 역, 일신서적출판사, 1991
이성의 한계안에서의 종교(이화문고 31) : I. 칸트, 신옥희 역,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4
순수이성비판 : I. 칸트, 최재희 역, 박영사, 1983
칸트인생론 : I. 칸트, 사회과학연구회 역, 서명, 1981
비판철학서론 : I. 칸트, 최재희 역, 박영사, 1978
도덕형이상학원론/영구평화론(박영문고 7) : I. 칸트, 이규호 역, 박영사, 1974
비판력비판 : I. 칸트, 이석윤 역, 박영사, 1974
프로레고메나 : I. 칸트, 서동익 외 역, 휘문출판사, 1972
전기

칸트의 일생 : 야서먼․브노스키 공저, 이영철 역, 글벗집, 1959
Immanuel Kants Leben, 3rd ed. : Karl Vorlander, 1974
Darstellung des Lebens und Charakters Immanuel Kants : Ludwig Ernest von Borowski, 1968(reprinted 1968)
Immanuel Kant geschildert in Briefen an einen Freund : Reinhold B. Jachmann, 1968
입문서

칸트(생애와 사상 4) : 우베 슐츠, 최혁순 역, 행림출판사, 1989
칸트(PM문고 5) : 로저 스크러튼, 민찬홍 역, 문경출판사, 1986
칸트철학연구 : 최재희, 삼지원, 1985
칸트철학과 현대사상 : 하영석 외, 형설출판사, 1984
인류의 스승 칸트(명문신서 8) : 최현, 명문사, 1983
칸트철학사상의 이해 : 한단석, 양영각, 1983
칸트의 생애와 철학 : 최재희, 태양문화사, 1981
칸트철학이해의 길(새밭신서 5) : B. O. 되에링, 김용정 역, 새밭, 1979
Immanuel Kant, 3rd ed. : Friedrich Delekat, 1969
Immanuel Kant, 4th ed. : Bruno Bauch, 1933
Kants Leben und die Grundlagen seiner Lehre : Kuno Fischer, 1860
전문서

칸트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 : F. 카울바하, 백종현 역, 서광사, 1992
칸트철학의 분석적 이해(번역총서 139) : C. D. 브로드, 하영석․이남원 공역, 서광사, 1992
칸트와 초월철학 - 인간이란 무엇인가 : 한자경, 서광사, 1992
인식과 존재 - 순수이성의 이율배반과 선험적 관념론 : 문성학, 서광사, 1991
칸트의 도덕철학 : H. J. 페이튼, 김성호 역, 서광사, 1988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 T. E. 월커슨, 백학수 역, 서광사, 1987
순수이성비판입문 : A. C. 유잉, 김상봉 역, 한겨레, 1985
칸트의 비판철학 : S. 쾨르너, 강영계 역, 서광사, 1983

( 1724-1804
칸트는 이 시대에 살면서 계몽주의에 대해서 다 파악하고 경험주의 내용을 다 파악하고 낭만주의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황에서 인식론 분야를 거의 완벽하게 조합하였다. 그의 영향이 엄청났다.
① 순수이성 비판 선험적 지식 (先驗的知識; a priori knowledge)

칸트 이후 서양철학에서 모든 개별 경험과 독립해서 성립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개념.

오직 경험에서만 생겨나는 후험적 지식과 반대된다. 라틴어 'a priori'('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와 'a posteriori'('이후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는 원래의 원인에 따른 논증과 결과에 따른 논증을 구별하기 위해 철학에서 사용되었다. 이 라틴어가 최초로 기록에 나타난 것은 14세기 논리학자인 작센의 알베르트의 저서이다. 이 책에는 선험적 논증은 '원인에서 결과로', 후천적 논증은 '결과에서 원인으로'라고 씌어 있다.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많은 후대 철학자들이 이와 비슷한 정의를 내렸고, 아직도 비철학적 문맥에서 그런 의미로 종종 쓰인다. 중세 논리학자는 '원인'이라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aitia'(원인)에 해당하는 삼단논법의 의미로 사용했고, 'prius'란 반드시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 점은 '본질에 의한 증명'(demonstratio propter quid)을 선험적 증명(demonstratio a priori)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에 대한 또는 이유에 의한 증명'(demonstratio quia)을 후험적 증명(demonstratio a posteriori)과 같은 의미로 보는 데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본질에 대한 설명, 근거에 대한 지식,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 등을 구별했다.

칸트는 이러한 구별 속에서 필연적․연역적 진리와 개연적․귀납적 진리의 대립을 생각하고 있었다. 필연적․연역적 진리는 경험과는 독립해서 이루어지므로 보편적으로 타당한 선험적 판단에 해당하고, 개연적․귀납적 진리는 경험에 좌우되므로 예외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는 후험적 판단에 해당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nunft〉에서 선험적 지식의 대표적인 예라고 여기는 수학 지식의 특별한 경우를 설명하는 데 부분적으로 이 구분을 사용했다. 예컨대 우리가 갖고 있는 수학 지식을 구별하기 위해서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철학자들이 이러한 종류의 지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철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보고, 느끼고, 들음으로써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오직 생각만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한 철학자들은 이 사실을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메논 Meno〉과 〈파이돈 Phaedo〉에서 기하학의 진리에 대한 지식은 영원한 이데아와 형상을 직접 관조할 수 있을 때, 전생에서 알고 있던 지식을 상기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제자들은 플라톤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 이론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데아(관념)는 신의 정신 속에 있으며, 신은 때때로 인간에게 지성의 빛을 비춘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험적 지식에서 필수적인 모든 관념은 모든 인간의 정신 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에게는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단지 개념의 분석만이 아닌 종합적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 해결책으로 칸트는 우리의 정신이 시간․공간․범주(가령 인과성)와 같은 형식들을 경험 소재에 적용함으로써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이상의 이론들은 우리가 선험적 지식의 내용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선험적 지식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비플라톤적인 선험적 지식론에서도 같은 생각이 나타나는데 이 이론을 처음 설명한 것은 토머스 홉스의 〈물체론 De Corpore〉이다. 20세기의 논리경험론자들도 이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들에 따르면 필연성을 가진 명제는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규칙의 산물이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경험을 통해서 외적 자료가 유입된다.
선험적 범주가 있다. - 외부의 자료를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② 기독교와의 관계
초월적 경험은 순수 이성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고 보았다.
사실상 있는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투영시켜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고 보았다.
③ 기독교에 미친 영향
④ 실천이성 비판
종교적인 내용이 경험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아주 강력한 범주적인 명령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윤리적 감정
(윤리적 의무감)으로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 삶을 윤리적으로 살아
보려고 하다보니 하나님의 개념이 있으면 유용할 것 같다고 보고 신관을 도입한다.
즉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살아라”라고 한다.
⑤ 기독교에서 안다는 인식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되지만 칸트는 이것을 전혀 이야기 할 수 없다. 즉 그가 이야기하는 경험과 우리의 경험을 같을 수가 없다.

d. 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 11. 21 프로이센 슐레지엔 브레슬라우~1834. 2. 12 베를린.)
독일의 신학자․설교가․문헌학자.

일반적으로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주요저서 〈그리스도교 신앙 Der christliche Glaube〉(1821~22, 제2판 1831)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석해놓았다.

어린시절과 교육

고틀리프 슐라이어마허와 카타리나 마리아(결혼 전 성은 슈투벤라우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혁교회(칼뱅주의) 군목이었던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성직자 가정 출신이었다. 누이 샤로테와 동생 카를이 있었다. 1783~85년 니스키의 유력한 경건주의자 단체인 모라비아 형제단(Herrnhuters) 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할레를 중심으로 발전한 경건주의 운동과 같이, 의도적으로 슬퍼하고 회개하려고 애쓰는 방식보다는 구원의 즐거움과 구주 예수와의 활기차고 상상에 가득 찬 관계에 근거한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개별학습을 시켰다. 이곳에서 슐라이어마허는 평생 동안 간직한 그리스와 라틴 고전에 대한 관심과 종교생활에 대한 독특한 감수성을 발전시켰으며, 훗날 자신을 '고급 수준'의 모라비아 형제단의 일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1785~87년에 다닌 바르비에 있는 모라비아 신학교는 활력이 없고 교리적으로 편협하여, 점차 비판적이고 탐구적이 되어가던 그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1787년 아버지로부터 가까스로 승낙을 받아 모라비아 신학교를 떠났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속세 지향적인 그의 태도를 호되게 나무라며 위선자라는 비판도 했으나, 결국은 부활절에 할레대학교에 입학하도록 허락했다. 그곳에서 외삼촌 사무엘 슈투벤라우흐와 함께 살았는데, 신학교수인 그는 슐라이어마허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회의주의를 이해해주었다. 부지런하고 독립성이 강한 학생이었던 그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칸트의 윤리학과 종교 분야에서는 아니더라도 인식론에서만큼은 평생 칸트주의자로 남았다. 2년 뒤에 삼촌이 목회를 하고 있는 오데르 강변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 근처 드로센(오스노)으로 옮겨 처음으로 신학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신학보다는 윤리학 저서를 더 많이 읽었지만, 1790년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시험을 치른 결과, 훗날 매우 독창적인 공헌을 하게 되는 과목인 교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대단히 우수함' 혹은 '뛰어남'이라는 성적을 받았다.

초기 경력

그뒤 프로이센 동부 슐로비텐에 있는 그라프(백작) 추 도나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가정교사 생활 외에도 주로 윤리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정기적으로 설교했고, 철학 특히 인간의 자유 문제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했다. 1794년 2번째 시험을 치렀고, 같은 해 아버지를 여읜 뒤에 란츠베르크에서 부목사가 되었으며, 1796년에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노인들을 위한 병원 겸 양로원인 '샤리테'의 목사가 되었다. 베를린에서 초기 낭만주의를 일으킨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을 통해 독일 낭만주의 작가 협회에 가입했고, 슐레겔과 한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플라톤의 저서들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베를린 학회와도 친숙하게 되었다.

1799년 일종의 신앙고백서로 쓴 〈 종교에 관해서 : 종교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에게 하는 연설 Uber die Religion : Reden an die Gebilden unter ihren Verachtern〉에서 그는 낭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종교란 '우주에 대한 느낌이자 직관' 혹은 '유한자 안에 있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이며, 그리스도교는 그 느낌에 개별적인 형상을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와 문화를 생동감있게 하나로 묶는 시각 때문에 꾸준히 인기를 끌어온 이 책은 당시의 젊은 신학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다소 부자연스런 운율체 산문으로 쓴 〈독백 Monologen〉(1800)에서 그는 종교를 개별화된 자아의 직관과 행위로 보았는데, 이는 종교를 윤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개별성을 무한자의 독특한 '기관이자 상징'으로 본다.

슐라이어마허는 베를린에 있는 어떤 목사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엘레오노레 그루노프에게 6년 동안 구애를 했으나, 1802년 포메라니아(지금의 폴란드 수웁스크) 스톨프에 있는 작은 개혁파 교회의 목사직을 맡으면서 그녀를 포기했고 그녀도 남편에게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1805년까지 그루노프가 자기 아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스톨프에서 목회생활을 하면서 목사와 현대인 사이에 깊은 균열이 나 있음을 깨달았지만, 동시에 설교하는 일에 큰 애착을 갖게 되기도 했다.

할레와 베를린

1804년 할레대학교로부터 설교자겸 임시 신학교수가 되어달라는 제외를 받아들였다. 루터교 신학부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낭만주의적 관념론의 대변자였던 그는 처음에는 냉대를 받았으나, 상황이 바뀌어 1년 뒤에는 정식 교수가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 형식으로 쓴 〈크리스마스 축하의식 Die Weihnachtsfeier〉(1805)에서 훗날 〈그리스도교 신앙〉에 삽입한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종교를 '감정과 직관'이라 말하지 않고 단순히 '감정', 즉 하느님이 유한한 인간인 우리들 속에서 살아 있으며 일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1807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침략하자 할레대학교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자기 사상을 강의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민족적인 저항을 일으키도록 격려했으며, 빌헴름 폰 훔볼트가 베를린에 새 대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도왔다. 1809년 친한 친구의 미망인 헨리에테 폰 빌리히와 결혼했고, 같은 해 베를린에 있는 삼위일체교회(Dreifaltigkeitskirche)의 목사가 되었으며, 1810년에는 새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1810년에는 신학과 철학을 강의했고, 삼위일체교회에서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거의 매주일 설교했으며, 베를린 학술원 회원(1800~)이자 종신 서기로 일했다. 사람들과 폭넓은 교제를 나누었으며, 후에 루터교와 칼뱅주의 교회를 하나로 연합시킨 프로이센 연맹이 결성되도록 적극 노력했다. 이 기간에 펴낸 주요저서에는, 신학의 기능은 교회를 종교 공동체로 묶는 것이고, 또한 교회를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기능을 교과과정으로 제시한 것으로 〈신학연구 개요 Kurze Darstellung des theologischen Studiums〉(1811)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다.

그는 1831년까지 프로이센 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프로이센 헌법 및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기도 했고, 개인적인 정적들의 음모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에 대해서 추방령이 내리기도 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1834년 2월 2일 마지막 설교를 하고, 2월 6일에 마지막 강의를 했다. 며칠 뒤 폐렴으로 죽었는데, 베를린의 모든 시민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명한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에 따르면 2만~3만 명의 시민이 베를린 시가를 지나는 장례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교회 묘지에 묻혔다.

영향

그의 사상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신학에 계속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25~55년 사이에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 즉 '케리그마' 신학(카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가 시작함) 추종자들은 그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복음에서 이끌어내어 인간문화에 근거한 종교로 인도했다고 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그 이래로 슐라이어마허의 공헌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평가가 계속되어왔는데, 이는 '케리그마' 신학의 비평이 한편으로 치우쳤기 때문이기도 했고, 19세기 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R. P. Scharlemann 글

참고문헌

슐라이어마허


Samtliche Werke, 30 vol. : F. Schleiermacher, Reimer, 1835-64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 : 목창균, 한국신학연구소, 1991
19세기 개신교 신학 : B. A. 게리시, 목창균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0
현대의 신학사상 : 김광식, 대한기독교서회, 1990
종교론 외(세계기독교사상전집 1) : 슐라이어마허 외, 정종화 역, 신태양사, 1985
슐라이에르마허 생애와 사상 : 마르틴 레데커, 주재용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신학연구입문 : F. 슐라이어마허, 김경재․선한용․박근원 공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현대신학의 선구자들-쉴라이에르마하로부터 바르트까지 : H. R. 매킨토시, 김재준 역, 대한기독교서회, 1973
The Theology of Feeling, 〈Types of Modern Theology, pp31-100〉 : Hugh Ross Mackintosch, 1937



① 낭만주의 영향을 받고 칸트의 영향하에 들어갔다. 그의 배경 경건주의에 있었다.
② 경건주의의 다른 색체로 넘어갔다.
③ 그는 기독교의 정수를 감정에 놓고 보았다.
④ 인간은 여러 감정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나오는 것이 의존감인데 특히 절대자에게
의존하고하는 감정이 강하게 들어있다고 보았다.
⑤ 종교란 유한한 인간과 신 사이에 놓인 다리와 같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종교를
가지고 옳다 그르다라고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⑥ 여기서 가장 강력한 종교가 기독교라고 보았다.


11. 19세기 복음주의

a. 성결운동
① 18c에 웨슬리 부흥운동에서 완전 성화개념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성경운동으로
되어진다. 세가지 유형
② 나사렛 구세군
③ 케직 성결운동


b. 산업혁명의 대응


12. 자유주의 신학

13. 신정통주의

14. 20세기
a. 현대신학
b. 복음주의
c. 한국교회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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