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조직신학교실

[스크랩] 교회론, 종말론 강의안

류성련 2014. 9. 16. 16:54

 

 

 

 

교회론 강의안

 

 

 

왜 교회론인가?

1. 교회론의 위치와 신학적 중요성

삼위일체론 :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창조론

예정론

섭리론

계시론

성서론

은총론

신앙론

교회론

종말론

시작(근거)

연결

응답

삶(공동체)

미래

인간론 :

하나님의 형상론, 죄론, 구원론

예배, 설교,

기독교교육,

선교신학

세상의 끝

천사론

마귀론

하나님 나라

A. (조직)신학 내에서의 교회론의 위치

- 조직신학 내에서의 신론의 위치는 모든 주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상호보완적이므로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신론 -> 그리스도론 -> 성령론 -> 역사와 종말론

-> 교회론 -> 인간론 -> 성서론 -> 계시론 -> 신앙론 -> 신론

B. 교회론의 신학적 중요성

① 교회는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 및 목회와 신학의 시공간적인 장이다.

② 칼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와 신학은 밀접한 관계성을 지닌다.

“신학은 교회의 선포가 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계시에 일치되는 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교회 위에(앞서감) 있고 교회와 함께 가며(동행,협력), 교회의 뒤를 따른다.(비판적 과제)”

- 신학은 교회를 인도하고 인내하며 비판하는 기능과 함께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학문이다.

③ 교회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반복 수정 및 변화 되었기에 이에 대한 고찰을 통한 성서적, 복음적, 개혁 신학적인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④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교회의 유형 및 동향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좀 더 근사치적인 진리에의 접근을 시도하기 위함이다.

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파생되는 많은 문제들의 대부분은 올바르고 건강한 교회관의 부재에 기인하고 있다. 기독교 안팎에서 현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기되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다양하고 복합적인 질문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된 적절한 응답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변증적 성격 및 과제)

⑥ 목회적 관점에서 볼 때에, 교회론의 핵심적인 주제들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과 삶의 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교회의 갱신 및 하나님의 실현에 실천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통전적인 교회 이해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교회론에 대한 바른 연구가 요청된다.

2. 교회론의 역사와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대두

A. 역사 속에서 교회론의 다양한 차원들

① 고대 - 교회의 태동, 형성, 발전 및 제도 교회로의 확대

감독-장로-집사 직분 구분/사도직 계승 이론 형성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갖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 교회의 4표지 확정(니케아 신조), 가시적/비가시적 교회 구분(어거스틴)

② 중세 - 속죄론과 구원론(성례전)에 종속된 교회론, 교황주의, 구원의 기관으로서의 교회

③ 종교개혁 - 교회론의 혁신, 교황주의 비판, 평신도 중시

④ 근대 - 교회 쇠퇴, 선교 운동

⑤ 현대 - 1948년 WCC 총회(암스테르담)는 교회 일치 운동 확산, 제3세계의 신생교회들과의 교류와 협력,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실천과 신학적 성찰의 중요성 인식, 타종교와의 대화 및 협력 운동

⑥ 최근 - 복음주의 진영의 새로운 교회 형태 등장, 교회 갱신 운동

B. 교회론의 르네상스

3. 교회론 연구 방법

- 귀납적/연역적/역사적/성서적/종교사적/사회학적/문화인류학적

4. 교회론 연구의 방향

a. 삼위일체론적 사고 속에서 이루어지고 삼위일체론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b. 교회의 정체성과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고 균형 잡힌 조화 속에서 성찰해야 한다.

c.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을 바르게 강조한다.

d. 교회의 기독론적, 성령론적,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해야 한다.

e. 현금 위기에 처해 있는 교회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적 과제를 수행함과 동시에 교회 개혁과 갱신을 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f. 미래 교회의 전망과 함께 미래 목회의 비전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

g. 성서와 복음의 원리에 따라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을 새롭게 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5. 교회론 연구 자세

① 성서적 토대 - 다양성과 통일성의 관점에서

② 통전적 입장 - 성경과 경험에 대한 바른 인식 및 성찰, 신학의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 이해에 있어서 단편적, 부분적 이해 : 종합적, 전체적 이해에로 나악야 한다.

③ 개방적 자세 - 열린 마음과 예민한 분별력으로

④ 근사치적 진리에의 접근

⑤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을 위한 간구와 함께

=> 열린 마음, 예민한 분석력, 뜨거운 영성

*성적, 종합적 연구/개혁 신학적, 복음적인 접근/비판적, 건설적인 방향

Ⅰ. 교회의 본질

=> 삼위일체론적 구조

1.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 => 잠정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나라의 형태

=>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교회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철저히 삼위일체론적 접근을 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구조를 지닌다.

▸종말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

*하나님 나라의 5가지 표지

❶ 영역 ❷ 주권 ❸ 통치-하나님의 성품 ❹ 파트너쉽 ❺ 공동체

*삼위일체의 이해

❶ 정유 (인격성) : 창조자 + 구원자, 화해자, 구속자 + 새창조, 성화

❷ 순환 - 페리코리시스 : 서로안에 있다. => in, with, for => 민주, 평등

*신학작업 4가지 (칼바르트) => 성령의 인도하심

❶ 기도 - 수직적

❷ 스터디(연구) - 지적훈련

❸ 섬김 -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❹ 사랑 - 열매

*카할/에클레시아 -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

하나님이 예수와 성령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불래낸 사람들의 모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되어가는 중이다. 아직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 개인이 모여서 교회신앙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교회이다,

조직 제도 프로그램이 교회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곧 교회는 아니다.

삼위일체하나님이 주님이시다 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1)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 벧전2:9-10, 엡2:19, 롬1:6-7, 고전1:2 => 종말론 차원

=> 하나님이 왕이시고 교회가 하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이다.

➀ 하나님의 선택부르심에 기초한 모임이다.

가족의 개념 (부모와 자녀)

종교개혁자 “신자들의 모임(믿는자들의 모임)”

*루터 : 인간적인 요소가 비중이 있음. 인간의 믿음의 우선성을 부각시킴

vs 개혁주의 : 성령의 선물로서의(역사로서의) 믿음.

동시에 적극적인 인간의 차원이 함께 한다.

vs 강력 깔뱅주의 : 영원전에 선택된 소수 그룹으로 봄.(협소함)

➂ 모든 민족, 인류, 계층, 지역, 성적 제한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다. 한 아버지의 형제자매 공동체이다. (눅9:51이하 사마리아행 인종을 넘어섬 : 보편적인 구원사의 확대, 요4 여성과의 대화 : 종교차별, 성차별을 넘어섬. 마15, 막7 : 사회적 계급을 넘어섬.)

➃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도들의 공동체

=>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보내심을 받는 공동체)

왕 같은 백성이다. 동시에 세상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 이스라엘 백성과의 연속성을 강조해주는 개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됨. 가장 발전된 교회론의 형태. 평신도, 선교, 세상(사회적)섬김 개념 포함됨.)

2) 그리스도의 몸(유기적 공동체) : 골1:18, 엡5:23, 고전6:15, 요13:13-15, 15:1 => 공간적 차원

=>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유기적인 공동체

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다 - 본회펀 -

➁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형제, 자매 공동체이다. : 지체의식

=> 지역교회뿐 아니라 세계교회의 개념이 함께 포함됨.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인 교회론 = 그리스도의 몸의 교회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 교회에 있다. : 루터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➂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지닌 평등한 공동체 (유기적 관계 속에서)

➃ 그리스도를 닮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공동체이다.

: 제자도 (빛과 소금,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내는 교회)

➄ 우주의 주님 되신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에 동참하는 공동체이다. :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만물에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엡1:23, 2:14)

3)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 : 행2:1-4, 20:18, 고전12:4-11, 갈5:22

➀ 교회는 성령 강림에서 태동된 성령의 피조물

: 십자가 부활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믿음으로 도달할 수 없다.

: 창조와 종말(새창조)의 가운데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다. 십자가의 부활사건을 인간의 실존에서 받아들이게 해주는 사건이다.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성령와 존재방식과 성령의 사역이 다르다. (유일회적인 사건)

오순절 이전

오순절 이후

특별한 소수

일시적

인격 밖에 머무름

보편적

영원적

인격 안에 내주함.

모든 곳에 계시 분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물러나야한다.(자기형상)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는 케노시스 행위가 담겨져 있다. 구원사건에도 케노시스의 하나님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다.(성육신 사건 전체) 창조와 함께 인간과 교제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그것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허물 많고 죄 된 인간 안에 들어와 집으로 삼아 내주하셨다.(성전인 육체) => 이를 가능한 것이 성령강림사건

*성령에는 2가지 요소가 함께 있다.

- 물리적, 공간적 차원이 있다. 그래서 능력으로 역사하고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한다.

- 인격적인 존재이다.

➁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

=>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는 시점 = 성령 세례 : 중생이후의 모든 현상들은 성령 충만으로 보아야 한다. ❶ 외적충만 ; 능력, ❷ 내적충만 : 성화

➂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유지되고 변화되는 공동체

성령의 은사 공동체 : 현대교회의 중요점 => 모두에게 주어진 것

=>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능력은 섬기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

❶ support : 교회를 형성하고 지탱하는 것 - 예언(설교)

❷ service : 봉사, 접대, 위로, 상담, 찬양

❸ sign : 방언, 해석, 영분별, 신유, 이적

*특징 - 발견, 훈련, 사용

=> 오늘날 교회론의 특징 = 성령론적 교회론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 아래 차별과 억압없는 상호 헌신과 섬김의 공동체

➅ 성령은 교회의 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므로 성령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지만 밖에서도 활동하신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영적 공동체이다. 교회의 어떤 제도나 사람이 아닌 오직 성령이 교회를 다스리신다.

*성령에 대한 오해 ; 성령이 누구인가?

=> divine person : 성부와 성자와 같음. 인격적 교제를 나누실 수 있는 분

=> divine power : 성부와 성자와 다른 존재방식이다. 능력과 현존으로 존재함.

2. 교회의 모델들

(*프린트 참고)

Ⅱ. 교회의 표지

- 내적인 본질, 비판의 표준, 방향성, 과제

“예수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다.”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381

“우리는 하나의(통일성)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

교회를 믿습니다.‘

▸기능 - 교회의 내적 본질, 외적 특성을 보여준다. 교회의 기준과 규범을 제시한다. 잘못된 현실의 교회에 대한 비판,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제시

*종교개혁은 말씀과 성례전을 추가한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교회는 그 안에서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됙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의 모범이다.”

=> 개신교 교회의 특성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 말씀과 성례전 + 권징과 치리

*최근 - 성령의 역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1. 교회의 통일성

- 교회의 하나님 됨은 구조, 직제, 교리와 사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에 하나이며 교회일치의 근거가 있다.

*역사적 이단의 판단기준

❶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삼위일체론) ❷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기독론)

- 삼위일체하나님의 하나님 됨이라고 표현

- 성령 안에서 성부성자가 이루는 상호참여와 나눔이라는 사랑의 공동체

-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새로운 교제에 근거한 독특한 하나됨

- 한 주님 한 성령을 믿으며 한 몸에 속하지만 다양성을 지닌다. 그 안에서 통일성을 가진다.

- 각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의 특이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지체들의 다양성과 사귐이다.”

- 분열된 교회들은 원인들을 발견하여 극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연합하여 공동의 과제를 수행해야 해야 한다.

▸분열에 대한 태도들

=> 일치를 위해서 겸손, 화해, 순종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칼바르트 분열은 수치이다.

=> 불가피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 지식의 상대성과 불완전성, 불가피성이 있다.

=> 그러나 대부분 분열의 원인은 인간적인 요소가 많기에 합당하다.

=> 교회의 획일성 반대

=> 교회의 일치는 동일한 주님, 교회, 성령론

=> 동일한 음성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 일치를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 에큐메니컬 운동 : 겸손과 순종

문제1) 완전한 교리적 일치 신조상의 부분들을 간과함. : 신조와 교리의 차이가 불가피하다.

문제2) 서로 불화할 수 있다 .

아브라임 카이퍼 각 교회들은 다른 교회를 정죄하지 말고 이해하고 협력해야 한다.

=> 교회분열이 정당화 될 수 있다.

=> 지나친 상대주의는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어려워진다.

=> 관용하고 이해하고 협력해야 한다.

문제1) 상대주의에 머무름

문제2)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김명용 교수 부분적 차이는 관용할 수 있다. 복음의 핵심가운데 니케아 칼케돈 신조에 나타난 핵심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성에 대한 기준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분열원인 - 정치적인 이유가 강하다!

❶ 한국교회 지도자의 이기심 탐욕 부도덕성 : 돈, 섹스, 파워

*돈의 유혹 이기기 : 부에 대한 욕망을 이기기, 재산 관리자, 수입의 투명성, 보화는 하늘에 있음, 다수의 장로들의 리더십

❷ 목회자와 교인들 간의 갈등 (목사와 장로, 교인과 교인)

❸ 지역과 정치적 다툼

❹ 뿌리 깊은 개교회주의, 개교단주의, 집단이기주의

2. 교회의 거룩성

-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도덕적 삶이나 행위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도 거룩하다. (이미 거룩한 근거를 가지고 거룩함으로 불리어졌다.)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으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성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교회는 거룩한 모임이다. (기독론적 칭의론)

-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었고 거룩하게 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 거룩한 교회는 회개하는 교회이다. 그것은 개혁된 동시에 언제나 개혁되어져야 할 교회이다.

: 우리에게 성령으로 지배하심이 요청된다.

-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는 데에 교회의 거룩성이 있다.

- 하나님의 거룩하심은(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십자가에 달려 있다.(죄인들의 친구, 종의 모습, 가난한 병약한 자들과의 연대)

- 교회의 거룩성은 하나님의 선택과 그의 부르심에 따른 은총의 결과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윤리적 과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참여하고 세상 속에서 그 사랑을 반영함으로 거룩하다. => 거룩의 표지

*거룩함 - ❶ 소속됨, ❷ 하나님을 닮아감 = 사랑 = 온전케됨 = 건강함. 따라서 진정한 거룩은 약자들을 향한 사랑의 베품을 통해서 나타난다. 영적 가난함(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없는 자 들을 연대함이 거룩함의 모습이다.

=> 윤리적 도덕적 거룩성 - 개인적 죄, 사회적 차원의 죄, 구조적 제도적 차원의 죄,

이원기 박사 “한국교회여 힘내라”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 = 영성, 도덕성, 공동체성

3. 교회의 보편성

“개별의 지역 공동체를 포괄하는 전체 교회”의 의미

-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보편적인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

- 보편적 교회는 계급과 성, 인종 지역의 경계가 없는 교회이다. 즉, 교회는 민족주의나 특수한 전통 및 문화 등 모든 인간적인 차이와 장벽을 뛰어넘는 만민의 교회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 특히 세상의 소외된 자들과 약자들과 연대하며 그들을 위한 삶의 실천도 포함하는 것이다.

- 성령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시키는데 이는 구원의 보편성에 근거한다. (요3:16, 히2:9)

- 교회가 만민의 교회인 것은 만인을 향한 선교의 요청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마28:19-20, 행1:8)

-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부분적인 시작이며, 그 보편성이 완성될 미래를 향한 도상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4. 교회의 사도성

- 사도적 교회란 그의 가르침과 선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들인 사도들의 증언에 기초하는 교회이다.

*사도성 - “사도들에게 기초하며, 그들과 연속성을 가지며, 따라서 정당성을 가진교회”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 육적계승 vs 영적계승

-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도직 계승이론은 성서적, 역사적 근거가 약한 이론이다.

- 이는 어떤 외적이고 기계적인 의미의 사도적 계승이 아닌 영적인 계승이다.

-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 아래 있는 교회가 참된 의미에서의 사도적 교회이다.

- 사도들의 말씀, 교훈, 정신이 지배하는 교회. 사도들의 정신이 교회의 표준이 되고 권위가 되는 교회

- 사도들의 삶을 실천적으로 계승하는 교회이다.

- 복음을 위한 사도적 고난 속에 있는 교회 - 복음을 위한 고난이 참된 사도성의 표지

- 참 사도적 교회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과제를 수행하는 교회 사도들의 뒤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부르심과 파송을 받는 교회. 사도성은 사도적 계승을 통하여 교회에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나 교회의 소유물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를 향한 방향정립이다.

- 사도직의 수행은 박해와 고난이 따르기도 하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는 십자가 아래 있게 된다.

“교회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사도적이 된다.” - 몰트만 -

- 사도적 교회는 ‘종의 형태’를 취하는 교회이다. (세상을 위한 존재, 타자를 위한 존재, 섬기는 교회)

- 사도적 교회는 온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파송되는 교회, 에큐메니칼 교회.

“교회의 보편성은과 사도성은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지 카톨릭적, 보편적 교회로서만이 사도적일 수 있다.”

“사도성은 교회의 유일한 표지이다.” -칼바르트-

몰트만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라는 고전적 교회의 표지를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새롭게 재해석한다.

“자유 속에서의 일치”,“보편성을 위한 당파성”,“가난 속의 거룩함”,“고난 속에 있는 사도직”이다.

이를 교회의 세게 참여와 관련시켜 표현하면, “자유 안에서 교회의 하나 됨”,“억압받는 자들 편에 서기”,“가난에 동참하는 거룩성”,“고난 가운데 있는 사도직”으로 해석할 수 있다.

Ⅲ. 교회의 목적 및 과제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 : 교회의 과제의 시작

사랑하는 자유

③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 : 신자의 과제

의존하는 자유

하나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사랑

순종하는 자유

물어보는 자유

④인간이 이웃 사랑 : 신자의 열매

②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 : 신자의 응답

A.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음화, 기독교화

-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과제이다. 수직적 차원을 강조한다.

-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 교회의 핵심 과제는 예배, 교육, 찬양, 감사, 전도이다.

- 교회의 진정한 목적은 복음화이며 세계의 기독교화이다.

- 개인 구원, 영혼 구원, 교회 성장과 부흥, 세계 선교에 초점을 맞춘다.

- 복음화가 일차적인 것이며 인간화는 2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등한히 함으로써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교회의 영적 차원과 기능을 강조한다.

- 복음과 기독교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B. 인간화, 해방, 정의, 평화

- 이웃사랑과 관련된 과제이다. 수평적 차원을 강조한다.

-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성적 차별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기초한 인간화를 추구한다.

- 기독교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정의와 평화에 대한 봉사가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 레오나르도 보프 -

“전도란 평화의 실현이다.” - 호켄다이크

- 세상과 역사 참여에 적극적이다.

- 상황과 현실 관련성. 현실 참여를 강조한다.

- 인간화와 해방에 기여하지만 때로는 교회의 영적 차원을 간과하고 교회성장과 선교를 무시할 가능성도 있다. 교회가 이데올로기 실천의 장으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교회는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교회의 영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조화시켜야 한다.

교회는 생명 구원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구현해 가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정신이 함께 실천되어야 한다.

눅2:14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 영광”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사역해야 한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도 슬픔도 없는 평화의 나라 건설을 위한 과제와 목적을 지닌다.

Ⅳ. 교회의 목적 및 과제

A. 케리그마 -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다.” (롬10:9, 고전12:3)

-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선포의 중심이다.

- 예수의 주되심, 즉 우주적 구권과 통치에 대한 선포이다.

- 예배, 말씀 선포, 성찬, 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 3중 독서 구조 : ❶ 성경 ❷ 신학 ❸ 신앙 의 균형이 중요

1) 설교란 무엇인가? (*도서 “성령이 이끄는 설교” 참고.)

대화 -> 제사 -> 율법 -> 선지자(대언)

-> 예수 그리스도(1차적 말씀) -> 성경기록(2차 말씀) -> 설교(3차 말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서 마치 지금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하는 것을 중계하는 중계자로서 설교를 해야 한다.

문자 형태 이전의 대화형태의 교감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건

▸설교의 필수적인 내용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이해와 경험에 대한 선포가 되어야 한다.

- 설교자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 한다.

❷ 하나님의 주님이시다.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매주 성도들은 설교를 통하여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인 누구인지 확인하고

진정한 Lordship을 회복하는 것이다.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드러내야 한다. 편협한 하나님의 성품을 설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사랑

거룩, 공의, 은혜, 자비, 인내, 분노 등등

구원사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 새로운 통찰을 얻기도 하지만 나의 사고를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설교는 구원사적인 이해를 통해서 신구약을 관통할 수 있는 설교의 내용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면 편협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경공부가 아닌 성경연구와 성경묵상을 통해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관계적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관념적인 개념과 원리에 대한 설교가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경험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설교자와 하나님사이의 파트너쉽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도 함께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어야 한다. 계속적으로 은혜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부족한 인간의 모습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한 고백이 함께 해야 한다. 은혜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❽ 좋은 설교자는 좋은 신학자이어야 한다. 성경, 신학, 삶에 대한 이해가 함께 해야 한다.

인간적인 활동 안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 본문에 대한 준비, 연구, 실행 뿐 아니라 청중으로 하여금 삶의 변화하는 열매를 맺는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 전체의 역사가 인간의 활동을 절대 배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인간의 경험, 지적수준, 가치관, 어휘, 인간됨, 문화와 인류에 대한 이해 등등)가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다양한 관계와 경험이 요청된다. 이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서 간접적인 경험을 위해서 계속적인 다방면 독서를 해나가야 한다.(설교자의 그릇을 키워나감.) 이를 통해 스스로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❿ 설교자의 영역

- 영적 = 전인격적으로 성령의 인도함 받는 것

- 영성 = 하나님과 자신의 이웃과 친밀하게 있는 관계

- 영적권위 = 죽고 사는 경험

: 신자로서 날마다 죽음

: 설교자로 죽고 삶. 본문과 씨름하며 나의 자아가 복종하게 되는 것. 무력함을 경험.

=> 다시 살림의 경험(부활의 경험)으로 나아가야 한다.

설교란? 성육신한 나의 말을 해야 한다. 나의 피와 살을 나누는 것이다. - 신옥수 교수 -

2) 성경공부

교회의 부흥은 담임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교인의 성숙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런 한국교회에서는 지식위주의 성경공부로(지나친 객관성) 전락하고 개인 큐티 남용(지나친 주관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3) 기도회

다양한 기도회가 활성화 될 필요가 있다. 영적 권위는 두 가지를 통해서 전해진다. 하나님의 목자를 통해서 전하신다는 확신과 목자의 기도를 듣고 계심을 경험하게 될 때이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피조물의 최초의 반응은 찬양과 감사였다.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대리적인 만남을 위한 것이 제사였다. 오늘날은 예배를 통해서 이러한 기능이 이어진다. 오늘날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유일회 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예배는 만남의 장이다. (보혈찬양 중요함.)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도 예수님은 예배의 신학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생명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죄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여기서 다 쏟아졌다.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불로써 임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은 상징이면서 물리적인 실제를 말한다.

따라서 영광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하나님의 신실함, 진실함으로 관계를 맺는 행위인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행위이다. 인간은 순종함으로 반응하게 된다. 따라서 예배공동체는 순종과 찬양의 공동체이다.

예배 공동체는 Lordship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우리의 삶이 주인이다.) 삶의 우선순위가 재배열된다. 그리고 관점이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변화된다.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의 회복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에너지가 공급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생명의 사건은 치유와 위로와 회복의 사건이 일어난다. 크리스천은 영원과 시간을 동시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 시간을 통해서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됨을 경험한다. 예를 들면 삶의 의미를 해석하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알고 있었고 경험했지만 신비에 가려져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게 되는 것이다. 제한과 한계가 없는 자유의 영원함의 시간이다.

인간의 불안의 뿌리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존재 유한성에 대한 불안함이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이 불안으로부터 해방된다. 그것은 바로 부활에 참여함이다. 이를 통해서 내 삶의 비전이 새롭게 되어 진다. 과거의 의미가 영원의 관점에서 해석되면서 치유와 위로와 회복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는 순간 내 안에 막힌 어떤 것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바울도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예배의 자리는 자유의 영이 역사하는 현존이다.

‣헌금

- 의미 회복

insurance 보험 / giving 구제 / thanks giving 감사 / lordship 주인 / worship 예배

=> 예배자의 가장 거룩한 행위

=> 물질은 인격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 1/3 재물관련 : 선택의 문제)

- 훈련필요.

‣성찬

- 속죄, 감사, 이웃사랑의 헌신, 재림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치유와 화해 등등 많은 의미가 있다. 따라서 성찬이 진행될 때 좀 더 포괄적인 의미가 해석되고 경험하게 되어야 한다.

‣축도 - "Now & Forever" 포기할 수 없는 권한.

B. 코이노니아 - “서로 사랑하라.” (요13:34-35, 롬13:8, 벧전1:22, 행2:42,44,46)

- 하나님 사랑에 기초한 이웃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

-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근거한 친교, 교제의 삶

-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 공동체로서의 사랑의 실천 공동체이다. (내적친교)

=> 예배를 통해 서로 사랑이 회복된다.

- 그러나 밖으로 표현되는 사랑으로서의 디아코니아와 마르튀리아가 없으면 사귐은 사귐병이 되고 만다.

- 성도의 사귐, 봉사, 자기희생의 근거는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은 밖을 향한 섬김에로 나아가야 한다.

- 두 날개 = 소그룹 + 선교회

- 자기희생의 훈련이 필요하다. 자기희생은 스스로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먼저 손해 보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 먼저 베풀고 주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실패가 있고 재기도 있다. 그러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 교회 안의 활동 -----------------------------

C. 디아코니아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마25:30,45, 요13:16)

-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나타난 “섬기는 종”으로서의 사역

- 제자의 길로서의 디아코니아 - 참된 제자도의 모습은 타인을 위한 봉사이며, 이는 예수를 위한 예수를 뒤따르는 증거의 삶이다.

- 초대 교회와 교인들의 사역의 중심은 디아코니아였다.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는 섬김의 사역 :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행위

- 교회의 본질적 사역인 동시에 우선적 사역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 병든자, 소외된 자, 약자들의 하나님이시다.)

-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와 사역(청소년, 장애인, 노약자, 사회복지, 구제사업, 자원봉사 등)

상대방이 나를 초대 할 수 있을 때에만 초대한다.(상호적 관계) 따라서 식탁 교제에 가난한 자, 병자 등을 초대할 수 없었다. 식탁공동체는 그들만의 모임이다. 이는 율법주의자들의 법칙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화로서 식탁공동체에 모두 다 초대시킨다. 구성원으로서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유와 조건이 없다. 이것은 표징으로서 나타나신 사건이지만 성령강림사건이유에 초대교회의 행위를 통해서 실천화 되어 영적 평등공동체가 이루어졌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였다. 그러나 범죄 이후에 소유에 얽매인 존재가 되었다. 명예, 권력, 돈, 성에 노예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노예에서 해방되고 성령이 오심으로 다시금 관계적 존재로 회복된다. 이의 표징으로 방언이 나타나고 식탁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관계 -> 소유 -> 노예 -> 회복)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이웃이 되는가? 그것은 나의 도움이 필요하는 사람이다. 이전까지 이웃은 상호적인 거래가 가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서 이러한 체제가 전복된다. 큰 희생을 감수하고도 사랑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랑의 모습은 결국 영생과 관여되는 일이다. 따라서 디아코니아는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적이 일이 된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디아코니아의 사역의 태도는 주의해야 한다. 진정한 친구로서 사랑을 행하는 디아코니아가 실행되어야 한다.

① 긍휼사역 (음식, 주거지 등등 제공)

② 긴급 비상 사역

③ 교육사역

④ 상담사역 - 낙심자 돕는 사역

⑤ 의료지원사역

⑥ 경제개발 사역 - 전세자금 대출, 직업교육, 주택제공 등등

⑦ 예술 사역 - 문화참여

⑧ 사회정책 변화사역

D. 마르튀리아 -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과 화목케 하라.”

(사43:10,12,44, 행1:8, 2:47, 마28:18-20, 고후5:20)

- 순교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 교회의 존재 목적은 모든 문화와 상황 속에서 옛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사역에 있다.

- 화해의 사역(고후5:18-21)이 중심이다. - 지역, 인종, 국가 등의 벽을 허무는 사역

-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선교 (복음 전도, 지역 선교, 세계 선교)이다.

- 공교회적인 전도의 그림이 있어야 한다.

----------------------------- 교회 밖의 활동 -----------------------------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마르튀리아

Ⅴ. 교회의 구조

A.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5조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불가견적이다. 이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

b. 어거스틴 - 보이는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 구별

플라톤의 용어들을 차용한 것이다. 기독교가 헬라화 된 것은 아니다. (‣불트만 - 기독교의 플라톤 화가 이루어졌다.)

c. 종교개혁신학자들

- 참된 교회 : 보이는 기관이나 조직체로서의 현실적 교회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모임이다.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지상과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택된 무리다.

- 보이는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알곡)와 거짓 신자(쭉정이)가 섞여 있다.

d. 멜랑히톤 - 반대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보이는 교회인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보이는 무리들의 모임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 선택된 자들이 있으리라는 어떠한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 => 성도의 모임 자체가 가시적인 것이다.

e. 현대에 이르러 상당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성서적이라기보다는 플라톤적(대립 분리 불연속성)이다.

=>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줌. cf) 중세교회는 아리스토탤래스에게 영향받음. (아퀴나스)

② 신약성서의 교회는 어떤 추상적인 이념이나 모임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보이는 역사적 실체였다. (빌립보, 에베소, 고린도 교회 등) 신약성서 안에는 보이지 않는 교회란 없다.(푈만)

③ 보이지 않는 교회란 세상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상의 교회란 허구적 개념에 불과하다. 천상에는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곳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이전에 지상에 존재하는 잠정적 역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f. D. Bonhoeffer

불가견적인 교회가 되려는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아니다. 참 교회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 고백교회처럼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g.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는 동일한 교회의 두 양태이다. 보이는 교회는 현존하는 구체적인 교회요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 완성된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의 개혁의 동인이 될 수 있다.

⋆B. 교회의 제도성과 사건성

a. 사건으로서의 교회

‣칼바르트 -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사건(말씀의 선포), 바로 그곳에 교회가 있다.(말씀의 순종)

‣에밀브룬너 - 교회는 수직적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며 수평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형제자매간의 인격적 만남 곧 형제자매간의 사랑의 사귐이다.

‣J. C. Hockendijk -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해우이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b. 제도로서의 교회 - 전통적인 R.C 교회론

- 교회는 가견적이고 제도이다.

- Vatican Ⅱ (제2바티칸 회의)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단체로서의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에 일치하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 => 사도직 계승이론(조직으로서 교회)

c. 사건과 제도로서의 교회

a. H. Kueng - 교회는 제도가 아니고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b. T. A. moehler - 2개의 극단적인 교회관을 피해야 한다.

① 극단적 중앙 집권적인 교회관(제도)

- 성령이 교회의 제도 속에 갇히게 되고 교회의 제도가 신성화되며 절대화 되는 문제점

② 개인주의적인 교회관(사건) - 교회의 제도성을 부정하고 무교회주의로 나간다.

c. 교회의 본질은 성령의 사건이다.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을 구현해 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났다.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언제나 성령의 활동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d. 교회는 성령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제도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의 제도성은 한 번 만들어진 것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그런 의미의 제도성은 아니다. 교회의 제도성은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기 위한 성령의 필요에 따라 개혁 변화되어야 한다.

유기적 교회 : 누구나 교회를 운영할 수 있고 세례까지 가능한다.

vs

가정교회 : 대형교회 안의 가정교회

*기존교회의 반발로서 등장하는 운동은 상처 입은 자들의 집단으로 전락될 수 있다.

C. 교회의 정치 제도(형태)

a. 교황제도 - 로마 카톨릭 교회

- 사도적 계승권이 로마의 교황(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주어져 있다는 주장 아래 교황이 절대권을 행사하는 제도

- 상명하복적이고 비민주적이다.

-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위계질서 인정, 평신도의 위치 약화

- 교히의 통일성 강조됨

b. 감독제도 - 영국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 교황제도의 변형된 형태

- 교황 대신 전체 교회를 감독하는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제도,

- “감독이 없으면 교회가 없다.” - 감독이 교회의 정치를 결정하는 결정적 권위자(교리 수호)

- 교회를 계급 구조로 보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함으로써 평신도를 교회 운영에서 제외시킨다.

- 감독정치는 상회와 하회의 구분이 분명하고, 성직자간 계급이 존재하고, 지역교회의 평등권과 자율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교회 임명권을 가진다.

c. 회중교회 - 그리스도 교회, 형제단 교회, 침례교회 등

- 평신도 중심의 민주적 제도

- 모든 성도가 성령의 은사(카리스마)를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 교회의 모든 권한을 회중(전체 교인)이 지니고 있다.

- 목사나 집사도 회중이 세운다.

- 교회의 목사는 회중이 결정한 것을 집행하는 것 이상의 독자적인 권한은 없다.

- 일체의 상회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의 자주권을 기본구조로 삼고 있다.

- 평신도의 권한을 확대하고 민주적 교회의 틀은 갖고 있지만 상회나 성직자의 지도력을 부인함으로써 교회의 통일성을 상실하고 자주 분열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d. 장로제도 - 개혁교회

- 회중제도에 가까운 교회의 정치 형태

- 장로회라는 회중들의 대의적 기구가 교회 통치의 중추적 기능을 한다.

- 장로회는 성직자들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회중에 의해 선출된 평신도 대표인 장로와 성직자인 목사로 구성되어 있다.

- 교회의 성숙을 전제할 때 장로회제도는 성직자들의 지도력과 평신도들의 민주적 참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제도이다.

- 회중정치와는 달리 당회, 노회, 총회라고 하는 교회회의의 위계질서를 인정하다. 회중교회가 주장하는 자율과 평등사상을 수용하지만, 그들과 달리 교회회의의 위계성과 교회의 연합을 강조한다.

∙ 장로회 체제의 정치 원리

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그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한다.)

② 그리스도는 그의 왕적인 말씀을 방편으로 삼아 그 자신의 권위를 발휘한다.

말씀이 교회의 객관적 권위이다. 모든 신자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권위는 말씀 아래에 있다. -> 로마카톨리에 대한 반동

③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세를 부여하셨다. 전 성도에게 권세가 부여되었다. 전체 교회의 해석과 다수의 의사가 중시된다. 성서의 권위에 다수의 의사가 종속되어야 한다.

④ 교회의 권세는 그리스도에 의해 전체 교회, 즉 일반 호원들이나 직분자들에게 독같이 위임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 각기 의무를 이행하는데 요구되는 추가적인 분량의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교리와 예배, 그리고 권징의 유지를 위해서 따로 세운 직분자들에게 그 권위를 부여했다. 직분자들은 그리스도 앞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

⑤ 교회의 권세는 지교회의 치리회에 있다.

총회는 지교회를 간섭할 수 없다(지교회의 독자적 운영권) 노회의 상회들은 지교회가 위임한 권한만을 갖고 있다. 위임된 권한에 대해서는 명령을 할 수 있다. 반드시 지교회는 어느 부분을 상회에 위임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 지교회의 당회장권이 중요하다.

Ⅵ. 교회의 교직(=교역)

1. 교직에 대한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회의 입장

1) 카톨릭 교회의 입장 (트렌트 공의회, Vatican 1차(1870), Vatican 2차(1964)에 반영됨)

- 교회는 성도들의 사귐인 동시에 성도들 위에 있고 그들 이전에 세워진 제도적 기구 내지교직 기구이다.

- 교직 기구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으로 그리스도는 교직 기구 안에 계신다.

-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교직 기구를 맡기셨고, 이는 베드로부터 시작하여 선임주교의 안수를 통하여 서품을 받은 후임주교들에게 전수됨으로써 교회의 모든 권위가 전승된다.

: 사도적 계승

전통 => 사람을 통한 계승

=> 7성사 : 신분(혼배성사, 서품성사) - 기능의 차이가 아니라 신분의 차이이다.

=> 모든 성사는 믿음과 상관없다. 베푸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 사제들은 이를 통해서 잉여 공로를 얻는다.

종부

혼배

서품

성체

고해

견진

통해, 자백

사면 ,보상

성찬 (화체설)

가족전도 약속

선행의 공덕으로 협력은총

영세

영세를 잃어버렸을 때

마지막 기회

: 마리아 처녀설 - 마리아 무흡설 - 마리아 평생 동정녀설 - 마리아 승천설 - 마리아 기도

=> 종교개혁자들

: 카톨릭의 구원론에 대한 반발

- 구원의 현재성만 강조, 구원의 조건으로 선행을 강조, 인간주의적, 물리적 차원의 구원 강조

-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 교회는 그리스도와 들 사이에 구원을 중재하는 매개체로서 이 매개체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현존하며 그의 공동체를 다스린다. 교황은 그리도의 대리자이다. 교회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변하며 따라서 교회에 대한 복종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 교직 기구는 세 계급으로 구성됨

: 교리권, 사법권, 성례권 + 교독권 (가르치고 지도하는 권한“마기스테리오”)

- Vatican 2차 이후 교회관의 변화 : 교회를 단순히 교직자들의 교직기구로 보지 않고 교직자와 평신도의 사귐으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 기본적인 교회론을 함께 가지고 간다.

=> 성경공부를 시작한다.

- 평신도의 위치 변화 (수동적 -> 적극적) : 성찬 참여에 있어서

- 교회는 평신도 위에 있는 지배 체제적 기관이면서 동시에 사귐이요 교직기구는 이 사귐을 위한 봉사라고 본다.

- 구별 : 공동사제직 (보편사제직) - 사제와 평신도 포함

사목적 사제직 (지배체제적 사제직) : 사제만 (성찬 집행, 평신도 교육 권한)

- 교황은 최고 권한을 지니고 있으나, 홀로가 아닌 전체 주교들과의 사귐 속에서 행사

=> 교황 무오설, 교황 수위설

(*평신도 -> 사제 -> 주교 -> 감독 -> 추기경 -> 교황)

- 로마교회로부터 분리된 기독교의 모든 교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참여한다는 점 인정 => 최근인정

2) 개신교의 입장

-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

- 루터 “성도들의 사귐” / “성도들의 교통” / “성도들의 교통”

- 깔뱅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

- 공동체로서의 교회 강조 / R. C. 제도로서의 교회

-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언제나 새롭게 일어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생성되고 유지되는 것이지, 교직자들의 교직기구를 통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선포와 성례전 집행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교직자는 도구(봉사자)이다.

- 교회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교직 기구의 필요성 인정, 그러나 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신적 질서가 아닌 인간적 질서로서 변화되고 갱신될 수 있다.

- 사도적 계승(법적, 제도적 계승)에 반대 => 만인 사제직, 제사장직 주장 (벧전2:9)

- 성서가 교황 또는 교직보다 더 우위에 있다. (성서 > 교회)

- 그리스도가 선포되며 성령을 통해 밝혀지는 성서의 말씀을 통해 교회를 다스린다.

- 개혁회의 신학은 목사, 교사(신학자), 장로, 집사의 네 가지 직분을 제시한다. 모든 직분들은 한 교직의 특별한 기능들이다. 다만 공적으로 임명된 교직자의 교직은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데 있다.

2. 사도직 계승과 교회 제도

1) 사도 계승의 의미와 문제점

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도직 계승의 성서적 근거 - 마16:18-19

➁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도직 계승의 의미 -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교회의 모든 권한은 그 다음의 주교로 계승된다. 주교 서품식에서 주교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써(안수) 성령이 선임 주교로부터 후임 주교에게 부어지며, 성령과 함께 교회의 권한이 승계된다.

➂ 로마 카톨릭 교회관(교직관)

- 주교직은 사도직의 연장이다.

- 주교의 직분과 권한은 주교들만이 가질 수 있으며 평신도들에게 양도될 수 없다.

- 베드로에게서 모든 권한과 법통을 이어받은 주교들의 조직, 즉 법적 정당성을 지닌 교직 기구이다.

- 주교들의 계급체제, 지배체제를 뜻한다.

➃ 로마 카톨릭의 사도직 계승의 문제점

- 부활의 목격자들(제자들)의 존재는 그 이후의 주교들과 구분되며, 양자는 혼동될 수 없다.

- 복음 선포의 사명은 모든 기도교인들에게 게승될 수 있는 것이지,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와 베드로 이후의 주교들에게 자동적으로 전이될 수 없다.

- 사도직 계승은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할 수 없다.

- 주교 서품식에서 선임주교가 후임 주교에게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음으로써 성령이 후임자에게 자동적으로 전이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혁의미는 성서의 본질을 회복한 것이다.)

2) 사도직 계승의 의도와 새로운 해석

➀ 교회의 사도성, 사도적 전통, 사도들과의 내적 사귐과 연속성, 사도적 전통성, 교회의 내적 통일성 : 사도직 계승의 긍정적 의도 => 사도의 표지 = 고난, 연보

➁ 사도직 계승의 의미

-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에 기초하고 사도들이 선포에 충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사도들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데 있다.

- 사도들이 물려준 성만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예배, 친교, 봉사, 선고를 포괄한 공동체의 삶)

- 교회의 사도성을 이루는 것은 성령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사도성을 보증하고 유지시킨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3.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질서 - 카리스마적 공동체

a.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각 사람이 자기가 받은 은사에 따라 봉사하는 공동체이다(벧전 4:10) - 신자들의 공동체 은사들의 공동체, 자발적 봉사자들의 공동체

b. 성령의 은사

- 사적 은사 (믿음, 방언, 영분별, 권면 등 - 고전12:4-11)

- 공적은사 (사도, 예언자, 교사, 집사, 감독 등 - 롬11:13, 고후3:3, 4:1, 6:3, 고전12:28)

c. 교회의 확장과 함께 사목과 치리 기능

- 감독 (에피스코포스) - 벧전2:25, 빌1:1, 행20:28, 딤전3:2, 딛1:7 / 감독이 무엇인지는 신약성경은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 집사 (디아코노스) - 감독을 보조하여 공동체의 제반 일들을 처리(빌1:1)

- 장로 (프레스뷔테로스) - 행20:20-35, 딤전5:17, 벧전5:2,14

=> 공동체 칠, 목자의 사명, 말씀 선포, 가르침의 직분 : 감독의 기능과 거의 같다.

d. 이는 법적인 임직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은사가 직분의 근거이며, 직분의 권위를 세운다.

“명령과 복종의 원리에 입각한 지배체제의 질서가 아닌, 서로 낮춤과 자발적인 섬김의 질서를 갖는다.” - 형제자매들의 공동체요 친구들의 사귐이다.

e. 신약성서에서는 장로제도도 감독제도도 공동체의 본래적 질서로 나타나지 않으나,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면서 장로제도는 사라지고 감독제도가 교회 유일의 제도로 등장하게 된다.

- 교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를 가져옴.

=> 가부장제, 일신론적 요소, 여성이 성직에서 제외, 성직과 평신도의 철저한 구분

f. 신약성서에 다르면 성령으 ㄴ종말에 올 새로운 시대의 은사(사44:3, 63:14, 겔36:27, 슥4:6, 욜2:28)이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성령의 피조물로서 이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없다.

4. 교직의 본질

a. 공동체의 인도와 치리를 전문 직업으로 삼는 교직 제도이다.

b. 그리스도는 제자를 선택, 파송(마10:1-8)하였으며, 이들은 예수의 삶과 부활의 증인으로서(행1:21-26) 그리고 기도와 가르침과 선포와 봉사의 해우이로 공동체를 인도(행2:42-47, 6:2-6)했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그의 몸된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교직을 허락하신다.

c. 교직의 필요성

- 예배와 성례전의 효과적인 집행, 성도들의 친교, 교회 교육, 교회 행정, 말씀 선포, 선교 사역을 위해 전문적 지식과 훈련을 쌓은 교역자가 필요하다. (관리, 감독, 인도)

d. 교직은 공동체의 대리자로서, 교회 공동체의 위임을 통하여 있게 된 봉사직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직자를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공동체를 통하여 집행된다.(공동체의 일꾼)

e. 교직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행20:28, 엡4:11)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일꾼이다.

f. 교직은 공동체와 상호의존적이다.

- 교직은 공동체 자신이 수행해야 할 과제와 사명을 수행하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은 교직자에게 협조해야 하며, 교직자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와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g. 바울은 평신도를 동역자, 동지로 부른다. (롬16:3,9,21; 고전3:9; 고후8:23; 빌4:3 욘1:1,24) 평신도는 단순히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교직자의 동역자요 동지이다.

h. 교직의 본질은 섬김에 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섬기러 오신 예수 막10:45) 모든 구성원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평등한 지체들이다.

i. liturgy - service, help, ministration - 섬김(제의적 직무 수행)

diakonia - 종의 섬김(눅22:27; 막10:44-45; 마20:28; 요13:13-15)

교직자는 물론 성직자도 공동체를 위하여 종과 같이 서로를 섬겨야 한다.

j. 특별 사제직과 만인 사제직

(R.C. 정교회, 성공회) / 개신교

*만인제사장직의 성서적 근거

- 예수의 성전 폐기 예언(막14:59, 마12:6)

- 제사 폐기(마12:7, 호6:6, 사1:13-17)

- 예수의 유일회적 희생제사(요1:29, 히3:1, 4:14,15, 5:1,5)

- 희생제물 = 대제사장(히10:12,14, 5:4-6, 7:1-3,23-24,27)

- 종말론적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롬3:25, 4:25, 고전15:3-5)

-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사제직 (벧전2:5,9, 행1:6, 5:10, 20:6, 히10:19)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 시대의 사제직이 폐기됨

- 특별한 계급으로서의 사제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 구분은 신약성서에 근거가 없다.)

-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 설교, 세례와 성찬의 집행, 중재자직은 교직자의 전유물만이 아니라, 모든 신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요, 공동체 전체에 부과된 과제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교직자가 서룍, 세례, 성찬을 집행하고 담당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올바른 신학교육 없이 올바른 설교는 불가능하며, 세례와 성찬식도 전문가에 의해 연구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평신도 중심, 전도에 초점, 동호회 모임느낌)

가정

(초대교회 근거, 가정단위, 중국 등 세계적, 대안으로서의 교회 모델, 직제등의 문제)

유기적 교회

(교회의 개념이 포괄적임, 관계중시, 공동체 중시, 목회자의 욕심, 틈새시장공략, 기성교회 비판)

5. 교직과 목회

a. 목회의 핵심 사역 - 설교 : 가장 중심 되는 과제 / 목약 - 양육, 교육 및 상담, 훈련

b. 목회의 위기

c. 하나님의 목회, 예수님의 목회, 우리의 목회

-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목회에 동참하라는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목회여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이므로, 목회자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

*교역자와 평신도의 바른 위치 정립과 역할 수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루이 벌코프

- 비상직원 : 사도 선지자, 사도 전도자

- 통상직원 : 장로, 교사, 집사

*에큐메니칼

- 일반교역직 ; 모든 평신도

- 특수교역직 : 안수 받은 교역자 (신학생들의 정체성)

=> 말씀, 교육, 성례전 - 예배선교 목회를 통해서 공동체 삶을 인도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모으고 세움

- 에큐메니칼 지도력 : 에큐메니칼 모임에 참여

Ⅶ. 교회와 국가 및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

1. 교회와 하나님 나라

1)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

①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하께 갖고 있다.

-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교회의 개념보다 더 크고 넓다.

②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

-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지만 하나님 나라로부터 구분된다.

-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큰 나무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예기, 선취(미리 맛보기)이다.

↳ 종말론적 개념 : 이미와 아직 사이 (교회론 구원론도 같다.)

그러나 현재화 된다.

③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이다.

-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면서 도래하는 나라이다.

-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도구이다. ↳ 독 이빨 빠진 사자

- 부활을 선포하며 사회 곳곳에서 교회가 정의 실현에 앞장서야한다.

④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이다.

- 교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적 공동체이다.

-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존재한다.

- 역사의 궁극적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다.

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주역은 하나님이다.

- 교회는 이 하나님의 활동에 봉사한다.

- 하나님의 활동은 교회의 활동 범위보다 더 넓다.

-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지만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신다.

- 하나님은 교회 밖의 선한 이웃들을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⑥ 하나님 나라는

- 교회와 세상에 선사되는 하나님의 은사인 동시에 과제이다.

-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messenger요 ambassador이며 봉사자이다.

- 큰 기도와 넓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품는다. 기도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따라서 기도는 영원과 접속하는 행위이다.

-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2)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교회 공동체의 사역

① 가난한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교회의 책임(눅4:18-19, 마25:40)

② 사회적 정의 수립 (암1:9-10, 4:1, 2:6-8, 6:24, 눅11:42)

③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 형성(사9:2-6, 엡2:14-17)

④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골1:20, 롬8:19-21, 출22:30, 23:12, 레22:26, 25:4, 26:33-35)

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선한 이웃과의 협력

⑥ 교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책임

=> JPIC (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2. 교회와 국가

1)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의 모델(유형)

① 중세기까지의 발전

-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기 이전까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론이 제시되지 않았다.

- 로마제국의 국가종교 내지 제국종교로의 전환

- 중세 : 기독교 왕국 형성 - 종교적 국가/국가 종교 : 국가와 교회의 결합

② 마틴 루터 : 두 왕국론(설)

-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아래에서 성서를 통하여 이루어가는 영적 통치 세계)

- “세상의 나라”

(불신앙의 악한 자들이 “율법”과 “칼” 아래서 평화를 이루는 세속적인 통치 세계)

*인간의 이해

RCC (라틴어)

루터파

깔뱅

하나님의 형상 :

이성, 영혼, 직관 등

(히)첼렘

평행법 사용

같은 의미

루터와 같음

하나님의 모양 :

추가적 은사, 하나님 인식

(히)드무트

모양이 상실되고 형상은 남음

완전히 상실됨 잃어버림.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선행인식 가능

예수님으로만 회복된다.

종교의 씨앗도 존재한다.

모든 이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짐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일반인에게 극히 작은 부분이 남아있다. (현실과 문화 긍정)

-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영역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하여 봉사하는 두 개의 영역 곧 교회와 국가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이 지으신 단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두 영역 내지 두 차원의 갈등과 투쟁을 나타낸다.

- 영적 통치권과 세속적 통치권 곧 교회와 국가는 서로 분리된 전혀 이질적 영역이 아니라 악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운 통치의 두 가지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상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동일한 목적을 위한 역할 분담에 불과하다.

*긍정적인 면 - 국가를 국가 되게 하며 교회를 교회되게 한다. “종교적 정치”와 “정치적 종교”를 거부한다. 양자를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구분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는 것이 루터의 본래의 의도이다.

*부정적인 면 -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고 불의한 국가와 교회가 공존하면서 교회가 국가의 관심에 협조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③ 깔뱅과 개혁교회의 전통의 입장

- 국가의 필요성 인정한다. : 인간성의 실현을 위함

- 교회와 국가는 각각의 독립성을 갖고 각자의 일을 행한다.

-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하므로 그의 모든 질서와 제도와 행위가 하나님의 의와 일치하도록 끊임없이 수정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국가는 교회의 비판적 음성을 필요로 한다. 국가는 그 통치에 있어서 언제나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판하고 수정해야 한다.

(루터와의 차이)

*왜 국가가 필요한가?

- 계약사상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 토마스 홉스 : 자유를 자유를 방치시키면 전쟁의 상태가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서 국가 권력에게 맞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리워야단이 되어 독재를 가지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 성화란 참된 인간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를 돕는 것이다. (생명권, 안전권, 자유권, 책임과 의무)

- 루터처럼 국가와 교회를 구분하지만, 칼빈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를 구분하지만 칼빈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독립된 영역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 그리스인들은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에서 살지 않고, 오히려 두 가지 상이한 영역 속에 살면서 두 영역을 포괄하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다. : 깔뱅의 영역 주권이론

- 개혁교회의 전통은 “모든 신도들의 보편적 왕의 직분”을 주장함으로써 근대 시민사회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했다.

④ 칼바르트의 “그리스도가인들의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 교회와 국가의 분명한 구분

-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교회) - “성도들의 모임”으로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

- 시민공동체(국가) : 공동의 법적 질서를 통하여 결합된 사람들의 공동체, 개인과 공동체의 외적이며 상대적인 평화 유지하며 이를 통하여 그들의 삶의 잠정적 인간성을 지키는 데에 그 목적을 갖는다.

- 양자는 그리스도 안에 공통된 근원을 가지며 하나님 나라에 그들의 공통된 목적을 가진다. 양자는 하나의 구심점을 가진 두 개의 원과 같다. 구별되지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 교회공동체는 안쪽의 원이고 국가는 바깥쪽 원이다.

- 시민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교회가 믿고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 상응, 유비가 될 수 있다.

- 국가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외적이고 지상적이며 잠정적인 방편이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유비 : 아리스토탤레스가 사용함. 상이성 안의 동의성. 동일성 안의 유사성. 유사하지만 다르다.

RCC, 자연신학

깔뱅

칼바르트

몰트만

존재론적

신앙

관계(남여)

관계(가족)

- 교회는 자기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정치에 대하여 희망을 열어 주는 동시에 정치를 비판한다. 교회는 그의 정치적 결단들을 통하여 국가의 정치적 의가 하나님의 의에 상응하도록 추구하며, 국가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리키도록 노력한다.

- 약자들을 위한 배려,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배려

- 교회는 그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하여 “국가의 개혁의 원천과 유지의 힘”이 되어야 한다.

2) 교회와 국가

① 교회와 국가는 영역과 형태를 달리한다. 양자는 각자의 독립성을 가지며 서로 구분된다.

②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다. 교회와 국가는 나누어질 수 없으며 서로의 방법으로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

③ 교회는 국가의 과제와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국가를 돕기도 한다. 교회는 법질서를 지키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고 행하게 함으로써, 사랑과 자비가 있는 국가를 형성케 한다.

④ 국가는 교회의 제반 활동이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과 질서를 마련하며 교회가 국가의 정당한 법질서를 따르도록 요구한다.

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통해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교회는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⑥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국가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속에서 국가를 변화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한다.

⑦ 교회는 국가를 돕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행사해야 한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지향하도록 언제나 다시금 경고해야 한다.

⑧ 교회는 국가가 잘못하고 있을 때 이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판과 감화를 통해 국가를 갱신시키고 변화시켜야 한다.

⒝ 이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무시되고 국가가 현저히 사탄의 기능을 할 때 불가피하게 교회가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

저항이 개혁을 위한 교회의 행위이다. - 깔뱅 -

*저항권(깔뱅)

- 국가나 통치자가 하나님이 받아야 할 경배를 대신 받으려고 할 때 통치자가 독재자가 되어 포악하고 방자하여 백성의 자유를 억할 할 때

⑨ 교회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공직자를 존경해야 한다. 교회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결정적인 도움은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칼바르트 -

*시민혁명 - 자본주의 - 공산주의 - 이념의 대립 - 1,2차세계 대전 - 소련의 붕괴 - 독일 통일

=> 유럽의 경험

3. 교회와 문화

*문화 - “문화는 오늘날 사회의 집단들을 특징 지워주는 특정한 특성들의 총합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특성들이란 영적이며 물질적이고, 직적이며 정서적인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예술이나 문학들 이외에 삶과 인권과 가치 체계, 전통 및 신념들의 양식을 포괄한다” (1982 UNESCO 회의 결정)

*고급문화 - 법, 종교, 철학, 문학, 과학과 예술 포함 : “인간다움”의 실현

*하급문화(대중문화) - 향유와 즐김의 대상으로서의 문화

*대중문화 - 세계화, 민주화, 정보화, 통합화, 새로움 창출 요구, 포스트모던 문화, 소비문화

1)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성 (리차드 니버) - 근대적 사고

①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 문화에 적대적인 태도

② 문화의 그리스도 : 문화의 관용, 연합 (리츨 - 바르트가 비판함.)

③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 the synthesist (종합 / 아퀴나스, 순교자 저스틴)

④ 역설적인 관계를 지닌 그리스도와 문화 : the dualist (마틴 루터)

⑤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 the conversionist (깔뱅, 웨슬리)

*최근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성

- 그리스도 위에 있는 문화 :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

- 그리스도를 회피하는 문화

- 문화 안의 그리스도 (레너드 스윗 - 성육신적 문화)

2)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이해

① 교회와 문화는 분리될 수 없다.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이며, 하나님 나라 실현의 도구이다.

②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다. 문화적 사명과 책임을 지니고 있다(청지기직 창1:26-28 : 섬김의 의미 포함), 그리스도는 핵심적인 문화명령을 성취하신 분이다. 문화 변혁자이다.(요1:14, 3:16) 교회는 이 세상의 문화 속에서 문화를 형성하고 변혁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

③ “복음의 문화화” 및 상황화가 이루어야 한다.

④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

- 시작 - 신학 : 1914년 칼바르트 / 철학 : 20세기 초/중반 -1차 세계대전 이후

- 상대성, 다양성, 다원성의 강조

- 열린사회의 부각 - 상호참여적인 민주사회

- 세속화, 개인화, 세계화, 다문화

- 관점주의

-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

- 지역성, 특수성 강조

- 경험적, 신비적, 설화적, 유동적 세계적, 지구적, 공동체적 / 종족적

*서구 문명 사상의 변천과정

구분

Premodern(전현대)

중세

Modern(현대)

현대

Postmodern(후기현대)

초기현대

시기 및 사건

<AD 313>

콘스탄티누스 칙령

<AD 590>

그레고리 1세 교황취임

<1517>

종교 개혁

<1619>

데카르트

사상적 배경 형성

의심의 철학

<1789>

프랑스 혁명

민중의 혁명 바르세유

궁전 격파

<1989>

베르린장벽 붕괴

(공산주의 붕괴)

<1989>

베르린장벽 붕괴

(공산주의 붕괴)

<현재>

진리

절대적, 초자연적, 계시적

영적 진리

객관적 진리

(과학과 이성으로 검증된 진리

- 계몽주의 이성론)

주관적 진리

(불확실함. 진리의 상대성, 보편적 진리 추구)

특징

· 교권 주의

· 교회 중심

· 신본 주의

· 권위 주의

· 중세사회와 결별

· 계몽주의(어두운곳에 빛을 비춘다) 사상

-> 이성, 자연, 행복, 진보, 자유 추구

· 이성주의, 인본주의

· 과학주의 (산업혁명), 합리주의/지식화

· 종교와 신앙의 배격

(종교가 사라질 것을 선포)

· 삶의 의미 상실

· 경험주의 (이성과 과학으로만 인정)

· 행복, 자유 = 이성과 혁명으로 가능함

· 도덕의 주관성과 상대성 인정

· 인간의 진보 - 기계문명의 혜택

· 이원적(이분법적) 사고, 역사비평학

· 상대주의 (절대성 부인)

· 개인주의 -> 개성

· 해체주의 (혼란, 혼동)

· 진리 결정의 주체 = 나
· 관용주의(최고의 덕목)

· 다원주의

· 혼합주의

· 다문화, 세속, 소비

· 실용주의

· 관계성, 공동체

· 특수성

: 지역주의, 민족주의

· 내러티브 관심

· 유동적

· 세계화

*철학적 입장

- 보는 입장, 발견할 때 , 진리는 없다

결과 및 반응

· 교회의 부패로 초자연적 진리에 대한 염증발생

· 교회 이외의 진리에 대해

탐구하게 됨.

· 종교개혁 -> 계몽주의등

· 실패하였다.

(공산주의의 붕괴 = 베르린 장벽의 붕괴)

* 이유 - 교만, 자만, 낙관적 태도, 비현실적 태도

· 환경오명, 자원고갈, 세속화 도덕적 규범의 붕괴

· 사상적,사회적으로 분열

· 복음과 충돌발생

(레슬리 뉴비긴)

· 관용 / 포용 / 아량 으로 모든 것을 덮는다.

· 다원주의 - 다양성 인정

* 신학에서 만인 구원설로 발전됨.

3) 교회와 문화,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

Ⅷ. 현대 교회론의 동향과 과제

1. 현대 교회론의 동향

1) 포스트모던 사회 및 문화와 교회와 기독교의 관계성

① 모던 사회에서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전환 : 포스트모던, 탈 기독교, 탈 전통적 문화

② 포스트모던적 문화의 특성 : 다원주의, 상대주의 등

③ 과격한 문화 변동에 대한 교회의 적응 능력의 부재 현상 : 기독교의 영향력 상실, 교회의 쇠퇴, 반기독교적 분위기, 교회의 게토화 등

④ 포스트모던 사회 및 문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전통적 vs. 탈 전통적/모던적 vs. 포스트모던적/급진적/보수적/중도적/복음주의적)

*복음주의 - 성서에 대한 존중 (성서주의가 아님) / 경건 - 중생한 자들의 삶의 강조

=> 거듭난 자들의 삶에 대한 강조 (칭의와 성화)

=> 독일권 : 개신교 신학 / 경건운동

=> 종교개혁주의 입장에서 출발해야 한다.

=> 17-18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자들 : 성서주의 교리주의로 왜곡됨.

=> 웨슬리, 침례교, 성결교 등장

=> 루터주의적, 개혁주의적, 세대주의(종말론), 근본주의(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의 반동)

: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 신정통주의적 복음주의 등장

=> 성서뿐 아니라 신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 제3세계 복음주의

=> 상황신학 - 정치, 여성 등등의 현실 관련성 신학을 발전시킴 : 진보적 복음주의

=>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일어난 : 포스트모던적 복음주의

⑤ 현대 교회론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실험중이며,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래 교회를 예측하며, 형성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2) 현대 교회의 다양한 모델들 : 이머징 교회, 구도자 교회, 목적이 이끄는 교회, 셀 교회, 가정 교회, 뉴패러다임교회, 포스트모던교회, 유기적 교회, 멀티사이트 교회, 고대/미래교회, 사이버교회, 다문화 교회 등 / 수입 교회론

▸탈전통적 교회의 출현

① 가정교회 : 네트워크 형태

② Internet Church : 사이트 교회 ③ Ancient Future Church : 촛불, 떼제

④ Multi-culture Church : 다문화 교회

⑤ Extreme Church ⑥ Actors Church

⑦ Cowboy Church ⑧ Hip Hop Church

⑨ Drive-In Church ⑩ J. Motor-Boat Church ⑪ Out-door Church

⑫ Prison Church ⑬ Skate Church ⑭ Theatre Church

▸탈형식적 교회의 출현

▸탈교파, 탈교단적 교회 등장 : Community church

▸개 교회 중심

3) 현대 교회론의 특성

① 교회의 기능적 차원을 강조한다. : 선교적, 성육신적, 상황적 교회론 대두

유기적, 관계적, 공동체적 교회론이 중심이 되고 있다.

대안적 예배와 설교의 혁신

소그룹의 활성화 및 특성화 : 셀 교회, G12 등

목회자/평신도의 관계성의 새로운 수립 : 평신도 참여, 평신도 사역 활성화, 목회 리더십의 강조와 평신도 리더십의 강화

은사 공동체 강조, 은사 사역 중심

⑦ 교회의 사도성 - 사도적 교회 강조 : 이머징교회, 신사도운동, 역사적 예수의 삶을 따름

⑧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 설정을 강조한다. : 흩어지는 교회 강조 “가라”구조

⑨ 교회와 문화, 복음과 선교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 포스트모던 문화 속의 교회들이 등장하여 발전하고 있다.

지역 교회의 특성화

⑪ 교회 경영, 행정, 조직, 구조의 혁신

*“자연적 교회 성장” (피터 슈바르츠)

① 능력 있는 리더십 ② 열정적 영성 ③ 기능적인 구조 ④ 은사 중심 사역

⑤ 영감있는 예배 ⑥ 전인적 소그룹 ⑦ 필요 중심 전도 ⑧ 친교-사랑의 관계

*피터 뵐만 (독일 학자)

① 비전 ② 관계중심의 교회 ③ 소그룹 운동 ④ 새로운 교회상 ⑤ 선교 ⑥ 문화화

⑦ 디아코니아 ⑧ 영적 리더십/현대적 경영 ⑨ 대안적 예배 ⑩ 치유와 축복

*Robert Baake (건강한 교회의 10가지 주요요소)

① 하나님 말씀 중심 ② 열정적인 영성 ③ 열매 있는 전도 ④ 감동 있는 예배

⑤ 사명과 비전에 이끌림 ⑥ 지도력 개발 ⑦ 교회 개척 ⑧ 신실한 재정관리

⑨ 의도적인 제자훈련 ⑩ 사랑의 관계

*Waldo Werning (건강한 교회의 12가지 기둥)

① 강력한 지도력 ② 은사중심의 섬김과 사역 ③ 열정적 영성

④ 기능적 구조/행정/섬기는 지도력 ⑤ 영감 있고 가동적인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

⑥ 다양한 소그룹/의도적인 제자훈련/공동체 안에 자람 ⑦ 열매 있는 전도/선교

⑧ 사랑의 관계 ⑨ 하나님 말씀/복음/은헤 중심 ⑩ 사명과 비전에 끌림

⑪ 성경적 재정관리 ⑫ 교회개척

*Rick Warren (목적이 이끄는 교회를 만들기 위한 5가지 요소)

① 예배 :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 교회가 더 강하게 자란다.

② 사역 :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 교회가 더 넓게 자란다.

③ 전도 : 가서 제자를 삼으라 - 교회가 더 크게 자란다.

④ 교제 : 세례를 주라 - 교회가 더 따뜻하게 자란다.

⑤ 훈련 : 가르쳐 순종하게 하라 - 교회가 더 길게 자란다.

*에디 깁스의 모델 (성공하기 위한 10가지 요소)

① 영성 ② 문화에 참여하는 성육신적 목회 ③ 사회봉사 ④ 체험적 예배 ⑤ 내러티브 설교

⑥ 고대 교회의 예식과 실천의 회복 ⑦ 예배의 시각화 ⑧ 첨단기술문화의 사용

⑨ 살아있는 공동체의 활성화 솔직한 리더십/팀 리더십

*에디 깁스의 이머징 교회의 특징들

① 예수의 삶을 따라하기 : 제자도 강조

② 세속 공간을 변화시키기 : 이원론적 사고 극복

③ 삶의 방식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헌신 : 공동체 강조 - 근대의 개인주의의 반발

④ 낯선 자 영접하기 : 환대 ⑤ 관대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⑥ 생산자로서 참여하기

⑦ 창조된 존재로서 창조하기 ⑧ 몸으로 인도하기 ⑨ 영성 활동에 참여하기

▸전통교회 vs 근대교회 vs 포스트모던 교회

=> 이머징 처치 : 영미권에서 떠오르는 목회 유형

▸종합평가 : 포스트모던 속에서 예수의 길을 실천하는 공동체 : 특징

① 창조적인 예술을 활용 ② 인터넷이 소통의 도구

③ 문화에 민감함 ④ 공동체 중시 : 관계질서 *한국사회에서는 다르다

⑤ 실험적 예배 시도 ⑥ 열린구조

⑦ 참여지향적 ⑧ 변화하는 여정가운데 있다.

⑩ 백인 남성 중산층 중심 ⑪ 사회정의 운동, 환대에 집중한다.

▸짐벨처 - 이머징 교회 비판 “깊이 있는 교회”

전통교회

이머징 처치

전통교회는 계몽주의 갇힌 교리 중심 체계이다.

교리교육을 피하고 필요중심의 설교를 함.

개인구원에 치중하는 좁은 구원관

전인구원을 집중한다.

성과속,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지 않음.

이원론 극복 (포스트모던 적)

세속 공간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감.

환영에 앞서 강요되는 믿음

- 믿음을 통해 교회에 올 수 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얼마든지 교회에 들어올수 있다. 환대가 우선시 된다.

오늘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예배

이벤트성 예배

목사 중심의 일방적인 설교

회중 중심의 설교

- 듣고 싶은 본문과 주제를 정함

- 피드백

공동체성을 상실한 빈약한 교회론

공동체성 강조

세상과 단절된 고립주의

세상 속으로 들어감

▸이머징 처치의 3그룹 => 예배의 갱신, 성육신적 참여, 전도=삶으로 보여주기

① 현실참여를 추구하는 그룹 : 보수적 신앙과 전통적 교회구조를 지키면서 포스트 모던 시대에 적합한 교회를 추구하는 그룹 - 개혁주의 이머징 처치

② 재건 주의적 그룹 : 기존 교회구조와 다르게 재건하려는 그룹 : 선교적 교회론에 영향받은 그룹 - 아나뱁티스트, 재침례파 => 유기적 교회론

③ 수정주의적 그룹 : 전통적 복음주의 교리에 의문을 제시하고 복음과 교리에 수정을 시도한다. 논쟁적인 그룹

▸한국교회의 반응

- 성육신적 교회론, 선교적 교회론, 공동체성 강조 등등은 받아들여야 한다.

- 동방정교회, 수도원 운동, 교리수정 등등은 재고해야 한다. => 한국적인 포스트 모던 상황 속에서 취사선택해야 한다.

- 연구 없이, 신학적 사유없이 받아들임 : 문화가 되어버림.

- 가치와 정신을 따르려는 정신보다 형식을 따르기에 치중해버린다.

▸왜 이머징 교회인가?

- 베이비 붐 세대가 교회로 돌아오면서 자녀들이 교회에 자리 잡지 못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동체성이 회복이 필요한데 그것의 대안이 이머징 처치이다.

- 교회가 세상과 같은 예배 속에 들어가 있기에 오히려 경건한 예배의 모델을 찾게 된다.

*Leonard Sweet (대안적 Epic 모델)

① Experiential (경험적 문화) ② Participatory (상호작용하는 참여의 문화)

③ Image-driven (이미지와 은유의 문화) ④ Connected (관계적 공동체의 문화)

2. 현대 교회론의 과제

1) 미래 교회의 전망

*미래 교회의 환경

① 제3세계로 옮겨가는 교회의 무게 중심

② 환경과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의 증대

③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술 중심의 물질주의 문명

④ 도시화, 세계화, 지구화, 대규모 이민의 영향력 증대

⑤ 로마 카톨릭의 부흥

⑥ 다원적 영성의 추구

⑦ 포스트모던 문화 현상, 대중문화의 확산

⑧ 정보화 시대, 전자문화, 대중매체의 영향력 증대

⑨ 미래 세대의 도래, 가족 해체 시대

⑩ 국가경제나 산업경제에서 국제경제로의 변화, 정보에 기초한 경제, 소비자 중심의 경제로의 변화와 같은 경제적 생산방식의 변화

*미국 복음주의 진영 내 교회의 모형

① 제도적, 조직적 모형 - 프로그램, 위원회, 현대적 경영기술, 정교한 시설, 세련된 기술과 대중매체에 매료되어 있는 교회, 정치적, 경제적인 보수적 성향

② 유기체적, 공동체적, 인격 중심의 모형 - 기술, 대중 매체, 제도적 구조 불신, 공동체성, 상호책임, 인격적 관계, 가정생활, 제자도, 성령의 은사활용, 반문화적, 물질주의와 기술주의에 대한 비판, 대안적인 경제체제 시도

▸가정교회와 실험적인 교회 형태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 공동체 운동

a.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가정교회와 실험공동체들이 지속적으로 형성될 것이다.

b. 많은 경우 이런 공동체들은 광범위하게, 때로 국제적인 차원의 유대를 형성할 것이다.

c. 이 연결망의 교류가 왕성해 질 것이다.

2) 현대 교회론의 과제

① 성서에 기초하며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토대로 하되 현대 사회와 문화와의 관계성을 함께 반영하는 교회론이 필요하다.

② 전통적인 교회와 현대적인 교회들 사이의 대화 및 소통이 필요하다.

③ 교회의 부단한 자기갱신과 변혁 운동이 필요하다.

④ 이론과 실천, 원리와 적용을 연결시키는 지속적인 작업이 요청된다.

⑤ 미래 교회에 대한 예측과 함께 전략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

 

 

 

 

 

 

 

 

 

 

 

Ⅰ. 왜 종말론인가?

1. 종말론의 개념과 신학적 위치 및 기능

A. 종말론의 개념 (종말은 말세가 아니다. 종말 = 새로운 창조)

a. eschaton - 마지막 것, 궁극적인 것(finis)/목적(telos)=새 창조

b. eschatology - 마지막의 일들, 궁극적인 일들에 대한 이론/희망의 이론

c. 신학의 역사에서 종말론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 이르러 사용되기 시작함, 초기교회와 중세교회에서는 종말론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이 나타나지 않았다. => 최근에 중심주제가 됨.

d. 종말론이라는 개념은 루터교회 신학자인 A. Calov의 [신학체계]에서 처음 사용됨

e. 기독교의 종말론은 세계의 대재난과 파멸과 소멸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새 창조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이론이다.

f. 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론이란 종말론의 개념 정의는 적절하지 않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새롭게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와서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미래(시간적 미래가 아닌 다가오는 미래)에 관한이론이요, 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이론이며, 희망의 이론이다. 단지 미래의 해석학이 아니라, 역사 변혁적, 실천적 이론이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희망이며 앞선 것이 아닌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의 삶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선취하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다.

바른 종말론신앙으로 바른 종말론을 선포해야 한다.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영이 불의한 현실을 역사변혁적 이론이 종말론이다. ->현실에 참여적 신앙인이 된다.

B. (조직) 신학 내에서의 종말론 위치

- 서구 취약한 주제가 성령론, 종말론 (1900년대까지 약화)

-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종말에 대한 관심 등장.

- 기독교신학의 모든 다른 주제들과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내용을 규정하는 기초이다. 조직신학의 모든 내용들을 결정하는 기능을 갖는다.

- 신론, 그리스도론, 신앙론, 계시론, 성서론, 인간론, 성령론, 마귀론, 교회론

C. 종말론의 신학적 기능

a. 종말론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는기능을 갖는다.

b. 종말론은 인간의 세계와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세계와 역사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는 기능을 행사한다.

c. 종말론은 기독교신앙에 근거하여 삶과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시함으로써, 혼돈과 무의미에 빠진 오늘의 세계의 의미 상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d. 종말론은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과 본질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함으로써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다. => 교회는 잠정적, 지상적, 역사적 공동체

e. 종말론은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신앙과 삶의 태도와 실천을 결정하는 기능을 갖는다. 기독교 이론들의 한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교회의 성격을 규정한다.

f. 종말론은 “모든 기독교적 선포와 모든 기독교적 실존과 모든 교회의 성격이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단지 부록에 속한 종말론이 아니다. 그것은 앞을 향한 희망과 조망이요 향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현재의 출발과 변화이다”(J. Moltmann)

D. 기독교 종말론의 출발점: 궁극적 근거-예수 그리스도 사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E. 종말론에 대한 오늘의 관심

종말론은 우리 시대의 신학에 있어서 태풍의 중심이다. 여기서부터 신학의 온 땅을 유익하게 뒤흔드는 뇌성벽력이 일어난다. 우박이 내려서 피해를 입든지, 아니면 온 땅이 신선하게 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트뢸취 (역사중심으로 상대주의주장) 의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보았다. 지상천국,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지상에서 경험하자. 그들은 근대를 경험했다. - 낙관주의

‘종말론의 사무실은 대부분 닫혀 있다’ 이와 반대로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되면서 이 사무실은 초과근무를 하고 있다.” (H.U.vonBalthasar)

a. 오늘날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가장 큰 요소는 미래학이다.

세계 인구의 급속한 증가, 점차 고갈되어가는 천연자원,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 과학 무기 특히 핵무기의 위험, 경제적 불의, 환경오염과 환경 파괴, 생태계의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 유전공학의 발전과 생명 복제, 지구화, 세계화, 세속화, 자연 재해, 테러

b.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

생태학적 환경보호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이 시대의 다양한 영적인 그룹들과 결합됨.

생물의 종의 보호, 환경 친화적 건축, 소비의 자발적 축소 내지 소비의 포기, 생태계를 보호하는 과학기술의 발전, 중앙집권적 체제의 분해와 자치구의 자율권 신장, 경제와 사회와 정치에 있어서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구조 형성, 군비 축소, 여성의 인권회복, 질병의 치료와 건강 유지의 자연요법 등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인간의 자기결정과 자연과의 화해를 방해하는 피안의 종교, 세계 도피의 종교로 이해된다.

c. 막스주의

기독교는 삶과 죽음의 진지성을 말살하며, 현실에 대한 관심과 개입을 약화시킨다고 비판.

d. 오늘의 묵시 사상적 세계 상황과 사이비 종말신앙

핵무기로 인한 세계 파멸의 위험, 자연 자원의 점진적 고갈, 생태계의 오염과 파괴. 생물의 종들의 멸절, 책임과 한계를 알지 못하는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 인류의 도덕적 타락, 미래의 불확실성

e. 한국교회의 사이비 시한부종말론과 공중휴거설 : 세계 부정적, 세계도피적인 삶의 태도 형성

그 시절에 세대주의와 근본주의 영향을 받았다. 세대주의는 종말론 중심이다. 근본주의적 영향 받은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 일제시대 이다. 세대주의특징이 시한부 종말론, 그때 이후로 자칭 메시아 등이 200명 가까이 된다. 한국교회 이단 중에 종말계열이 있다. 주기적으로 시한부 종말론이 등장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끼친 사회적 혼란이 크다. 반대로 92,98년 이후에는 20년동안 종말을 잘하지 않는다. 죄와 종말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성경은 기독교 핵심은 종말이다.

F. 종말론 연구의 유의사항

a. 종말론은 오늘날 인간과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현실적 문제들과 갈등을 무시하고, 단순히 역사의 종말이 오리라고 기다리는 피안의 세계를 다루는 이론이 될 수 없다.

b. 종말론은 이 세계와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되었다는 환상이나 열광주의를 피해야 할 것이다. 이 세계는 미래의 구원을 필요로 하며, 구원의 미래는 아직 현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c. 종말론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성과 도피를 정당화시키지 않는 동시에 인간의 행동이나 프로그램을 하나님 나라의 오심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막시즘은 기독교의 메시아니즘을 도용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패해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다스리는 유토피아를 말했다. 변행 된 유대기독교

d. 종말론은 단순히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며, 죄와 죽음의 세력이 다스리는 이 세계를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개혁주의 종말론 입장) 오히려 종말론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역사적 현실 속에 앞당겨 오는 일에 기여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2. 종말론의 역사와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대두

A. 역사 속에서 종말론의 다양한 차원들

a. 초대교회 - 임박한 재림 기대, 지연된 재림 사상, 몬타누스주의(열광주의적 전천년왕국설), 오리게네스의 만유회복설, 로마의 제국종교화로 인한 제국 종말론 황제와 교황이 다스리는 이 곳이 천년왕국, 아우구스티누스의 무천년왕국설 등)

b. 중세교회-연옥설의 발전, 심판,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 요아킴 피오레의 천년왕국설(성부의 시대-성자의 시대-성령의 시대) 성령시대에 과격한 것. 이단으로 배척당함

c. 종교 개혁-연옥설 반대, 재세례파의 천년왕국설과 만유회복설 거부, 영혼불멸 신앙 강조

d. 근대-계몽주의적 진보적, 낙관주의적 역사 이해, 종말론의 차안화 (이 세상에서 지상천국화), 세속화, 탈종말론화 => 칸트, 헤겔, 쉴라이어마허, 포이어바흐, 칼 막스 등

e. 현대 신학 - 전쟁을 경험한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가 활발하고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철저한 종말론(A. Schweitzer), 영원의 종말론(K. Barth) 초기는 키에르 케고르와 칸트에 영향 받음. 영혼이 시간 속에 접촉 -> 비판받는다. 역사를 강조하는 몰트만에 의해 비판.

- 실존론적, 현재적 종말론(R. Bultmann), 구원사적 종말론(O. Cullmann)

- 예수를 중심으로 수렴되고 확산되는 구조. 창조 인류 이스라엘 예수 -> 사회 세계 종말

보편사적 종말론(W. Pannenberg), 메시아적 종말론(J. Moltmann),

진화적 종말론(T. de Chardin), 해방신학의 종말론(L. Boff)

B. 종말론의 차원(구별되나 분리되어 기술할 수 없다)

a. 개인의 종말-개인적 종말론/인격적 종말론: 죽음, 중간기 상태, 육체의 부활

b. 역사의 종말-보편적 종말론: 재림, 천년왕국설, 죽은 자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c. 우주의 종말-우주적 종말론: 하나님 나라, 창조의 완성으로서의 세계 종말 새 하늘과 새 땅

C.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대두

a. 20세기 중반 이후 가장 활발한 신학적 토대의 중심에 놓여 있다.

b. 시대적 현상에 따른 관심의 증대

c. 한국교회의 종말 이해의 동향-종말론에 대한 무관심/시한부 종말론의 폐해

d. 기독교 선포의 중심이 종말이다. 종말론 불감증 환자로 만들면 안된다. 종말론적신앙에대해 말하라

e. 목회적 차원-성서적, 복음적 종말 이해의 필요성 요한계시록을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종말에 대한 선포가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종말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구원사(창조-타락-구원-종말-새창조)가 성경전체 드라마이고 역사이다. 종말은 더 나은 것이다. 회기과 복구나 완성의 차원이 아닌 더해지는 차원이 있다. 종말은 단순한 끝이나 재난이나 파멸의 소식이 아닌, 위협과 공포의 소식이 아닌 위로와 복음의 소식이다.

종말은 그런 의미에서 창조자체가 종말을 지향하고 있다. 창조가 과거완료형. Eschatological creation. 그 창조가 new creation. 창세기안에서이미종말에관한복음이들어있다. 창3:15.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객관적으로 실현되었다. 어느 시대가 마감될 때가 종말이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의 사역은 종말의 사역을 한 것이다. 귀신들린자가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라, 병자가 치유-새 하늘과 새 땅에서 종국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 지상에서 맛을 보여주신 것이다. 말씀선포와 축사등은 종말의 선취이다. 부분적 실현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종말이 실현 되었다. 우주적 사건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정치적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만 십자가와부활사건은우주적사건이며십자가와부활로우주가화해한다.

종말론적 신앙: 객관적 화해로 우리는 종말이라는 것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왔지만, 최종적 승리는 오지 않았다. Already와 not yet 사이. 우리의 시대는 종말의 현재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이다. 우리는 다 이겼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저주와 심판은 언젠가는 완전히 치유될 것. 종말적 신앙은 개인뿐만 아니라 크리스찬이 누릴 최대의 복이고 특권이다. 창조와 구원만이 복이 아니다. No more pain, no more sorrow. 오지 않았지만 십자가와부활사건으로과거완료형으로지금여기에서누리는삶이다. 우리의 삶이 어렵지만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길 수 있다.

우리는 고난을 경험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니 지금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실존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되듯이,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죽음 - 중간기 - 부활 - 천년왕국 - 최후심판

Ⅱ.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의 본질과 의미는 기독교신학의 근본 토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복음의 진수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개인적 종말론은 각 개인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다룬다.

1. 죽음에 대한 태도

-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 아마 유일한 존재로서...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특성들에 속한다. 그는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 인간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지닐 수 있는 존재이다.

A. 죽음을 잊어버리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사는 태도

- 이 세상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전부라 생각하고 주어진 삶에 탐닉하는 삶의 태도, 죽음을 망각하고 삶으로부터 배제하는 것.

- 죽음은 살아있는 자에게도 죽음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에피쿠로스)

B. 죽음을 의식하지만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

- 죽음에의 익숙함과 이를 통한 죽음에 대한 무관심, 무감각, 냉담한 태도

- 생명에의 무관심과 결합됨

C. 죽음은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죽음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태도

a. 영혼 불멸설 - 죽음의 치명성 상실, 하나의 축제의 의미를 지님.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

b. 윤회설 - 영혼의 육체의 무수한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유일회성과 진지함 상실

현재의 삶에 대한 무관심초래, 죽음의 치명성 약화, 죽음은 하나의 통과 과정, 물질적, 사회적 삶에 대한 무관심

D. 삶속에서 경험되는 죽음

a. 인간은 삶 속에서 언제나 죽음을 의식한다.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현존한다. 삶 속에서 경험되는 실재이며,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의 한 구성적 요소이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죽음을 통하여 살아간다.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b. 삶 속에 있는 죽음의 현실은 하나님의 부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현실과 삶의 결핍 상태를 가리킨다.

c. 죽음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죄 된 삶과 하나님 없는 이 세계의 현실 속에 현존하는 하나의 현실이다.

d. 하나님의 부재와 죽음의 연관성

- 롬5:14,21, 고전15:22, 엡2:15, 골2:13, 롬8:20, 롬5:17-18, 7:25, 고전1:10

e. 죽음은 삶의 현실이다. - 마4:16, 눅9:60, 마8:22, 요일3:14, 요일1:5, 3:15

f. 죽음은 단지 삶의 시간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간과 이 세계의 현실 안에 현존한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면서 산다. 그의 삶 속에서 죽음의 현실과 치명성이 경험되고, 죽음의 현실과 치명성 속에서 삶이 경험된다.

g. 죽음은 삶의 사건이요, 삶 속에서 하나의 현실로 경험된다. 질병과 고난과 노화와 좌절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이별과 고독 속에서 죽음의 현실과 치명성이 경험된다. 삶, 그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유한성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사랑하는 것들로부터의 분리, 그들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 속에서 진행된다.

h. 죽음의 슬픔과 치명성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비로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랑의 깊이 속에서 경험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삶과 존재에의 참여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는 물론 상대방의 존재가 죽음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의식하며, 그들의 사랑에는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깊이 속에서 죽음의 무성과 치명성을 경험한다. 사랑 가운데서,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의 치명성이 경험된다. 이 경험 속에서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한다.

i. 사랑의 깊음 속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유한성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죽음의 한계를 느낄 때 사랑은 더욱 강렬할 수 있다.

j. 죽음의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삶을 위하여 지혜롭지 못하다. 오히려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 앞에 서 있는 자기의 삶의 태도를 결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지만, 삶에 속한다. 삶을 종결짓는 마지막 사건이다. 죽음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으면서, 우리의 삶에 무의 그림자를 던지며,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자 위협한다. 이러한 죽음의 현실을 삶 속에서 의식하고 경험하며, 죽음의 현실과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의 존재규정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다.

k. 삶 가운데서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삶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l.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이웃의 죽음과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을 감각이 있는 사람, 죽음의 의식을 배제하거나 죽음을 미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사실을 인정하고 죽음을 의식하며 이를 통하여 죽음과 함께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무감각한 사회, 비정하고 냉혹한 사회를 인간미 있는 사회, 동정적인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 불의한 사회를 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

2. 죽음의 본질 - 존재의 절대적인 종국, 환생, 분리

A. 인간 존재의 궁극화로서의 죽음

a.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궁극적 완성 내지 결합이다.

b. 미완결 상태에서 진행되던 삶이 완결되어지며, 유동 상태에 있던 삶이 그의 궁극성에 도달하는 것을 듯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곧 어던 존재인지는 죽음의 순간에 결정된다.

c.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라, 궁극적 자기 정체성에 이르는 존재이다.

B.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

a. 인간의 삶이란 죽어가는 삶, 죽음에 이른 삶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끝, 개인의 종말로 이해되며, 부정적인 것, 파괴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 삶은 무의미하다. 삶 자체가 전부다. 삶 다음에 남는 것은 없다. : 소유의 인간상

b. 인격적, 정신적 존재 - 평생을 통하여 계속된 내적 성숙 과정의 완성이다. 존재의 성취다.

- 삶의 역사를 남기게 된다. 생물학적 존재는 점점 쇠퇴하지만, 그의 내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는 점점 더 성장한다. (고후4:16)

C. 하나님의 영원으로 돌아감

a.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는 죽음의 순간까지 불완전하며, 그들의 모든 노력과 행위는 단편적이고 양면적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인간의 모든 정체성이 완전히 드러난다. 죽음 속에는 인간은 그의 전 생애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그분 앞에서 자신이 생애를 책임져야 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이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b.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자기의 죄됨과 제한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자기의 존재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사건이 된다. 그는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속으로 들어간다.

c. 죽음은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인 동시에 긍정이다. 죄된 인간의 존재와 삶은 영원한 가치를 갖지 못하며, 영원히 존속될 수 없다. 인간의 죽음은 그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이요 심판이다.

d. 죽음은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계약의 성실하심 때문에 죄 된 인간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에 의하여 용납되고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선과 악이 병행하면서 투쟁 가운데 있던 그의 삶은 하나님에 의하여 긍정된다. 이제 그는 용서받은 자로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삶의 끝남과 단절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경험되지 않고 하나님의 긍정과 용납으로 경험된다. 그의 모든 죄 된 일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부정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에 의하여 긍정된다. 이제 그의 존재는 무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보존된다.

3. 자연적 죽음/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 죽음의 원인에 대한 문제

A. 자연적 죽음

a. 구약 성서적 근거 - 창25:7-8, 35:29, 대상29:28, 욥42:16-17, 5:26, 전3:1,20, 4:2, 사65:20, 슥8:4, 수를 다하고 죽는 죽음은 인간의 피조성에 속한다.

b. 자연적 죽음 그 자체는 하나님의 벌도 아니고 심판도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그러나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그의 자연적 죽음을 죄된 삶의 마지막 결과 곧 죄의 결과로서 경험한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 안에서 수를 누리고 당하는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죄의 삯이요, 그의 죄되고 무의미한 삶에 대한 저주와 심판으로 경험된다.

c. 프리드리히 슐라이허마허 “죽음은 유한한 인간 존재의 시간적 한계이며 자연적 끝이다.”

죄로 말미암아 이지러진 인간의 하나님 으식은, 자연적 죽음을 악한 것으로 경험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두려워한다. 타락한 인간의 죄된 삶의 총화이기 때문에 죄된 삶의 귀결과 이에 대한 벌로 경험된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자연적 악은(죽음)... 죄로부터 생성하지 않는다.”

d. 칼바르트

- 죽음은 “그 자체에 있어 심판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도 아니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 존재의 한계이며, 그 자체로서 인간의 자연에 속한다. 인간의 탄생은 비존재로부터 존재로의 넘어옴이라면 죽음은 존재로부터 비존재로의 넘어감이다.

- 죽음 그 자체와 사실상의 죽음은 구분된다. 사실상의 죽음 곧 인간이 현실적으로 당하는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다. 그는 죄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자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과 벌로 경험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저주와 죽음에서 자연적 죽음으로 해방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과 벌로서 경험하지 않고, 자연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비자연적 죽음으로부터의 이 해방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해방이기 때문에, 자연적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e. 폴 알트하우스 - “신학은 끝나지 아니하는 자연적인 생며으이 의미에서 죽음이 없는 원상태와 타락한 창조의 표징으로서의 죽음을 가르칠 수 없다.”

B. 죄의 결과 - 죄와 죽음의 인과관계

a. 구약성서적 근거 - 창2:17, 3:19, 시88:6, 삼상2:31, 시90:7-9, 신30:15, 28장, 레18:5, 겔18:21, 왕상21:20, 사2:1,20, 겔18:28, 암5:4

b. 신약성서적 근거 - 롬5:21, 고전15:21

- 죽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생명을 파괴하는, 극복되어야 할 반신적 세력

-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죽음의 세력 추방, 생명의 세계 회복 - 마10:8, 11:5

- 바울 :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니므이 형벌 - 롬6:23, 약1:15

죽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극복됨. 그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은 깨어졌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되었다.(고전15:54-55, 롬5:18)

- 요한문서 :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계 속에 가져오는 부활과 생명이다.(요5:24) 영원한 생명의 현재적 경험이 사랑에 있다면, 죽음의 현재적 경험은 사랑 없음과 미움에 있다. 여기서 죽음은 하나님 없는 인간과 세계의 죽음과 같은 상황을 가리키는 동시에 생물학적이며 자연적인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 곧 하나님 없는 삶 혹은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동시에 죄 된 삶의 마지막 끝으로서 오는 죽음을 가리킨다.

- 요한계시록 :

첫째 죽음(영혼과 몸의 분리)

둘째 죽음(최후의 심판 이후에 오는 영원한 저주와 하나님으로부터의 궁극적 분리)

c. 초대교부 : 죄의 보편성 강조

- 아우구스티누스 : 육체적 죽음 / 영원한 죽음

*죽음의 세 가지 단계

❶ 파라다이스에서 아담은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였다.

❷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고 사멸의 상태로 빠졌다.

❸ 죄를 폐기하며 자연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d.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

- 죽음의 세 가지 측면 : 영적 죽음, 육체적 죽음, 영원한 죽음

- 원인 : 사탄의 유혹, 인간의 죄, 하나님의 진노 => 서로 맞물려 있다.

-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영혼의 죽음 속에서 느껴지고 육체의 죽음 속에서 경험된다.

- 영적 죽음 : 영혼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마8:22, 엡2:1-3)

- 영원한 죽음 :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분리(계20:14)

-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보는 기독교의 죽음관은 점진적 발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 구약 초기 : 죽음을 육체의 생명의 종국으로 보는 경향 => 유기적 통일체로 보는 인간론에 근거

▸구약 : 죽음을 인간 존재의 소멸이나 완전한 종국으로 보지 앟ㄴ았다. 생명의 힘이 가장 낮은 정도에 있는 상태, 살아있는 것의 그림자와 같다. “죽은 자는 존재하기를 완전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영역, 스올에서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존속한다. 이 존재는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의 지속이다.” 죽은 자는 살앗을 때와 같은 육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창37:35,42:38, 왕상2:6, 겔32:27)

- 스올 : 음부로 번역됨. 의인과 악인의 구별 없이 모든 죽은 자가 가는 장소다. 지하에 있는 망각의 장소, 어둠의 땅(욥10:21-22)이다. 징벌도 보상도 없으며 일도 없고 계획도 없다.(전9:10) “죽음 후에 일어날 것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며 죽음의 종국성에 대한 표현이다.”

- 죽음 후 “인간은 음부에서 존재하나 삶이라고 불릴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죽은 자는 살아있지는 않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 구약성서는 죽음을 하나님과의 최종적인 분리로 간주하지 않았다. 죽음을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권 밖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나 둘워해야 할 것, 그리고 피해야 할 것으로 취급했다.(시6:1-5, 88:1-14, 사38:1-20)

- 죽음 후의 삶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호흡을 상실하고 음부에서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존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약 후기에 부활에 대한 소망이 제시되고 비극적 죽음관으로부터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죽음관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개념이 발전하게 되었다.

- 예수 당시 유대교 안에는 죽음과 그후의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나타났다. 바리새파(육체의 부활, 천사와 영의 존재 믿음), 사두개파는 이를 거부했다. 죽음을 개인의 소멸로 간주했다. 에센파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신약 - 예수의 부활이 중심, 죽음과 그 후의 삶에 대한 교훈이 중심이다.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의 전환이다. 잠으로 표현했다.(마9:24, 요11:11, 행7:60, 살4:13) 죽은 자의 영혼은 중간상태에서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 육체적 생명의 종결로 설명하거나(마2:20, 막3:4, 눅6:9)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암시하고 있다. 신약은 육체의 영혼을 구별하고 죽음을 육체와 영혼으 ㅣ분리로 이해하는 등 헬라적인 용어를 사용했으나 그 개념 자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대립적 이원론 배격 예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신자들에게 공포의 힘을 상실했다.

C. 자연적 죽음인가? 죄의 결과인가?

a. 타락 이전의 본래적 상태에 있어서 죽음은 창조질서에 속한 자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유한하다. 유한성은 피조물의 표지이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에 속한다. 그러나 죄된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자연적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인간이 이 세계 속에 실존하는 한 그의 죽음은 언제나 자연적인 것이다.

b. 인간은 본래 유한한 존재 곧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죽음 그 자체는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죽음을 죄에 대한 벌로, 하나님의 저주로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죄인의 세계에서 단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과 저주로 경험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을 때 우리는 죽음을 더 이상 죄에 대한 벌과 저주로 경험하지 않고 자연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비자연적인 죽음에서 자연적 죽음으로의 해방이다. - 칼바르트 -

c.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죽음도 비자연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죽음은 언제나 비자연적인 것, 본래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d. 비자연적인 죽음은 삶 속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강제적 죽음, 폭력적 죽음을 거부하고, 모든 생물들이 상대적 의미의 자연적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e. 충만한 삶은 물질적 결핍이 없는 삶,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자기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며 수를 누리고 죽을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삶, 올바른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 목적과 의미가 있는 삶(인간의 유한한 삶이 하나님의 목적과 역사에 통합될 때 죽음의 허무를 넘어서는 영원한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삶의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될 때 가능하다.(감사와 기쁨)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믿고 희망하는 삶

Ⅲ.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 : 장소 문제 / 상태의 성격

중간적 장소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 기간에 인간의 영혼은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는가? 의식을 갖고 있으며 형태가 변화하는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가? 그렇지 않은가?

로마 카톨릭 교회 : 연옥설 / 개신교: 거부

개신교 정통주의 : 중간 상태의 영혼은 의식을 갖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 영혼 수면설

소치니스 주의 : 영혼 멸절설

일부 성서신학자들 : 죽음의 순간 부활설

1. 영혼 불멸설

- 영지주의 : 영육 이원론

- 초기 기독교 : 몸의 부활

a. 죽음과 보편적 부활 사이에 의로운 자들과 순교자들이 거할 중간상태에 대한 유대 묵시사상적 표상

b.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에 있으며, 그와 결합되어 살 것이라는 희망(살전5:10, 롬14:8)

c.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

▸플라톤 이원론 - 칸트, 키에르케고르

이데아

현상계

비가시적, 불가변적, 불멸적, 초월적,

영원, 정신, 영혼, 하늘, 남자, 문화

가시적 가변적 가멸적 내재적 시간

물질 육체 땅 여자 자연

=> 만날 수 없음 대립과 분리 불연속성이 강조 된다.

▸아리스토 텔레스 유기적 이원론 = 연속성 강조, 종합, 화해 강조

- 아퀴나스, 헤겔, 판넨베르크

1) 영혼선재설 :

영혼이 하데스에 머물러 있음 -> 망각의 강을 건너 땅으로 옴 -> 삶은(육체는) 영혼의 감옥

*철학은 망각했던 것을 되살려 준다.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 죽음을 향해 동경함을 가진다.

2) 영혼불멸설 :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육 이원론의 문제

- 신령주의, 신비주의

- 금욕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 중독

*분설 : 분리의 가능성 자체가 잘못됨, 성서적 근거가 잘못됨.

(히)루아흐 = 영 = (헬)프뉴마 = 하나님

(히)네페시 = 혼 = (헬)푸시케 = 인격

(히)바살 = 몸 = (헬)사르크스, 소마(그리스도 몸, 교회, 부활체) = 자연

❶ 육체를 포함한 전인

❷ 인간의 죄 된 본성

=> 영혼과 육체는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 전인적 창조, 범죄, 구원, 부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 영과 육이 전인적으로 인도함 받는다.

1)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그 이후의 발견

- 죽음 : 생명의 단절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의 전이

- 삶 : 순환 운동, 영혼의 지속성 주장

- 생명 : 영혼과 몸의 결합/죽음 : 죽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

- 죽음 후에도 영혼은 존속하며, 새로운 육체와 결합항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 영혼 선재설

- 회상설(상기설)

- 육체는 영혼의 감옥, 무덤이다.

-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 = 해방, 영혼의 구원, 영혼의 본향으로의 귀향

- 영혼은 영원하며 지속적이다.

- 철학은 죽음에의 동경이다. 철학의 목적은 죽음이다.

- 죽음은 축제와 같은 것이다. 영혼의 해방의 완성자이며 영혼의 위대한 친구이다.

2) 영혼불멸성의 문제점

- 현대신학, 인간학, 심리학, 행동학 등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

- 인간 :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이다. 전체로서의 인간이다.

- 행동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는 결합되어 있다. 양자는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 인간 속에는 육체에 대하여 독립된 영혼이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 이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언제나 함께, 동시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인간의 성격과 사유와 행동을 결정한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사유의 활동은 인간의 정신적 조건은 물론 육체적 조건에 의존하며 육체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육체적 활동도 영적, 정신적 조건에 의하여 결정된다.

- 영혼불멸설은 영혼과 육체 차안과 피안의 이원론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은 물질적이며 육적인 현시로가 차안의 구체적인 사회 현실을 경시하거나 천시하는 잘못된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조장한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과 비교할 때, 일시적이고 허무하며 썩어 없어질 인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때, 육체를 천시함은 물론, 인간의 실존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물질적 현실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된다.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 영혼불멸설은 인간의 구체적 삶과 삶의 현실, 이 세계 안에서 지금도 신음하는 피조물들 고난과 슬픔, 생명이 파괴와 착취에 대한 무관심a을 조장하고, 영적 피안적 현실을 동경하고 추구하게 한다. 현실의 세계에 대하여 등을 돌린 삶의 태도를 조장하며, 이를 토앟여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을 방지하고 또 방조하는 기능을 행사하게 된다. 현재의 삶은 피안에 대한 준비일 뿐이라는 표상은 삶의 거부의 이론이며, 종교적 기만이다. 그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모순되며, 이런 점에서 종교적 무신론이다.

-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자기폐쇄성, 탈 사회화, 탈역사화의 위험, 무신성, 무신론이 숨어있다.

- 현대 신학자들은 대부분 영혼불멸설을 반대한다.

- 기독교의 가장 큰 오류들 중하나로 간주된다.

칼 라너 “죽음은 전체로서의 인간에게 마지막을 정립힌다.” - 영원한 생명은 인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자질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밀 부룬너 “오직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 속에 근거한 참으로 기독교적이고, 성서적인, 그리스도론적인 불멸의 사상을 인정한다.” - 플라톤적 영혼불멸설을 거부한다.

3) 영혼불멸설과 죽은 자들의 부활

a. 인간 자체 안에 주어져 있는 불멸의 것을 인정하고 신뢰한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하나니므이 능력과 은혜를 신뢰한다.

b. 인간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통찰/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행위에 대한 희망

c. 인간의 육체를 천시하고 신적 영혼만의 영원한 존속을 신앙/육체를 포괄하는 인간 존재 전체의 되살아남과 영원한 생명을 신앙

d. 육체 없는 영혼만이 고려의 대상/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인간이 가졌던 모든 관계들과 삶의 역사가 고려의 대상

e. 인간의 구체적 삶의 역사와 그것을 구성하는 삶의 물질적, 사회적 현실이 간과됨/육체를 가진 인간의 삶의 역사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됨. 인간 삶의 물질적 사회적 현실이 고려됨.

f. 이 세계에서의 삶은 영원한 세계에 대한 준비과정이다. 삶의 유일회성과 진지성이 약화된다. 부활 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이 세계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삶이다. 이 세계에서의 삶은 단 한 번뿐이므로 삶의 진지서오가 삶의 의욕이 강화될 수 있다.

g. 물질적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창조적 의식이 약화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삶 속으로의 개입이 마비되며,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 사회적 현실로부터의 내적 퇴각, 이 세계로부터 등을 돌린 삶의 태도, 탈 세계화, 탈역사화의 특징을 지닌다.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현실 속으로의 개입, 의와 사랑과 자기희생의 윤리적 특성을 갖는다.

h. 죽음은 신적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의 해방이요 축제와 같은 것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기다린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그의 사랑하는 피조물들의 마지막 적으로 간주된다. 죽음의 세력의 극복을 기다린다.

2. 연옥설

1) 연옥설의 유래와 내용

2) 연옥설의 타당성과 문제점

3) 연옥의 현대적 해석

=> 영혼불멸설의 한 형태, 연옥에서 육체 없는 영혼의 영원한 존속을 전제하고 있다.

3. 중간기 상태

1) 죽음 안에서의 부활 - 칼라너, 로핑크, 그레쉐이크

- 육체 없는 영혼은 실재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는 결합되어, 하나의 전체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형성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 그 인격적 존재로 죽음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성된다. 그것은 육체의 형태를 갖지 않으며 육체의 제한성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형식으로 변용된다. 이 변용은 바로 죽음 속에서 일어난다. 마지막 종말의 날은 단순히 역사의 연대기적 시간의 마지막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잇는 인간의 삶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모든 죽은 자들에게 동시적으로 한순간과 같이 온다.

- 한 인간의 죽음의 순간은 종말의 마지막 시간이 앞당겨 일어남(선취)이요. 역사의 종말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순간이다. 모든 개인의 죽음 속에서 개인의 완성은 물론 인류의 역사의 완성과 세계의 종말이 일어난다.

- 종말은 역사의 미래가 아니라 개인의 죽음 속에서 앞당겨 일어난다. 죽음은 시간의 영역에서 영원 속으로 영원한 현재 속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는 폐기된다.

- 죽음의 순간은 세계와 역사의 한 부분이 완성에 이르는 종말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마지막 날의 현실 곧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과 완성의 현실을 경험한다. 각 사람의 죽음의 순간에 세계의 종말이 앞당겨 일어나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최후 심판이 일어나고, 이 과정을 거쳐 죽은 자는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장점 -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불멸과 몸의 부활을 결합시킨다. 종말의 마지막 완성을 단순히 역사의 미래에서 찾지 않고, 역사의 현실과 과정 속에서 찾는다. 육체 없는 영혼이 잠정적으로 머무는 중간 상태 곧 연옥에 대한 생각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연옥에 대한 생각이 철폐될 경우, 연옥에 머무는 자들을 위한 미사와 면죄부가 불필요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는 1979년 죽음 속에서의 부활을 거부했다.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흔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칼 라너 - 몸과 영혼을 동시에 가진 인간의 단 하나의 그리고 전체적 완성이 죽음과 함께 직접 일어나고, 육체의 부활과 보편적 심판이 세계의 시간적 역사를 따라 일어나며, 양자가 각 사람들의 개별적 심판들의 총화와 일치한다는 생각은 이단이 아니다.

*레오나르도 보프 -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영원 속으로 넘어감이 부활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죽은 자들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문제점

- M. Schmaus : 보편적 부활과 함께 올 죽음의 세력의 마지막 극복,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메시아적 전망과 희망이 약화될 수 있다. 죽음 속의 부활은 인간의 몸과 아무 관계가 없는 단순히 인간의 영적, 정신적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은 인간의 신체적, 물질적 현실에 대해 적극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지 영적인 것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 J. Ratzinger : 영혼불멸설의 숨은 회복을 초래할 수 있다. 죽음 속의 부활은 그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할 역사와, 완성되지 않은 채 계속되는 역사의 간격을 해명하지 못한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한 개인의 삶의 시작과 현재의 미래, 그리고 죽음 너머에 있는 초개인적인 역사의 완성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며, 어떤 의미에서 개인의 죽음과 역사 전체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역사의 마지막에 올 최후의 날은 개인의 죽음의 순간과 동일시된다.

- W. Pannenberg :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과 연결되어야 한다. 신체성이 파악될 수 없다. 인류의 완성과 관계없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개인의 구원의 완성과 인류의 구원의 완성의 연관성은 미래에 대한 성서의 희망의 본질적 요소이다.

2) 전적 죽음

- 20세기 초에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됨,(칼바르트, W.Elert, 알트하우스, O.Cullmann, H.Thielecke, E.Juengel, H.Ott 등)

- 성서적인 인간론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의 죽음에 있어서 육체와 영혼이 전적으로 죽는다.

*칼바르트 - 죽음다음에 인간의 영혼이 남아서 나비처럼 무덤 위를 날아다니다가, 어딘가에 보존되어 죽지 않고 계속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교적인 것이다.

*W.Elert - 죽음 다음에 인간에게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Jungel - 죽음은 삶의 상황들을 전적으로 중지시키는 무관계성의 사건이다.

*H.Ott - 죽음과 함께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폐기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간에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의미의 담지자로 계신다.

*P.알트하우스 - 인간의 전적 죽음을 말하는 동시에, 죽음 자의 새로운 현존의 형태를 말함으로써 완호된 입장을 취한다. 몸과 영혼은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몸은 영혼의 얼굴, 눈, 태도, 몸짓이요 영혼의 표현이며 형태이다. 죽음은 몸은 물론 영혼에도 해당한다. “영혼으로부터 몸이 사라지며, 영혼도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로부터 생명으로 불러낸 인간의 인격을 간직하시며, 그에게 새로운 현존의 형태를, 곧 여기 땅위에서와 같이 다시그 ㅁ하나의 영적-정신적-신체적 형태를 주신다. “죽음이 몸은 물론 인간 전체에 해당하는 것처럼, 부활도 인간 전체에 해당한다.”

- 죽음 후에도 죽지 않고 존속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은 인간의 전적 폐기이다. 죽음 후에도 남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뿐이다.

-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와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 활동을 드러내는 점에 있어서 타당성을 가진다.

▸문제점 - 만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폐기되었고 완전히 무로 돌아갔다면, 마지막 부활에 있어서 그의 정체성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고 또 확인될 수 있는가? 인간의 그 무엇이 부활하게 되는가? 과연 누가 부활하게 되는가? 죽은 자들이 잠자고 있다는 성서적 진술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살아있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은 파괴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삶의 의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잇을 것인가?

3) 영혼 수면설 :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

- 루터 :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났으며, 의식과 자각이 없는 깊은 잠의 상태이다.

죽음이 인간에 대한 그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의미. 죽은 자들은 잠자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살아 있는 자들의 삶에 대해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

- 성서적 근거 : 신약(막5:39, 요11:11, 행7:60, 고전15:20, 행13:36, 엡5:14, 살전4:13, 살전4:14, 벧후3:18), 구약(신31:16, 삼하7:12, 왕상14:20, 시13:3, 단12:2, 사114:18, 렘51:57) => 스올에 잇는 죽은 자들의 그림자와 같은 상태를 잠자는 상태로 묘사

- W.Trillhaas : 영혼의 잠자는 상태에 대한 이론은 신약성서의 증언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신약성서의 구절들은 세상을 떠난 영혼의 상태와, 그것이 머무는 장소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 : 바울(빌1:23, 롬4:19, 살전4:16)

*이종성 : “죽음은 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을 말한다.”

-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과 사귐 속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 잠자는 상태에서 그들은 살아있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로 구서오딘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통 가운데 잇다.

▸비판 -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눅23:43, 벧후2:9)

- 신자는 죽은 즉시 천국에서 완전한 의식을 가진 채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과 축복의 상태를 누린다.(눅16:19-31, 빌2:21-23, 살전5:10)

▣ 결론적 제안

성서는 죽음 후의 중간 상태에 대한 일관된 이론이 없다. 중간 상태에 대한 다양한 진술들이 있으며, 이 진술들 가운데는 모순되는 것들도 있다. 죽음 후에 인간은 수면 상태에 있다고 보는 진술들이 있는가 하면, 의인은 하늘나라에 있고 악인은 지옥에 있다는 진술도 있다. 수면설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수면설은 생명의 중단을 뜻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잠자는 상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통 안에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잊어버릴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죽은 자들을 회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사귐 속에 살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들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김명용 “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사상”

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부활 (살전4:6-17, 고전15:51-52, 빌3:20-21, 고전15:27, 골3:24, 엡4:30, 요6:44, 6:54, 행4:2, 23:6, 26:23 / 단12:3, 사25:19, 25:8)

➁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 - G.Greshake, 로핑크, 크렌머 등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

1) 바울 - 고후5:1-4,8, 고전15:53-54(천국에서의 삶은 육체 없는 영혼만의 삶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고 사는 삶)

2) 복음서 - 요11:25,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16:22-24, 마5:29-30, 마10:28(영혼=I), 계6:9, 눅20:27-40, 제4마카비 7:19, 쿰란 문서 : 죽음 이후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과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다는 믿음, 마22:30-부활 때 의로운 자는 천사와 같다 / 눅20:36-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은 천사와 동등하다. 눅23:43(낙원-제2에녹서8:1 셋째 하늘, 고후12:4), 막9:2-8 변화산 사건

3) 계시록 - 계6:9(제단 아래), 6:11(흰두루마기), 7:9(흰 옷-제2에녹서 22:8, 이사야 승천9:2, 제1에녹서 62:15) - 흰옷을 입고 어린 양을 찬양하는 자들은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하늘에 삶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존재로 살고 있다.

4) 에베소서, 벧전 - 엡2:5-6(이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 벧전1:3-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

5) 속사도 교부들 - 이그나티우스(즉각적인 몸의 부활), 폴리캅(영혼과 육체의 부활)

- 역사의 마지막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희망 사상과 동시에 죽음 속에서 부활이 일어난다는 사상이 함께 있다.(유대 문헌과 성서 및 초기 교회 문헌)

➂ 중간기와 마지막 날의 조화

1)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품이 잠들어 있다. - O. Cullmann

/ 죽은 자들이 이미 천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수많은 성서의 가르침과 충돌한다.(빌1:23-24, 고후5:1-4, 히11:6, 눅23:43)

2) 유대 묵시문학적 세계관인 마지막 날의 부활이라는 관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 불트만 -

영생과 부활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실존적 결단 속에서 죽음 속에서 일어난다. (로핑크, 몰트만, 판네베르크, 큄멜, O.Cullmann)

3) 죽음의 순간과 역사의 마지막 날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적 차이가 없고 한 순간이다. - 칼바르트, 에밀부룬너 => 실제로는 동일하지 않다. 영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역사의 시작과 역사의 완성은 동일한 순간이 아니다. 성서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사고 이다.

4) 죽은 자들은 완전한 육체성을 아직 갖고 있지 않은 영혼으로 존재하고 있다.

- 1979 가톨릭 교리성의 발표 : 죽음 이후 영적 실재는 완전한 육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 J.Razinger : 부활의 삶

- 약간 변형된 형태의 영혼 개념, 마지막 날의 부활을 강조한다. 넓은 의미의 헬라적 요소 아퀴나스의 영혼 개념은 육체가 없는(육체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고 육체성을 요구하고 있다.) 영혼이다.

*안토니 후쿠마 - 인간의 저인성을 강조하면서도 중간기 상태에서의 잠정적인 분리 강조

“비록 인간이 지금은 영육 통일체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 통일체가 죽음의 때에는 일시적으로 분리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5) 죽은 자들은 부활한 상태로 있으나 역사의 마지막 날의 지상으로의 부활과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 고전15:51(역사의 마지막 날) : 고후5:1(죽음의 순간에 영원한 하늘의 처소를 덧입는다)

- 바울의 주장(고전15:43-54) : 신령한 몸(하늘의 삶에 합당한 삶, 마지막 날에 입게 됨)/ 고후5장(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사상이 뒤로 물러가고 하늘의 육체를 죽음에서 얻게 될 것 기대, 영광스러운 몸): 따라서 고전15장과 고후5장 사이에는 근본적인 사상의 차이가 없다. 천상에 있는 의로운 자들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육체를 지니고 죽은 자들은 천상에서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부활체를 갖고 있다.

- 그리스도의 재림과 역사의 완성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만의 희망이 아니고 이미 죽어 그리스도의 품에 있는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 죽은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낙원에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들의 영혼은 부활체를 입고 있다. 그들은 아직 지상으로 부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으며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고 지상으로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그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고 그들은 지상의 사람의 눈에는 무덤 속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의 구원은 땅위에서의 구원의 완성과 합쳐져야 하고 하늘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랫동안 그 영광이 짓밟히고 훼손된 이 땅위에서 빛나야 한다.

*J.크렌머 - 세례시 부활/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마지막 날의 부활

Ⅳ. 죽은 자들의 부활

1. 예수의 부활

2. 영적인 몸으로의 부활

3. 죽은 자들의 부활의 현재적 의미

1)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고백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나타낸다.

2) 죽음과 함께 삶의 모든 것이 망각의 영역으로, 무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 각자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숨김없이 되살아날 것이다.

3) 죽은 자들의 부활은 단순히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 가운데서 지금 앞당겨 일어나고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주검의 세력에 대항하도록 고무하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주검에 대한 저항하는 기능, 비판적이며 해방하는 기능을 갖는다.

4) 몸의 부활은 인간의 몸이 그 안에서 살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의 새 창조를 전제한다. 새 창조의 물질성을 지키며, 하나님의 통치는 신체적인 것과 손으로 붙들 수 있는 것을 탈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완성한다.

몸의 부활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인간과 자연만물이 평화 가운데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를 지향하며,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형성될 것을 요구한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삶은 물론 모든 공동체적 삶은 언제나 신체적이고 물질적이며 자연의 생태계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신체적이며 물질적인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 삶의 모든 영역은 물론 자연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부활의 현실의 빛과 표징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의 세계와 자연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하고, 온 인류와 피조물들이 공존하는 창조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노력해야 한다.

몸 없는 부활을 말하는 심령주의적, 영적 부활의 표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자연 없는 인간 중심주의적 부활의 표상을 거부해야 한다. 인간의 몸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이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공동체를 이루는 우주적 생태계적, 신체적 변화를 시사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종말론은 육체를 영혼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물질을 정신의 지배에서, 자연을 인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이 각자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사는 새 창조의 세계를 희망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상황들의 우주적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시작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인격적 종말론으로 끝나지 않고 우주적 종말론으로 확대된다.

몸의 부활은 인간의 육체와 물질에 대한 긍정이다. 마지막 구원은 인간의 영혼의 영역에서는 물론 육체와 물질과 자연의 영역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몸과 영혼의 통일성 안에 있는 인간의 부활된 생명, 하나님의 길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과 이웃 사람들과 온 우주와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젊은 육체이다.”

Ⅴ. 종말의 징조들과 그리스도의 재림

1.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요한 계시록의 역사적 배경

A.D. 90년대 도밑아누스 황제 시대의 황제숭배 강요와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황화하여 선포한 것이다. 로마제묶에 대한 비판 정신이 깔려 있다. 로마제국은 군사적인 정복으로 확립된 황제의 강력한 정치적 독재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를 통치 이데올로기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다.

① Pax Romana의 유혹(17:3) - 음녀

② 황제숭배의 강요(13:4) - 짐승-도미티아누스(주화 하나님으로 부를 것 강요, 황제신전, 16장 19장에 거짓 선지자로 불리는 두 번 째 짐승이자 땅의 짐승이 첫 번째 짐승인 바다 짐승의 형상을 세우고 예배 강요)

③ 사도적 복음의 깊고 절실한 상황화 - 로마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거의 문학, 세속적 권력의 상대화 - 하나님과 하늘에 대한 환상을 보여줌 - 신성모독이며 로마권력의 멸망 예언

2) 요한 계시록의 성격

① 서신 형태로 보내어진 묵시적 예언(1:1) - 아폴칼립시스(계시)/예언(1:3)/서신

② 정교한 문학작품 - 요한은 자기가 받은 환상의 경험을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구약성경의 예언의 틀, 예수 전승, 사도적 케리그마, 당시 로마제국의 상황, 당시 아시아 교회들이 처한 문제들에 비추어 신중하게 해석하여 완전한 문학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

=> 로마-바벨론의 음녀/짐승 : 정치적 만화

▸이미지들의 해석 : 문학적 장치, 구약과 고대 근동의 신화, 로마 제국의 표상,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 등의 이해 - cross-reference의 구조, 평행들과 대조점들과 암시들을 검토

사탄(창3:14 뱀, 사27:1 리워야단)

③ 피해야 할 실수 두 가지

- 계시록의 이미지들을 시공을 초월한 상징들로써 이해하려는 시도를 피해야 한다.

- 지나치게 문자적 해석을 시도해서도 안 된다.

3) 계시록 해석법

① 과거적 해석 - 과거, 사도 요한 당시 초대교회와 로마제국의 투쟁을 묘사한 것(자유주의 신학자들)

② 교회사적(역사적) 해석 - 요한의 때로부터 대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전개 전체에 대한 파노라마 식 예언(요아킴, 루터, 칼빈) 저술 당시에는 미래였으나 교회 역사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

③ 비유적, 상징적 해석 - 종말에 관한 예언서가 아니다. 기독교의 선과 악이 벌이는 장기적인 대결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④ 미래적 해석 - 1-3장은 요한 당시 상황, 4-22장은 교회의 입장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에언적 사건(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그리스도 재림 전후에 일어날 미래적 사건으로 해석

2. 종말의 징조와 그리스도의 재림

Ⅵ. 천녀왕국설

- 전천년설(문자적 해석) / 후천년설, 무천년설(상징적 비유적 해석)

- 사도 시대, 초기 교부 시대 => 전천년왕국설이 지배적

- 4C말 : Tyconius와 Augustine의 계시록 재해석 => 무천년왕국설

- 17C 전천년왕국설 부흥

- 20C : 세대주의적 전천년왕국설 등장 이후 천년왕국설 논쟁이 시작되었다.

- 그리스도의 재림 방법과 천년왕국설의 문제는 성경관과 구원관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 해석의 차이의 문제이다. 재림의 시기와 사건의 순서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시적으로 그리고 큰 영광중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 이 가운데 어느 한 견해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 모두가 성경과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이론의 여지없이 결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성경해석이나 신앙전통에 비추어 문제점이 적은 이론을 택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1. 천년왕국설

1) 전천년왕국설

2) 후천년왕국설

3) 무천년왕국설

❐ 참고 - 천년 왕국 (millennium)

· 계 20:1~10 관한 해석

- 문자적 : 전천년설

--------------------> *후천년설은 모호하다

- 상징적 : 무천년설

1) 무천년설 (Amillennialism)

· 학자들 : 어거스틴, 루터, 칼빈, 카이퍼, 바빙크, 벌코프

· 주장 : 계20장의 천년왕국이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단순한 신약시대의 상징이다.

*신약교회 = 상징적 천년왕국

· 이유 : 계시록의 말씀만 가지고 천년왕국을 주장할 수 없다.

❶ 신약성경 다른 곳에 천년 왕국이라는 것이 없다.

❷ 성경 전체적으로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다. (요5:28)

=> 이러한 사건 이후가 세상의 종말이고 끝이다.

· 반론 :

❶ 요한 계시록은 독특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

- 신약성경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을 지라도 천년 왕국이 가능하다.

- 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계22장)

요한 계시록에 천년왕국의 표현이 6번 나오는 데 이것이 교회로 연결 시키기에는 부족하다.

❸ 사탄이 결박된 시대라는 표현과 해석의 문제가 생긴다.

- 신약교회에 사탄의 결박이 포함되지 못한다.

2)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 무천년설의 반론에 대한 반론 : 무천년설과 의견이 비슷하다.

: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 요한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있을 수 있다. 이 왕국은 예수님 재림 후에 있을 것이다.

->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사회의 복음이 증거 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진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신약시대 이후에 큰 황금시대이다.

*문자적이지만 상징적인 견해도 가지고 있다.

· 학자들 : 어거스틴, 찰스 하지, 윌리암세드, 로버트 뎀리, 벤자민 워필드

· 주장 : 신약에서 천년왕국의 말이 없으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계20장의 사탄의 결박이 신약 교회전체가 아니고 기독교 복음이 꽃피워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때 결박당한다.

· 반론

❶ 성경의 종말의 징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❷ 계19장, 20장의 순서와 맞지 않는다.

❸ 세상이 좋아진다고 주장하는 데 현시대는 불안하게 흘러가고 있다. (핵전쟁, 마약, 환경오염등) 신약시대 이후 복음의 황금기와 대치된다.

*현재는 많이 선호하지는 않는다.

3) 전천년설 :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1) 세대주의 적 전천년설 - 성경을 철저히 문자적으로 본다.

❶예수님의 초림 -> ❷신약교회시대 -> ❸예수님의 공중재림(휴거)가 일어난다. : 어느 순간 갑자기 : 믿는 자들을 대리고 가신다. -> ❹지상에서 7년 대환란이 일어난다. : 지구의 만들어진 ↳ 3년 반 : 적그리스도등장

*유대인들의 대 회심이 일어난다.

(계6~18장)

*하늘에서는 혼인잔치가 벌어진다.

(믿는 자들과의 잔치)

이후의 엄청난 환란이다. -> ❺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지상 재림하신다. : 천년왕국의 시작 -> ❻천년왕국 : 성전에 세워지고 제사제도가 회복되고 제사를 드리게 된다. : 실제 천년동안 지속된다. (이스라엘의 땅) 에스겔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다.

-> ❼천년왕국 후에 악인의 부활하고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 영혼이 사탄과 악인들은 깊은 구덩으로 빠진다. -> ❽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히 지속된다.

하늘: 어린양의 혼인잔치

7년 대환란

아마겟돈

교회시대

3년반

3년반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함.

휴거

적그리스도

지상재림

성전

악인의 부활

*대환란을 강조한다. (단9~12장, 마) - 사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대 환란이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강조한다. (성전의 회복, 이스라엘 백성의 회심)

-> 구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다.

· 반론

- 예수님의 재림은 한 번있는 것이지 두 번 오는 것이 아니다. : 성경에서 이렇게 나누어놓지 않았다.

- 구약의 예언(구약의 예배, 성전등)의 성취로 보면서 그대로 회복되는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히브리서의 단번에 제사가 무효가 된다.

=> 구원사적인 문제 =>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약화시킨다.

· 학자들 : 스코필드, 월보드, 팬트코스

2) 역사적 전천년설

-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전에 있을 것이다. : 전체적인 의미가 세대주의 적 전천년설과 같다.

· 차이점 : 이스라엘을 중심하는 구약의 회복이 아니고 하나님 왕국으로서 신약적 성격의 나라

· 학자들 :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엥겔, 고대, 랑게, 알포트, 엘리콧

· 대환란 -> 예수님의 재림 ->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멸하고, 천년동안 사탄이 결박된다. -> 아마겟돈 전쟁 후에 사탄은 불 못에 던져진다. -> 성도들이 왕 노릇한다.

· 반론

- 요한계시록 외에 천년왕국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 신약의 종말론을 볼 때 천년왕국의 필요성이 희박하다.

- 예수님이 재림 후에 임시적으로 천년의 기간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 지옥 교리의 중요성

❶ 예수님이 친히 선언하신 진리이다.

-> 멸망의 교리에 대해서 책임지신다.

❷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에 대한 바른 개념을 주신다.

❸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를 알게 해주신다.

❹ 회개와 믿음의 정당한 계기를 마련한다.

*문자적으로 실현될 곳이다.

*천년왕국설 논쟁

- 후,무 천녀설 : 구약 예언에 대한 상징적 해석, 영적 해석/전천년설 - 문자적 해석

과도기적 통치기간

- 후- 지상천국/무- 죽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

후- 의와 평화의 황금기/무- 교회시대 전체

- 후- 지상 왕국 : 전진적인 것, 그리스도의 가시적 임재 없는 지상통치/전-격변적인 것, 그리스도의 직접 지상통치

- 후- 낙관적, 긍정적 세계관, 역사관/무, 전- 배교, 타락 등 비판적 역사관

- 세계의 복음화, 평화의 황금기 후 재림/전, 무-그리스도 재임의 임박성

*주요 쟁점

① 성서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철저한 미래적 해석/역사적 전천년설- 미래적, 역사적 해석 결합

후, 무- 영적 해석/전- 문자적 해석(세대주의는 구약에 근거/역사적 전천년설은 신약에 근거)

② 계시록과 공관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있을 사건들을 단일 사건으로 보는가(무)? 복수 사건으로 보는가(전)?

③ 계20장의 부활에 대한 해석 - 동일한 종류의 부활인가(전)? 다른 종류의 부활인가(후,무)?

계20:4 (육체적 부활:전)/ 1회 육체적 부활(무)

- 사단의 결박시기 : 그리스도의 초림 때문인가(무,후)? 재림 때인가(전)?

-----------------------------------------------------------------------------

2. 휴거설/환난설

- 명확한 결론이 내려진 주제가 아니다.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휴거의 시기, 환난의 성격, 환난 시 교회의 존재 유무

1) 환난전 휴거설(미래주의적 해석)

- 교회가 대환난에 앞서 휴거되어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

- 대부분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 초기 교회는 환난전 휴거설에 관한 명확한 진술이 발견되지 않는다.

- 미래주의적 해석이 등장 : Darbyism, 세대주의

- 살전4:16-17의 해석

-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예언대회, 스코필드 관주 주석, 성서학원 운동 등을 통해 확산

- 근본주의 신학계에서 수용 : J.Brooks, A.Pierson, C.I.Scofield, R.A.Torrey등

▸성서적 근거

➀ 살전5:9, 계3:10 -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된다.

➁ 교회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계7:9-14)

➂ 휴거에 대한 본문(요14:1-14, 고전15:51-58, 살전4:13-18)과 재림에 관한 본문(24:4-31, 막13:24-27, 눅21:25-27, 계19:11-21)등이 내용상 차이가 난다. 즉 휴거와 재림은 두 별개의 사건이다.

▸강조점

➀ 대환난의 독특성을 강조 -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의 시기인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 대환난의 기간(단9:27)을 7년으로 간주

➁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➂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환난 직전)과 지상 재림(환난 후)

3회의 부활 : 휴거 때 죽은 성도의 부활/대환난 끝에 있을 환난 동안에 죽은 성도의 부활/천년 왕국 끝에 있을 불신자의 부활

➃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 강조(마24:36)

*문제점 - 이스라엘과 교회 구분, 그리스도의 두 단계 재림

*강점 - 임박한 재림을 강조함으로써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 강조, 신자들에게 종말론적 긴장을 지닌 신앙생활하게 한다.

2) 환난 후(환난 통과) 휴거설(역사주의적 해석)

- 교회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환난을 통과한 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휴거된다.

- 역사적 전천년설

-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락탁티우스 등

- C.Eedman, N.West, A.Gordon 등 신복음주의(E.Carnell, G.Ladd, R.Gundry)

- 성서는 모두 환난 후 휴거설을 나타낸다.(요14:1-11, 고전15:51-58, 살전 3:18)

▸특징

➀ 문자적 해석에 덜 의존해 있다.

➁ 교회가 대환난 동안에 존재한다.

➂ 하나님의 진노와 대환난을 구분한다. 진노는 신자가 아닌 악한 자에게 임한다.(요3:36, 롬1:18, 5:9, 살전1:10, 계14:8,19, 15:1,7, 16:1,19, 19:15). 환난은 신자도 경험한다.(요16:33)

➃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화난ㄴ을 통과한다.(계3:10)

➄ 한 번의 재림과 두 번의 부활(환난 후와 천년왕국의 시작에 있을 신자의 부활, 끝에 있을 불신자의 부활)

➅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 - 일련의 사건이 임박하다.

*문제점 - 천녀왕국의 기간이나 주민 등에 대한 이해 부족

=> 어떤 전에서는 무천년설과 명확한 구별이 되지 않는다.

3) 환난 중간 휴거설(환난 전 휴거설의 변형)

- N.Harrison, O.Buswell Jr., G.Archer 등

- 다니엘서와 계시록이 삼년 반 명시(단7:25, 9:27, 12:7)

- 환난과 진노를 구별 : 하나님의 진노는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환난 동안에는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진노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노가 시작되기 전 휴거된다.

- 살후2:3(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 살후2:9(악한 자의 임함)

- 교회 휴거는 일곱 번재 나팔을 불 때(계11:15-19, 살전4:16, 고전15:51, 계14:14)

*문제점

- 나팔을 동일시하는 것(계11장, 고전15장, 살전4장), 3년 반에 대한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강조를 휴거와 연결시키는 것

- 부분 휴거설 : 성도들이 준비될 때마다 휴거된다.(열처녀 비유 마25:1-13, 마24:40-41, 눅21:36)

- 성도의 상급에 기초하고 있다.

▸휴거 논쟁

- 휴거의 시기와 그 대상을 쟁점으로 하여 전천년왕국설에서 일어난 것이다.

- 미래주의적 해석이다.

*주요쟁점

➀ 교회와 대 환난과의 관계

- 교회가 대환난을 면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과할 것인가?

- 대환난 동안 교회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➁ 휴거와 재림의 관계

- 휴거와 재림은 별개의 독립적인 사건인가? 동시에 일어나는 연속적 사건인가?

-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두 단계로 볼 것인가? 한 단계로 볼 것인가?

➂ 대화난과 하나님의 진노의 관계

-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➃ 재림의 임박성

-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환난 전 휴거설)?

-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사건들과 징조들이 있는가(후, 중간 휴거설)?

Ⅶ. 최후의 심판과 만유 구원론

1. 최후의 심판

- 이중심판 : 천국과 지옥/영생과 영벌

(마7:13-14, 마25장, 막9:45, 눅16:23ㅡ 막9:48)

2. 지옥설

- 기독교는 초기부터 지옥교리를 가르쳐 왔으며 그것은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지옥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은 신학적으로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지옥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 현대에 들어와 지옥을 부정하는 현상이 지배적이다.

지옥 개념은 “쓸모없고 해로운 것”이다.(E.S.Chesen), "지옥이 사라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M.Marty)

- 낙관주의적 자유주의 신학과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영향이다.

- 복음주의 신학과 교회에서도 발견된다. 목회자들은 지옥, 영원한 형벌과 같은 심각한 주제에 관해 설교하기를 주저한다.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견해를 의문시하거나 논박하기도 한다. 지옥을 부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보편구원론과 멸절설이다.

- 지옥은 부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기독교의 중심교리 중 하나로 많은 논제를 포함하고 있다. 지옥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지옥은 어디에 있으며, 지옥불은 실제인가? 비유인가? 지옥 고통은 형벌적인가? 치료적인가? 지옥 고통은 영원한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1) 지옥 교리의 발전

2) 영원 형벌설

- 가장 일반적이며 전통적인 견해이다.

- 지옥을 악인에 대한 영원한 형벌 장소와 조건으로 간주한다.

- 악인에 대한 형벌은 영원하며, 그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징벌이다.

- 성서의 지옥 표상에 대한 문자적 이해와 요약이다.

- 문자적 견해, 고전적 견해, 정통적 견해, 유력한 견해

▣ 특징

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실재한다. 지옥 고통은 의식적 고통을, 지옥 불은 문자적 의미의 불을 의미한다.(눅16:24, 마8:12) / 천국 축복으로부터의 분리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➁ 지옥의 본질적 목적은 교정이나 치료가 아니라, 응보적 형벌이다. 지옥은 모든 악인과 불신자에 대한 징벌의 장소요 상태다.(살후1:9, 유1:7, 계21:8) 일단 지옥에 가면, 누구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심판의 기준인가를 보여준다.

➂ 지옥은 영원하다. 악인의 영원한 거처요, 고통은 영속적이다. 예수는 지옥을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장소(막9:43,48),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곳(계20:10)으로 묘사했다. aionois(끝없는, 영원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을 의인과 악인의 최후의 운명, 즉 영생과 영벌에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지옥과 천국의 기간이 동일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마18:8-9, 25:41,46)

➃ 지옥 형벌의 등금 문제에 대한 여러 입장들이 있다. 악인이 지옥에서 동등한 형벌을 받는다. 형벌의 균등성을 부정하고 개인에 따라 차등이 있다. (뵈트너, 에릭슨) 로마가톨릭교회는 지옥의 개인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징벌은 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 비판

➀ 영원한 형벌과 하나님의 본성, 사랑과 은총의 조화문제가 전통적 견해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영원한 형벌과 고통을 허락할 수 있는가? / 지옥의 존재와 하나님의 본성은 모순되지 않는다.

*어거스틴 - 영원한 형벌에 대한 논란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오해로부터 일어난다. 중생하지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 - 하나님의 성품이 지옥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만들뿐 아니라 필수적으로 만든다.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무한히 협오하므로, 죄인에 대해서도 그의 진노와 증오를 나타낸다. 영원한 형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의 무한성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에릭슨 -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죄다. 지옥 고통은 인간 자신의 선택이다. 따라서 지옥과 하나님의 사랑은 모순되지 않는다.

➁ 지옥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존재 이유와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이 지옥에서 인간에게 끝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준다는 개념은 사디스트적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조화되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사탄의 행동에 더 적합한 것이다. 전통적 지옥관은 왜곡된 하나님 개념에 기초한 것이며 비성서적이다.

➂ 일부 전통적인 견해 지지자들도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 개념이 지옥교리를 약화시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옥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는 전통적 견해의 수용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엇으며, 비판자들의 꽁격의 초점이 되었다.

3) 비유서로가 조건적 불멸설

A. 비유설

- 성서에 나타난 지옥 표상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비유적 또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옥을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아닌, 악의 결과로 일어나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정의한다. 지옥은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혼자 살려고 하는 세상적 결정의 실현이다. 자기중심적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장소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표현된 신약성서의 지옥 모습은 지상의 화염과 동일한 뜨거운 열과 연기의 장소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 임박한 파멸을 경고하는 비유다.

- 지옥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강조하며 영원형벌설의 사디즘적인 요소를 비판한다. 하나님은 지옥에서 그의 피조물이 끝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 할 수 없으며, 성도들 역시 동료들의 영혼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 성서적 근거와 이론적 토대

➀ 유대문학의 지옥 형상은 상징적이었다. 중간시대에 게헨나, 힌놈의 골짜기는 지옥에 대한 비유로 널리 사용되었다. 일부 유대인이 받아들였다. 이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으며 신약성서는 그것을 거부했다.

➁ 하나님은 항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그 시대의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여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고 나타낸다. 신약시대에는 다채로운 언어 또는 과장법이 사요오디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 심원한 악의 장소를 의미했다.

➂ 신약성서 저자들의 의도는 그들의 언어와 표현이 비문자적으로 이해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유다는 지옥을 영원한 불(유1:7)과 캄캄한 흑암(유1:13)으로 묘사했다.

➃ 종교개혁자들과 현대 복음주의자들 대부분이 비유적 해석을 지지했다. 칼빈은 꺼지지 않는 불을 비유적 표현으로 간주했으며, 루터는 문자적 해석을 거부했다. C.Hodge는 지옥불을 문자적 불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B.Graham, C.S.Lewis, W.V.Crokett)

▣ 비판

성서와 불일치한다. 단순한 상징과 비유라고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공포의 대사응로서의 지옥형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을 부정한다. 찰스 핫지는 지옥에 대한 표상들을 모두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반대했지만,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의 실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B. 조건적 불멸설

❐ 멸절설-조건적 불멸설 / 영혼 소멸설

- 지옥의 본질을 파멸로 해석하고 악인은 죽은 뒤 소멸된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을 운명을 지녔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멸적 존재라는 신념에 기초한다.

➀ 죽음은 인간에게 존재의 종식을 의미한다. 불멸성은 인간 본성의이 일부나 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신앙을 조건으로 인간에게 그것을 주신다. 신자는 불멸, 곧 영생을 누리게 되는 반면 불신자는 존재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지옥은 악인의 영혼을 소멸하는 종말론적 소각이다.

*영혼 소멸설 - 불멸성은 인간 본성의 일부지만, 악인은 죄로 인해 그것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악인은 죽은 뒤에 끝없이 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그 존재가 소멸하게 된다.

➁ 지옥의 존재나 악인의 지옥 형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영원성을 부정한다. 악인의 최종적 파멸을 지옥의 본질로 이해한다. 지옥불은 악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소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자의 궁극적 결과는 자기파멸이다. 따라서 지옥은 고통 속에서 새로운 불멸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한 인간의 반역적 삶이 끝나는 것이다.

➂ 성서 주석과 헬라적 인간관 거부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전통적 견해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 시37:20, 말4:1-2, 마10:28, 13:30,42,49-50, 고전3:17, 갈6:8, 살후1:9, 히10:29, 벧후2:1-6, 3:7, 유1:7, 계20:14-15

불과 멸망의 형상을 결합하면, 존재의 종식, 즉 소멸을 의미하게 되낟. 성경은 악인의 궁극적 파멸을 증거 한다.

➃ 전통적 지옥관이 성경 자체보다 오히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헬라철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전제를 갖고 성경을 이해하면, 악한 자는 지옥에서 영원히 의식적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견해에 이르게 된다. 죽은 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신앙과 영혼불멸 개념이 혼합된 결과가 전통적 견해다. 그렇지만 영혼불멸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멸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사이며 인간의 내적 소유물이 아니다.

➄ 최초제기 - 4세기의 Arnobis “절멸이 악행자에 대한 진정한 형벌이며 그의 진정한 죽음이다.”

소치누스 - 악인의 멸절 교리 주장 : 악인은 죽음과 더불어 멸절되지만 의인은

마지막 날 불멸의 생명으로 부활 될 것이다

제7일 안식교 - 악인의 영혼은 일정기간 형벌을 당한 뒤 소멸된다.

여호와의 증인 - 악인의 영혼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된다.

John Stott, P.Hughs, J.Wenham, C.Pinnock

➅ 전통적 견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성경의 교훈과 가장 일치하는 교리로 취급한다. 문자적 독해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에 일치한다.

*C.Pinnock의 주장

- 보다 성서적이다. 전통적 견해는 하나님이 악인에게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준다고 보는 반면 조건적 멸절설은 사디스트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일치한다.

- 도덕적으로 더 정당하다. 전통적 견해는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괴물처럼 그리고 잇는 데 반해 조건적 불멸설은 하나님이 악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 법적으로 더 타당하다. 전통적 견해는 악인이 받아야 할 것 이상의 영원한 형벌을 요구하는 데 반해, 조건적 불멸설은 일정 기간의 형벌과 소멸을 요구한다 .

- 형이상학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 전통적 견해는 천국과 지옥이 영원히 공존하는 우주론적 이원론에 기초하여 악과 고통이 지옥에서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의 구속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있다. 조건적 불멸설은 지옥의 본질을 파멸로 이해함으로써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적절히 나타내고 있다.

▣ 비판

-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다. 성경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66:24, 막9:43-48은 지옥형벌의 영원성을 명시하고 있다.

✪ 결론

- 지옥에 관한 기독교적 논의는 그 존재보다는 본질에 집중되어왔다. 지옥의 실재에 동의하면서도 그 본질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영원한 형벌, 치유와 정화, 파멸 중 어느 것으로 보느냐 / 영원한 것으로 보느냐, 한시적인 것으로 보느냐

- 전통적 견해(영원한 형벌) / 연옥설과 보편구원설(치유와 정화)/ 절멸설(파멸)로 해석된다.

- 지옥불 : 전통적 견해(징벌의 불) / 멸절설(멸망의 불) / 연옥설과 보편구원설(정화의 불)

- 비유설 : 상징적, 비유적 해석, 하나님과 분리된 생태로 해석

- 전통적 견해(문자적 해석) : 영원한 형벌과 하나님의 사랑의 조화의 문제점

- 비유설 - 전통적 견해의 수정 시도

- 조건적 불멸설과 보편구원론 : 보다 급진적, 영원한 형벌의 완전한 폐기 주장

- 현대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더 이상 전통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비유설이나 조건적 불멸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성서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

3. 만유구원설

1) 만유구원설의 주장

➀ 성서적 근거 제시

- 행3:21(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엡1:7-10(통일되게 하려하심), 골1:20(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화목-화해), 빌2:9-11(모든 존재들이 예수의 이름에 굴복,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 고전15:1(모든 생명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8(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21:4-5(만물을 새롭게 하리라-몰트만 주장의 핵심 근거) :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인에게 미치는 긍휼이다.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➁ 지옥의 영원성 부정

- 지옥을 인정하지만 지옥은 영원하지 않다고 본다. 헬라어 aionios는 히브리어 olam과 마찬가지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낟. 절대적 의미의 영원이 아니다. 이 단어는 aiones와 olam과 마찬가지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한다. 절대적 의미의 영원이 아니다. 이 단어는 aiones와 olamin과 같은 복수형이 존재하고 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막9:48의 영원한 불못은 교육적 의미를 지닌 정화의 불이다. 세상 끝까지 존재할 수 없다. 영원의 의밈는 한계가 있는 영원이라고 주장한다. Walter Michaelis는 저주와 심판과 영원한 죽음은 종말론적으로 관찰할 때 최후의 것 지평 속에 있느 한 단계 이전의 것이다. 최후의 것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한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이 종결될 수밖에 없다. 지옥의 고통과 경험은 현존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지옥이 있고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는 한 하나님은 아직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지옥도 없애고 지옥을 경험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➂ 그리스도의 지옥여행과 파괴된 지옥

“그리스도께서 지옥을 열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 -몰트만-

그리스도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고 지옥을 열었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도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모든 희망이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곳에도 희망은 조재하게 되었다.” 지옥의 문이 열리 ㄴ것뿐 아니라 지옥을 감싸고 있는 성벽이 무너졌다. “그의 고난으로 그리스도는 지옥을 파괴시켰다.” 더 이상 “영원한 저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 - “지옥은 세상의 어떤 장소나 지하세계의 언떤 장소가 아니고 하나의 실존적 경험인데 곧 죄와 하나님 없는 존재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경험이다.”

저주받은 세계와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 몰트만은 루터의 이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옥을 파괴시키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본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없는 세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현재의 진노뿐 아니라 미래의 진노와 미래의 지옥의 고통까지 겪고 계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만인의 죄를 속량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지옥의 문을 열고 지옥을 파괴시킨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은 궁극적으로 지옥과 죽음이 하나님 안에서 폐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옥의 경험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르 ㄹ그 지옥에서부터 꺼내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옥은 열려져 있고 닫혀진 영원한 지옥ㄷ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복음전파(벧전3:9, 4:6)를 주장했다. 개신교는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부정,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거부한다. 산자와 죽은 자의 교통 가능성, 연대성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예수 이전에 죽은 자들도 복음의 소급하는 능력에 의해 신앙에 이를 수 있다. 십자가는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들을 바르게 하고 그들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가는 희망과 은총의 빛이 그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➃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의 질적 차이

하나님의 결단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유일회적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고후5:19, 요3:16) 멸망에서 구원으로의 위대한 전환은 십자가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나 전향의 시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이 전환의 개인적, 주관적 경험이요 수단이지 전환 자체가 아니다. 나의 신앙이 구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나에게 신앙을 마련한다. 잘못된 결정은 시간의 세계에 속하는 결정이다. 그는 결코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을 뒤엎을 능력이 없다.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이다. 인간은 끝없이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성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양자택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주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의해 한계 지워져 있다.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 객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어 있다. 불신자의 불신앙을 하나님이 화해시킨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보다 크게 보아선 안 된다. 불신앙과 저주는 인간의 자유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만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➄ 최후 심판과 용서하시는 하나님

마지막 심판의 날은 기쁜 날이다. 두려운 날이 아니고 가장 놀랍고 놀라운 날이다. 총체적 용서와 만유의 회복이 구현화 되는 심판이다. 하나니께서 십자가에서 의도했던 바가 완성되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만유를 용서하시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역사의 완성이자 계시이다.

➅ 만유의 구원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 악한 자들의 악은 심판받아 없어질 것이다. 죄도 없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모든 잘못된 것들은 없어질 것이다. 악했던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전체 피조물과 우주를 구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다. 변혁된 세계이다. 마지막 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세상의 신격화 이론이 더 맞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종국적으로는 마귀도 구원하실 것이다.

➆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2) 만유구원론에 대한 평가

A. 문제점

- 제기되는 비판들

: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 기독교 전통과 심각하게 충돌하낟.

: 기독교 선교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

➀ 지옥에 대한 문제

➁ 영원에 대한 의미

➂ 믿음의 문제

➃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B. 긍정적 기여

➀ 바르트의 화해론 이후 남겨진 신학적 숙제를 해결했다.

➁ 수많은 신학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느 가능성을 열었다.

➂ 만유를 위로하는 기쁨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➃ 가톨릭의 잘못된 연옥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산자와 죽은 자의 교제를 가르쳤던 초대 교회의 정신을 일깨워준다.

➄ 바르트의 만인 구원의 가능성을 넘어 만유 구원의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다.

Ⅷ. 시한부 종말론

1. 시한부 종말론의 특성

- 발생 배경 : 급격한 사회변동과 불안정한 사회구조를 배경으로 기존교회가 현실에 안주하는 반면 종말론적 신앙을 강조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 계시의 종국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계시를 강조한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짜 맞추기식으로 연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한다.

- 자기 집단만 구원 얻는다는 집단적 이기주의 경향을 지닌다.

- 예수의 재림 시기를 예고한다.

2. 바른 종말 신앙

- 시한부 종말론을 대하는 한국교회의 자세

➀ 사회가 불안하고 교회가 세속화되며 종말 신앙이 약화될 때마다 이단적 종말론이 등장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대형교회주의 등 양적 성장과 현세지향적 축복을 강조하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점검해야 한다.

➁ 이단들이 예고한 휴거의 날이 지나가는 것이 역설적으로 이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지나가면, 그것이 거짓 예언이었음이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종말론으로 인해 혼란이 왔다 해서 종말론적 신앙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종말은 분명히 있으나 그 시기를 모를 분이다. 따라서 신자의 바른 태도는 언제라도 종말을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➂ 교회는 신자들에게 항상 올바른 성서관과 종말론을 가르쳐야 한다. 이단들은 성경보다 새 계시와 신비체험에 더 권위를 부여한다. 거짓 예언과 잘못된 성경 해석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서가 최종적인 게시이며 최고의 규범과 권위라는 신앙과 성서적인 종말론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수적이다. 또한 현세에 안주하여 종말을 부정하거나 종말에 무관심한 현상과 현실 도피적으로 임박한 종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상, 이 양 극단을 피하여 성경적인 종말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단순히 내세로 도피하는 것으로 해결하기보다 기독교적으로 대처하고 극복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➃ 올바른 성경 해석법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해야 한다. 이단 종파는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거나 짜 맞추기식으로 해석하여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킨다. 바른 성경 해석법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이단의 발생을 막는 예방책이다.

➄ 지나친 신비주의와 체험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체험적인 신앙은 필요하나 성경에 근거한 체험이어야 한다. 성경을 능가하거나 역사를 외면하는 신비체험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공허하다. 환상이나 직통계시를 쫓다 성경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➅ 성서적인 종말론을 확립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시한부 종말론의 도전을 성서적 종말론의 확립과 종말론적 신앙의 부흥을 위한 적절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a. 개신교의 신학적 빈곤

b. 그릇된 성서 해석

- 성서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본문의 묘사를 이 시대의 특정한 사건과 직결시키는 일

- 성서의 본래 정신과 의도를 간과하고 이것과 관계없이 특정한 본문을 기독교의 진리로 간주하는 일

- 상충되는 본문들을 연관시켜 파악하지 않고 한 편의 본문들만을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삼고 다른 한편의 본문들을 제쳐 두는 일

- 성서의 본문들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접합시키는 소위 짜 맞추기식 성서 해석

c. 극단적 신비주의, 영계 체험, 예언, 환상, 직통계시 등

*기독교 종말 신앙의 핵심 정신

➀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준비

➁ 소명에 충실하고 신실한 삶 (마24:45-51, 25:14-30)

➂ 복음전파의 중요성 (마24:14, 벧후3:9, 행1:8)

➃ 이웃사랑 (마25:31-46)
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승리

< 기말고사 안내 >

기말고사 6월11일(수) 9:30-10:30

- 장소 : 307호

- 문제유형: 4지선다형(20) - 주제별 1문항

괄호넣기(10) - 개념 용어 사상

연결하기(10) - 학자, 개념, 사상

교회론 - 본질, 목적, 표지2, 교역, 기능

종말론 - 죽음2, 중간기2, 연옥설, 영혼불멸, 만인구원, 천년왕국2,

 

 

 

출처: 장신대 신대원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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