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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 웨슬리의 생애와 신앙적 배경

류성련 2014. 9. 26. 23:19

요한 웨슬리의 생애와 신앙적 배경

 

 

요한 웨슬리는 1703년 부친 사무엘 웨슬리와 모친 수산나 사이에서 첫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엡워드의 영국국교회 목사로서 청교도적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요한 웨슬리의 신앙적 배경의 한 축을 이루는 부친의 영향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관

- 사무엘 웨슬리는 "성경연구와 성경과 관련된 저술에 몰두했는데 욥기의 히브리어 단어를 일일이 검토하는 등 철저하게 연구하여 200여 쪽의 방대한 욥기 주석을 출판할 정도였다. 요한이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물론 라틴어에 대하여 능통한 것은 아버지 사무엘의 영향이었다."

 

둘째, 세계관

- 사무엘은 교회가 세계를 향한 선교적 차원에서 사역을 감당해야 된다는 환상과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 이러한 확신 때문에 "복음전파를 위한 신도회"를 위한 선교사로 자신을 헌신한 적이 있다. 그의 노년에 자신이 다 할 수 없는 조지아 선교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위를 추천했으며 요한도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기 전에 미국의 인디안들을 위하여 선교사로 간 바 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올더스게이트의 회심 이후에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신념으로 사역하였다.

 

셋째, 조직의 면모

- 사무엘 웨슬리는 당시의 신도회를 옹호하였는데, 그는 후에 스스로도 그러한 신도회를 만들었다. 요한 웨슬리의 신도회에 대한 자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는 복음적 회심 이전에도 가는 곳마다 신도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복음적 회심도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어느 신도회에서였다. 실제로 1739년에는 존 웨슬리도 아버지, 사무엘의 모형을 사용하여 신도회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옥스퍼드에서의 Holy Club 운영과 후일 메도디스트 운동의 핵이 되는 속(Class)의 운영 등은 부친의 조직가적인 면모를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죽을 때까지 독립된 교회를 조직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형태의 조직을 형성하고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그의 여러 조직 가운데 조모임, 속회, 회개회, 선택자회 등은 웨슬리가 조직하고 요긴하게 활용한 소그룹 운동이었다. 웨슬리의 이러한 조직들은 산업화 사회에서 극빈층으로 전락되고 노동력을 정당한 대가없이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의 규합체인 노동조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노동조합의 조직 및 핵심인물들은 '속회'의 조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이 '속회'의 지도자들이 후일 노동조합의 중요한 인물들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청교도에서 영향을 받은 이로서 웨슬리 형제들에게 있어서 경건생활의 모범이었으며 그것을 지도한 선생이었다. 수산나는 "엄격한 시간표, 하나님 앞에서의 묵상과 자기 성찰을 위한 규칙적인 시간, 영적 일기의 기록, 안식일의 엄수"등의 청교도적 경건을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수잔나는 자녀들의 영적 생활을 체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자녀들의 영혼 구원을 숭고한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장은 역시 가정이었다.

 

청교도들에 의하면 가정은 "작은 단위의 교회로서, 기도, 성경 읽기, 교리 문답 및 세부적인 신앙에 대한 지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장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어려서부터 고집이 꺾여야 했다. 수잔나는 의지를 제어하려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의 규율을 만들었으며, 그것들을 자녀 훈련에 엄격히 적용하였다. 물론 이런 수잔나의 교육방법은 너무 엄격하다는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으나, 존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굴복과 단련을 터득하였다. 그녀는 자녀들과 더불어 신앙 문제는 물론 그들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서도 토론하였다. 요한 웨슬리의 인격에 미친 어머니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요한이 감리회 운동을 시작했을 때 어머니의 삶을 본받아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개개인의 영혼을 돌보았을 뿐 아니라, 소그룹을 통하여 각 개인의 필요를 채워 주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무엘과 수산나의 영향이 내적인 것이었다면 다음의 몇가지 요소들은 그가 18세기 부흥운동을 주도하는데 목회적, 신학적 형성과 실천의 토대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는 영국국교회, 청교도, 모라비안 경건주의, 마틴 루터의 주석, 가톨릭교회의 신비주의, 동방교회의 교부들 등 많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웨슬리는 토마스 아켐피스, 제레미 테일러, 윌리암 로와 같은 신비주의 저자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 외에도 퀘이커 교도와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도 웨슬리에게 영향을 미쳤다.

 

 

 

 

죤 웨슬리 / John Wesley


 

 

죤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소읍 에보트(Epworth)에서,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의 목사이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Samuel Wesley)와 엄격하면서도 슬기로운 신앙의 여인이었던 어머니 수산나(Sus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웨슬리의 부모는 열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열명은 어려서 죽고 여섯 명의 딸은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과 결혼했다. 세 아들 사무엘, 죤, 챨스는 모두 목사가 되었다. 죤 웨슬리는 15번째이며, 찬송가 작가이고 죤의 동반자가 되었던 챨스는 18번째 였다.

죤이 다섯 살 때인 1709년 2월 9일 한밤에 돌연 불이 났다. 죤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어린 죤은 양친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 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죤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 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 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웨슬리는 16세에 챠터 하우스를 떠나 옥스포드(Oxford) 대학으로 향하였다. 당시의 옥스포드는 학교라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스스로 훈련하고 스스로 수양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얻은 교훈, 챠터하우스에서 받은 수양을 그대로 계속 실행 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은 대부분 옥스포드에서 학생으로 혹은 조수로 있었는데 그 동안에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 때 영국교회의 안수를 받았다.

또한 여기서 유명한 옥스포드 구락부 곧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자기 자신과 그의 전도인들의 독특한 생활 습관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그 클럽을 가리켜 '규칙벌레','성경클럽','엄격한 종교 주의자 (Methodist)'라고 놀렸는데 후일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당년 31세의 웨슬리는 15년 동안 옥스포드 생활을 하여왔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좀 더 열성 있고 희생적인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그는 1735년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로 가서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선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북미 선교 활동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마침내 2년 만에 웨슬리는 중생의 대 경험을 앞에 두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1738년은 웨슬리 형제에게 중요한 해가 되었으니, 동생 챨스 웨슬리가 먼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죤 웨슬리는 엘더스게이트(Aldersgate)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인 서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9시 15분 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에 웨슬리는
'그의 심령이 이상하게도 뜨거워 짐을' 느꼈다. 그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기 죄가 속량 되어지고 구원 받은 줄 확신하게 되었다.

1738년 엘더스게이트 경험으로 부터 1791년 임종 시 까지의 웨슬리의 생활은 항상 말 타고 여행하며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님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 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 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 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웨슬리는 찬송에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이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신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이와같은 운동은 신대륙 미국에까지 건너가 감리교회가 조직 되었다. 이제 죤 웨슬리는 갔지만 그가 세운 교회는 확연한 존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존 웨슬리의 생애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 사 사무엘 웨슬리와 아내 수산나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친가의 독실한 종교생활 환경에서 자라나 그 믿음이 신실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에 [가정학교]를 만들어 열아홉명의 자녀들을 직 접 가르치며 교수과목과 교육방침도 결정했다.

자녀교육의 제일의 목표를 [규칙생활]로 정해 아이들의 방종을 제 재함으로써 착실한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놓고 개별 상담과 기도도 해주었다. 요한 웨슬리가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일년에 한번 엡워드교구 목사의 집에서는 [알파벳잔치]라는 것이 있 었다.

이는 자녀가 다섯살이 돼 첫 공과를 배우기 시작하는 날로 첫날은 ABC를, 다음날부터는 창세기를 보며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가르치며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이 6세 되던해 엡워드 목사관에 불이나 [가정학교]는 잠 시 중단된다. 1707년 2월 7일, 집을 삼킬듯한 불길이 목사관을 휩싸자 식구들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들은 형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런데 어머니가 그들을 점검해보니 한 아이가 없었다. 그때 [사람살리라] 라는 소리가 목사관2층에서 들렸다. 웨슬리가 창문에 몸을 내밀며 소리치 고 있었다.

아버지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목마를 타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해 내려오자 마자 목사관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이 위험한 사건을 겪은 웨슬리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존재] 를 확실하게 믿었고 그의 80여년의 생애동안 [화재]와 [구원]에 대한 인 상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요한 웨슬리는 11세가 되자 런던의 [차터하우스] 중학에 입학했다. 그는 지식의 풍요로움을 위해 열심히 탐구하고 노력했으나 신앙면에 서는 성장하지 못했다. 당시의 신앙생활의 게으름을 후에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외부에서 가하는 억제가 없어졌을때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게을러 졌다. 그래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마저 소홀히 했다.] 그는 6년만에 차터하우스의 교육과정을 마친후 옥스퍼드로 갔다. 웨슬리는 1년에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의 그리스도 교회대학에 입학했다. 웨슬리는 재학중 우수한 성적을 얻기위해 밤낮으 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논리가 뛰어나 학우들과 논쟁하면 언제나 상 대를 꺾고 말았다.

1725년 22세때 그는 생애에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한 웨슬리는 마침내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 흡잡을게 없었으나 성직을 맡기엔 부족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영적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작은 것이었다. [ 나는 아직 내마음의 성결에 대한 관념조차 갖지 못하였다. 나의 종교생활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명백한 죄를 범하면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 죄에 만족하였다.]

그가 먼훗날 그 때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웨슬리가 사도직을 걷기로 작정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책은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 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나는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 었다. 나는 이책을 읽음으로써 참된 종교는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 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우리의 언행뿐 아니라 우리의 사 상에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표로 본 요한 웨슬리
 

년 도

월 일

나 이

내 용

1703

6.28


born in Epworth in England

1709

2

6

화재에서 생존함을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스3:2)로 비유

1714


10

런던 챠트하우스 입학

1720


16

옥스퍼드(Oxford) 대학 입학

1724


21

인문학 석사

1725

9.19

22

영국 성공회 목사가 됨(4대째 목사)

1727


24

옥스퍼드 대학 조교수 활동

1729


26

Holy Club 시작됨

1735

10.14

31

미국 죠지아로 선교 출발 , 풍랑가운데 중요한 신앙체험

1736

2.5

32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항 도착

1737

12.2

33

미국 선교 실패 귀국길에 오름

1738

2.1

34

고국 도착

1738

5.24


올드스케이트에서 회심체험

1742



브리스톨에서 속회조직

1791

3.2

88

사망



 

  웨슬리는 이때부터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신앙생활하는데 보냈으며 내적 성결을 위하여 힘썼고 기도도 열심히 하여 그리스도에게 몸바칠 각 오로 살았다. 그리고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갖지 못했던 그리스도인 의 헌신과 성결에 대한 도리를 깨달았다. 웨슬리가 쓴 [그리스도인의 완 전론]의 기본 사상은 아켐피스의 저서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 또한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란 책은 그가 아켐피스 에게서 얻은 신념을 더 굳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 한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나의 생명 전체 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 자신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결국 악마에게 바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기는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로부터 13년뒤에 얻었으나 하 나님과 인류를 위해 몸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다.

요한 웨슬리가 집사안수를 받은 것은 그가 22세때인 1725년 9월19일 이었다.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대학 교회당에 옥스퍼드감독 요한 피터에 게 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는 그로부터 3년뒤에 받았지만 가끔씩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당시 설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술 회했다. [1725년부터 2년동안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그때 청중이다. 신자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개의 도리와 복음의진 수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에대한 신앙을 전파하지 않은 까닭으로 내 설교에는 힘이 없었고 감화력이 없었 다.]

1726년 3월 11일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특대학생이 되었다. 이 대학에 간지 얼마 안되어 그는 희랍어 강사직과 토론회의 심판장 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희랍어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의 신학사 상을 그들에게 불어 놓어주기에 힘썼다. 또한 주일은 제외한 토론회에서 학생들의 언론을 비평하고 평가해주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받은 것은 1727년 이었으나 당시 그는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65세의 고령인데도 엡원교구와 우릇 교수 둘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혼자서 두 교구를 맡기엔 힘이 벅 차 아들 요한 웨슬리를 부목사로 초빙했다. 웨슬리는 2년 3개월동안 부친 교구에 봉직한후 1729년 옥스퍼드대학 조교수로 피선돼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한편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포드 그리스도교회 대 학에 입학한 것은 1726년 그의 나이 20세가 채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고 비범한 재사였고 형이 오기전부터 교내에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종교모임을 가졌다. 서로 뜻을 같이하는 그의 동지들 과 함께 매일매일의 학과 일정표를 만들고 종교적 의무를 지키며 침식시 간을 될수 있는대로 줄이는등 신앙향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썼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 생활로 동창학우로부터 [규칙장이들](metho-dists)라는 별명 까지 듣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포드로 돌아온 후 즉시 동생이 조직한 단체 [신 성구락부] (holy club) 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729년. 타락한 조국을 바로잡고자 뜻있는 청년 몇사람이 조직한 [신성구락부]는 신임회장 요한 웨슬리를 맞았다. 회원 네명중 세명은 대 학조교수였고 나머지는 대학재학생이었다. 웨슬리는 이들을 지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신중히 하 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일반회원들에게 항상 겸손했다. 그 들은 매일밤 모여 기도하고 희랍어 성경과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신성구락부]의 성경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운동이었다. 그들은 부채 자를 방문하고 병자위문을 하는등 여러가지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옥스포드 감독의 허가로 그들은 감옥 뿐 아니라 시내의 가난한 가정 도 심방하였으며 무산아동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남루한 옷 을 몸에 걸친 소녀 하나가 웨슬리에 구걸했다. [너는 대단히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 옷은 그것밖에 없니?] 웨슬리는 그 소녀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돈 이 없어 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의 서재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마치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다. [나는 가련한 소녀의 배고픔을 면케 해줄만한 돈으로 내집의 벽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아 - 내 마음엔 공의도 없고 자비도 없다.

이 그림들 은 저 가련한 소녀의 피 값이 아닌가?] 이때부터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그들의 수입중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잔액 전부를 구제비에 썼다. 웨슬리는 연수입 30파운드를 제외한 2파운드를 내놓았고 이듬해는 60 파운드의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32파운드를 구제비로 썼고 다 음해 역시 90파운드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리의 부친 엡윗교구 목사는 72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났다.

한편 웨슬리가 몇몇 신성구락부 회원들과 식민지 북아메리카 조지아 로 선교여행을 떠나고 남은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계속 모임을 갖다 졸업 후 목사직을 받고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 단체가 해산된 이후에도 그들이 남긴 향기는 얼마간 옥스포드 학원에 머물렀다.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아메 리카 대륙과 전세계에 신앙의 불꽃을 일게 하였다. 감리교가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신성구락부였다.

웨슬리는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정열로 완고한 영국교회의 안 일주의와 의식에 치중한 생활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북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이 전도단은 1735년 10월 18일 시몬주호를 탔는데 이 배에는 모라비 아인들과 80명의 영국이민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미대륙에 도착하기까진 8주나 걸렸는데 이 항해는 웨슬리에 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선객들중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제를 통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용감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항해도중 여러차례의 풍랑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 었다. 그러나 독일 모라비안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했다.

폭풍이 지난후 웨슬리는 한 모라비아교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 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그의 일기장에 [나의 일생중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 다.]고 기록했다. 그 영광은 웨슬리가 구원의 빛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일생 처음으로 그 구원의 빛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1736년 2월 6일. 웨슬리 일행이 탄 배를 조지아에 도착했다. 배가 도 착하자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했다.

웨슬리는 조지아에 도착한 후 모리비아교단의 스팽겐베르크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신앙 체 험을 한다. [웨슬리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 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리는 무슨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 겐베르크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리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웨슬리는 대답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 는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리는 [나는 ...알죠]라며 입속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 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 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이 찼다. 그후 웨슬리는 사바나시에 도착해 첫 주일은 맞아 고린도전서 13장 을 낭독하고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사바나에서의 활동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반신도들이 사치품을 멀리하고 귀부인들도 검소한 의복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그곳에 주간학교를 설립한 후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웨슬리는 주일마다 분주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11시 에는 성찬식과 설교를 했으며 오후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에 참석하고 2시 에는 유년들을 모아 교리문답을가르쳤다. 또 3시에는 기도회를 인도하였 으며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회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사바나시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평일 에는 스페인출생의 유대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서반아어를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노력하였지만 신도 들을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그들이 먹기 어려운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 의의 굳은 음식으로 먹인 까닭에 그 비상한 활동과 노력은 아깝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 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고 영국 교회 에서 세례를 받지않은 자에게는 장례식 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그의 조지아 선교사업 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라는 미 모의 여인과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 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날 웨슬리가 성만찬식을 집례하는데 이 신혼부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리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불명예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다. 그러나 고소의 내용은 그다지 대수로운 사건들이 아니었을뿐 아니라 동기가 웨슬리를 실 각케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돼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불명예스런 일이었 고 그때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시돼 웨슬리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737년 12월 2일 웨슬리는 귀국의 여정에 오른다. 사바나를 떠난 웨슬리는 천신만고 끝에 찰스타운에 도착,영국행 범선 을 타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후 그는 조지아 선교때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인도인(아메리카)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 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 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조지아선교 실패로 인해 그는 지극히 낮아졌다.

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다.그들 중 페터 볼러와의 대화는 웨슬리의 신앙에 큰 교훈을 주었다. 그는 볼러로 말미암아 그의 불신앙을 깨닫게 되었다. 중생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그는 [내가 전도를 중지하 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묻자 볼러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선생은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시오.]라 고 대답했다. 웨슬리는 볼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이튿날 아침 옥스포드 감옥에 있는 한 사형수에게 믿음으로 구원얻는 도리를 전도했다.

다음주일 웨슬리는 퀘이커교 예배에 참석했다. 이것은 웨슬리의 부 흥운동 뿐 아니라 감리회 예배의식 발전상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폭스 (퀘이커교 창설자)회에 참석하였는데 내 마음속에는 형 언할 수 없는 감격이 넘처 흘러 그동안 해왔던 기도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로운 기도를 했다.] 영국교회의 의식과 기도문에 따라서만 기도했던 그는 자유기도가 더 은혜로움을 깨달았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중생의 기쁨을 체험한 다. 이날 그는 런던시 올더스게이트가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 상스럽게도 나의 마음이 뜨거워 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 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중생의 경험은 웨슬리의 성격과 전도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생명을 전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웨슬리가 중생한지 18일후 옥스포드대학 앞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이 설교는 그 의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만큼 그의 중생 이전의 이론과 그 내용 이 완전히 달랐다. 영국국교는 웨슬리를 의식을 깨뜨리는 자로 간주, 그를 배척하기 시 작했다. 벌써 런던에 있는 교회들도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네 교회만 그에게 설교를 허락했다. 또 뉴케이트 감옥에 수용된 죄수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전에 해오 던 방법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돼 그는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영국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1739년 4월 2일부 터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예의범절만 찾던 영국교회의 목사들은 제복차림으로 노천에서 전도 하는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른 목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지만 그날 오후4시 나는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약 3천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웨슬리는 야외설교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의 새로운 선교방법에 대 해 성도들이 걱정을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나에게 내 능력에 따라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악한 자를 바로잡고 덕이 있는 자를 견고하게 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교구에서 일하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누 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합니다. 그렇 기때문에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위슬레 대헌장의 요지다.

그러던 중 웨슬리 일행에게 일대 수난이 다가왔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감리교도들에게 박해가 심했다. 그들이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운동이나 왕권 회복운동으로 오인, 교구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 다. 이러한 폭도들의 행패는 1757년까지 계속됐다. 1742년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속회를 조직하고 첫 모임을 가졌다. 속회는 대략 12명이 한팀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간증과 성경공부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감리교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1776년 처음 발표된 총회통계를 보면 감리교엔 목사 97명, 성도 1만 9천7백61명, 순회지구 40개로 나타나있다. 그 일년후에는 성도가 2만5천9 백11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이 커지고 양적으로 발전한 감리교는 1984년 웨슬리는 기독교사 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첫 사랑의 상처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려고 했으나 나이 48세때 미망인인 파질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의 변태 행각과 질투로 별거하게 됐으며 얼마후 부인은 병으 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반면 웨슬리가 받은 복은 컸다.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많은 일을 했다. 영국 전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등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4천번이상의 설교를 했고 일생을 통해 선교여행한 총거리가 40 만km 에 달했다. 1790년 6월 28일 87회 생일을 맞은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 이 기록했다. [오늘부터 나는 87세가 된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 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물결이 멈추기까지 육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 뿐이다.] 그해 10월 웨슬리는 수섹스주 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때 주를 찾으며 그가 가까이 계실때 부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일을 중지하 고 시티 로드교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됐다. 1791년 3월 2일. 그의 작은 방에는 열 한사람이 모여 있었다. 침상위에 누운 웨슬리 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의 유해는 시티 로드교회 뒤뜰에 안장되었다.

영국사회를 믿음으로 구원한 믿음의 아버지 웨슬리는 다른 여타의 유럽국가들이 유혈혁명으로 타락된 산업혁명이후 사회에서 벗어난 것과 달리 영국에 명예혁명이라는 영광스런 사회변혁의 중심적인 사상을 제공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구원을 이뤄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의 효시였다. 그의 후계자인 우리도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한 그의 선언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선교 대상으로 삼고 그들에게 구제, 교육 등 갖가지 방법으로 선교를 펴야 할 것이다.

  


 통계로 본 요한 웨슬리 
 
 

전도생활

50년간 말을 타고 지구 10바퀴이상 되는 거리를 다님

선교거리

40만Km

하루평균 다닌 거리

32Km

저술

200권이 넘음

설교회수

4000번 이상 설교

60년간 변함없는 생활

새벽4시 기상 기도와 설교

찬송생활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만든 찬송가중 525곡을 선정 찬송가만듬

사망5일전 생활(88세)

32Km떨어진 곳에 복음 전도

함께한 사역자

죠지 휫필드, 챨스 웨슬리 등

 

 



 

웨슬리 회심일 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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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9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죤 웨슬리의 일기

 

 

출처 : 주님뜻대로만 살게하소서
글쓴이 : 오지랖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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