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가 회심했던 올더스게이트 거리
올더스게이트 거리는 영국 상업의 중심지이다. 세인트 폴 성당 뒤편으로 런던박물관을 정면으로 향하여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출처- 웨슬리스토리)
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런던 박물관 옆에 위치한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 지금은 그가 거듭남을 체험한 집회장소가 남아 있지 않고, 회심당일(1738년 5월 24일)의 일기를 적은 커다란 불꽃 모양의 동판이 이 곳이 웨슬리의 회심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다. 2003년 3백주년 기념으로 동판을 만든 것이다. 기념비 내용은 회심일의 일기이다. 정확한 회심위치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의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영국 학자들은 런던박물관 자리를 주장하고 있고 미국 학자들은 30m 정도 거리를 더 올라가 길가에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대학교에서 1926년 8월에 기증한 명판을 설치했다.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 죤 웨슬리의 일기 -
촬스 웨슬리 회심 기념비
“하나님은 그의 일꾼을 묻으시지만 당신의 일은 계속하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k" 기념비 맨 꼭대기 책에 적혀 있다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이었던 찰스 웨슬리 목사를 기념하여 설교자로서 그는 탁월한 능력과 열정이 있었고 유능했으며, 많이 배웠으나 자만하지 않고 경건했으나 허식이 없었으며, 다른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의 아들이었지만, 자만하는 자와, 위선자와 경건치 못한 자에게는 우레의 아들이었다. 그는 감리교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형인 존 웨슬리 목사와 함께 순회설교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선한 군병으로서 고난과 박해와 수모를 견뎠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 크게 헌신하여 이 나라에 최초로 감리교 모임들을 만들었다. 그리스도인 시인으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영어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찬송가로 교훈과 위로를 전했다. 그는 1707년 12월 18일에 태어나 1788년 3월 29일에 죽었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고 경건하게 믿었으며, 영국교회의 진실한 친구였다
촬스 웨슬리 회심 기념비
촬스는 존 웨슬리보다 3일 앞서 회심하였는데 찰스 웨슬리의 회심장소는 Mr. Bray의 집(John Bray's House)이다
촬스웨슬리가 회심한 집
촬스 웨슬리의 회심 (회심기념비)
1738년 5월 21일, 아픔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의 런던에서 그는 발견했다. 그와 그의 형 존이 그토록 오래 오래 찾아왔었던 것을 그는 드디어 찾았던 것이다. '나는 찾았다 내 자신이 하나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소망 안에서 기쁨에 넘쳤다.' 수일 내로 그는 찬송가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출한 재능을 발견하였다. 이 회심의 경험 이후 쓴 그의 첫 찬송은 이렇다: -나의 경이로운 영혼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내가 어떻게 내 모두를 하늘에 열망할까요? 한 노예였던 내가 죽음과 죄로부터 구원을 받다니, 영원한 불구덩이에서 불타던 막대기가 꺼내어져 구원을 받다니, 아 어찌하면 그만한 승리의 개가를 다 표현하여 올릴 수 있으리요, 혹은 나의 이 위대한 구세주께 찬양을 어찌다 노래할 수 있으리요? 아무리 찬양을 많이 올린다 해도 그 높으신 구원의 은총에 까지 올라가기란 너무너무 부족하기만한 그 구원의 경이로움이란. 1749년에 42세의 나이로 찰스는 20세의 사라와 결혼하였다. 결혼후 처음 4년 동안 그들은 함께 여행하며, 찰스는 설교했다. 그의 형처럼 전국을 다니며 순회설교를 하였다. 영감이 폭발할 때, 그는 펜! 종이! 펜! 종이! 하며 소리치며 공부방으로 뛰쳐갔다
웨슬리형제 기념우표
1999년, 영국에서 지난 천 년을 기념하며 "The Christian's Tale "라는 주제로 기념우표를 만들었는데 그 중 웨슬리 형제를 기념하는 우표이다. 중앙에 "천사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 제목이 보이고 이 찬양이 수록된 찬송가 Hymns and Sacred Poems(1739) 표지, 그리고 웨슬리 예배당 스테인드 글라스, 존 웨슬리가 찰스에게 쓴 편지의 일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리교 센트럴 홀
1912년 존 웨슬리를 기념하기위해 세워졌다. 1898년 "감리교 20세기 기금" 이 모아져 세워졌다. 1946년1.10- 2.14 까지 제1차 UN 총회가 열린 장소로 유명하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계단에는 존 웨슬리의 동상이 서있는데 본래 이 동상은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웨슬리스토리)
웨스트민스트 사원
왕실의 교회로 유명한 이 사원안에 존과 촬스웨슬리의 기념비가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에 대한 영국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웨슬리 스토리)
웨슬리형제 기념비, 웨스트민스터 사원, 원안의 사진은 왼쪽은 촬스웨슬리 오른쪽이 존 웨슬리이다
아래 사진은 존 웨슬리가 아버지 사무엘웨슬리의 무덤위에서 설교하는 장면이다
웨스트민스터의 사원에는 웨슬리 형제를 위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말한 세가지 명언이 기록되어있다. 기념비의 내용은 (존 웨슬리, 1703.6.17 출생, 1771.3.2 사망, 촬스 웨슬리, 1707.12.18 출생, 1788.3.29 사망, 첫 번째 명언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두 번째 명언 "세계는 나의 교구다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k)" ) (사진 출처- 기독교세계, 감리교)
세인트 폴 대성당
성 바울 대성당 건물 정면에서 왼쪽에는 교회마당과 정원이 뒤로 연결이 되는데 바로 이곳에 동상이 서있다. 이 동상은 감리교 센트럴 홀에 있는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동상을 복제해서 만든 것으로 1988년에 세워졌다. 출처- "웨슬리 스토리" 조선석 피기영 글 사진
이 책은 영국 선교사로 사역하던 조선석 목사와 피기영 목사가 저술한 책이다
아주 귀한 사진들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블러그 여러곳에 사용 하였다
세인트 매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곳, (출처- 기독교타임즈, 웨슬리연구소)
세인트매리교회, 웨슬리가 설교하던 강단,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의 펠로우로 있는 동안 교수와 학생을 대상으로 몇 차례 이곳에서 명설교를 했다. 존 웨슬리는 66년이라는 공식사역기간동안 무려 4만회의 설교를 했고 하는데, 간단히 계산해 보아도 하루 평균 2회 이상의 설교를 한 셈이다. 그의 무수한 설교 가운데 가히 명설교로 꼽히는 몇 편의 설교가 바로 이곳, 세인트메리교회에서 교수와 학생들, 졸업생들 앞에서 선포됐다.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Salvation by Faith)이라는 설교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구원의 믿음에 대한 부족함을 절감하고 낙심했던 웨슬리가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1738년 3월 4일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설교를 그만 두어라. 너 자신이 믿음이 없으면서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마음의 소리에 가책을 느끼며 설교를 그만 두어야 할지 아닌지에 대해 뵐러에게 묻는다. 뵐러는 의기소침해 있는 웨슬리에게 대답한다.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라고. 이후 웨슬리의 관심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두 달이 지난 5월 24일 웨슬리는 올더스게잇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강한 확신과 회심을 경험한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난 웨슬리는 에베소서 2장 8절(‘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을 본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이후 그의 몇몇 설교는 대학에서 논란거리가 됐다. 웨슬리의 8월 24일자 일기를 펼쳐보면, ‘성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했다. 아마도 이것이 최후였을 것이다..... 나는 나의 소신을 유감없이 피력했다. 대학의 소사가 와서 부총장께서 나의 설교노트를 보기 원한다고 하기에 하나님의 현명하신 섭리를 찬미하면서 지체 없이 노트를 보냈다’라며, 자신의 설교에 대한 주위의 비판적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웨슬리는 대학교회에서 여러차례 설교할 기회를 얻었을 만큼 뛰어난 설교자였다. 하지만 이번 설교는 오직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고, 형식적이고 믿음 없는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참석했던 교수들은 이를 문제 삼아 웨슬리가 대학교회의 설교단에 서지 못하게 한다. 무엇이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을까? 궁금하다면 웨슬리의 대표적인 설교 53편을 묶어 펴낸 [표준설교집]을 열어보시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90프로 크리스찬’ ‘신앙에 의한 의인’... 존 웨슬리가 성서에서 찾아낸 하늘가는 길을 한번쯤 진지하게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세인트 매리교회 강단
웨슬리형제가 설교했다는 내용의 안내문
세인트 매리교회 내부 (블로그 > 자유자 카이사르)
세인트 매리교회( 옥스퍼드 웨슬리기념채플)
세인트 매리교회 유리문
St. Mary Church에는 존 웨슬리 300주년기념으로 예배당 현관문(유리문)을 존 웨슬리의 예배당(John Wesley's Chaple)이란 글씨가 새겨진 문을 만들어 달았다. 사실 웨슬리의 마지막 설교가 "옥스퍼드 위선자"였음에도 이 채플이름을 웨슬리 예배당으로 만든 것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영국 차터하우스
존 웨슬리가 몸담은 수도원은 카르투지오수도회가 런던에 세운 차터하우스 스쿨(Charter House School)이다. ‘차터하우스’는 ‘특별히 허가된 기관’이라는 뜻의 ‘카르투지오’(Carthusian)란 프랑스어로 된 수도원 명칭에서 유래됐다. 수도사들은 1349년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웨슬리가 차터하우스 스쿨에 다닌 것은 그의 나이 11세인 1714년부터 1720년까지로 6년간 이곳에서 엄격한 신앙훈련과 함께 도제교육을 받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사춘기에 수도원 교육을 통과한 셈이다. 필자가 런던에서 선교 사역하는 동문의 도움으로 차터하우스를 찾았을 때는 애석하게도 출입이 통제된 시간이었다. 엄격한 경비요원의 저지로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었다. 실망하던 차에 한 노신사가 수도원에서 나왔다. 한국에서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인자한 모습의 노신사는 기꺼이 자신의 외출을 포기하고 수도원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다. 이분은 오랜 기간 감독목사로 봉직하다 은퇴한 뒤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는 암브로스 위커스라는 성직자였다. 수도원내 채플로 가는 복도에는 웨슬리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2층에는 그의 친필도 보관돼 있었다. 2층의 그랜드 챔버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1558년 이래 몇 차례 와서 기도하고 묵은 곳이었다. 1082년 무렵 프랑스 카르투지오에서 시작된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매우 엄격한 수도회 규칙에 따라 기도와 명상과 노동에 주력하는 영성기관이었다. 어린 웨슬리가 이곳에 입학할 당시 동료는 44명. 엄격한 교육을 견디지 못하는 훈련생들도 있었으나 웨슬리는 훌륭하게 적응했다고 한다. 극기의 힘은 유아기부터 어머니 수재너 여사에게서 받은 가정의 신앙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웨슬리는 수도원 교육이 오히려 편안하고 해방감을 느낄 정도로 만족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의 저널을 보면 후일에 그는 거의 해마다 차터하우스 교정을 찾아 산책하곤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웨슬리는 청소년 시절의 차터하우스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크리스천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한국 교회는 21세기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책임질 청소년들의 바른 영성교육에 주력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자녀 가운데 제2의 웨슬리 같은 인물이 배출된다면 우리나라와 교회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을까?수도원 교육기간에 상급생들이 하급생들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잘 인내했는데 그는 후일 이때를 회상하면서 그것이 도리어 건강에 유익한 결과가 되었다고 했다. 웨슬리는 차터하우스 시절에 스스로 다짐한 세 가지 수칙을 지켰다. ‘첫째,불량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둘째,내가 믿는 종교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셋째,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공예배에 빠지지 않으며 기도에 힘쓴다’는 다짐이었다. 웨슬리는 세상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청소년기를 스스로 ‘영적 자기 관리’에 힘씀으로써 극복했을 뿐 아니라 차터하우스 시절에 옥스퍼드 시절의 출중한 신앙훈련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기 자신의 영성 상태에 엄격할 정도로 민감하며 외적 경건과 상반되는 내적 갈등과 범죄의식에 괴로워했다. 즉 다른 사람들은 죄로 인식하지 않는 것도 웨슬리 자신은 죄로 인정하면서 부단히 성결의 은혜를 사모했다고 한다. 웨슬리는 6년간의 차터하우스 교육을 마치고 1720년 졸업한다. 그는 우수한 졸업 성적으로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았는데 당시 화폐가치로 매우 큰 금액이었다고 한다. 웨슬리는 같은 해 옥스퍼드의 40여 칼리지 중 가장 규모가 큰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한다. 이 학교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시작된 학교였다. 김성영 목사<성결대학교 총장> 출처 : 브리스톨연합교회, 글쓴이 : Good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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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church 칼리지 내부, 옥스포드
크라이스트처치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은 식당에서 한 모퉁이 돌아선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채플은 학생들에겐 예배의 자리를, 식당에 전시되어 있는 초상화의 주인공들에겐 육신의 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빛깔의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조각은 형형색색 특별한 이야기들로 모여, 대성당의 역사와 전통만큼 높은 명성을 뽐내고 있었다
촬스웨슬리 창문
크라이스트처치 바닥의 웨슬리 관련 석판, 웨슬리가 이곳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기록을 새겨 넣은 정사각형의 석판이다
옥스퍼드 링컨칼리지, christ church 후문
요한이 1720년 입학해서 1724년 B.A.학위를 취득한 크라이스트 처치는 옥스퍼드 산하의 여러 독립 대학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재정적으로 튼튼했으며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최고의 명문이었다. 크라이스트 처치는 저 유명한 윌리엄 글래드스톤(1809-98)을 비롯하여 총 14명의 영국 수상들을 배출했다니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크라이스트 처치의 캠퍼스는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특히 1529년에 지어졌다는 다이닝 홀이 인상깊었다. 이 학생 식당에는 영국 국왕 헨리 8세를 비롯하여 이 학교 출신 저명 인사들의 초상화들을 벽면 사방으로 삥 둘러가면서 걸어 놓았다. 요한의 초상화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벽에 걸려 있었다. 크라이스트 처치 바로 옆에는 옥스퍼드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요한은 이곳에서 1725년 준회원 안수를, 1728년에 정회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대성당 바닥에는 웨슬리 형제의 사제 서품을 기념하는 문구가 우아하게 새겨져 있었다. 내가 옥스퍼드를 방문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곳은 링컨 칼리지였다. 웨슬리는 1726년 이곳에서 휄로우가 되었다. 도대체 휄로우가 무엇인가? 그냥 교수인가? 아니면 특별 연구원인가? 흥미롭게도 우리를 시종 안내했던 여행사 직원도 이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결국 나는 링컨 칼리지 관계자와의 열띤 대화 끝에 이 궁금증을 비로소 해소할 수 있었다. 휄로우는 정식 페컬티 멤버, 즉 교수는 아니었다. 이 보다 훨씬 더 영예로운 작위였다. 마치 영국 학술원, 'Royal Society'의 정회원을 휄로우라고 부르듯이 링컨 칼리지가 뽑은 영예 종신직이 휄로우였다. (그러므로 휄로우는 다른 한국말로 번역할 필요 없이 그냥 휄로우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 싶다.) 웨슬리는 휄로우로 선출되면서부터 연구실 하나와 자유 배식의 특권과 지도할 학생들을 배정 받아서 희랍어 신약 성경과 논리학을 가르쳤다. 또한 연 1회 연금이 주어져서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런데 이 휄로우쉽은 종신직인데 일단 결혼할 경우 휄로우라는 칭호를 반납하는 것은 물론이고 급여까지 단념해야만 했다. 이러한 규정 때문에 웨슬리는 1751년 메어리 베제일과 만혼을 하게 됨으로서 결국 휄로우 자리를 내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좌우지간 사무엘은 아들 요한이 휄로우가 되자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내 아들 잭키[요한]는 링컨의 휄로우랍니다." 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리고 다녔다 한다. 링컨 칼리지 안에는 1926년 웨슬리의 휄로우쉽 수여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 미국 감리교회의 기부금으로 조성된 웨슬리 연구실이 있었다. 이 연구실에는 웨슬리를 그린 다양한 초상화들과 동상, 기념 접시들, 웨슬리 시대의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구석진 곳에 놓여 있는 세계 지도 원구가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쳤던 웨슬리의 정신을 절묘하게 표현해주고 있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 실질적으로 15년간 머물렀지만 링컨 칼리지의 휄로우쉽 연금을 받은 것까지 합산할 경우 거의 30년 이상의 인연을 맺어왔다. 그러므로 만년의 웨슬리가 옥스퍼드 시절을 유독 그리워했다는 사실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christ church 칼리지 식당 블로그명 : 앞니로 콕콕~~
크라이스트 처치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큰 단과 대학으로 가장 오래된 학문인 법학, 의학, 신학이 중심을 이루는 대학이다. 우리는 이 곳이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 책의 저자가 이 학교의 수학 교수였다. ― 영화 해리 포터(Harry Potter)의 촬영장소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마법학교 호그와트의 연회장으로 나왔던 식당은 참으로 어마어마했다. 그곳에 웨슬리를 비롯한, 헨리 8세(영국 성공회를 시작한 왕), 에라스무스(16세기 최대의 인문주의자) 등의 초상화가 셀 수 없이 걸려 있었다. 크라이스트 처치 예배당 안의 바닥 한 곳에는 웨슬리탄생 3백주년 기념으로 새긴,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크라이스트 처지 동문이었음을 보여주는 동판이 있었다
링컨 칼리지 (출처- 기독교타임즈, 웨슬리연구소)
링컨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존 웨슬리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이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라면, 링컨칼리지는 그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더 깊은 학문적 연구와 성숙한 신앙으로 몰입해 들어갔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톰타워(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 정문) 우측 첫 사거리에서 하이스트리트로 한 블록 올라가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나타나는 링컨칼리지. 언뜻 보기에 크라이스트처치의 1/5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박한 규모의 대학이지만 작다고 무시할 수 없는, 감리교인인 우리에게는 의미 깊은 곳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장차 감리교라는 거목으로 세워질 메도디스트 운동의 씨앗을 품었던 ‘홀리클럽=신성회’(Holy Club)가 모였었기 때문이다. 웨슬리 흉상은 사방에 철사로 만든 뾰족한 가시로 둘러싸여 비둘기의 오물 폭격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었다. 이 흉상 옆 창문 너머에 있는 방이 바로 웨슬리연구실이다. 이 연구실은 1926년 미국감리교회에서 존 웨슬리를 기념하기 위해 꾸몄다고 하는데, 실제로 존 웨슬리가 사용했던 방은 기념실 맞은편 방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구실로 향해 나무계단을 올라가 ‘웨슬리 룸’(The Wesely Room)이라는 문패와 문이 굳게 잠겨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돌아서려니 아쉬움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존 웨슬리는 1726년 이곳 링컨칼리지에 ‘펠로우’(Fellow)라는 교수직에 임명된다. 펠로우는 일종의 연구교수직으로 정교수를 지망하는 우수학생들 중 최고의 학생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자리다. 그는 1727년부터 링컨칼리지 학장의 복귀요청이 있었던 1729년까지 2년 동안 고향인 엡워쓰에서 아버지인 사무엘의 목회를 돕는다. 대학으로 복귀하던 1729년 11월, 그를 기다리는 한 무리가 있었으니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이었던 동생 찰스 웨슬리가 그해 1월에 꾸렸던 ‘홀리클럽’이었다 (기독교타임즈 곽인 기자)
링컨 칼리지의 웨슬리 흉상
웨슬리 흉상
링컨칼리지 벽에 있는 웨슬리 기념물
웨슬리가 교수로 봉직한 기간과 여기서 홀리클럽이 모임을 가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링컨 칼리지
링컨칼리지 잔디밭
웨슬리가는 옥스퍼드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요한의 아버지 사무엘이 엑세터 대학을 마쳤으며, 조부와 증조부 역시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요한 자신을 비롯하여 12세 연상인 장형 사무엘 2세, 그리고 4살 연하의 동생 촬스가 모두 크라이스트 동문이다. 축구장 2배 이상 크기인 잔디 운동장에서는 주인공 해리 포터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웨슬리 센터(Wesely Centre)
웨슬리 센터의 존 웨슬리 편지 원본
웨슬리 센타, 촬스 웨슬리 탄생 300주년 기념 포스터
영국전역에 흩어져 있던 웨슬리와 관련된 문서는 물론, 감리교에 대한 온갖 중요문서와 희귀자료를 수집해 활발히 연구를 펼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 연구소가 소중한 것은 매년 업데이트 된 감리교유산(Methodist Heritage)을 소개하는 책자를 펴내 웨슬리가 남긴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데 한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브룩스 대학교(Oxford Broookes University)에 속해있는 이 웨슬리 센터는 대학이 밀집한 옥스퍼드의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번호 ‘U1’을 단 브룩스대학 파란색 이층버스의 종착지에서 대학 안으로 5분 남짓 걸어들면, 하얀 예수상이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우리를 환영하듯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우뚝 서있다. 이 예수상 오른편에 웨슬리 센터가 아담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연구소 유리창에는 2007년에 탄생 3백주년을 맞는 찰스 웨슬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안내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내년 한 해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6월 28일부터 한 주 동안은 바로 이곳에서 강연과 찬양이 어우러진 세계적인 행사가 열릴 예정이라고 하니, 웨슬리연구의 중심지라는 말이 과장된 말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를 센터로 안내한 사람이 연구소 총책임자 피터포세이드 교수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간 듯 부스스한 머리에 단출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그를 그저 대학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으로 짐작했었는데, 눈을 반짝이며 웨슬리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 모습에서 괴짜천재임을 발견했다. 서고에서 코팅된 빛바랜 편지며, 말년의 웨슬리의 주름진 얼굴을 담은 초상화를 들고 나와 보물 보이듯 조심스레 내놓았다. 존 웨슬리는 신학서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바쁜 여정 가운데서도 일기, 저널, 편지, 설교문, 신구약주석, 신약성경번역본 등을 남겼다. 이 기록물들이 자료가 되어 웨슬리 센터의 서고를 가득 채우고 연구자를 기다리고 있다. 나오는 길에 다시 만난 예수상이 딛고 선 받침돌에는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Train up a child in the way he should go)는 잠언말씀이 새겨져있었다. 웹워쓰가 웨슬리가 태어난 곳이라면, 옥스퍼드는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가 탄생한 곳이었다
출처 (sola-gratia,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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