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별명으로 풀어본 경건주의(Pietism)에 대한 제 고찰

류성련 2014. 9. 29. 00:12

별명으로 풀어본 경건주의(Pietism)에 대한 제 고찰  

 

윤종훈 교수(총신대학교 교회사)

 

 

(본 논고는 2004년도 총신대학교 교지에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들어가는 말

  오늘날 경건(Piety)이라는 말이 개혁주의 와 복음주의 계통뿐만 아니라, 카톨릭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즉, 학문과 경건, 또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등 말이다. 과연 경건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용어를 명확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먼저 경건(Pietism)과 경건주의(Pietism)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경건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제시된 용어에서 비롯되었지만(가령 딤후 3:5), 경건주의라는 용어는 사실 교회사에서 등장하게 되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경건(Piety)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의 “eusebeia” 즉, 존경, 존중(reverence)을 의미하며, 선함과 거룩함(goodliness, holiness)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라틴어적 어법에서 이 용어의 의미는 “하나님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감정”을 의미하며, 독일어는 ‘신적이며 헌신적, 또는 점잖고 무해하며 단순한 것”을 지칭하고 있다.
  그럼, 역사선상에 등장하였던 경건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이를 비평적 관점에서 조망한 여러 별명들을 통하여 진정한 경건주의는 무엇이었으며,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는 강렬한 도전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경건주의의 역사적 배경

  우리가 중세의 역사와 신학을 고찰해 볼 때, 이 시대는 약 1000년의 역사를 두고 온통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집단아래 카톨릭의 전통과 관습, 예전에 물들어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입각한 획일적인 신학구도 속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인들에게 새롭게 다가온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존 칼빈, 울리히 쯔빙글리 등을 통하여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은 참으로 어머어마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새 시대를 맞이하여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 위해, 과연 프로테스탄트의 신학과 신앙고백, 그리고 신앙은 어느 면에서 카톨릭과 다른가? 라는 점에 대하여 자기들의 소리를 내기 시작 하였다. 즉, 즉 이들은 중세의 성경중심에서 벗어난, 오직 교회의 전통과 의식, 예전중심의 신학에 대하여 종교개혁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중세신학의 한계와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초대교회를 비롯하여 성경에 제시하고 있는 진정한 신학과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중세의 암흑의 세계에 빠져있던 중세인들에게 제시된 진정한 복음주의 운동은 참으로 커다란 대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한번 상상해 보라!
 
중세의 성경은 전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일반 성도들은 결코 라틴어를 제대로 읽을 수도 듣고 해석할 수도 없는 분위기 속에서 모든 예배가 라틴어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당시 예배 시간에 성경을 낭독하던 독경사들 마저도 성경을 낭독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라틴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죽은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배형태 속에 항상 예배에 참여하던 성도들의 영적 고갈 및 기갈 상태야말로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세는 종교개혁을 맞이하여 성경이 독일어와 영어로 번역되기 시작하게 되자, 누구나 성경을 스스로 읽고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젠 성경연구가 가능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것이다.

  1000여 년 동안 흘러왔던 신학의 흐름을 바꾸어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초대교회의 진정한 교회의 모습과 성도의 삶과 신앙의 회복을 꿈꾸었지만, 문제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교회란 어떤 단체인가? 어떠한 신학적 입장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가? 에 대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너무나 다양하게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루터와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루터가 주장하는 신학이 다르고, 쯔빙글리와 칼빈의 제 신학들이, 그리고 이 외의 수많은 종교개혁의 2세들의 신학적 입장과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게다가 루터는 루터파를 형성케 되었고, 쯔빙글리는 자기의 신학을 중심으로하여 단체를 형성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칼빈은 개혁주의라는 새로운 단체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모두는 중세의 카톨릭의 신학과 신앙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카톨릭 신학과의 차이점을 제시하기 위하여 주장함에 있어서 각 교파들은 중세 카톨릭과 다른 신앙고백과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교회사가들은 흔히 “신앙고백주의 시대 또는
정통주의시대” (Orthodoxy)라고 지칭하고 있다.
  전 유럽이 정통주의 시대를 맞이하자, 카톨릭 국가와 교황은 서로 결탁하여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마녀사냥(!)에 나서게 되었다. 수 많은 군주들을 동원하여 카톨릭의 위상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다 보니, 유럽의 역사는 종교와의 전쟁, 즉, “기독교 안에서의 서로 죽이기 운동”이 한창 진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신학적 분열이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자 수 많은 병리현상들과 구교와 신교 사이의 전쟁으로 확산되어 엄청난 혈전들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전쟁은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1562-1598), 20년 간에 걸친 영국 혁명 또는 청교도 혁명(1620-1640), 30년간에 걸친 독일을 위시한 30년 종교전쟁(1618-1648)등을 일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정통주의 또는 신앙고백주의는 비롯 중세 예전중심 신학의 한계점과 문제점을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신학으로 재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정통주의는 신학적인 근거를 성경 위에 두어 성경해석을 통하여 전체의 교리와 이론을 설명코자 노력하였으며, 기독교 신앙의 합리적 옹호와 교리의 교정에 초점을 맞추게 됨으로 해서 16세기의 신학의 위대한 유산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조직, 발전시킴으로써 개신교 신학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통주의의 신학의 체계화 작업은 당시 일상적인 삶과 연계시키는 면에 있어서는 너무 소원하였으며, 논리의 정연함과 학문에 대하여 너무 몰두한 나머지 번쇄주의적이며 교리논쟁에 일관하였다. 따라서, 16-7세기의 정통주의는 진정한 기독교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너무 객관적인 교리의 진리체계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개인적인 영적인 체험을 너무 도외시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사실, 그 원인은 당시 많은 이단적 경향이 짙던 여러 분파들 속에서 신비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요소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수한 교리와 성경의 영감설만을 강조하는 정통주의에 대한 회의를 느낀 자들은 루터와 칼빈을 통한 종교개혁의 불씨를 다시금 새롭게 조명하여 일으킨다는 미명하에 반정통주의 운동(The Anti-Orthodox Movement)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을 가르켜 “제 2의 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경건주의를 제창하던 자들은 정통교리를 무시하기 보다는 개혁의 선배들이 이룩한 정통교리를 수호하되 단순히 이를 번쇄화 하기 보다는 교리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Ortho-Praxis), 또는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더 소중함을 깨닫고 교리에서 실천으로 강조점을 옮기게 되었다. 이 운동은 특히 1690-1730년대 독일교회를 중심으로 전 유럽국가에 새로운 신앙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2. 경건주의 운동의 기원

  어느 역사가에 의하면, 경건주의는 테오도르 운테릭(Theodore Unterlyk)의 조국 네덜란드와 슈패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가 청년시절 방문하여 깊은 인생을 받았던 쟝 드 르 바디(Jean de le Badie, 1610-1674)의 조국 스위스에서 독일로 전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혹자는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 1565-1631)의 저명한 저서인 [경건의 실천](Practice of Piety)과 같은 영국 퓨리탄 저서들의 영향을 결코 간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경건주의는 형식화된 국가종교에 대한 반동일 뿐만 아니라, 독일을 황폐화 시킨 30년전쟁(1618-1648)의 공포에 대한 염세적인 반응으로 보기도 하였고, 중세적 경건의 여러 특징들이 복고된 것으로 즉, 모라비안들을 기점으로 하여 감리교도들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부류들도 있다. 알브레히트 릿츌(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자신의 저서인 [경건주의의 역사, 1880-1886]에서 지적하길, 이는 당시에 현대적인 것으로부터의 후퇴, 즉, 역행적인 운동으로 비쳐졌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건주의 운동은 반카톨릭 운동의 출원지인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 입각하여 당시 정통주의 신학이 너무 영적으로 드라이한 모습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신앙의 생활화를 추구한 운동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게 보인다.

3.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개괄적 스케치.

  경건주의는 개혁파 경건주의와 루터파 경건주의로 대별할 수 있으나, 개혁파는 루터파 보다 약 10년 앞선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 중 개혁파 경건주의의 계보를 정리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 원인은 개혁파 경건주의가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거의 동시 다발적이며 산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륙의 개혁파 경건주의는 영국의 경건주의적 퓨리타니즘의 산물로 이해된다. 개혁파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는 먼저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인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를 들 수 있으며, 그의 제자이자 1610년 화란으로 망명하였던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를 지목할 수 있다. 게다가 토마스 테일러(Thomas Tayler, 1576-1633)와 윌리암 휫틀리(1583-1639) 등은 청교도적 개혁파 경건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개혁파 경건주의의 효시들을 살펴 보자면, 에르네스트 슈트플러(Ernest Stoeffler)에 의하면 대륙 최초의 경건주의자로 불리우던 자는 다름 아닌 쟝 드 타펭(Jean de Taffin)이었으며, 그는 1599년 잉글란드의 브라운주의자들(the Brownists)과 서신왕래를 통하여 경건성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고트프리드 코넬리우스 우데만스( Gottfried Cornelius Udemans, 1580?-1649?)로서, 타펭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동 시대 개혁파 경건주의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서, 타펭이 내면성, 기도, 영적 고양의 느낌, 행복감을 강조한 반면, 우데만스는 경건의 출발점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법의 준수에 있다고 강조하였기에, “엄격주의, 엄정주의, 형식주의(Precisionism)’’에 빠진 자로 묘사되기 하였다. 윌리암 테링크(William Teellinck, 1579-1629)는 수 차례 영국에 머물면서 퓨리탄들의 경건에 영향을 받았으며, 당시 존 도드(John Dod)와 아더 힐더삼(Arthur Hildersam)의 큰 영향을 받아 대륙으로 건너와 경건주의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콕세이우스(Johannes Cocceius, 1603-1669)는 계약신학 즉, 연합신학(Federal Theology)을 강조하였으며, 보에티우스(Boetius, 1589-1676)는 경건 훈련으로서의 금욕을 매우 강조함으로써, 당시 바른 삶이 결여된 계몽주의적 영향을 받은 새로운 신학에 경종을 울리게 되었다.
  루터파 경건주의는 17세기에 읽혀졌던 신비주의적 신앙서적들로부터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았다.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들은 마르틴 루터 뿐만 아니라, 루터파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슈패너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를 비롯하여, 중생의 신비를 강조한 카스페르 슈벵크펠드 폰 오찌즈(Casper Shwenkfeld von Ossig, 1489-1561),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그리고 발렌틴 비겔(Valentin Weigel, 1533-1588), 제이콥 뵈메(Jacob Bhme, 1575-1624)등을 들 수 있다.
  루터파 경건주의의 창시자는 슈패너로써, 그는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 True Christianity, Walhres Christentum]라는 책을 읽고 너무 감동된 나머지 1675년 [경건한 소원, Pia Desideria]을 출간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루터파 경건주의의 출발을 알리는 경적소리가 되었다. 슈패너의 후계자인 프랑케(August Herman Francke, 1663-1727)는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통하여 경건주의 운동을 이끌어갔다. 그는 고아원, 빈민학교를 비롯하여 성경연구원, 라틴어학교, 출판사, 진료소, 부속기업 등을 세워 경건주의 운동의 확산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 다른 경건주의 지도자로서는 고트프이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를 들 수 있다. 그는 슈패너 보다 훨씬 강하게 당대의 기성교회의 현실과 신자들의 일상생활을 향하여 회초리를 들어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특히 당대의 교회를 향하여 “바벨의 장송곡”(Baelsgrablied)을 외침으로서 민족교회를 향해 조가를 불렀고 모든 교회기구들을 배격하고 신비주의적 노선을 선호하는 과격한 경건주의자의 면모를 나타내었다. 또 다른 인물로서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과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어(Friedrich Christoph Oetinger, 1702-1782)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단 교회를 지도자였던 진젠도르프(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를 들 수 있다. 특히, 진젠도르프는 영국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4. 별명을 통해서 본 경건주의

  어느 한 개인에게 주어진 별명은 제아무리 변명을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본질과 성향(Characteristics)적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코훌쩍”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고 하자. 분명한 사실은 이 사람은 살아오는 과정에 있어서 어느 시점에 코를 많이 흘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이 주어졌을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처럼, 근 현대 교회사에 등장한 운동가운데 정통주의에 대한 반기와 이를 극복 코자 시도된 경건주의를 별명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은 경건주의의 여러 단면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관찰이라고 보여진다.

  사실, 이 “경건주의”라는 명칭은 당시 정통주의자들이나 카톨릭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정통주의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삶의 신학을 주창하며 경건성을 추구하던 무리들을 향한 하나의 야유와 비난이 섞인 칭호이었다.
 

  첫 번째로, “감정주의”(Emotionalism)라는 별명을 들 수 있다.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의 스콜라 신학과 철학에 입각한 정통주의를 벗어나서 너무 감정을 위주로 신학과 신앙생활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주어진 별명이다. 이들은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다 보니 아무래도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보다 감정에 치우친 면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특히, 대륙의 최초 개혁파 경건주의자라로 불리 우던 쟝 드 타펭은 “느낌의 신학, Feeling Theology”을 주창하였다. 즉, 신앙이란 단순한 신앙고백을 통해 주어지는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되 감정에 느낌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는 훗날에 19세기의 현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이자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워진 슐라이에르마허 (Friedrich Schleiermacher,1768-1834)로 하여금 신정통주의신학 (Neo-Orthodoxy)의 출발점인 “감정의 신학”을 주장하는 포문을 제시해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둘째로, “신비주의” (Mysticism)라는 별명을 들 수 있다. 이 별명은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필립 슈패너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불후의 명저인 [진정한 기독교]의 저자인 요한 아른트는 신비주의 진영에 속한 자였기에, 그에게 영향을 받아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킨 슈패너는 신비주의 성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경건주의의 영적 감흥과 삶의 신학을 주창함에 있어서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열정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신비주의 성향적인 면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와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셋째, “합리주의”(Rationalism) 성향을 들 수 있다. 경건주의가 태동할 당시 16-17세기의 유럽의 사상적 조류는 합리주의가 팽배해져 가는 상황에 있었다.
  14-15세기 유럽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일어났던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은 미국, 음악, 철학, 문학, 과학 등 문화부분뿐만 아니라 경제생활, 사회구조, 정치체제에 걸쳐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이는 중세 봉건제도의 구체제에 대한 반동으로서 인간의 이성과 개인의 자유를 주창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16세기에 전 유럽에 “합리주의”를 태동케 하였다.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신론(Deism- 성경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연구하고 계시를 부정하거나 그 역할을 현저히 후퇴시켜서 그리스도교의 신앙내용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의 종교관)이 그 대표적인 일례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당시 경건주의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경건주의가 당시의 시대사조였던 합리주의의 또 다른 형태의 이념이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 것이다.

  넷째로, “주관주의”(Subjectivism)를 들 수 있다. 신앙고백주의 당시의 여러 가지 신조들 즉, 스코틀란드 신앙고백(1560년), 벨기에 신앙고백(1561년),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1651년), 도르트 신조(1618-9)등과 같이 성경을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주제중심으로 규격화시킨 신조에 입각한 신학을 강조한 정통주의에 비해, 경건주의는 정해진 신조보다는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다 보니 신비주의의 기본구조인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적 요소를 다분히 소유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금욕주의”(Ascetism)라는 별명을 들 수 있다. 경건주의는 “삶의 경건”을 인생의 제 1원리로 삼았기 때문에 세상의 욕심과 욕망 그리고 쾌락과 향락을 멀리하고자 하였기에, 그 결과 신비주의의 한 요소인 금욕주의적인 경향성을 띄게 되었다.

  여섯째, “정숙주의”(Quietism)를 들 수 있다. 이는 정적 주의라고도 불리며, 카톨릭 안에서 일어난 경건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운동 중 한 부류이었다. 스페인의 미구엘 데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40-96)의 저서인 [영혼의 안내서, Guida Spirituale, 1675]가 출판되면서 시작되었다. 몰리노스에 의하면, 신자는 하나님 속에 사라지고 죽고, 상실되어야 하며, 육체와 영혼을 막론하고 일체 행동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하였다(The essence of quietism is that perfection lies in the complete passivity of the soul before God and the absorption of the individual in the divine love to the point of annihilation not only of will but of all effort or desire for effort).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는 무엇보다도 내적 광명의 신학적 성향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으며, 특히 하나님과 신자와의 합일사상을 매우 강조한 점을 고찰해 볼 때 경건주의는 정숙주의의 성향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숙주의 성향은 극도의 개인주의를 낳게 되며, 교회의 그 중요성과 역할을 상실하게 되며, 신자들은 정치와 사회 생활에 무관심을 같게 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일곱째, “혼합주의”(Syncretism)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정숙주의 등의 혼합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여덟째, “천년왕국주의”(Chiliasm)라는 별명으로서, 이러한 천년왕국 사상은 단지 경건주의의 시대적 산물이라기 보다는, 이미 마르틴 루터도 이 땅 위에 속히 도래될 천년왕국사상을 꿈꾸었으며, 그 이후 잉글란드의 대다수 퓨리탄들은 천년왕국 실현이 잉글란드에 곧 임박해있으며 머지 않아 이룩될 것으로 기대를 한껏 모았다. 특히 경건주의의 창시자인 슈패너는 “보다 나은 시대를 향한 소망”을 꿈꾸었기 때문에 그의 종말론인 이와 같은 천년왕국 사상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망은 요한 아른트의 영향에 거의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아홉째, “도덕주의” (Moralism)를 들 수 있다. 슈패너의 뒤를 이어 경건주의운동을 기치를 드높인 프랑케는 경건이 생활의 엄격한 도덕관으로 전환되면서 세상적인 쾌락, 오락, 단싱, 카드놀이 등이 하나님 앞에 큰 죄악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당대인들부터 경건주의는 한낮 도덕주의자들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고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열째, “율법주의”(legalism)를 들 수 있다. 루터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라는 명제가 그의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칭의 사상이 루터파 정통주의 신학사상의 주 요점이었다. 이에 반하여 경건주의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 보다는 체험적인 중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케는 이 둘의 조화를 시도하기 위하여 루터파의 정통주의의 칭의 사상과 경건주의의 중생 사상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감당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케는 중생에로의 준비과정으로서 “율법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둠으로써 경건주의는 율법주의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열 한번 째, “분리주의”(Sepratism)이라는 비난 섞인 별명을 들 수 있다. 항상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집단은 분리주의적인 색채를 띨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사에 등장한 여러 가지 형태의 신학교단들은 카톨릭을 중심으로 기존 교단에 의해 정죄 당하거나 이단으로 규정됨으로써 수 많은 억압과 핍박 그리고 화형을 당하기 까지 하였다. 따라서, 개 교단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분리주의(sectarian)적인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령, 카타리파, 왈도파, 재세례파와 토마스 뮌쳐운동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들 수 있다. 교리와 신조 중심의 정통주의에 비하여 경건주의는 하나님과 신자와의 일대일 관계성을 추구하다 보니,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건주의 운동은 중세의 성례적 제도적 교회의 문제점과 중세의 객관성의 원칙 즉, 하나님, 교회, 신앙, 교리 등과 정통주의의 사변적이고도 드라이한 신학구도에서 탈피하여 근대인들의 특징인 개개인의 인격성에 근거를 둔 개인적인 신앙체험의 신학과 주관성의 원칙, 즉 인간의 이성과 감정, 체험적 진리, 그리고 신자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신학을 주창한 근대적 신앙운동이었다.
  앞서 별명들을 통해 고찰한 바와 같이, 경건주의는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다 보니, 성경에 근거한 전통적인 교리와 지적인 신앙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기독교를 한낮 윤리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려는 결과는 낳게 되었다. 성경과 초대교회의 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참된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한 바른 교리와 이에 대한 정확한 신앙고백 그리고 믿음에 기반을 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개인적이고도 주관적, 체험적인 신앙은 이러한 기반에 기초했을 때에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와 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적인 성향아래 시작된 이 운동은 금욕주의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세상의 문화와 문명에 대하여 너무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만물을 통치하며 보존하고 유지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문화대명령”에 대한 균형을 상실케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게다가 경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규율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선에 빠짐과 동시에 자신들과 같은 경건주의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신앙적 우월의식을 향유코자 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또한, 경건주의가 가진 루터의 이신칭의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은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이신칭의에 대한 루터의 법정적 차원의 “의 개념” 즉, 법정적 객관주의에 반하여, 이를 하나님과의 새로운 실존적 관계라는 차원으로 이해코자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적인 변화와 하나님과의 합일로 인한 내적 본질의 변화성을 크게 강조함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성화의 과정을 이루게 된다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이해의 약화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 운동은 전 유럽에 커다란 신학과 신앙의 금자탑을 형성하였다. 16세기 당시 신앙고백주의 시대의 번쇄적이고 스콜라신학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진정한 신앙의 변화와 열매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진정한 신앙은 단순한 지식과 고백보다는 거룩한 삶,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을 구현임을 입증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슈패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모임을 주창하여, 소금이 모든 것을 고르게 함과 같이, 신자의 삶이 신학과 경건적 영성과 교제, 나눔, 섬김 그리고 치밀하고 밀도있는 삶의 신학을 나누는 성경공부 등을 통하여 하나의 유기체적인 교회관을 세워가도록 노력하였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하여 경건주의가 주는 메시지는 매우 강렬하다.
  교회의 도덕성이 땅에 실추되었고, 신학과 목회의 괴리 현상이 심각하게 지적되고 있으며, 칭의와 성화의 연관성을 상실하고 교리와 삶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경건주의는 참으로 많은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거듭나야만 한다. 초대교회의 복음의 순수성과, 고백적 신앙으로 결론을 맺고 마는 열매를 상실한 예배의식과, 예배를 드림이 신앙생활의 전부로 인식하는 신앙적 태도에 일대 변혁의 바람이 불어야 할 것이다. 근대교회사에 등장했던 정통주의의 신앙고백중심의 한계점도 철저하게 인식하여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진정한 장점을 되살린 한국교회에 새롭게 적용할 진정한 신학이 출원하게 된다면 이 보다 더 이상향적인 신학적 프로그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출처 : 이미와 아직의 여운
글쓴이 : 라벤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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