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경건주의

류성련 2014. 9. 29. 00:11

경건주의

 

경건주의의 아버지하면 대체로 필립 야콥 스페너(1635-1705)를 꼽는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경건주의 아버지로 스페너보다는 요한 아론트(1555-1621)를 꼽기도 하나 스페너가 훨씬 괄목할 공헌을 하였다.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는 루벡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키엘에서 학생 시절에 스페너의 감화를 받고 경건주의자가 된다.


경건주의는 스페너를 세례 때 대부로 삼았던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돌프(1700-1760)(주 : 모라비아교회의 창설자. 그는 종교적 표현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고, 많은 찬송시를 썼는데 그중의 일부는 영어로 번역되었다.)에게 영향을 미쳤다. 진젠돌프는 열렬한 경건주의자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경건주의 학교인 할레 대학에 보내어 프랑케 아래 수학하도록 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1703년 부친 사무엘 웨슬리와 모친 수산나 사이에서 첫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엡워드의 영국국교회 목사로서 청교도적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Ⅰ.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경건주의에 대한 정의

 

  경건주의는 시작된 때로 보아, 넓은 의미의 경건주의와 좁은 의미의 경건주의로 말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1600년경에
시작된 신앙적 흐름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1670년경의 필립 야곱 스페너에 의해 시작된 운동을 가리킨다.

 

  1. 넓은 의미의 경건주의(지형은, 『경건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글모음』, St. Charles university Graduate School 강의록, 1995년 11월, pp.11-14)

 

  넓은 의미로 경건주의를 정의할 때 초점은 <경건의 흐름>에 있다. 경건주의 모두에 공통적인 신앙과 사상의 흐름이 언제부터 주도적이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물음은 두 가지의 답을 요구한다. 경건주의 모두가 가진 흐름이 <무엇>이냐? 와 그 흐름이 <언제>부터 당시를 지배하기 시작했는가이다.
  1555년은 종교개혁 시대가 끝나고 개신교 정통주의가 시작된 해이다. 이 해에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가 열렸다. 종교개혁 후 무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던 루터파와 로마 카톨릭이 화해하였다. 개혁교도 사실상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세 집단은  논쟁과 변증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교리의 체계가 세워졌다. 이러한 정통주의 시대를 “신조시대”, “개신교 스콜라주의”. “교리논쟁 시대” 등으로 부르는 까닭이 이러한 때문이다. 이러한 중에 1600년경의 유럽에서 <경건성의 위기>가 있었다. 대략 종교개혁 후 3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순수한 교리, 거대한 신조의 체계는 더 이상 절실하지 않았다. 거대한 신학 체계가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며 경험되는지가 문제였다. 이러한 영적인 위기는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의 영역 안에서, 네덜란드의 “제2의 종교개혁운동”안에서 그리고 독일의 정통주의 안에서 공통적이었다.
  위기는 종종 새로운 방향을 향한 기회이다. 그래서 방향전환이 있게 된다. <새로운 경건성>이 일었다. 이것이 요한 아른트(Johann Arndt)에게서 대표적으로 가장 잘 나타난다. 그 내용은 교리로부터 삶으로 강조점을 옮기는 것이었다. 순수한 교리의 체계와 그것을 방어하는 것보다 바른 교리에 따라서 변환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개관적인 교리보다 주관적인 체험이 더 문제였다. 기억할만한 것은 초기 정통주의의 시대에 이미 새로운 경건성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아 아른트는 넓은 의미의  경건주의의 아버지이다.

 

  2. 좁은 의미의 경건주의(Ibid., pp.14-29)

 

  좁은 의미의 경건주의는 1670년경 스페너(Philip Jakob Spener)에 의해 시작된 운동을 가리킨다. 아른트는 교리에서 삶으로 강조점을 옮긴 새로운 경건성을 대표적으로 표현하여 글로써 영향을 미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에 비해 스페너는 이 새로운 경건성이 활동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함으로써 구체적인 운동이 시작되게 하였다. 이른트에 의해 새로운 시대의 금이 그어진 것만큼 스페너에 의하여 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런 점에서 스페너는 경건주의의 창시자이다.
  1635년에 태어난 필립 야콥 스페너는 1600년경에 시작된 새로운 경건성의  분위기 가운데에서 자랐다. 그가 자란 알사스 로렌 지방은 스트라스부르크를 중심한 루터교 정통주의가 지배하던 곳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 정통주의의 분위기는 교회의 개혁을 강조하는 새로운 경건성으로 채워져 있었다.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스페너가 마인 강변의 도시 프랑크프르트의 수석목사로 청빙받은 것이 1666년이었다. 1670년 스페너는 교구의 몇몇 사람들과 함께 소그룹 모임을 시작하였다. <경건한 모임, Collegia Pietatis>라고 불리운 이런 모임은 경건주의 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1675년에 스페너는 경건주의의 방향제시서라고 불리는 『경건한 요청』에서 교회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제안들을 밝혔다. 경건의 모임을 비롯한 다른 여러 가지가 여기에 담겼다. 특히 이 책을 통하여 스페너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겼고 다른 도시에서도 스페너의 보기를 따라 소그룹 모임들이 일어났다. 이제 아른트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경건성은 그 구체적인 마당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사회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경건주의를 좁은 의미로 보아 스페너를 그 창시자로 부르는 까닭이 이런 맥락 때문이다.
  스페너를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부르는 가장 큰 까닭은 무엇보다도 1675년에 발간된 그의 책 때문이다. 『경건한 요청』 - 참된 복음적 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갱신하려는, 심증으로부터의 요구 - 이 경건주의 연구사에서, ‘교회사의 새로운 시대를 연 책’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책의 중요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새로운 시대, 곧 경건주의가 이 책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요한네스 발만(Johannes Wallmann)은 『경건의 요청』에는 두 가지 새로운 것이 있다고 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lla in ecclesia)란 사상과 ‘교회의 더 나은 시대를 향한 소망’(Hoffnung besserer zeiten fuer die kirche)이라고 불리는 천년왕국설이다. 이 둘로써 『경건한 요청』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교회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Ⅱ. 『경건의 요청』(Pia Dsideria)의 내용 요약 분석

 

   1. 배경(Ibid., p.30)

 

  『경건한 요청』을 쓴 1675년, 40세의 스페너는 프랑크푸루트의 수석목사로 있었다. 당시의 프랑크프르트는 30년 전쟁(1618~1684) 후 다시금 빠른 속도로 부흥하고 있었다. 남북가 동서의 교역로를 연결하는 이 곳은 특히 책의 도시였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서 책시장이 열렸다. 프랑크푸르트는 당시 유럽에서 아주 중요한 책의 유통 도시였다. 1675년에 이 도시의  출판업자인 쭌너(Johann David Zunner)가 요한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을 발간하면서 스페너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요한 아른트는 1600년대에 가장 많이 읽힌 경건서적의 저자였다. 서문이라는 글 양식은 당시에, 오늘날과는 달리, 그저 간단히 책을 추천하는 정도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밝히는 저술 양식 가운데 하나였다.
  스페너는 이 서문을 교회갱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힐 기회로 삼았다. 1675년 봄 책시장에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이 출간되었다. 스페너가 쓴 서문은 2절지 28쪽 분량이었다. 스페너의 서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의 요청때문에 이 서문이 같은 해 가을 책시장에 단행본으로 따로 출판되었다. 그 단행본에 붙은 제목이 바로 『경건한 요청』이었다.

 

  2. 내용 요약 및 분석

 

  1) 서문의 내용 및 분석

   (1) 서문과 본론의 관계구조(Ibid., pp.32-33)
  『경건한 요청』의 서문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경건한 요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문을 깊게 살펴야 한다. 우선 서문이 본론보다 6개월 뒤에 쓰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스페너가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에 쓴 서문>에는 물론 따로 제목이 없었다. 약 6개월 후 가을 책 시장에 이 내용이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경건한 요청』이란 제목이 붙었고, 이 단행본을 위하여 스페너가 <서문>을 썼다. 서문은 스페너가 아른트의 설교집 서문에 대한 독자들(교계와 신학계)의 반응을 약 6개월 동안 겪고 나서 쓴 글인 셈이다.
  서문은 두 가지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먼저, 이 서문은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 서문>에 대한 스페너 자신의 최초의 해석이다. 스페너는 서문에서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 서문을 스스로 분석하며 그 기본 구상을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서문에는 <복음서 설교집 서문>, 곧 본론이 함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본론의 세 부분, 진단과 예측, 처방의 내용이 매우
간결하게 다듬어져 표현되어 있다.
   (2) 서문의 내용 및 분석(Ibid., pp.33-35)
  스페너는 의학용어로써 교회를 분석한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인 교회는 ‘병’들어 있고 그래서 ‘처방약’이 필요하다. 교회의 병든 상태 언급은 본론의 첫 부분을 지시하고 있다. 처방약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 제안이 담긴 셋째 부분을 가리킨다. 교회갱신에 참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고 그래서 인내가 필요하지만, “우리가 기다릴 때 하나님의 시간은 오고야 만다!” 교회갱신을 위하여 사람이 노력해야 하지만 갱신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다. 독자는 본론의 두 번째 부분의 소리를 이미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서문 전체를 꿰뚫고 있는 주제가 <실천>임은 명백하다. 교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약과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교회를 이론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스페너의 목적이 아니었다.
  독자들을 교회갱신에 참여하도록 호소하여 교회를 새롭게 만들려는 것이 스페너의 목적이었다. 스페너가 서문의 약 삼분지 일을 “우리 같이 … 합시다”는 표현으로 쓴 것도 실천을 겨냥한 그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스페너는 교회갱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구상을 밝힌다. 교회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먼저 모으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들에게 우선권을 두고 이들을 먼저 양육하여 신앙의 본이 되게 하고, 교회 전체를 개혁 해 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성장에 필요한 것을 기꺼이 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들을 헌신합시다. 각 목회자들이 개 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이러한 사람들을 먼저 양육하고, 이들의 구원의 분량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는 이들의 본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도록 일합시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점점 가까이 끌 수 있게 되며 결국에는 그들도 구원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지신의 신앙성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사람들을 먼저 돕고 이들의 신앙성장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 나의 모든 제안들은 거의 전적으로 이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되어서 그래서 기초가 놓이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쏟는 노력이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서문의 이 부분은 『경건한 요청』 전체의 핵심이며 요약이다. 경건주의의 교회갱신 방법이 여기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정통주의가 (1) 법적인 치리를 통하여 (2) 전체교회를 한꺼번에 개혁하려고 하였다면 경건주의는 (1) 경건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신앙의 헌신을 통하여 (2) 누룩이 퍼지듯이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2) 본론의 내용 및 분석

   (1) 본론의 구조 Ibid., pp.31-32.
  『경건한 요청』은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뉜다. 서문과 본론이다. 본론은 다시 셋으로 쪼갤 수 있다.
  첫째, 교회의 현재상태를 진단함. : 참되고 사랑 있는 믿음이 없어서 타락함.
  둘째, 장래상태를 예측함. :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더 나은 교회 상태를 약속하셨음.
  셋째, 교회개혁을 위하여 처방함. : 6가지이 구체적인 제안.
  진단, 예측, 처방의 세 부분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장 짧은 중간 부분이 셋 가운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문의 돌쩌귀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격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타락한 상태를 철저히 파헤친 후에는 절망할 수도 있다. 교회의 타락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또는 교회의 타락을, 실천과는 상관없이 이론적으로만 분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현재상태를 진단한 첫부분은 그렇게 끝날 수 없다. 둘째 부분의 희망때문이다. 교회에 주어진 희망의  약속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용기를 기질 수 있고 또 그 희망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가 그토록 타락했다는 것을 알고나면 이런저런 구체적인 갱신의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 갱신에 참여하는 것은 더더욱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교회의 갱신에의 구체적 제안이 담긴 셋째 부분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는다. 둘째 부분의 희망 때문이다. 교회갱신을 위하여 제안하는 것은 정당하고 또 의미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갱신된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갱신의 <가능성>을 보장한다. 갱신을 위한 제안의 <의미성>은 여기에 뿌리를 둔다. 이로부터 교회갱신을 위한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이 희망론은 첫째와 셋째 부분을 떨어지지 않게 이어 본론 전체를 하나로 만든다.
   (2) 본론의 첫 번째 부분 : 현재의 타락한 교회상태를 진단함(Ibid., pp35-37)
  스페너는 교회가 타락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전체 기독교가 타락했음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스페너는 예레미야의 통곡의 말을(9:1) 들면서 본론을 연다.  그는 타락의 근본원인을,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파헤쳐나가며, 분석의 대상을 “복음적 교회”(Evangelische Kirche), 곧 루터파 교회로 좁힌다. 루터파 교회가 타락하여 비참하게 된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하다. 첫째는 육체적인 것으로서 페스트, 굶주림, 전쟁 등이다. 스페너는 이것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면서 동시에 하니님의 배려로 본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것은, 두 번째 것으로서, 영적인 것이다. 스페너는 영적인 것을 더 큰 문제로 보았다.
  영적인 비참함에는 다시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외부(로마 카톨릭)로부터 오는 박해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그 자체의 잘못이다. 스페너는 또 외부의 박해를 주변적인 것으로 보아 옆으로 미루어 놓고 교회 자체의 죄악을 분석하는데 집중한다. 교회의 타락을 분석하면서 스페너는 당시의 루터교가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을 따른다. (세속 정치가, 성직자, 평민, 스페너는 각 계층의 타락상을 들추어낸다.)
  세속정치가에게는 교회를 보호하고 육성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많은 정치가들이 교회에 대한 선한 관심은커녕 자신의 사리사욕에만 붙잡혀 있다. 이런 사람의 타락상은 사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스페너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교회를 위하여 애써서 일해 보려는 정치가들조차도 타락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성직자의 타락도 두 가지로 나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과 스스로의 상태에서 타락한 모습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 나중 것이다. 성직자들 스스로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평민의 타락도 둘로 구분된다. 일반적인 삶에서의 타락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의 타락상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서 드러나는 타락이 더 크게  문제된다.
  스페너에 의하면 모든 계층의 타락의 근본원인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스페너는 여기에서 루터를 따른다.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서 말한 살아있는 믿음을 말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열매 맺는 믿음을 말한다. 스페너는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을 바른 교리와 그에 따른 열매로 보았다. <교리 + 삶>인 것이다. 스페너가 보기에는 루터파 교회에는 이 둘 가운데 <삶>이 빠져 있었다. 스페너가 루터파 교회의 타락을 분석하면서 <교리>의 타락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바른 교리에 따른 삶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3) 본론의 두 번째 부분 : 미래의 영광스러운 교회상태를 예견함(Ibid., pp.37-38)
  스페너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이 지상에서 아직 더 나은 상태를 약속하셨다.”고 믿었다. 성경에는 주님의 재림 말고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많은 유대인이 개종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바벨론(로마 카톨릭 교회)의 멸망이다. 이 두 예언이 성취되면 곧 이어서 교회의 영광스러운 상태가 올 것이다. 스페너가
『경건한 요청』에서 “더 나은 상태”, “영광스러운 상태” 등으로 조심스럽게 표현한 것은 천년왕국을 뜻한 것임이 분명하다.
  스페너는 주의 재림 전에 있을 <교회의 더 나은 상태>를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완전론자라고 비난하리라는 것을 예상한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그리스도인 완전론과 교회의 완전론을 전개한다. 스페너는 절대적 완전을 거부한다. 그러나 초대교회를 들면서, 가라지가 있더라도 알곡의 열매가 풍성하여 가라지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이 땅에서 교회가 도달할 수 있는 완전으로 제시한다.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상태가 곧 완전의 상태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스페너는 교회의 희망을 두 가지로써 보증한다. 하나는 성경의 예언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상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보기이다.
  (4) 본론의 세 번째 부분 : 교회갱신을 위해 구체적인 여섯 가지 방법을 제안함(Ibid., pp.38-41)
  스페너가 제시하는 여섯 가지 방법은 모두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갱신의 핵심이다. 스페너는, 성경의 일부분만을 포함하는 당시의 ‘교회력 성구’(Perikope)를 비판하면서 성경의 모든 책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를 위하여 스페너는 서문에서 말한, 신앙성장을 위해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의 소그룹 모임(경건의 모임, Collegia Pietatis)을 제안했다. 성경의 근거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이었다. 스페너는 이러한 소모임을 1674년에 쓴 한 편지에서 “교회 속의 작은 교회”라고 표현했다.
  두 번째는 만인제사장직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이다. 스페너는 루터에 의해 발견된 이 진리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경쟁이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 목회자들이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은 평신도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제사장직의 실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서로 나누는 것이다.
  세 번째는 기독교는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인 삶에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실천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우리 구주께서는 자기의 제자된 표로써 거듭 사랑을 요구하셨다(요 13:34-35, 15:12; 요일 3:10, 18, 4:7-8, 11-13, 21; 피터 C. 어브, 『경건주의자들과 그 사상』, 엄성옥 역 (서울 : 은성출판사, 1994), pp.46-47).
  네 번째는 당시 정통주의 시대에  한껏 유행이던 종파간의 논쟁을 비판하면서 교리적 논쟁보다 기독교의 근본 덕목인 사랑이 더 우선임을 강조한다. 그 다음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 의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의무요, 둘째는 그들에게 선한 본을 보여 주고, 결코 그들을 노하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을 때에는, 겸손하고도 단호한 태도로 우리가 믿는 진리를 제시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단순한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넷째, 여기에 불신자들과 이단자들을 향한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의 실천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p.48-53).
  다섯 번째는 신학교육의 개혁에 관한 것이다. 신학은 단순한 학문이나 지식의 체계가 아니다. “신학의 본질은 실천에 있다.” 신학교수는 스페너의 뜻을 밝혀 말하자면 ‘신학대학의 목회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인 목회자를 길러내기 위해서 신학 교수들이 먼저 본이 되어야 한다. 신학교육에서 지식의 습득이나 학업성적보다 경건한 삶과 신앙 성품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여섯 번째는 신학생들의 경건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다섯 번째의 훈련 외에도, 장차 목회를 하면서 다루게 될 일들을 실습할 수 있도록 예비하여 주는 것도 유익할 것이란 내용이다. 예를 들자면,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병자들을 위문하거나 설교를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의 목적이 덕성의 함양에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설교의 목적(신앙과 열매)이 청취자들의 내면에서 최대한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Ibid., pp.61-65).

 

  Ⅲ. 1687년 프랑케의 L. neburg 회심의 의미에 대하여?

 

   1. 개인적 의미(*Ibid., pp.141-154)

 

  그는 자서전에서 1687년까지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라이프찌히에서의 초기 생활에서 나의 신앙생활은 천하고 좋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나의 목적은 유명하고 유식한 사람이 되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있었다. … 나는 하늘에 계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해 살려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그들의 마음에 들게 하려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 나의 지식은 증가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나는 더욱 교만해졌다.”
  그러나 그는 24세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영적 상태를 벗어나기를 갈망했다. 1687년 가을 친척인 글록시니(Gloxini)박사의 권유로 뤼 네부르그(L? Neburg)로 가서 주석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세인트 요한 교회의 설교를 요청 받고 요한복음 20:31절을 가지고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란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던 중 자기 자신은 그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설교에 대한 묵상을 집어치우고 자신에 대해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 그는 두려움 속에서 무릎을 끓고 “아직 알지 못하고 신뢰하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말일 그분이 진실로 하나님이라면 이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해달라고 외쳤다.” 그러던중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도를 시작할 때는 의심과 염려를 지니고 무릎을 끓었지만 다시 일어설 때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큰 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붙들었으며, 이 세상에서의 승진이나 명예, 부귀, 행복, 표면적인 세상의 허세 등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2. 경건주의의 의미(E. S. 모이어, 『인물중심의 교회사』, 곽안전?심재원 역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3), pp.375-384)

 

  프랑게는 회심후 경건주의의  유력한 교사와 강의자로 활약하였고, 이것 때문에 대학에서의 파면과 엘풀트에서의 목회에서 쫓겨났으며, 그 후 할례 시의 근방에 있는 마을의 목사가 되었고, 새로 설립된 할레 대학의 교수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교육원리로 스페너의 일반적인 종교교육 원리를 장려하였고, 그의 고상한 이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 개신교 최초의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의 중심부가 되어 훌륭한 교사, 목사, 외국 선교사 및 유력한 평신도들을 유럽에 공급하게 되었다. 할레 대학은 창설된지 3, 40년 동안에 약 6,000명의 신학자가 배출되었고, 이 경건주의는 미국 루터교회에도 영향을 끼치고, 여러 세대에 걸쳐서 개인과 교회 단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주의(웨슬레는 경건주의자인 진젠돌프 백작이 이끄는 헤른트 후트 형제단 교회의 모라비안 전통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를 연결하여 준 진젠돌프 니콜라스 루드빅(Nicholas Ludwig)도 10세에서 16세까지 할레에서 교육을 받았다. 특히 덴마크와 할레의 합동 선교 사업으로 덴마크의 왕이 할레 대학의 프랑케에게 인도에 있는 자기 나라 식민지로 보낼 선교사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할레 대학에서는 서슴치않고 이를 수락하여, 할레의 2선교사를 인도로 파송하였고, 18세기에 할레에서는 약 60명의 인도 선교사를 공급했다.
  경건주의 운동은 무엇보다도 성경운동이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는 경건주의는 이 성경을 모든 이에게 보급하는 일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프랑케가 세운 고아학교의 여러 부속 활동으로서 <고아원출판사>가 세워졌다. 스페너의 글을 제일 처음으로 출판했던 여기에서 성경이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이 출판사의 일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사람이 하인리히 율리우스 엘러스(Heinrich Julius Elers, 1667-1728)였다. 그리고 성경을 값싸게 출판하여 보급하는 일을 실제적으로 현실화시킨 사람은 칼 힐데브란트 폰 칸스타인(Carl Hildrbrand von Canstein, 1667-1719)남작이었다. 프랑케의 최고의 동역자는 바로 이 사람이었으며, 그는 엘러트의 문서선교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도 했으며,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칸스타인의 출판사의 성경번역사업이 발전하여 1710년에 할레 성서공회, 1775년에 칸스타인 성서공회라고 불리웠던 이 기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더 풍성해야 한다”는 요청을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이루어졌다(지형은 op. cit., pp.59-69).

 

  Ⅳ. 경건주의가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하여 가지는 의의?

 

  1995년 한국 감리교회 경기연회 보고에 의하면 지난 한 해 동안 감리교인은 약 3만 명이 감소했다고 했다. 300명 모이는 교회 100교회가 사라진 결과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작금의 한국교회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고 새롭게 개혁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와 같은 하강 곡선이 지속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교인 감소 현상은 감리교회 뿐만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성공주의, 불건전한 신비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각종 인본주의 사상들이 강하게 침투되어 참과 거짓을 바로 분별키 어려운 가치관 상실의 시대였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최고의 성장속도를 과시했다. 이 모든 축복은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로 감사해야 할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은 통째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본 강의의 서두에서 교수님이 말씀 하신 것과 같이, 참 신앙인, 산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더불어 인간사이에서의 수평적 관계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경건이다. 현 시대와 같이 하나님 따로, 예배 따로, 기도 따로, 교회생활 따로, 생활 따로의 이중적 생활을 통째적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경건주의에서 찾을 있을 것이다.
  할레 경건주의의 창시자인 프랑케가 세인트 요한 교회의 설교 요청을 받고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 이란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던 중 자신에게는 이 믿음이 없음을 깨닫고 고민하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다가 결국 그는 회심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문제는 기독교인이 적어서가 아니다. 기독교인은 국민의 4/1 이상이나 되지만 진실된 교인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교회는 많지만 진짜 예수님의 소리를 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 원인은 누구에게 있나? 주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즉 목회자에게 이 책임의 근본 원인이 있다. 경건주의는 신앙의 실천을 지향한 운동이요, 신학적으로는 칭의론보다는 성화론을 더 강조하는 운동이다. 문학작품이나 시국연설, 철학적, 윤리적 소리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정말로 하나님의 소리를 하는지? 밥줄을 이어 가기 위한 궁색한 고등 사기꾼의 행각은 아닌지?(이것조차 모르고 있는 더 더욱 한심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동방박사들의 물음에 명쾌하게 그 장소를 알려 주었으나 알면서도 찾아가 경배 드리지 않은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오히려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다.)의 모습이 오늘 우리 목회자들의 모습은 아닐까?
  내가 먼저 은혜 받고, 내가 먼저 체험하고, 내가 먼저 실천하고, 내가 먼저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내가 먼저” “또 내가 먼저”가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작금의 현실은 신학과 목회현장과의 너무나 큰 괴리의 현실을 보고있다. 감리교 3개 신학대학에서의 가르침과 목회현장의 요구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상이다. 신학은 목회현장에서의 정리되지 않은 소리들을 정리하는 것이고, 목회현장(교회)는 신학으로 정리된 목회의 현상들을 다시 적용하여 검증 받는 곳이다. 즉 신학과 교회는 따로 떨어질 수 없는 두개의 수레바퀴며, 이 둘은 계속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신학 없는 목회, 목회 없는 신학은 있을 수 없다.
  경건주의는 신학과 목회의 분리를 낳은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문제는 경건주의의 중심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경건의 개념은 소유적 개념이 아닌 관계적 개념이다. 즉 자기 수양이나 도를 닦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를 가짐으로써 경건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학과 목회현장의 괴리현상은 양쪽이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를 인식하려고 할 때 서로를 보완해 줄 것이며, 특히 필립 야곱 스페너의 『경건의 요청』 본론 세 번째 부분 중 교회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여섯 가지의 방법에서 네 번째는 당시 정통주의 시대에  한껏 유행하던 종파간의 논쟁을 비판하면서 교리적 논쟁보다 기독교의 근본 덕목인 사랑이 더 우선 임을 강조한다. 그 다음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 의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의무요, 둘째는 그들에게 선한 본을 보여 주고, 결코 그들을 노하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을 때에는, 겸손하고도 단호한 태도로 우리가 믿는 진리를 제시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단순한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넷째, 여기에 불신자들과 이단자들을 향한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의 실천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은 신학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죄 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스페너의 요청 처럼 사랑을 우선한 비판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도 기도했는지? 또한 스페너가 “신학교 교수는 신학대학의 목회자”라고 했는데 신학자는 과연 자신들의 경건성을 위해 노력했는지? 그 경건성의 결과의 소리였는지? 를 신학자와 종교지도자 모두가 경건주의의 창시자 필립 야곱 스페너의 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할 것이다.


 

참고서적

 

1. 지형은『경건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글모음』, St. Charles university  Graduate School 강의록, 1995년 11월.
2.  피터 C. 어브, 『경건주의자들과 그 사상』, 엄성옥 역, 서울 : 은성출판사,   1994.
3.  E. S. 모이어, 『인물중심의 교회사』, 곽안전?심재원 역,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3.

출처 : 축동언약교회
글쓴이 : 엔학고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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