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독일 루터교 교회 경건주의의 자리매김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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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치 원 (독일 뮌스터 대학 신학박사 /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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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본 소고는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까지 독일 루터교에서 일어났던 '교회' 경건주의를 교회사 및 신학사적으로 자리 매김 하고자 한다. '교회'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슈페너(Ph. J. Spener)를 중심으로 했던 경건주의, 프랑케(A. H. Francke)를 중심으로 했던 할레 경건주의, 그리고 벵엘(J. A. Bengel)을 중심으로 했던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를 급진파나, 신비주의적 그리고 교회 분열적 경건주의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경건주의를 자리 매김 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의 근세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경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의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경건주의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건주의에 대한 연구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일고 있는 '경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경건주의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닌, 정통주의에 대한 연구 결과에 의해 제기되고있다.
일반적으로 정통주의는 경건을 소홀히 하고 건조한 교리만을 강조하며 신학적 논쟁만을 일삼았다는 의미에서 '죽은 정통주의'(tote Orthodoxie, dead orthodoxy)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경건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붙여진 이 명칭이 정통주의를 편협하게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경건 서적과 설교집이 많이 읽혀지고, 많은 찬송가가 작곡, 작사되었으며, 교회에 대한 자기 비판과 개혁을 부르짖는 글이 많이 나온 시대가 다름 아닌 정통주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정통주의를 일반 정통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개혁 정통주의'(Reformorthodoxie), 또는 '경건주의의 선구자'(Vorpietismus)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통주의 전체가 살아있는 경건의 삶에 큰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된다. 이렇듯 최근의 정통주의 연구는 '경건 운동', 또는 '삶의 갱신 운동'으로 간주되던 경건주의의 입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본인은 최근의 정통주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경건주의라는 말이 교회사 및 신학사에 등장하게된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인은 '경건주의가 무엇이냐?'라는 물음 대신 정통주의에 대한 일반적 시대구분을 짤막하게 기술하고 이 구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렇게 질문을 전이하는 배경에는, 경건주의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정통주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함에서 올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통주의의 시대 구분의 문제점
교회사 및 신학사에서 독일의 정통주의는 일반적으로 초기 시기(Fru¨horthodoxie)와 전성 시기(Hochorthodoxie), 그리고 후기 시기(Spa¨torthodoxie)로 나뉜다. 초기 시기란 '아욱스브르크 종교 평화협정'(Augsburger Religionsfriede)이 체결된 1555년부터 1600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루터교와 개혁교회가 교회조직으로 발돋움하던 때였다. 당시 개혁교회는 비록 법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cuius regio, eius religio'(영주[領主]의 종교에 따라 그 지역의 종교가 결정된다는 말)의 원칙에 따라 독일에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전성 시기란 1600년경부터 1675년까지로 각 교회 조직체(카톨릭, 루터교, 개혁교회)간의 신학적 논쟁이 중요했던 시기로 신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하에 자신들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후기 시기란 슈페너의 『경건한 소원』이 출판된 1675년을 시작으로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Ch. Wolff)가 할레 대학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귀한 1740년에 이르는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로부터의 신앙적, 학문적 비판에 의해 와해되고 있었다.
정통주의를 이렇게 시대적으로 구분하는 배경에는 두 가지 입장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 하나는 독일의 루터교 경건주의는 슈페너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슈페너를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와 논쟁을 벌인 후기 정통주의 자들을 17세기 중엽까지 내려온 정통주의의 신학적 노선 위에 서있는 자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첫 번째 전제가 갖는 문제점을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두 번째 전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특히 독일에서 경건주의에 대한 최초의 논쟁으로 간주되는 슈페너와 게오르그 콘라드 딜펠트(G. K. Dilfeld) 사이에서 일어난 신학적 입장에 대한 논쟁(1679-1680)을 중심으로, 슈페너를 중심으로 하는 경건주의자들과 후기 정통주의자들 중, 어느 쪽이 더 전성 시대 정통주의 신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정통주의를 세 부분으로 구별하는 시도의 문제점과 경건주의를 정통주의와 대립되는 운동으로 보는 견해의 편협성이 드러날 것이다.
슈페너와 딜펠트 간에 있었던 논쟁의 핵심은 '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딜펠트에 의하면 신학이란 신학적 명제를 성서의 근거로부터 설명하고, 증명하며, 변호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러한 신학 정의 하에서는 인간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은 전혀 필요 없고,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에 비해 슈페너는 신학을 성서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oijkonomiva를 깨닫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능력'(habitus qeovsdoto")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신학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이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주장은 각각 신학사적 전통을 가진다. 딜펠트의 신학이해는 멜랑히톤적 휴머니즘의 영향하에 신학을 하던 헬름스테트(Helmstedt)의 게오르그 칼릭스트(G. Calixt)와 예나(Jena)의 요하네스 무재우스(J. Musäus)에 의해 대변되었으며, 후에 계몽주의 신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요한 살로모 제믈러(J. S. Semler)에 의해 그 전통이 이어졌다. 이 신학적 계열의 특징은 학문적 신학과 개인의 경건을 분리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신학 내에서 이성에 보다 큰 자율을 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슈페너의 입장은 정통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인 예나의 요한 게하르트(J. Gerhard)를 비롯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발타자 마이스너(B. Meisner), 슈트라스부르크(Straßburg)의 요한 콘라드 단하우어(J. C. Dannhauer), 슈페너의 『경건한 소원』을 자신의 소원이라 환영했던 비텐베르크의 아브라함 칼로브(A. Calov) 등의 정통주의의 대표적 신학자들에 의해 대변되었다. 이 신학적 계열의 특징은 마르틴 루터의 "신학은 사변이 아니라 실천적이다"(Theologia est practica, non speculativa)라는 명제를 받아들여,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볼 때 신학 이해, 계시와 이성, 그리고 경건과 학문의 관계에 관한 한, 정통주의를 단순히 세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종교개혁에서 정통주의를 거쳐 신학적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부류의 신학적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사실은 경건주의와 정통주의의 관계 설정에 있어 두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함을 알려준다. 첫 번째는 경건주의가 정통주의를 비판할 때, 정통주의 제반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과 학문의 분리를 주장하며 신학 내에서 이성의 자율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경향을 띠는 정통주의를 문제삼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건주의와 논쟁을 벌인 후기 정통주의자들이 이 두 부류 중 어느 신학적 계열에 속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의 신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겠지만 경건주의와 논쟁을 벌인 신학자 및 목회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헬름스테트 대학의 신학적 영향하에 있거나 인본주의적 신학적 경향에 대해 동조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사실은 누가 더 요한 게하르트적 정통주의 신학적 노선에 서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이 더 정통적이며, 후기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 입장이 오히려 비정통적이라고 주장했던 할레 경건주의자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경건주의는 전성 시기의 정통주의와 지금까지 추정되어 온 것 보다 훨씬 더 가까운 연관성이 있다. 반면에 후기 정통주의는 비록 교의학의 구조적 체계와 관련해서는 스승들의 방법론에 머물지만, 이성과 계시 그리고 학문과 경건의 관계에 관한 한 스승들의 신학적 입지를 떠난다. 바로 이 점을 경건주의가 간파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면에서 경건주의와 후기 정통주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서에 대한 입장이다. 아래에서는 경건주의라는 말이 교회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한 사건을 중심으로 경건주의와 성서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건주의와 성서
경건주의라는 말은 프랑케(A. H. Francke)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라이프찌히(Leipzig) 대학에서의 소요 사건을 통해 교회사에 공식적인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소요 사건의 와중에 프랑케의 강의를 듣던 한 신학생의 영정에 바치는 조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조사는 프랑케의 활동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라이프찌히 대학 수사학 교수 요아힘 펠러(J. Feller)에 의해 쓰여졌다. 바로 이 조사 중에 경건주의자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건주의 자란 누구인가? 그는 성서를 연구하며 성서의 가르침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자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경건주의자라 불리는 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성서연구이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성서연구를 소홀히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적으로 하는 성서연구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성서를 강해하는 시간이 거의 사라졌으며, 성서연구는 교리적으로 중요한 '성서의 전거'(dicta probantia)만을 주석하는데 집중되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반해 경건주의자들의 성서연구의 초점은 교리해석이 아니라 성서 자체의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느냐에 귀를 기울였다. 교리보다 말씀 자체를 중요시했던 그들의 자세는 대학의 젊은 신학도들에게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켜, 단 몇 주일만에 라이프찌히에 있는 모든 헬라어 원어성경이 매진되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대학의 담을 넘어 전 라이프찌히 시에 말씀의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이는 경건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성서에 대한 경건'(Bibelfro¨mmigkeit)이라고 부른다. 슈페너가 그의 여섯 가지 『경건한 소원』 중 첫 번째로 성경공부가 활발해지기를, 그리고 두 번째로 성경공부의 효과적인 활성화를 위해 소그룹 모임을 제안했다는 것은 그의 성서에 대한 경건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경건주의의 성서에 대한 경건을 보다 더 잘 나타내 주는 것이 프랑케의 제2의 종교개혁에 대한 견해이다.
프랑케는 할레 대학 교수로 있을 당시 대학에서의 신학교육의 개혁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면서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먼저 그는 성서를 신학과 신앙의 기본 토대로 만든 것을 루터의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성서연구가 교의학과 논쟁신학의 시녀 역할을 하며 하나님 말씀 자체가 소홀히 되는 신학교육을 문제 삼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를 신학의 기초요, 신학의 중심 텍스트(Hauptwerk)로 다시 환원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 운동을 그는 제2의 종교개혁이라 불렀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 경건주의의 대명사로 불리는 '제2의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 즉 '삶의 갱신운동'이라는 말의 뜻과는 뉘앙스가 다른 이 제2의 종교개혁의 열정은 마침내 성서신학을 신학의 각 분과 중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그리고 고전어를 신학을 시작하기 전에 배워야하는 가장 기본적인 필수과목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역시되어 비판이 타부시 되던 루터역 성서의 오역을 학문적으로 지적하며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고, 나아가 히브리어 원어성서(1720, Halle)와 헬라어 원어성서(1734, Tübingen)의 편찬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성서의 보급을 위해 성서학회를 만들어 종교개혁부터 그때까지 배포된 양보다 몇 배나 되는 양의 성서를 보급하였으며, 심지어는 다른 여러 나라 언어로 성서를 찍어 그 나라들로 성서를 보냈던 사업들도 경건주의의 성서에 대한 경건을 잘 반영해 준다.
경건주의자들의 성서에 대한 경건은 학문적 연구나, 교회 내의 성경공부 그리고 성서 배포에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위에 언급된 조사가 보여주듯 그들은 또한 성서의 가르침대로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성서를 단지 교리의 책으로만 간주하는 것을 반대하고 성서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제도에 의한 경건의 훈련이 아닌, 성서에 기록된 구원의 직설법(Indikativ)에서 나오는 구원의 명령법(Imperativ)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경건주의의 두 번째 특징이다.
그러나 이렇듯 원래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고, 또 성서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이들을 향해 사용되어졌던 경건주의라는 말은 성서의 규범보다는 교회의 제도를 중시 여기던 후기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비웃음과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어졌다. 그들에게 있어 성서의 규범은 '비본질적인 것'(adiaphora)이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성서의 Imperativ(성화)를 소홀히 할 경우 복음의 본질적인 것, 즉 Indikativ(칭의)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건주의 자들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거듭 인용하며 칭의와 성화의 조화를 역설하게 된 것이다. 물론 후기 정통주의자들과 경건주의자들의 논쟁을 잘 살펴보면, 경건주의가 말하는 경건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율법주의적 옷을 입게 됨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소고는 지면의 한계상 이 문제를 생략한다.
나가는 말
경건주의를 특징지어주는 본질을 단순히 '삶의 갱신운동'으로만 보는 것은 독일 루터교 경건주의가 원래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쉽게 오해할 수 있다. 그들의 경건 운동은 '성서 안에서, 성서를 통한 경건 운동'(Fro¨mmigkeit in und durch die Schrift)이었다.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고, 또 성서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경건주의는 신학 이해와 이성과 계시의 관계, 그리고 경건과 학문의 관계에 관한 한 종교개혁과 17세기 중엽까지 이르는 정통주의와 같은 연속선상에 있다. 단지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된, 신학과 신앙의 분리를 주장하고 이성의 자율을 강조한 정통주의자들과 많은 대립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경건주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또한 성서와 루터의 종교 개혁적 사상을 담고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을 중히 여긴 슈페너를 중심으로 했던 경건주의, 프랑케를 중심으로 했던 할레 경건주의 그리고 벵엘을 중심으로 했던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를 급진파나, 신비주의적 그리고 교회 분열적 경건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교회' 경건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별 없이는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디아코니아 활동에 대한, 교육개혁에 대한, 신분계층의 타파를 통한 시민계급의 형성에 대한, 선교에 대한 등등의 교회 경건주의의 건설적인 기여를 바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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