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종교개혁과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에 대한 소고

류성련 2014. 9. 29. 00:59

종교개혁과 경건주의 오해에 대한 소고

 

 

 

 

종교개혁과 경건주의 오해에 대한 소고

 

I.머리말

 

II.경건주의에 관한 오해

 

III.오해의 역사

 

IV.경건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

 

V.맺는말

 

VI.각주

 

VII.필자소개

 

 

I.머리말

 

 

경건주의는 1600년대에 유럽에서 교회와 사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 이다.(주1) 유럽은 그 때에 중세 사회가 붕괴된 다음 사회 전체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에 있었던 개신교 갱신 운동 가운데 뒷날까지 가장 넓고 깊게 영향을 끼친 것이 경건주의다. 경건주의는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한편, 경건주의는 교회사와 신학사에서 가장 크게 오해를 받아온 운동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날 교회는 많은 점에서 경건주의 유산을 물려 받았 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esemann)은 그 사 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교회의 생명은 아직도 경건주의 안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영향을 얻고 있다. 오늘날도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경건주의 계통에서 배출되고 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쇠퇴는 전체 교회의 활동 영역에 대한 심각한 위기라 고 볼 수 있다."(주2)

 

케제만의 이 말은 유럽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경건주의 유산이 20세 기 끝무렵을 사는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흔히 경건주의를 신비주의나 열광주의, 도덕적 신인협력주의나 율법주 의, 인간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내세 지향적 개인 신앙이나 역사성을 무시한 외골수의 주관적 신앙으로 생각해 왔다.(주3) 그리하여 경건주의를 교회를 갱신 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를 퇴보시킨 운동으로 취급했다.

 

교회사에 있었던 어떤 운동이나 사조든 그 초기 형태와 나중에 주도권을 쥐고 난 뒤 형태가 같지 않다. 경건주의는 그 시대에서도 아주 많은 흐름을 포괄하고 있고 시간적으로도 매우 긴 시기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부정적인 모습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의 주된 흐름인 교회적 경건주의를 두고 볼 때, 또 경건주의가 초기에 가졌던 문제의식을 놓고 볼 때 위의 판단은 일방적이고 또 맞지 않다. 경건주의에 관한 잘못된 판단은 최근 30여 년 동안에 많이 바뀌었다. 경건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갱신한 운동임을 여러 학자들이 드러 냈다. 이 글은 경건주의가 오해 받아온 역사를 살피고 이로써 경건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하여 주로 경건주의의 연구사를 다룰 것이다.(주4)

 

 

II.경건주의에 관한 오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건주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 보자. 서구 교회와 사회는 경건주의라는 말을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내가 겪었던 일이 여기에 대한 한 단면이 될 것이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경건주 의를 공부하는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한 사람은 각성운동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경건주의에 관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경건주의적 전통을 가진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경건주의에 대하여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독일어권 사람들 이 '경건주의'(Pietismus)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는 것이었다.

 

영어권의 인식도 이와 비슷하다. 1962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에 경건주의를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한 데일 브라운(Dale W. Brown)은 논문 서문에서 경건주의적 전통을 가진 자기 출신 교단을 말하면서, '경건주의'라는 말이 영어 권에서 부정적인 함축성을 가지고 있음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주5)

 

우리 나라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흔히 경건주의는 사회적 차원을 무 시하고 개인적 성결만을 강조하는 신앙이며 그래서 그 안에 허구성을 가지고 있 는 것으로 평가된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경건'이란 낱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다. 경건이란 말이 개인주의적 신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이웃과의 수평적 관 계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만을 강조한다고 본다.(주6)

 

경건주의에 관한 오늘날의 이런 오해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경건주의 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 전역사(前歷史)를 가지고 있다.

 

 

III.오해의 역사

 

 

경건주의가 발생한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정통주의를 반대함이었다. 경건주 의 운동이 아직도 그 역사적 현장에서 자신을 방어하면서 정통주의와 싸우던 논 쟁은 대략 1740년 즈음에 끝난다.(주7) 객관적인 연구사는 당사자들의 세대가 지 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마련이다. 약 1820년대까지 계몽주의에 눌렸던 경건주의에 대한 관심은 1828년 빌헬름 호스바흐(Wilhelm Hossbach)가 경건주의 의 창시자 스페너의 전기를 펴내면서 다시 일기 시작했다.(주8) 이 때는 벌써 독 일에서 각성운동이 활발하던 때였고 영어권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1800년대 중 반의 대각성운동이 나타나고 있던 때였다.

 

경건주의 연구사에서 결정적인 책을 쓴 사람은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이다. 리츨은 {경건주의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세 권의 책을 썼는데 이 책들은 각각 1880, 1884, 1886년에 출판되었다.(주9) 그 즈음에 대단히 저명했던 이 신학자가 쓴 경건주의 연구서는 두 가지 점에서 기념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범위가 대단히 넓은 경건주의 분야를 한 개인이 일차 자료를 들추어가며 연구했다는 점이다.(주10) 그러나 둘째로, 경건주의를 한 쪽으로만 보고 평가했 고 이로써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 점이다. 도덕적 인격에 근거를 둔 리츨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경건주의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리츨은 경건주의 의 본질을 로마 카톨릭에 뿌리를 둔 신비주의적 영성주의(Mystischer Spiritualismus)에서 찾았다. 그래서 리츨은 경건주의를 교회를 퇴보시킨 운동으 로 평가했다. 리츨이 경건주의를 연구하던 때 경건주의를 훨씬 더 정당하게 평가한 학자들이 있었다. 리츨의 {경건주의 역사} 둘째 권이 나오던 해 오이겐 작세(Eugen Sachsse)가 {경건주의의 근원과 본질}이란 책을 내었다.(주11) 작세는 여러가지 점에서 리츨보다 더 바르게 경건주의를 평가했다. 리츨보다 조금 늦게 파울 그륀 베르크(Paul Gr nberg)가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에 관하여 세 권으로 된 책을 썼다.(주12) 이 연구서는 오늘날까지도 경건주의 연구에서 반드시 필요한 책이 다.(주13) 그륀베르크가 스페너를 연구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경건주의를 잘못 평가한 리츨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륀베르크에 따르면 리츨은 사료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될 수 있는대로 객관적으로 대상을 평가해야 하는 역사가로서의 자세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리츨과는 다른 눈으로 경건주의를 평가했던 사람이 또 있었다. 1904년에 칼 미 릎트(Carl Mirbt)는 {기독교 실제사전}에 "경건주의" 항목을 집필했다.(주14) 미 릎트는 이 글에서 경건주의를 교회와 신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운동으로 평가했다.

 

1908년에 호르스트 스테판(Horst Stephan)이 쓴 박사학위 논문은 그 제목부터가 벌써 이러한 방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교회와 신학과 일반적인 사 상 형성의 발전에 공헌한 경건주의"(주15)

 

경건주의를 향한 비판이 자유주의 신학 입장에 서 있는 저 유명한 리츨로부터 만 온 것은 아니었다.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도전장을 내었던 변 증법적 신학이 또 경건주의를 비판했다. 바르트나 투르나이젠이 경건주의를 도덕 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 신인협력주의로 보고 비판한 것이다.(주16) 그러나 이들이 공격한 것은 오늘날의 교회사적 지식으로 보면 경건주의가 아니라 각성운 동이었고,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자신을 방어하느라 움츠러들었던 각성운 동의 뒷물 정도였다.

 

대중적인 인식이 사실과 다를 때가 종종 있다. 경건주의는 워낙 유명했던 리츨 과 또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바르트 계열의 비판 때문에, 말하자면 당시 신학계와 사상계에서 유명세를 가진 사람들이 성급하게 판단했기 때문에 차분히 평가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경건주의는 이래저래 도매금으로 질타당하고 있었 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경건주의 연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대 략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이 시기를 주도한 사람은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와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였다.(주17) 이 둘은 모두 경건주의 연구 로써 학자의 길을 시작한 사람이다.

 

알란트는 리츨과는 크게 다른 입장에 서 있다. 경건주의의 뿌리를 로마 카톨릭 적인 신비주의적 영성주의에서 찾은 리츨과는 반대로, 알란트는 경건주의의 근원 이 루터교 정통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 즈음에 독일 땅이었던 스트라스 부르크의 루터교 정통주의에 경건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게 보아 정통주의와 신비주의적인 경향은 서로 대립된 사상이었던 것이다. 한편, 슈 미트는 알란트와는 또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경건주의 뿌리가 신비주의적 영성주의라고 주장함으로써 슈미트는 리츨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경건주의가 이 러한 뿌리로부터 그 당시의 교회와 사회를 갱신한 운동이라고 본 것에서 슈미트 는 리츨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슈미트는 평생 경건주의 연구에 힘을 쏟았다. 슈미트 이후로 서구 신학은 일반적으로 경건주의에 관한 슈미트의 견해 를 받아들였다. 교회사나 교리사를 전체적으로 다룬 책들에 담긴 경건주의에 대 한 설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나라에 그 동안 소개된 몇 안되는 경건주의에 관한 소개도 거의 슈미트의 견해에 머물러 있다.

 

경건주의 연구가 큰 전기를 맞는 것은 1964년이다. 이 때에 독일어권을 중심으 로 교계와 학계가 함께 참여하여 "경건주의 연구를 위한 역사위원회"가 조직되었 고 이 기구를 통하여 경건주의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양적으로 많은 연구 결 과가 나왔다.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경건주의에 관한 이전의 해석이 많이 수정 되었다. 이 때 이후로 경건주의 연구를 주도한 학자는 요한네스 발만(Johannes Wallmann)이다. 스위스 쮜리히 대학교에서 1961년에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의 지도로 정통주의 분야에 대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쓴 발만은 1968년에 보훔대학교(Ruhr Universitaet Bochum)에 교수자격 취득 논문(Habilitation)을 제출했다. 발만은 1960년대 중반부터 그가 쓴 논문에서 경건주의의 초기 발생사 (특히 루터교 경건주의)가 연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추 적해 왔는데 1968년 교수자격 취득 논문에서 이 문제를 철저히 파헤쳤다. {필립 야콥 스페너와 경건주의의 출발}이라는 제목으로 1970년에 출판된 이 연구는(주 18) 교회사 분야의 경건주의에만 아니라 바로크 시대를 연구하는 일반 사학계에 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경건주의 연구를 위하여 반드시 읽고 넘어 가야 할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만은 이 연구서에서 그 때까지 묻혀 있던 많은 일차 자료에 근거하여 경건주 의 발생 과정을 자세히 연구했다. 경건주의 창시자 스페너의 생애를, 스페너가 {경건한 요청}(Pia Desideria)를 쓴 1675년까지 철저하게 다루었다. 발만은, 경 건주의가 기본적으로 스트라스부르크의 루터교 정통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주19) 경건주의를 정통주의로부터 구분하는 그 근본적인 특징은 급진적 성향을 가진 네델란드 쪽의 개혁교 집단에서 왔음을 논증했다. 그 때까지 기성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했던 작은 모임 사상과 천년왕국적인 미래 대망 사상을 스페너 목 사가 어떻게 교회 안에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는지가 발만의 계속되는 연구를 통하 여 점점 분명해졌다.(주20)

 

지난 30여 년 동안을, 경건주의 연구의 분량과 깊이로 보아 '경건주의 연구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경건주의 연구는 주로 독일어권에 서 진행되었다. 영어권에서도 연구에 참여한 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비 율로 볼 때 아주 적었다.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경건주의에 관한 정보들이 주로 마 틴 슈미트의 견해에 머물고 있는 이유도 우리 나라 신학이 주로 영어권에서 개괄 적인 신학 정보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IV.경건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

 

 

지금까지 우리는 경건주의가 오해받아 왔던 연구사를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경건주의가 시작된 시대적 상황과 그 본질을 논의하는 것은 이 글 범위를 벗어나 는 것이다. 그러나 짧게나마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난 때의 시대적 의미를 개괄함 이 경건주의 연구사에 대한 이 글을 완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주21)

 

경건주의는 1600년대에 일어난 개신교적 갱신운동으로서 타락한 당시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경건주의가 방어적 이며 체제 유지적인 보수적 운동은 아니었다. 어떤 운동이든지 그것이 다수가 되 고 주도권을 쥐게 되면 체제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떤 운 동의 본질은 그 초기 성격에 비추어 평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살피면, 교회사 에서 경건주의만큼 혁신적인 운동도 드물다.

 

당시는 크게 보아 중세에서 근세로 변화하고 있던 때였다. '중세에서 근세로' 변함이 여러가지를 뜻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변함이 다. 당시에는 제도적인 교회나 위에 있는 신(객관)이 어떻게 규정해 주느냐보다 내(주관)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정통주의 는 이러한 변화 가운데서 객관성를 고수하려는 힘겨운 노력을 하며 방어적인 자 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이러한 시대에 객관성을 보존하면서도 주관성이 객관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침으로써 그 시대에 기독교를 의미있게 하려고 했다.(주22)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갈등은 다른 말로 하면 교리와 삶의 갈등이다. 특히 이 점에서 그 즈음 주도권을 쥐고 있던 정통주의와 여기에 반대했던 경건주의 사 이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정통주의가 바른 교리를 정의하고 그것을 보존하는데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경건주의는 바른 교리를 삶에서 실천함을 더 강조 한 운동이었다. 바른 교리(Ortho-doxie)보다 바른 실천(Ortho-praxis) 또는 경건 의 실천(Praxis pietatis)이 더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렇게 강조점을 옮김으로써 경건주의는 변하고 있던 세대에 기독교의 복음을 변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적인 삶을 지향하며, 미완성인 종교개혁을 완성하려고 했던 경건주의 는 이런 목적을 위하여 신비주의적 흐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이 신비주의 사상 가운데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실천 지향적인 장점이었다. 그래서 경건주의는 전반적으로 사변적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청교도 운동 이 경건주의에 접맥된 것도 주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경건주의는 교리에 치우 친 정통주의를 반대하며 일어났는데, 감정과 직관에 빠진 신비주의와 달랐고 인 본주의적 윤리를 강조하는 계몽주의와도 달랐다. 후에, 계몽주의 사상을 그 토대 로 형성되는 자유주의 신학에 경건주의 흐름을 이어받은 각성운동이 대립하게 되 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다.

 

 

V.맺는말

 

 

17세기에 일어나서 18세기에 꽃을 피운 경건주의는 계몽주의에 눌리다가 각성 운동으로 다시 분출한다. 각성운동은 영어권과 유럽을 포괄하는 넓은 범위의 신 앙 갱신운동을 가리키는 교회사적 개념이다.(주23) 영국에서는 1738년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이 그 시작이며 미국에서는 1734년 겨울에 시작된 죠나단 에드워즈의 각성운동이 그 출발이다. 독일어권에서는 이보다 늦게 1700년대 말 쯤에 각성운 동이 시작되었다. 크게 보아 각성운동의 신앙적 범위 안에서 형성되는 영어권 복 음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경건주의 흐름에 연결된 운동이다. 그러므로 경건 주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영어권 복음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주24)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가 각성운동권에서 온 사람들이다. 한국 교회 는 이러한 선교사들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한국인이 가진 깊은 종교적 심성과 합 하여 이러한 신앙이 한국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통해서였다. 평양 대부흥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든(신앙의 정체화) 부 정적으로 평가하든(신앙의 비정치화) 평양 대부흥 운동이 한국 교회 신앙의 기본 틀을 만들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 틀은 경건주의적이다. 성경 중심 적인 것이 그렇고, 삶의 변화에 초점이 있는 것이 그렇다.

 

보통 한국 교회 신학사나 사상사를 논하면서 그 유형을 다음 셋으로 나누는 것 이 보통이다. (1) 교리 논쟁을 강조하는 정통주의적 신앙 유형, (2)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주의적 신앙 유형, (3) 일반 종교적인 이해 아래 기독교를 한국 문 화에 접맥한 또 하나의 종교로 해석하는 종교 문화적 신앙 유형. 평양 대부흥 운 동에서 형성된 신앙 유형은 이 셋 가운데 그 어느 것에도 잘 맞지 않는다. 평양 대부흥 운동은 '유형적'으로 보아 그 기본 틀이 경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교회 사적'으로도 경건주의와 한국의 평양 대부흥 운동의 연결이 짐작이 가기는 하지 만 자세하게 연구해야 할 문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사나 사상사의 틀을 다 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경건주의가 당시의 타락한 교회와 사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삶의 변 화, 곧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을 외쳤던 것에서 벽에 부딪친 현재 한국 교회의 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점은 한국 교회와 신학이 경건주의를 연구해 야 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VI.각주

 

 

*1996년 2월 8일 목요일,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분야 교수 임용을 위한 공개 강의 때 읽었던 논문이 이 글의 기본 골격임. 문장을 문어체로 바꾸고 각주를 보충했으며 내용 가운데 적은 부분을 고쳤다.

 

 

1)경건주의를 개관하기 위하여 최근까지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는 다음 책 을 참조하라: Johannes Wallmann, Der Pietismus, Goettingen 1990; Martin Greschat 편집, Zur neueren Pietismusforschung, Wege der Forschung 440권,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1977; 지형은, 경건주의와 스페너의 [경건한 요청](I), (II), in: {기독교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년 1, 2월호, 111-126, 98-110; 경건주의 연구사를 위하여 Johannes Wallmann, Der Pietismus, Goettingen 1990, 3, "g) Forschungsberichte"에 나오는 목록 참조.

 

 

2)PeterC.Erb,Pietists.SelectedWritings,한글 번역: {경건주의자들과 그 사상}(서울: 은성, 1991), 7.

 

 

3)DaleW.Brown,UnderstandingPietism,한글 번역: {경건주의 이해}, 오창윤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7), 9f.: 브라운은 틸리히의 말을 인용한다. "경 건주의란무엇인가? 그 말은 유럽에서보다는 미국에서 훨씬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경건한'이라는 말과 '경건주의자'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사 용되고 있으나, 미국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그러한 말들이 위선과 도덕주의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경건주의가 반드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브라운은 또 바르트의 말을 인 용한다. "보다 고상한 유형이거나 저급한 유형이거나 할 것 없이, 경건주의자 들과 더불어,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천국에 있느니보다는 교회와 더불어 지옥 에 있는 편이 낫다." 브라운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20세기 신학 용어로서의 경건주의는 감정주의, 신비주의, 합리주의, 주관주의, 금욕주의, 정적(靜寂) 주의, 신인협력주의, 천년 왕국주의, 도덕주의, 율법주의, 분리주의, 개인주 의 및 내세 지향주의 등과 같이 부정적 의미로 취급되고 있다."

 

 

4)경건주의에 관하여 내가 쓴 글 참조하라: {그말씀}(서울: 두란노), 1995년 7 월호부터 연재되고 있는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의 생애와 사상"; {목회와 신학}(서울: 두란노), 1996년 6월과 8월호, "경건의 위기와 소그룹을 통한 교 회 갱신" 1, 2; {활천}(서울: 활천사), 1995년 8월호부터에 연재되고 있는 "이야기로 쓰는 교회사 - 경건주의 산책";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한국기독교문 화연구소, {신학논총} 제2집(서울: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1996), 245-270에 있는 "受容과 創造的 變容: 敬虔主義의 方向提示書 [敬虔한 要請](Pia Desideria) 硏究史".

 

 

5)DaleW.Brown이 Northwestern University에 제출한 미간행 박사 학위 논문 "The Problem of Subjectivism in Pietism: A Redefini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Theology of Philipp Jakob Spener and August Hermann Francke, Evanston, Illinois, 1962, vi; 같은 저자, aaO.도 참조.

 

 

6)임영택, "신앙 공동체를 위한 비판-문화교육학(I) -교육신학적 접근-", in: {기독교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년 11월의 내용은 경건주의에 대한 우리 나라의 일반적 이해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몇 문장을 인용해 본다: "웨 슬리는 개인의 성결과 사회적 성화의관계성을강하게강조한다. 만일 사회적 성화를등한시하고개인적성화에치우치면개인주의적경건에빠지게된다. 웨슬리의 경제관에서 우리는 윤리와 성화신학을, 또 한편으로 경건주의의 허 구성을 찾아볼 수 있다"(90). "그 동안 한국교회에는 웨슬리안 경건주의가 강 조되어, 사회적 성화를등한시하고개인적성결과저세상적인구원에치중하여왔다 ... 개인의 신앙 체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로 축소되었다고 ... 한국 교회는 개인의 성결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90). "4) 전통적 경건주의와 민중신학을 넘어서 ... 개인적 성결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에 대해 서는 ..."(92). 좌담, "영성훈련은 가능한가?", in: {기독교교육}(서울: 대한 기독교교육협회), 1986년 6월, 15-31. "왜 '영성'이란 말이 나오고 '영성훈 련'이란 말이 강조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차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사용해온 단 어로서 '경건'이란 말은 첫째로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너무 강하고, 둘째 로 경건이란 말을 사용할 때 가지고 있는 컨텐트(Content)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라는 관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의 미만을 가지고는 20세기 말 다변화 시대에 크리스찬의 삶의 총체를 이야기하 기는 경건이라는 말로는 부족하지 않느냐는 점에서 경건이라는 말과 같을 수 도 있지만 그러나 주는 뉴앙스가 좀 더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을 강조 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크리스찬의 삶을 구체화시켜 나갈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영성'이 란용어가나오지않았나싶습니다."(오성춘의 말). 한편, 오성춘의 이 말에서 볼 수 있는, 영성과 경건의 관계 문제는 앞으로 한국 교회가 정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카톨릭 영성신학자들은 영성신학을 전개할 때 가장 먼저, 어떤 식으로든 '경건'이란 단어를 처리해야 할 부담을 느낀다. 경건이란 말이 영성이란 말보다 기독교 신앙에서 더 친숙한 말이며, 성경에도 영성이란 말은 나오지 않으나 경건이란 말은 명백하게 쓰여 있기 때 문이다. 카톨릭 영성신학자들이 전개하는 논리는 오성춘의 논리와 같다. 곧 경건이란 말이 개인주의적이며 내세 지향적인 신앙을 주로 뜻하며 그렇기 때 문에 다변화된 오늘날 종교적 상황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신 교 영성신학자들이 카톨릭 영성신학이 전개하는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이유는 개신교적인 전통인 경건주의 신학이 지금까지 충분히 발굴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사실 경건주의 운동은 오늘날 영성신학에서 말하는 문제의식을 거의 다 포괄하고 있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 과연 경건과 경건주의란말이개인주의신앙만나타내는말로고착되었는지, 그래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 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진보적인 집단에서 경건을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 교단에서는 아직도 경건이란 단어가 호감을 주는 것 같다. 또 다른 기준으로 나누어 본다면, 신학계에서는 경건이란 단어가 부정 적으로 인식되는데 반하여 목회 현장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 같다.

 

 

7)Ph.J.Spener,HauptschriftenPhilippJakobSpeners,PaulGruenberg편 집, Gotha,1889,1ff.참조. 경건주의 당시대의 마지막 논쟁에 대하여 15f.

 

 

8)WilhelmHossbach,PhilippJakobSpenerundseineZeit,Berlin1828.

 

 

9)AlbrechtRitschl,GeschichtedesPietismus,3Bde.,Bonn1880-1886.

 

 

10)리츨은 1876년부터 10여년 동안이나 경건주의 연구에 몰두했다. 매우 방대한 경건주의를 어느 한 학자가 다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 경건주의 연구 에서 상식이다.

 

 

11)EugenSachsse,UrsprungundWesendesPietismus,Wiesbaden1884.

 

 

12)PaulGruenberg,PhilippJakobSpener,3Bde.,Gottingen1893-1906.

 

 

13)그륀베르크의 책이 오늘날까지 대단히 유용한 이유는 그의 연구서 제 3권, 211ff.에 나오는 스페너의 글과 스페너를 찬성 또는 반대한 글의 목록 때문 이다. 그륀베르크 이후에 여러 학자가 이 목록을 보충하고 수정했지만 아직 도 이 목록은 스페너와 경건주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일차 목록이다.

 

 

14)CarlMirbt,Art."Pietismus",in:Realenzyklopaedie3판 15권, 774-815.

 

 

15)HorstStephan,DerPietismusalsTraegerdesFortschrittsinKirche,TheologieundallgemeinerGeistesbildung,

Tuebingen1908.

 

 

16)본 논문의 각주 3)에 인용된 바르트의 말 참조. 바르트 계열이 경건주의를 비판한 것은 슐라이에르마허가 '경건성'이란 단어를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사용한 때문이기도 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경건한 자의식'(Das fromme Selbstbewustsein)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의 본 질은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절대 의존 감정에 있다. 슐라이에르마허 신학 에 자주 나오는 이와 같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보기 하나를 들어보자. "Die Frommigkeit, welche die Basis aller kirchlichen Gemeinschaften ausmacht, ist rein fur sich betrachtet weder ein Wissen noch ein Tun, sondern eine Bestimmtheit des Gefuhls oder des unmittelbaren Selbstbewustseins."(Friedrich Schleiermacher, Der Christliche Glaube, 1. Bd., 7. Auflage, Hg. v. Martin Redeker, Berlin1960,14(3절). 그 외 에 aaO., 2. Bd. 색인에서 "Frommigkeit" 항목을 보라. 슐라이에르마허는 경 건주의 3세대인 진젠도르프 백작이 이끈 모라비안적 형제단 교회의 신앙에서 자라고 영향을 받았다. '경건성'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 한 개념이다. 그런데 그는 이 개념을 '감정'(Gefuhl)이란 단어와 연결시켰 다.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절대 의존 감정이 경건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틸리히의 말을 빌리면 "쉴라이에르마허는 이 직접지(直接知)를 감정이라고 부르는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Paul Tillich, {19-20 世紀 프로테스탄트 思想史}, 송기득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 4판, 121). 슐라이에르마 허가 경건성을 감정과 연결시킨 것은 경건주의에 대한 인식에도 불행한 결과 를 가져왔다. AaO., 113ff.에서 틸리히가 '감정'에 관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라. 특히 129f.의 나오는 예를 보라.

 

 

17)KurtAland,Spener-Studien,Berlin1943;MartinSchmidt,WiedergeburtundneuerMensch.GesammelteStudienzur

GeschichtedesPietismusI,Witten1969;같은 저자, Der Pietismus als theologische Erscheinung. Gesammelte Studien zur Geschichte des Pietismus II, Gottingen 1984.

 

 

18)JohannesWallmann,PhilippJakobSpenerunddieAnfangedesPietismus,Tubingen1970.

 

 

19)그 즈음 루터교 정통주의를 대표하는 세 도시(그 도시마다 대학이 있었다)는 Strssburg, Wittenberg, Jena였다. 이 가운데 스트라스부르크는 나머지 둘과 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 서적과 개혁교적 흐름이 이미 그 안에 담겨 있는 곳이 여기였다.

 

 

20)쿠르트 알란트는 발만의 연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 두 사람 사이 에 벌어진 지상 논쟁은 학문 외적인 감정으로까지 발전된 듯도 하다. 학계는 발만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논쟁의 과정과 내용과 평 가에 대하여 나의 박사 학위 논문, Philipp Jakob Spener und seine Pia Desideria. Die Weiterfuhrung der Reformvorschlage der Pia Desideria in seinem spateren Schrifttum, 제 I장, A 참조하라(미간행, 근간 예정).

 

 

21)경건주의가 워낙 범위가 넓은 운동이기 때문에 경건주의를 전체적으로 평가 하는 데에는 언제나 제약이 따른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면 경건주 의 가운데서 개혁교 경건주의와 루터교 경건주의가 다르다. 루터교 경건주의 안에서 1세대인 스페너와 2세대인 프랑케가 다른데, 3세대인 진젠도르프 백 작은 스페너와도 다르고 또 프랑케와도 다르다. 뷔템베르크 경건주의자인 벵 엘과 외팅어 또한 나름대로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를 하 나로 묶을 수 있는 교회사적 맥락과 특징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2)객관성과 주관성 문제와 관련하여 경건주의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Walter Schmithals의 뛰어난 논문, Der Pietismus in theologischer und geistesgeschichtlicher Sicht, in: Pietismus und Neuzeit, Bd. 4, Goettingen 1979, 235-301 참조하라.

 

 

23)JohannesWallmann,KirchengeschichteDeutschlandsseitderReformation,3판, Tubingen 1988, 197ff.에 있는 각성운동의 개관을 참조하라.

 

 

24)ErnestStoffler편집,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Eerdmans Publishing Co., Grand Rapids 1976 참조.

 

출처 : 유토피아의 꿈과 낭만이 머무는 세계
글쓴이 : 아가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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