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우리 집 돼지우리는 귀틀집이었다. 딱히 귀틀집이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귀틀집의 형식을 따른 집짓기였다. 통나무를 그저 얼기설기 우물 정(井)자로 사람 키만 큼 쌓아놓고 그 위에 지붕을 해 덮다가 남은 자투리 이엉을 훌렁훌렁 올려놓으면 되는 그런, 그러나 돼지우리 치곤 꽤나 근사하던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오늘 교우들과 소양강 둘레길을 걷다가 호수위에 지어진 정자(亭子)같다고나 할까, ‘길관수’라는 이의 선산 지킴이용 오두막 한 채를 발견했다. 앞선 일행들은 호수의 마술에 걸려 지나쳐가고 뒤따르던 우리 눈에 그 집이 들어왔다. 한 평이 될까 말까한 귀틀집에 길게 처마를 끌어내다가 마루를 깔았다. 정면으로 소양호와 멀리 춘천이 건너다보인다. 호수위엔 그이가 타고 다녔음직한 전동보트 한 대가 파릇하니 겨울 물위에 떠 있었다.
아마 우리네 건축물 치고 가장 멋없는 집이 귀틀집일 것이다. 아니 귀틀집은 멋을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 나무의 생긴 모양새대로 척척 올려 쌓고 그 사이를 진흙으로 채우면 되는 단순한 건축술(?) 때문이다. 톱과 도끼 한 자루만 있으면 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니 귀틀집은 애시 당초 멋있게 지을 수 없으니 귀틀집에 살려면 집에 사는 그 ‘사람이 멋’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집도 사람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사람들은 고궁이나 클 절간의 대웅전 같은 건축물들을 보면서 쉽게 ‘한국의 건축미는 선(線)’에 있다고 씨부렁댄다. 그러나 귀틀집은 선(線)이 없다. 건축의 선을 말할 때 들먹이는 게 용마루나 처마 끝의 흐름이다. 중국은 형(形)이고 일본은 색(色)이다. 중국의 건축이 형(形)이라함은 ‘외형’에 건축의 주안점을 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크게 짓는다. 일본이 색(色)이라고 하는 것은 건축의 색깔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건물을 이쁘게 짓는다. 그걸 두고 한국은 선(線), 중국은 형(形), 일본은 색(色)이라는 거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건축물들은 하나 같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오르는 시늉이다. 요즘 슬라브 옥상건물에 함석으로 지붕을 씌운 걸 봐도 그렇다. 그러나 정말 한국 사람들은 부드러움과 곡선을 사랑할까? 그래서 건축물이 곡선을 그리는 걸까?
아니다. 한국의 건축물이 곡선을 그리는 뜻은 ‘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서가 아니다. 우리네 건축물의 선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반작용의 역학’이 작용한 거다. 뭔 말이냐? 모든 선은 운동을 나타낸다. 운동에는 방향과 속도와 그리고 중력이 있다. E=1/2mc² 혹은 E=mc² 같은 등식이 그걸 말해준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네 건축물의 처마나 용마루가 하늘로 치켜 올라가는 뜻은 ‘어떤 무의식의 운동’이라는 거다. 건물은 대부분 밑으로 내리 누르는 형국이다. 대궐 같은 집일수록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이 건물에 눌려 살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을 짓되 내리누르는 수직적 중압감을 감소하자는 무의식에서, 반작용의 운동을 따라 살짝 처마와 용마루를 들어 올려 엄숙한 지붕과 건물의 무게를 분산시키려는 거다.
그러니 한국의 건축물이 곡선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선의 아름다움’을 알았기 때문이기보다는, 짓누르는 것에 대한 거부와 표층을 뚫고 올라가려는, 화(火)와 수(水)를 얼러 중(中)즉, 토(土)에 머물러 있게 하려는 도가적인 무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임이 아닐까?
이런 사유에서 오늘 우리가 본 [길관수 씨네 귀틀집]이야 말로 억지로 곡선을 쓰지 않고도 토(土)를 이루는 사상의 완성이 아닐까 싶다. ㅎ
*이렇게 '길관수'네 귀틀집을 돌아나오는데 걷는 길이를 알기 위해 지니고 나온 손전화기에 '오강남'이라는 수신자 이름이 떴다. 오강남 박사셨다. 캐나다로 들어가신다는 소식을 공항에서 알리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하강하는 수직의 무게를 중화 시키지 않아도 되는 '귀틀집의 건축학'과, 동서양의 종교를 아우르는 사상의 안내자인 [오강남 박사]라니, 참 오늘의 묘한 조합이 일어나는 날이다.
< 글, 그림 출처, 성암 감리교회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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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위대한 유산(遺産) [속회]
허태수 목사(춘천성암교회 담임. 협성대 외래교수)
*감리교의 전통중에 겨울에 하는 '등급사경회'가 있다.
1~6년급, 특별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번에 '속회 반'을 하나 더 추구하게 되어서(교육국 주관)
위탁받은 원고다.
들어가는 말
“한국 감리교 이대로 좋은가?”라는 문제에 앞서 감리교인인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먼저 “나는 감리교도인가? 나는 웨슬리안인가?, 나는 메도디스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진솔한 응답이 필요한 때이다. 기독교 원리에 “감리교는 제도상으로 감독정치, 감리사제도, 속회조직 등이 있다.” 고 명시되어 있듯이 웨슬리의 신학과 정신이 담겨있는 속회는 단순한 제도적인 조직이 목적이 아니라 성화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감리교의 빛나는 유산이다. 하지만 좋은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이 한국 감리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오늘의 감리교가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속회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속회가 건강하면 감리교인들이 건강하고, 감리교인들이 건강하면, 감리교회가 건강하게 회복되고, 감리교회가 건강하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속회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의 결정체이고, 속회의 목적은 감리교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성화에 있기 때문이다.
1과/ 속회의 역사 (초기 감리교의 속회)
오늘의 감리교회는 웨슬리 정신과 유산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초기 감리교의 조직들 중에서 최근까지 영향력을 발휘한 속회조차도 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친목도모의 장으로 전락해 버렸다. 감리교가 다시 부흥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대한 유산인 속회를 다시 재조명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동안 하나의 기능으로만 여겨왔던 속회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초기 감리교 조직들의 형성과정과 조직들의 특성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1. 감리교신도회(Methodist Society)
웨슬리가 이끄는 감리교도들은 그 모임을 신도회(society)라고 불렀다. 신도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개체교회(local church)와 같은 것으로서 각 지역마다 지역 단위 모임으로 조직되어갔다. 감리교신도회는 영국성공회 내의 신앙운동 모임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옥스퍼드 감리교인들의 신성클럽(the Holy Club)도 신도회라고 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신도회의 모습은 웨슬리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뒤였다. 1738년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회심한 후, 존 웨슬리와 피터 뵐러는 함께 감리교도와 모라비안교도를 합쳐서 페터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만들었다. 매주 수요일 40~50명이 모여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노래와 기도로 시작하고 노래와 기도로 끝맺었다. 이후에 웨슬리는 독일 마린보른(Marienborn)과 헤른후트(Herrnhut)에 있는 모라비안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조직유형 중 영성훈련과 찬양을 중심으로 모임 조직인 11개의 합창단(Chior)에서 밴드(band) 등을 감리교 조직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진젠도르프와의 라틴어 논쟁에서 ‘신앙의인화’만을 강조한 나머지 ‘행동’을 배제하는 모라비안들의 정숙주의(quietism)와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을 비판하게 된다. 김홍기, “초기 감리교회의 조직화와 속회중심의 영성훈련”『신학과 세계 제40호』(서울: 감리교신학대학, 2000), 86.
결국 정적주의와의 갈등은 페터레인 신도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40년 4월 18일 웨슬리가 파운데리 신도회(Foundery Society)를 조직하자 정적주의에 반대하던 20여명이 파운데리 신도회에 가입하였고, 그해 7월 페터레인 신도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박용호, 「존 웨슬리의 속회론」, (서울: Kmc, 2010), 4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웨슬리는 진젠도르프의 엄격한 영적 감독체제는 상호간의 직고의 개방성보다는 은밀함의 비성숙성으로 유도되었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상호간의 직고의 개방성이야말로 집단적인 교제의 진정한 목적이어야만 했다. 그는 신도반들을 성별이나 결혼 상태에 따라서 구별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그러한 개방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데이비드 L. 왓슨, 「이것이 속회다(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한경수 역, (인천: 주안교회출판부, 1993) 143-144.
그는 이미 런던에서 1739년 12월에 감리교신도회가 구성되었는데, 이것을 ‘런던 파운데리 신도회’(London Foundery Society)라고 부른다. 이 신도회는 런던 최초의 감리교본부를 지었다.
런던보다 앞서 브리스톨에서 1739년 7월 11일에 웨슬리와 휘트필드에 의해 시작된 브리스톨신도회와 런던신도회는 지역에 수십 개의 신도회를 조직해 나갔다. 1743년 이미 500명의 회원들이 각 지역 신도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흩어져 성장하고 있는 많은 신도회들을 더욱 긴밀한 연결체로 조직하여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지도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그 이후로 감리교신도회들 전체를 ‘연합신도회’(the United Society)라는 이름으로 칭하였다. 위의 책, 151.
마침내 전국적인 연합 신도회가 1743년 5월 10일에 결성되면서 동시에 연합 신도회의 총칙(The General Rules)이 발표 되었다. 이 연합 신도회의 조직은 웨슬리가 부흥운동과 함께 메도디스트 신앙훈련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하여 사용한 메도디스트 연결주의(connectionalism)의 탄생이었다. 이것은 독립된 교단은 결코 아니었고, 영국 국교회 안에서 전도운동과 경건운동과 박애운동을 통합적으로 실천하는 영국 국교회 소속의 특별한 모임이었다.
연합 신도회의 결성과 동시에 총칙 연합 신도회의 총칙에 발표된 메도디스트 신도회의 목적 “이 모음은 규칙적으로 모여서 함께 경건의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귐으로서, 함께 기도하며, 함께 권고의 말씀을 받으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지켜주고(to watch over), 서로의 구원을 함께 이루어 가기 위해 서로를 돕기 위하여 모이는 것이다.…”
이 발표되었으며, 총칙의 서두에는 메도디스트 신도회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입회의 조건은 “오직 다가올 진노로부터 피하고 죄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소원뿐”이라고 명시하였다. 그리고 이 총칙은 크게 세 부분 즉 ‘첫째, 모든 종류의 악을 피하라. 둘째, 모든 선을 행하라. 셋째, 하나님의 모든 예법을 지키라.’로 나뉘고 각기 안에는 세부 규칙이 들어 있다. 웨슬리는 규칙을 지키지 않고 지도자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의 증거를 보이지 않는 회원을 즉시 신도회에서 추방하고 제명하였다 웨슬리는 1743년에 뉴캐슬 신도회를 방문하였을 때에 메도디스트 규율이 느슨해진 것을 보고 회원들의 신령상 형편을 철저히 조사한 다음 64면의 회원을 추방하였으며, 1748년 브리스톨 신도회원 수를 900명에서 메도디스트 규칙을 지키지 않고 메도디스트의 명예를 더럽힌 180명을 제명하고 720명으로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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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회의 입회 조건은 어떤 특정한 교파나 교리적 신앙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가올 진노에서 자유하고 죄로부터 구원을 원하는 욕구’뿐이었기에, 신도회의 문은 구원을 갈망하고 성결의 비전(vision of holiness)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웨슬리는 메도디스트는 “마음과 생활의 성결(holiness of heart and life) 그리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내적이고 외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메도디스트의 성격’이라는 글에서는 메도디스트의 특징을 “자기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하여 마음속에 널리 확산된 하나님의 사랑을 지니는 것”이라고 했고, “자기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메도디스트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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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신도회는 국교회의 주일예배에 충실히 참여하고 주일 저녁 시간과 매일 아침 5시에 설교예배(preaching service)로 모였으며, 속회(class)와 반회(band)는 주간의 평일 저녁 시간에 모였다.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성결할 삶을 위한 규칙, 즉 연합 신도회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고, 성결의 능력을 추구하면서 구원을 완성을 이루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서로를 돕고 훈련하기 위해서 연합한 신앙공동체였다.
2. 속회(Class)
1742년부터 신도회는 속회(class)와 반회(band)로 나뉘어졌다. 왜냐하면 각 지역의 신도회의 회원 수가 점점 더 증가함에 따라, 웨슬리는 많은 수의 신도회를 일일이 자주 방문할 수 없게 되었고, 각 신도회는 그들이 함께 모이는 신령하고 고상한 목적을 상실하고 빗나가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도회 회원들의 영적인 훈련이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신도회 내에서 개인의 문제들을 다루고 돌볼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신도회의 문제들은 웨슬리에게 신도회의 단점들을 절감하게 하였으며, 그 치료책에 대해서 고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는 브리스톨 신도회에서 그 치료책을 발견하였다. 1742년 2월 15일에 브리스톨에 세운 감리회집회 장소인 뉴룸(New Room)에 대한 부채 상환을 위해 심각한 논의 되었다. 이 빚은 웨슬리가 대리인으로서 개인적으로 더 맡아왔던 것이었다. 그때 은퇴한 선장 포이(Captain Foy)가 제안하기를 신도회의 각 신도는 그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1페니씩을 기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주일에 1페니를 내는 것이 많은 신도들에게는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는 것이 지적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열 명이나 열두 명의 신도들로부터 모금하는 일을 직접 책임지고 부족한 금액은 자신이 채우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하겠다고 제안하였으며, 그래서 매주의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전체 신도회를 속장으로 칭하는 한 사람과 더불어 “작은 무리들, 즉 속들(각 속에 12명가량)”로 나누기로 합의하였다. 데이비드 L. 왓슨, 「이것이 속회다(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157-158.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각 지도자들이 돈을 받기 위해 회원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돈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나고 사정을 돌보면서 진정한 돌봄의 사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은 돈은 유사에게 납부하고, 신병상의 문제는 웨슬리에게 보고하였다. 웨슬리는 그 동안 신도회를 더 세심하게 기도할 수 있는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기에 이들의 보고를 목회상의 보고(pastoral report)로, 이들의 하는 일을 목회상의 감독(pastoral oversight)이라 판단하고, 이것을 신도회를 돌보고 지도하는 목회적 제도로 채택하였다. 그 이후에 이러한 제도를 ‘속회’(Class Mee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곧 속회의 기원이다. 이는 1742년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쓴 웨슬리의 글 속에 잘 드러난다.
2월 15일 월요일,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안고 있는 공동의 빚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의논하기 위해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의견이 다음과 같이 모아졌다: 1. 속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가능하다면 1주일에 1페니씩 부담한다. 2. 모든 신도회는 소규모의 모임이나 속회에서 각 속회마다 대략 12페니씩 내기로 결정한다. 3. 각 속회마다 한 사람의 대표자가 그것들을 수금하여 매주 담당간사에게 제출한다. 3월25일 목요일, 나는 가장 성실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 몇 명을 선택해서 만났다. 그리고 내가 일일이 돌볼 수 없는 사람들-그들은 내가 돌보아 주길 몹시 바라고 있었다-로 인해 겪어왔던 나의 고충을 털어 놓았다. 많은 이야기 후 우리는 브리스톨에서 처럼 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에게 속회를 맡도록 나누어 주는 방안에 찬동했다. 이것이 런던에서의 속회의 시작이다. 이 일로 나는 하나님께 더 없는 감사를 드렸다. 속회의 설립이 가져 온 말할 수 없는 유용함은 갈수록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 Journal 1742년 3월 15일, 24일 -
그리하여 속회는 1742년 4월 런던의 파운데리 신도회(Foundery Society)에 처음 설립되었는데, 1746년에는 전 영국의 감리교회 패턴이 되었다. 그 이후 감리교신도회가 각 지역에 조직될 때마다 속회도 함께 구성되었다. David L. Watson, 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Nashville:Discpleship Resources, 1987), 94-95. 재인용
속회 제도는 모든 신도회로 급속히 적용되고 발전되어 나갔으며, 이로써 모든 신도회 내의 모든 불경건한 자들과 악한 행실이 보고되고, 회개치 않을 경우에는 신도회의 명부에서 제명하기도 하였다. 또 많은 회원들이 속회를 통하여 마음과 생활을 개혁하고 경건하고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1742년 말에 신도회는 여러 개의 작은 그룹, 즉 속회(라틴어로 classis 또는 division)로 나누어져 완벽하게 제도화되었고 메도디스트 신도회의 신앙교육과 훈련을 위한 핵심 기구로 정착되었다.
3. 반회(band)
속회가 주로 개인의 간증과 권면의 말씀과 찬송과 기도로 이루어진 성도의 교제와 교육 중심의 신앙 훈련 모임(disciplinary cell)이라면, 반회는 내면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죄의 상호 고백과 영혼에 대한 상호 엄격한 감독을 통한 신앙 고백적 영성 훈련 모임(confessional group)으로 운영되었다. 반회는 신도회의 친교 안에 더욱 작은 규모로 구성되었다. 이 반회는 각 지역신도회의 내적 써클 혹은 핵심 써클로 형성된 것이다. 반회는 본래 신도회가 조직되기 전부터 구성된 것으로 그 역사가 더욱 깊다. 이 반회는 모라비안의 조직에서 배운 것으로서 1738년 12월에 “반회 모임 규칙”(Rule of the Band Societies)를 만들었다.
결국 반회의 목적은 약 5장 16절의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서로의 잘못된 행동과 말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함께 죄악의 본성과 생활의 습관을 고쳐서 완전한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교제 가운데 죄악의 사슬은 끊어졌고, 죄가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 밴드는 속회보다 서로의 영혼을 철저히 감독하고 돌보는 영적인 교제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상호 고백 훈련이 중심이었다. 구성 인원은 5~10명 정도로 나누었다. 박용호, 「존 웨슬리의 속회론」, 106.
이 모임을 통하여 죄와 성화에 대한 상세한 질문들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1. 지난 모임이후에 어떤 죄를 법하였는가? 2. 지난 모임이후에 어떤 유혹을 받았는가? 3. 그 유혹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4. 죄인지 아닌지 모르는 말과 행동이 무엇이 있었는가? 5.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는가? 이러한 성화훈련의 과정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을 추구하였다.
이 반회는 속회(class)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웨슬리 말년에는 거의 사라져 버리고 큰 지역 신도회(society)에서만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반회 조직을 항상 격려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에 19세기까지 남아있었다. 이렇게 반회가 속회보다 활발하게 움직여지지 못한 것은 일주일에 두세 번 모일 정도로 빈번했고, 연령별 및 성별로 너무 제한된 조직이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 철저한 영적 생활을 강조하므로 가족적인 분위기로 조직되었다. 또한 속회는 반회처럼 번번하게 모이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였다. 반회의 지도자는 반회원들의 선거로 선출했지만, 속회의 지도자(속장)는 웨슬리가 임명했다.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센터인 헤른후트를 방문함으로써 보다 소규모 영성훈련을 도모하는 반회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속회는 지역단위로 모든 감리교인들은 의무적으로 참여하였으나 반회모임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나이와 성별, 기혼자와 미혼자로 구분하여 상호 고백이 가능한 친화력 그룹을 형성하였다. 비록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엘리트 조직으로서 특별한 구성원 의식과 훈련을 공유한 집단이었다. 이 모임을 통하여 죄와 성화에 대한 상세한 질문들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이러한 조직화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감리교 교리의 기초가 상당부분 형성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홍기, “초기 감리교회의 조직화와 속회중심의 영성훈련”,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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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발 신도회(Select Society)
웨슬리는 반회보다 더 엄격하고 제한된 모임인 선발 신도회를 만들었다. 이 모임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가 삶에서 확실히 증명될 수 있게 체험되고 실천되었다. 웨슬리는 이 신도회의 회원들을 그들 형제자매들보다 “앞서 달려가는” 보다 훌륭한 일행으로서 “하나님의 빛을 따라 계속적으로 나아가고, 성부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선발 신도회의 목적은 “완전으로 정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모든 은사를 발휘하여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더욱더 세심하게 감독하고 돌보게 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숨기 없이 고백할 수 있고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과 성결과 선행의 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웨슬리는 선발 신도회를 ‘위대한 구원’(the great salvation), 즉 완전을 공유하는 자들의 모임으로, 반회(band)는 그것을 열망하며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으로 분명히 구분하였다. 그래서 선발 신도회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회원표를 사용하였다. 이 선발 신도회는 특별히 따로 마련한 규칙이 없었다. 웨슬리는 “그들의 마음속에 가장 훌륭한 규칙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규칙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이 모임에는 단지 세 가지 기본 지침이 주어졌다. ① 이 모임에서 했던 어떤 말도 다시 말하지 말라. ② 모든 회원은 사소한 일에서도 그의 목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③ 모든 회원은 매주 1회 정해진 헌금을 가져온다. 이 선발 신도회는 완전히 자유로운 일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어떤 지도자도 임명되지 않았다. 감리회 운동에서 이 선발신도회의 지위는 1744년 연회에서 확정되었다. 웨슬리는 이 단체들에게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지도록 강력히 권고했고, 이 단체를 따로따로 심사하였으며, 이 단체에 대한 엄격한 감독을 주장하였다. David L. Watson, 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196. 재인용.
2과/ 속회와 성화훈련
웨슬리는 일찍이 속회의 유익과 효력을 인식하였다. 감리회는 웨슬리가 “분별 있는” 것으로 깨닫게 된 은총의 다른 수단들과 마찬가지로 속회를 채택했다. 이번 과에서는 속회의 목적과 운영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속회는 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은총의 수단이며, 영성훈련임을 살펴보겠다.
1. 속회의 목적 : 구원의 확신과 성화 훈련 김홍기, 감리교회사(서울: 도서출판 kmc, 2003) p.242-243
처음에 재정적인 방편으로 시작된 속회는 곧 목회상의 감독을 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데이비드 L. 왓슨, 「이것이 속회다(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158. 재인용. 속장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쁜 행실의 사례들 - 아내와 다투는 사람, 술취한 사람 -을 웨슬리에게 보고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웨슬리의 마음을 즉시 지르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것이다. 속장들은 기부금을 거두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속회의 목적은 단지 행정적인 조직이나 양적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화훈련이라는 질적 성숙을 도모하는 목회적이고 신앙적인 동기가 되었다. 모든 속도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들을 간증형식으로 고백하고 나눔으로써 서로 권면하고, 돌보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책임의식(accountability)을 가졌다. 김홍기 교수는 속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성화의 책임의식과 연대의식인 ‘accountability’를 직고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속회를 통하여 소규모 단위의 성경공부, 기도회, 그리고 신앙적 담화를 위한 좋은 장이 마련되었다. 이 속회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파선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 또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랑의 선행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속도들이 속회공동체를 통해 송동의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강제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하고, 서로 응답하며, 서로 격려하게 하는 것이다 김홍기, 감리교회사, p.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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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웨슬리는 속회를 통한 공동체적 성화 생활을 강조한 반면에, 개인적, 수도원적, 신비주의적, 은둔적 성화 생활을 비판했다. 고독하고 은둔적인 종교를 만들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웨슬리는 못 박아 얘기한다. 특히 웨슬리는 신비주의가 현실도피적일 뿐 아니라 성서의 말씀보다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위험성이 있음을 문제 삼는다. 웨슬리도 체험을 강조했으나 체험보다 성서의 말씀을 더욱 강조했고, 성서를 떠난 주관적 체험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로 보기에, 속회의 영성운동은 내면적이면서도 외향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다. 따라서 그들의 성화 생활의 실천은 속회 공동체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결정적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복음을 그들의 신앙공동체 속에만 가두어둘 수 없었고 세계에 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복종 때문에 어떤 역사가보다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고 세계에 그들의 증거를 나타낼 수 있었다. 따라서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가 지적했듯이 감리교는 당시 부패한 문화에 대한 반동문화적 공동체였고, 세계와 제도적 교회에 대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이러한 속회가 안식처, 영적 기쁨의 장소, 성도의 영적교제 속에서 영적 능력을 소유하는 곳이 되었고, 내적 생활의 거룩한 신비를 발견하고 상호 신뢰하는 사랑의 고백 속에서 기쁨을 체험하는 곳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과 충성심을 갖고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과 순수한 신앙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열쇠였다. 성화훈련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첫째로, 내면적 개인적 경건(personal piety)을 힘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 금식, 성경읽기, 일기쓰기 등 경건의 선행(good works of piety)을 힘쓴다. 둘째로, 상호협동적 영성훈련(mutual corporate discipline)을 힘쓴다. 이를 위해 서로가 권면하고 격려하고 충고하고 상담하는 크리스천 컨퍼런스(Christian conference)를 가진다. 셋째로, 악행을 금지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비의 선행(good works of mercy)을 힘쓴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갇힌 자와 나그네와 신체장애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선행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사회적 성화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2. 엄격한 속회운영 방법
웨슬리는 지역 속회들을 방문할 때 때때로 매우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감리교 모임의 예배와 교제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회원들은 '만나기를 멈춘 자들'(ceased to meet)이라 하여 회원 목록에서 제명해 버렸다. 세 번 이상 무단결석한 회원들을 제명하였다. 1741년 브리스톨에서 모인 모임에서 40명의 이름이 제명되었다. 며칠 후에 킹스우드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1747년 게이트헤드(Gate head)를 방문하여 회원들을 심사하였을 때 800명에서 400명을 교인들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철저한 영성훈련으로 절반정도로 회원들이 줄어들었으나 오히려 그 다음 해에는 두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1751년 화이트해븐(White heaven)에서는 근신해야 할 회원을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약 240명의 속도들이 한 번도 결석하는 일이 없었음을 발견했다. 다만 한 회원이 단 한 번 결석했을 뿐이다. 이러한 심사의 기준, 영적 분별의 방법은 간단했다. 웨슬리는 속장들에게 각 회원의 영적 상태를 물을 때 속회와 신도회의 출석 여부, 그리고 술 취한 적이 없는지, 가정의 불화가 없었는지, 구원을 열망하는지 등 지극히 간단한 방법으로 분별했다. 그러나 격식에 매임 없이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속회의 성격은 새 회원들을 돌보는데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이었다. 웨슬리의 여생 동안 수많은 새 신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위와 동일. p.243-244
3. 속장의 사명
속장은 항상 일주일에 한 번씩 속도들을 방문하여 권면하고 위로하며 충고할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는 헌금을 받기도 했다. 또한 속장을 주 1회 재정관리 집사를 만나서 지난 주 속회 모금액을 전해 주고, 속도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나 조사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충고하고, 견책하고 위로하고, 권고한다. 그리고 주 1회 신도회의 목사를 만나서 영적상태에 문제가 있는 속도들이나 병든 속도들이나 신앙생활이 흐트러진 속도들에게 작은 목사의 역할을 실제로 한 셈이다. 이렇게 속장과 속도들은 긴밀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가졌는데, 속장이었던 밴덤(Elizabeth Vandome)은 임종 시에 모든 속도들을 불러 모으고 친 가족처럼 최후의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속도들은 그들의 속장의 모범을 항상 의심 없이 따랐다. 항상 건전하고 풍성한 속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건하고, 지혜 있고, 활동적인 속장이 되기를 힘썼다. 속장은 깨끗하고 건강한 종교 경험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었음을 성령으로 확증해야 하며, 끊임없이 죄를 정복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었음을 성령으로 확증해야 하며, 끊임없이 죄를 정복해야 하고, 은혜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야 했다. 속장은 항상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에 능통해야 했고, 교리적 진리에 대한 바른 식견을 갖고 있어야 했고, 도덕적종교적 의무를 바로 알아야 했다. 또한 각 속도의 특성과 개성을 파악하고 있어야 했고, 그들의 특수한 경험을 이해해야 하며, 속도로 하여금 속회 발전을 위해 열심을 다하도록 권고하며, 속도로 하여금 영적 생활의 진보를 이루도록 권면해야 했다.
4. 속회 속도의 자격과 회원증
감리교 연한신도회(United Society)에 소속된 모든 회원들은 속회에 소속되었고, 감리교 신도회는 속회의 속도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감리교 신도회에 가입하기 전에 소규모의 모임인 한 속회의 속도로서 보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소속감을 더하여 주기 때문이다. 속회에 소속된 모든 회원들에게는 회원증을 주었다. 반회(band)모임의 회원권은 별도로 배부되었는데, b자가 새겨진 회원권이었고 3개월마다 속회 회원권이나 반회 회원권이나 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속회 회원증이 없는 사람들은 감리교 신도회나 애찬회에 참여할 수 없었다.
회원권은 일 년에 네 번씩 분기마다 바뀌었다. 회원권이 갱신될 때마다 1실링씩 감사헌금을 바쳤는데, 그것을 회원권 기부금이라고 부른다. 처음 회원권을 얻으려면 3개월간의 시험기간을 거쳐야 한다. 1780년부터 2개월로 줄어들었다. 3개월 기간 동안 속장이 감리교 신도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추천해야 하고 감리교 신도회에 받아들이는 증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시험기간 마지막에 한 번 더 상담하도록 되어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포도원”(On the God's Vineyard)이란 설교에서 속회의 중요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누구든지 구원받고자 희망하는 사람은(이것만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들, 즉 감리교도들과 연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세 가지 증거에 의해 입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그에게 적절한 속회에 소속된다. 거기서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보낸다. 그리고 난 다음에 3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심사모임(quarter meeting)에서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면 그는 신도회에 소속된다. 그리고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는 동안 계속 관계가 지속되고, 자신의 신앙고백에 따라 걸어간다.
5. 속회의 진행순서
속회는 속장의 인도에 따라 기도와 찬양을 시작하고, 속장이 지난 일주일 동안의 자신의 영적 생활 경험에 대해 고백하는 간증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속장이 일주일의 영적 생활을 묻는 질문이 다섯 가지였는데, ‘일주일 동안 무슨 죄를 지었는가’, ‘무슨 유혹을 받았는가’, ‘어떻게 물리쳤는가’ 등으로, 이 질문에 따라 각 속도들이 돌아가면서 영적 자아비판의 간증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속장이 충고하고, 권면하고, 훈계하고,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다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구속의 은혜를 위해 통회자복한 후, 속장이 각 속도들을 위해 목회기도를 한 후 마쳤다.
6. 근신 회원 반(班)
웨슬리는 성화훈련을 힘쓰지 않는 근신회원(penitents)들을 따로 모아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위대한 목자에게로 다시 돌아오도록 힘썼다. 3번 이상 무단으로 결석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 자등 은총의 수단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근신회원으로 생각하였다. 출석 신자(believer)와 근신자(penitents)를 따로 구분하여, 근신자들을 위해 특별히 봉사하도록 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영적 근거를 곧 다시 회복했다. 그들을 전보다 더욱 높이 일어났으며, 전보다 더욱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들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더욱 강하여졌을 뿐 아니라, 더욱 온유하고 더욱 겸손해졌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회원권을 받고 정상적인 감리교인이 되었다.
3과/ 속회의 과제 : 바람직한 속회의 방향
1. 웨슬리 속회의 쇠퇴 원인 분석
웨슬리 속회가 성장과 쇠퇴를 거치는 과정에서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을 것이다.
(1) 영적 책임의식(accountability)의 상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속회 안에서의 내적 경건으로의 몰입은 상호간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돌봄에 무관심하고 은총의 수단을 활용하는 것도 등한시하며 실제적 선행생활도 관심 밖으로 내몰게 만들었다.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상실한 채 영적 내면적 자기 경건에만 몰입하는 것이 속회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 마디로 신앙과 선행의 조화를 통한 성화의 완성이라는 웨슬리의 본래적 정신을 상실한 것이다. 위와 동일. p.249-250
(2) 속회의 교회갱신적 사명 상실.
속회는 본래 제도적 교회의 영적 무기력을 쇄신시키고 갱신시키는 ‘교회안의 작은 교회’였는데, 제도적 교회의 대형화와 함께 속회도 또 하나의 교회제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위와 동일. p.253-254
(3) 교회의 교인자격이 쇠퇴함.
교회의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문은 크게 열려졌다. 교인의 자격의 기초 토대가 넓어진 결과들로 인해 교인의 자질이 손상되었다. 그들은 도덕적인 사람들이지만 신앙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의 선한 의도를 좌절시킨다. 길버트 머레이, 감리교회 속회(웨슬리 관련 자료집 2집, 한경수 옮김) p.385-386
(4) 메말라버린 그리스도인의 체험,
속회의 번영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충만하고 활기가 넘칠 때에 가장 성공한다. 그런데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신앙이 상실되면서 속회 제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위와 동일. p.379-380
(5) 감리교도의 중산층화.
19세기 후반에 들어 감리교도들이 급격하게 중산층화하면서 영적 신앙생활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의 중산층화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전 사역에 가장 무관심하게 되는 모든 유혹 중에서 부자들의 교활함이 가장 크다... 지난 50년간에 내가 본 수천의 증거가 그것을 말해준다. 부자들은 교활하다... 그들은 그들이 가난했을 때보다 훨씬 덜 거룩한 성화생활을 힘쓰지 않고 있다.” 그리고 “부에 관하여” 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부의 증가는 알만악의 뿌리로써 신경질과 우상숭배와 교만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안한 성질을 가져옴으로써 성화생활의 방해물이 됨을 지적하였다. 김홍기, 감리교회사(도서출판 kmc, 2003) p.248-249
(6) 속회 지도자의 훈련부족.
19세기 감리교도들의 급격한 양적 증가는 질적 영성훈련을 약화시켰다. 철저한 질적 영적 성화훈련이 자연스럽게 양적 성장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질적 성화훈련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지도력이 상실됨으로써 속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부유층 교인들은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을 얻으려고 목사 만나기를 좋아하였고, 목사들도 사회적 지위를 성취하려고 부유층교인들을 만나기를 좋아하였다. 또 모든 교인들을 지도할만한 속회지도자들이 절대로 부족하였고, 기존의 속회지도자들의 영적 상태도 속도들을 제대로 돌볼만한 능력이 없었다. 속회지도자의 수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고, 속회지도자의 훈련부족이 속회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성도의 영적 성장을 책임지는 ‘책임적 제자직’(Accountable Discipleship)을 가진 지도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된 것이다. 위와 동일. p.250-251
(7) 합리적 과학적 성서비평학의 영향.
합리적 과학적 성서비평학의 발전과 함께 감리교 설교가들의 설교들은 학문적이 되었고, 예배형태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형식적이 되어 버렸다. 속회도 자연히 감성적 체험적 분위기보다는 지성적 학문적 분위기로 바뀌면서 생명력을 상실하였다. 위와 동일. p.249
2. 속회의 목표 재확인
만약 우리가 속회의 전통을 회복하려면 궁극적인 성화의 목적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초기 속회에서 속도들이 그들의 믿음이 파괴되는 일이 없도록 ‘서로를 돌보는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첫째 목표로 삼았다. 웨슬리 속회가 원시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교제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의미다. ‘서로’ 라는 말이나 ‘교제’라는 말이 공동체 정신을 지향하는 것처럼, 신앙의 성장이나 성숙과 성화는 혼자 묵상하거나 기도원에 들어가 자기 혼자만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가 그렇게도 많은 영향을 받고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라비안을 떠났던 것은 바로 정적주의와 신비주의 때문이었다. 웨슬리의 성화는 생활 수도원적인 영성으로, 삶 속에서 이루어야 할 성화이다. ‘서로’라는 말은 침묵적인 영성이 아니라 ‘돌봄’의 영성을 말한다 박용호, 「존 웨슬리의 속회론」, (서울: Kmc, 2010), 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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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속회의 두 번째 목표는 ‘소박하고 솔직하고 진지한 자기 고백과 간증을 통한 영적 체험과 영적 교제’였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삶의 나눔’이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교제로, 웨슬리 용어로 ‘상호 책임 의식’(Accountability)이다 위와 동일. p.180.
. 솔직한 자기표현은 개인적 성장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정서적 성숙을 성취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속회는 그런 동력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L. 왓슨, 「이것이 속회다(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한경수 역, (인천: 주안교회출판부, 1993) 207.
. 속도들이 속장으로부터 매주 그들의 종교적 체험과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도록 요구받았을 때, 그들은 제자 됨으로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자기인식에서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것은 ‘상호 책임 의식’(Accountability)을 통해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하나님과의 관계형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속회에서 자신을 열어 삶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은혜도 없고, 성령의 역사도 있을 수 없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모임이라면 속회는 매력 없는 모임이 될 것이다.
21세기 교회의 키워드는 ‘성장’이 아니라 ‘건강’이다. 웨슬리 속회의 핵심도 성장이 아니라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만일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브리스톨에서 속회에 성실하지 않고 성화에 진전이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인 3백 명을 잘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엄격하게 징계하였고, 그 후에 감리교회는 오히려 더 성장하였던 것이다 박용호, 「존 웨슬리의 속회론」, (서울: Kmc, 2010), 182.
.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외형 부풀리기와 성도 끌어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과연 교회와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 목적을 위한 신앙의 내용은 무엇인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속회의 올바른 의미 세우기 : ‘에클레시아 속의 에클레시올라
웨슬리는 은혜의 보편성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특히 교회의 규칙서에 의해 제공되는 제도화된 은혜의 수단에 근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신도회와 속회와 반회는 그것들의 참된 목적을 성취하였다. 에클레시아(ecclesia, 교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교리적 조직을 제공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에클레시올라들(ecclesiolae, 작은 교회들)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의 내적 고취에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었다. “작은 교회”들을 조직할 때 내세워진 목적은 보다 큰 교회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것에 그 본질적 요소들을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구성원들에게는 오직 영국 국교회의 교리들과 규례들이 전제가 되는 한에서만 종교적 체험에 대한 지도와 영적 양육이 주어졌다. 간단히 말해서 웨슬리는 “에클레시아 속에 에클레시올라”라는 개념을 철저히 실행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적 제자 됨의 직접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소집단들의 자유와 세상의 현실성과 가변성 속에서 교리와 체제가 확립된 보다 큰 교회라는 불가결한 조직을 철저하게 실행하였다. 결론은 명백하다. 즉 “에클레시올라”라는 조직은 본질적으로 타당하고 불가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리교 속회는 그룹 내에 언약과 훈련, 그룹 안에서의 책임, 그리고 큰 교회라는 몸에 대한 소그룹으로서의 책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H. A. 스나이더, 조종남역, 「혁신적인 교회갱신과 웨슬레」,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p. 193.
따라서 오늘 우리는 그동안 속회에 부여해 온 특성과 의미를 바로 세워야 한다.
첫째는 개인적 성장과 상호 인격적인 활력은 속회의 목적이 아니라 속회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소그룹들이 이 세상에서의 제자직의 본질적인 임무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교회의 소그룹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을 메시지에 대하여 냉담하거나 적의를 품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무장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아성취를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 직접적인 사명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선포함에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구원을 거부하는 이 세상 안에 고통과 압제가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자아의 보잘 것 없음을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그룹(속회)으로 하여금 가난과 압제 속에서도 사회적 증인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공동체들 안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마찬가지로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믿음과 그들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에서 오는 기쁨을 풍성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호 관계 책임(Accountability)이다.
두 번째는 초기 감리회에 있어서 속회의 기능이 복음 전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 전도가 교세를 확장시키고 교인들을 모으는 방법으로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속회의 원래 목적이 아니었다. 속회는 오직 복음 전도와 양육의 장소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속회의 일차적인 목적이 상호 관계 책임(Accountability)을 통하여 신실한 제자직을 배양시킴으로써 복음 전도에 대한 최초의 반응을 유지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매주 열리는 속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람들은 속도들이 그들 각자의 종교적 순례의 여정을 보고하고, 사랑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을 통하여 그들 자신의 증언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임에 따라 제자 됨의 실체를 접하게 되었다. 속회의 속도가 되는 것은 에클레시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클레시올라에 의하여 제시되고 요구되었던 규정의 준수를 필요로 하였다. 웨슬리는 ‘에클레시아 속의 에클레시올라’라는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감리회 속회의 목적이 영국의 국교회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혁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오늘 감리교회와 교단을 건강하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속회가 ‘에클레시아 속의 에클레시올라’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웨슬리의 정신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감리교도로서 살아가는 모든 이 시대의 메도디스트들을 향한 성령의 인도하심일 것이다.
4. 속회 활성화를 위한 제안
웨슬리는 속회와 밴드의 양 날개로 소그룹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오늘 감리교회 조직을 보면 속회조직만 있고 사실 밴드조직이 없다. 강력한 상호 관계 책임(Accountability)으로 완전에 이르는 반회(band)조직이 없으니까, 감리교회 안에서 감리교도를 찾아 볼 수 없고, 감리교회 안에서 메도디스트의 모델을 발견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좀 더 분명한 과제가 남는다. 무엇보다 첫째는 지금까지 고민해왔던 과연 어떻게 속회를 잘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그리고 둘째는 ‘에클레시아 속의 에클레시올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한 반회(band)조직을 어떻게 접목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으로 불신자와 초신자도 교회에 등록하면 속회원이 될 수 있는 현 속회 운영에, 교회 평신도 지도자 그룹을 위한 속장 반회(band)를 구성하는 것이다. 1주에 한 번 속장 교육과 더불어 더 깊은 영적 경험과 성화를 열망하는 속회 지도자 영성훈련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숙한 속회의 지도자 그룹이 형성되어 초신자들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되고 성숙한 신앙의 도전이 될 것이다. 아울러 자연스럽게 속장 리더십 영성훈련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기별 한 번씩 애찬회를 통해 지도자로서의 자긍심과 책임을 더욱 고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선택 신도회(Select Society)는 속회보다 큰 구역이나 지역의 목회자들 간의 상호 책임적인 고백과 돌봄(Accountability)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웨슬리의 리더십 가운데 조직을 하나로 이끌어 가는 연결 혹은 연대주의(Connectionalism)를 이루는 것이다. 연대주의란 각기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신도회가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의 신도회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순회 설교자가 가더라도 동일한 자신의 지도자로서 가르침을 받고, 다른 신도회에 속한 감리회원들도 어디를 가든지 동일한 형제자매로 인정하고 같이 활동한다는 정신이다. 또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를 웨슬리는 ‘연합신도회’(United Society)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정신을 ‘감리교회의 연대주의’라고 한다. 선택 신도회(Select Society)를 지역 목회자들의 모임(예를 들어 지방교역자 회의)에 적용하는 것은 오늘 개교회주의에 빠진 감리교회가 다시 연합 감리교회로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시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가 먼저 성화에 이르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감리교회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감리교회가 영국이나 미국에서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처음 가졌던 교리나 정신 그리고 훈련을 잃어버림으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바리새적인 종교로 전락하는 것을 염려한다.”고 말하였다. 웨슬리의 강력한 유산인 속회와 밴드를 잘 가꾸고 발전시켜서 한국 감리교회가 다시 부흥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한다.
<출처, 허태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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