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영성
글 /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머리말
영국교회가 17세기 말 합리주의에 의하여 영적 고갈에 당면하고 영국사회가 도덕적 퇴폐에 빠졌을 때 존 웨슬리는 영국사회를 구하고 생명력을 잃고 형식주의에 빠진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일깨웠다. 그러므로써 그는 영국교회에 새로운 갱신의 운동을 일으켰다.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은 단순히 신앙운동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무너진 도덕과 윤리를 갱신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영적 각성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사회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명예혁명을 가져 올 수 있었다.
1. 생애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영국국교의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Samuel)와 어머니 수산나(Susanna)의 열다섯번째 아들로 태어 났다. 그의 조부와 증조부는 국교에 반대하는 죄목으로 생업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부친 사무엘은 기독교 보수주의를 이어받았다.1) 국교를 반대하는 신학대학에 들어간 사무엘은 거기에 난폭과 맹목적인 신앙이 판을 치는 것을 보고 염증을 느껴 옥스퍼드의 엑세터(Exeter) 대학으로 학교를 옮긴다. 존 웨슬리는 이러한 기독교 보수주의의 가문에서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 사무엘로 부터 성자의 품성과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어머니 수산나는 “단순히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주간 중에도 틈틈히 경건과 기도의 행위로써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매일 얼마 만큼씩 시간을 내어 가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를 하였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하게 하나님께 바치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진정한 열정으로 가득 차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매일 저녁에 시간을 내어서 아이들 하고 하루에 한명씩 따로 데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2)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의 크라이스처치(Christ Church)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726년 옥스포드 대학교 링컨 대학의 연구원(a Fellow of Lincoln)으로 선발되었다.3) 그는 부친의 교회에서 2년간(1727-9년) 부목사로 재직했다. 옥스포드 시절 그는 진지하고, 경건하고 학구적인 동료들을 모아 클럽을 만들어 신앙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모임은 처음에는 “신성 그럽”(Holy Club)이라고 일컬어지다가 나중에는 “감리주의자“(Methodists)라고 불리워졌다. 이 들 중에는 그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친구인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가 포함되어 있었다. 약 45명의 회원들이 거룩한 모임운동에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존 웨슬리는 윌리암 로오(William Law, 1686-1761)를 직접 만나 보았고, 그리고 그 이전의 위대한 영성가 헨리 모어(Henry More, 1641-1687), 토마스 아킴피스(Thomas à Kempis, 1379-1471),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1613-1667) 등의 영향을 받았다.
1735년 32세의 나이로 존 웨슬리는 복음선교회의 후원으로 동생 찰스와 함께 미국 조지아주의 선교사로 가게된다. 거기서 노예무역과 술을 금지하는 그의 설교와 경험부족은 식민주의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그는 1737년에 귀국하게 된다. 그는 런던으로 되돌아 와 모리비안 교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생동적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하든중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후 그는 남은 생애를 복음전도사역을 위하여 받치게 된다.
웨슬리는 국교회가 집회장소를 제공해 주지 않자 1739년 킹스우드의 광부 앞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런던과 브리스톨 지역에 여러 신도회를 조직했으며 그것이 성공함으로써 그는 그들을 연합시키는 평신도 설교자들로 구성된 한 단체, “연합신도회”(United Societies)를 조직한다. 웨슬리는 그의 각 지역에 있는 신도회를 속회를 중심으로 확장하였다. 1742년 이후 웨슬리는 그의 활동영역을 넓혀 영국 전체를 그의 전도영역으로 삼는다. 그가 매년 말 타고 여행한 거리는 평균 12,800km였고, 수천통의 편지를 쓰고, 수많은 설교를 했다. 그는 많은 국교회 지도자들의 적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열정적인 환영을 받았다.
1744년 평신도 설교자들의 회의를 열었고 이것은 매년 열려 결국 이것을 위한 법적 제도가 1784년 마련되어 감리교의 기초가 되었다. 1747년 그는 아일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1751년에는 스코틀랜드를 처음으로 방문하고 이후 모두 22번이나 방문하게 된다. 1760년 미국에서도 감리회조직이 소규모형태로 시작되어 점차 발전하였고 1768년 감리교회가 뉴욕에서 세워졌다. 웨슬리는 미국감리회의 조직을 위하여 옥스퍼드 대학 지저스 칼리지(Jesus College) 졸업생인 토마스 코크(Thomas Kork, 1747-1814)박사를 감독으로 임명하고, 미국에서 프랜시스 에스베리(Francis Asbury, 1745-1816)를 동역자로 안수하도록 지시했다. 웨슬리 자신은 그때까지도 감리회조직이 영국 성공회 안에서 하나의 신앙운동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감리교는 점차적으로 독립된 조직으로 성장해 나갔다. 웨슬리가 별세할 당시 영국에는 2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감리교 신자들이 있었고,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이 있었다.4)
웨슬리의 부인 마리아 바제일(Vazeille) 여사는 매우 변덕스런 기질을 가지고 어느 상인의 돈많은 과부였다. 그래서 웨슬리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평생 15분 이상 울적한 기분을 가져본 기억이 없을 겅도로 늘 밝은 면을 보며 살았다. 알렉산더 녹스는 웨슬리의 동기에서 야심과 교만과 이기심과 자기만족 등의 빛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고 증언한다. 그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능력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믿어 주는 신뢰였다. 웨슬리의 동생 찰스는 더 신사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휘트필드는 더 위대한 설교자였다. 웨슬리는 강력한 지도력과 조직력을 가진 위대한 용기와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의 인격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경건과 사랑은 비교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2, 회심의 체험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서 갓 안수를 받은 성공회 신부로서 대학에서 경건한 모임을 추구하면서 체험지향적인 경건을 추구했던 이미 대륙 경건주의(continental pietism)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년전 영국에서 시작되어 성공회적인 성사위주의 영성을 호흡한 신도회 운동(religious society movement)을 받았다.5) 웨슬리는 옥스포드 시절부터 “개인적인 신성을 목표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1726년 처음으로 출간된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그리스도인의 완성](Christian Perfection), 1728년에 출간된 [경건한 삶으로의 부르심](Serious Call to a Holy Life))에 접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오직 그 분께 헌신하고 나의 영혼과 몸과 나의 존재 전체를 그분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웨슬리 형제는 1735년 선교사로 임명받아 미국의 조지아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항해 도중 니취만이 이끄는 일단의 모라비안(moravianism) 교인들이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의 모습에 크게 감화를 받아 스스로에게 그런 용기가 없었음을 뉘우쳤다. 사반나(Savannah)에 닿아서 스팡겐베르그(August Spangenberg)를 만났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당황하여 “그분은 세상의 구세주임을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스팡겐베르그는 지체없이 다시 물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을 구원하신 것을 알고 계시는가?”.6) 그는 죠지아에서 2년 동안의 결실없는 선교를 마치고 좌절 속에서 귀국했다.
웨슬리는 당시 25세 였던 독일 모리비안 교회지도자 페터 뵐러(Peter Böhler)와의 교제를 통해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믿음”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의 일기 1738년 3월 4일자에는 다음같이 쓰여있다. “옥스포드에 가서 동생을 만나보니 ...그 자리에는 페터 뵐러도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5일 일요일에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안에서 우리가 신앙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우리를 구원받게 해 줄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즉시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설교를 그만 두어라. 너 자신이 믿음이 없으면서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느냐?’ 나는 뵐러에게 내가 설교를 그만 두어야 할지 아닌지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였다. ‘절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설교를 할수 있읍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믿음을 갖게 되기까지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요. 그리고 나서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에 관하여 설교를 하십시오“.7) 웨슬리는 뵐러와 함께 “패터레인”에서 기도회를 시작하여 “페터레인 신도회”가 시작된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가의 한 모임에서 독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이 낭독될 때, 그는 회심의 경험을 갖게된다. 그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저녁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 가(Aldersgate Street)에 있는 어느 회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5분전 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나는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어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8) 그후 그는 그의 삶의 목표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생동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을 고양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낳고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738년 6월 웨슬리는 몇 동역자와 더불어 독일 헤른훗(Herrnhut)의 모리비아 교단을 방문하고 그리고 할레의 경건주의자 프랑케(August Francke)를 방문하여 그의 신앙생활은 큰 영향을 받게된다. 그러나 웨슬리는 모리비안 교도들의 정적주의(quietism)와 영적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경향, 그리고 진젠도르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인숭배의 경향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낸다.9)
웨슬리는 80세가 넘기까지 하루에 세차례 설교했으나 21세와 다름없는 힘이 생기며 오히려 젊었을 때 앓았던 두통, 치통 등 육체적인 질병을 전혀 앓지 않았다. 웨슬리는 “주께서 다스리신다”, “살아있는 순간까지 그분을 위해 살게 하소서”라는 신념을 갖고 살았다.10) 그는 87세까지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11)
3. 웨슬리의 일기
웨슬리는 테일러 감독이 그의 저서 [거룩한 삶과 죽음]에서 충고해준 것에서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삶의 사소한 일들 에 관해서 까지 기록하는 습관을 가졌다. 이것이 26권으로 제본되어 있는 웨슬리의 신앙일기이다.12)
웨슬리의 신앙일기는 조지 폭스(George Fox)의 일기, 존 헨리 뉴우먼(John Henry Newman)의 삶의 변증법과 더불어 17,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영국민족의 참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13) 조지 폭스(George Fox)의 일기가 17세기의 영국사회를 이해하도록 해주고, 존 헨리 뉴우먼(John Henry Newman)의 삶의 변증법은 19세기의 영국사회를 잘 알려준다면, 웨슬리의 신앙일기는 18세기 영국사회의 진면목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조지 폭스는 개인주의의 화신이었다. 그의 일기는 개신교의 영국국교의 반대측면과 항변의 정신 사이의 불일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헨리의 뉴우먼은 영국국교인 성공회를 부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의 저서는 영국상류계층의 모습에 대하여 중요한 사상을 전달해준다.
웨슬리는 중세의 프랜시스와 그의 추종자들 이후 처음으로 사회의 하층계층인 노동계층을 찾아가 설교한 자이다. 프랑스, 독일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종교개혁도 본질적으로는 중산계급의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상류계층과 노동계층에는 미치지 못했다.14) 이에 반해서 웨슬리는 여행계획을 짤 때 의도적으로 귀족들이나 그들의 하인들이나 빈민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자립정신이 강한 근면한 노동자들과 직접 만나기 위하여 일정을 짰다.
4. 웨슬리의 영성
첫째, 회심의 영성이었다.
웨슬러는 회심의 경험을 갖기까지 구원을 받을 믿음이 부족한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한 자가 바로 독일 모리비안 교도 베터 뵐러였다. 그는 뵐러에게서 배운대로 믿음에 관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일기에 다음같이 적고 있다. “내 영혼이 비록 원점에서 시작을 하기는 하였어도 이 새로운 교리(믿음)에 관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제일 먼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구원을 전한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에 있는 죄수였다”.15) 거듭된 뵐러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는 영적 번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나는 페터 뵐러에게 내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단호하게 대답하기를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주를 이 세상에서 감추려고 해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이 사실을 브로톤씨와 자기 동생 찰스에게 말하였다. 이들은 수많은 전도의 일을 했고 또 당했던 웨슬리가 믿음이 없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불을 지른 것이 되었고, 결코 그 불이 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16)
한달 지나 동생 찰스가 뵐러와의 대화를 통하여 믿음의 본질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내 동생은 장시간에 걸쳐서 페터 뵐러와 특별히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하나님의 뜻으로 그의 눈이 열려서 ’오로지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의 진실하고 살아있는 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게 되었다”.17) 무겁고 우울한 마음을 지니고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가의 소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의 낭독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끼고, 자기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가 씻음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른다. 그는 이 순간을 다음같이 적고 있다. ”나는 악의적으로 나를 이용했거나 박해한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생전 처음 내 마음속에 느낀 것을 거기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터놓고 간증하기 시작했다“.18) 그러나 마귀는 ”이것은 믿음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기쁨은 어디 있나“.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처음 믿을 때 생기는 황홀한 기쁨을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에 따라 때로는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귀의 시험은 자꾸 되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웨슬리는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자 주님이 그에게 도움을 보내어 주셨다. 웨슬리는 회심이전과 이후의 영적 투쟁의 차이를 다음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싸웠다. 그렇다. 나는 율법 아래서 뿐만 아니라 은총 아래서 역시 있는 힘을 다하여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주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때때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늘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19)
둘째, 엄격한 칼빈주의 예정론을 반대하고 개인의 회심적 결단을 중요시했다.
웨슬리는 아다나시우스나 어거스틴도 아니었고 다만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는 형이상학적 신학을 반대하고 모든 교파에 속한 기독교인들과 우애관계를 형성하고 대중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이름과 함께 붙여다니는 제한된 구원의 교리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리의 감리교에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정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옥스포드로부터 그의 오랜 친구인 칼빈주의자 조지 휘트필드와 논쟁하고 단절하게 되었다. 그런데 헌팅든(Huntingdon) 백작 부인이 휘트필트 편에 들어서 웨슬리에 반론을 펴 문제가 복잡하게 되었다. 그 귀부인은 웨슬리와 마음이 맞지 않아 감리교 식의 회단을 스스로 설립하기까지 하였다. 브라이튼(Brighton) 채플이 그 하나다. 이것들이 얼마후에는 칼빈주의적 감리교인 모임(Connection)인 “헌팅든 여사 모임”(Lady Huntingdon‘s Connection)으로 발전하였다.20) 그렇다고 이 모임이 감리교에서 분열해 나간 것이 아니다. 그 기본 정신은 웨슬리와 다름이 없었다.
세째, 말씀과 능력전도의 영성을 소유했다.
올리버 크롬엘(Oliver Cromwell)처럼 웨슬리는 본질적으로 행동의 인간이었다. 그는 세계를 교구로 삼고 40년이나 거의 말을 타고 영국, 스코트랜드, 아일랜드를 무비면서 복음을 전했다. 1년에 8천마일을 여행했으며, 일천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다. 그는 진기한 풍경을 일부러 찾아 다니는 사람들 조차 발길을 돌리지 않는 가장 멀리 떨어진 영국의 산간 벽지들을 수없이 찾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거칠고 맹수같이 사나운 야만적인 광부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고 때로는 진흙과 돌로 맞은 적이 있으나 굴하지 않고 전도했다. 어떨 때는 그는 폭도들에 의하여 납치를 당하고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그의 태도는 늘 차분했다. 그는 매사를 다룰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곡을 찔렀다. 그는 사람들이 울며 쓰러지게 만들었으나 자신은 놀라지 않았다. 휘트필트와 함께 그가 설교할 때마다 청중들에게 신체적인 광란의 변화가 자주 나타났다. 어떤 이는 울부짖고 어떤 이는 땅에 거꾸러져서 몸을 뒤틀곤 하였다. 웨슬리는 이 현상이 성신의 역사, 아니면 악마의 반항의 발악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웨슬리나 휘트필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시인 내지 묵인하였기 때문에 일반 성직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의 일기에 의하면 설교를 듣고 어린 시절부터 간질병증세가 있는 시장의 아들이 고침을 받았고 적고 있다.21)
네째, 초자연적인 것을 인정하는 영성을 소유했다.
웨슬리는 악영을 쫓아내는 영력을 소유했다. 그는 극히 소박하리만큼 초자연적인 것에 집착했으며, 혼령들의 선의와 이상한 소리들이 악마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믿었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킹즈우드(Kingswood)에 있는 마귀에 사로잡힌 젊은 여인을 기도의 능력으로 해방시킨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방안에 들어 서니까 그 여인은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두 세 사람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그 여인은 이렇게 소리를 쳤다. ‘나는 저주를 받았어요...나는 이제 마귀의 자식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마귀에게 맡겼어요...마귀를 섬겨야 돼요. 나는 마귀와 함께 지옥으로 가야 돼요. 나는 마귀의 것이예요. ..나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나는 저주를 받을 거예요. 저주를 요!’ 그리고 나서 그 여인은 마귀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여인은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나 우리가 막 떠나려고 하자 말할 수 없이 격렬하게 다시 시작하였다. ...“착한 마귀야, 이리 와서 나를 데려가라. 내 두뇌를 뽑아 내겠다고 했지. 자, 어서 그렇게 해. 나는 네 거야. 나는 네 거가 될 거야. 자, 어서 와서 나를 데려가 줘”.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함으로써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여인이 그녀와 똑 같이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이 때 내 동생이 들어 왔는데 시간은 9시 쯤 되었다. 우리는 11시가 넘도록 기도를 계속하였는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그녀의 영혼을 향하여 말씀을 하시어 평화를 되찾게 하였다. 첫 번째로 고통을 받던 여인과 그 다음의 여인이 함께 평안해 졌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원수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께 찬양하였다“.22)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서 그의 전도집회에 일어난 감리교 신자들의 입신의 체험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항상 몸에서 떠나 있을 때이며, 그 체험은 순간적으로 전혀 예기치 않는 때에 이루어지며, 모든 감각과 기력을 빼앗아 버리고 만다. ..일반적으로 그런 체험을 하는 순간부터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게 되며 그들 주위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오후 5시경 그들의 찬송부르는 소리가 들렷다. ..앨리스 밀러(15세)가 황홀경에 들어갔다. ..그녀는 걸상에 앉자 벽에 기대고 눈을 떴으나 하늘만 쳐다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 앞에 몇가지 동작을 취해 보였지만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엔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사랑의 표정이 가득차 있었고 눈물이 조용히 그녀의 뺨 위로 흘러 내렸다. ..이 처럼 아름다움 인간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기쁜 듯 미소를 머금고 감사와 사랑이 얼굴에 가득하였고 눈물 방울이 조용히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반 시간 쯤 지나자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공포와 비애와 실망의 빛으로 바뀌더니 눈물이 쏟아지며 외치기 시작했다. ‘오 주여 그들은 모두 벌받을 것입니다. 모두 벌 받게 될 것이예요’ 그리고 5분 정도 자나자 다시 미소를 띠며 얼굴엔 다시 사랑과 기쁨이 가득찼다. 6시반 경 다시 절망의 빛이 감돌더니 비통하게 울면서 ’오, 주여 그들은 지옥으로 가게 되겠지요. 온 세상이 지옥으로!‘ 하며 외쳤다. 조금있다 다시 ’큰 소리로 통곡하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고 외쳤다. 다시 조금 지나자 얼굴엔 감사와 기쁨과 사랑이 피어나더니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외쳤다. 7시 쯤에야 의식이 돌아왔다. 내가 ’어디 갔다 왔느냐‘ 하자 ’내 주님과 함께 있었어요. ’왜 울었지?‘ ’나 때문이 아니고 세상 때문에 울었어요. 지옥으로 들어가지 직전에 있었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니?’ ’세상을 향해 외치는 목사님들이죠. 그러지 않게 되면, 자만에 빠져 하나님께선 그들을 떠나게 되고 그들은 영혼을 잃게되고 말거예요’”23)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서 입신에 대한 균형잡힌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피부로 경험하였다. 확신보다는 위로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넘치는 평화 속에서 새 힘을 얻었다. 고함이나 경련, 환상, 신비체험 등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너무 과신하여 그것이 내적인 역사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이런 것이 없으며 모두 헛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에도 위험이 따른다. 반대로 이러한 현상을 너무 소홀히 취급하여 무시해 버리거나 이러한 현상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도 또한 위험이 따른다. 반면에 진리는 다음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타락된 죄인들에게 급작스럽고 강하게 역사하신다. 이런 사람들은 자연히 급작스레 고함을 지르거나 북돋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더 뚜렷히 보여주시려고 신비한 꿈이나 입신 또는 환상을 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3)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경험들은 자연의 은총과 일치하게 된다. 4)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이러한 현상들을 모방하여 유혹한다. 그러하다고 이런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전체 현상들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된다. 처음에는 이런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아직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현상이든 그것이 진실된 것인가 아니면 잘못되거나 왜곡된 것인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24)
다섯째, 합리성과 도덕성과 사회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회심의 경험을 한 후 그 계기가 모리비안교도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모라비안 공동체를 알기 위하여 독일로 가서 진젠도르프(Zinzendorf)를 만나 두 주일을 헤른후트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가 완전한 모리비아교도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을 가졌다. 모라비안교의 지나친 주관성과 신비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훨씬 행동적이요 덜 신비주의적이며, 폭넓은 활동의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1739년 10월에 진젠도르프에게서 온 몰터(Philipp Heinrich Molter)가 의심있는 자는 아직 참 신앙을 가지지 못했음으로 성찬을 삼가고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될 때까지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설교를 하자 웨슬리가 여태까지 모라비안교도에게 가졌던 우의가 흔들리게 되었다. 찰스 웨슬리는 "그는 성령이나 은총이 각종 수단- 특히 성례전-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부인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25) 그리하여 감리교인들은 모라비안교도들과의 모임에서 분리해 나와 ‘연합회단“을 조직하게 된다.26)
모라비안 교도들이 교회의 성례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는 달리 웨슬리는 성례전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자선행위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역, 그리고 방법상의 개혁을 훨씬 강조하였다. 대륙 경건주의가 윤리성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웨슬리운동은 사회에 대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인 봉사에 적극적으로 헌신했으며, 그것을 거룩한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는 성공회의 신앙과 구조 안에서 쇄신된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웨슬리는 재산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도 바른 설교를 하고 있다. “월요일 저녁에 형제들에게 ‘세상이나 세상의 재물을 사랑하지 말도록‘ 엄한 주의를 주었다. 재산이야 말로 그들에겐 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들이 근면 검소하기 때문에 재산이 느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이런 현상이 벌써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런던, 브리스톨 등 무역도시에서 사업하는 자들은 자본이 이미 7배, 어떤 자는 20 -100배까지 늘어났다. 그러니 그들이 재산에 파묻혀 파멸하지 않도록 엄한 경계를 해주어야 한다”.27)
1741년 6월 15일 일기에서도 루터와 자신의 차이점을 쓰고 있다 : “런던으로 길을 떠난 후에 도중에 마틴 루터가 쓴 유명한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었다. 나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그것을 내가 얼마나 높이 평가했던가? ...저자가 아무 것도 신통한 것을 쓰지 못했다는 것만 보아도 어려운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다루고 있는 여러 본문에 관한 글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생각이 아주 얕은 것은 물론이고 엉망진창이며, 거의 모든 문제에 관하여 혼동을 일으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비주의 냄새를 짙게 풍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위험할 정도로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28)
1749년 7월 19일 일기를 보면 웨슬리는 루터의 생애를 번역했다. 그리고 난 뒤의 그의 느낌은 루터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큰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칠고 다루기 힘든 정신과 여론에 대하여 그를 날카롭게 꾸짖어 줄”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마틴 루터의 생애라는 작품의 번역을 마쳤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하나님의 높으신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고 또한 하나님이 붙잡으신 복된 도구였다. 그러나 아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는 충실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29)
여섯째, 신자의 완전 즉 성화를 추구했다.
처음에는 웨슬리는 신자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완전한 동기와 행동이 가능하고, 그런 경지에 도달하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에 지배되었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서 다음같이 쓰고 있다. “ 몇년전 동생은 ‘형님의 오순절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금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때에는 거룩하다 말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의견을 수시로 알렸다. 그러나 선입관을 가지지 않고 본다면 지금은 그날이 완전히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들 뿐 아니라 거룩하다 함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런던을 비롯한 잉글랜드의 여러 지방과 더블린을 비롯한 아일랜드 지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물론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20년 전보다 더 자주 들을 수 있다”.30) “론체스턴에서는 방안에 더 들어 올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찼다. 그들에게 베데스타 못가에 있던 중요한 사람의 얘기를 들어 설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으나 완전해 지기를 바라는 자들은 얼마 안되니 어찌 된 일인가”.31)
그리하여 웨슬리의 감리교인들은 국교회로부터 “감리교는 완전하며 말이나 행동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열광주의적 태도를 지닌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웨슬리는 완전한 성결이라는 신앙의 목표이지 그것이 실제로 실현된다고 본 것은 아니라고 피력한다. 웨슬리는 완전주의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완전에 대하여 당시 로이드 이브닝 포스트(Llyod's Evening Post) 편집장에게 보내는 글월에서 다음같이 자신의 입장을 “완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35, 6년전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nus)가 말하는 완전한 기독교인의 성품에 대해 찬양한 적이 있었습니다. 25, 6년전엔 나도 그런 성품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좀 더 성경적인 태도를 가지고 성경의 말씀대로 행할 때 그러한 성품은 이룰 수 있음을 알게 되어 그런 성품을 ‘감리교의 성품’이라고 불렀고 그 후로 호기심 있는 사람들은 내 글을 읽게 되었으며, 덕분에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이 많이 벗어 졌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높이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첫 머리에 나와 형제들의 이름을 적고 ‘내가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감리교의 변하지 않는 원리이며 실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리교의 표식입니다’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단지 하나의 이유 때문에 즉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바라는 욕망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자들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은 몸과 마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하려 노력합니다...나는 불완전하다고 온 세상에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감리교인이라고 블러 주셨읍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내가 바라는 그런 성품을 아직 얻지 못하고 있읍니다“.32) 이 글월에서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자신의 칭의를 믿으며, 하나님의 넓고 큰 자비 속에서 거룩한 곳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경건하고 지각있는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웨슬리는 다음같이 “기독자의 완전”에 대해 피력한다: “기독자의 완성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바는 1)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대하시겠습니다? 2) 마음과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보다 못한 것을 바라십니까? 3)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다시 얻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반대하시겠습니까?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너무 엄청난 것입니까? 5)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이 완성에 대해 다른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에 관심쓰지 않습니다”.33)
여기서 웨슬리는 완전이란 윤리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종말론은 후천년적(postmillennial)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가 살던 시대에 분명히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병원, 학교, 각종 자선기관의 설립을 통해서 인류의 불행이 극복된다고 보았다.
일곱째, 신앙적인 열정과는 달리 지성적이며 유모어와 원만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으며 생활은 절도가 있었다.
웨슬리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었으나 모든 사물을 본대로 기술하였다. 그의 친구 존슨 박사는 웨슬리의 강한 성격에 대하여 다음같이 말하였다. “그는 아무리 독기를 품은 눈초리를 가진 사람을 만나도 굴하는 법이 없으며, 누구를 공박할 때는 눈물도 사정도 없을 뿐 아니라, 웅변을 할 때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의 귀를 먹먹하게 하지는 않으면서도 바위 꼭대기에서 쏟아지는 폭포수와도 같이 말을 잘하였다”.34) 웨슬리는 학자풍의 유모어를 가졌으며 그의 생활양식과 방법은 정숙하게 일관되었다. 알렉산더 녹스(Alexander Knox)는 그의 저서 [존 웨슬리]에서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게 훌륭한 노인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그의 정신 속에 담겨진 행복감이 그의 용모에서 빛난다. 그분의 얼굴을 볼 때 마다 ‘훌륭하게 보낸 인생의 멋진 추억’을 그분이 얼마나 만끽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35)
그는 밝고 꿰뚫어 보는 눈길을 말년에 이르기까지 유지하였고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하였다. 웨슬리 말년에 그와 함께 생활하였던 헨리 무어(Henry Moore)는 웨슬리의 서재에서 책 한권이나 종이 한 조각이라고 제자리에 놓이지 않는 적은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정확성과 시간을 엄수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차분하게 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일을 완벽하게 해내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행복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는 부드럽고 사귀기 편했으며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의 인격은 최선의 예의와 완벽한 경건성이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멋진 고전미와 해박한 지식과 착은 마음씨를 자지고 있었다. 순수한 농담과 재미있는 이야기와 끊이지 않는 명랑과 쾌활 속에서 참된 종교의 극치를 보였다.36)
여덟째, 공동체와 조직의 영성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거룩한 삶과 죽음], 토마스 아킴피스(Thomas á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고 로(William Law)의 [중대한 소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때 웨슬리는 중대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다음같이 충고하였다. “젊은이, 하나님을 섬기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지요. 명심하시오. 하나님은 결코 혼자서 섬길 수 없어요. 동지를 찾든지 없으면 만드시오. 혼자서만 믿는 고독한 종교(solitary religion)에 대하여 성경은 가르치지 않아요”.37) 이 권면은 웨슬리의 인생관을 결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지를 찾는 인생관은 그의 신학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칼빈의 엄격한 개인주의를 배격하였고, 그의 교회조직 전반을 형성할 뿐 아니라, 대체로 공동체적 방법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속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이루어 놓은 조직과 그가 창시한 제도와 주창한 생활관은 오늘날에도 영국사회와 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웨슬리는 자주 하나님과의 계약을 갱신하였다. 1777년 1월 1일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늘 하던 대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갱신하기 위해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유의 권능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새로운 힘을 얻어 가던 길을 계속 나갈 수 있었던 은혜스런 시간이었다”.38)
맺음말
웨슬리는 감리교운동을 성공회 내의 갱신운동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감리교 운동은 서서히 일관된 발전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성공회로부터 분리될 정도로 큰 모임이 되었다. 우선 헌팅든의 모임(Huntingdon Connection)이 1779년 분리 되어 나가서 웨일즈 감리교(Welsh Methodist Church)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웨슬리의 감리교인들은 성공회에서 서서히 분립하다가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난후 1791년에 결국 분립하여 한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런던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의 전도자로 외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얼마전 1784년에 감리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한 계획을 실현할 것을 당부한 일이었었다. “연회를 두어서 백명을 임명하여, 재산을 관장하고 감리교의 지속적인 운동을 지휘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교회분립을 반대하던 그였지만 실상은 이렇게 하여 감리교회의 자치의 깉을 미리 마련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미친 영향은 비단 감리교의 창설만이 아니다. 18세기 영국사회와 교회에 준 영향을 크다. 그는 가난한 자, 부자, 감리교인, 교황신봉자, 장로교인에게 ”그들 가운데 유행하는 유행병, 즉 교회를 떠나는 병을 조심하라“고 설교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당시 사역자는 오직 그가 맡은 교구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성공회 비판가들의 견해에 대하여 ”나는 전세계를 나의 교구로 본다“고 말한 그의 복음사역관은 오늘날 우리들의 복음전도관에 도전해 주고 있다.
웨슬리의 위대성은 그가 단지 경건한 인물이었고 감리교 창시자라는 데만 있지 않고 영국사회에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자의 성결을 선포하여 경건의 열매를 사회와 개인의 실생활 속에서 맺음으로써 영국사회를 도덕적으로 구원한 역사상 가장 투철한 윤리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데 있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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