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역사와 의미
김병혁 전도사
들어가는 말
오늘은 제483주년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였다. 5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난 이 시점에서 종교개혁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을 종교개혁의 후예로 인정하는데는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종교개혁 주일만 되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연합으로 기념 사업도 벌이고 종교개혁을 추모하는 집회와 학술 토론회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종교개혁 기념 행사들이란 자신들이 종교개혁의 후광을 입고 있는 기독교인임을 자위하고 그 사실에 만족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일회성 행사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행사들은 종교개혁과 그 정신을 운운하지만 실제로 종교개혁의 역사성을 현시대적 사고와 상황적 교리로 상대화해 버리고 다만 지금 우리 자신이 개혁되어(reforming) 가는데 있어서 종교적 명분만을 제공하는 제한된 사건 정도로 축소시켜 버린다.
그래서 종교개혁과 관련되어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이 개혁된(reformed) 사상을 말하려는 것은 오늘날처럼 보편화되고 다원화된 시대와는 어울리지않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종교적 사고 정도로 일축한다. 오늘날 이처럼 종교개혁이 현란한 구호와 과시형 행사로 그쳐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종교개혁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혹은 신앙적 명분만을 확보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림으로, 종교개혁의 역사가 갖고 있는 심오한 성격과 종교개혁이 시대를 거슬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의미에 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이 부족한데서 비롯된다. 여기에 본 논고를 작성하게 된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 보편적 가치로 상대화된 종교개혁의 역사와 의미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역사적 전통을 살펴보고 역사속에서 가장 엄밀한 형태로 개혁된 신학과 신앙적 전통이 어떤 경로로 보전되었으며 그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두 가지 종교개혁과 두 가지 전통
한국교회안에서 종교개혁을 생각할때면, 대부분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부패한 종교정책에 대항하는 성격으로 비텐베르그 성문앞에 게재한 「95개 반박문」을 떠올린다. 그래서 오늘날 장로교회의 대다수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종교개혁이라하면 루터의 용기있는 행동과 그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가 처해있었던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생각해볼 때, 누구도 감히 말할수 없었던 카톨릭의 종교 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게재하고 종교회의에서 나름대로 성경의 말하는 바를 소신있게 고백한 루터의 행동은 찬란한 종교개혁의 서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제시한 개혁의 명제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루터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움을 갖게 된다. 실질적인 종교개혁의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는 「95개 반박문」에서 루터는 로마 교회의 성전건축과 그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안해 내었던 많은 부패한 신학 논리(면죄부판매, 성자 잉여 공로 사상, 교황의 무오성)들의 허구성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개혁의 명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적용점이 당대의 카톨릭교회뿐 아니라 오늘날 현대 교회가 나아가야할 지향점을 제시하는데 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헌금보다 가나한고 곤궁한 사람을 돕기 위한 헌금이 더 가치있다는 것과 성전 건축을 위해 성도들의 최소한의 생계유지비까지 거둬들이느니 차라리 그 성당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이 낫다는 것과 불의하게 건축헌금에 강요되어 돈을 빼앗긴 사람에게는 교회가 오히려 그 성당을 팔아 그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나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교회에 와서 속죄를 받으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등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개혁의 성격이 아님을 알수 있다. 또한 루터주의의 대표적 신학 원리라고 할수 있는 이신칭의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에로의 회복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라 아니할수 없다.
이런 루터의 개혁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95개 반박문」의 내용이나 이신칭의 사상등은 제한된 성격을 갖고 있다. 즉 「95개 반박문」의 경우 당시 카톨릭의 부패된 사죄방식이나 그로 인한 유효성의 문제들을 비판하였을뿐 내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카톨릭의 사상전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신칭의나 만인제사장 교리의 경우는 매우 실천적인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루터주의자들로 인해 언약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방향으로 가게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엄밀하지 못한 개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가 이처럼 종교개혁의 시발자였음에도 미완의 종교개혁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몇가지 원인들이 있었다. 루터의 개혁은 카톨릭이라는 제도권 전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물론 그가 죽는날까지 사제의 서품을 벗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으나 루터의 성만찬론에서 알수있듯이 루터는 항상 카톨릭의 의식을 완전히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후에 퇴색된 루터주의자들에 의해 루터의 엄밀하지 못한 개혁의 논리는 예배의 외적의식이 강하게 주장되고 개인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와 신비주의의 내용으로 탈바꿈되어 버렸다. 루터의 개혁에 방해가 되었던 또다른 제도권이 있었다. 그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언제나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신흥세력의 비호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수 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의 정치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몇몇 부호나 영주들은 루터의 개혁사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이들의 참여와 관심은 처음에는 힘이 되었을지언정 후에 엄밀한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덫이 되고 말았다.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정치적 인물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과 제도권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윤리적 부담감이 루터로 하여금 초기의 순수한 종교개혁적 의지를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의 갖고 있는 신학적 딜레마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열거하는 것은 종교개혁을 말할 때,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서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말할때는 루터를 넘어선 종교개혁의 정신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은 누구를 통해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는가? 이 물음은 역사상 종교개혁의 정신이 가장 잘 발현된 가장 개혁된 신학과 신앙은 무엇인가하는 물음과 일맥상통한다. 그러기에 루터나 루터주의를 넘어선 종교개혁을 말할 때, 우리는 항상 칼빈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혹자는 칼빈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불편한 심기를 노출한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칼빈을 우상시하고 칼빈의 말을 성경이상으로 믿으려한다고 핀잔을 준다. 만약 어느 누구가 칼빈의 말과 저술자체를 성경이상으로 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심각한 이단이라 아니할수 없다.
그럼 왜 우리가 종교개혁의 역사를 말할때마다 칼빈을 언급하는가? 왜 칼빈이 말한 내용을 개혁주의와 동일시하는가? 일단 본 논고에서는 칼빈이 루터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소상하게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칼빈에 대한 억측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칼빈의 신학적 진술 방식을 살펴보자. 루터의 개혁이 당시의 역사적 정황아래 이루어졌다고 한다면-곧 그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한계이기도 하다- 칼빈의 개혁은 시대에 대한 불만이나 종교적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칼빈의 신학적 관심사는 중세의 시대에 머물지 않고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존속하였던 역사속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즉 교회 개혁의 목표를 현실을 개탄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역사속에서 가장 적확하게 표현된 개혁 신학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시도해 나갔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성경에서 말씀하시려는 그 내용에 관한 영적 추구와 바른 성경 해석이었다. 이러한 신학적 방법론은 그로 하여금 사도 시대이후 계승된 교부들의 신학적 전승과 어거스틴의 풍요롭고 개혁된 신학적 내용을 대변하게 하였고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시도되었던 여러 개혁자들의 사상을 주시하게 하였다. 이뿐 아니라 칼빈은 동시대의 가장 개혁된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해 역사상 가장 바른 신학을 세워나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칼빈의 사상은 초대교부 신학이며, 어거스틴의 신학이며, 사도적 전승에 따라 개혁자들의 신학을 정리한 총제적 신학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개혁신학을 칼빈 자신만의 단독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칼빈주의를 편협한 신학으로 취급하는 것은 엄청난 역사적 몰이해이다. 우리가 칼빈과 그의 신학을 주목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사고와 방법론에서 가장 개혁된 역사를 볼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초대교회의 신앙적 순수성과 정통 신학의 맥과 내용 그리고 루터와 루터주의를 넘어선 개혁된 신학과 신앙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베푸신 은혜가 아니라 전 인류을 위해 예배하신 계명성과 같은 성격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개혁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는 칼빈의 인격이나 칼빈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부들과 어거스틴, 여타의 개혁자들의 내용이 함의된 내용 즉 칼빈을 통해 드러난 엄밀하고 분명한 신학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칼빈을 말하면서도 칼빈의 내용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는 여러 가지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먼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체계자체가 칼빈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것일뿐 아니라 그가 말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할만한 언어적 능력이 부족하고 개혁주의 역사가 한국교회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이유등으로 칼빈과 개혁주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역사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순수한 의미에서의 종교개혁 역사를 주의깊게 바라보는 일은 실로 중요하다. 이 역사적 흐름속에서 칼빈을 통해 해석된 개혁된 신학의 내용이 가진 풍성함과 그 열매가 어떠한 모습으로 맺혀지는가를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개혁주의의 역사적 흐름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개혁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개혁된 것을 전달하는 성격이 강하다. 즉 칼빈이 말한 내용이외의 다른 내용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혁된 내용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하고 드러내는 방향으로 종교개혁이 진행되어 갔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저술할때만해도 유럽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은 아니라도 이미 유럽 사회에서는 반카톨릭적 종교 운동이 역사 전면에 꿈틀대고 있었다. 종교 개혁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증폭되어 감에 따라 카톨릭측과 제휴한 정부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많은 개신교들은 대륙으로 피난의 행렬에 동참하였는데 당시 칼빈은 스위스 연방 도시중 하나였던 제네바라는 도시에서 역사상 가장 성경적인 개혁운동을 실현시켜 가고 있었다. 칼빈에 의해 주도된 개혁작업은 그의 저술들과 더불어 유럽 전역에 흩어있던 개신교도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여러 경로를 거쳐 칼빈의 개혁사상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하게 됨으로써 칼빈의 개혁된 신학에 영향을 받게 된 개혁자들은 칼빈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국의 개혁을 시도해 나갔다.
보편적으로 칼빈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회를 가리켜 유럽 대륙에서는 개혁교회라고 부르는가 하면 영어권에 속한 지역에서는 장로교회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실제로 개혁교회나 장로교회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라고 할 때, 광의적 의미에서는 카톨릭으로부터 저항해서 나온 모든 개신교를 가리키지만 협의적 의미에서 보는 개혁주의란 개신교안에서 루터주의(또는 복음주의)와 구별되는 신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본논고는 협의적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엄밀한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과 내용위에 서 있는 개혁주의적 종교개혁 사상이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는 몇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먼저 종교개혁의 확산 배경가운데는 개혁된 인물들이 있었다. 당시 칼빈신학의 보급처라고 할수 있는 제네바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개혁자들이 모여들었다. 실질적인 종교개혁은 이곳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수많은 개혁자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확산되어 가는 경로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도 카톨릭과 세속 정부의 압박과 도전과 연관이 있었다. 즉 개혁주의적 종교개혁은 국가적인 계몽적 차원이나 종교운동(Movement) 형식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이 카톨릭이나 정부의 핍박을 피해 어느 곳에 머무는가에 따라 그 장소가 종교개혁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래서 17세기 당시 종교개혁은 개혁자들이 옮겨 다니는 도시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제네바에서 하이델베르그(독일), 하이델베르그에서 노이스타느로, 노이스타트에서 헤르본(화란)과 말브르크등지로 개혁운동의 불씨가 확산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운동과 관련하여 개혁정신을 계승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종교개혁은 운동이나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혁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지역에 머무르고 있느냐에 따라 흥왕하기도 하고 급격하게 쇠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역사는 수백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서 신앙적 영향과 감화를 받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약 내곁에 개혁된 신학과 그 내용을 가진 자가 있어서 그로 인해 신앙적 영향을 받게 된다면 바로 그와 함께 머무르는 곳이 종교개혁의 장소이며 환경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신앙적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전혀 개혁된 사고와 상관없는 신학적 전통과 신앙적 내용을 소유하고 있는 자라면 그와 함께 하는 곳에서 종교개혁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개혁주의적 종교개혁은 신앙고백서 작성과 맥을 같이 한다. 개혁자들은 어느 곳에 처해있든지 먼저 신앙고백서를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이 교리중심의 사변주의자나 논쟁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이것은 신앙고백의 역사성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해묵은 편견에 불과하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내용을 이단이나 사이비 신앙으로부터 보호할뿐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지침서 역할을 한다. 역사속에서 이런 신앙고백서의 가치를 무시하고 ‘성경으로 곧장 들어갈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대개 신비주의나 초월주의나 역사적 상대주의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로는 칼빈이 만든 제네바 교리문답과 프랑스 신앙고백을 비롯하여 열가지 가량이 있다. 독일의 경우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에 의해 작성된 「하이데베르그 교리문답」이 있고 네델란드는 기도 드 브레에 의해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와 「도르트 회의 교칙」이 있는가 하면 영국에서는 120여명의 개혁자들에 의해 3년에 걸쳐「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이 만들어 졌다.특히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7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내용을 가장 선명하고 원숙하게 보여주는 결정문서로서 이후 모든 세계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준거적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이 같은 신앙고백서들은 지적, 영적으로 상당한 통찰력을 가진 개혁자들에 의해서 지금의 개념으로는 상상할수조차 없는 심도깊은 논의와 숙고가운데 만들어 졌고 이 내용을 개혁교회에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하여 개혁된 신앙고백서를 한국 장로 교회가 받고 있다는 것은 은혜가 아닐수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초기에는 당시 영국이 인도에 전해주었던 12신조를 받게 되었으나 1950년 초반에 가서야 박윤선 박사를 통해 완전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소개받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사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의 영향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한국 장로교회의 표준문서로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또한 한국교회 초기부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구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이어지는 영, 미국의 장로교회 전통을 바르게 평가할수 있도록 네델란드 개혁교회로 이어지는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 전통을 한국 교회에 소개한 것은 16, 17세기 종교개혁 전통이 한국에까지 이어질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종교개혁의 역사와 흐름을 통해 알 수 있는 세 번째 특징은 개혁주의가 장로교회라는 교회 정치제도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장로교회라는 말은 17세기 영국과 스코틀랜드 개혁자들을 중심으로 사용된 용어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장로교회 정치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장로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모든 신학적 작업의 결과물로서 얻어진 정치체제가 바로 장로교회 정치체제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칼빈은 신구약 성경해석을 통해 당시의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감독주의를 거부하고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장로정치제도를 가장 성경적인 교회정치 제도로 확신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인물들과 당시 17세기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한 개혁자들 대부분이 장로교회적 전통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들이 엄숙하고 경건한 장로교도였다는 사실은 장로교회의 역사적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놀라운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의 관점이나 그 나라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종교개혁의 운동의 성격이 다소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칼빈과 관련되어 진행된 종교개혁의 역사 현장에는 장로교회가 열매로서 남게 되었다. 조지 길레스피의 ‘가장 좋은 개혁주의’라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장로교주의는 역사상 가장 개혁된 신학과 그 내용을 담고있는 교파임에 분명하다. 다만 문제는 오늘날 장로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장로교회의 성경적 기원과 역사적 가치와 장로교회 정치제도를 통해 드러난 종교개혁의 정신을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내용 가운데 머무르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권과 정치에 사로잡혀 사분오열되었고 무분별한 연합운동으로 진리를 지킬만한 대의명분을 잃어버렸으며 한국 교회의 장자적 기득권적 전통만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장로교라는 교패를 달고 있으면서도 전혀 장로교적인 전통과 역사의식을 발견할수 없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우후죽순 늘어만가고 그로 인해 정통적 장로교안에 담겨져있는 풍요롭고 부요한 신학과 신앙의 역사를 상대화한 나머지 명목만 있을뿐 속빈 장로교회를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장로교회와 장로교 목회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길레스피의 말처럼 가장 좋은 개혁주의로서의 장로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가장 좋은 개혁주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개혁된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개인이 그 길을 걷기에는 우리 자신이 순수하지 못할뿐더러 지금의 기준으로는 개혁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기 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된 정신을 이어가는 인물들-개혁주의자들의 저술들을 통해-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장로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와 성도라면 이 부분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종교개혁의 현대적 의미
종교개혁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다. 어느 시대에 일어났던지 종교개혁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었으며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역사였다. 그러나 사람편에서 보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개혁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식을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식상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종교개혁을 염원하는 구호들이 남발하고 있다. ‘이 시대에 16, 17세의 종교개혁을’ 혹은 ‘종교개혁의 부흥의 불길을 이 곳에 내리소서’, ‘주여, 개혁이 아니면 죽음을 주소서’ 이런 주장들은 너무 세속적인 사회속에 묻혀 살아감을 못내 갈등하는 많은 신앙인들의 종교적 공감대를 끌어내는데는 적지않은 수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종교개혁이 인간적 열심을 동반한 복음주의적 운동같은 형식으로 재현될수 있다는 낙관론적인 사고에 기초해 있음을 살펴볼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개혁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운동과 구호는 종교개혁을 너무나 현상적인 인식수준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종교개혁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형태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20세 마지막 종교개혁 주일을 보내는 상황에서 진정한 종교개혁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대에 종교개혁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것인가?
첫째, 좀더 철저하게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딜레마는 세상의 거침없는 변화속도에 어떻게 적응하는가에 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교회는 도태될것이라는 논리가 더욱 팽배해져 가는 가운데 교회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미래 학자들은 21세기에 살아남을 만한 교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탈성직주의적 교회, 세상에 대해 열린 교회, 초교파적 일치를 도모하는 교회, 아래로부터의 교회. 보다 민주화된 교회, 사회비판적 기능을 강화하는 교회, 사회에 지성적 대안을 제시하는 교회, 영성과 음악을 강조하는 교회만이 21세기 교회의 경쟁적 구도속에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맞을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세상적 관심의 추이에 교회의 운명을 내맡기는 우를 범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개혁된 신학위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혁된 신학이 없는 곳에는 개혁된 교회가 있을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 교회는 신학과 교리가 없는 것을 포용성과 다양성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신학과 교리없이도 교회가 존재할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 없이도 신앙이 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교회는 세상가운데 생존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편에 있어야 한다.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이 변할지라도 개혁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해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확신컨데, 21세기에 살아남을 교회는 시대를 좇아가거나 세상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교회가 아니다. 개혁된 말씀과 그 해석아래 굳건히 서있는 교회만이 하나님앞에서 살아남을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가 변할수록 변하지 않는 말씀을 부여잡은 개혁된 교회는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등대불처럼 더욱 확연히 빛날 것이다.
둘째, 개혁신앙의 지표인 신앙고백서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증가되어야 한다.
셋째, 개혁신앙이 지닌 삶의 적극적 가능성을 발현해 가야 한다.
맺음말
종교개혁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어느 한 시대의 국한하여 사용될 용어가 아니다. 지금도 종교개혁는 지속되고 있다. 다만 종교개혁이 누구에 의해서 진행되는가와 보다 엄밀한 종교개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된 신학과 그 역사적 전통아래 머무는 자는 이미 종교개혁의 역사적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개혁된 진리로서 살아가고 그것을 고백하는 삶에는 언제나 종교개혁의 역사가 동반되어 진다. 시대가 변할수록 무엇을 개혁할것인가를 살펴보기 전에 개혁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지혜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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