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부흥운동 - 영국의 새롭게!
새계를 새롭게! 18세기 웨슬리 부흥운동
1739-1791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운동은 종종 “웨슬리 부흥운동”이라 부른다. 존 웨슬리 부흥운동은 패망해 가는 영국을 소생시키고 전세계에 성령의 불을 퍼지게 했던 운동이었다.
1. 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
18세기의 영국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암흑기였다. 아울러 사상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불신하는 자연신론(Deism)이 성행하여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합리주의가 당시의 신학계에 침투하여 교회는 믿음의 가치를 도덕 생활이나 윤리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교회의 예배는 점점 줄어들고 건물은 황폐해져 갔다. 성직자들 또한 영혼 구령에는 관심도 없이, 성직을 뇌물로 거래하는 부패가 교회 안에 가득하였다.
이렇게 영적으로 교회가 타락하자 사회의 도덕적인 상태도 악화되었다. 곳곳에 폭도들이 횡행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며, 날이 어두워지면 무장하지 않고는 밖에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집들 중 세 집 건너 한 집은 술집일 정도였고, 거리에는 창녀가 들끓었다. 감옥은 죄수들로 가득 찼고 범죄자들의 사형집행이 잦았는데 심지어 적은 액수의 물건을 훔친 사람조차 교수형에 처해졌다. 무신론자 볼테르가 피의 혁명으로 프랑스를 거의 파멸시킨 것처럼,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성령의 불이 임하지 않았다면, 영국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절대절망의 위기에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악의 물결이 교회를 이길 만큼 승하게 되면 여호와의 신이 원수를 대항하여 기(旗)를 세우시겠다(사59:19, KJV)는 말씀처럼, 그 뒤를 이어 영적 회복과 부흥을 이 땅에 보내신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세 사람 ─ 찰스 웨슬리, 조지 휫필드 특히 존 웨슬리를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불을 보내 사 타락 일로에 있던 영국을 영적으로 소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2. 성령의 부흥을 위한 준비 및 발단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지만, 하나님 백성들의 기도와 금식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된 사람들을 통하여 부흥을 허락하시며, 웨슬리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존 웨슬리는 1720년 6월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자, 경건주의자들의 책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더 나아가 1729년 11월에 웨슬리 형제는 진심으로 경건한 삶을 갈망하여 옥스포드 대학 내의 여러 학생들과 함께 엄한 규칙을 정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매일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졌고, 매주마다 성찬식을 하였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했다. 그리고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했으며, 주일에는 경건서적과 신앙서적을 읽었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또 정기적으로 죄수들과 환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했고, 해마다 연말이 되면 회원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다. 1735년 10월 14일 존과 찰스 웨슬리 두 형제는 더 많은 헌신을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선교에 몰두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악조건이 겹쳐 결국 3년만에 영국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13년 동안 경건한 삶을 갈망하여 드린 존 웨슬리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1738년 5월 24일 내면의 커다란 고민에 쌓인 웨슬리가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획기적인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영원히 기념할 만한 이 날, 그는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주로 신뢰하는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없이 하시고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을 얻은 웨슬리는 미칠 듯 한 기쁨으로 구원을 간증했다. 그렇지만 그 후 거의 6개월간 마귀와 투쟁하며 불신과 두려움에 싸여 패배와 절망 속에 다시 빠지기 시작했다.
존 웨슬리는 영적으로 갈급함을 충족시키고자 독일에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Moravians)을 찾아갔다. 이 단체는 1727년 8월 12일 독일 헤른훗(Herrnhud)에 있는 비교적 작은 무리의 그리스도인들 위에 강력한 성령의 부흥이 임했을 때 형성되었다. 존 웨슬리는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피부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웨슬리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옥스포드로 가는 도중 우연치 않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노드햄톤 대 부흥운동사』를 읽게 되었는데, 웨슬리는 이 소책자를 통하여 미국 노드헴톤(Northampton)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와 참된 부흥운동의 양상에 대하여 큰 충격을 받고, 자기에게 무엇인가 영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회심못지 않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 이런 모든 준비가 끝나고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1739년 1월 1일 새해 첫날 마침내 성령의 불을 폭포수처럼 영국에 쏟아 부어 주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을 ‘감리교의 오순절’(the Methodist Pentecost)이라 부른다. 존 웨슬리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39년 1월 1일 홀·킨친·임함·휫필드·버친즈 그리고 내동생 찰스 등 여러 사람들이 페터레인(Fetter Lane)에서 약 60명의 형제들과 함께 철야기도회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쯤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하였다(the power of God came mightily upon us). 많은 사람들이 격렬한 기쁨으로 인하여 부르짖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과 놀라움으로부터 겨우 회복되었을 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오!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John Telford, The Life of John Wesley, p.117)
이 경험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날 웨슬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함과 동시에 예수님이 약속한 ‘위로부터 능력의 입히움’(눅24:49 ; 행1:8)을 받은 것이다. 그 후로 그의 설교와 전도에는 큰 능력이 나타나 대 부흥이 일어났으며 인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3.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가는 성령의 부흥
이 날 이후로 웨슬리가 가는 곳곳마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가듯 빛이 강하게 임하여 어두움이 쫓겨가고 사회 전체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가 한 번 지나간 마을이나 도시마다 음란하고 포악한 사람들이 변화되는 기적들이 일어났다. 아울러 이런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방해하는 적대세력도 많이 일어났다. 어떤 때는 적의에 가득찬 군중들이 나타나 큰 소리를 질러 사람들이 설교를 못 듣도록 방해하기도 했으며, 폭도들에 의해 웨슬리가 돌에 맞기도 하고, 주먹으로 입을 맞아 피가 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불길은 불가항력적으로 계속 번져나갔다. 그리고 영국 교회들은 웨슬리와 그의 부흥운동을 시기하고 배척하여 그를 ‘신비주의자’, ‘광신자’, ‘새 이단자’, ‘열광주의자’로 단정하여 교회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였다. 그러자 그는 길거리에서, 산언덕 위에서 혹은 마을 어귀에서 밀려오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때때로 3만 명까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설교할 때면 놀랍게도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 하시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닫고 변화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잘 차려 입은 어른들이 마치 죽기라도 할 것처럼 울부짖었고, 많은 사람들이 몸을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임재에 너무 압도되어 감당하지 못하고 전장터에서 부상당한 병사처럼 들것에 실려 나가기도 했다.
웨슬리는 본래 교회의 권위와 예배의식을 존중하는 고교회(High Church)주의자로서 이런 ‘광신적 흥분’(fanatical excitement)을 원치 않아 언제나 차분한 목소리로 설교를 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면 언제나 ‘극도의 감정적 흥분’(excessive emotional excitement)이 수반되었다. 설교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가 중단할 수 없었던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설교를 중단했어도 곧 다시 설교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전보다 더 큰 능력으로 설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종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는 소리와 죄 용서함을 받고 찬양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설교를 더 계속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Wesley Duewel, Revival Fire, pp. 71-91).
이러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18세기 영국 전체를 변화시켰고, 이 불길은 대서양을 건너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모체요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부흥의 열기 속에 오늘날 미국에 있는 50개 교파가 그들의 근원을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두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전세계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다.
지금 교회와 세상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수준이 위험수위에 도달하여 있다. 부흥이 임하여 역사의 전환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무 늦으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18세기 영국에서처럼 부흥을 허락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겸비하여 하나님께 부흥을 간구한다면….
새계를 새롭게! 18세기 웨슬리 부흥운동
1739-1791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운동은 종종 “웨슬리 부흥운동”이라 부른다. 존 웨슬리 부흥운동은 패망해 가는 영국을 소생시키고 전세계에 성령의 불을 퍼지게 했던 운동이었다.
1. 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
18세기의 영국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암흑기였다. 아울러 사상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불신하는 자연신론(Deism)이 성행하여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합리주의가 당시의 신학계에 침투하여 교회는 믿음의 가치를 도덕 생활이나 윤리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교회의 예배는 점점 줄어들고 건물은 황폐해져 갔다. 성직자들 또한 영혼 구령에는 관심도 없이, 성직을 뇌물로 거래하는 부패가 교회 안에 가득하였다.
이렇게 영적으로 교회가 타락하자 사회의 도덕적인 상태도 악화되었다. 곳곳에 폭도들이 횡행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며, 날이 어두워지면 무장하지 않고는 밖에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집들 중 세 집 건너 한 집은 술집일 정도였고, 거리에는 창녀가 들끓었다. 감옥은 죄수들로 가득 찼고 범죄자들의 사형집행이 잦았는데 심지어 적은 액수의 물건을 훔친 사람조차 교수형에 처해졌다. 무신론자 볼테르가 피의 혁명으로 프랑스를 거의 파멸시킨 것처럼,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성령의 불이 임하지 않았다면, 영국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절대절망의 위기에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악의 물결이 교회를 이길 만큼 승하게 되면 여호와의 신이 원수를 대항하여 기(旗)를 세우시겠다(사59:19, KJV)는 말씀처럼, 그 뒤를 이어 영적 회복과 부흥을 이 땅에 보내신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세 사람 ─ 찰스 웨슬리, 조지 휫필드 특히 존 웨슬리를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불을 보내 사 타락 일로에 있던 영국을 영적으로 소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2. 성령의 부흥을 위한 준비 및 발단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지만, 하나님 백성들의 기도와 금식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된 사람들을 통하여 부흥을 허락하시며, 웨슬리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존 웨슬리는 1720년 6월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자, 경건주의자들의 책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더 나아가 1729년 11월에 웨슬리 형제는 진심으로 경건한 삶을 갈망하여 옥스포드 대학 내의 여러 학생들과 함께 엄한 규칙을 정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매일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졌고, 매주마다 성찬식을 하였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했다. 그리고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했으며, 주일에는 경건서적과 신앙서적을 읽었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또 정기적으로 죄수들과 환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했고, 해마다 연말이 되면 회원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다. 1735년 10월 14일 존과 찰스 웨슬리 두 형제는 더 많은 헌신을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선교에 몰두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악조건이 겹쳐 결국 3년만에 영국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13년 동안 경건한 삶을 갈망하여 드린 존 웨슬리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1738년 5월 24일 내면의 커다란 고민에 쌓인 웨슬리가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획기적인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영원히 기념할 만한 이 날, 그는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주로 신뢰하는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없이 하시고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을 얻은 웨슬리는 미칠 듯 한 기쁨으로 구원을 간증했다. 그렇지만 그 후 거의 6개월간 마귀와 투쟁하며 불신과 두려움에 싸여 패배와 절망 속에 다시 빠지기 시작했다.
존 웨슬리는 영적으로 갈급함을 충족시키고자 독일에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Moravians)을 찾아갔다. 이 단체는 1727년 8월 12일 독일 헤른훗(Herrnhud)에 있는 비교적 작은 무리의 그리스도인들 위에 강력한 성령의 부흥이 임했을 때 형성되었다. 존 웨슬리는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피부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웨슬리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옥스포드로 가는 도중 우연치 않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노드햄톤 대 부흥운동사』를 읽게 되었는데, 웨슬리는 이 소책자를 통하여 미국 노드헴톤(Northampton)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와 참된 부흥운동의 양상에 대하여 큰 충격을 받고, 자기에게 무엇인가 영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회심못지 않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웨슬리에게 있어 이런 모든 준비가 끝나고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1739년 1월 1일 새해 첫날 마침내 성령의 불을 폭포수처럼 영국에 쏟아 부어 주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을 ‘감리교의 오순절’(the Methodist Pentecost)이라 부른다. 존 웨슬리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39년 1월 1일 홀·킨친·임함·휫필드·버친즈 그리고 내동생 찰스 등 여러 사람들이 페터레인(Fetter Lane)에서 약 60명의 형제들과 함께 철야기도회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쯤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하였다(the power of God came mightily upon us). 많은 사람들이 격렬한 기쁨으로 인하여 부르짖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과 놀라움으로부터 겨우 회복되었을 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오!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John Telford, The Life of John Wesley, p.117)
이 경험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날 웨슬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함과 동시에 예수님이 약속한 ‘위로부터 능력의 입히움’(눅24:49 ; 행1:8)을 받은 것이다. 그 후로 그의 설교와 전도에는 큰 능력이 나타나 대 부흥이 일어났으며 인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3.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가는 성령의 부흥
이 날 이후로 웨슬리가 가는 곳곳마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가듯 빛이 강하게 임하여 어두움이 쫓겨가고 사회 전체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가 한 번 지나간 마을이나 도시마다 음란하고 포악한 사람들이 변화되는 기적들이 일어났다. 아울러 이런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방해하는 적대세력도 많이 일어났다. 어떤 때는 적의에 가득찬 군중들이 나타나 큰 소리를 질러 사람들이 설교를 못 듣도록 방해하기도 했으며, 폭도들에 의해 웨슬리가 돌에 맞기도 하고, 주먹으로 입을 맞아 피가 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불길은 불가항력적으로 계속 번져나갔다. 그리고 영국 교회들은 웨슬리와 그의 부흥운동을 시기하고 배척하여 그를 ‘신비주의자’, ‘광신자’, ‘새 이단자’, ‘열광주의자’로 단정하여 교회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였다. 그러자 그는 길거리에서, 산언덕 위에서 혹은 마을 어귀에서 밀려오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때때로 3만 명까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설교할 때면 놀랍게도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 하시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닫고 변화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잘 차려 입은 어른들이 마치 죽기라도 할 것처럼 울부짖었고, 많은 사람들이 몸을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임재에 너무 압도되어 감당하지 못하고 전장터에서 부상당한 병사처럼 들것에 실려 나가기도 했다.
웨슬리는 본래 교회의 권위와 예배의식을 존중하는 고교회(High Church)주의자로서 이런 ‘광신적 흥분’(fanatical excitement)을 원치 않아 언제나 차분한 목소리로 설교를 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면 언제나 ‘극도의 감정적 흥분’(excessive emotional excitement)이 수반되었다. 설교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가 중단할 수 없었던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설교를 중단했어도 곧 다시 설교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전보다 더 큰 능력으로 설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종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는 소리와 죄 용서함을 받고 찬양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설교를 더 계속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Wesley Duewel, Revival Fire, pp. 71-91).
이러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18세기 영국 전체를 변화시켰고, 이 불길은 대서양을 건너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모체요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부흥의 열기 속에 오늘날 미국에 있는 50개 교파가 그들의 근원을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두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전세계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다.
지금 교회와 세상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수준이 위험수위에 도달하여 있다. 부흥이 임하여 역사의 전환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무 늦으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18세기 영국에서처럼 부흥을 허락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겸비하여 하나님께 부흥을 간구한다면….
출처 : 등나무 아래의 평화
글쓴이 : 등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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