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종교개혁 (John Calvin, 1509 - 64)
1. 생애
․ 1509. 7. 10. 프랑스 북부의 노용에서 법률가 존 제라드와 경건한 어머니 쟌느 프랑스의 5째 가운데 4째로 태어남 ․ 1523년 파리대학, 마르슈, 몬테규 대학에서 논리학, 철학, 인문 과학 등을 배움 ․ 1529년 오르레앙 대학에서 법학 공부 ․ 1530년까지 루터와 멜랑히톤의 저서 탐독, 로마 카톨릭 교회에 충실하려고 노력 ․ 1531년 아버지가 죽자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왕립 학교에 들어가 고전어를 배움 ․ 이듬해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를 출판함 1) ․ 1533년 친구 니콜라스 콥의 대학 학장 취임 연설문을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관점에서 초안함 2) ․ 1534년 콥은 바젤로 피신하고 칼빈은 성직록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감 ․ 1534년 10월, 과격한 개혁파들의 난동으로 峙勇資?개혁자들이 투옥되고, 순교 당함(칼빈의 동생 포함) ․ 1535년 당국의 핍박을 피해 바젤로 망명, 「기독교 강요」집필 3) ․ 1536년 이듬해 5월,「기독교 강요 1판」출판 ․ 1536. 7. 종교관용 조치 후, 잠지 파리에 들렀다가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도중에 제네바에 체류하던 중, 개혁자 파렐(W. Farrel)을 만남 4) ․ 1538년 제네바 개혁에 조직적인 반대를 하는 자들이 선거에 승리하자, 칼빈과 파렐은 설교권 박탈당하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함 ․ 1539-1541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의 목회를 하면서 집필에 전념, 마틴 부처(Martin Buccer, 1491-1551)와의 만남 ․ 1540년 재세례파 미망인 이델레트 드 부어(Idellette de Bure)와 결혼 5) ․ 1541년 9월, 파렐과 제네바시의 요청으로 환대를 받으며 제네바로 돌아옴. 본격적인 제네바시의 개혁 운동 을 전개함. ․ 이후 제네바는 성경적 개혁 도시의 모델이 됨 6) ․ 1564년 2월, 온갖 질고가운데 마지막 설교를 한 후 병석에 누움, 여호수아 주석을 마직으로 성경 주석 완필 7) ․ 1564. 5월 27일. 55세의 일기로 동료 베자의 품에 안겨 운명함 8)
2. 칼빈과 기독교강요(The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그림 1) 서재에서 성경 연구에 몰두하는 칼빈의 모습
(1) 저술 동기 1) 실제적 목적 : 기독교의 교리를 단순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성도들이 성경에 쉽게,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짐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 그것에 의해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우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이 일을 착수하였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약간의 지식이라고 가지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책 자체가 그것이 의도하였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가르침의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강요」의 서문-프랑스의 프랑수아 왕에게 보내는 헌사- 중에서)
2) 변호적 목적 : 핍박자(카톨릭과 재세례파)의 비난을 성경적으로 변증하기 위해서
(2) 출판 역사(*표 2)
(3) 1559년 최종판 내용 1) 제 1 권 : 창조주 하나님(신론, 인간론) 2) 제 2 권 : 구속주 하나님(원죄론, 기독론, 십계명 해설) 3) 제 3 권 : 성령 하나님(성령론, 종말론) 4) 제 4 권 : 교회론, 국가론
(4) 특징 및 평가 1) 초판부터 5판(최종판, 1560)에 이르기까지 무려 24년동안 거의 변함없는 일관적이고 체계적인 논조로 거듭될수록 증보됨 2) 바울과 초대교회 교부와 어거스틴의 정통 신학을 대변함 3) 종교개혁 후 종교개혁의 원리를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명저
3. 칼빈의 사상 9)
(1) 성경관 1) 성경의 완전 영감, 절대 계시로서의 성경 2) 성령의 내적 조명과 성경의 통일성 3) 역사적 문법적 성경해석 4) 66권 이외의 다른 계시를 인정하지 않음
(2) 신론 1) 계시된 말씀을 통한 창조주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사고 2) 신론적 신관 10) 3) 섭리와 하나님 영광 사상 강조
(3) 예정론 1) 루터의 예정론을 발전시킴 2)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한 이중 예정 사상 3) 칼빈주의 신학의 핵심 교리 4) 예정론은 칼빈주의와 비칼빈주의(ex, 아르미니안주의)를 구분하는 준거점이 됨
(4) 구원론 11)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은혜(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5) 성령론 1) 은혜의 방도로서의 성령 2) 믿음의 효과와 적용의 사역 3) 칭의와 성화의 균형 12)
(6) 교회론 1)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구원의 언약에 기초한 택자(언약 백성)들의 모임 13) 2) 비가시적 교회와 더불어 가시적 교회의 중요성 강조 3)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의 표지(말씀 선포, 성례 집행, 권징 시행) 14) 4) 교회 권세와 직분 강조
(7) 성찬론 1) 영적 임재설 주장(천주교의 화체설, 루터의 공재설, 쯔빙글리의 상징설 반박) 2) 성찬 시행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이 이루어짐 3) 유아 성찬 반대 4) 성찬을 교회 연합과 권징의 수단으로 활용 5) 1년에 4차례 시행
(8) 교회 정치 1) 직분자를 통한 교회 설립과 유지 2) 네 직분론(목사, 장로, 교사, 집사) 3) 장로주의 교회 정치
(9) 세속 정치 1) 집권자(권세자)에 의한 통치 인정 2) 귀족정치와 민주정치 혼합 정치체제 이상적 3) 공정한 재판과 정당한 저항권 강조
4. 제네바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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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제네바(Geneva) 시청 근처 벽면에 새겨진 네 명의 종교개혁자(reformers) 입상 왼쪽부터 파렐(William Farel), 칼빈(John Calvin), 베자(Theodore Beza), 그리고 낙스(John Knox)
(1) 1차 개혁운동 1) 파렐의 권유로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에 동참 2) 칼빈은 3인의 목사 중 한사람으로 급속한 개혁을 시도 3) 시민의 반항으로 의회가 파렐과 칼빈을 추방 4) 이때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3년간 성경 주석을 집필
(2) 2차 개혁운동 1) 1541년 신파의 집권으로 다시 초빙 2) 23년간 개혁운동을 진력하였음
(3) 개혁의 내용 1) 교회법 제정 ① 교회정치 : 감독 없이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음 ② 교회의 직원 가. 목사 : 성경해석과 설교담당(예배 인도, 교육, 권징, 성례집행) 나. 장로 : 치리 담당(성도의 생활을 돌보는 일, 권면, 권징) 다. 집사 : 재정 담당(구제, 병자 간호, 사회복지 업무담당) 라. 교사 : 신학교수와 시의 종교교육 담당(바른 신학고수 및 전승, 이단으로부터 교회 보호) ③교인 : 전 시민으로 신앙고백을 하여야 함 2) 평의회 조직 ① 목사 5인,장로 12인으로 조직 ② 주로 풍속개량, 도덕 고취의 목적 ③ 칼빈은 목사회원이었으나 성경해설가로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음 ④ 교회는 추방권을 소유하고 형법상의 처분권은 없었음 3) 사업 ① 교회사업의 부흥을 위하여 견직 산업을 장려함 ② 시민 교육을 위해 대학을 설립 ③ 은행을 장려함 4) 칼빈의 제네바 통치 이념 ① 제네바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고자 함 ② 교회와 국가의 상호 밀접한 관계 협력 촉진, 참 교회를 위한 교회법 조직, 정비 ③ 시민에게 요리문답을 교육, 사회를 위해 도덕 강조, 법질서 회복. ④ 경제적으로 번영을 위해 상공업 장려 ⑤ 종교 교육을 위해 제네바 대학을 설립운영 ⑥ 제네바 종교 개혁자들의 은신처, 종교개혁 운동의 구심점이 됨
5. 칼빈에 대한 평가
(1) 루터의 개혁사상은 복음주의 신학에 기초를 마련해 준 반면, 칼빈의 개혁사상은 좀 더 엄밀한 개혁주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줌 (2)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원리와 근거를 마련함 (3) 그의 사상은 후대 개혁주의자(일명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도있고 체계적인 내용으로 완성되어 감
<각 주>
1) 칼빈의 회심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만, 언제 회심을 했는지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1557년에 쓴 시편 주석 서문에는 자신의 회심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갑자가 나를 개종시키시어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시고 교훈하시기에 보다 쉽도록 인도하셨다. 당시 나는 어렸을 때보다 심령이 매우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진정한 신적 경건의 맛과 지식을 약간 음미하게 되자, 나는 즉시 이 방면에 보다 큰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불타게 되었다. 내가 이전에 하는 공부를 아주 저버린 것은 아니지만 열심은 식어가고 있었다”(시편 주석 서문 中) 이처럼 칼빈은 회심의 경험보다 회심으로 인한 신앙의 변화를 더욱 중요하게 취급한다.
2) 칼빈이 작성한 콥의 학장 취임 연설문 초안의 일부 내용이다. "세상과 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는 자들을 이단, 미혹케 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으로 불러왔습니다. … (중략) …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분은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오덕교, 『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 p.150에서 인용)
3) 칼빈은 이 책에서 집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너무나도 값진 내 동생의 죽음의 의미를 의롭지 못한 자들 앞에서 옹호하며 또한 똑같은 위협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 놓여 있으므로 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썼다” 또한 칼빈은 이 책의 부제로서,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제반 사항과 경건의 내용을 망라하였고, 경건에 열심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독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저서”라고 부연하였다. 이 책이 처음 발행될 당시에는 신변보호 차원에서 칼빈이라는 이름대신에 마르티누스 루카니우스(Martinus Lucanius)라는 가명이 사용되었다.
4) 칼빈은 제네바에 잠시 머무는 동안 만나게 된 제네바의 개혁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강권에 못이겨 제네바 시의 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칼빈은 훗날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파렐은 나를 제네바에 머물도록 강권하였는데, 그가 사용한 수단은 상담이나 권면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나는 이러한 폭언이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드시는 것과 같이 느꼈다. … (중략) … 내 마음은 개인 연구에 전력해야 한다고 결심한 뒤여서 다른 일에는 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파렐)는 간청 정도로 아무 소득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추구하는 은둔과 평온한 학문 생활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나는 그의 이 저주로 말미암아 큰 충격을 받아 여정을 단념하고 말았다”
5) 부처의 권유로 칼빈은 옛날 자신을 반대하던 재세례파 사람의 미망인과 결혼을 하였지만, 다른 개혁 선배들과는 달리 결혼 생활이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1542년 영아인 아들을 잃었으며, 1549년에 아내를 여의었다. 칼빈은 아내가 죽기 전에그녀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자녀를 자신의 친자녀처럼 돌보겠다고는 약속을 하며 괴로워하는 아내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칼빈에게 남겨진 두 이복 자녀는 불행한 삶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과 근심이 되었다. 그러한 이유때문인지 칼빈은 다시 재혼하지 않고, 남은 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6) 칼빈이 종교개혁을 주도한 제네바 시에 대한 개혁자들의 평(評). 존 낙스(John Knox, 1505-72):"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였다. 다른 곳에서 나는 그러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존 베일(John Bale): "제네바는 sop 모든 세게의 놀라운 비밀로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고, 그곳은 가난 가운데서도 살 수 있는 성소와 같았다”
7) 제네바에서의 과중한 업무와 사역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성경 주석을 완료하는 일에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일에 온 힘을 쏟은 나머지 사역 말미에는 신장결석, 위궤양, 혈루증, 근육경화증 등등의 합병증에 시달렸다. 때로는 강단에 오를 힘이 없어서, 침대 채로 옮겨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종종 ‘걸어가는 종합병원’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8) 칼빈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묘비를 만들지 말 것과 장례식 없이 매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죽음마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드리려 했던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 그의 묘지는 남아있지 않으나, 그가 추구했던 종교개혁의 정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진리의 등불이 되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다.
9) 다음의 내용은 칼빈의 책「기독교 강요」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칼빈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록중 하나로 개혁교회 속한 성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10) 칼빈의 신관은 루터주의의 신관과 비교된다. 후자의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은 인간의 죄와 구원과 구속에 대한 고백과 문답에서 시작하는 반면, 칼빈을 따르는 개혁주의의 것은 성경과 하나님, 하나님의 작정,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고백과 문답으로 시작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 칼빈주의와 루터주의의 신학적 접근 방식의 차이는 후대에 이르러 서로간의 구별과 차이를 더 심화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11) 일명 ‘칼빈주의 5대 교리’ 혹은 ‘개혁교회 튤립 교리’로 불리우는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 사상은 도르트 회의(1618-19)를 통해 알미니안주의의 불건전한 신학에 대한 성경적 변증과 정죄의 결과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12) 칼빈은 루터주의의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라는 칭의적 관심에만 머물지 않고, 성도의 구원이후에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은혜로의 성화의 효과와 책임에 대해 강조하였다. 이로써 칼빈주의는 루터주의보다 구체적이고 확장된 개념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3) 루터는 교회를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라고 하는 반면에, 칼빈은 성도들의 교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구(institution)이라고 함으로써, 교회의 비가시적, 가시적 성격을 성경적으로 규명하였다.
14) 개혁교회에서 처음으로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채택한 사람은 마틴 부처(Martin Bucer)이다. 칼빈은 개인적으로 권징을 교회의 권징으로까지 언급하지 않았으나, 칼빈 이후 칼빈주의 개혁자들에 의해 3대 교회 표지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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