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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1)루터의 생애
마틴 루터는 1483년 동부 독일의 작센주의 아이스레벤에서 하층민인 가난한 鑛夫의 아들로 태어 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강건함을 지닌 광부였고 어머니는 신앙이 절실한 분이였다.고 전하고 있다. 루터의 고향 아이스레벤은 남부 독일과 라인강 연안 지역에 인접해 있던 관계로 당시의 거대한 흐름인 知的 混亂과 經濟的 混亂에서 약간 비껴날 수 있었다. | ||||
루터는 만스펠드 등지의 市立學校(Stadtschule)를 거쳐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Magister artium까지 수학을 하였으며 그 이후 法學을 공부하려 하였으나 일련의 사건(그의 바로 옆에 떨어진 벼락에서 가까스로 살아나게 된 다음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됐다.)을 겪은 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로서의 자기 행로를 변형하여 그의 나이 22세인 1505년에 수도자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속세를 완전히 떠난 모범적인 수도자로서 수도원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무척 힘겨워하며 성직자의 길을 가게되었고 그 이후 비텐베르크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곳에서 신학부 교수로 재직을 하며 지도자 계급까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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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출교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1517년 10월말에 한 무명의 수도사에 의해 비교적 조용히 시작된 한 사건이 그 3년 후에 걷잡을 수 없는 대 사건으로 진전됨 셈이 되었다. 1525-34년 사이 Warburgfh 도피하여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옮겨 적었다. 한편 이시기의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을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525년 결혼을 금기했던 성직자의 특권을 깬 카타리나 수녀와의 결혼은 성직자로서의 특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자체에도 개혁을 이루었으며 카타리나 수녀와의 사이에 2남 2녀의 자제를 두었다. 루터는 2중 적 성직자의 생활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모순을 극복하며 건강한 기독교적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이에 대한 많은 언급을 하였다. “만인 제사장”을 부르짖어 누구 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즉 누구나 가정을 가지면 가정을 이끄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1532년 “뉘른베르그 평화협정”, 1536년 “비텐베르그 협약”의 성립은 프로테스탄트의 개신교회의 존립을 가능케 하였다. 구교에 의해 신교의 승인을 그의 생전에 보게되었으며 혁명적인 교육의 실천가였으나 개신교의 승인 뒤 그의 보수적인 성향의 성격을 보였다 한다. 당시는 시대사적으로 르네상스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神本主義를 비난하던 인본주의 자들(에라스무스, 토마스아퀴나스)를 비난하며 신중심의 사고에서 인간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이는 신본주의에서 人本主義와 성경중심으로 변하여 르네상스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인본주의는 인간은 누구나가 이성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개발하여야하고인간의“완전성”(Perfektilitt) 에의 도달가능성과 “가소성”(Bildsam-keit)을 인정하고 모든 이는 신 앞에 동등하다는 平等性을 강조하여 동등한 權利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2)루터의 교육사상
루터는 인간이 이해에 있어 救援論的 입장에서 아직까지 기독교적, 중세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하에 결국은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원론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존재이며, 이때 구원은 전위적인 역사로서의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으며 인간은 구원을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 인간은 “영의 나라”와 “세상나라”에 동시에 속하면서 그 곳에서 신의 질서가 지배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신에게 봉사해야 하는 존재(하나님께 봉사 Gottes Dienst)라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교육이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선한행위”(Gutes Werk)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율법(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하는일)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하나 복음(인간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일-구원)에 있어 구원을 받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다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보이고 있다. 루터는 그의 교육사상에서 “두 왕국 설”(Zwei-Regimenten-Lehre)- “영혼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모두 신의 질서에 의해지배되어야 하며, 바로 이 두 나라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는“세상의 나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깨끗한 직업을 위한 직업교육을 통해 깨끗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내세를 강조로 현세를 중시하지 않았으나 루터에 의해 현실적 세계 또한 강조 되었다. “영혼의 나라”를 위한 교육이란- 목사와 평신도 모두에게 복음선포를 위한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복음”,즉 성서 원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古典語 敎育(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을 해야한다. “세상의 나라”를 위한 교육이란- 세상 안에서의 질서를“지혜(Weisheit)”,“이성(Vernunft)”을 통해 유지하기 위한 능력의 배양을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예술”과 “언어”- 7自由敎科(septem artes liberales)와 모국어 교육을 통하여 완성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왕국 설” 은 모두 교육에 있어 언어의 중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Maxweber는 기독교 숭배의 나라들이 자본주의가 발달하였으며 개신교의 영향은 서구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훨씬 더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다 라 하였다.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은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니다라는“ 만인 제사장설”(Des allgemeine Priestertum)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문맹퇴치와 연결이 된다. 교육은 성서에 제시된바 “신의 명령”(Gottes Gebot), 그것도 최고의 명령(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라는...) 이라 하였고, 교육은 자연의 법칙이 제시한 바 “인간의 책임”(인간은 先天的으로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고 양육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라 하였다.
2.루터 신학의 특징
1) 호두의 핵을 탐구하는 신학
루터는 신학의 과제에 대하여 초기에 이미 1500년대에 대표적이었던 생각과는 다른 독자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스콜라적 경향이나 또는 인문주의적인 경향과는 대립되는 것이라 할 수 는 없다. 루터는 가브리엘 빌(G. Biel)의 저서와 같은 많은 많은 스콜라 문헌들을 감명깊게 읽었으며, 수도원적이고 스콜라적인 신학의 새로운 경향들이 지닌 차이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신학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이해가 곧 전통과의 완전한 결렬의 의미는 아니며 루터의 신학적 주제들이 전통이 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겠다. 루터의 신학적 문제의 모든면은 인간의 구원 문제였다. 구원(Heil)의 문제와 그 확신을 주는 진리(Wahrheit)의 문제는 정말로 신학의 중심이어야만 한다라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신학연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친밀한 관계였던 아이제나흐 사제인 요한네스 브라운(Johannes Braun)에게 보내었던 1509년 3월 17일자 편지에는 “나는 처음으로 철학을 신학으로, 즉 호두의 핵을, 밀의 내부를, 그리고 골수를 연구하는 신학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항상 자기 판단 속에서 스스로 속는다. 우리는 언제나 자상하게 인도하시는 그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이렇게 쓰여있다. 루터는 1509년 3월 9일에 성서학사 학위(Baccalaureus bibicus)를 취득하였다. 그는 성서를 면밀히 주석 했으며 이때부터 철학과 신학에 눈이 떴을 거라는 걸 앞에 인용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2)십자가 신학
종교개혁에 있어 루터가 사용한 가장 유명한 용어는‘십자가 신학’이라는 개념으로 이 용어는 1518년에 창안하여 여러 군데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십자가 신학’이라는 용어는 스콜라철학과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어거스틴을 추구하는 새로운 신학적 노력과 스콜라신학에 대한 반대 및 성서 연구를 장려했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517년 9월 4일자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논제’와 관련해 1517년 11월 3일 루터에게 쓴 편지에서 셰울은 루터가 옳은 교리를 수호하고 있다 하여 그를 칭송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의 중요 내용은 反 스콜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창조된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비 가시적인 존재를 이해하고 아는 자가 신학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세상을 향하신 그의 뜻이 고난과 십자가에 표현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자가 참된 신학자이다.” 영광의 신학자(Der Theologe der Herrlichkeit)는 惡을 善하다고 칭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칭한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자는 사안을 바로 직시한다. 하나님의 비가시적 존재를 행위에서 인지하고 보는 그러한 지혜는 부풀려진 것이며, 완전히 눈멀게 하는 것이고 완고한 것이다. | ||||
루터파의 예배장면 | ||||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의 날카로운 대립은 모든 스콜라 신학과 루터가 에어푸르트에서 알게된 스콜라적인 경향과는 다른 것이며, 오히려 당시 이미 시작된 로마와의 싸움에서 신 인식에 대한 많은 견해들을 罪論과 恩寵論에서 처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하나의 論爭 形式(Kampfformel)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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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로마교회의 개선점에 대한 논제
루터는 로마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의 개선점을 제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나는 이와 같이 무서운 정황 가운데 어떤 개선을 가져올 만한 제안을 하기에는 너무나 변변찮은 존재이나 여전히 바보스런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으며 또한 할 수 있는 한 세속적인 당국자나 일반 공의회를 통하여 무엇을 할 수 잇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개선점-루터는 모든 제후와 귀족과 도시는 그들의 예하 사람들이 로마에 첫 수입세를 지불하는 것을 담대하게 금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교황은 계약을 어기고 첫 수입세를 강탈하여 전 독일 국민에게 손상과 모욕을 끼쳤다 하여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두넙째 개선점- 로마의 임명권 금지로 교황은 로마의 책략 곧 위탁제도, 보좌제도, 보류, 양도예약, 교황의 달, 통합, 연합, 팔리아, 상서원의 규칙 및, 악행 등으로 아무 권리와 권리도 없이 독일의 모든 재단들을 강탈하고, 또 재단들을 독일을 위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로마의 외국인들에게 주고 매각한다. 하여 교황은 개교회 당국자에게서 그들의 권한을 빼앗고 주교들을 바보와 명목상의 지도자에 지나지 않게 하며, 그 자신의 교회 법규와 본성과 이성에 거슬러 행동한다. 세 번째 개선점-사도들의 통치와 교황의 통치를 벗어난 개교회의 權利回復으로 고위성직자의 권한 박탈과 그 예하 인들의 권위회복을 통한 자유보장을 찾자는 취지가 강하게 베어 있다. 네 번째 개선점-주교의 법정에서 세속적인 문제의 배제하자 라 하여 주교 법정의 재판관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난폭한 착취의 금지를 말하며, 그들은 신앙과 도덕 문제에만 관여하며 돈, 재산, 생명, 명예 등에 관한 문제들은 세속적인 재판관들에게 맡겨야 한다. 영적인 재물은 돈이나 육신에 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신앙과 선행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개선점-독일 교회의 조직으로 로마 교황청의 관장 하에서가 아니라 독일 교회가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의 최종적인 공소원이 되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독일 교회의 조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개선점-보류제도의 폐지 일곱 번째 개선점- 보류사항의 폐기 여덟 번째 개선점-교황 가족의 축소, 즉 교황의 가족들은 교황 자신의 재정으로 먹여 살려야 하며 교황 궁정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에 있어 모든 제왕의 궁정보다 사치스러워서는 안된다. 이는 로마교도들의 가지고 있는 재물과 허영이 적다면 더 잘 기도하고 연구할 수 있을 것이며 저 옛날처럼 신앙문제를 다룰 자격과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홉 번째 개선점- 주교의 서약에 있어 엄격하고 두려운 서약은 폐지되어야 한다. 열 번째 개선점-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있어 교황을 황제의 즉위 시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우는 일 외에는 어떠한 간섭도 황제에게 할 수 없다. 열 한 번째 개선점- 솟권과 나폴리 왕국, 교황은 스스로를 억제하여 손을 떼고 또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하여 아무 칭호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열 두 번째 개선점- 교회 국가들, 볼로그나, 이몰라, 비쎈짜, 라베나., 그리고 안코나 국경과 로마그나 및 다른 이태리 지방에 있는 모든 영토들에 대하여 동일한 생각을 가져야 하며 아무러 소유권도 가져서는 안 된다. 열 세 번째 개선점- 교회에 대한 경의로 교황의 발에 입을 맟추는 행위는 비 그리스도적 이라 하여 이를 금지 할 것을 요구하며 그이상의 행위들에 대하여도 강력히 반대의 요구를 하였다. 열 네 번째 개선점- 로마 순례의 폐지, 로 좋은 본을 보지 못하는 무분별한 로마의 순례를 반대하였다. 열 다섯 번째 개선점- 탁발 수도단의 개혁, 서약은 많이 하나 거의 지키지 않는 무리들에 대한 내용으로 형식위주가 아닌 진실된 행위로의 개선을 말하고 있다. 열 여섯 번째 개선점- 성직자의 결혼, 성직자의 건강한 가정의 이룸으로 건강한 사고의 신앙으로의 유도를 말하고 있다. 수도원 가운데서 보류사항의 폐기, 죽은 자의 미사 폐지, 성사금지의 폐기성자의 날 폐기, 사면권의 확대, 순례의 금지, 특권의 금지, 거지 생활의 금지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 무용한 미사 그지, 성우회와 면죄, 보헤미아 사람들의 문제, 대학교, 교회법, 세속법, 신핫, 신학교재, 학생수의 제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경제개혁과 사회개혁, 의복의 사치, 조미료 거래, 연부금, 거래, 과도한 음식, 사회악, 독신생활과 그 폐혜등을 거론하녀 그의 개선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4. 宗敎改革에 미친 여러 사안
1) 宗敎改革의 原因
신의 섭리에 따른 종교개혁은 19세기 이후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단순히 중세교회의 악습에서 비롯됐다는 전통적인 학설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학설로 대체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요인은 물론 정치, 경제, 인구통계학적인 원인을 분석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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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판 성경으로 제자들에게 구술하는 루터 |
제네바에 있던 칼뱅의 계승자 테오도루 스베자는 종교개혁에 대해 매우 학문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루터의 야심과 17세기의 성직자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改革理念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톨릭 신자들에게도 중세 교회의 敎理와 慣習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인식되어 졌으며 이는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신성 로마 제국을 분열시킨 깊은 수렁을 강조하며 그것을 종교개혁의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루터와 독일의 상황 때문이라고 보는 프러시아의 역사가 레오폴드 폰 랑케등 19세기 역사가들에 의해 새롭게 설명되어 지고 있으나 마슐레는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의 원인을 찾은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기폭제를 찾아냈으며 배타 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틀 속에서 루터의 혁명을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현대의 사료에 있어 루시앙 페부르의 글이 발표된 이래,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단순한 교회의 부패에만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거나 종교 내부의 문제에만 전적 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간의 단순한 해석에 대하여 현대의 사료는 적절한 지적과 함께 종교적인 목적을 재 확립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시한다. 신앙적인 문제와 구원의 문제에 민감한 피에르 쇼뉘는 종교 개혁사에서 유럽 라인강 유역의 특수성을 강조하였으며 상업도시의 밀집과 높은 문맹 퇴치율을 자랑하는 이 지역은 새로운 사상과 보급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피에르 쇼뉘는 종교개혁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서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축약될 수 있으며 이들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우며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의 신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고 작센 지방 교회에서 실험으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원 증명서의 거부라는 행동과 성서를 통해 확립되었으며 따라서 하나의 성서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그의 종교개혁이 어떻게 댔을지 알기 어렵다. 교회를 성서의 든든한 중심 위에 다시 세웠다고 하는 종교개혁 과정은 대학의 학문적인 분위기와 비슷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는 인문주의 환경에서 시작되었으며, 한편 츠빙글리에게서 비롯된 하나의 성서라는 개념은 유럽 중부, 라인강 유역, 알프스 산맥의 문화적인 성과들을 모두 결집해 주었으며 지리적인 主權體로서 하나의 유럽은 다루기 힘든 거대한 덩어리인 사회적인 집단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하나의 신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상, 하느님께서 증거를 요구하실 때 사람들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은 무엇을 근거로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라고 말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서를 강조하고 있다. 루터주의의 영향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보이며 여러 가지 복음주의적인 기대가 엇갈리며 우유부단하게 진행되었던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전차 칼뱅주의로 정착하였으며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은 제네바를 이상적인 상태로 보게 되었다.
2) 칼뱅과 복음주의 운동
에라스무스와 함께 프랑스 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르페브르 데타플은 사람들에게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며, 인간이 공로, 즉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배격하였다. 또한 칼뱅은 성인과 성 유골에 대해 경배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였으며, 그는 우상숭배의 관습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해가 된다고 보는 우상 파괴주의 자였다. 종교개혁과 예술에 있어 예술에 대한 종교개혁의 기여도는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츠빙글리와 칼뱅이 성화에 대해 보인 공공연한 적대감은 우상파괴주의 운동과 함께 예술의 창작 정신에 대한 障碍要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개신교의 다양한 사상이 특정한 예술양식에 영감을 주었고, 그에 대한 밝은 미래를 약속하였다. 모든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음악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은 루터였다. 그는 성화에 있어서도 칼뱅과는 달리 관용적인 입장이었다. 종교개혁에 있어 수많은 종교전쟁은 그 폭력성 때문에 동 시대 인들에게조차 전대미문의 일로 받아 들여 졌다. 사실상 1560년 이후는 광기에 가까운 신앙과 이단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말세에 대한 불안감이 대 학살극 같은 참혹한 사건들을 불러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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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 교인들의 예배 |
3)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의 세계화한 종교
루터와 칼뱅의 뛰어난 업적과 영향력 면에서 신중한 비교가 필요하다. 루터가 라틴어의 성서를 모곡어인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독일의 정체성을 확림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면, 칼뱅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국제적인 칼뱅주의’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루터주의는 발생지인 독일과 스칸디아 반도 등지에 한정되어 남아 있게 되었다. 이에 비해 칼뱅주의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네덜란드 교회를 세우고, 영국 교회의 반대파를 형성하고, 마침내 미국의 기독교계 다수파를 차지하면서 계속 확대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인 팽창을 거듭해 세계를 지배하게된 영국의 그늘 아래에서 도처로 수출된 영국 교회조차도 성직제도나 예배의 형식에서 칼뱅주의와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자체가 칼뱅주의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실제로 칼뱅주위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받으며 칼뱅의 사상적인 영역 안에서 그 틀을 다진 것이었다. 이처럼 칼뱅주의가 경이적으로 세계화를 이루게 된 진짜 원인은 칼뱅주의자들이 가진 사상 때문이다. 우선 칼뱅주의는 서양세계의 급속한 정치, 경제적인 발전에 발을 맟추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한 현대적인 입헌정치에 합당한 민주주의적인 원칙들을 보여준 것도 칼뱅주의다. 더욱이 칼뱅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국가에 대한 개념이 반민주적이며 절대주의여서 저항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복종만 주장하며, 경제적인 면에서는 동업조합에서 비롯된 완고한 조직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루터주의의 보수적인 태도와 칼뱅주의가 구별되는 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5.결론
루터의 출현은 종교적인 해방과 민족적인 해방에 대한 이중의 상징으로 전독일인에게 환영을 받았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루터와 함께 독일어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일 민중의 10분의 9는 격심한 소요사태와 휘말리게 되었으며 독일 근대 역사의 중심 드라마는 플랑드르에서 등극한 황제가 로마교회에 충실한 채 남아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였다. 카를 5세와 개신교 제후들의 대립으로 시작해 1866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에 이르기까지 300년 이상 독일이 분열되어 골육상쟁을 겪는 동안 독일민중의 공동체 의식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고,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이 그것을 널리 전했다. 모든 루터파 제후가 진심으로 바라지도 않았지만, 카톨릭 황제에 대한 개신교 신자들의 충성심은 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민족은 프랑스처럼 국가적인 응집력 속에서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완전히 대세를 잡지 못한 영방국가적 다양성에서 형성되었다. 이에 역사가인 요제프 로방은 를 전혀 이루고 있지 못하던 독일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루터가 공헌한 점을 장조 하였다. 루터주의는 신앙만이 아닌 교육에 있어서도 귀족에게만 국한되었던 점을 탈피한 자국어의 교육(공교육의 강조)으로 문맹퇴치를 선두적으로 이끌며, 인간의 이해에 있어 구원론적인 입장으로 중세적인 사고의 탈피를 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참고문헌- ·올리비엥 크리스티 저《종교개혁》 ·베른하르트 로제 저 《마틴루터의 신학》 ·브렌다 볼튼 저 《중세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 저 《종교개혁 3大 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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