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종교개혁 : 생애와 신학
안명준
1) 칼빈의 생애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에 비하여 제2세대 종교개혁자라 칭한다. 루터(1483)와 츠빙글리(1484)가 15세기 말 태어난 인물인데 반하여, 칼빈은 16세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루터가 독창적이고 대담하고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개혁가였다면, 칼빈은 개혁사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다. (cf. 윌리엄 A. 스코트, 개신교 신학 사상사, 80)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디 지역의 노용(Noyon, 파리북부, Atlas 218, 윗지도)에서 제라드 꼬벵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제라드 꼬벵(Gerad Cauvin)은 1481년에 이곳 노용으로 옮겨와 법학을 공부하여 공증인이 되었고, 주교의 비서와 대성당의 사무장이 되었다. 중세의 전통적인 교회중심의도시이자 성직자들이 존경받는 이곳에서 교회의 서기일과 사무장의 역할은 성공한 사람의 표시였다. 그의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Jeanne Le france)는 중산계층의 출신이다. 아버지 꼬벵은 노용에 온지 16년(1481-1497)만에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했고, 1498년에는 시의원이 되었다. 출생 후 칼빈은 쌩뜨 고드베르뜨 교회에서 장(Jean)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는 칼빈이 세 살때에 사망했다.
-1523년 파리로 유학. 라 마르세(de la Marche)대학에 등록.
▷라틴어의 대가인 코르디에(Mathurin Cordier)에게서 라틴어를 배웠고,
▷인문주의 사상을 접했다.
-부친의 권유로 사제가 되기위하여 몽테귀(de Montague)대학에 전학.
▷몽테귀대학: 1) 학구적/종교적/금욕적 분위기로 악명이 높았다.
2) 소량의 식사와 수면시간 제공, 공부에 진력케했다.
3) 칼빈은 이때 소화불량을 얻어 평생 고생한다.
▷스코틀랜드 출신 오캄주의자인 존 메이저(John Major)를 만나 세계관을 넓힘. 메이저는 「대 영국사」(1521), 「복음서주석」(1529)에서 위클리프, 후스, 루터의 개혁운동을 비판했다. 이것은 칼빈이 종교개혁에 관심을 갖게한 계기를 제공했다.
-1527년 세인트 마르텡 드 마르트빌(St. Martin de Martville)의 사제보로 임명.(아버지가 일하는 노용 참사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진것)
-1528년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
-1529년 법학공부를 위해 오를레앙 대학으로 전학(노용참사회와 불편한 관계가 된 아버지가 신학을 포기하고 법률가가 되라고 명한 것).
▷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피에르 드레토왈(Pierre de L'Etoile)교수만남: 고전문학과 인문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멜키오르 볼말(Melchior Wolmar)에게서 그리스어를 배운다.
-1531년 부르쥬 대학(Bourges)대학으로 전학. 희랍어 선생이 볼말이 이곳으로 옮겼기때문.
-1531년 5월 14일 아버지 사망. 법률공부 중단.
▷콜레지 포르테(College Fortet)에서 개설한 왕립강좌에 등록하여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익힘.
-1532년 1월 14일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
▷4월 첫저서인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출판 - ①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소개, ② 3가지 질문, 곧 이교와 기독교,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 통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칼빈은 현재의 신학대학원과 같은 정규신학 수업을 받아 보지도 않았고, 목사 안수도 언제 받았는지 기록이 없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는 일반철학과 교양과목을 이수하고 법학을 전공함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후대의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뛰어난 설교자요, 신학자였고, 방대한 주해와글을 남겨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건재하다. 다섯 번의 수정을 거쳐 1559년 완성된 그의 '기독교 강요'는 비루터란 개혁파들에게 독보적인 권위였다. 그 역시 루터처럼 성서신학자였다. 스물세권의 구약 주석을 썼고,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전체를 주석했다. 또한 그 당시 귀족, 정치인, 종교지도자들과의 서신 교회에서 그의 정치와 경제 및 사회전반에 걸친 지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2) 교회와의 갈등의 시작
칼빈은 1532년 4월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을 출판하고 오를레앙 대학에서 1년간 머문후에 1533년 8월 노용을 방문하고, 같은해 10월 파리로 돌아왔다. 11월 1일 만성절(Alle heiligen Tag)에 연설한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의 대학 학장 취임 원고를 작성해 주었다. 그는 거기서 검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의 평화, 모든 학문의 유용성,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이것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지지하면서 타락한 교회질서의 비판과 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한 것이다. 이러한 학장 취임 연설은 왕실과 불편한 관계를 초래했다. 프랑수와 1세는 서신을 보내 프랑스의 최고대학에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대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것이다(이시대의 상황은 이미 루터종교개혁을 배우면서 살펴보았듯이, 신성로마제국의 칼5세와 싸움에 지고, 그러나 교황과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와가 서로 협력하려 했던 역사적 정황이 배경에 놓여 있다). 연설문 작성자인 칼빈과 낭독자인 콥은 소환을 받았다. 그러나 둘은 잡히면 처형될 것을 우려하여 도망쳤다. 연설문 작성이 결국 콥과 칼빈을 떠돌이가 되게 했고, 이후 3년간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이태리를 전전하게 된다.
1534년 4월과 5월 사이 칼빈은 자신이 가진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노용에 갔다. 10월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의 개혁자들은 미사제도의 오용을 논한 벽보를 파리와 주변에 게시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심지어 암보아즈(Amboise) 왕궁침실에도 이러한 벽보가 붙자 프랑수와 1세왕은 개혁자들을 억합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1535년 칼빈은 남프랑스의 친구 뒤티에(Du Tillet)집에 피신한다. 많은 장서를 소장한 이곳은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칼빈은 여기서 암브로시우스, 키프리아누스, 크리소스톰, 터툴리아누스, 그리고 어거스틴을 연구한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밝히는 변증적 성격을 지닌 「기독교강요」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535년 8월 23일 완성한다(출판은 1536년 3월). 칼빈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인문주의자인 르페브르(J. Lefevre, Faber Stapulensis -프랑스의 인문주의자로 '5개역 대조시편' Quinquplex Psalterium을 집필했고, 루터 또한 이책을 참고했다)를 방문하여 시국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후 메츠(Metz)에서, 스트라스부르그(Stra burg), 그리고 바젤(Basel)로 여행했다.
3) 칼빈과 제네바
1536년 이후 종교적 관용조처가 일시 내려지자, 칼빈은 파리로 돌아와 신변을 정리하고 동생 앙뜨앙느(Antoine)와 이복여동생 마리(Marie)와 함께 스트라스부르그로 떠난다. 그러나 제 3차 불란서와 독일의 (합스부르그-발로아(Habsburg-Valois)) 전쟁으로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직행로가 막히자 제네바를 거쳐가는 우회도로를 선택해야만 했다. 칼빈은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파넬(G. Farel, 1489-1565)의 방문을 받았다.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프랑스와 이태리와의 교역 중심지로 사보이의 지배를 받고 잇다가, 16세기 초반 프라이브르그와 베른의 도움으로 독립을 했고, 1534년 부도덕한 생활로 악명이 높던 주교를 몰아냈다. 제네바의 행정은 200인의 귀족으로 구성된 대의회와 25인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관할하였고, 시민들로 구성된 총회는 4인의 평의회와 재정관을 선출하여 시정을 행사하였다. 제네바 시의회가 로마 카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사보이에 대하여 정치적인 반란을 시도한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교황제의 노예상태에 매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넬의 설교를 통하여 제네바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넬은 프랑스 도피네 지방의 가프(gap)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인문주의자인 르페브르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1521년 온건한 개혁자인 브리소네의 비호아래 설교를 시작했으나, 얼마 후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유랑생활을 하다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쩌를 만나 교제를 나누었고, 1532년경부터 제네바와 와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535년에는 어느정도의 개혁의 틀을 마련했다.
파넬의 본격적인 제네바 개혁운동은 1536년 1월 기독교령인 베른이 사보이가를 물리치면서 이루어졌다. 파넬일행은 교회개혁을 계속하여 5월 21일에는 제네바 시의 각 가정 가장들이 대성당에 모여 만장일치로 복음주의적인 예배를 드릴 것을 결의하도록 이끌었다. 교회 재산을 시의회가 관할하며, 취리히의 교회와 정부 체제와 동일한 국가교회 형태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같은해 6월 파넬과 비레는 카톨릭 세력을 물리치고 중앙성당등 여러 교회를 접수했다. 그들은 교회당의 채색유리창을 부수고, 성자들의 상을 우물속에 빠뜨려 버렸고, 8월이 되자 대의회는 미사집전을 중지하였다. 그 후 수개월 간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이 제네바를 떠나고, 대신 기독교의 지도자로 채워졌다. 이러한 때에 칼빈이 제네바를 지나가게 되었다.
파넬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칼빈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앞장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칼빈은 '나는 나이도 어리고, 소화불량이 심하며, 이미 종교개혁에 실패를 맛보았고, 나의 소명은 종교개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것이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파넬은 '네가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저주할 것이라고'하면서 심판과 저주를 퍼부었다. 나중에 「시편주석」에서 칼빈은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파넬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까지 퍼부어 가면서 나를 권면했다. 나는 파넬의 저주의 음성을 듣고, 넉다운 당해서 계획했던 여행을 표기했다. 그러나 나는 본성이 수줍고 겁이 많아 어느 특정한 직책 수행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파넬은 칼빈을 붙드는데 성공했다. ▶1536년 11월에는 「신앙고백서」를 제출하여, 제네바 온 시민이 복음주의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게 했다. 그리고 ▶1537년 1월 16일 제네바 시의회에 「교회행정에 관한 조례」를 제출했다. 이신앙고백서의 내용은 두가지이다. 매주일 예배마다 성찬을 베풀자는 것, 매주 예배시에 모든 평신도들이 성찬에 참여해야 할 것 제안(당시 구교는 평신도들에게 1년에 두세번정도 성찬참여를 허용했다). 이것은 너무나 혁명적이어서 문제가 되어, 칼빈은 한달에 한번 성찬을 베풀어야 한다고 양보했다. 이외에도 교회와 교인의 치리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담고 있다. 즉 장로(평신도로서 제네바 시의회의 의원가운데서)를 세워 교인들의 생활을 감독하고 검토하여 목사에게 보고케 했다. 잘못된 교인이 교정이 안되면 다음의 과정을 거쳐, 즉 권면-죄의 고백-제네바시의회에서 처리-파문(출교)(마18, 고전5,5 딤전1,20에 근거하여)시킨다는 것이다.
제네바시의회는 이것을 대폭 수정하여 통과시켰다. 특히 제네바 시민들로 하여금 10명씩 관원앞에 나아와 신앙고백을 준수할 것을 서약토록 한 것은 제네바 시민의 불만을 가져왔고, 권징권이 시의회에 있다고 주장하는 시당국과 권징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고유 권한 이므로 교회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빈의 의견대립으로 시의외와 목사들의 관계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1538년에 이르러서는 시의회가 목사들의 파문권한을 박탈했다. 칼빈과 파넬은 제네바시에 항의했다. 둘은 1538년 부활절 예배에 성만찬 집례를 거부했고, 같은해 4월 23일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여기에는 반칼빈주의자들의 활약도 컸다.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 비레(Viret), 쟝 필립(Jean Philippe)등은 철저한 카톨릭주의자들로서 조직적인 반 칼빈운동을 전개하여 성공한 것이다.
4) 칼빈과 스트라스부르그
제네바를 떠난 칼빈은 베른, 쮜리히, 바젤을 거쳐 부쩌의 권고로 스트라스부르그(Stra burg)에 오게 된다. 이곳에서는 부쩌가 파넬과 같은 예언자 역할을 하여 칼빈으로 하여금 프랑스 난민교회(이곳에는 400-500의 프랑스 피난민이 살고 있었다)를 맡아 목회 할 것을 권고 한다. 여기서도 그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파넬과 같은 방식의 부쩌의 저주와 징계에 그는 또 한번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에 들어선다.
-매일 설교와 강의를 했고, 주일에는 두 번 예배와 설교를 했다.
-한달에 한번 성만찬을 시행했다.
-불어판 「시편찬송가」을 편찬했다(1539).
-부쩌의 권고로 1539년 「기독교강요」 제2판 17장 436쪽으로 증보 출판했다. 초판과는 달리 목사후보생과 교역자의 교육을 위해서 집필했다.
1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
2장: 인간에 대한 지식,
3장: 율법,
4장: 신앙: 사도신경
5장; 회개,
6장: 칭의 혹은 의인,
7장: 구약과 신약,
8장: 예정론 및 섭리,
9장: 기도,
10장: 성례전,
11장: 세례,
12장: 성만찬,
13장: 기독자의 자유,
14장: 교회의 권한,
15장: 국가의 권한,
16장: 5가지 거짓 성례전
17장: 그리스챤의 삶
-1540년 3월 「로마서 주석」출판한다.
-1540년 「성만찬에 대한 소론」:루터와 쯔빙글리와 구별되면서도 루터쪽에 기우는 입장.
-1540년 8월 세자녀를 둔 과부인 네덜란드인 이델레트 드 부레(Idelette de Bure)와 결혼했다. 그녀는 재세례파였으나, 부쩌의 영향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5) 칼빈의 제2차 제네바 시대
칼빈과 파넬이 떠난 후 제네바는 혼란에 빠졌다. 로마 카톨릭이 제네바를 회유하기 위하여 공작을 벌였기 때문이다. 1539년 5월 추기경 야코보 샤돌레토(Jacopo Sadoleto)는 제네바 시민에게 서신을 보내 로마카톨릭은 오류가 없으며, 오류없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선동했다. 제네바는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나 합당한 대책을 찾아내지 못한 시의회는 칼빈과 파넬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그 역시 칼빈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칼빈역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파넬의 경고와 권면으로 6개월 시한부이지만 제네바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허락했다(1541년 9월 13일). 제네바시는 정식 목회자로 예우하여 월급을 주고, 칼빈의 계획대로 제네바를 개혁할 것을 약속했다.
-1541년 11월 20일 「제네바 교회 헌법」을 만들었다. 이것은 목회적인 의도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규제하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칼빈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 4가지 직제가 필요함을 역설했다.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이다.
▶목사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전을 베풀며, 치리를 돕는 일을 수행하지만, 가르치는 일과 병든자와 가난한 자를 돌볼 수 도 있다. 즉 위의 4중직을 전부 수행할 수 있다. 목사의 업무는 칼빈에게 있어서 나머지 세 직책을 다 포괄하는 업무였다.
교사의 임무는 교리를 가르쳐 이단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장로는 반드시 평신도로서 그 수는 12인데, 2명은 소의회소속 평신도, 4명은 60인 의회에속한 평신도, 그리고 6명은 200인 의회 소속평신도였다. 이들이 직임은 항존직은 아니었다. 그 직무가 불성실할 경우 연말에 가서 사임케했고, 성실하면 계속 장로직을 갖게 했다. 장로들과 목사는 협력하여 당회를 구성한다. 집사의 임무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병자를 도와주는 일로 이해했다.
▶성만찬은 칼빈은 매달 1회를 주장했으나, 제네바의회에 의하여 1년에 4번집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부활절, ⓑ성령강림절, ⓒ9월첫주일, ⓓ크리스마스등이다.
▶말씀설교를 강조했다.
칼빈은 1564년 2월 6일에 마지막 설교를 하고 몸져 누었다. 병석에서도 일과 작업은 계속되어 여호수아 주석을 남겼고, 1564년 5월 25일 55세로 베자의 품에서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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