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파 종교 개혁
종교개혁은 루터교, 장로교, 그리고 성공회로 대별되는 3대 우파 종교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좌파 종교개혁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에 대한 종교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 성경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우파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우파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 본다.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종교 개혁의 분파를 지칭하며, 유아세례를 받은 이는 재세례를 통해야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성경을 강조하고 원시 기독교로의 복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 무저항주의 및 천년왕국설을 역설했고, 교회와 국가 사이에 상호 긴장 관계 수립,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설교하여 국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의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스위스 형제단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부터 일어났다. 콘라도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단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 행정에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찬송가도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 세속적인 직업 거부,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다보니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파들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뮌스터의 은거자들
멜키오프 호프만은 본래 루터파에 입문했다가 츠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겼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위에 가까운 이론을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슈트라크부르크에 재림해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네덜란드까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를 처형하자 이제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였다. 이렇게 전개되자 도시 밖의 재세례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 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는 로마 가톨릭 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하고 도시 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하였다. 급기야는 전쟁으로 번져서 남자들의 죽음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교황청군과 내통하고서 성문을 열어 주었으며, 결국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갔다.
메노나이트
메노 시몬니스는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일하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과격파가 부르짖었던 칼, 일부다처제도 등을 반대하면서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다. 후에 메노 시몬스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메노나이트 즉, 메노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스위스형제단과 관점이 유사하며 원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교인들의 말씀 중심적인 훈련을 강조하였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연합을 상징하며, 비신자와는 결별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했고 공직을 거부하게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행을 실천하는 길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므로, 폭력이외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독교평화주의에 근거, 전쟁과 폭력에 반대했다. 그래서 메노나이트는 병역을 사회봉사로 대신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평화주의를 실천해오고 있다. 또한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여, 성직자가 없다. 물론, 메노나이트 목사는 있으나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평신도 사목자일 뿐이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서 재세례 금지법을 어겼으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다. 메노나이트에서 자의적인 세례를 통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교회역사속의 메노나이트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믿음을 강조했으며, 세례를 베푼 것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령주의자
아시시의 성(聖) 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 개혁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개인적인 영적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신과 직접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바람으로서 자연적으로 반(反)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종교 개혁의 대원리인 성경과 은총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 속에 파고들어서 조용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을 더욱 권위 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가장 가치 있게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타슈벵크펠트(1489년-1561년), 세바스티안 프랑크(1499년-1542년), 후안 데 발데스(1490년-1541년)등을 들소 있다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인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내면적인 영적인 교제는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었으므로 어떠한 면에서는 이들이 19세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고 있는 면을 바로잡자고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루터로 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교리를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유럽의 자유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 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거쳐서 영국으로까지 퍼졌으며,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의 신학적 구조는 속죄론에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속죄설을 부인하는 틀 안에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예수께서 도덕적인 스승으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도덕적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였다. 흔히 유니테리언이라고 부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높은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을 받을 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략시킴으로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를 다시 등장시킨 이단이었다. 다만 이들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덕적인 윤리관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고 다만 기독교를 빙자한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출처 :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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