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종교 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서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에스파냐는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의 위성 국가였으며,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였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시키고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써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리프의 아들이며, 에스파냐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1519년 6월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에스파냐 사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교황청의 착취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 동안에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곳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일생의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큰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속 제후들이었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로마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폐해가 컸던 첫 수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젠세 등은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였는데 십일조란 각 개인이 수입의 1/10을 교황청에 바쳐야 하는 제도였다. 종교 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광경이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를 제도화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
95개조 명제 발표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대사(大赦)였다. 대사는 사도 시대 이래로 인간 구원 과정에서 보조 수단으로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 공로와 성인들의 보속 공로를 갖고서 신자가 현세에서 또는 죽은 다음에 연옥에서 받아야 하는 죄의 잠벌을 없애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범한 신자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벌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죄 때문에 생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벌은 먼저 고해 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덜어질 수 있다. 아울러 보속하지 못한 잠벌은 대사를 통해서 면제받고 영혼이 정화되어 구원될 수 있다.
1513년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대사(大赦)를 반포하고 대사부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를 실시하였는데,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를 면죄부로 착각하여 남용하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이 문제에 비판적인 자신의 견해를 95개조로 낱낱이 써서 발표하였고, 로마 교황이 파견한 특사 요한 에크와 논쟁한다. 루터는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권과 공의회의 무류성을 거부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다. 이 논쟁에서 결국 엘리트 신학 코스를 받은 엑크가 이기게 되고, 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되돌아간다.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영적 독립을 선언했으며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교황은 적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 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된다.
보름스회의
보름스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제후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곧 독일 교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게 된다.
농민봉기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란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 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배층의 착취를 언제나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1524년 터져 나왔다. 이 농민 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 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가 교회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레데릭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는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반가톨릭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소요한 농민들은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 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 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 사태는 독일 북부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 수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짐으로써 원하는 독일교회의 개혁이 달성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농민 운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반가톨릭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레데릭이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말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 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 소요는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루터의 개혁 평가
루터는 본래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교황청에 의해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근본적으로 보수파였으며, 루터의 개신교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이었다. 어쨌든 루터의 종교 개혁은 종교를 탈피한 점에 특색이 있고, 그것으로 지도권을 행사해 온 로마의 지적 문화에 대한 반발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반발심에는 질투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덧붙여 당장 루터를 믿고 봉기에 나선 농민들에게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현실에서 차별은 있다고 하는 의미)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귀족 기반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 관계로 일반 민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출처 :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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