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7. 종교 개혁과 기독교 박해
a) 종교 개혁
유물과 교회 직책, 면죄부를 파는 일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의 큰 사업이었습니다.
교황 보니파스 8세는 A.D.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였고, 성 베드로 성당까지 순례를 하는 사람에게 면죄를
허가했습니다.
그 해에 이백만명이 로마로 몰려 들었고, 성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두 사제는 돈을 갈퀴로 긁어 모았습니다.
교황은 이렇게 모은 돈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많은 성과 저택을 구입함으로써 로마 사람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은 많은 도시와 땅을 소유했고, 교회에 강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카톨릭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해 준다는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에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은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육적 쾌락을 위해 죄를 용서하는 문서를 팔았습니다.
마틴 루터 당시에는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했기 때문에 교황은 돈을 모으기 위해 더욱 면죄부 판매에 열중했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도시를 방문해 교황의 공식 인가서와 교황의 깃발을 내 걸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긁어 모은 돈은 큰 쇠금고에 넣었습니다.
돈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별 무리가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조상과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이에 루터는 면죄부를 비롯한 카톨릭의 모순을 지적한 95개 조항을 캐슬 교회 문에 못 박았습니다.
카톨릭 신학 박사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면제부를 파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면죄부가 엉터리라는 가장 큰 증거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이라는 연옥이라는 영계 자체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아직까지도 돈을 받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습니다.
b) 기독교 박해 (종교 재판)
중세시대에 카톨릭의 타락과 모순에 대항하여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카톨릭에 의해 이단자로 정죄되어 참혹한 고문과 희생을 당했습니다.
A.D.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는 '박멸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내려 카톨릭과 카톨릭의 영향권에 있는 권력자들이 함께 이단자를 고문하고 화형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고문대를 사용하여 손과 발을 묶고, 밧줄을 감아 사지를 잡아 당겨, 사지가 떨어져 나가며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고문입니다. |
'철갑처녀로 알려진 이 고문기구는 속이 비어 있는데 |
그들은 집게로 손톱을 뽑아냈고, 남녀 성기를 불로 지져댔으며, 큰 롤러에 송곳을 달고 개신교도 위에서 굴렸으며, 고문기구로 손 마디와, 다리와 발가락을 뭉갰습니다.
또한 희생자의 옷을 벗긴 뒤 줄로 팔을 등 뒤로 묶었고, 도르레를 사용하여 몸을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신체 부위의 관절이 떨어져 나가게 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귀와 입에 끓는 납을 부어 넣었고, 눈을 빼거나, 살점이 튀도록
채찍질을 하거나, 긴 못이 박힌 낭떠러지에 던져 넣었습니다.
종교 재판소에서 고문 당한 사람은 감옥에 벽의 쇠사슬에 묶였고, 피로 가득찬 고문실에 살고 있는 쥐와 해충의
먹이가 되어 죽어갔습니다.
종교 재판은 점점 대량학살로 이어졌는데 A.D. 1209년 베지에르라는 도시에서는 6,000명이 칼로 살육당했고,
A.D. 1211년 라바우어에서는 10만명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메린돌 대 학살에는 500명의 여인들이 창고에 갖힌 채 불어 타 죽었고, A.D. 1562년 오렌지 대학살에서는
교황 비오 4세가 이탈리아 군대를 보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A.D. 1572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만명의 성경대로 믿는 위그노 교도들(Huguenots)이 대학살을 당했습니다. |
네델란드의 종교재판에서 고문하는 모습으로 프로테스탄트가 고문대에 발이 낀 채 거꾸로 매달려 있고, 밑에 있는 화로에서는 그의 눈을 지지기 위한 쇠막대기가 달구어지고 있습니다. |
종교재판에 사용되었던 3가지 주요 고문방법을 |
나무에 묶여 화형 당하는 개신교도 |
교황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단(異端)을 징치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의로운 성도들을 고문하거나 죽였습니다.
다음의 몇 인용문들을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헌에서 발췌된, 공언하고 있는 박해의 정당성입니다.
만약 교회의 어느 신자가 불신실하게 된다던가, 이단에 빠져들던가, 혹은 어떤 다른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이러한 교인은 그가 의존돼 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을 견책할 수 있는 권한 뿐만 아니라 교회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외적인 형벌로써 고통을 줄 수 있고 세속적인 권력에 의뢰할 수도 있다.
Schouppe, A Course of Religious Instruction, 74, cited by Gane, 53.
화폐 위조범이나 다른 범죄자들이 세속적인 당국자들에 의해서도 즉시로 합당하게 사형에 넘겨지거든, 하물며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이야말로 즉시 파문(破門)할 뿐더러, 분명히 사형에 처해야 하지 않겠는가.
St. Thomas Aquinas, Moral Theology, cited by Gane, 53.
영적인 검과 물질적인 검 모두가 교회의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검도 참으로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영적인 검도 교회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즉 하나는 사제(司祭)의 손에 의해, 다른 하나는 왕들과 병정들에 의하여 사용되지만, 사제의 뜻과 승낙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공공연히 이단임을 공언하고, 말이나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말하노니, 출교 뿐만 아니라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Lepicier, De Stailitate et Progressu Dogmatis, 211, 212, 194, cited by Gane, 53.
* 그러면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이단자는 누구인가?
"이단자란 카톨릭교회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으로 가르치는 특정한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이를 고집스레
반대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믿을 것과 안 믿을 것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언하는 영세 받은 신자이다."
M. 뮤럴,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설, 4권 1885년 판, 170, cited by A. J. Weaner, 성서 기초교리, 148.
이렇게 독선적(獨善的)으로 규정된 이단의 개념에 따라, 이단자로 정죄되면 행정을 맡은 시장이나 당국자들은 닷새 이내에 그를 나무에 달아 불태워 죽여야 햐며, 만약 당국자가 이를 지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그도 파문에 처해지고 이단자로 취급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카톨릭 백과 사전, "종교 재판소" 8권, 34, 성서 기초교리, 148.
* 이러한 제도 아래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이단들, 특히 성도들이 고통과 죽임을 당했는가?
스페인에서만도 종교재판에 의하여 고난 당한 사람들은, 산 채로 화형 당한 사람이 31, 912명으로 헤아려졌고,
소위 복종하도록 강요된 참회자가 291, 450명으로 계산되었다.
알비젠스인(Albigenses)들의 대학살에서는 백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교황 인노센트 3세가 1208년 알비젠스와 왈덴스인 박멸을 위해 일으킨 십자군 당시 제수이트(Jesuits)제도가 처음 확립된지 30년 동안에 900,000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당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알바 공(公·카톨릭신자)의 지시에 따라 36, 000명이 보통 집행자들에 의해 신속히 사형에
처해졌다는데, 알바 공은 이러한 행위를 자랑했다.
찰스 5세의 치하에서는 50, 000명의 프랑드르인들(Flanders) 지금의 벨기에의 서부, 네델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중세기 국가와 독일 사람들이 교수형과 화형과 산 채로 매장당했다.
Guinness, Key to the Apocalyps, 92, 93, Albert Barnes, Notes on Daniel, 328.
세계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살상 행위로 꼽히는 1572년 8월 24일 의 바돌로매(Bartholomew) 제일(祭日)의 대학살이 바로 로마 카톨릭교회에 의하여 저질러졌음을 세상이 알고 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프랑스의 어린 왕 찰스 9세의 섭정 태후였던 캐더린(Catherine)은 강력해져 가는
개신교도들인 위그노파를 제거하기 위해, 위계(僞計)를 써서 그들을 한 데 모아 놓고, 졸지에 살상을 감행하여
남녀노유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위그노면 모두 죽여!'라고 외치며, 파리 시내에서만도 일주일 이내에 8,000여명을 죽였고 2달 동안 전국으로 확대한 살육을 통해 8만명 이상을 죽였음은 가공(可恐)스러운 역사로 기록돼 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러한 살육의 소식을 들은 교황청과 스페인 황실에서는 도덕적인 극악성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열광적으로 대환영했고, 로마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기념 메달이 발행되었다.
[교황권의 한 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J. A. Wylie, The History of Protestantism, vol. I, 16.
일찍이 인간 가운데 존재했던 어느 다른 제도보다도, 로마교회는 더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이
역사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진 개신교도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로마 교회의 허다한 핍박에 관한 기념물들이 지금은 너무나 없기 때문에, 그들에 의한 엄청난 희생자들에
대한 완전한 개념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상상력을 가지고서라도 희생자들의 고통을 적절히 인식할 수가 없음이 분명해졌다.
William E. H. Lecky, History of the Rise and Influence of the Spirit of Rationalism in Europe, vol II, 35, 37.
로마 교황은 저희 신앙 때문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로마교회의 우상 숭배에 편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서를 높이 쳐들며, 저희 생명의 죽음도 불사하고 죄를 대항하여 피로써 항거한 5천만의 남녀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
H. G. 게이네쓰, 시대의 임박한 종말, 204, 성서 기초교리, 152.
로마 교회는 이러한 대대적인 핍박의 수단으로 1179년에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최초로 그들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력으로 박멸하기 위해 십자군(十字軍)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십자군이 짓밟은 지역의 뒤처리를 위해 1229년 툴루스 종교회의(the Council of Toulouse)의 결정에 따라 악명(惡名) 높은 종교 재판소(the Inquisition)를 개설한 것이다. Lenwick, 75.
주로 도미니칸 신부(修道僧)들에 의해 운영된 이 종교재판수는 비밀리에 기소되고 집행되는 무서운 살인 및
고문 기구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어 개종시키거나 죽음을 선사했다.
Foxe's Book of Martyrs(London: The Protestant Truth Society, Inc.), 10-15.
처음에는 왈덴스인들과 알비젠스인들을 색출하여 박멸(撲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1542년부터 다시 예수회(Jesuits) 신부들에 의해 운영되어 개신교 박멸에 무서운 힘을 드러냈다.
<알프스여 증언하라!>
알프스 계곡들을 살펴 보라!
그리고 그 계곡들의 전설을 읽지 말고 그들의 역사를 읽으라.
지금은 달빛에 비쳐 은 빛으로 눈부신 백설(白雪)의 계곡,
그 아름다운 색조 위에 뿌려졌던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의 검붉은 핏방울들.
자유를 울부짖으며 계곡을 뛰어넘는 폭포들,
그것들은 지금 로마교회의 칼날에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한 많은 시체를 넘어 포효(咆哮)하느니......,
물 길도 영롱하게 계곡을 내리달리는 강들이여,
그것들은 바디칸이 죽인 순교자들의 재를 실어 나르며,
그 시체 더미 위를 소리치며 흐르거라.
바위 틈과 계곡을 편답(遍踏)하라.
그것들이 위대한 영웅들의 행적을 증언하리라. (......)
로마 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겨루어 왔던 진리의 요람,
그 장엄한 골짜기들,
너, 알프스야,
심판의 날에 목소리를 높이거라.
산들아, 삼림아, 거기 있는 나무들아,
영원한 언덕들아,
잠잠치 말고,
저주받은 도시의 피흘린 죄악을 심판날 하나님께 증언하거라.
1400년 알프스 프라겔라(Pragela) 골짜기에 은신했던 왈덴스인들이 로마 교회가 보낸 토벌군에 의해 기습을 받아 짓밟히고 살해당한 뒤, 피하여 도망친 사람들은 엄동설한에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수도 없이 얼어죽었다.
1488년 교황 인노센트 8세의 왈덴스인 박멸령에 따라, 프랑스 군대들이 알프스의 로이스(Loyse) 골짜기에 덮치자, 왈덴스인들은 굴과 동굴로 피신했으나, 입구에 불을 놓아 3, 000여명이 질식해 죽기도 했다. Ibid., 6.
이 모든 죄악은 알프스에 의하여 심판날에 증언될 것이다.
로마 교회의 이러한 핍박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1949년 로마에 있는 예수회의 기관지(La Civilita Cattolica)는 진술을 통해, 로마 교회는 그들이 소수일 때는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지만, 그들이 압도적인 다수가 될 때에는 종교적 차별을 실천한다고 역설(力說)했다.
전해져 오는 역사의 증언대로, "로마 교회는 자신들이 불리한 입장에서는 양처럼 온순하고, 동등한 처지에서는
여우처럼 교활하지만, 번성하게 되면 이리처럼 사나워진다"는 교훈이 새삼스러워진다.
(Rome is a lamb in adversity, a fox in equality, and a wolf in prosperity.) Gane, 54.
* 참고서적 : 천주교의 유래 (우두로우 저, 정동수 역, 말씀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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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로마 가톨릭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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