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영국와 독일 종교개혁 유적지를 보고 왔습니다

류성련 2014. 11. 4. 15:37

지난 6월 16일부터 열흘 동안 영국과 독일 종교개혁 유적지를 돌아보고 왔습니다. 가늘 학기에 종교개혁사를 강의하기로 되어 있어서 수업 자료를 얻을 겸,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도 만나고 독일에 있는 친구(김형만 목사)를 만날 겸 다녀왔습니다. 우선 영국에서는 로마 유적(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는요크에 가서 중세 영국 왕실 채플 기능을 한 York Minster를 둘러 보았는데, 과연 웅장했습니다.

 

 

 

다음으로 북부 잉글랜드 복음 선교의 시발점인 Lidisfarne의 Holy Island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제부도처럼 하루에 두 번 물길이 열려야 들어갈 수 있는 섬이었는데 7세기 노섬브리아 왕 Oswald가 북부 앵글로 색슨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아일랜드 Iona 수도원의 St. Aidan와 St. Cuthbert를 초빙해 이곳에 교회와 수도원을 짓고 선교하도록 주선한 곳입니다. 중세 영국 교회를 이끌었던 이곳 수도원은 종교개혁을 이끈 영국 왕 Henry 8세의 명령으로 1528년 파괴되어 펴허로 남았고 St. Mary 교회만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 갔습니다. 에딘버러 성채에서 곧바로 내려오는 대로변에 12세기 지어져 스크톨랜드 국왕 채플 역할을 했던 St. Giles 대성당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종탑도 왕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 웅장했습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역이었던 John Knox가 바로 이곳 사제로 있으면서 Mary여왕과 투쟁하며 종교개혁을 끌어냈습니다. 지금은 스코틀랜드교회로 되어 있는데 대성당 안에서는 관광객과 시민을 위한 무료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대성당 뒤 광장엔 이 교회 교인이자 영국 자본주의 창시자인 Adam Smith의 동상이 있있습니다.

 

 

 

St. Giles 대성당 바로 아래 쪽에 스코틀랜드 종교재혁자 John Knox House가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Knox가 이곳에 산 적은 없는데 18세기 전기 작가가 이 집에서 Knox가 임종을 했다고 기록하고 그것을 이어받아 19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이 집을 사서 성지로 조성하면서 Knox 생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역사적 사실을 뛰어 넘어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설에 Knox가 임종하기직전 이 집 2층 창문으로 시민들에게 유언 설교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집은 13세기 때 지어진 것으로 대대로 스코틀랜드 국왕의 왕관과 은화를 만들던 세공업자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요크셔 북부 Skelldale에 있는 Fountains Abbey 유적을 방문했습니다. 이 대수도원 유적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유명한 것으로 중세 수도원의 흥망성쇄를 한 눈에 볼 수있는 것입니다. 이 수도원은 1132년 요크에 있던 베네딕토수도원에서 세속화된 소두원 풍토를 쇄신할 것을 주장하다가 수도원장에게 추방당한 13명의 젊은 수도사들이 세운 것입니다. 이들은 요크 대주교가 주선해 준 산 골짜기에서 절대 청빈과 절대 순결, 절대 순종의 덕목을 요구하는 베네딕투스 수도원칙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 수도원을 건설했는데, 초기엔 생활고로 고생하다가 유럽에서 중세 클루니 수도원개혁운동을 이끌었던 프랑스 Citeaux수도원과 연결되어 재속수도사(lay monk) 제도를 도입한 결과, 생활과 수도를 겸하는 수도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정치권과 일반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은 3백 년 만에 영국에서 제일 부요한 수도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물질적 부요가 정치권과 민중의 비판을 받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종교개혁 당시 영국 국왕 Henry 8세에 의해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파괴된 수도원 모습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계명을 저버리고 "부요한 자는 화가 있을지니"라는 징계를 받은 교회 모습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웨슬리 고향인 Epworth를 방문했습니다. 도시랄 것도 없어 루터의 고향 Wittenberg보다훨씬 작은 동네더군요. 내가 사는 갈현동보다도 작았습니다. 아주 한적한 곳으로 웨슬리 가족이 1657년부터 1738년까지 살았다는 옛 목사관과 웨슬리 아버지가 목회했던 St. Andrew성당, 그리고 웨슬리가 종종 서서 설교했다는 마을 광장 분수탑, 웨슬리 기념교회, 엡웟 최초 감리교회 등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마인츠의 Worms를 다녀왔습니다. 루터가 Wittenberg 성당 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임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4년이 되는 1521년 4월 21일, 그를 재판하는 신성로마제국 의회가 열였던 곳이지요. 그는 자신을 파문하려는 로마 추기경과 황제 Chares 5세 앞에서, 그 유명한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s anderes. Gott helfe mir. Amen."를 외친 곳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파문당한 후 작센 영주 Fredrich의 보호를 받아 Wartburg 성으로 가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함으로 종교개혁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Worms에는 루터 당시 가토릭교회의 위용을 자랑하는 St. Peter and St. Mary 대성당과 그가 심문 받았던 황제 저택이 있던 자리(분수 광장으로 바뀜), 후에 그를 기념하여 지은 성삼위개혁교회, 그리고 종교개혁 기념공원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1868년 조성된 종교개혁 기념공원에는 Luther를 비롯하여 Waldus, Wycliff, Savonarola, Hus, Melanchton 등 중세 이후 유럽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유독 Calvin과 Knox, Zwingly 등 칼빈주의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띠었습니다.  이들 칼빈주의 개혁가들의 동상은 제네바에 있다지요? 다음에 가볼 곳이기도 합니다.

 

 

 

 

 

 

 

 

출처 : 한국교회사학회
글쓴이 : 이덕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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