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요약
현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요약
제 1 부 정통, 합리주의, 그리고 경건주의
1. 정통주의 - 종교개혁 이후 도그마가 신앙을 그리고 정통교리가 사랑을 대체했다. 개혁파, 루터란, 로마카톨릭은 모두 신자들이 고수해야할 정통 신조들을 발전시켰으며, 이에 순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자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까지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합리주의가 유럽을 휩쓸게 되면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 문제들에 관해 답을 줄 수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분쟁과 편견만을 낳는 기독 교리의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어야 하느냐는 것이 이 운동의 주장이었다. 이에 잉글랜드의 감리주의자들과 대륙의 경건주의자들은 기존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은 채, 보다 열정적이고 개인적인 신앙과 경건성을 배양하는 길을 택했다.
30년 전쟁은 20세기 이전까지 가장 처참하고 처절한 유럽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종교적인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기독 교리에 관한 회의적인 태도는 정교분리라는 세속국가를 발전시키게 했다. 30년 전쟁을 끝내는 웨스트팔리아 화약은 종교자유의 원칙을 나타냈다.
헨리 4세의 암살은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했던 낭트 칙령을 위태롭게 했다. 이때 대부분 상인과 전문직 기술자들인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독일로 스위스로 영국으로 신대륙으로 망명했다. 신자들은 비밀리에 건물이 아닌 야외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이를 광야교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온갖 탄압을 이겨내면서 스위스 로잔에 망명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길러서 프랑스 내에 개혁파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청교도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의 칼빈개혁파들이 교회는 성경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영국국교-성공회에 대항했다. 당시 청교도주의를 반대하였던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영국 성공회 예배의식을 강요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가 공식 종교가 되었고 잉글랜드에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은혜와 예정론에 관한 루터와 칼빈의 일체의 입장들을 정죄했다. 카톨릭 내에서는 “정적주의” 운동이 큰 논쟁을 일으켰다. 스페인인 몰리노스는 “영혼의 안내서”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수동성을 주장했다. 프랑스로 들어간 정적주의는 마담 기욘의 극단적인 운동이 있었으나, 캄부레이 대주교 페네론은 정적주의에 동의하고 실천했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이런 모든 사건들을 정리하고 가톨릭 정통신앙을 정의했으며, 교황을 교회 권력의 중심에 세웠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 때문에 카톨릭은 약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루터란 내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의 타협을 모색하는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 학파들이 루터란 신학을 주도했다. 루터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초로 신학을 했던 예수잇들과 같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적 신학방법을 사용했다.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는 곧 사라졌으나, 성경영감의 교리와 엄격한 고백주의 정신을 뒤에 남겼다. 루터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분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신적 행위였던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은 독자들을 그에게로 이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루터란 스콜라 학자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영감 되었음을 강조했다.
17세기에 개혁주의 전통은 두 개의 종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곧 도르트 종교회의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야말로 칼빈주의 정통신학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한 중요한 문서이다. 제1장은 모든 종교 논쟁의 ‘지존의 심판관’인 성경의 권위를 취급하고 있다. 즉“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올바른 규칙은 성경 자체이다”고 했다. 그 후에는 청교도 혁명 당시 잉글랜드에서 문제가 되었던 여러 가지 사항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나 엄격한 정통신학에 충실하고자 했던 점에서 도르트 회의의 성격과 같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2.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 18, 19세기에 극성기에 달했던 이성주의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그 특징으로 한다. 도그마에 관한 논쟁들, 그리고 기독교신자들 사이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은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신비주의 운동은 내세 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에 퀘이커들을 제외하고는 전체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3. 경건주의 - 경건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스페너는 “피아 데시데리아”라는 경건주의 교과서를 만들었다. 이 책에서 그는 루터의 만인제사장 설을 통하여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차이점들을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책임에 중점을 두도록 제안했다. 그의 제자 프랑케는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할 기쁨을 강조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했다. 이들은 루터란 출신이었으나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개혁파 사이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경건주의가 기독교 역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젠돌프는 후스파 모라비안들을 만났는데, 이들에게 사유지를 제공하고 정착지를 주었다. 이들의 경건한 생활 공동체인 헤른후트를 보고 깊은 감명을 느낀 그는 19세기의 선교 열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존 웨슬리와 감리교에게 미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웨슬리는 1735년 인디안 사역을 위해 미국으로 가던 중 난파의 위기 앞에서 모라비안들의 깊은 신앙심을 보고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경험한다. 웨슬리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이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협회를 조직하였다. 감리주의가 성공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산업혁명 때문에 야기되었던 새로운 필요에 적절하게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4. 청교도 -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정책은 17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앵글리칸 교회가 공식 종교였지만 식민지에서는 별 세력을 얻지 못했다. 웨슬리 형제와 휘필드가 가장 중요한 종교적 운동을 이끌었으며, 후에 감리교와 침례교 등이 이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었다. 청교도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북쪽 지방이었다. 잉글랜드를 떠나 네델란드로 갔던 일단의 반체제적 청교도 인사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세계로 떠났다. 로드 대주교의 박해 기간 중에 10,000명 이상의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로 도주했다. 영국에 남아 있던 이들은 청교도 운동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엄격한 칼빈주의를 계속 신봉하고 있었다.
독일이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에도 경건주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철저한 칼빈주의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인적인 회심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던 인물로서 이러한 물결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대각성 운동의 목적은 신자들 각 개인을 깊은 영적 경건과 철저한 성경연구로 이끌고자 함에 치중했다.
대각성 운동은 미합중국을 결성하게 된 13개 식민주 전체를 포용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서로 다른 식민주들 가운데 일체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동시에 인권과 정부의 성격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유포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상들이 식민주들 간에 날로 성장해 가던 일체감과 어울려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낳게 한 것이었다.
제 2 부 19세기
1. 미합중국 - 18세기말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제2차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개척지대에서는 이러한 부흥집회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감리교와 침례교는 양적으로 급성장했으며, 마침내 미국 내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되었다. 제2차 각성운동의 중요한 결과는 출신민족들과 특정교파간의 상관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노예제도는 많은 이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했으나, 입장은 모호한 것이었다.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흑인 교파들이 생겨났다. 곧 흑인교회들은 흑인들을 연합시키고,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등, 흑인사회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이들은 또 아프리카 선교의 중요한 몫을 감당한다.
영국에서는 윌리암 부스에 의해 구세군이 창설되었다. 구세군은 시초부터 도시 빈민들의 영적, 육체적 복리를 위해 활약했다. 미국 내에서도 감리교회에서 성화에 대한 강조 때문에 성결교회라고 불리는 분파가 나타나서, 성령의 은사-특히 방언, 치병, 예언 등을 중심으로 예배를 했다. 1906년 로스안젤리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오순절의 불길”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 “하나님의 성회”를 조직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유럽에서 건너오면서 기독교에 충격을 주었다.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상의 구조 속에 기독교를 집어넣고자 했으며,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근본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대응했다. 이런 움직임은 ‘복음주의 동맹’으로 나타났다. 1895년 열린 집회에서 기독교의 다섯 가지 이념들을 정립했다. 그것은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신성, 동정녀 탄생,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그의 육체적 부활과 임박한 재림이었다. 얼마 후 장로교 총회도 이와 비슷한 원리들을 채택했다.
19세기 미국 종교계의 중요한 현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신흥종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파의 출현이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로는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쳔 사이언스 등이다. 모르몬교는 조셉 스미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는데, 천사가 준 금판의 기록들을 번역했다는 모르몬경전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을 마치 미래의 사건들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암호가 숨겨 있는 것처럼 읽는데서 발생한 종교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창시한 베이커 에디는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삼위일체 등의 기독교 용어들을 본래의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른 ‘영적’으로 해석했다.
2. 유럽 - 프랑스 혁명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했다. 혁명파들은 종교란 인간의 무지의 소치에 불과한 것이며, 자기들은 일체의 미신과 종교를 극복한 과학과 이성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다. 소위 ‘자유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기를 거부하는 신부들은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단두대로 보내졌다. 나중에는 시민헌법에 서약을 한 여부나 가톨리과 프로테스탄트를 가리지 않고 마구 잡아 죽였다.
1795년에 공포정치는 끝났으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계속 기독교에 대적했다. 이때 군부를 장악한 나폴레옹은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와 화해를 했다. 왕정복고 후에도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이전처럼 강력하지 못했다. 이에 '자유교회'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국고에 의해 유지되는 국교들과는 대조적으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 측에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각종 사회적 불의, 그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도에 대항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가톨릭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경계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미래를 낙관했다.
3. 라틴 아메리카 - 19세기 전반에 걸쳐 라틴 아메리카를 뒤흔든 사상적 논쟁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대부분 보수주의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 사상을 수입해온 반면에, 자유주의자들, 혹은 진보주의자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에 의존했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이들의 주도하에 혹독한 독재정치와 폭력이 극에 달한 혁명들이 반복되었다.
새로운 사상들이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교회 정치가들은 더욱 격렬하게 이런 사상들을 정죄했으나, 수많은 가톨릭신자들은 신앙을 교회와는 별개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도달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쉽사리 많은 개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4. 에큐메니칼 운동 - 19세기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전 세계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현지교회가 자체적으로 지도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이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생을 뜻한다.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이 사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에큐메니칼'이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의 연합, 혹은 통일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현대적 기독교 통일운동을 불러온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선교활동임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제 3 부 20세기
1. 격변의 시대 - 19세기에 걸쳐 선교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가까운 장래에 세계의 모든 인구가 기독교 신자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찍이 세계가 경험하지 못한 참혹한 전쟁을 유발시킬 흐름들이 이러한 표면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러시아의 혼란은 혁명을 불러왔다. 공산당 혁명이 성공하자 그들은 교회재산을 국유화했다. 유럽에서는 많은 이들이 국제연맹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파시즘의 출현으로 이러한 소망은 무산되었다.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나치당은 아탈리아의 파시즘을 압도했다. 나치당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가 국제 파시즘의 도그마가 되었다. 1939년 6월 유럽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연합 추축국과 대항하여 다시 한 번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종전 후 민권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은 흑인들과 여성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세계를 지도해왔던 백인남성들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도 존재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교회가 존재했다. 실제로 19세기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우주교회가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20세기의 몇몇 학자들은 전 세대의 선교사들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들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바로 이 선교사들이 모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는 거대한 기독교의 연락망을 구축해 놓았다. 20세기의 혼란 속에서 신자들은 분열되고 방황하고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과 박해와 혼란 속에서도 이들은 영원한 평화와 정의의 통치를 이루실 그 분을 증거했다.
2. 동방 기독교 - 세계전역에는 정교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지역 내에서는 하나의 교회만을 인정했지만, 이민을 떠나 정착한 신자들은 출신지역이 다르므로 이른바, 정교회 디아스포라가 생겨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핍박 때문에 신자들의 수가 격감했다. 많은 생존자들은 서구로 이주했다.
터어키의 지배 아래 있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학살당했다. 약100만 명이 이를 피해 이주했는데, 그 결과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이란, 이라크, 그리스, 프랑스 그리고 서유럽 일대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 기독교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소련의 영토 일부가 된 아르메니아지방에서는 정교회가 영토내의 다른 교회들과 비슷한 상태로 계속 존속하고 있다.
3. 로만 가톨릭교 - 가톨릭교회는 현대의 각종 사상과 운동들을 공포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동을 가져온 이유들 가운데는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에게 교황령을 빼앗겼다는 것, 새로운 세속국가들이 가톨릭교회의 사역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현대사상에 의해 신자들이 무신론적으로 물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 이들 비판세력들은 계속 교회에 의해 무시되고 억압당했다. 따라서 20세기의 가톨릭교회 역사야말로, 트렌트회의와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을 계속 고수하는 세력과 현대세계의 도전에 대응하여 교회를 개방시키고자 하는 세력들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20세기 로만가톨릭의 모습은 수세기에 걸쳐 현대세계의 도전을 단지 대결과 정죄로 일관했던 입장을 벗어나, 이 세계와 새로운 대화를 모색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가톨릭 신도들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신자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를 가톨릭교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4. 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 - 시대의 도전들에 대한 신학적 응답은 칼 바르트에게서 나왔다. 이 학파는 흔히 “위기신학” 혹은 “신정통주의”라 불렸다. 그는 신학이란 아무리 진실하거나 정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작업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유스러움과 기쁨, 그리고 유머까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셉 로마드카는 자기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정권에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기독교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블로흐는 기독교 신조들과 성경에 나타난 교훈들이 긍정적 가치들을 가지도록 재해석하고자 했다. 소망의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자 사이의 대화를 위한 통로를 열었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는 위르겐 몰트만이었다. 몰트만은 소망이야말로 성경적 신앙의 중심 분야라고 주장했다.
1936년 프랑스에서는 감리교와 회중파내의 개혁파신자들이 연합하여 프랑스 개혁교회를 결성했다. 이 교회는 특히 공업화된 지역 내에서 전도와 선교에 투신했다. 마찬가지로 서독의 경우,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13만 명의 인원들을 동원하여 독일 및 해외의 사회문제 및 구제 사업에 헌신했다. 이러한 운동 뒤에는 세속화가 아닌 순종을 가장 중요한 명제로 받아들였던 수백만 명의 헌신적 신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5. 미국 내의 프로테스탄트주의 -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전후에 특히 격화되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성경의 무오설이었다. 성경의 무오설이야말로 근본주의 정통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북장로교 근본주의 지도자였던 프린스톤 대학의 교수 그레셤 메이쳔은 1929년 미국 근본주의신학의 아성이 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으며, 결국은 이를 중심으로 정통장로교회가 성립되었다(1936년).
이처럼 다채롭고 다양한 신학들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예배의 종말론적 차원과 그 사회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예배의식의 부흥이 있었다. 1973년 이러한 사상을 함께 하는 일단의 기독교지도자들은 “시카고선언”을 채택했다. 전 세계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 미합중국내의 교회들이 마침내 콘스탄틴 이후 시대와 에큐메니칼 시대의 도전에 비로소 응답하는 듯 보였다.
6. 지구의 끝으로부터 - 1910년의 에딘버러 세계선교사 총회를 시작으로 교회와 선교사의 관계는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교회의 본질적 성격 및 기타 중요한 신학 문제를 먼저 논의하지 않고 선교작업만을 취급할 수 없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 사역은 항상 세계 각처에 현지인들이 이끄는 성숙한 교회들을 설립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 식민지주의의 종식, 그리고 신생 교회들의 자신감 획득 등에 따라 예기치 못했던 모습을 보였다. 왜냐하면 이들 교회들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적용이 아니라 이에 대한 도전의 양상을 띤 질문과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해방신학의 제안은 단지 해방의 문제에 국한된 신학이 아니라, 기독교신조와 생활전체를 하나님에 의하여,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서구의 언론에서 해방신학은 동서간의 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해석되어, 흔히 “마르크스신학”으로 이해되었다. 과연 이러한 논쟁들과 대결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진전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제3세계에서 출현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신학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보한다 하더라도, 21세기에는 남반구가 북반구를 향해 거대한 선교사역을 펼칠 것이 예상된다. 그리하여 1세기 전만해도 “세계의 끝”이라고 간주되었던 나라들이 이전에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자들의 후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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