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버리의 성 안셀름(이은재 교수)
I.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에게 알려진 바로는 당시 전승되어 오던 기독교 신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자였으며 개별적인 가르침에 관하여 적지 않게 논쟁하였으며 또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되 신앙의 내용을 [오직 이성으로써] 답변하려고 시도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예외적으로 옛 가르침에 문제를 삼아 모든 전통을 뛰어넘어서 자신의 개념과 언어로 표현하려 하였다. 때문에 그는 인용이나 단순한 의역에 머물지 않고 정의, 논증 그리고 증명에까지 [이해함으로 intellectus] 나아갔다.
그의 첫 논문은 오랜 망설임 끝에 베크(Le Bec) 수도원의 동료수도사의 청원에 의해 기술된 것으로 일종의 [성찰]을 나타내준다. 그는 독백(Monologion)의 서문에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해주고 있는데, 첫 장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창조에 관해 필연적으로 믿어야하는 것을 어느 누구나 전적으로 이성으로만 (sola ratione) 대부분을 납득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신앙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그는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르치고 대화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militia Christi)이어야 할 수도원장의 신분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신앙과 이성이라는 양자의 관점에서 그는 모범과 지도를 보이기 위해 열심을 다하였다.
이 사람은 바로 캔터버리의 성 안셀름(St. Anselm in Canterbury)이다. 대략 20년이 지나서 안셀름은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학작품을 기술하였다. "그리스도의 오심 또는 그 분의 인간이 되심이 인류를 구원하는데 필수적인가 하는 것을 이성으로써 고찰하려는" 작업으로 우리에게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었는가?](Cur Deus homo)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쓸 때의 상황은 이전과 달리 수도원의 고요함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이는 그 저작이 캔터버리의 감독으로 출발하였으나, 마감은 망명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직 이성으로만"이라는 계획은 포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열적으로 진취되었다. 자신에게 직권을 제시해주었던 영국 왕과의 논쟁은 조정하기 어려운 인간적이고 교회-정치적인 투쟁으로 마감되었다.
당시의 안셀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행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신앙의 핵심으로 제시하기를 원하였다. "이성의 필연성"을 포함하는 화해의 필연성은 생각의 결과로 論究된 것은 아니나, 생각과 함께 관계하며 요청되어 있어서 구원의 필연성이 영적으로 깊이 약속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책 첫 장에서 확인되고 있는 바,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써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무관심{소홀}이 발생한다면 도데체 올바른 순서란 무엇이겠는가?"(C.D.h.I.1)
신학자로서 안셀름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근거를 뚜렷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가능성] - 안셀름에 따르면 이는 스스로 의무지워진 것이다. - 과 죄로 말미암아 무기력에 빠진 인간의 [불가능성], 하나님의 [불필연성] 또는 [책임/채무없음]과 인간의 [필연성] - 즉, 죄인의 의무인 [배상] - 이 그것이다. "인간이 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완성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반하여 만일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고 인간이 해야만 하는 [배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神-人{ein Gott-Mensch}이 그것을 해야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는가."(C.D.h.II.6)
II. 부르군드 왕국의 서쪽 경계선에 있는 아오스타(Aosta)에서 1033년에 출생한 안셀름은 교황 그레고리 VII세(1073-1085)와 영국 왕 빌헬름 I세(1066-1087)의 동시대인이었다. 아버지는 군둘프(Gundulf)이며 어머니는 에르멘베르가(Ermenberga)로 귀족의 가문이었으나 부유하지는 않았다. 세상적 자산에 대한 염려할 것 없는 교제, 자선 그리고 선행이 그 가정의 기풍이었으나 아버지가 보다 세상적인 삶에의 경향을 보인 반면에 안셀름은 신뢰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보다 경건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안셀름은 일생동안 한편으로는 질서, 책임 그리고 순종을,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 온유 그리고 친밀함을 갖추었는데 이는 어머니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고 23세 되던 해에 아오스타를 영구히 떠났다. 아버지와의 불화는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그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 이미 15세에 결심한 것으로 - 허락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이즈음 그는 지식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점점 영향력을 더해 가는 북유럽 방식에 젊은이들이 관심하고 있었다.
안셀름은 노르만디에 위치한 베네딕트파 수도원 베크에 입문하였으며 수도원장은 저 유명한 랑프랑(Lanfrank)이었다. 랑프랑은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인 영적인 자료에 중세의 7학예로써 주해하고 종합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법과 변증이라는 논리학을 신학하는 데에 부가하였다. 그가 투르의 베렝가르(Berengar)와 벌였던 성찬논쟁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베크 수도원은 [열린] 수도원으로 수도사가 되는 것과 상관없이 젊은이들을 받아들였다. 안셀름 자신은 수도사에의 열정을 갖추고 있었으나 엄격한 수도규칙의(districtio ordinis) - 하루의 일과를 예배와 기도에 전념하는 - 클루니 수도원보다는 랑프랑의 높은 학식과 영적 지도력이 있는 베크 수도원을 선택한 것이었다.
III. 1060년 베크 수도원의 수련사로 시작하여 1063년 랑프랑이 까앵(Caen)의 대 수도원장(Abt)으로 떠나자 그곳의 수도원장(Prior)으로 1079년까지 16년간 봉직하면서 수도원학교를 운영하였다. 그 가운데 마지막 3년 동안 그의 첫 신학적인 작품들이 - Monologion, Proslogion - 완성되었다. 그의 수도원장직에 대하여 몇몇의 시기에 찬 형제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안셀름은 롬12,11과 고전9,22에 따라 형제애를 유지하려는 가운데 영-육간의 고난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랑프랑으로부터 넘겨받은 수도원학교를 운영함에 있어 문법적인 기초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며 성숙[성장]을 위하여 이상적인 像을 내면화하는(spiritualis in se transforment imaginem viri) 연령 단계별 훈련을 강화하였는 바, 이는 안셀름의 가장 큰 걱정(praecipua cura)이었다. 이 연령 단계별 훈련은 교사와 영적 지도자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요청되었으며 소년들에게는 수업시간에 그들의 나이에 맞게 요청되었다.
1079년에 처음 만난 이래로 1093년부터 1106년까지 안셀름의 비서요, 뗄 수 없는 동반자이기도 하였던 에아드머(Eadmer, 그는 "안셀름의 생애"를 기록하였으며 1124년에 사망하였다)는 수도원장 기간에 썼던 안셀름의 여섯 편의 저술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여기에 "Orationes sive Meditationes"(1066-1078), "Monologion", "Proslogion"(1076-1079)이 해당하며 특히 요한복음 14장 6절을 중심으로 하는 세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는데, "De veritate"(진리에 관하여), "De libertate arbitrii"(자유의지에 관하여), "De casu diaboli"(악의 원인에 대하여)등이다.
이후 안셀름은 베크의 대수도원장 헤르루인(Herluin)이 죽고 나자(1079) 루엥의 대주교의 간청에 따라 대수도원장의 직책을 넘겨받았다. 그는 세 명의 프랑스인과 두 명의 영국인으로 구성된 수도원 분원을 세우고 수도원학교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그 자신이 수도승들의 양육, 훈계 및 성숙을 위해 쉬지 않고 전력을 기울였으며 프랑스와 영국의 수업시찰을 위해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원학교의 높은 학식을 위한 갱신에 있어서 교육의 목적을 도덕의 단련에 두었다.
대수도원장에 오르던 1079년 안셀름은 영국을 처음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1070년 이래로 캔터버리의 대주교로 있던 랑프랑을 방문하였다. 두 번째로 영국을 방문한 것은 1092년으로 정복자 윌리엄의 뒤를 이어 윌리엄 II세가 1087년부터 통치하고 있었는데, 안셀름은 수도원을 건립할 계획으로 아브랑쉬의 백작 후고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스승 랑프랑은 이미 1089년에 죽었고 캔터버리의 대주교직은 공석으로 비어있었다. 이때에 중병에 걸린 윌리엄 II세가 글로체스터를 방문하여 안셀름을 대주교로 지명하려 하였다. 이는 1093년 3월의 일이었으나, 안셀름 자신의 주저와 루엥의 대주교 마우리티우스(Mauritius)의 격려로 결국 그는 왕에게 封臣으로서의 충성을 서약한 것이 그해 가을이었다.
마침내 12월 8일 영국의 감독들 앞에서 요크의 대주교 토마스의 집전에 따라 안셀름은 캔터버리의 대주교직에 올랐다. 대주교직에의 과정이 오래 걸렸던 이유는 베크의 수도사들이 안셀름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셀름은 수도사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바램보다는 주님의 뜻에 순종해야 함을 가르침으로써 저들을 설득하였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안셀름의 신학이 실천적인 지평에로 나아가게 하는 주요개념이다. "인간이 순종을 거절하였을 때에 자유를 상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유와 더불어 福마저도 잃어버렸는 바, 우리는 그 결과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1095년 안셀름은 그 자신의 순종으로 인하여 도전을 받게 되었다. 당시 영국 왕 읠리엄 II세는 교황 우르반 II세(Urban, 1088-1099)를 승인하는 절차에서 안셀름의 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요구하였고 안셀름은 마태 22장 21절에 근거하여 교황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이 문제가 되어 논쟁이 있었다. 이 경우 누구에게 어떠한 근거로 순종하여야 하는가? 1097에 다시 한번 교회의 자유와 성직자의 개혁에 관하여 왕과 대질하게 됨으로써 결국 안셀름은 사도행전 5장 29절의 근거 하에 왕에게 로마에로의 여행을 호소하였고 이는 그에게 망명생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셀름은 발두인(Balduin)과 에아드머를 동반하여 클루니와 리용을 거쳐 1098년 4월 로마에 도착하였고 교황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로마의 여름더위를 피해 카제르타(Caserta)에 있는 성 살바토레(Salvatore) 수도원의 원장이요 친구인 요한네스의 수도원농장으로 자리를 옮긴 안셀름은 영국에서 "마음의 압박"(tribulatione) 가운데 시작하였던 위대한 작품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었는가?"(Cur Deus homo. 1094-1098)를 종결지을 수 있었다.
IV. 1094년 교황 우르반 II세에게 보낸 "육신이 되신 말씀에 관한 서한"(Epistula de incarnatione Verbi)에서 이미 안셀름은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었는가?]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면서 유명론자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와 논쟁을 시작하였다. 로스켈리누스(1050-1125)는 콩피에뉴의 참사회원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은 세 본질과 마찬가지로 삼 神으로 이해하게 되거나 아니면 각 인격이 신적인 본질의 세 특성을 가지는 일 神으로 이해하게 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전자를 받아들인다면 삼 신 가운데 다만 하나가 인간이 되었다거나 후자의 경우에는 사벨리우스식으로 전체 신이 인간이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앙론은 하나님 자신이 아들의 인격 안에서만 인간이 되시었다는 것이다. 안셀름은 로스켈리누스의 명제를 변증법의 오용으로 인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론 내에서 하나님의 인간이 되심이 갖는 위치, 즉 어떻게 성육신이 구원론 내에서 필연적으로 생각되어져야만 하는가의 문제에 관심하였다. 그 어떤 인간도 저 神-人없이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이라는 신앙이 이성에 거슬리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불신자들의 항변에 대해 그리고 신자들마저도 어려운 것으로 간주하여 당혹해 하는 것에 대해 안셀름은 성육신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충분하고 정당한 길이었음을 이해시키고 변호하려 하였다. 안셀름에게 있어 하나님의 인간이 되심은 이성에 근거하는 필연적인(rationibus necessariis) 사건이었다.
전체 작품은 안셀름과 그의 제자요 후에 베크의 수도원장이 된 보소(Boso)와의 대화로 이어지고 있다. 안셀름은 "우리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 대해 믿는 바를 하나님 자신이 원하셨다고 고백하게 될 때에 무엇이 당신의 이성에 거슬린다는 말인가?" 라고 물은 후에 "간단히 말하자면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이 낮은 곳으로 낮추시었고 전능하신 분이 무엇인가 많은 수고를 하시었다."라고 대답하였다. 생각하기 어려운 점은 威嚴하신 분이 낮은 자와 만나시었다는 데에 있지 않다. 문제는 그 필연성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인가? 에 달려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었던 그리스도를(빌립보 2장 8절) 설명하는 가운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에 필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또한 요한 6장 38절과 마태 26장 39-42절에 비추어 자원에 의한 것이지 외부로부터의 강요나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간이 되심이라는 이 필연성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이해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의지가 신적인 의지에 순종함으로써 양자에게 만족(satisfactio)이 되고 죄로 인한 징벌의 상황에서 구원에로 인도하게 된다.
만족 또는 징벌은 죄로 인해 유보되었던 하나님의 영광[영예]을 회복시켜 준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에 대해 이 일을 행할 수 있을까? 단지 神-人만이 하나님에 대해 선한 의도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고 구속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은 하나님의 진리를 정당화한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9장 22절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희생은 성육신의 필연성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릴 영원한 福을 나타내 준다.
V. 1098년 10월에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여 성령은 다만 아버지께로만 나온다는 동방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온다는 - 후에 이는 "De processione Spiritus Sancti"(1102) 라는 논문으로 발전하였다 - 입장을 옹호하였으며 1099년 4월에는 평신도 서임권의 금지를 갱신하려는 로마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평신도 서임권의 금지는 1095년 클레어몽트 공의회에서 반포되었었다. 이 공의회 이후 안셀름은 리용과 그 근교에 머물며 설교와 논문에 몰두하였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De conceptu virginali et de originali peccato"(동정녀 탄생과 원죄에 관하여), "인간의 구속에 관한 명상" 등이 있다.
우르반 II세와 윌리엄 II세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이 있었는데, 1099년 7월 29일 교황이 먼저 죽고 일년이 지나 왕도 사냥 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1100년 8월 2일) 안셀름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였으며 윌리엄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헨리 I세의 요청으로 영국으로 되돌아 왔다. 윌리엄의 형제인 새 왕 헨리 I세는(1100-1135) 교회의 상태가 정상화되어야 매우 불안정한 통치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제대로 보았다. 그러므로 안셀름을 귀환하도록 한 것은 교회-정치적인 그의 외교술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르반의 뒤를 이어 계승한 교황 파스칼리스 II세(Paschalis, 1099-1118)와도 다양한 수단과 중개역으로 협상하였는데, 안셀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안셀름은 영국과 로마를 오가며 왕과 교황의 서신을 전달해 주곤 하였는데, 해묵은 문제인 왕을 통한 서임권의 금지와 충성서약의 불변으로 말미암아 두 번째 망명길에 올라 리용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서임권 투쟁의 시작이 되었으며 안셀름은 1103년 12월부터 1106년 9월까지 망명생활을 하였다.
첫 망명과 달리 두 번째 시기에는 영국과 서신왕래를 할 수 있었다. 왕에 대한 교황의 파문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1105년 5월 안셀름은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같은 해에 왕이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중재할 의향을 보인다고 듣게 되었다. 1106년 3월 교황은 왕과 화해하기를 원함으로 안셀름은 영국으로 여행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중병으로 인하여 베크에 머물러 있다가 1106년 8월 15일부터 다음 달까지 영국으로 돌아 왔다.
1107년 8월 1일 웨스터민스터 제국의회에서 안셀름은 왕과 대주교 앞에서 교황과 합의한 사항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감독이나 수도원장을 선출하여 서임권을 발행할 때에 왕은 영적인 표지물인 반지와 지팡이를 대주교에게 위임함으로 수여권은 상실하나 교구에 딸린 세속권은 여전히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러한 결정이 하인리히 VII세가 바랐던 교회의 세속권 유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교회의 직무에 있어 영적이고 세속적인 측면을 분명히 구별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최상의 실제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는가 싶다. 물론 이 규정이 신뢰할만한 共助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셀름은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안셀름에게 진정한 자유와 참된 순종은 동일한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유를 따라 기꺼이 忍苦의 세월을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화해라는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안셀름이 받아들인 화해는 두 권력간의 중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 왕의 충성과 교회의 자유와 평화를 허락하시는 - 이해되었다.
안셀름은 1107/1108년 성직자의 독신에 관한 개혁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De concordia praescientiae praedestinationis et gratiae Dei cum libero arbitrio"(예지된 양심의 예정과 자유의지를 지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를 기술하였다. 1108/1109년에는 요크 대주교의 수장권을 주장하는 토마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1109년 4월 21일 이후로 캔터버리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내가 거저 얻은 바를 기꺼이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주고 싶다."(...quod gratis accepi, gratis volui petentibus impendere, De concordia...III,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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