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단공동체
마틴 브레히트
Ⅰ. 들어가는 말
덴마크-할레의 연합 선교회 활동이 이후의 개신교 선교에 어떤 선교적 충동과 자극을 주었는가는
헤른후트 공동체의 선교활동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할레의 모범을 따르려고 했으며
그러나 곧 독자적인 형태의 선교활동을 발전시킬 정도로 성장하였다.
헤른후트 혹은 형제단공동체(Brueder-Unitaet)에 관해 언급할 때 먼저 두가지 기본적 요소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독창적 추동력을 가진 창시자 그라펜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이며,
다른 하나는 헤른후트에서 시작한 형제단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메렌(maehren) 형제단공동체에 속한자들로서
영어로는 모라비안으로 잘 알려졌으며,
합스부르크의 반종교개혁운동의 발생 이전에 국경을 넘어
독일의 작슨 주로 피난 온 망명 집단이다.
본 연구 내용은 다음의 자료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Hartmut Beck, 많은 백성 중에 형제들. 형제단공동체의 선교활동 250년
(Brueder in vielen Voelkern. 250 Jahre Mission der Bruedergemeine, Erlangen 1981);
진젠도르프의 선교자료의 모음집으로서, 선교를 위한 텍스트 (Texte zur Mission, Hamburg 1979).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는
교회사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경탄할 만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만일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직접 그를 시험해보라.
왜냐하면 진젠도르프는 그 자신이 적지않은 논쟁적 사항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인격과 성장에 대하여 몇 가지 사항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 귀족 출신으로 반종교정책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
진젠도르프는 일찍이 자신이 상류층 사회에 속해 있음을 알았으나
가난한 이웃이나 경건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아주 어린시절에 아버지를 여위었기 때문에
모친이나 숙모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할머니 헨리에테(Henriette)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의 할머니는 경건주의의 선구자들,
즉 스페너(Spener)나 프랑케(Francke)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루터교회 교인이었으면서도 영성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열렬한 신앙심은 그의 손자의 종교적 기초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분명한 것은 진젠도르프의 생의 초기 관계들이 그의 인격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이미 접촉하였던 구세주의 성육신 이해와 고난에 대한 개념은
그의 종교적 사고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하였다.
진젠도르프는 당시에 경건주의 중심이었던 할레에 프랑케가 주도하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본래 그는 비사교적 성격의 아이로 묘사되었지만
거기에서 여러 단체들을 경험하면서 기독교 공동체나 경건한 소그룹 등과 같은 공동체 모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할레에서는 신앙을 부흥시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내용들과,
무엇보다도 동인도 지역에서 오는 선교활동에 관한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의 비유(마13:31)처럼,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후에는 큰 나무가 된 겨자씨의 본성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젠도르프는 할레 선교단체에서 만나 후에
친구가 된 스위스인 프리드리히 봐테빌레(Friedrich von Watteville)와 함께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을 위한 선교활동 계획을 세웠다.
그 자신이 가장 원하는 바는 프랑케처럼 하나님 나라 사역의 메니저가 되는 것이지만
우선 비텐베르크에서 가서 법학을 공부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화해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직 젊은 진젠도르프가 감당하기에 그 일은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그는 일찍이 교파간에 경계를 극복하려는 에큐메니칼적 관심과 의도는
학업을 위해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카톨릭 교회에로까지 확대되었다.
프랑스 여행 중에 한 갤러리를 방문하여 본 한 그림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고통 중에 있는 한 사람,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그림 하단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지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진젠도르프는 예수의 피와 상처에 매우 집중된 경건성 외에
그는 에버스도르프에 있는 장차 그의 부인이 될
에르트무테 도로테아(Erdmuthe Dorothea in Ebersdorf)의 농장에서
필라델피아 교회의 이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진젠도르프로 하여금 기존의 교파적 교회의 경계를 단번에 넘어서게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그가 적어도 에큐메니칼적으로 보이는
마음이 이끌리는 교회형태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나중에 이러한 것은 존 웨슬리에게서도 볼 수 있다.
Ⅱ. 헤른후트(Herrnhut)
독일 드레스덴의 쿠어작슨 시에서 받은 관직은 진젠도르프에게 적합한 것이 아님이 곧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쿠어작슨 시를 떠나 1727년 뵈멘(현 체코)과의 국경도시인오버라우지의 베텔스도르프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그가 어떤 특별한 기독교 경건주의적 공동생활단체를 만들려고 예상했으나
아직 기대한 것과 같은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합스부르그의 반종교개혁정책에 의해 추방된 매렌의 이주 피난민들이
진젠도르프의 소유지에서 자신들의 안식처를 얻게 되었고
그 이후 이주민들이 갑작스럽게 수 백명으로 불어남으로 인하여 피난민 정착촌인 헤른후트가 탄생하였다.
피난민 중에는 짐머만 크리스찬 다비드(1690-1751)와 같은
선교역사에서 매우 인상적인 인물과 니취만 가족의 다양한 구성원들,
그리고 나중에 형제단공동체의 활동을 세계 곳곳에 주목할 정도로 심어놓은
다비드 자이스베르거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스티안 다비드는 오늘날까지 개신교 찬송가에 수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고 있는,
정의의 태양이 우리 시대를 비춘다; 우리 교회에 나타나 세계가 그것을 보는도다라는 가사의 노래를 만들었다.
개신교 국가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나온 경건주의적 분리주의자들도 헤른후트에 왔다.
독창적인 설립과정으로 시작한 이들 공동체 생활은 고유한 특징적 구조들을 형성하며 발전해 갔다:
예를들면, 진젠도르프의 시적 재능이 탁월하게 드러난 찬양시간이나, 애찬식을 겸한 공동생활예배 등이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지속적인 공동생활속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묘지에서 드리는 부활절 아침예배는 그 이후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의식이 되었다.
헤른후트 공동체가 가진 정신적 힘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능력으로
예배와 교인들의 모임을 위해 특별하게 만들어진 건물에서 볼 수 있다.
예식 집례자나 설교자가 청중(교인)과 특별히 가깝게 자리할 수 있도록 설계된 건축양식은
헤른후트 공동체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교회는 가족과 성 별로 구분하여 코어(Choere)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고
거기에 다시 미혼 남녀들에게는 특별한 과제를 부여했다.
미혼 남자들의 소집단 하우스는 특별한 과제를 받은 사람들을 훈련하고 교육시키는 장소가 되었다.
그 외에 개인 구성원들을 집중적으로 돌보는 소그룹 조직(Band)을 구성했다.
이러한 단체들 내에서 공동체 교류와 활동은 헤른후트 전체 조직의 세포와 같은 기본적인 것이었다.
1729년부터 성경이나 찬양 시귀 등으로 짜여진 매일성경읽기 (Losungen)를 출판하였으며
이것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개인적 결단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형제단공동체 뿐만 아니라 경건생활을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의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도록 발전되었다. 필자 역시 집에서 매일 이 책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 책자에서 형제단공동체의 분명한 성격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특징적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소위 그들 자신의 신앙세계 안에서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밖으로 나아가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영혼들을 위해 활동하기를 원했다.
여기에서 개신교 내부에로 확산되며 진젠도르프 시대를 넘어서
후기 각성운동시기까지 알차게 추진된 디아스포라 활동이 탄생되었다.
형제단공동체의 집회에서는 가끔 터어키에서의 선교활동을 보고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모렌란드, 그린란드, 라프란드 등에서의 활동들을 보고하였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활발한 선교의도를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진젠도르프는 선교활동에 함께 참여한
조력자들과 협력하기 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독주하는 스타일이었다.
즉 그는 공동체의 인도자, 아이디어 창출자, 계획자, 주도자로서의 모든 역할을 거의 혼자 수행하였다.
헤른후트 총회보고서를 보면 진젠도르프가 언급한 내용만 거의 독점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공동체의 대표였지만 그보다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다.
종교개혁시대 이후에 유럽에서, 특히 독일 영토 내에서는 다양한 교파 공동체들,
즉 카톨릭, 루터파, 개혁파 교회들이 어렵게 획득한 종교의 자유의 보장은 각각 그들의 영토에서만 인정되었다
(오늘까지도 북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에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매렌지역의 형제단공동체는
종교자유의 정책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보호받지 못했으며 작슨의 합스부르그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재세례파나 혹은 교파를 바꿔 국가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개혁파 교회들로 간주되었다.
1732년부터 1736년까지는 쿠어작센 정부는 당시의 교회의 신조들에 동의하지 않은
진젠도르프나, 루터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정도 인내와 관용을 베풀었다.
루터파 교회 안에서 인정받으려는 진젠도르프의 이전의 노력들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형제단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역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떠나야만 했으며
이들이 받은 큰 타격은 아마도 형제단공동체의 운명을 바꾸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임시로 프랑크프르트 근교의 베터라우에 있는 그라프의 소유지에 새로운 정착지를 발견하였지만
거기에서 특정교파와의 연결관계를 갖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형제단공동체는 피난민으로서 또한 순례공동체로서의 자신의 현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특정장소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모든 교회들보다 진보적(발전된) 위치에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형제단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세계 각국으로 파송되었으며
진젠도르프 자신도 덴마크, 네델란드, 영국, 북아메리카 지역을 방문하였고,
그는 초기 감리교도들을 제외한다면 당시 교회의 어떤 인사보다 많은 여행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리적 확장이나 세계경험의 확대 이상의 것을 뜻하였다.
종교개혁이전의 매렌 형제단공동체에 근거하여 교회분열을 극복하려는 이상이
진젠도르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교파(신조)들은 한 교회지붕아래 있는 서로 다른 교리형태,
즉 서로 다르게 노래 부르는 방식(Tropen)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평신도 신학자인 진젠도르프가 당시의 신조들의 차이가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 한 것이었다.
물론 진젠도르프 자신도 교회분열을 극복할 수 없었다;
형제단공동체는 교회의 일치를 열망했지만 결국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된다.
그렇지만 활동에 있어 항상 교파를 초월하여 일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고유한 종교적 색채를 지녔지만
얼마나 이들이 루터교 전통속에 머물기를 원했는가는 그들의 후기활동에서 나타난다.
Ⅲ. 선교활동의 시작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치가들과 좋은 관계를 통한 호의적인 활동의 기회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가 형제단공동체에게 즉각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진젠도르프는 코펜하겐의 덴마크 궁정의 고위직을 얻기를 희망하였으며
이것을 위해 1731년 왕좌가 바뀔 때 코펜하겐에 머물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흑인 노예와 두 명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에스키모인을 만났다.
진젠도르프는 흑인노예에게서 카리브 지역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들었으며,
이것이 헤른후트 공동체가 선교에 열망을 갖는 계기가 되어
카리브와 그린란드의 덴마크 영 식민지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나의 공동체(교회)가 선교기관의 수행자로서
그것에 희생적으로 전념하며 종사한 것은 근대선교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당시에 식민정부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작은 것이었다;
서양문명을 선전하는 것은 그들의 선교적 위임과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선교활동에서 간접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현지인들의 상황과 전통을 존중함으로 접근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그들의 선교활동에서 칭찬 받을 만한 독특한 점이었다.
이들은 선교에서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민족, 국가, 인종의 차이를 초월하여 평등하게 대하였다.
자이스트에 있는 형제단공동체 건물에는 1747년에 그들이 다양한 민족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 돌아온 약 20여명이 첫 번째 개종자들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이들은 개척선교의 첫 열매로서 이들이 헤른후트 공동체의 선교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었는가는
나중에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A. 성 도마 섬과 카리브지역에서의 선교
1732년 공동체의 첫번째 형제들이 당시 덴마크 영인 카리브 해역의 한 섬으로 파송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재정적으로 적은 후원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목적실현을 위해 노동자로 일하면서 삶을 영위하였다.
선교사들 대부분은 검소하게 살았으며 배고픔으로 위협을 당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상업적 활동이나 직업적 활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카리브 지역에 파송된 사람들은 덴마크 귀족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성 크로익스 섬을 복음화하려는 시도는 많은 인명을 희생하면서 끝을 맺었다.
당시 18명의 형제들이 도착한지 몇 달 이내에 말라리아로 인하여 죽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헤른후트에서는 당연히 의기소침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젠도르프는 낙심하지 않고 찬양하는 시를 작사하였다:
우리의 첫 번째 눈물의 씨로부터 많은 열매가 탄생하네.
우리의 구세주의 은혜가 인근 각처에서 임하네.
뿌려진 많은 씨앗들이 잃어버려진 것 같지만
그러나 그들의 무덤 위에서 싹트고 있네:
이들이 (바로)흑인의 씨앗이네
성 크로익스 섬에서 선교의 시도는 풍토병이나 열대병으로 인한 많은 희생자를 배출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찍 중단해야만 했다.
아프리카에 오래된 한 선교센타에 있는 많은 무덤을 볼 때 충격을 받게 된다.
선교에는 큰 희생이 따랐지만 지속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필요로 했다.
부분적으로 복음화된 식민지 지역에서 성례를 집례하기 위해서
안수 받은 목회자가 필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을 안수하기 위해서 연합공동체에 감독 제도를 다시 수용하였다.
성 도마 섬과 나중에 수리남에서는 선교사들이 노예들을 이용하여 상업행위에 계속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작은 식민농장들을 산 후에 거기에 속한 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어쨌든 1736년 첫번째 세례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이와 함께 교회를 세웠는데 곧 그 교회는 토착민 사역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1738년 한 선교사가 현지 혼혈인 레베카와 결혼하면서 기존의 인종차별의 장벽을 넘어섰다.
이 결혼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정부는 결혼한 부부와 결혼식을 집례한 선교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직후 진젠도르프가 1739년 1월 29일에 토마스 섬을 방문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항의함으로 그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당시에 형제단공동체는 이미 52개 농장에 200여명이 넘었다.
그의 귀국 후에 공동체의 활동은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상업적인 사회적 조건 하에서 선교활동은 당시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일이 더 적절한 해결책이었지만
그들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노예상업활동이 완화되어 가면서
그것이 선교활동의 한 방식으로 간주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카리브지역에서의 선교는 성공적이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관심을 더 끌지 못했다.
매년 수세자의 수는 현저한 증가세를 보였지만
진젠도르프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그들에 대한 교육이 기본적으로 충분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았다.
1754년 형제단공동체는 자마이카의 두 개의 식민농장에서 흑인들을 위해 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 출발은 건물이나, 재산목록과 더욱이 노예(!)까지 주어진 좋은 조건이었다.
선교사들은 물론 감독제도를 수용하였으며 선교는 훈련조직과 연결되었다.
백인들의 상업성에 의존적인 구조에서는 선교는 선교와 상업성이라는 양면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B. 그린란드
카리브에서의 선교활동과 거의 동시에 그린란드에서도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선교의 연결은 역시 덴마크와 이루어졌다.
그린란드에는 이미 루터교 목사인 한스 에게데(Hans Egede)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의 칭의에 대한 강력한 주장은 형제단공동체와의 충돌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칭의를 넘어서 성화를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지한 바와 같이 진젠도르프는 후에 존 웨슬리와 논쟁에서 에게데의 편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루터나 헤른후트 혹은 진젠도르프와 같은 교파나 사람의 이름을
이식하거나 절대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733년 처음으로 세 명의 공동체의 형제들이 여행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크리스티안 다비드(Christian David)가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그들은 이러한 계획을 위해 관청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직면한 첫번째 큰 문제는 경제적 자립이었다.
1736년 첫번째 여인들의 도착과 함께 선교활동이 그린란드에서 정착했다.
그러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유랑하는 에스키모인들 생활속에서의 선교 초기는 매우 힘들었으며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였다.
1739년에 이르러서야 첫번째 수세자가 생겼다. 진젠도르프는 그린란드에서의 선교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어떤 식민지에서도 그렇게 진심으로 만족한 곳은 없었다. 물론 빛나는 지침이 있었다:
이교도 앞에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라.
그는 또한 복음전파를 위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었다:
그린란드의 주민들이 지난 겨울 그들의 친구가 죽은 것을 슬퍼할 때
그 기회를 타서 죄인의 친구인 예수의 죽음을 전하라. 그러나 그가 살아계심을 함께 전해야 한다
나중에 진젠도르프는 그린란드에서의 선교가 예수의 공로를 선포하지 않음으로 인해 비판하였다.
어려운 상황과 내부적 마찰이 있었지만 선교활동은 확고해졌다.
그린란드에서는 선교활동 50주년 되는 해에 헤른후트의 소집단 중심의 조직의 본을 따서 교회를 세웠으며
이어서 두번째, 세번째 선교활동의 근거지들을 개척하였다.
많은 선교사들이 외부 후원이 중단되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혹은 평생동안 그곳에서 사역을 지속하였다.
C. 라브라도르(Labrador)
형제단의 선교는 그린란드로부터 영국정부에 속한 라브라도르로 방향을 바꾸었다.
첫번째 탐사는 1752년 영국의 교역탐사단과 함께 시도되었지만
에스키모인들의 공격으로 많은 희생을 치루며 좌절되었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 형제단의 선교사들이 라브라도르에 겨우 접근할 수 있었다.
나인의 거주지로부터 해안에 활동근거지를 개척하였으며
약 1800년도에 110명의 에스키모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1738년부터 진젠도르프는 모든 이방인 사역자들에게 올바르고 적절한 교육을 주고자 했다:
토마스 섬의 첫번째 전도자들에게 지침: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힘쓰라.
그린란드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에게데 목사와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가를 찾아보라.
무엇이 몇 천마일 떨어져 있는 형제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가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모든 세계 민족에게 가라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지당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성령이 선교의 방식에 대하여 기름을 부으심 후에 발생하는 분쟁을 본다.
진젠도르프는 몇 가지 점들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였다:
예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는 선교를 시작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진 하나의 훌륭한 밀알이 될 수 있다.
그는 몇 가지 유혹들에 대하여 경고하며 지침을 제시하였다:
성직자들과 다투지 말라
추가지침을 보면:
다른 종교와 다투지 말고 그 신도들을 우리에게 인도하지 말라.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교리를 만들지 말라!
이전의 죄들을 멀리하라.
우리는 이 세상 국가 안에서 순례자로 살아감을 망각하고 영원히 정착하려고 한다.
경건하지 않은 이교도들을 대항하지 말고 그들의 악한 것을 보고 격앙하지 말라.
구세주를 따르는 길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라.
주님을 위해 싸우는 주요원리는 불가능 속에서 견디는 것이며 어려운 중에 기다리는 것이다.
탐사 그 자체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말라.
주님을 위해 말씀전파의 사역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주님에게 저항하는 내면적인 욕망을 제압하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에는 참고 견디라.
결론적으로: 미혼 형제들은 경건한 여인들과, 이방인 여인들을 포함하여,
가능한 빨리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함으로 결혼할 것.
여인들을 위한 선교활동은 기혼의 선교사 부인들에게 임무를 맡겼다.
이와 같은 분명한 지침들은 마치 진젠도르프가 남녀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D. 수리남/베비체(Berbice, Guyana)
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들이 성 도마섬과 그린란드에서의 사역을 위해 의존했던
덴마크 선교기관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며
다른 방식의 접촉을 시도한 것을 볼 수 있다.
네델란드 역시 개신교 국가로서 식민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남미 북쪽 지역에 위치한 수리남에 거주하는 유럽 식민정부 관리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 지역을 통과하는데 자유로웠으며 이주 초기에는 그들의 지원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독자적 방식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분명한 약속을 주지 않았다.
또다시 사역의 시작과 이주는 어려워졌으며 결국 사역지의 일부분을 빼앗겼다.
헤른후트 공동체 정착지 주변에 몇 년 동안 유럽인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인디언 지역 안에 교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헤른후트의 방식을 따라 조직되었다;
사랑의 식탁의식, 세족식, 장례식, 그리고 찬양 등을 수용했다.
이 모든 것들이 인디언들의 관습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는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
386명의 수세자들과 많은 신도들을 얻었지만 이 순례적 공동체는 정착하지 못했다.
그 땅에서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고 또한 정치적 상황도 선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1763년 정착촌은 노예폭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다른 장소에서의 사역의 계속적인 시도 역시 어려움을 당했는데,
인디언들이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숲 속으로 탈출한 흑인 노예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정착촌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숲 속에 거주하는 흑인들을 위한 선교활동 역시 지속적인 존립이 불가능했다.
식민농장의 노예들에게 선교사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전체적으로 18세기의 수리남에서의 형제단공동체는 많은 인력소모와 적지않은 희생자를 배출하였으나
그것에 비해 결과(회심자)는 미미하였다.
노예 해방 후 수리남에서 다시 국가교회가 탄생하였으나 혼인관계에 있어
그들의 자유방임적 태도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E. 북미대륙
북미의 영국식민지에서 헤른후트 공동체는 인디언 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백인 이주민들이 도처에서 인디언들을 추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형제단공동체의 계획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아틀란틱 지역을 통과할 때 찬양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용기있게 증거하는 헤른후트 공동체 그룹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1736년 진젠도르프는 인디언 추장 토모 키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서 추장은 자신이 찾고 있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어두움과 미련함 가운데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예수님을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그에게 나아오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축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했다.
진젠도르프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우리를 위한 속죄전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증거 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으며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축복하신다.
왕은 세례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 편지에는 진젠도르프의 인간의 잃어버림을 배경으로 한 그리스도중심의 선교메시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형제들은 전쟁에 복무를 요구하는 좋지 않은 조건으로 인해
첫 번째 정착지인 조지아주로부터 좀더 관용적인 펜실베니아로 이주한다.
그곳에 오늘까지 이들 활동의 중심지로 알려진 베들레헴을 1741년 창건한다.
주변엔 인디언 교회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교회들을 돌보는 은혜처소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계속 머무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인디언들은 통상 프랑스 편에 서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여러 지역의 인디언들을 방문하였으며 때때로 발생하는 어려움들에 개의치 않았다.
인디언을 위한 위대한 선교사는
매렌 출신의 다비드 자이스베르거(David Zeisberger)였다(1808년 사망).
십 여년간 인디언 복음화에 헌신하였다.
1775년 720명의 인디언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역시 그들을 도와 평화로운 정착을 이룰 수 없었다.
진젠도르프가 아메리카로부터 돌아온 후에 1743년 힐쉬베르그의 총회에서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제시한 몇 가지 논의점을 살펴보자.
①증인의 변화와 기도 ②이교도의 현재 삶에서 기도와 찬양 ③어린양
④우리를 위해 당하신 희생 ⑤우리의 곤경 ⑥우리의 속죄
⑦인간 일반과 구분되는 구세주 ⑧이교도에 관한 기도
⑨구주가 세상을 창조하심에 대한 고백
⑩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 … ⑫악한 마음에 대한 토론 ⑬영혼과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⑭부활의 소리에 관하여 … ?
사랑 안에서 욕망이 변화되는 것 … ?성례 ?세례 … ?아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고 속죄하고 거룩하게 하심 … ?
모든 것과 관계하고 항상 그 입술의 고백인 예수의 인격.
진젠도르프의 이론적이며 또한 실제적인 선교 활동들은
이러한 항목들의 열거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설명을 보면;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들을 수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세주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가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진젠도르프의 그리스도중심주의와 그리스도 단성론을
어렵지 않게 비판할 수 있으며 또한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진리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침묵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최고의 깊은 기독교 진리이다.
F. 남아프리카
네델란드와 동인도회사는 캅(Kap) 지역에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메렌 출신으로 몇 년 동안 뵈메의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을 부인했던 헤른후트 일원인 죠지 슈미트는,
진젠도르프에 의해서 격려를 받았는데 진젠도르프는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였으며
그는 특이하게도 혼자 힘으로 캅 지역의 기독교화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개혁교회 목사로부터 반발을 샀다. 슈미트는 캅 지역 밖에 있는 호텐토텐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충돌은 첫번째 세례예식을 거행한 것에서 찾아왔다.
진젠도르프의 편지에 의해 안수 받은 슈미트는 어린양 사도라고 비난을 받았다.
진젠도르프는 그에게 어린양의 씨에 관해 이야기 하라고 조언하였다.
반발이 심한 상황에서 슈미트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암스텔담으로부터 더 이상 허락을 받지 못하자 그는 독일로 돌아왔다.
기네아의 노예해안 지역에서 계속적인 선교활동은
특히 열대조건에서 발생하는 질병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이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이미 교구적 체계를 갖춘 랍펜(Lappen) 지역에서의 선교사역에 대해서는
왜 선교를 포기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북쪽 러시아 지역의 사모예덴(Samojeden)에서는 선교활동이 허락되지 않았다.
발틱해 주변의 레틴과 에스텐의 토착주민들에 대한 선교사역은
이미 존재해 있는 디아스포라 사역으로,
명목상이지만 이미 기독교화된 영역에서 고유한 선교사역을 진행하고 있었고
교회와 접촉하고 있는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교회에 적응해 감으로 인해 디아스포라 사역의 독특한 많은 것을 상실했다.
헤른후트 공동체는 러시아를 넘어서 페르샤나 발칸반도 유역의 발라카이(Walachei)와 같은
아시아 민족에게로 선교적 지평을 확장해 갔다.
그러나 이 두 지역에서는 효과적인 열매를 얻지 못했으며
다만 볼가강 유역의 칼뮈켄(Kalmuecken)에서 임시적인 의료선교 활동이 있었다.
덴마크-할레선교회가 인도의 트란크베바(Tranquebar)에서 선교사역을 행한 것 같이
덴마크 정부의 후원으로 헤른후트 형제들은 도시의 관문으로서
형제들의 정원 이라 불리우는 도시주변 인근지역에 위치한 이주민 정착촌이나
수마트라 근처에 있는 니코바렌 섬과 같이 선교거점을 확보하기 어려운 곳에서 선교활동을 시도하였다.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음에도 사역은 실제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십 수년이 지난 1795년에 이르러 비로서 전망이 보이지 않는 시도를 중단했다.
형제단공동체의 선교는 이미 진젠도르프 생존시 약 3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18세기 이르러 선교사, 선교지, 수세자와 교인의 숫자에 있어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활동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는 확장을 경험하였다.
선교지 방문은 선교의 적절한 방법으로 단지 교리감독이나 교회생활의 조정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동역자의 자격(적합성)과 관련하여 그들의 과제와 협력사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여러 다양한 선교지역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배치하고
교회적으로 상호연결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활동지평을 확대시키고자 했다.
진젠도르프를 중심으로 한 형제단공동체 선교의 지도체제는 때때로 전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공동체의 활동을 위한 재정은 풍족하지 못해 선교사들이 대부분 스스로 자신의 수입원을 만들어야 했다.
이들은 궁핍이나 질병, 혹은 여행 중 우발사고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인원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공동체는 사역중에 겪는 이와 같은 어려움으로 인해 당황하지 않았다.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복된 것과 순종해야 할 것과 존중해야 할 것이 무엇가를 인식하고 바르게 접근하고자 노력하였다.
선교계획이 일시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외부적 요인이나 인력 형편으로 인해 좌절될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시도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좌절이 초래하는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사역에 충실한 것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진젠도르프의 후계자 스팡엔베르그(August Gottlieb Spangenberg) 는
그의 저서 이교도들에 대한 개신교 형제들의 사역에 관하여
(Von der Arbeit der evangelischen Brueder unter den Heiden, 1782)에서
형제들이 기적이나 특별한 영적능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사랑으로 활동했음을 지적한바 있다.
다양한 집단과 기구들의 조직을 통한 사역의 구조화는 개인적 돌봄의 차원만이 아니라
목표지향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진젠도르프의 일반적인 선교이론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18세기 이후에 헤른후트 공동체의 선교 발전에 대한 한 가지 주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19세기에 달성한 노예해방은 헤른후트와도 역시 관계가 있다.
이들은 정부의 관리에 대하여 순종을 법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해방운동을 주도하거나 백인사회에서 분리된 감리교도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토착민들과 필요한 학교체제를 함께 운영하였으며
점차적으로 토착교회 구성원들은 발언권리를 얻었고
또한 선교사역에서 토착민 설교자들이 활동하게 했다.
더 이상의 노예들이 나오지 않게 되자 교회가 부분적으로 축소되었다.
네델란드영인 수리남에서의 노예해방은 지체된 과정을 거친 후에 1863년 비로서 실현되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 노예에 대한 선교사역을 통해서 잘 준비되었다.
흑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위한 책임에 동참함으로 사역에 통합되었다.
토착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였다. 파라마리보에서는 전형적 민족교회(국가교회) 형태가 나타났는데
약 1900년 이후에야 비로서 자립할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 서부와 동부에서의 선교는 19세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의 정치사회적 변혁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린란드에서 선교는 일시적이지만 거의 모두가 성례전에 참여하는 매우 진전된 기독교화에 도달하였다.
1900년 헤른후트의 그린란드선교는 덴마크 선교회에 이양되었다.
새로운 선교개척지가 호주(1849년 이래)와 티벳(1853년) 그리고 알라스카(1885)년에 탄생하였으며
켈리포니아의 인디언(1890)지역과 니카라구아(1849)에서 선교활동이 장기간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밖에 동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에 속한 니사지역(1891)과 운얌베지(1897)지역이 있다.
형제단공동체의 선교의지와 활동은 이렇게 중단 없이 진행되었다.
많은 영토에서 선교사역은 에큐메니칼 정신과 협력관계형태로 수행되었다.
한편 그들의 사역을 회상할 때 그들의 보수주의와 자기중심주의로 인해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물론 시대의 징표를 언제나 바르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참된 것과 새로운 도전을 목표로 추구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형제단공동체 선교의 업적과 그들의 큰 희생 앞에 존경을 보내야 한다.
Ⅳ. 진젠도르프의 선교신학
형제단공동체의 선교역사를 제외한다면 진젠도르프의 선교에 대한 생각은 전적으로 교훈적이면서
때때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선교학자였다.
진젠도르프의 설교에서 우리는 원론적인 그의 선교신학을 엿볼 수 있다.
1740년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두 가지 잘못된 방법이 있다.
1) 그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만 너무 많이 전하고
그 중심에 놓인 어린양과 그의 속죄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 것.
2)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먼저 아버지에 관하여 말하고 그 아들을 두 번째 언급하는 것.
이러한 방식은 그들에게
어린양의 상처에 관한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이방인에게
먼저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그의 피를 흘리신 것을 전하여
그들이 그의 죽으심과 상처를 믿게 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진젠도르프에게 중요한 것은
어렵게 전달되어지는 삼위일체교리가 아니라
구세주가 창조주와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고난이 그의 신학의 출발점이다.
총회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이방인에 대한 설교에 관해서는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진다.
가장 좋은 것은 그들에게 처음에 구세주의 신성에 관하여 설교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다만 예수의 공로와 죽음을 말하고
구세주를 예수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그의 이름 속에는 이미 특별한 것이 들어 있다.
그의 기적적이며 신적능력을 말해야 하며 (그것이)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세계를 창조하심을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이며,
그가 이방인들에게 아들의 신성을 마음속에 전하는 것을
성령께 위임하였다는 본질적인 것을 함께 말해야 한다.
이방인들에게 예수와 그의 십자가와 죽으심을 마음에 진실되게 전하여
그들이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었을 때 다음의 사실을 말하라:
너희는 예수님이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라…. 구세주는 전 세계의 창조자이시다(!)….
만일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어린양의 상처를 믿는다면
아버지와 성령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성이 더 이상 방해(간섭)하지 못한다.
진젠도르프는 복음전도과정에서 이러한 우선순위를 정함으로
어떤 경우에도 예수를 소홀히 여기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신적존재에 대한 모든 인간적 표현은 구세주에게 속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사이의 신성의 깊이를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
진젠도르프는 이러한 삼위일체적 주제에 대해 어떤 흥미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중심주의야 말로 그에게 유일하고 올바른 선교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적인 이방인 교리문답의 구상을 제시하였다.
그에게는 이방인들이 모든 인류의 살아계신 하나님,
특별히 그의 신도들에게 구세주를 우선적이며 독자적으로 알게 하고
그 후에 그를 통해서 아버지와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그의 신적 어머니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중시했다.
진젠도르프는 그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하여 특징적으로 성령을 어머니로 이해하였다.
교리문답에 따르면 창조자는 구속자이며 그로부터 정의되어진다.
구속자는 악마에게 떨어진 인간을 그로부터 얻는다. 거기에서 구속자와의 사랑의 연결이 이루어진다.
1742년 필라델피아에서 행한 밭에 자란 잡초에 대한 비유(마태 13:24-30)의 설교에서
진젠도르프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 끝을 맺는다:
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은 전 세계보다 큰 밭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표현할 수 없는 씨앗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좋은 씨를 심으며 당신의 최후의 심판 때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오 당신의 신령한 불꽃의 씨를, 당신의 피의 불꽃을 필라델피아에 심으소서.
이 땅에 떨어진 당신의 땀방울이 영원한 생명으로 결실하게 하소서.
아멘!
이것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진젠도르프가
그에게 중심이 되는 피와 고통의 신학이 이 기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3주 후에 진젠도르프는 같은 장소에서 3번째 고난의 고지(눅18:31-43)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예수의 고난에 관한 설교를 중단하고 도덕적 설교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십자가설교는 비밀한 지혜였다.
필수적인 사랑은 그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며,
어린아이 같은 굴복이며, 죄 없으신 예수의 피와 흠이 없는 어린양을 통해서
복 받은 자의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젠도르프는 이교도들에 대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의 몇몇 사람들이 우리의 선교사역을
형식적인 이교도 개종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 않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우려하며 막을 수 있는 것을 막고자 한다.
사람들이 효과를 의심한다면 우리는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일할 수 없다.
거기에서 많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사역지에서 드러난 결과로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회심한 이교도들을 보여주겠다.
진젠도르프는 선교의 시작이나 사역을 위한 지원에 있어서 정부나 또는 다른 어떤 기관에도 의존하지 않았다.
또한 피상적으로 남을 광범위한 지역의 선교를 의도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국가, 지역, 섬들을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며
우리 자신 또한 선택 받은 것 같이 우리도 이방인으로부터,
적어도 소위 기독교인들과 관계를 가진 이방인들을 첫 열매로 얻기를 희망한다.
진젠도르프는 위대한 선교적 정복으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방법에 관하여 우리는 태양이 그 빛을 발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이 선교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태양이 그의 힘으로 떠오르듯 우리가 태양의 본성에 머문다면 우리는 그 힘을 저항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진젠도르프가 선교에 있어서
식민지화 나 혹은 교파적 교회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교파혼합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에 그가 살았던 교파 교회들의 문제점이나 상황에 대해서 정통하고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뉘엔베르그(루터교)나 암스텔담(개혁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속한 각각 다른 전통들에 의미를 부여했다.
만일 어린양의 피가 흐른다면 그 모든 차이들은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승천일 다음날은 선교의 날이었으며 진젠도르프는 이미 감동받은 주제에 관하여 계속 언급하였다.
그는 각 국가로부터 첫번째 회심자를 얻게 되면 그곳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 것을 분명한 원칙으로 세웠으나
실제로는 그것이 지켜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방인 지역에 교회설립을 서두르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수 천명에 이르렀지만
동행하는 제자들이 70명을 넘는 적이 드물었으며 대부분 12명의 제자들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젠도르프는 당시의 미국의 각성운동운동에 수천명의 청중들이 모이는 것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들은 무리들로서 (주님을 따름은) 듣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세주는 오늘의 위대한 감리교도 자신보다 더 위대한 설교가 이시다.
그는 다수의 청중을 교회로 모이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가와 세계 각 지역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사탄의 유혹이 끝이 날 때 비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젠도르프는 세례를 서두르지 않았으며 모임의 작은 수에 만족하고자 했다.
그로 인해 헤른후트 선교사들은 그들의 활동의 성공에 대해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항상 적은 수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설립된 교회나 공동체의 독립이나 자립은 계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했다
1747년 헤른후트의 그리스도의 흔적에 관한 연도(Wundenlitanei)에 대해
진젠도르프의 32편의 설교에서 선교가 다시 언급되었다.
예수와 같이 그의 교회의 구성원들은 순례자들이다.
전 세계는 어린양의 기업으로 반환되어지며 그러므로 사탄에게 이와 같은 요구가 선포되어진다.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부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메시지는 계속 증거 되어야 한다.
진젠도르프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메시지를 성취하는 메시지의 중재의 기적을 알고 있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희망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회심이다.
유대인과 합리적 무신론자의 회심에 대한 논증은 토마에게서와 같이 예수의 고난이다.
구세주는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나타나야 했다.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지만 그것에 관하여 증언하거나 감동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구세주가 우리의 시대에 불신자들이나, 유대인과 이방인 같은, 적대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자신의 말씀과 교회에로 이끈 것 같은 방법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제공이다.
진젠도르프의 선교신학적 착상들은 항상 음미 할만하며,
그 자신 보다 다른 결론들에 도달하게 한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이 강조된 것과 그것을 선교행위로 전환한 것은 의심할 바(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A. 추가로 주목할 것
우리는 지금까지 16세기부터 18세기 까지 독일 개신교의 세 주요 전통에서 선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들의 업적과 장점들이 인지되어야 하며 또한 약한 부분과 부족한 점들에 대하여 침묵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그의 시대에 유일한 선교적 시도가 아님은 확실하다.
또 다른 선교활동이 네델란드와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리교도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독일에서 시작한 선교의 장점은 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권력의 후광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이 모든 선교현장을 지배하였던
식민지 권력층이나 상류계층인사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18세기에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르고
19세기에 선교회의 폭넓은 활동의 기반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점으로 남아있다.
독일어 영역에 있어서 하나의 참조사항을 덧붙이고자 한다.
B. 바젤 선교회의 전망
독일 교회의 딸로서 1815년 스위스 바젤에 개신교 선교회가 창설되었다.
선교 열정의 불꽃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할레 선교회로부터 전해진 선교소식이 창설배경이 되었다.
바젤 선교회는 독일어권에서 헤른후트 선교 이후에 두 번째 설립된 선교회이다.
이 선교회는 여러 도시의 후원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큰 연합기관형태로 발전하였다.
각성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선교는 독일-스위스의 지역적 경계만이 아니라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교파적 경계선도 초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루터교 지역에서 독자적인 선교회를 원했기 때문에 후원 단체들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젤 선교회는 국가나 교파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우선권을 두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적 특성을 견지할 수 있었다.
1914년 5개국의 73개의 주요지역에 45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2,096명의 현지 동역자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그들은 72,000명의 그리스도인과 865개의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56,000여명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바젤 선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선교활동기관을 통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0년 108명의 협력자들이 여러 다양한 교회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선 바젤 선교는 영국 식민지에서 영국 선교회와 협력하였고 후에 독일 식민지에서 활동하였다.
사역은 엄격하며 중앙조직 중심의 기구와 선교학교를 통해서 유지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잡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널의 출판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바젤 선교의 정신은 이미 1815년 주님의 이름으로
새롭게 설립된 선교기구(Mission-Anstalt)의 표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19세기 마지막 20년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을 거치면서
주님이 한편 그의 심판을 통해서, 다른 한편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축복을 보여주셨는가를 본다면,
만일 우리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눈에 가려지지 않고 남아있는 흔적에서
전 세계 위에 불고 있는 성령의 바람을 느낀다면,
만일 우리가 시들어 버린 신체의 각 부분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깨닫는다면,
누가 여기에서 주님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건을 위해,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 새 길을 여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는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중심에 그 입술을 통해서
보다 가깝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자(전달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감사와 경탄의 마음으로 이방인의 개종을 목표로 하는 선교기관이
얼마나 많은 축복의 결실을 맺었는가를 보았다;
우리가 아직도 세계 곳곳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혀 전할 수 없는
5억의 이방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절박한 현실에 비하여 현재 주님의 포도원에 일하고 있는 선교사의 숫자가
500명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방인의 전도자를 교육하기 위한 세미나가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이 중요한 사업에 모두 손을 잡고 참여하도록,
우리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그들의 구원을 재촉하며 이 중요한 사역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결단케 하는 것,
그것은 또한 그들을 향한 우리의 노력을 지지하도록 그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긴밀한 영적교제를 갖는 원근각처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이 중요한 사건에 활발하게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하여 그의 형제자매의 행복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선교적 외침의 열기는 오늘도 듣는 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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