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감리교회역사

류성련 2014. 11. 20. 22:43

감리교회역사

 

 

 



감리교회 웨슬리는 18세기가 시작되는 초엽 1703년에 태어나서 18세기가 끝날 무렵 1791년에 소천하였다. 거의 한 세기를 장수한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이었다. 그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는 성공회 사제였고, 증조부 바돌로매오 웨슬리 (Bartholomew Wesley)와 할아버지 존 웨슬리(John Wesley: 감리교창시자 존 웨슬리와 이름이 같음)도 청교도 목사였다. 그러니까 웨슬리는 4대째 목사가 된셈이다. 외할아버지 사무엘 아네슬리(Samuel Annesley)도 청교도 목사였다.

1703년 6월 17일 존 웨슬리가 사무엘과 수잔나의 19자녀중 15째로 출생하였다.(9명의 자녀들은 일찍 사망하고 10명의 자녀만 성장하였는데 7자매들은 불행한 생을 살았고, 형 사무엘2세와 동생 찰스와 존의 삼 형제만 사회적 교회적 기여를 하였다.

1720년 6월 24일 장학생으로(40파운드) 옥스포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Oxford University Christ Church)에 들어갔다. 고전문학, 라틴시, 희랍어신약성서, 희브리어구약성서, 신학서적 탐구하였다.(신학교가 따로 없었음)

1725년 9월 19일 집사사제(준회원) 안수를 포터(Potter)감독으로 부터 받았다. 존이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er)의 저서를 통해 완전성화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여태까지는 1738년 5월의 올더스게이트가(Aldersgate Street) 사건이 존 웨슬리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1725년은 그저 잠간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웨슬리는 생애 후기에 옥스포드에 있을 때인 1725년부터 그의 신앙과 개인적 헌신을 심화시켜 준 몇 가지 영향력들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자신이 1725년에는 '종의' 믿음을 가졌던 반면, 1738년 후에는 '아들의' 믿음을 가졌다고 직접 쓰기도 하였다. 그는 매일 5시에 기상하고, 여섯 시간 일하고, 내적 성결을 위해 기도하고, 1-2시간 종교적 명상을 갖고, 매주 수요일 금식하고, 대화를 개혁하고, 독서에 심취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훈련하였다. 또한 1728년 경 말 윌리엄 로우의 [크리스쳔 완전]과 [엄숙한 부르심]을 만나면서 경건하고 신비적인 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셀리 커크햄과 헤어진 후 1725년 4월부터 매일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는 매시간 종을 친다. 종을 칠 때마다 시편을 찬양하고 명상기도를 하였다. 하루에 몇 번을 잊어버리고 몇 번을 기억하고 기도하였는지를 점검하였다. 매일 매일의 삶이 영적으로 몇 점짜리의 삶인지를 반성한 것이다.

1726년 존이 3월 17일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칼리지(Lincoln College)의 교수로 선발되었다.(Fellow).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윌리암 로(William Law) 등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성화와 완전사상에 영향받아 경건한 삶을 추구하고, 주일은 신학공부, 월요일과 화요일은 고전공부, 수요일은 논리학 공부, 목요일은 어학공부, 금요일은 형이상학과 물리학공부, 토요일은 수사학과 시문학 설교와 편지 쓰기로 정함.

1729년 옥스퍼드대학생 동생 찰스가 '신성 클럽'(Holy Club)을 창립하였고, 1728년 9월 28일 존이 영국성공회 정회원 사제로(elder) 안수받은 후(엡웟 교외에서 2년간 목회한 후), 11월에 존이 옥스포드로 돌아와서 신성 클럽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성클럽(Holy Club)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옥스포드 대학생 단체를 결성한 사람은 존이 아니라 찰스였고, 따라서 최초의 감리교도라는 자격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찰스이다. 1729년 5월5일 편지에서 찰스는 최초의 감리교도를 윌리암 몰간(William Morgan), 로버트 커크햄(Robert Kirkham),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등 세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신성클럽에서 그들은 신약성서를 희랍어 원본으로 열심히 읽었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하였으며, 주 1회 교도소를 방문하여 죄수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성경을 가르쳐 주었다.

1735년 사무엘 웨슬리가 죽었고, 웨슬리 형제가 조지아로 해외선교를 떠나게 되었는데, 존의 나이는 32세였다. 1735년에 존은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군(軍)과 자선사업계 양쪽에서 흔치 않은 방식으로 성공적 경력을 쌓아온 놀라운 인물이었다. 1732년 미국에 조지아(Georgia) 식민지를 창설하였다. 아버지 사무엘은 이미 오글도르프와 서신을 통해서 접촉하고 있었다. 그 장군은 식민지에 목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리고서 두 형제에게 접근하였다. 그들은 그를 따라가기로 동의하였는데, 존은 식민지 이주민들의 목사로, 찰스는 그의 개인비서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

1738년 2월 1일 존이 영국에 돌아왔다. 찰스와 함께 그들의 영적 지도자 모라비안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만나서 영적인 상담을 자주하게 되었다. 뵐러는 존과 찰스를 루터의 신앙의인화의 신학에 근거하여 상담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1738년 5월 1일 피터 뵐러와 웨슬리가 함께 페터레인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조직하였다.

1738년 5월 21일 챨스가 회심을 체험하였다. 형보다 먼저 회심을 체험하였으므로 형을 더욱 영적으로 갈망하게 만들었다. 1738년 5월 24일 존의 회심이 일어났다. 그는 가기 싫은 올더스게이트 모라비안모임에 갔다가 윌리암 홀랜드(William Holland)란 청년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많은 목회자들이 로마서 강해 서문이라고 하는데 로마서 강해에는 서문이 없고 루터가 희랍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로마서에 서문을 달았다)을 듣는 가운데 이상하게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리스도만을 신뢰함으로써 죄에서 해방되는 확신과 함께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동시에 체험하였다.

1738년 9월 존이 모라비안교도의 센터 독일 헤른후트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많은 것을 배우고 특히 소규모 영성훈련 조직을 통하여 속회와 밴드 등의 영성훈련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모라비안의 정숙주의(quietism) 혹은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의 경향에 실망을 느껴서 결국 모라비안과 함께 시작한 페터레인신도회의 분열을 가져 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739년 4월 1일 존이 브리스톨에서 산상수훈강해로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최초의 감리교 모임이 브리스톨에서 모이기 시작하여 5월 9일 감리교운동의 최초의 센터인 새회당(New Room)을 브리스톨(Bristol)에서 지었다. 1738-39년에 니콜라스가(Nicholas Street)와 볼드윈가(Baldwin Street)에서 시작된 조모임(band)을 이 새회당에서 바활성화시켰고, 1741년에 이르러 조모임을 더욱 강화하였다. 1739년 7월 킹스우드스쿨(Kingswood School)을 시작하였다. 읽고, 쓰고, 배우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철저히 영성을 훈련하는 학교를 만들었다. 킹스우드학교는 어머니 수잔나에게서 배운 철저한 청교도식 교육방법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중산층이 아니고 성공회교인이 아니면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시킬 수 없었다. 웨슬리는 과감하게 민중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학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감리교회목회자를 키우는 중요한 학교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1739년 12월 런던신도회(London Methodist Society)를 조지 휫필드(Jeorge Whitefield)와 함께 시작하였다. 그러나 칼빈적인 이중예정론의 입장을 강조한 휘필드를 날카롭게 비판함으로 결국 나뉘어 지게 되었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란 설교를 통하여 예정된 자들만을 위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for all) 모든 사람들 안에서(in all)나타나는 속죄의 은총임을 강조하였다.

1740년 4월 런던의 씨티 로드(City Road)에서 파운데리신도회(Foundery Society)를 조직하였다. 연합신도회(The United Society)도 파운데리에서 시작하였다. 1740년 7월 18일 모라비안교도들과 함께 시작한 페터레인신도회(Fetter Lane Society)가 신학적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1742년 선장 포이(Captain Foy)의 제안에 따라 새 회당의 빚을 갚기 위해 속회(class)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화훈련을 목적하여 감리교회를 성장시키게 된 중요한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6월 6일 아버지 사무엘의 교회를 방문하였으나 설교를 영국성공회가 허락하지 않자 예배당 밖에 있는 아버지 무덤 위에서 설교하였다. 7월 30일 어머니 수잔나가 사망하였다.

1744년 6월 25일 첫 번째 감리교 연회가 모였다. 첫 연회의 주 목적은 평신도 설교가들로 하여금 감리교회신학과 교리를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려는 데 있었다. 1745년 최초의 평신도설교가 맥스필드(Thomas Maxfield)와 세닠(John Cennick)을 비롯하여 평신도설교가(lay preacher)를 50명 세웠다. 평신도설교가들을 세운 이유는 영국성공회로부터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 안수를 베풀지 안고 평신도들을 설교가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감리교회운동에 참여한 영국성공회에서 안수받은 성직자들은 불과 6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평신도 설교가들을 세웠다.

1766년 1월 31일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을 출판하였다. 이 저서는 그의 완전성화론을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정리한 논문이다. 여러 번 수정하여 이해에 완전히 완성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1777년 런던 씨티로드에 '웨슬리예배당'(Wesley's Chapel)을 봉헌하였다. 이것이 세계감리교회 어머니교회(Mother Church of World Methodists)가 되었다. 그 이유는 최초로 세워진 '새회당'이 칼빈주의적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t)의 소유가 되었다가 최근에 감리교회가 매입하였으므로, '웨슬리예배당'이 세계감리교회의 어머니 교회의 명목을 이어 오게 되었다. .

1784년이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중요한 해였다. 2월 28일 감리교회 독립 조직 선언문을 작성하였다(Deed of Declaration). 9월 1-2일 미국 선교를 위한 성직안수를 베풀었다. 이미 영국성공회에서 사제안수를 받은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도 미국선교를 위한 감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임명하기 위한 안수를 존 웨슬리 자신이 베풀었는데 이것이 사실상의 감독안수가 되었다. 웨슬리는 콕이외에 와트코트(Whatcoat)와 베이지(Vasey)에게도 목사안수를 베풀었다. 12월 24일 웨슬리에 의해 감리사로 파송된 토마스 콕이 크리스마스연회를 개최하고 프란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에게 준회원 안수, 정회원 안수와 함께 제3일에는 감리사로 안수함(내용상의 감독)으로 미국감리교회가 조직되었다. 감독이라고 부른 것은 에즈베리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웨슬리는 에즈베리를 교만하게 생각하였으나, 나중에는 미국의 현실을 수용하였다. 웨슬리의 기도서 개정판 인쇄하여 미국감리교회의 예배를 위해 보냈다. 웨슬리의 이후의 감리교회를 책임질 일백명의 대표를 웨슬리자신이 임명한 "법적 대표 백명(The Legal Hundred"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국감리교회는 감독을 선출하지 아니하고 이 백중을 대표하는 회장을 선출하는 회장제를 선택한 것이다.

1787년 1월 8-12일 런던의 빈민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299파운드를 모금하기도 하였다. 1788년 3월 29일 평소에 지병이 많았던 챨스 웨슬 리가 형보다 먼저 죽었다. 1790년 7월 30일 존이 정치가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에게 흑인 노예해방을 위한 서신을 보냈다. 1791년 2월 1일 미국 감리교도들에게 최후의 편지를 보냈고, 2월 22일 최후의 설교와 편지를 썼다. 2월 24일 윌버포스에게 노예해방을 위해 계속 정진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쓸만큼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흑인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3월 2일 존 웨슬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여, 3월 9일 런던의 씨티로드의 웨슬리예배당 뒷뜰에 묻혔다. 당 89세(만 87세 8개월)을 장수하였다. 그의 키는 160CM, 몸무게 55kG였고, 50년을 말을 타고 다니며 마상전도를 하였으며, 40만킬로 이상 전도여행을 하였고, 4만 2천회 설교하였으며, 2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웨슬리는 그의 생의 가장 마지막에 그의 아버지 사무엘같은 내적 증거의 영적 고백을 두 번이나 외치고 죽었다: "내 생의 모든 것 중의 최선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존의 영적 내적 확증의 신앙은 물론 사도 바울의 롬8장에서도 영향받았고, 모라비안으로부터 마음의 종교(religion of heart) 의 영향도 받았지만 아버지 사무엘의 영향도 강하게 받은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성령이 나의 영으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는 영적, 신비적, 내적 확증의 은혜를 웨슬리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헨리 아펜젤러가 한국감리교회역사를 시작하였다. 아펜렐러역시 웨슬리, 에즈베리에게서 나타난 복음주의 신앙, 의인화와 거듭남과 성화의 영성을 강조하는 신학을 갖고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웨슬리적 경건주의의 교회를 형성하였다. 새벽기도회, 속회 및 구역예배, 부흥회, 철야기도회 등 뜨거운 마음의 종교로써의 한국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