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박종천 교수 / 감신대 조직신학
1)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이 말씀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목마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음에도,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과 안식을 구하기 일쑤다. 이처럼 인간이 무언가를 숭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영혼과 무관하게 어딘가에 홀로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묻는 것은 잘못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왜 어리석은 자인가?
그것은 자신의 마음의 진실한 상태를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면서 그를 반대하고 핍박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다만 우리 영혼의 깊이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이나 무의식의 일부일 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기 어렵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현대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이 세계 너머 어딘가에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상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음악과 시를 즐기는 것을 보면, 결국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의 질서를 믿는 것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왜냐하면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나 그렇지 않은 존재이거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작용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늘, 땅, 땅 아래, 창조 세계의 전 영역을 통해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유지하심으로 그것들이 원초적인 무(無)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며 지으신 모든 것을 매 순간 감찰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영향을 미치시지만, 결코 이성적인 피조물들의 자유를 침해하시지는 않는다.”(웨슬리전집 IV, 42∼43)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존재하심을 ‘무소부재’라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에 대하여 웨슬리는 하나님을 세상 밖에서 군림하는 우주적인 독재자의 이미지보다는,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속적인 과정과 사건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보여주시는 은혜로운 아버지의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다. ‘광대한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가 내 영혼의 자비로운 아버지’라는 고백은 존 웨슬리의 찬송에도 잘 드러나 있다.
“우주의 주님, 나의 주님이신 아버지, 주님의 영광이 얼마나 광활하게 비치는지요.
선하신 주님이 만물을 지켜 주심은 온 세상이 하나의 영혼인 것처럼 하시네.
하지만 내 모든 머리카락 하나 하나 세시기를 나 하나만 돌보아 주시는 것처럼 하시네.”
2) 살아 계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활동하는 실재시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를 살았고 문학적 장르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지녔다. 물론 그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원망으로 가득 차서 고뇌하고 절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실’(real)하다는 것만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성경에 근거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찬탄과 감격, 찬양과 경배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시 104:24)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시 150:1)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다.”(시 138:2)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본 뒤에 가지게 되는 영혼의 울림과 떨림 없이, 하나님에 대해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산 신학이 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인격적으로 그리면서도,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이나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초월을 굳건하게 지닌다. 이러한 성경의 증언에 근거하여 종교 강령 1조, 교리적 선언 1조, 신앙고백 1조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다 같이 주장한다.
“영생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 한 분만 계시니 그는 영원 무궁하시고 무형무상하시며 권능과 지혜와 인자하심이 한이 없으시(다).”(종교 강령 1조)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교리적 선언 1조) /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며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신앙고백 1조)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 신앙의 독특성을 가리켜 유일신론(monotheism)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유일신론을 ‘하나님이 수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경적 유일신론 외에 다양한 형태의 유일신론이 있는데, 우선 그리스신화의 제우스, 단군신화의 하느님, 그리고 고대 중국의 상제는 ‘신화적 유일신론’의 산물이다. 신화적 유일신론에서 최고신은 우주와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땅 위의 하위 신들의 활동이 최고신의 실질적인 공백을 채워 준다. 또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와 다양한 신비주의는 ‘신비적 유일신론’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브라만, 공(空) 또는 법신, 일자 등은 우주 안의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며 되돌아갈 바탕이다.
성경적 유일신론은 신화적 유일신론과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은 땅 위의 하위 신들, 곧 우상들과의 공존을 거부한다고 보며, 하나님은 구체적인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이 점에서 절대자를 비인격적이고 신비적인 원리로 간주하는 신비적 유일신론과도 차이가 있다.
3) 현대 사회와 하나님의 문제 :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17세기 이후 현대 과학이 등장하면서부터 성경적 유일신론은 과학적 합리주의에 강한 도전을 받았다.
인간의 이성으로 우주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성을 모든 가치와 의미의 유일한 척도로 삼게 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 중에는 과학적 합리주의 세계관을 옹호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와 같은 동아시아의 종교를 흠모한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이성을 절대자로 삼는 계몽주의자들의 신이해를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고 하는데, 웨슬리는 이신론을 가리켜 ‘실제적 무신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간의 과학 기술 진보가 극에 달한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계몽주의자들의 이신론과 아시아의 신비주의를 혼합한 이른바 ‘뉴 에이지’(new age) 영성이 유일신 신앙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다. 뉴 에이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절대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의 궁극적 원리며, 인간이 그 원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터득함으로 우주와 일체를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새로 등장하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우주나 자연과 일치시키는 ‘범신론’(pantheism)과 ‘범재신론’(panentheism)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현대 과학이 성립하게 된 데는 성경적 하나님 신앙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주가 질서 정연한 법칙에 의해 운행된다는 신념은 창조주 신앙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현대 과학의 정신적 기초는 놓일 수 없었다. 그런데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하나님 신앙이 인간 이성으로 대체되고,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화와 우상 숭배가 생기면서 그것은 다시 무신론으로 치달았다.
하나님 신앙은 인간 이성의 창조적 상상력과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과학이 태동할 때 그것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 신앙을 반(反) 과학적인 초자연주의 유신론으로 바꾸어 버렸다. 초자연주의 유신론에 따르면, 최고 존재이신 하나님은 다른 모든 존재들로부터 분리된 존재인 동시에 그들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그것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다.
하지만 영원하고 무한한 초자연 세계를 시간적이고 유한한 자연 세계와 나란히 두는 초자연주의 유신론은 현대 과학에 의해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초자연적인 신이 자연 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근대 무신론이 등장하였고, 나아가 정신의 영역을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유물론을 불러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자연주의적 유신론, 곧 ‘범신론’이다.
범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주나 우주의 본질 혹은 우주 안의 특별한 힘과 같다. 범신론자인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 즉 신’(deus sive natura)이란, 하나님이 자연 또는 사물의 총체성과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포괄하는 자연의 창조적 근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범신론의 문제는 자연과 하나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부정하고,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우주라는 용어로 대체되면서 하나님의 의미를 피상적이게 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진화론적·생태학적 세계관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실재로 믿지 않으며, 하나님이 자연과 우주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초월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주와 세계 내에서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른바 ‘범재신론’(panentheism)이 등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범신론과 범재신론을 혼동한다. 사실 양자는 혼동될 만큼 그 의미가 까다롭다. 범신론과 달리, 범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세계에 참여하시고 세계와 상호 관계를 맺으신다고 주장한다. 현대 신학에서 범재신론으로 분류될 수 있는 신학으로는 생태학적 신학과 과정 신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의 신학들은 모두 초자연주의 유신론과 자연주의적 범신론의 양 극단을 넘어서려는 대안 찾기라 할 수 있다.
성경적 유일신론과 교부들의 신학, 그리고 감리교회의 교리와 전통과 모순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범재신론을 수용하는 것은 삼위일체론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우주 안에 임재하시는 영이시다. 전자가 하나님의 절대 초월자의 측면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로서 세계 안에 내재하는 측면이다. 본격적인 삼위일체론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이해한 다음에 가능하다.
다만 하나님 이해에서 다룰 수 있는 삼위일체의 문제는 초월과 내재와 관련한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 첫머리에서 고백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이 풀 수 없는 것이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세계,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고백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은혜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추상적 절대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우리 사이의 교제를 추구하고 만드시는 아버지시다.
세계 창조는 하나님 자신과 진실로 구별되는 실재를 조성하심으로 타자와 함께, 타자를 위하여, 타자 안에서 존재하실 것을 결단하신 은혜의 사건이다.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아낌없이 주시며, 인간과 함께 파멸의 신음 소리를 내는 세상의 피조물 안에 자비롭게 임재하시어 치유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성령을 파송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시면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어떤 다른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주시고 당신의 외아들을 주심으로 모든 것을 주신다(롬 8:32).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받는 자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하나님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타자다. 하나님과 타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협곡 위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다리를 놓으신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를 위해 스스로를 던지신 바로 그 다리, ‘험한 세상의 유일한 다리’(the bridge over the troubled water)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창조주(성부), 화해주(성자), 구속주(성령)로 활동하시고 사랑하시고 자신을 내어 주시고 교제하시면서 세상과의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신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초월, 곧 하나님의 높으심과 주권, 엄위하심과 거룩하심, 영광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의 초월 곧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이 그 자유를 우리와의 교제와 신실한 관계를 위해 사용하심으로 참으로 자유하시고 초월하심을 보여 주신다.
무제한한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교제를 위해 -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 자신을 제한하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진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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