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박종천 교수 교실2

새로운 에큐메니칼 신학의 방향- 박종천(감신대)

류성련 2014. 12. 22. 13:43

출처:http://www.mts.ac.kr/~iti/

21세기 에큐메니칼 신학과 한국교회 2000년 11월 27일
감신대 부설 토착화신학연구소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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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연
새로운 에큐메니칼 신학의 방향

박 종 천 (감신대)





들어가는 말:

최근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는 1998년 제8차 하라레 총회를 계기로 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조심스럽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들이라 할 지라도 폭넓은 '에큐메니칼 포럼(ecumenical forum)'에 동참할 수 있는 새로운 마당을 열자는 것이다. 기존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구별되는 이 포럼은 가톨릭과 오순절 및 복음주의 교회들이 제한없이 동참한다는 데 의의가 있는 미래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그리하여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의 만남이라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의 제3의 길이 예측되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그것을 대변하는 신학이 이구동성으로 21세기 신학의 프론티어로 생각하는 영역은 세가지가 있다. 이 세 영역은 하나같이 보수와 진보가 팽팽하게 대결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인 콘라드 라이저의 관점을 필자식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21세기 에큐메니칼 신학이 당면한 도전과 신학적 과제는 첫째, 세계화 문제와 시민사회운동의 신학; 둘째, 종교다원주의의 등장과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신학; 셋째, 생태계의 위기와 생명중심적 성령신학이다.
본 강연은 21세기 새로운 에큐메니칼 신학의 방향을 이상에서 언급한 세가지 도전과 신학적 과제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1. 세계화의 문제와 시민사회운동의 신학

지난 세기 말부터 경제, 금융, 그리고 통신 분야에서 급격히 진행되어 왔던 인류 사회의 세계화는 현대적인 의미의 바벨탑 쌓기이다. 왜냐하면 세계화는 민족의 경계, 국가의 주권 그리고 생태계의 지속가능성 등을 무시하는 지구적 재정, 금융 체제를 통해 무제한하게 인간의 권력과 탐욕을 추구함으로 종당에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에큐메니칼 비전은 이러한 바벨탑 쌓기로서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에큐메니칼 공동체(oikoumene), 즉 생명의 상호 관계(또는 相生)를 위한 공간으로서의 '하느님의 한 집안'(God's household)을 회복하는 데 놓여 있다. 주지하듯이 탈규제화, 자유화, 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 강령에 의거해 금융자본의 자유로은 이동을 보장해 줌으로써 20 대 80의 사회, 즉 20%의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80%의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로 양극화되는 사회를 바르게 비판하고 극복할 대안이 필요하다.
최근에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의 ?향이 교회들 간의 '공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에서 부터 다양한 시민운동 단체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보다 광범위한 운동인 이른바 '에큐메니칼 포럼'(ecumenical forum)의 형성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민 사회'(civil society)의 가치와 의미와 힘을 재발견한 것과 맞물려 있다. 시민 사회란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한 서구사회에서 부터 성립한 것으로 권력의 창출에 근거한 국가와 이윤의 증대를 목적하는 경제의 영역과 구분되는 제3의 영역이다. 서구 산업 사회에서 국가와 경제의 영역에 의해 교육, 문화, 예술, 종교 등의 '생활 세계'(Lebenswelt)가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이를 하버마스는 권력과 돈이 지배하는 '체계'(System)가 생활 세계를 식민지화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서구 후기 산업사회에 있어서 평화, 여성, 환경과 연관된 다양한 시민운동의 출현은 체계에 대한 생활 세계의 견제와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시하여 교회와 종교의 영역이 후기 산업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중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종교 역시도 산업사회의 세속화 과정에서 사적인 문제로 전락한 것인가? 아니면 종교는 자기 쇄신의 과정을 거쳐 또다시 '공공 영역'(public sphere)에서 자신의 담론과 실천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는가? 지난 세기에 시작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는 세계 교회가 참된 교회적 삶을 인간의 전 삶의 영역으로 진입시키려 했던 과정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는 대체로 종족과 계급을 구분하는 방식에 의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자본주의적 민족 국가가 발호할 때는 민족주의와 계급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십수세기 동안 국가의 권력 구조를 따라 조직화되었고, 20세기에 들어가서는 기업의 경영 방식으로 조직화되던 구시대적 발상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시민 사회의 운동과의 연대 속에서 열린 교회로 거듭나는 길일 것이다. 권력과 돈을 추구하는 목적 합리성의 지배를 받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과 구분되는 시민 사회의 영역은 의사 소통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대안적 삶의 의미와 대안적 공동체의 윤리적 연대성을 추구한다. 통제의 위계질서적인 구조나, 정치적 경제적 힘을 수립하고 축적하기 위한 경쟁 체제는 생동하는 인간 관계의 망인 시민들의 생활 세계의 활성화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직의 참여적, 탈중심적 형태로 변혁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민 사회 운동과의 비판적인 연대를 통해 교회는 세계화의 반대 급부인 지역 공동체의 해체 현상에 대한 대안으로서 지속가능한 인간 공동체의 재건을 에큐메니칼 선교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최근에 이러한 에큐메니칼 선교의 대표적 사례가 영국 성공회의 민간사회단체인 '크리스탄 에이드(Chrisitian Aid)'의 '희년 2000 운동(The Jubilee 2000)'이다. 이 운동은 지금도 전세계 인구 가운데 13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루에 1,000원도 안되는 생활비로 연명하고 있고, 지금도 매 초마다 하나의 새 생명이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더미 상황 가운데 태어나고 있다는 데서 착안했다. 이 운동에 따르면 오늘날 가난한 나라들의 외채 문제는 우리 시대의 노예제라고 한다. 19세기에 노예제 폐지는 신앙 양심에 어긋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실효가 더 이상 없다고 판정되었을 때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판 희년의 실현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희년이나 19세기 노예제 폐지운동이나 오늘날의 외채탕감운동은 모두 기득권층과 연루되었으나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하는 삶을 선택한 시민, 지식인, 종교인들의 운동이며, 생명가치와 경제가치의 상생을 위한 운동이다.
더나아가서 교회는 시민 사회의 다양다기한 운동들 간의 이해 관계의 대립을 중재하고 시민 운동가들이 권력과 돈의 세력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정화시킬 수 있는 영적, 윤리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시민 사회 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말고, 시민 사회 운동이 알게 모르게 빠질 수 있는 문화, 인종, 종족의 배타성을 초월할 수 있는 하느님의 한 집안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세계화의 질곡 속에서 시민 사회와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성립하는 신학을 상생(相生)의 신학으로 이름 붙이기로 하자. 여기서 상생은 상극(相剋)과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것은 참된 공동체가 차이(difference)와 연대성(solidarity)의 변증법에 기초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시 말해서 남과 연대하여 상호 관계 속에 산다는 것 곧 상생은 나의 자유, 힘, 필요와 안정을 제한하는 타자를 인정한다는 것 즉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성과 상극을 전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상생의 비전에 제공하는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는 여성신학자들이 비판하듯이 가부장적인 부자관계를 옹호한 것으로 해석되어선 안된다. 역설적으로 삼위일체 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가부장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상의 가부장적 권력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을 주종 관계로서가 아니라 친근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이해했고, 또한 그것을 자신이 독점하지 않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하는 열려진 관계로 여겼다. 동방 정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상호 관계를 '페리호레시스'(perichoresis)라 부를 수 있다. 페리호레시스란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상생을 말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느님과 만물 간의 상생을 포괄하는 것이다.
미국의 감리교 경제신학자 믹스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적 페리호레시스를 웨슬리의 '만인을 위하여 만인 안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 for and in all)'의 원리에 의해 재해석했다: '페리호레시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지속적인 주고 받음을 가리킨다. ... 각각의 위격은 다른 위격들에게 그들 고유한 사역이며 동시에 그들 모두의 공동의 사역인 것을 위해 적절한 것을 준다.' 18세기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넒은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의 승리에 기여한 개신교 윤리를 제공함으로써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감리교 운동은 영국의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으며, 두세대 동안 감리교인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어라,'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라,' '할 수 있는 한 많이 주어라'는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경제윤리를 실천하려 했다. 그러나 가난했던 감리교인들이 부유해지면서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저축은 하게 되었지만 남을 위해 주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부유해진 감리교인들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감리교 부흥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세가지 경제원리 중에서 앞의 두가지만 지키고 세번째를 위반할 경우 아무 것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두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의 가치마저 상품교환의 수단으로 삼는 오늘날의 시장사회에 있어서 웨슬리의 '값없이 베푸는 원리(the rules of gift-giving)'는 조롱거리가 되지만,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참으로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바른 책임적 응답이다. 이러한 상생을 위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의 삶이 상호 관계적 과정이라는 것을 말해 주며, 이는 권력과 탐욕에 대한 인간의 추구를 스스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탐욕과 권력의 과대한 집중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기 전에, 인간의 최대한도의 욕망 충족은 민중과 생태계의 최소한도의 기본적인 필요를 보장함을 전제하여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와 자연과의 상호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의 삶은 오직 권력과 탐욕에 대한 의도적인 자기 제한에 기초할 때 지속 가능하다.
시민 사회의 신학으로서 상생의 신학은 시민들이 공공의 영역에 동참하려 할 때 단순히 하버마스가 지적한 대로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담론의 능력만을 가지고서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종교적, 윤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점에서 최근 인도의 시민 사회의 신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도의 '지바다라'(jeevadhara)라는 기독교 신학 잡지로 대변되는 시민 사회의 신학 운동에 따르면 자아와 사회의 수준에서 타자성, 자기 희생, 자아의 확장, 집단의 복지에 대한 헌신, 그리고 비판과 창조의 능력은 근대 서구적 합리성이나 심지어 하버마스가 말하는 의사 소통적 이성에 의해서도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삶의 영성화'(a spiritualization of life)를 필요로 한다. 인도의 시민 사회 신학자들은 시민 사회의 쇄신과 활성화를 위해서는 그것의 담지자요 창시자요 변혁자인 '예언자적 순교자들'(prophetic martyrs)을 요청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의 사랑에 불타는 자기 희생과 권력의 논리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이는 시민 사회의 프로젝트는 성립할 수 없을 뿐더러, 진리와 사회적 자율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시민 사회 운동의 정당성은 지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의 시민 사회 신학은 인도 사회처럼 시민 사회의 역사가 일천하고 비서구 다종교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시민 사회의 신학으로서의 상생의 신학의 건설을 위한 좋은 대화 상대자가 될 것이다.
또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급속한 근대화 과정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과 동시에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범람으로 몰려들어오는 포스트모더니즘 문명의 혼란을 겹으로 겪고 있다. 이점에서 한국 사회는 원컨 원치 않건간에 후기 현대사회의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하겠다.


2. 에큐메니칼 운동의 공의회적 과정과 21세기 시민사회의 '생활/생명정치 신학(theology of life politics)'

21세기를 향한 에큐메니칼 비젼은 '오이쿠메네(oikoumene)', 즉 '하느님의 한 집안(God's household)'이라는 성서적 이미지에 대한 심사숙고로부터 출현한다. 지금까지 오이쿠메네라는 말은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the inhabited human world)'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생태계의 위기의 시대에 있어서 오이쿠메네는 모든 생명체들이 거주하는 한 집안으로 해석되고 있다. 오이쿠메네의 희랍어 어원인 '오이코스(oikos)'는 집 또는 집안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이쿠메네는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동거하는 하느님의 한 집안인 것이다. 따라서 에큐메니즘에 대한 인간중심적, 역사중심적 이해를 넘어 온 생명은 상호의존적이며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느님의 영의 능력에 의해 유지된다는 생명중심적 이해가 등장했다.
오이쿠메네는 온 생명을 위한, 그리고 온 생명 안에서 작용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으로서 '오이코노미아(oikonomia)'와 결부된다. 온 생명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하느님의 한 집안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에큐메니칼 신학이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동방교회 삼위일체론의 전통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 교회에서 오이쿠메네의 비젼은 구체적으로 '공의회적(conciliar)' 삶의 형태를 지역 교회로부터 보다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실현하려 했다. 물론 공의회적 과정은 제국의 오이쿠메네에 의해 변질되기도 했으나, 여전히 로마 제국에 의해 대변되는 세계화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의 형태였다. 공의회적 과정은 교회를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성안에 있는 공동체 또는 '코이노니아(koinonia)'로 규정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삶의 공의회적 형태의 실천으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대 문화의 세계화의 파괴적 효과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응 세력일 수 있다. 특히 1970년대에 주로 정교회의 영향으로 재발견된 공의회적 삶의 형태는 그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해 왔던 대의 민주주의와 국제 협력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개신교의 이념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와 공동체 해체의 문제를 극복할 수 해결할 길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에큐메니칼 운동선상에서 이러한 전망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해 주었던 것이 'JPIC 과정(정의 평화 창조보전 운동)'이었다.
원래 JPIC 운동은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핵무기 반대 평화 운동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교회가 사회운동으로부터 자극받아, 점증하는 세계화의 위험에 대처하려는 과정으로서 JPIC운동은 평화 문제만이 아니라 아파타이드와 같은 인종 문제 등 정의의 문제와 더나아가서 생태계 보전의 문제에 대한 공의회적 대처 방식이었던 것이다. 뱅쿠버 총회에서 가시화된 JPIC의 공의회적 모델은 미국 시민사회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느님 앞에서 상호간의 언약 체결'의 모델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러나 1990년 JPIC 서울 대회를 통해서도 밝혀졌듯이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시작된 운동을 교회의 제도적 결정 과정으로 진입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토론안으로 시민사회의 관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공의회적 과정을 둘러 싸고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콘라드 라이저에 의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시민사회라는 개념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예리하게 해 주는 비판적 분석의 도구이지 결코 이상화하고 낭만화하는 용도로 쓰여서는 안된다. JPIC 공의회적 과정은 시민사회와 정치 경제적 구조 사이의 경계선상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의 관념의 비판적 사용은 필요하다. 공의회적 과정과 결부된 고백과 저항은 영적 행위만이 아니라 공적으로 효과적이기를 모색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공의회적 과정안에는 정치의 논리와 시민사회의 논리 사이의 변증법이 작용한다. JPIC를 위한 공의회 과정은 지구적 정치 경제 체제의 파괴적 세력의 정당성을 비판하고 자기 파괴의 위기를 직면한 세계를 보존하기 위하여 저항과 고백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JPIC 과정은 단순히 지구적 정치 경제 체제를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내부에 생동하는 관계성을 회복하려는 적극적 목표를 가진다. 이점에서 최근 에큐메니칼 신학이 '생명 신학(theology of life)'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생명 또는 삶과 문화는 시민사회의 개념으로 가장 적절하게 분석할 수 있는 체험의 영역이다. 교회의 영역에서 시민사회의 과정이 취할 수 있는 형태가 공의회적 과정이라면, 총체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보다 광범위한 제도적 구조내에서 시민사회의 차원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상호성, 연대성, 대화와 갈등의 비폭력적 해결을 위한 능력을 강화하고 나눔의 과정을 보강함으로써 '공의회성(conciliarity)'의 기초 형태로 시급히 돌아가야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 의식을 변화시킴으로 체계 수준에서 변혁에 기여하는 것이다. '메타노이아(metanoia)'의 에큐메니칼 의미는 도덕적 결정의 순간적 행위가 아니라 학습의 과정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JPIC를 위한 공의회적 과정에서 에큐메니칼 생명/생활 신학의 역할은 앤소니 기든스가 말하는 '해방정치(politics of emancipation)'와 '생활/생명정치(politics of life)'의 관계성을 상기시킨다. 단적으로 말해서 해방정치가 삶의 기회에 관한 정치라면, 생활정치는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정치이다. 해방정치는 착취, 불평등, 억압을 축소하거나 제거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해방정치는 정의, 평등, 참여라는 명령을 일차적인 것으로 한다. 해방정치가 관심하는 억압의 문제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삶의 기회를 제한하기 위해 사용하는 차별적 권력의 문제이다. 해방정치는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극복하는 것에 관심하기 때문에 그 주된 지향은 '향하여'가 아니라 '벗어나'이다. 해방정치에서 행동 조직 원리는 자율성이다. 생활정치는 해방을 전제로 한다. 생활정치의 쟁점들은 해방된 사회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하므로, 도덕적 실존적 문제가 다시 의제로 나타난다. 따라서 생활정치는 개인적 집단적 수준에서 사회활동의 실존적 변수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성찰적으로 조직되는 질서 즉 후기 현대 체계에 관한 정치이다. 따라서 그것은 성찰적으로 질서지워진 환경에서의 자아실현의 정치이며, 이러한 환경에서 성찰성은 자아와 신체를 지구적 규모의 체계들과 연결시킨다. 생활정치에서 권력은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다. 집단적 투쟁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의 수준에서도 도덕적 실존적 문제가 적극적으로 부활하여 공적 논쟁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생활정치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페미니즘과 생태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여성운동의 초기 단계는 사회활동 영역에서 남성과 평등한 수준의 참여를 위한 해방적 관심이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마침내 남성과 평등한 기초 위에서 남성 지배적인 사회 부문들로 들어가면서, 남성 영역들으 모습을 심층적으로 바꾸어 놓을 가치와 태도를 야기하게 되었다. 특히 여성의 해방은 사회의 공격성 정도에 영향을 미쳐 자연 환경에 대한 기존의 태도를 바꾸도록 도전하게 되었다. 여성은 이전에 남성에 의해 보다 폭력적인 방식에 종속되어 있던 생활 무대 속으로 양육적 가치를 구현해 넣는 데 기여할 지 모른다는 기대를 낳게 되었다.
여성운동만이 아니라 JPIC 과정에서도 해방정치와 생활정치를 연결시켜야 할 필요성이 점증해왔다. 세계의 빈국의 해방과정은 선진국에서 근본적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격차는 지구적 산업화를 통해 축소되기는커녕 지구 생태를 더 크게 파괴할 뿐 아니라, 세계 인구가 제1세계 사회의 생활방식과 비견되는 생활방식을 채택하는 데 필요한 자원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3세계의 해방은 제1세계의 생활정치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1990 JPIC 서울대회는 에큐메니칼 생명신학의 10대 확언을 제시했다:
1. 모든 권력의 사용은 하느님 앞에 책임적이어야 한다.
2. 하느님은 가난한 자들을 편드신다.
3. 모든 인종과 민족은 평등한 가치를 가진다.
4. 남성과 여성은 모두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5. 진리는 자유한 사람들의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6.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믿는다.
7.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8. 지구는 주님의 것이다.
9. 젊은 세대의 존엄성과 헌신을 믿는다.
10. 인권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이상의 JPIC 10대 확언은 폭력, 기아, 빈곤과 환경 파괴와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지속가능한 문화(a sustainable culture)'의 기초 조건들로서 에큐메니칼 생명/생활신학안으로 수렴되어져야 한다. 지속가능한 문화의 창조를 위해서 에큐메니칼 생명/생활신학은 근대 문화를 지배하던 가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넘어서, 탐욕과 경쟁보다 관계성안의 존재의 가치를 더 평가하는 생활방식을 계발해야 한다.
에큐메니칼 생명/생활신학에 근거한 지속가능한 문화의 창조는 시민사회와의 연관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공동체의 공의회적 과정이다. 공의회적 과정은 교회로 하여금 세계화의 세력에 반대하여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보편성을 확언하도록 돕는다. 공의회적 과정은 문화와 지역 상황의 고유하고 영속적인 차이를 인식하고 배타주의와 분파주의의 주장을 저항하기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3.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과 종교 신학의 과제

20세기가 이념 대결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상이한 종교에 바탕을 둔 문명 충돌의 시대라는 것은 이론이기에 앞서 이미 현실로 입증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톤의 지론이며 이는 초 강대국 미국의 세계 지배를 지속하기 위한 전략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서구 문명권은 21세기에 이슬람 아랍 문명권과 연대하는 유교 중화 문명권에 의해 강력한 도전을 받을 것이기에, 이러한 문명 충돌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팅톤의 예측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차치하더라도, 세계화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에 대한 응답으로 지역의 집단적 정체성을 수호하는 특정한 문화적, 종족적, 종교적 전통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역간의 신속한 이동과 이주를 가능하게 한 세계화로 말미암아 여러 사회에서 그 사회를 결집시키는 기초를 위협하는 문화적, 종족적, 종교적 다원성의 상황이 초래되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반동 현상이 얽혀 있다. 소수 민족의 권리나 자결권을 위한 투쟁의 양상이나 민족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의 부상은 갈등의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신학이 직면한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가 문명이나 종교의 충돌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시대로 진입하는 것인가 아니면 타 신앙 전통을 가진 이웃들 간에 바람직한 인간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하여 개방적이고 지속적인 대화로 특징지워지는 시대로 진입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문명간의 충돌과 상극의 시대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문명간의 화합과 상생의 시대로 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문명간의 상극과 상생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지구상의 여러 타 종교 신앙의 공동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특수한 자리를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이 문제가 더 복잡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전통 종교의 부흥은 기독교로 하여금 종교의 공적인 기능과 종교 다원성에 대한 응답에 대해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헌팅톤처럼 문명이나 종교간의 충돌을 강조하는 냉혹한 정치 현실주의의 극단 못지 않게 문명이나 종교간의 낙관적인 화합을 역설하는 일부 서구 신학자들의 종교 신학의 관념적 이상주의라는 극단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종교간 갈등의 현실이 엄연한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서구의 종교신학은 이를 못본 척하고 마치 여러 종교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하느님에게로 이르는 다양한 길이며 이들 사이에는 갈등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 이러한 종교신학의 입장을 이른바 '신중심적 다원주의'(theocentric pluralism)라고 한다. 그런데 신중심적 다원주의는 종교적 고백상의 차이는 단지 사적인 문제이고 공적인 관심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는 근대 서구 시민 사회의 진보적인 세속주의가 가진 종교에 대한 편견을 벗어날 길이 없다. 문명간의 갈등이 종교간의 갈등이고 종교간의 갈등은 결국 각 종교의 '진리 주장'(truth claim)간의 갈등이므로, 이러한 갈등을 외면하고 진리 주장의 상대성에 빠지는 서구 세속주의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려운 서구의 종교 신학은 올바른 에큐메니칼 종교 신학이라 할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 주장과 맞물려 있는 기독교의 선교와 복음 전도가 타종교와의 대화와 해방이라는 공동 주제를 포괄할 수 있을 때 올바른 에큐메니칼 종교 신학으로서 상생의 신학이 성립할 수 있다. 만일에 기독교의 진리 주장에 대한 선험적인 확신을 가지고 타종교인들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서구 제국주의의 상극적 세계관과 답합하는 것이 된다. 만일에 고통당하는 이웃을 해방하기 위하여 타종교인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선교와 복음 전도의 사명을 대체하려 한다면 서구 종교 신학의 피상적인 다원주의의 우를 반복하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종교 신학자인 피에리스에 의하면 참된 에큐메니칼 종교 신학은 종교간의 상극으로 까지 나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진리 주장에 근거한 종교적인 헌신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열정은 포기되어선 안된다. 또한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종교 다원주의를 맞아서 종교간의 '대화의 당위성'(dialogical imperative) 역시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한스 큉의 말대로 오늘날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도 없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참된 에큐메니칼 종교 신학을 비서구 세계의 가난과 종교성과 연관하여 자리매김하려는 피에리스의 시도는 문명 충돌론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문명간의 화합과 상생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피에리스의 종교 신학이 인도의 시민 사회의 신학과 연관될 수만 있다면 깊이있는 신학적 성찰에 근거하여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간의 연대와 실천을 모색할 수 있는 귀중한 대안이 될 것이다.
인도 신학자 아마라도스에 따르면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마저 희생시키려는 세계화 시대의 '물질주의적 소비주의'(materialistic consumerism)에 바르게 대항하려면, 지역과 세계의 공동체의 삶을 인도하는 인간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위해 시민들이 일어서야 한다. 아마라도스는 시민 사회에서 종교간의 대화야말로 물질주의적 소비주의라는 세계적 대적에게 맞서기 위해 지역과 세계의 공동체를 네트워킹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본다. 이점은 세계화의 과정에 대해 바람직한 에큐메니칼 대안 공동체 건설을 주장하는 라이저의 입장과 상통한다. 라이저에 따르면 초대 기독교 교회가 놓여 있었던 시대의 로마 제국은 여러가지 점에서 당대의 세계화 과정을 반영했다. 박해받는 소수자로서 초대 교회는 이러한 권력의 세계화 과정에 대하여 민족적, 문화적, 정치적 경계를 초월하는 개체 교회 공동체들간의 네트워크를 수립함으로 응답하였다. 세계화의 도전에 대한 초대 에큐메니칼 응답을 다시 참고함으로 21세기 적절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 사회에서 종교의 기능을 이해해야 할 것이고,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사는 다양한 종교인들이 어떻게 공공 질서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평화와 인간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가 시민 사회의 운동의 일환으로만 국한될 경우, 문명의 갈등과 상극을 넘어 화합과 상생을 지향하는 새 문명의 창조로 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민 사회 안에서 종교인들은 함께 시민 운동을 창출하고 동참하면서도 종교간의 대화를 지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피에리스는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 불교와 기독교의 상생을 위한 대화를 양자간의 차이와 갈등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에큐메니칼 종교 신학자이다. 피에리스는 동양과 서양을 지정학적, 문명권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 영혼의 환원할 수 없는 두가지 언어 또는 종교 상징으로 생각한다. 동양 문명은 불교의 구원론적 '지혜'(gnosis)로 서양 문명은 기독교의 구속의 '사랑'(agape)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혜와 사랑은 종교 체험의 양극이며, 참된 영성은 지혜적 초탈함과 사랑의 참여라는 양극을 변증법적인 긴장 안에서 유지한다. 동양 문명과 종교의 지혜적 초탈함은 세상을 도피하려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소비주의처럼 즉물적인 현재에 대한 근시안적인 집착을 교정할 수 있는 대안이다. 하느님의 나라처럼 동양은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있으며, 서양 역시 그러하다. 자신 안에서 동양을 발견한 서양의 수도사 머튼은 서구인들이 갈망하는 명상이란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부터 벗어나는 신비한 삶이 아니라, 공동체와 정치로부터도 도피하지 않는 '초점과 질의 삶'(a life of focus and quality)이라고 했다. 서구화된 인도의 시민 사회 신학자 아난타 쿠마르 기리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이 언어 구사의 능력만을 높이 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위한 침묵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은 점을 비판한다. 물론 권력의 담론 또는 담론의 권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은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민 사회는 말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듣는 공간이기도 하며, 담론만이 아니라 심오한 침묵으로 부터 나오는 삶에 대한 통찰을 나누는 공간인 것이다. 이미 인도의 시민 사회의 신학은 동양 문명의 근저를 이루는 지혜적 영성의 힘을 알아차린 것이다. 머튼이라는 서구 수도사 안의 동양이 서양의 사랑의 영성을 온전하게 하고, 아난타 쿠마르 기리라는 인도의 시민 사회 신학자 안의 서양이 동양의 지혜의 영성으로 온전해 지는 이치야말로,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앞에서 문명 충돌을 넘어 문명 화합을 지향하는 에큐메니칼 종교신학으로서의 상생 신학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4. 종교다원적 시민사회와 에큐메니칼 기독교의 토착화 과제

오늘날 종교다원적 시민사회에 기독교 공동체와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은 당위적인 것이다. 오직 시민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적극적인 회담자(active interlocutor)'가 되려면 기독교는 토착화되고 외부의 비판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人民(people)과 민족의 주체성이 표현되는 영역이며, 인민이 인민다워지는 영역이고, 공론이 형성되는 영역이다. 시민사회에서 우리는 견해와 인식의 다원성을 직면하게 된다. 교회의 봉사가 인민을 목적으로 하고 효과적으로 봉사하기 원한다면, 교회는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진입해야 한다. 시민사회로의 진입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시대의 징조(signs of the times)'만이 아니라 '장소의 징조(signs of the place)' 곧 시민사회의 삶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문화적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의 영향하에서 식민지적 기독교는 종교다원적 시민사회를 향하여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에만 익숙해왔다. 그러나 장소의 징조에 개방적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경청하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공공의 영역에서 공감적인 경청자가 됨으로써 교회는 사회의 생각, 이해관계, 관심의 다양한 흐름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힌두교인들이 다수를 점하는 인도 사회에서 기독교가 달리트와 소수 부족 등 사회의 저변 계층의 해방을 위해 선교할 경우 시민사회의 중개가 없이는 기독교로의 개종과 숫적 팽창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공격의 대상이 된다. 공개적인 장소로 '나오는 것(coming out)'과 공공적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시민사회의 중개를 촉발할 수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선결 조건은 기독교의 토착화이다. 종교다원적 시민사회에의 참여의 선결조건으로서 토착화란 기독교 공동체가 지역과 국가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방식, 에토스, 사회적 행위 등에 있어서 다른 시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토착화는 주로 기독교의 예배에 토착문화적 요소를 수용하는 것에 제한되었다. 그러나 종교다원적, 포스트콜로니얼 시민사회에 있어서 토착화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과정에 개방적인 자세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시민사회는 사회의 삶의 모든 측면들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영역이다. 시민사회에의 참여는 다양한 공동체들로부터 기꺼이 비판받을 태세를 요구한다. 시민사회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의 한 집단으로서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을 공공 영역에서 비판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일반 공중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도록 허락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상호 비판의 과정없이 어떤 사회도 진보할 수 없으며, 이러한 과정은 상호간의 더 강력한 연대성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과 특수성을 강화하려하고 공적 영역에서 대화하는 데 헌신하기를 원하지 않는 기독교는 반 시민사회적이고 반민주적인 배타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향에 쉽게 물들게 된다.
시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과정에의 참여로서의 토착화는 교육, 의료사업, 사회복지 등의 분야에 일방적이고 경쟁적인 참여가 되어선 안된다. 도리어 에큐메니칼 기독교의 토착화는 공의회적 과정을 중시한다. 다시말해서 기독교의 기여의 구체적인 내용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기독교의 사회봉사는 국가나 여타 자원 집단들에 의한 봉사와 평행을 이루어 시행되는 것보다 보다 광범위한 시민사회와의 '상호협력(collaboration)'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하느님의 성육신이 모험을 감수한 것이었던 것처럼, 시민사회에서 에큐메니칼 기독교의 토착화는 타자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서의 상생의 삶, 공의회적 과정에 대한 개방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5. 토착화된 기독교 공동체로서 通敎會의 규범적 저력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프랜시스 휘오렌자는 하버마스가 극도로 합리화된 사회 속에서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분석해내는 데는 성공적이지만 생활세계의 어디에 윤리와 정의의 물음을 갖고 진지하고 구체적인 토론을 하는 '담론 공동체(Diskursgemeinshaft)'가 있는가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휘오렌자는 교회를 신앙적 전통의 실체적 규범적 저력을 지닌 해석의 공동체로 부르면서 교회가 식민지화된 생활세계에서 해방적 의사소통행위를 위한 제도적 장소로 거듭나고 있고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포이케르트가 지적한 대로 무제한한 의사소통공동체로서, 그리고 메츠가 제안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위험한 회상의 공중적 현존으로서 인정받으려면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전통의 규범적 저력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해석의 공동체로서 교회내에서 정의와 선의 개념과 실천에 대한 물음들이 공중적으로 토론될 수 있어야 한다. 정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치와 행정에 대한 공중적 토론이 전문가들의 몫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기초위에서 수행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교회가 성서와 전통 속에 담긴 선한 삶과 정의에 관한 규범적 내용을 해석해 내어야 한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적 시민사회에서 토착화된 기독교 공동체로서 통교회의 규범적 저력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가? 통교회의 교회사적 단초는 18세기 감리교 운동에서 나타난 '은총의 가변적 수단(the prudential means of grace)'으로서 속회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통교회의 20세기적 실마리는 '제도교회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로서 남미의 기독교기초공동체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두 운동은 시대와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가진다. 복음에 대한 투철한 헌신을 가지고 시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과정에 참여, 곧 토착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기초공동체운동이 통교회의 탄생인 점은 그것의 복음적 변혁력의 출처가 정치경제적 해방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문화적 창조성에서도 연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난한 자들의 영성에 뿌리박고 민중적 축제와 토착적 종교성을 배타하기는커녕, 그것에 창조적으로 적응함으로써 민중으로하여금 복음적 해방을 축하하고 자유와 기쁨을 향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초공동체운동을 해석하는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분법적 계급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아니라,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 내의 해방 영성에 대한 몰이해로 말미암아 아시아적, 한국적 교회론의 혁명을 기하는 데 부족한 면을 가진다. 한국사회와 같이 복잡한 계층화의 양상을 띠고 있는 상황에서는 중산층의 반민중성보다는 민중성향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보다 탄력있는 시민사회운동론이 요청될 뿐아니라, 전통종교와 신흥 민족종교의 영향력이 다원적으로 그리고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종교적 정황을 감안한다면, 보다 세련된 교회론의 문화변혁적 토착화로서 통교회론의 올바른 방향 설정이 절실하다 하겠다.
과거 수십년간 한국사회의 성장 이데올로기는 한국교회 내부의 교회성장운동과 맞물리면서 대형교회들의 출현과 전반적인 교세의 급성장을 이루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은 한국식 기업경영을 모델로 삼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교회의 탈공중화와 교회들간의 물적, 인적 자원의 격차를 유발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시민사회에서 에큐메니칼 기독교의 토착화 모델인 통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통교회는 인간 개인의 개성화에 토대를 두되 사회 통합과 개방적, 확산적 민족의 질적 통합, 그리고 지구적인 생명과 평화의 실현을 추구하는 한국교회의 매개구조적 소통공동체이다.
앞으로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하여 한국 토착화 신학연구소의 중대한 과제가 있다면 통교회의 규범적 저력을 어떻게 해석해 내는가 하는 것이다. 수년전에 하버마스는 한국을 방문하고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숙과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의미심장한 지적을 해주었다. 그것은 막스 베버가 위대한 세계종교라고 일컬었던 심오하고 풍부한 규범적 내용들이 현대사회의 탈형이상학적 사고의 조건하에서 현대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과연 어떻게 활성화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샤머니즘의 유산과 기독교의 현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고전 종교인 유교와 불교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한국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규정하고 있다. 불교의 순수한 내적 초월의 윤리와 공동체 지향적 성격이 강한 유교는 한국인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 세계의 도전들을 대응하면서 자기비판적으로 변화를 시도해왔던 기독교의 사례에 비추어, 유교의 상호주관적 문화의 핵심과 불교의 보편주의적 가치의 핵심을 재해석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거 한국과 동아시아의 전통이었던 유 불 선 三敎會通의 전통과의 연관속에서, 오늘날 종교다원적 포스트콜로니얼 시민사회의 정황에서 유교, 불교, 기독교간의 새로운 삼교회통을 통한 통교회의 규범적 저력의 학문적 회복을 하려는 노력이야말로 21세기 에큐메니칼 신학을 주도할 한국 토착화신학의 연구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