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연구]
-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
by J.Dunn(제임스 던)
1. 제 1 부
다양성 안의 통일성
제 3 장 원시적인 신앙고백물들
9. 인자(人子)로서의 예수
60여년 전에 부쎄는 인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고백이 곧 처음 기독교인들의 고백이었고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촛점이었다고 제안했다. 그 후로 10년쯤 지난 후에 로마이어는 갈릴리에 기원을 둔 기독교(예루살렘 기독교와 구분된)가 독특하게 인자기독론을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보다 최근의 연구는 Q자료에 집중했는데 Q자료가 후기 수난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에 대한 묘사(마가에서 가장 잘 두드러져 있다)와 구별된 그리고 융합되지 않은 천상의 인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초기의 신앙고백을 구체화시켰다고 논증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는 인자이다'라는 표현이 처음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곤 했던 최초의 언어양식들 중에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자' 칭호는 거의 독창적으로 복음서들에 나와 있는데(공관서 69번, 요한 13번, 신약의 나머지 문서 1번),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어느 점으로 보나 그 칭호는 단지 예수의 입술 위에서만 드러나 있다. 예수는 결코 한번도 복음서 설화들에서 인자로 진술된 적이 없으며, 또한 제자들에 의해서 인자로 불리워지거나 고백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곧바로 부정적인 해답을 요청한다. 즉, '인자'는 초기교회에 의해 사용된 고백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 사용된 문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금세기를 주도하는 신약성서 학자들은 한결같이 인자 진술들을 검증하였고, 인자 진술 모두를 예수에게만 관련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적어도 다소는 부활절 이후 상황속에서 현재의 양식에 도달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주요한 논거들은 다음과 같다.
(1) 인자 자료의 전체 단위가 Q자료에는 빠져있다. 다시 말해서 Q자료에는 우리가 막 8.31, 9.12, 31, 10.33 이하 45에서 가장 명확하게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인자의 고난(부활)에 대한 암시가 없다. 그러므로 Q는 인자 전승이 마가에서처럼 수난의 케리그마와 혼합되기 이전 단계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수난 받는 인자 진술 그 자체는 Q자료가 지금의 형태에 이르게 된 후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쉽게 논증될 수 있다.
(2) 공관복음서에 평행하는 전승들을 비교하면 '인자' 문귀가 후기에 첨가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마 16.28(참고, 막 9.1/눅 9.27가 더 초기의 형태)과 마 24.30은 막 13.26에 첨가된 것으로 보이며, 또 마 26.2은 막 14.1의 편집상의 확대임이 분명하다. 또 막 9.9, 눅 19.10과 마 13.37, 41은 '인자'가 편집상의 산물임을 예증한다. 게다가 거의 모두 요한의 인자 관련 문귀들은 공관복음서의 용법과 판이하며 어떤 것은 특별히 발전된 요한신학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요한적 용어와 논제들과 명백하게 관련되었다(특히, 3.13, 6.62-상승, 하강 주제; 3.14, 8.28, 13.34- 예수의 들림 받음; 12.23, 13.31- 예수의 영화).
(3) 공관복음서 전승 어느 곳에서도 인자 진술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구성요소가 되지 않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예수의 메시지 중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는 점을 당연시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자료가 갖고 있는 특성들이 본래 독립된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즉 하나님 나라 자료는 진정한 예수 전승에서, 인자 자료는 초기 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논증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수용하지 못한다. 하나는 원시 공동체들의 예언적 영감으로부터 출현한 예수의 진술들은 스스로 그 둘레에서 얽혀 버렸고, 이미 받아들여진 예수 전승의 발전들일 수 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변형물들인 예언적 진술들은 부활한 예수의 진술들로써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로 인자 전승이 적어도 원시 공동체 내에서 어떠한 발전과정을 겪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원시 교회들이 예수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인자로서 사유했다는 사실과 예수가 인자라는 확신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모체였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2)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는 없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신념이 얼마만큼 중요했는가? 인자 진술 자료가 원시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할 때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즉, 인자 자료가 어느 정도로 처음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가? 인자 진술들은 인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반영하는가?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여러가지 상이한 해석들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는데 따라서 확실한 결론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은 대안적 해석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a) 모든 인자 진술들은 초기 교회들로부터 온 것이다.
즉,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예수에게 속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예수가 인자였다는 신념은 아마도 예수의 제자들이 소유한 새롭고 독특한 부활절 이후의 신앙을 표현했다. 게다가 그것은 기독교적 신앙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특히 예수의 진술의 전승 발달과정에 있어서 어느 다른 신조문들과 필적됨이 없이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처음 기독교인들이 예수와 인자를 동일시하는 조처를 취해게 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한 왜 이 새로운 신앙이 현재의 전승유형을 만들어냈으며 어떤 점에서 모든 인자 증언들이 예수 자신의 입술위에 나타나고 다른 상황속에서는 하나도 보존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란 보다 어려운 일이다. 무슨 이유로 예수가 인자라는 신념이 케리그마적 진술들 속에서는 조금도 나와 있지 않은가? 왜 인자 칭호는 다른 원시의 교훈이나 제의적 신조문들속에서 그렇게 완전히 빠져있나? 진상은 이렇다. 즉, 다른 '권위의 칭호들'의 경우에 있어서 이루어진 발전과 비교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아래에서 검증될 여러 칭호들의 발전과정과 비교하면 우리는 이러한 가설에 대해 확고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b) 인자 진술들 중에 얼마는 대강 전승속에서 우리에게 보존된 형태로 예수에게로 소급한다.
이들은 예수가 자신과 구별되는 미래에 도래할 인자를 기대하는 곳- 특히, 막 8.38, 눅 12.8 이하; 마 10.23; 눅 11.30; 17.22-에서 나타나는 진술들이다. 이 진술들이 무슨 이유로 자신있게 예수와 관련될 수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원시교회가 고양된 예수와 인지를 이러한 방식으로 구별했으리라는 사실 추정에 근거할 가능성은 없다. 이 경우에 있어서 초기 교회의 창조적 역할은 인자와 지금 고양된 예수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예수가 도래할 인자를 예견하는 그러한 진술들 속에서 예수는 그 인자와 동일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전승 안에 이제 새로운 진술이 나타났는데- 그 진술은 인자의 천상의 활동과 영광 중에 도래를 포함하고 또한 예수의 지상의 활동과 고난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핵심되는 문제는 실제로 예수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자의 도래를 기대했는지 혹은 기대하지 않았는지 그 여부에 관한 것이다. 이 가설에서 우리가 고심하는 난점은 앞에서 언급한 인자 진술들이 그 가설에 대한 유일한 실제상의 증거가 된다는 점이다. 그 증거는 충분히 유력한 것인가? 눅 12.8 이하와 막 8.38은 우리에게 예수와 인자 사이에 나타나는 구별을 인식하도록 요청하는가? 사실상 그러한 해석은 예수가 선포한 내용 중 그에 의해 자각된 사실과 반대되는데 거기에서 예수는 자신의 봉사활동의 종말론적인 성취와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세례 요한에게서, 혹은 이전에 이루어진 사건이 갖는 예비적 성격을 대조시켰다(특히 마 11.11/ 눅 7.28; 마 12.41 이하/ 눅11.31 이하를 보라). 무슨 이유로 또한 어떤 방식으로 천상의 인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그러한 신념은 예수의 지상의 활동이 묵시적인 칭호와 관련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전승의 발전을 이끌어 냈어야만 했는가?- 어째서 특별히 마 8.2이 눅 5.58과 같은 하찮은 진술들이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분 예수에 대한 신앙의 표현으로 출현해야만 했는가?
고양의 다른 칭호들과 관련해서는 전혀 유사한 일들이 발생치 않았다. 과연 대조적으로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사용한 '주'(Lord)라는 칭호는 분명히 편집에 의한 것이며 오해의 여지없이 부활절 이후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c) 세번째 견해는 인자 진술들 가운데 극히 일부가 예수의(직함이 없는) 연설 관용구와 관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가끔 '바 나샤(ברנשא)'(사람의 아들)라는 아람어적 문귀를 시편 8.4(참고, 히 2.6)=일반적 의미에서의 특별한 자기- 묘사없는 '사람'의 견지에서 사용했다. 이것은 어떤 공관복음서 진술들의 특히 막 2.10, 2.28(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따라서 인자=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 8.20/ 눅 9.58 그리고 마 11.18 이하/ 눅 7.33 이하- 배후에서 본래적인 의미가 되고 있다. 또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도마복음서이다. 그것은 단 하나의 인자 진술- 어록 86, 마 8.20/ 눅 9.58과 매우 유사함- 만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도마복음서 안에 여러개의 어록들은 독립적인 그리고 초기이 아람어적 자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세번째의 견해는 인자 전승의 가장 초기의 단계는 직함없는 '바 나샤(ברנשא)' 어법이었다는 사실을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인자 진술을 형성함에 있어서 원시 공동체의 역할이란 다음과 같이 발전되었으리라 본다. 고양된 예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할만한 용어를 구약 전체를 통해서 추적한 결과 단 7.13의 천상의 인자 표상을 채택하게 되었고 이러한 표상과 부활한 예수를 동일시한 진술들이 그것과는 별도로 혹은 본래적인 시 8.4의 진술 유형을 근거로 해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전승이 발전해 나감에 따라 이러한 본래적인 진술들은 직함을 가진 진술들이 되었다('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 '人子'(the son of Man)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Q자료에서 결정된 것을 발견하는 단계이다. 결국 모든 전승이 계속해서 확장되었고, (바울적인) 십자가의 케리그마의 발전과 융합되었고 소위 마가의 고난의 인자 진술을 형성시켰다. 제4복음서는 인자 진술을 특히 높임 받고 영광 받은 예수에 대한 요한적 논제와 관련시킴으로써 이러한 연관성을 굳혔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 전승을 선재사상을 암시하는데까지 확장시켰다(요 3.13: 6.62).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복음서가 뒷받침된다는 것은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도마복음서의 종말론은 예수의 선포나 초기의 케리그마들을 거의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예수- 전승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묵시적- 이후 단계를 반영한다. 거기서 묵시적 인자 진술은 무시되었다. 시편 8.4의 진술 유형과 동일시 된 그런 진술들은 자기 묘사를 제외하고서는 거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특별히 '일반 사람이 머리둘 곳이 없다'는 말은 전혀 사실 묘사가 되지 못한다. 사실상 그러한 어록은 단지 방황하는 선포자로서의 예수 자신의 선교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마 8.20/ 눅 9.58). 그 논제는 마 11.18 이하/ 눅 7.33 이하의 경우에서 한층 분명해진다. 만약 이러한 진술들이 예수에게 본래적인 것이라면 그것들은 예수가 3인칭 관용구 '바 나샤(ברנשא)'로 자신을 언급하는 예수의 언어양식을 반영한다.
(d) 네번째 견해는 세번째 견해의 변형으로 즉, 예수는 '바 나샤(ברנשא)'라는 용어를 매우 애매한 방식으로= '어떤자'(one)- 자신에 대해서 사용했다는 견해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바 나샤(ברנשא)'라는 용어와 이와 같이 사용된 유사한 예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쨋든, 예수가 '바 나샤(ברנשא)'를 자기- 묘사로 사용했다는 최상의 증거는 공관복음서 전승 자체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앞에서((c)의 서두) 언급한 본문들에 대한 최상의 설명이며, 만약에 우리가 공통된 본래적 '바 나샤(ברנשא)'양식(특히 막 3.28/ 마 12.31 이하/ 눅 12.10)을 인정한다면 다른 본문들의 다양한 양식들은 최상으로 해명되어질 수 있다. 또 이것은 '바 나샤(ברנשא)'라는 용어가 양쪽의 방식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최상의 설명이 된다(특히 마 5.11/ 눅 6.22; 마 10.32/ 눅 12.8; 마 16.13/ 막 8.27).
이러한 논제가 씨름해야만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떤 지점에서 단 7.13이 人子 진술에 대해 스스로 명백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나? 우리는 이미 단 7.13에서 그려지고 있는 본래적인 묵시적 人子 표상이 마 8.20/ 눅 9.58과 같은 매우 비묵시적 자료를 포용하는 데까지 확장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을 인식했다. 또한 예수가 시편 8.4의 관용구와 단 7.13의 표상 모두를 본래적으로 포용하고 있는 '바 나샤(ברנשא)'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몇몇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가 단 7.13을 암시하면서 사용했던 애매한 '바 나샤(ברנשא)' 양식을 적어도 4가지의 가설들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 110에 암시된 바, 시 8편(막 12.36; 고전 15.25-7; 엡 1.20-22; 특히 시 8.6에 주목하라) 뿐만 아니라 단 7.13(막 14.62)과도 관련된 '바 나샤(ברנשא)' 용법의 폭넓은 사용을 인식했는가?
만일에 우리가 단 7.13이 예수의 '바 나샤(ברנשא)' 용어에 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동시에 단 7.13은 명칭상의 용법이 아니라 도리어 단지 하늘의 법정에서 궁극적으로 옹호받을 마카비안 시대의 박해 받은 충신들을 묘사, 혹은 상징하는 인간적 표상에 대해서 언급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문제는 본질상 수월해진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고난받는 인자 진술들이(혹은 그 일부가)- 비록 Q자료에는 빠져있다 해도 예수에 대한 애매한 '바 나샤(ברנשא)' 양식과 관련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가능한 일이다.*
*고난과 배척사상은 대개 Q에 보존된 다른 人子 진술들속에 나타나고 있다(마 8.20/ 눅 9.58; 마 10.32 이하/ 눅 12.8 이하; 눅 11.30/ 마 12.40; 눅 22.28-30/ 마 19.28, 또한 마 10.38/ 눅 14.27; 마 23.37-39/ 눅 13.34 이하를 보라).
따라서 인자 전승이 발전해 나가는 그 과정에 있어서 원시 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견해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처음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언급한 일종의 '바 나샤(ברנשא)' 진술들을 전해받았는데, 모든(거의?) 그 진술들은 예수 자신과 관련되었고 적어도 몇몇은(대부분? 모두?) 다니엘 7장의 환상을 암시하며, 또 그것에 다소간 영향을 받았고 결국 암묵적 기독론을 포함한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초기 공동체들은 '바 나샤(ברנשא)'를 일인칭 단수로 받아들임으로써, 또는 그것을 단 7.13과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관련시켜 완전한 인자칭호가 되도록 정교하게 만듦으로써 그 애매성을 제거했다.
3) 따라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가 인자였다는 확신이 원시 교회의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신앙의 독특성을 고백하기 위해서, 혹은 신앙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이해를 갖기 위해서 인자 기독론을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한 가지 증거가 있다면 이 싯점에서 원시 교회의 활동은 예수 진술의 전승을 정교하게 만드는 데 국한되었다는 사실이다. 인자 예수에 대한 신앙은 그러한 전승 외부에서 실제적인 활력을 갖지 못했고(행 7.56은 유일한 예외가 되고 있다), 인자 기독론은 원시 교회들의 특징적인 신학을 위한 근원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원시 팔레스틴 공동체를 특성화하는 다른 고백에 관한한 그것은 '예수는 메시아이다'라는 고백이었다. 비록 예수가 도래할 인자로 인식되었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신앙은 주로서의 예수에 대한 고백속에서 보다 명확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2013. 8. 6. 발람의 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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