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연구]
by J.Dunn(제임스 던)
-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
1. 제 1 부
다양성 안의 통일성
제 2 장
케리그마 혹은 케리그마들
4. 사도행전의 케리그마
우리는 이미 다드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연설문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추출해 낸 케리그마의 요약을 개괄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드의 입장과 같이 원시 교회들의 선포를 노출시키는 데 관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과제는 훨씬 단순하다. 즉 우리는 누가가 최초의 신자들의 케리그마를 묘사한대로 매우 솔직하게 사도행전의 그 연설문들을 사용할 것이며, 그것들의 독특한 성질들에 집중할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좀 더 깊게 그 연설문들을 파고 들어갈 때 우리는 그것들의 역사적 가치를 연구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도행전에서 누가에 의해 그려진 원시 기독교인들의 케리그마는 무엇인가? 라는 간단한 물음을 제기하는데 그치려 한다.
1)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으나 사도행전의 연설문들은 예수를 선포한다.
이제 예수는 메시지의 내용이 되었다. 즉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자가 된 것이다. 특히, 제1의 촛점이 예수의 부활에 맞춰져 있다. 계속 반복해서 예수의 부활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 대한 메시지의 핵심적인 주장이 되고 있다(예를 들면, 2.24-32; 4.1-2, 33- 요약적 문귀; 10.40이하; 13.30-37, 17.18, 30이하). 앞으로 살펴볼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바울에 의해서 전수된 메시지가 강조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은 히브리서의 메시지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히브리서에서 부활은 단지 결론부인 송영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날 뿐이다(히13.20).
대조적으로 사도행전의 연설문들은 거의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즉, 예수의 봉사활동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다만 2.22과 10.36-39에 참고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보다 두드러진 것은 사도행전의 실제 연설문들이 예수 자신의 메시지와 교훈을 거의 반영하고 있지 않은 점이다(8.12; 14.22; 19.8; 20.25, 35; 28.23, 31은 약간 예외가 되지만).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것은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사도행전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선포 사이에 어떠한 '통일성' 혹은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2) 사도행전이 부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추론은 예수의 죽음의 신학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죽음이 언급은 되고 있으나 단지 희박한 사실(주로 유대인의 책임에 강조점을 둔)에 불과하다. 그 역사적인 사실은 해석되지 않았다(2.23, 36; 3.13-15; 4.10; 5.30; 7.52; 10.39; 13.2이하). 예를 들면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혹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즉, 예수의 죽음은 희생이었다는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다. 종(제2 이사야의)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간결한 암시도, 죄인들을 대신하는 희생,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고난 그 다음에 오는 옹호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13.13, 26; 4.27, 30; 또한 8.30-35). 유사하게 행5.30과 10.39('그를 나무에 달아'-참고 13.29)에 암시된 신명기 21.22 이하는 예수가 당한 수치와 모욕을 강조하려는, 그리고 동일한 굴욕-옹호 주제에 부합하려는 누가의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갈 3.13의 신학을 추론하는 것은 확실한 주석을 허용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본문을 곡해하는 것이다. 행 20.28(자기 자신의 피로 사신 주, 혹은 하나님의 교회)조차도 어떤 복음적 선포를 합리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며, 상당히 당혹시키며,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사도행전 연설문들의 케리그마 속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신학이 현저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시 여기에서 뚜렷한 변화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대속적인 효험은 사실상 베드로전서와 히브리서에서 처럼 바울의 복음(롬 3.25; 고전 15.3; 고후 5.14-21)의 주요 특징이 되는 것인데, 그러나 막 10.45를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이 원시 케리그마의 참된 진술인지 아니면 누가 자신의 신학의 반영인지 전혀 분명치 않다. 케리그마 속에 있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라는 표현은 바울에게 전승되었고(고전 15.3), 또 누가가 막 10.45를 생략하고 있고 적어도 그 진술과 다른 변형(눅 22.26)을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자신의 신학적 반영임을 암시하게 한다.*
*예수의 죽음의 신학이 명시되어 있는 공관복음서들 내에 한 가지 다른 문장이 또다시 누가(22.19이하)에서 본문상 혼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필시 이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사실이 되고 있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누가가 희생에 의한 구속개념을 무시하려는 그의 시대의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영향을 다소간 받았다고 하는 점이다. 어쨋든, 사도행전 연설문의 케리그마에 관한 한, 우리는 그것이 십자가의 신학을 빠뜨리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신약성서 안에 포함된 상이한 케리그마들 사이에 또 하나의 중요한 다양성의 요소가 드러나고 있다.
3) 사도행전의 연설문들 안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 현저한 특징을 이루고 있고, 또 동일하게 바울의 메시지에도 강하게 나타나 있는 실현과 임박한 종국 사이의 긴장이 완전히 빠져있다. 예수의 메시지 안에서의 파루시아, 혹은 그의 재림 그리고 그 나라의 도래에 가장 근접한 표현이 두드러지게 결여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임박함의 느낌은 행 3.20 이하에서 겨우 형식적으로 포착되며, 또한 심판의 날은 어렴풋한 위협을 주는데 불과하다- 확실히 예수가 직시한 것과 같은(10.42; 17.31; 24.25) 시급히 당면한 위험이 아니다. 아울러 실현된 종말론의 강한 특징, 마지막 때가 지금이라는 확신이 나타나 있지 않은데, 단지 2.15-21과 3.24에서 엿볼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의 대조는 극히 놀랄만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메시지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종말 축복의 실재성과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선물은 종말 수확의 시작(첫 열매)이었음을 강하게 확신했으며(고전 15.20, 23; 롬 8.23), 그의 선교활동 중 대부분, 바울은 파루시아와 종말의 임박성을 선포했다(살전1.10; 4.13-18; 고전7.29-31). 특별히 바울이 고전 16.22에서 보존하고 있는 원시 교회의 아람어적 외침- 마라나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틴에 있는 원시 공동체들이 이와 동일한 종말적인 열정과 긴급성의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과연 우리가 후에 살펴볼 것인 바, 행 2장과 4장에서 누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공동체의 산물은 이러한 종말론적 열광주의와 같은 류의 표현으로써 가장 잘 설명된다.
이 사실에서 1년 동안 필요한 물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산을 처분하는 일이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전에 오실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가 추측컨데, 시간의 경과와 파루시아의지연이 이러한 원시 케리그마의 요소를 비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했다는 사실은 부득이한 일로 생각된다.
4) 예수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오랜 시간상의 차이가 나타났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또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서는 고양된 예수에게 거의 아무런 역할도 부과하지 않고 있다. 구속사의 신기원을 이루는 오순절 날에 성령을 부여한 일(행2.33)과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서의 역할(10.42; 17.31)을 예외로 하고 아마도 예수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 배후에서 권한을 위임하는 자로(the anthorization) 생각되었고(2.38; 3.6; 4.10, 30; 8.16; 10.48; 16.18; 19.5-그리고 참고 9.34), 그는 여러 환상들 중에 현현한다(7.55이하; 9.10; 18.9; 22.17이하; 23.11; 26.16, 19).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나 요한의 서신에서 특징을 이루는 바, 신자와 고양된 주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연합'이라는 강한 결속감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특히, 바울과 요한이(롬1.3-4; 8.9-11; 고전12.3-13; 15.45; 요한14.15이하, 26.16, 7-15) 그렇게 민감하게 다루었던 고양된 주와 성령 사이의 관계는 단지 행 16.6 이하에 암시되었을 따름이다. 보다 인상적이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에게나(특히 막14.36, 눅11.2/ 마6.9; 마11.25이하/ 눅10.21) 원시 교회의 아람어적 기도와 아들됨에 대한 어떤 강렬한 경험을 보존한 바울에게나(롬8.15이하; 갈4.6) 그렇게 중요했던 아들됨의 개념이나 경험이 사도행전에서는 완전히 빠져 있다는 점이다.
5)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에서의 예수의 선포라는 주제 이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의 연설문들 안에서는 강한 '종속론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좀처럼 행위의 주체로써 묘사되지 않고 있다. 즉, 그가 행한 모든 일, 봉사활동, 부활, 고양 등이 하나님께 종속되고 있다(예를 들면 2.22, 32; 3.26; 5.30이하; 10.38, 40). 파루시아에 관한 유일한 관련 문귀도(3.2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낸다'는 견지에서 구성되었으며, 예수를 심판주로 보는 두 개의 관련 문귀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러한 직무를 주셨다고 진술되었다(10.42; 17.31- 예수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적어도 사도행전 케리그마에서 '양자론적' 강조점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진술하지 않으면 안된다.
행 2.36; 13.33에서 부활은 예수가 아들, 메시아 및 주로서의 새로운 지위를 얻은 것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 초기의 다른 케리그마의 형태들과 매우 잘 일치하며(롬1.3이하; 히5.5) 원시 공동체들의 강조점을 상당히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특별히 초기 바울 서신과 계시록에서 발견하는 바, 우주적인 그리스도관과는 뚜렷하게 대조된다.
6) 예수의 선포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연설문의 케리그마는 회개와 믿음에로의 부름을 중요시한다.
여기에서의 차이는 오히려 흥미롭다. 한편으로 사도행전에서의 회개의 요청이(2.38; 3.19, 26; 14.15; 17.30; 26.20) 예수의 회개에로의 요청과 매우 유사하나 바울과 요한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은 회개 자체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단지, 롬2.4; 고후7.9이하; 12.21). 그리고 요한은 그 단어조차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에로의 부름에 있어서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믿음을 강조하는 누가는(2.44; 4.32; 5.14; 10.43; 13.12, 39, 48; 14.1 등) '믿는다'라는 동사를 98번 사용하는 제4복음서 기자와 그리고 그 동사와 명사를 약 200여번 사용하는 바울 서신들과 상당히 접근한다. 그러나 그 부름은 특별히 주 예수를 믿는 믿음에 대한 것이며(행9.41; 11.17; 14.23; 16.31),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케리그마를 예수 자신의 케리그마로부터 완전히 구별짓는 것이다. 원시 공동체에서의 믿음에 대해 누가가 묘사하는 또다른 측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도행전의 독특한 점이기 때문이며, 또 사도행전을 다른 신약 문서들과 구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이적의 결과로서 묘사하고 있는데, 그 때에 그 이적의 효능에 대한 어떠한 불안감도 나타나 있지 않다(5.14; 9.42; 13.12; 19.17이하). 반면에 나머지 신약 문서들 안에는 이적의 복음 선포적이며, 선전적인 가치가 도리어 경시되었다(막8.11이하; 마12.38이하/ 눅11.16, 29; 요2.23-25, 4.48; 20.29; 고후13.3 이하).
7) 요청이라는 말과 짝이 되는 말은 약속인데, 그 말은 사도행전에서 보통 용서(2.38; 3.19; 5.31; 10.43; 13.38 이하; 26.10), 구원(2.21; 4.12; 11.14; 13.26; 16.31) 혹은, 성령의 선물(2.38 이하; 3.19; 5.32; 참고 8.15-17; 10.44-47; 19.1-16)이라는 견지에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이처럼 그 말이 중복되어 쓰이는 것은 신약의 다른 케리그마들 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예수의 케리그마는 용서와 승인을 제공하며, 그리고 바울의 의인 개념은 오직 엡 1.7과 골 1.14에만 '용서'라는 말 자체가 나타나 있기는 해도, 용서의 개념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요한 문서들 안에는 전혀 용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구원개념은(명사든, 동사든) 공관복음서 안에서 종종 예수에게 속한 것이며(막3.4; 5.34; 8.35; 10.52 등), 그리고 바울에 의해 규칙적으로 사용되었다(롬1.16; 5.9 이하; 8.24; 9.27; 10.1, 9 이하, 13 등). 그러나 요한 문서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고 있다(7번). 성령의 약속에 관해서는 예수는 적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에 의하면, 좀처럼 성령 그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막 13.11은 성령의 약속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케리그마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환난시에 제자들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렇다.*
*사도행전 1.5, 11.16은 우리가 지금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의 교훈에 보다는, 교회의 시대를 선행하는 구속사의 단계로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누가의 재구성에 보다 쉽게 부합된다.
그러나 성령은 바울이나 요한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케리그마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예를 들면, 롬2.29; 8.2, 9, 15; 고전6.11; 12.13; 고후1.22; 갈3.2 이하; 요3.5-8; 7.39; 20.22; 요12.27; 3.24).
케리그마에 아무런 윤리적인 추론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히려 사도행전은 주목할 만하다. 누가는 신자들이 상호간의 신뢰로 결합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즉 사도행전에서는 고립된 기독교인이란 한 사람도 없다(이에 대한 중요한 일화가 행8장과 18.24-- 19.7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선포의 수용에서 유래하는 어떤 도덕적인 의무감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사랑'(동사와 명사)이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 단어는 예수와 바울 서신(108번), 요한복음과 서신(95번)의 메시지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였다. 여기에서의 대조는 완전히 두드러진 것이다.
8) 요컨대,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단 하나의 케리그마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에 의해서 재현된 상이한 연설문들 내에서 하나의 고정된 모형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최소한 누가의 진술과 일치하는 원시 교회의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케리그마라고 부를 수 있는 '규범적인 개요'를 인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긍정이다. 가장 규범적이며 기본적인 요소들은 이와 같다.
(1)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선포
(2) 이러한 선포에 대한 응답과 회개와 예수에 대한 믿음에로의 부름
(3) 그렇게 응답한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용서와 구원과 성령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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