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3·6교실/신약신학 교실

요한의 케리그마

류성련 2015. 1. 24. 08:59

초기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연구

-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

by J.Dunn(제임스 던)

1. 제 1 부

다양성 안의 통일성

제 2 장

케리그마 혹은 케리그마들

6. 요한의 케리그마

제4복음서는 그것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우리는 이 귀절을 요한복음에 대한 복음서 기자 자신의 간결한 요약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1) 요한복음서 기자의 목적은 믿음을 자극하는 것이다. 즉, 불신자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게 하고, 또는 신자들 자신의 믿음을 격려하는 것이다. 요한은 믿음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제4복음서에서 동사 '믿는다'는 말은 다른 신약 문서에서보다 훨씬 많이 나온다(98번). 이것은 만약, 인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경험하려 한다면 반드시 행해야 할 규정이다(우리는 요한이 회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회상한다).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그러한 믿음을 예로 들면 6.69; 8.24; 11.27; 20.31; 요일 5.1, 5)라는 주장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이 예수에 대한 위탁을 말하는 것이다(예수에 대한 믿음은 요한의 탁월하고 특징적인 어법이다. 예를 들면 요 1.12; 3.16; 6.29; 11.25 이하; 17.20; 요일 5.10). 또한 요한의 용법의 특징은 '안다'(56번 사용)는 동사가 '믿는다'는 동사의 상당어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것이 곧 믿음의 내용이다. 우리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묘사하는 방식에 의거하여 이것이 요한에게 있어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특히 요한의 케리그마의 독특성을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 본다면 첫째, 제4복음서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고양된 그리스도가 상당히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역사적 예수가 고양된 그리스도의 견지에서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4복음서의 예수와 공관복음서의 예수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특별히 다음의 특징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먼저는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기독론적인 칭호들-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 인자- 이다. 반면에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단지 그의 봉사활동 후기에서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은 제4복음서에 나와있는 그 유명한 '나는.....이다'라는 진술이다(6.35; 8.12; 10.7, 11; 11.25; 14.6; 15.1). 이러한 진술은 만약 그것이 예수의 진술의 본래적 전승에 속한 것이라면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으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또 한 가지는 제4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 있는 선재에 대한 예수의 분명한 자이해로써(예를 들면, 3.13; 6.38; 8.38, 58; 10.36; 17.5, 24) 그것이 또다시 공관복음서 전승에서도 동일한 특징으로 남아있다면 그러한 진술은 역사적 예수의 메시지의 일부였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상의 차이점들은 엄밀하게 역사적 차원에서 조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최상의 설명은 요한이 인간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묘사를 제공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가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참된 묘사가 되게 한다는 사실이다. 즉, 요한이 이해하는 역사적 예수는 그의 지상 생활에서 이미 볼 수 있듯이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의해서 형성되는 바, 영광과 함께 하는 역사적 예수다(특히 1.14; 2.11; 11.4; 12.23; 13.31; 17.5를 보라).

신약성서 안에 나와 있는 다른 케리그마들은 역사적 예수와 고양된 그리스도를 상당히 독자적인 것으로 보존하고 있다. 즉 사도행전과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거의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비록 부활절 신앙의 빛에서 예수를 묘사하고 있지만 두 가지 묘사를 동일한 범위로 혼합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요한의 선포는 매우 독특한 것인데 바울의 '마지막 아담' 기독론과 히브리서 기자의 대제사장 기독론 만큼이나 독특성을 띠고 있다. 둘째로, 동시에 요한은 바울과 사도행전과 비교했을 때 예수의 지상 생애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한 강조를 상당히 증대시키고 있다. 이것은 물론 상당한 범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영지주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점차적인 영향과 도전에 근거한다. 우리가 아는대로 가현설은 요한의 당대에 유행하던 독특한 양식이었다. 영지적 이원론이 물체, 육체, 물질적인 것을 악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가현설은 신적인 구속자가 완전히 물질적인 것을 수락할 수 있다거나 화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예수의 인간성은 틀림없이 허깨비이거나 외관(dokei-it seems)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의 저작물들은 예수의 인간됨의 그 실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육체성은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케리그마들 속에서는 실재 비교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강조되었다(요한 1.14; 6.51-58; 19.34 이하; 요일 4.1-3; 5.6-8). 여기에서 기원후 1세기 말경에 이루어진 변화된 제 상황과 도전들이 그것들에 대응하는 케리그마들을 형성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나타난다.

3)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은 결국 생명에로 인도한다.

여기에서 또 다른 요한복음의 중요하고 특징적인 주제가 드러난다. 즉, 동사 '산다'와 명사 '생명'은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속에서 모두 67번 나오는데, 그 단어는 사도행전에서는 그렇게 빈번히 사용되지 않았다(20번). 바울 서신에서는 일정하게(96번) 나타나고 있다. 요한은 거의 용서나 義認이나 구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 않으나 생명의 약속과 성령은 밀접하게 관련시킨다(4.10-14; 6.63; 7.38 이하; 20.22). 그리고 상호 거주에 대한 그의 언급은(예를 들면 6.56; 14.18-23; 15.4-7; 요일 2.27이하; 3.24; 4.12-16) 비록 요한의 개념이 보다 개인주의적이긴 하지만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합일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아마도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러한 모든 사실들이 케리그마적 약속에 대한 광범위한 유사 표현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사도행전, 바울과 요한 사이에 나타난 케리그마의 다양성은 추측컨데, 약속 그 자체의 본질과 내용의 차이들에 의해서 보다는 선포자에 대한 개인적인 선포 및 상황에 따라 진술된 용어의 적합성에 의해 결정되어졌다고 본다. 또 한 가지 요한의 케리그마의 독특성은 날카로운 '양자택일'의 상황속에서 생명의 약속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나고 있다.

청중은 반드시 생명과 사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데, 만일 삶을 선택한다면 그는 사망과 심판을 뒤로 하고 그 순간에 사망에서부터 생명으로 옮겨간다(3.36; 5.24; 11.25 이하; 요일3.14; 5.12). 그와 같이 명쾌한 대조는 요한의 메시지를 대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두움, 봄과 보지 못함, 진리와 거짓, 성령과 육체 등(1.5; 3.6, 19-21; 6.63; 8.12, 44 이하; 9.39-41 등). 여기에서 어떠한 타협의 여지가 없다. 또한 과정으로서의 삶의 개념, 단지 시작에 불과한 완성의 개념, 또한 바울의 메시지에서 특징을 이루고 있는 성령 안에서의 삶의 미완성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 종파 안에서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구별이 선명하다(요일 2.4, 23; 3.6, 9 이하, 14 이하; 4.5 이하). 이것이 바로 윤리적 이원론이며 결단의 대조법인데,- 요한 문서 저자들은 복음의 도전을 가능한한 날카롭고 명확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사실에 대한 단순한 판단이다.

요한의 케리그마는 인간을 두 계층으로 구분하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그러한 구분은 신자들 자신의 마음속에서 경험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와 바울의 케리그마들이 특징을 이루는 종말론적 긴장이 완화되었다는 것이며,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요한의 실현된 종말론이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일서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다양한 '삶의 시험들'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시험은 성령, 사랑, 올바른 고백, 복종에 거하는가에 대한 시험이다(에, 2.4; 3.24; 4.2 이하, 7). 저자는 분명히 사랑하는 자는 올바른 고백을 하는 자로 추정했다. 그런데 저자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면서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분명치 않다. [요한의 날카로운 대조는 선한 이교도, 혹은 사랑을 표시하는 무신론자에 대한 (기독교적인) 문제에 해답을 결코 주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각개 인간의 분열된 상태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불신앙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동정심을 소유하고 있는 바울은 최소한도 그러한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다고 보며, 자의적인 어떠한 대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반면에 요한일서 기자는 단지 침묵할 따름이다.

7. 결론

우리는 신약 문서 전체를 검토하지 않고, 단지 예수의 케리그마와 사도행전에 묘사된 처음 기독교인들의 케리그마, 그리고 신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두명의 신학자- 바울과 요한에 의해 표현된 케리그마들의 외형적 개괄만을 시도했다. 그들은 공통된 케리그마를 가지고 있는가? 으리는 단수의 케리그마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잠시, 예수의 메시지는 별도로 하고, 처음 세 개의 부활절 이후의 케리그마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1) 사도행전의 연설문들과 바울, 그리고 요한은 공통된 케리그마를 함께 나누어 갖고 있는가?

만약에 우리가 그들 나름대로의 선포의 개체성과 제 강조성의 독특성을 고려한다면 대답은 분명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보다 세밀히 관찰한다면 이들 상이한 선포들 속에 어떤 공통된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그것들은 우리가 '공통의 케리그마'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핵심이 되는 케리그마에는 다음 세 가지의 구성 요소들이 포함된다.

첫째, 부활하고 고양된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 사도행전의 연설문들은 예수의 부활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었고 바울은 예수의 현재적인 주권과 대리자로서의 의미에, 그리고 요한은 부활절 신앙의 충분한 조명을 통한 역사적 예수의 묘사에 강조점을 두었다.

둘째, 믿음과 선포의 승인과 예수에 대한 위탁에로의 부름이 선포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가장 일관성 있는 특징이 되고 있으며 '정통'이라는 용어 보다는 '믿음'이라는 용어가 원시 기독교의 명확한 특색을 이루고 있다는 볼트만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세째, 믿음에 따라 제공되는 약속- 그것이 성령, 혹은 여러 다양한 측면들(용서, 구원, 생명)의 견지에서든지 또는 그 결과로서 설정되는 고양된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계속적인 관계(그리스도와의 합일, 상호내재)의 견지에서든지- 이 선포되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관계가 믿음의 공동체나 그러한 공동체 내에(또는 초월한) 사랑의 책임성을 포함한다는 추론을 항상 그렇게 명확하게 얻어내지는 못한다. 이것이 부활절 이후 케리그마의 통일성이다. 그러나 그외에도 상이한 케리그마들의 상당한 다양성이 나타나 있다. 위에 개괄된 통일적으로 핵심이 되는 케리그마가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이 반드시 인식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신양성서 기자도 이러한 케리그마 그 자체를 선포하지 않고 있으며, 또 이렇게 핵심적인 것으로 케리그마를 축소시키지도 않고 있다. 위에 검증된 각개의 경우에 있어서의 기본적 케리그마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핵심적 요약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그들은 공통요소들을 함유하고 있으나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포의 경우에 있어서 두 개의 케리그마는 절대로 동일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다양성은 차이와 불일치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예수의 지상활동과 그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차이점들, 그리고 율법의 계속적 적합성 및 복음의 종말론적 논제의 범위와 윤리적 완성에 대한 불일치를 말한다. 이러한 차이점과 불일치들은 종종 깊숙하게 드러나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합적인 케리그마들은 특유한 상황속에서의 기독교적 케리그마의 정당한 표현들로 제안(또는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케리그마들(복수의 케리그마)은 언제나 '단수의 케리그마'에 불일치한다. 실로 그것들은 특수한 상황속에 내재된 케리그마의 내용과 완전히 상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상황속에서도 그것들은 이러한 차이점들을 수용 가능하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더 이상 논의하지 않거나 유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신약의 케리그마에 대해 말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핵심이 되는 케리그마에 언급한다면 그것은 곧 실제로 신약성서에서 어느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서도 전파된 적이 없는 케리그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에 우리가 다양한 케리그마들 가운데 한 가지를 얘기한다면 그것은 케리그마의 유일한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한 것이지 신약의 모든 저자들에게나 혹은, 그들이 처해있는 다양한 제 상황들에 적합하거나 승인될 필요성이 있는 케리그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만약에 우리가 신약의 케리그마와 통일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반드시 신약의 케리그마들의 다양성도 주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특수한 도전에 대응하여 "이것은 복음이고 그외 다른 것은 없다"고(참조, 갈 1.6-9)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신약성서가 어떤 지침서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절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즉, "이런 특수한 양식은 모든 시대에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복음이다"라고.

2) 비록 우리가 부활절 이후의 케리그마의 통일성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지만 부활절 이후 케리그마와 예수의 케리그마 사이에 통일성을 언급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공적선포의 차원에서 양자의 차이점은 대단한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회개와 믿음을 요청했고, 처음 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요청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의 용서와 승인을 제안했고, 처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 중재된 하나님의 용서와 승인을 제안했다. 매우 분명하게 예수는 자기 자신을 케리그마와는 정말 상응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부활절 이후 케리그마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단지 각개의 케리그마의 특징적인 강조점의 견지에서, 그리고 공적 선포의 차원에서 추적될 수 있는지, 또 예수가 스스로를 자신의 케리그마의 필수요소로 보았는지, 그리고 그가 하나님 나라와 자신 사이에 즉, 그가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선포 사이에 혹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나 자신의 운명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을 파악했는지의 여부가 문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선포자 예수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선포와 처음 기독교인들의 선포는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라는 확증을 가능하게 하는 선포된 예수 사이에 드러나 있는 충분한 연속성을 식별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계속 이어지는 다음 장들 속에서 우리의 논의의 기초를 이루게 될 것이며, 우리는 제1부의 결론 부분에서 제시했던 그러한 논의의 빛에서 그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부활절 이전의 선포와( 부활절 그 자체, 예수의 부활에 대한 그 믿음을 포함하여) 이후의 선포 사이에 가장 명백한 차이점들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은 부활절 이전의 케리그마로 되돌아 가려는 강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견지에서 언급을 요구하며, 또한 산상수훈과 탕자의 비유의 견지에서 기독교를 요약할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 그 자체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케리그마들은 그리고 요한은 다양한 방식속에서, 처음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예수의 메시지의 재현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원시 교회들의 시야에 하나의 결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그 자체가 탁월하게 기쁜소식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고 하늘로 고양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전이 부활절 이후의 선포의 특질을 형성한 것이며, 거기에다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바울이 명시적으로 진술한 바와 같이 부활하고 고양된 예수에 대한 선포가 없는 케리그마는 기독교적인 케리그마가 되지 못하며, 또한 복음으로서의 그 타당성을 상실하는 것이 되고만다(고전 15.14-19). 결국 기독교회는 역사적 예수의 교훈 위에가 아니라 부활절 이후의 케리그마 위에 설립된 것이다.

 

3) 요약하면,

(1) 신약의 모든 케리그마들은 통일적인 요소를 소유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원시 기독교의 복음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2)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실제의 복음은 보다 엄밀하게 규정되었고, 보다 광범위한 내용상의 정의와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된 내용이 폭넓게 제기되었다.

(3) 여러가지 상황속에서 실제의 복음은 다양한 것이었고, 그 상황 자체와 같은 정도로 차이가 날 수 있었다. 그러한 차이점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그 상황 자체와 같은 정도로 차이가 날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다른 상황에로 전환될 때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4) 이 차이점들은 종종 그들의 상이한 상황속에서 선포된 복음들에 절대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상이한 상황에 따른 복음으로써의 성격을 바꾸려 하지 않고 특수한 선포 양식을 야기시키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그것들을 단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두 개의 추론은 오늘날에까지 그 적용이 확대된다.

(a) 단일하고 유일회적이며 통일적인 케리그마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상황은 항상 보다 엄밀하게 규정되는, 보다 더 광범위한 케리그마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러한 케리그마는 구체적 상황속에 놓여있는 선포의 양식으로써 그것은 구체적 상황에 대해 갖고 있는 의미와 관련성을 상실하지 않고 통일시키는 핵심요소로 귀결될 수 있다.

(b) 기독교인들은 '단수형의 케리그마'에 대한 여러가지의 표현들과 해석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탄없이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며, 또한 이들 다양한 표현들을 뒤엎거나 마치 '정죄 받을 부분들'이나 '이단적 분파들'로 배척하지 않고 그것들의 필연성과 타당성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동시에 추상적인 성격을 갖는 핵심적인 케리그마는 기독교의 특성을 충분히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는데- 공동 행위, 봉사 및 예배에 상당히 명확한 근거가 된다. 최소한도의 것을 요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이상의 보다 많은 것을 문의하는 것은 바울에게 야고보를 혹은 누가에게 요한을 출교시키라고 요구하는 것과 똑같다.

2013. 08. 02. 발람의 나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