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마카비 혁명이란 무엇인가?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본결과,, 마카비 혁명의 원인은 안티오커스 4세의 핍박속에서 그에게 분개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로마와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고 본국으로 퇴각하는 처지가 되었을때,, 굴욕적인 참패의 비통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 도륙하여 그 시체들을 개나 돼지의 먹잇감으로 주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고기를 제우스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공포하였다. 이것이 마카비혁명운동이 일어나게 된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다음에 더 자세히 나와있다.
Ⅱ. 마카비 혁명
1.헬라 왕들의 경쟁적인 팔레스타인 지배(기원전 323-190년)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그의 사령관 사이의 내분으로 분열되었다. 정치적으로, 유대의 대제사자들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야심에 가득 찬 왕조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처음 백년동안 프톨레미 왕조가 유대를 지배하였고, 이 당시 토비야드 가문과 대제사상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도움을 줌을 통하여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2.안티오쿠스3세(기원전 223-187년)
안티오쿠스 3세의 동전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Antiochus) 3세(기원전223-187년)는 몇 차례의 전쟁 속에서 3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팔레스틴을 이집트인들로부터 빼앗는데 성공하였다(제5차 시리아 전쟁, 기원전201-195). 프톨레미의 군인들은 퇴각하고 그 땅을 시리아인들에게 양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대인들은 세력 판도가 시리아인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전쟁 동안에 시리아의 편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후 안티오쿠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다. 전투 중에 예루살렘이 입은 전쟁 손해를 복구하려고 하였으며 지금까지의 권리에 보다 더 큰 특권을 받았다.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미에게 승리를 얻은 후에 군대를 이끌고 서부로 이동하여 흑해와 연결되는 해협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가 아이톨리아로부터 도움의 요청을 받아 그리스를 침입했을 때, 로마가 개입했다. 로마는 테르모필레에서 안티오코스를 격퇴했고, 에게 해에서 두 번 그의 함대를 강타했으며, 스키피오 형제들의 지휘 아래 후퇴하는 안티오코스를 소아시아까지 쫓아갔다. 마그네시아-애드-시필룸에서 안티오코스는 재기불능의 패배를 당한 채 소아시아에서 완전히 후퇴해야 했다(기원전190년). 그가 차지하고 있던 이전의 점령지들은 대부분은 버가모의 영토가 되었다. 아파메아(Apamea) 평화 협정(기원전188년)으로 말미암아 안티오코스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국가의 안정을 크게 해쳤다. 안티오코스는 어느 신전에서 보물을 강탈하려다가 살해되었다(기원전187년)
3.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Epiphanes; 기원전175-164년)
맛사다/ 헤롯의 궁전이 맨앞에 보인다.
안티오코스 후계자인 셀류코스 4세 에우파토르(Eupator; 기원전187-175년)가 신하에 의해 암살 당한 후, 볼모로 잡혀 로마에서 14년을 보낸 셀류코스의 동생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올르게 된다. 남부 시리아 소유권을 놓고 이집트와의 분쟁이 재연되었으며(제6차 시리아 전쟁, 170-168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을 점령하였다. 그는 잠시 시리아로 돌아왔으나(이 때 그는 예루살렘의 보물을 약탈했다), 그 후에 또 다시 이집트를 침입했다. 이집트를 침입하는 에피파네스에 대해 로마는 이집트의 점령을 포기하는 것과 시리아로 되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항복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알았고, 그는 아르메니아와 메디아의 원정을 떠났으나, 이 때에 사망하게 된다.
마카비서에 의하면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압제한 폭군이며 마카비 반란의 도화선이 된 헬라화 정책의 추진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유산을 탈환하려는, 즉 그리스 문화와 전통을 지닌 지중해 동부의 통일 왕국을 형성시키려는 이상을 지닌 셀류시드 제국 최후의 왕으로 인정될 수 있다.
멤피스에서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한 안티오코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을 재통합하기 위한 중요한 조처를 취했다. 그러나 곧 로마와 파르티아라는 새로운 두 강대국이 등장했다. 피드나에서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를 격퇴하고 나서 불과 몇 주일 후에 로마가 개입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티오코스 4세에게 불리하게 행한 일, 그리고 미트리다테스 1세 치하에서 파르티아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 등으로 말미암아 셀로오코스 왕국은 아시아의 소 도시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이를 틈타서 과거의 속국들이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안티오코스의 사후에 벌어진 왕조 내의 분쟁으로 말미암아 셀류시드 왕국의 국력이 손상되었는데, 이것은 셀류시드 왕조의 몰락의 징후였다.
4.파르티아 왕국
파르티아 왕국은 기원전 160년 이후로 미트리다테스 1세의 통치 하에 계속 서쪽으로 확장하여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남으로는 페르시아의 본토인 고대 이란 국가들을 정복했다. 안티오코스 시디테스가 잠시 이 지역들을 탈환했으나, 그의 군대는 기원전 129년에 파르티아에 의해 격파되었다. 한편 분가한 파르티아 왕가에 의해 통치되던 아르메니아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반기를 들었으며, 영토를 남서부로 확장하여 한 때는 갑바도기아를 지배했다. 기원전 86년에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1세는 셀류시드 왕조 제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시리아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통치는 루쿨루스(Lucullus; 기원전 69년)와 폼페이(Pompey; 기원전 64년)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등장함으로 끝을 맺었다.
5.마카비 반란의 원인
마카비 반란의 기원과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안티오코스 3세가 팔레스틴을 정복하기 전에도 예루살렘에는 이미 친 셀류시드파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지도자들 중에는 대제사장 시몬과 토비야드 요셉의 아들들, 즉 그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같은 친 셀류시드파와 전통적인 형태의 이스라엘 종교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이미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원인이 전통적 형태의 종교와 가속되고 있는 헬라화 사이의 피비린 내 나는 반란에 대한 원인으로는 충분하지는 못하다. 공개적인 적대감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설명하는 유일한 자료인 마카비2서는 지도층인 제사장 가문들 사이의 정치적 싸움이 반란으로 이어지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뿐 아니라 로마인들이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테스에게 굴육을 준 사건과 셀류시드 제국의 경제적 어려움과도 연관되어 있어 복합적인 이유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정치적인 위신을 세우기 위해 팔레스틴을 완전히 자신에게 예속시키려고 결심했다. 즉 제우스 에피파네스가 의도한 이 예속은 이 땅과 민족을 제의적으로 헬레니즘화시키는 일이었다.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는 안티오쿠스 3세에 의해 보장된 종교적 자유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헬라주의자들에 대해서 유대인이 문화투쟁을 벌였다는 것은 유대인의 입장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 투쟁은 세계사적으로 예상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맨처음 안티오쿠스는 주전 167년에 예루살렘 북쪽 성벽 앞에서 안식일에 사열식을 거행하게 했으면 그 다음에는 군대를 신속히 도시로 진주시켜 성전 광장 북서쪽의 높은 산기슭 언덕 위를 점령하여 이곳에 “아크라”(후에 안토니아로 불림)로 불리는 성곽을 세우게 했다. 더욱이 정통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분노를 훨씬 더 야기시켰던 가증한 일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원전 167년 율법을 지키는 유다인들을 억압하고 헬레니즘적인 의식을 도입하도록 했다. 물론 이런 종교정책의 목적은 반유대적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의 상황과 그 때 사용된 방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반이집트적이고 친시리아적이었다.
당시 국가 제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루살렘의 번제제단 위에 올림피아 제우스 신의 제단이 세워졌고, 주전 167년 12월 15일 이래로 매 달 25일에는 그곳에서 희생제사가 거행되었다. 25일은 에피파네스의 생일로 경축되었기 때문에 이 제물은 본래 그에게 바쳐지는 셈이었다. 이러한 제우스 제단은 묵시문학에서 “황폐케 하는 가증한 것”이라고 불리워졌다. 유다의 다른 지역에서도 헬레니즘적인 제단들이 세워졌고 제물들이 봉헌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리아의 도시들에게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국가 제의에 참여하도록 강요 또한 받았다. 이러한 제의정책이 지향했던 본래의 목적은 이 전에 프톨레미 왕조 치하에 있었던 팔레스틴에 대한 통치권을 안티오쿠스와 그의 신들이 장악하게 되었다고 만방에 알리는 것이었다.
6.마카비 반란
시리아 정부가 도입하고자 했던 이교도적인 종교 형태들은 민족적인 반발을 유발시켰다. 이러한 민족적인 저항은 느혜미야와 레위인들이 시도했던 유다교 재건에 깊은 영향을 받음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화투쟁에서 율법에 충실한 자들을 정열적으로 이끈 지도자들은 모데인의 “마따디아” 사제가문에 속했다. 마따디아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이 아들들 중 가장 유명한 아들이 바로 유다 마카베오(그리스어로는 Makkabaios이다)였기 때문에 후대의 문헌들은 이 가문을 흔히 “마카베오 일가”라고 부른다.
마따디아는 주전 167년에 시리아 정부가 파견한 제의 관리를 위하여 이교도의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 했던 유다인 한명을 살해했으며 또한 그 제의 관리도 죽여버렸다. 이것인 마카비 혁명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섯 아들을 데리고 유다의 광야로 가서 그곳에서 의용병을 조직하여 헬레니즘 신봉자들과 투쟁하였다. 율법에 열심인 하시딤도 이들에 합세하였다. 주전 166년 마따디아가 죽자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베오’가 봉기의 주도권을 차지하여 주전 160년 죽을 때까지 이를 지켰다. 그는 뛰어난 종교적인 인품을 지녔다기보다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역량을 가진 자였고, 그로인해 유다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안티오쿠스 4세는 바르티아(Parther)인들을 정벌하러 떠났기 때문에 서방의 사령관이었던 리시(Lysias)가 유다인 봉기를 진압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이 일에 막강한 병력을 투입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또 그럴만한 능력도 없었다. 유다는 아주 뛰어난 게릴라 전을 벌임으로서 시리아 연합군을 사마리아와 벳-호른(Beth-Horon)과 엠마오, 벳술(Beth-Zur)에서 격파하였다. 그 후 3년 후인 주전 164년 12월 25일 레위인의 희생제의를 재생시켰다. 따라서 그 후로부터는 해마다 하누카 축제 즉 성전 봉헌식이 거행될 수 있었다.
주전 164년 왕이 페르시아에서 갑자기 사망한 후 10살이 되는 그의 아들이 왕위를 물러받게 되었다. 하지만 2년뒤 목적의식이 뚜렷한 셀류커스 왕가 출신의 왕인 데메드리오1세가 반란을 일르키면서 예전 그의 아버지의 왕권을 다시 차지하게 된다. 데메드리오 왕의 즉위는 유다 마카베오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데메드리오는 3번에 걸쳐 군대를 파병하였는데, 기원전 160년 3차 진군 때 유다 마카베오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벳-호른과 인접한 엘라사에서 패배하여 거기에서 죽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승리에 대한 압력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이를 로마가 좋게 여기지 않아 분활통치를 시킨 것이 원인이었고, 한편 로마는 유다인들의 비교적 독립적인 태도를 환영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다 마카베오의 직속 후계자는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이었다. 그는 주전 160-143년경에 민족주의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데메드리오 1세가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안티오쿠스 왕가 출신의 알렉산더 발라스를 자신의 경쟁자로 의식하게 되면서 유다에 대한 시리아의 압력이 완하되었다. 이 틈을 타서 요나단은 재빨리 발라스 편으로 전향했다. 그 후 두 경쟁자들은 모두 지나칠 정도로 유다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유다인들은 벨라스 편이 전망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편으로 전향하였다. 결국 기원전 152년 유다인들은 그 댓가로 유나단이 대사제로 그리고 용병대장이라는 위치를 얻게 된다. 그 후 요나단과 하스몬 왕가 사람들은 유다교라는 한계를 넘어서 자신의 가문과 민족의 세력 신장을 위해 싸웠다.
요나단은 정치적으로 전략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 로마와 스파르타에게서 원조를 받기도 하였고, 그 결과 어느 정도의 땅과
재물 또한 획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그 성과는 안티오쿠스 6세의 배후 인물인 시리아의 야전군 사령관 트리폰의 눈에 띄게 되었다. 결국 143년 요나단은 트리폰과의 전쟁 중 패배하였고, 포로로 잡힌 후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 후 형제들 중 두 번째인 시몬이 유다인 봉기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주전 143~134년까지 유다인들을 통솔했으며 요나단처럼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많
은 성과를 올렸다. 대표적인 성과는 주전 142년 데메드리오와의 동맹을 모색하면서 그에 의해 세금을 면제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도 마카베오 가문과 최초의 하스몬 왕가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유다의 정치적 독립에 단계적으로 접근해간 역사였다. 그래서 주변
강대국들이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기는 했지만 주전 142년의 세금면제에 힘입어 주전 597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처음으로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그로부터 79년 간에 걸친 하스몬 왕국의 자유로운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Ⅲ. 하스몬왕조
1. 대사제 시몬(기원전143-134)
주전 143년 이래 민족의 지도자로 등장한 사람은 시몬이었다. 그는 전투준비와 징집을 위해 자신의 자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가 거르린 용병은 혼혈인들과 일부의 헬레니즘의 신봉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시몬에게 여러 가지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시몬은 이 군대의 힘으로 풍요한 해양평원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게젤(Geser)을 점령할 수 있었다. 후에 시몬을 이을 그의 아들 요하네스 히르칸이 이곳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유다인들은 주전 140년에 그의 공로를 고려하여 시몬을 대사제이며 사령관이며 민중의 지도자로 영원히 찬미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사제적, 군사적, 시민적인 지위가 “영원히”존속한다는 것은 그의 가문과 관계가 있었다. 즉 새로운 왕조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사제군주 가문인 하스몬 왕가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부장적이었던 시몬과 그의 한 아들은 안티오쿠스 7세와 그의 사위에 의해 여리고 근처 연회 석상에서 암살되었다. 둘째 아들인 히르칸은 살해하는데 실패하였고, 히르칸은 도망한 후 예루살렘에서 하층민의 지지를 얻어 대사제 시몬에 이어 대사제로 임명되게 된다.
2.요하네스 히르칸1세(기원전134-105)
팔레스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리아의 시도가 실패로 이어진 뒤 요하네스 헤르칸은 마음대로 온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유대 지방 곳곳에 승리의 진군을 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하여 싸우는 국민 군대가 아닌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용병군단을 형성하였고, 전투를 수행하였다.
히르칸의 정책이 군사적인 계획에서 성공하기는 했지만 백성들에게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
부 되었다. 마카베오 봉기를 일으켰던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 무리들 가운데서 바리새인의 공동사회가 생겨났다. 히르칸은 처음에는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에 태도에 따라 갔으나 점차 그로부터 돌아서서 그의 뜻을 지지하는 사두개인들과 가까워졌다. 그는 새롭게 주조한 화폐에 “대제사장 요하네스와 유대 공동체” 또는 “유대 공동체의 우두머리 대제사장 요하네스” 말을 새길 정도로 대제사장의 직위와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보다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령관과 지배자의 직위가 더 중요하였다.
3.아르스토불(Aristobul) 1세(기원전104)
히르칸이 죽고 난 후에 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히르칸은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부인이 통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아리스토불이 자기의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명의 동생들을 감금해 버렸다. 그는 그의 동생인 안티고누스만을 그의 정부에 참여시켰으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의심하도록 하여 곧 살해해 버렸다. 아리스토불은 동방의 작은 국가들의 왕들처럼 행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대인 지배자로서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그는 출전을 계속하여 갈릴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점령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할례 받게 하였다. 그렇지만 유대교에로의 강제 개종은 종교적인 의도에서가 아니라 왕의 지배권에 복종시키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불은 잔악한 행위를 많이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와 그의 첫 사도들의 고향을 구약성서적인 신앙으로 무장시키는데 역사적인 공헌을 끼친 면도 있었다.
4.알렉산더 얀네우스(Jannaus, 기원전103-76)
아리스토불이 1년간 짧은 통치를 한 후 죽었다.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감금되어 있던 죽은 왕의 동생들을 석방시키고 제일 큰 형의 부인이 되면서, 그에게 통치권을 이양하였다. 이 새로운 지배자는 요나단이라는 자기 이름을 희랍식으로 얀네우스로 개명하여 자신을 알렉산더 얀네우스라고 불렀다. 그도 역시 많은 전쟁을 하였으나 그의 전임자들처럼 대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하여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넓이에 거의 상응하는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확고하지 못하였다. 점령지의 주민들은 추방되든가 아니면 강제로 유대화되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였고 왕은 자주 나라 안의 이곳 저곳으로 반란을 진압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급히 출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스몬의 지배는 자기 백성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기반이 약했다. 경건한 사람들은 군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의 직위를 수행하고 있는 지배자의 정책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잔인하고 독단적으로 그의 뜻을 관철하였으며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을 폭력으로 억압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얀네우스는 800명의 폭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이런 잔인한 형벌의 처형은 결코 이스라엘서는 집행된 적이 없었기에 백성들에게 경악과 두려움을 자아냈다. 얀네우스가 테러를 통해서 공개적인 저항은 분쇄하였으나 백성들 사이에는 그이 대한 내적인 반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5.알렉산드라(기원전75-67), 히르칸2세, 아리스토불2세(66-63)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임종하면서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 바리새인들과 다시 화해하도록 충고했다고 한다. 그녀는 왕이 죽은 후 지배권을 이양받아 9년 동안 신중하고 지혜롭게 통치하였다. 그녀가 여자로서 여왕이 되기는 하였으나 대제사장의 직위는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유약하고 활동능력이 별로 없는 아들 히르칸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살로메는 이제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에도 영향력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화해하였다. 바리새인 공동체의 서기관들은 그 때까지 우두머리 사제들과 장로들만이 될 수 있었던 산헤드린의 회원이 될 수 있었고, 산헤드린에서 자기들의 의견을 주장하여 여러 가지 관철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얀네우스의 무력 통치하에서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의 최고회의에서 그들의 의견을 결정적으로 행사하여 오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밀려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과 또 여황의 통치에 불만을 가져온 모든 사람들과 여왕의 작은 아들이며 권력에 강력하게 집착하는 아리스토불 2세가 협력하게 된다.
기원전 67년에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 그녀의 합법적인 아들 히르칸 2세가 법에 따라서 왕위를 이어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 2세가 왕위를 높고 그와 쟁탈전을 벌였다. 쟁탈전에서 아리스토불이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곧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진격하여 왔다. 유대에서 권력 투쟁을 하고 있던 두 파벌은 폼페이우스를 쪽으로 돌아서서 그를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왕국을 폐하고 옛날 제사장들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줄 것을 원하였다. 하스몬 왕국은 외적인 힘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유대 백성들에게서도 왕국을 지지하여 줄 수 있는 세력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의 종말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Ⅳ. 결론
AD 597년 이스라엘이 멸망한지 300여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카비 혁명의 원인은 많은 군사 정치적인 상황과 배경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졌고, 마카비의 반란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이스라엘의 힘만이 아닌 주변의 상호 관련된 상황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300년 이상의 식민지 생활과 150년 동안의 헬라화의 영향은 그들의 정체성을 많이 희석시켰다. 그 결과 마카비 혁명 이 후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부 바리새인들과 같은 하시딤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도 일부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를 이은 하스몬 왕가에서조차도 자신의 지배권의 강화에 대한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그들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종교생활에는 국가와의 분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독립을 얻은 잠시 평화로운 시대는 있었지만, 결국 백성들은 또다시 식민지를 원하게 되었고, 정치적인 야욕에 있었던 히르칸과 아리스토불 때에 나라를 로마로 넘겨주게 되었다.
국제성지문화연구소/ 유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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